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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의 성격에 관한 나의 견해
    교육의 성격에 관한 나의 견해우리의 바람직한 혹은 온전한 교육을 위해서 교육의 목적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어야 하며, 교육 내용은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오랜 사유와 고찰로 빚어진 자신만의 지식’이어야 하고 교육 방법은 ‘자아 성찰과 교사의 조력’이어야 한다.입시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거침없이 적어 내렸던 학기 초의 나는, 사실 그럴듯한 답안을 적어내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나 방안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학생의 피부에 와 닿는 수업을 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탄식을 금치 못하면서도 진짜로 피부에 와 닿게 하려면 어떤 수업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역량 밖에 있다며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를 포기하던 내가, 구체적인 방향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된 것이 이번학기에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루소와 코메니우스 등의 교육사상가의 사상을 보고 배우며 참된 교육의 가치와 교훈을 고전 속에서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고, 그 중에서도 나의 평소 교육관과 비슷한 교육사상가를 열렬히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수많은 훌륭한 교육사상가들 사이에서도 한 학기동안 열정적으로 파고들어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 교육사상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본인이 가장 깊이 공감하고 깨달음을 얻은 부분은 바로, 학생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진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는 ‘학생중심교육’을 대변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이상적인 길을 찾는 과정은 반드시 본인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이상적인 길은 사물과는 달리 눈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포착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중심교육의 논리가 문답법까지 연결된다. 소크라테스 식 문답법은 질문과 대답을 통해 개념의 집을 짓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대상에 대해 질문하면 상대방은 논점을 흐리지 않는 한에서 자유롭게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의 대답을 고차원적인 개념에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 모순되는 사례에 접근한다. 상대방은 이와 같은 모순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더 나아가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이성과 논리로 대화를 함으로써 학습자 스스로 반성을 하게하고, 깨닫도록 돕는 과정이다. 우리나라가 현재 견지하고 있는 몰가치한 주입식 교육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학습자 스스로 깨닫게 하면서, 학습자는 스스로 자기 지식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듯 소크라테스가 학습자의 자기지식구성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학습자의 변화와 혁신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학습자 스스로가 자신의 진리를 찾으려면, 교사가 ‘학습자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하지만 이렇게 학습자 중심의 교육방법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수업 자체가 학습자 중심으로 돌아가고는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그 학습자가 진리를 찾는데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주로 사용했던 산파술은 그의 역할을 집약적으로 나타내준다. 소크라테스 그 자체는 아이에 빗댈 수 있는 영혼을 낳는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이 영혼을 낳을 수 있도록 조력한다. 학습자가 진리의 자손을 낳았는지, 허위의 자손을 낳았는지를 분별하며 허위의 자손을 낳았을 경우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그에 걸맞은 질문을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교사는 그 누구보다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엄청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답식 교육은 교사가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수업의 방향과 흐름이 완전히 바뀔 수가 있기 때문에, 교사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학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만약 교사가 주제에 대해 전문가가 되지 못해 학생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수업은 단지 ‘잡담’에 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무지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는 학습자가 그릇된 의견에 빠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면서까지 본인의 의견을 온전히 배제하고 학습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렇듯, 교사는 자신과 학생이 논의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하면서도, 학생에게 질문을 던질 때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을 주입시키려는 의도를 배제해야 한다. 그래야만 학습자가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시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학습자 중심의 교육에는 학습자에게 학습의 책임을 부여한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은 전생의 삶에서 이미 진리를 터득한 상태이다. 다만, 이 삶으로 다시 태어날 때 망각의 강을 건너 진리를 잊은 것이다. 즉, 진리를 알면서도 잊은 상태가 되는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 진리를 다시 회복시키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회상을 돕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학습자의 무지를 일깨우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가 무지의 지를 강조한 이유는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진리나 실재를 모르고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는 당위를 역설하고자 한 것이고, 본인이 현자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학습자와 자신과의 지위에 차등을 두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즉, 그의 제자나 시민들은 현자의 진리를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인식 주체로 지위를 탈바꿈하는 것이다.이 밖에도 소크라테스는 ‘덕은 지식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사상의 윤리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이는 선을 알면 선한 행위를 한다는 의미보다는,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선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는 측면이 크다. 이는 선한 지식을 아예 터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할 경우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 습관에서 비롯된 선한 행동들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관한 점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애매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지식을 통해서 누구나 선함을 터득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이는 지식만을 추구하는 현대 입시위주의 교육에 크나큰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일련의 교육적 주장들에 대해 혹자는 현실에 맞지 않는 교육적 사상이라고 말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본인이 윤회설과 같은 세세한 사상까지 소크라테스와 동일하지는 않아 사람이 지식을 잠시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서두에 말한 교육 내용에 ‘기본적인 지식’을 포함시킨 것이다. 즉,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의무교육 중 초등교육과정에서 저러한 기본적인 지식을 터득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시키는 과정에서도 무조건적인 주입식교육이 아니라 대화와 문답을 통한 살아있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본적 지식을 쌓은 뒤에는, 반드시 본인의 성찰과 사유에서 비롯한 본인만의 지식체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사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혹자가 소크라테스의 교육법에 대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육의 최종 목적지가 입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교육의 목적을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교육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아를 찾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자신의 변화와 헌신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교육의 초점이 자아의 탐색에 있다고 한다면, 이제 더 이상 교육은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를 수 없다.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만이 자신만의 지식체계를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절대성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의 정도는 이미 정해져 있다. 교사는 학생이 이러한 지식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보고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길을 이탈하려 할 경우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게 사유하는 질문을 던져 올바른 길을 찾고, 마침내 자신만의 개념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도덕적인 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성찰과 검토를 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가치한 삶이 되는 것이다.결국 절대적인 지식이나, 상대적인 도덕의 문제나 모두 본인의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는 교사와의 토론과 대화가 합쳐진다면,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인 ‘진정한 자아 탐색’은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교육학| 2020.04.20| 3페이지| 1,000원| 조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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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루너 교육의 과정을 읽고 : 교사의 노력이 절실하다
    브루너 교육의 과정을 읽고 : 교사의 노력이 절실하다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가 ‘구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두 달 남짓한 수업시간 동안 우리가 고민하고 탐구했던 문제 역시 지식의 ‘구조’와 관련한 것이었다. 브루너는 교육학계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저명한 학자이다. 본인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읽었던 교육관련 서적에서, 브루너는 루소만큼이나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브루너의 ‘지식의 구조’이론은 다소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 나의 교육 관련 지식이 미약하고 사고 능력이 얕았던 탓도 있었겠지만, 구조화된 학습만으로는 많은 양의 학습량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당시에 내가 경험했던 교육은 주로 주입식에서 비롯한 암기학습이었다. 그것이 결코 좋은 학습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적응을 해왔기 때문에 이것보다 좋은 방안을 강구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예비교사가 된 이 시점에, 이 책이 없었더라면 그 생각을 그대로 가져가 내 학생들에게 적용했을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루너는 미래의 나 자신에게 있어서 축복이다. 그의 ‘지식의 구조론’이 무조건 옳다거나 찬양해야할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식의 구조에 대해 사유했던,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이것을 전달하려 했던 의미를 탐색하고 이를 깨달아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사고의 한 순간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이토록 나를 변화하게 했던, 브루너의 ‘구조’에 대해 자세하게 탐독해보고자 한다.1959년, 시골해변인 우즈호울에서 35명의 학자들이 모여 미국의 초, 중 과학교육의 개선방안을 논의한다. 이의 배경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라고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낡고 부정확한 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불만이 숨어있었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수많은 방안 속에서 ‘발견학습’, ‘탐구학습’ 등의 일련의 노력이 잇따르게 되고 이의 결과물이 바로 우즈호울회의의 종합보고서, 「교육의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구조’이고, 교육과정은 학문의 기본구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기본 지침을 천명했다, 한 교과의 교육과정은 그 교과의 구조를 나타내는 일반적 원리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명목에 따라 학자, 과학자 등이 교육과정 계획에 참여한다. 여기까지가 이 책이 나오게 된 전반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이다. 이 배경만 봐도 왜 ‘구조’라는 키워드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조’에 의해 교육 목표가 세워지고, 교육 과정 설정의 주체가 바뀌었으며, 교육 방법의 원리조차 바뀐 것이다.‘구조’의 정확한 뜻은 ‘학문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원리’이다. 따라서 ‘구조 학습’을 했다고 한다면, 법칙의 이름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사용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학습은 장차 우리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기저로 한다. 기술에 국한된 특수적 전이와는 달리, 일반적 개념과 원리를 포함하는 일반적 전이가 구조학습의 목표이다. 학습하는 바가 기본적이고 일반적일수록 새로운 문제에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학년들에게 나중에 배우게 될 학습내용과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일반적 접근방식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연장시키면, 학자와 어린이의 공부에 연속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까지 나아간다. 이 개념을 밑바탕으로 하여, ‘학습의 준비성’에 관한 제언도 나온다. 어떤 교과든지 그 기초가 적절한 형식만 갖춘다면 어떤 나이의 아동에게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롯해서 같은 내용을 점점 더 높은 수준에서 여러 번 반복하고 제시하는 나선형 교육과정까지 나오게 된다. 내가 처음 브루너의 의견을 접했을 때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던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이렇게 따지자면 어렸을 때 공부해야 하는 내용이 너무 방대해지고 그 범위가 막연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장 과목 수만 비교해보아도 그러하다. 처음 브루너의 이론을 접했던 고등학교 당시, 내가 배우는 과목 수만 열 과목이 훌쩍 넘었다. 브루너의 이론대로라면, 이 모든 과목의 기초를 저학년 때부터 다져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더러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브루너의 이론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동의 발달단계에 맞게 학습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모든 과목을 일일이 이해시키고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저학년은 고학년에 거치게 될 학습에 관련된 기초를 탄탄하게 해주면 되고, 그 세부내용은 고학년에서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까 내가 언급한 열 과목이 넘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과목 중에서, 언어에 관련된 과목이 절반 가까이 되는데(국어의 세부과목, 제 1외국어, 제 2외국어 등), 저학년일 때 이 모든 언어의 기초를 가르치는 대신 언어를 학습하는 방법에 관한 개론을 제시해주면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어려운 학문이란 없다. 올바른 교육을 행하는 방법이 어려울 뿐이다. 이 점에서 교사의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앞으로 언급 될 많은 ‘구조’와 관련된 내용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교육적 변혁의 시도에 있어서 교사의 끊임없는 노력은 필수불가결하다.‘직관적 사고’에 관한 부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정규교육 안에서 교육학자들은 직관적 사고에 관한 부분을 항상 경계해왔다. 모든지 근거를 바탕으로 단계를 밟아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학습의 미덕이라고 여겨져 왔고, 이것은 자연과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문과학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섣부른 결론으로의 도약이라거나 근거가 없는 추론은 지양하도록 배워왔다. 이것을 ‘비약’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브루너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 직관적 사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직관적 사고를 저해하는 것이 오히려 다양한 사유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물론 이 직관적 사고가 무조건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모두 정당화하라는 뜻은 아니다. 확실한 지식을 바탕으로 전체 문제 사태에 대한 통괄적인 지각을 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온당한 지식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분석적 사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직관적 사고는 분석적 사고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돕고, 분석적 사고는 이러한 직관적 사고의 산물을 점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하여 직관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는 서로 상부상조하게 되고, 둘 중 하나만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유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직관적 사고 안에서도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추측을 하게 해야 할 것이며, 직관적 사고가 그릇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여기서도 교사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다양한 과목에서 적용될 수 있는 올바른 직관적 사고의 방법을 개발한다거나, 선천적인 직관적 능력에 따른 비효율의 문제를 개선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학습 동기’의 측면에서는 다소 이상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내적동기의 발현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자 지향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다. 성적이나 그에 따른 이득과 같은 외적 동기는 근본적으로 학생을 공부 안에 끌어들이지 못한다. 이러한 학생이 주로 학업이 끝난 이후에는 완전히 공부에서 손을 놓게 되며, 한 평생 공부를 지긋지긋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학습하는 과정에서 발견적 희열을 느끼고, 과제 자체에서 흥미를 느끼게 되면 학생은 공부 안에 깊숙이 끌려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만드는 것 자체가 교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수업을 할 때, 교사들은 학생들을 집중시키려고 화려한 시청각 자료나 일시적인 보상(과자와 같은 것)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단기적 흥미를 유발해 궁극적으로는 수동적인 학생을 만들어낼 소지가 있다. 결국 학생들의 내적동기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학생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그 내용을 ‘번역’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너무 쉽거나 어려운 내용은 학생들의 교육의지를 잠재울 가능성이 크다. 나 또한 이런 내적동기 유발에 대한 교사의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아마 교사의 역할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이 부분이 달성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겪고 있는 고질병과 같은 문제들이 일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매년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학생들도 줄어들 것이고, 아이들의 무관심에 모멸감을 느끼는 교사들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교사의 끊임없는 개발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교육학| 2020.04.20| 3페이지| 1,000원| 조회(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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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초부터 불임인 산파,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소크라테스’를 만나다
    태초부터 불임인 산파,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 ‘소크라테스’를 만나다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산파의 일에 비유하고 있다. 먼저 그는 산파의 일반적인 특징을 열거한다. 그에 따르면, 산파는 임신한 경험은 갖고 있되 가임기 여성이 아니어야 하며, 산고를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약과 주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적당한 쌍을 찾아 주는 중매쟁이 역할까지 해야 한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산파술이 통상적인 산파술의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이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일반적인 산파술에는 진짜 자식과 가짜 자식을 가려낼 능력이 없지만,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그의 제자의 영혼이 진리의 자손을 낳았는지, 허위의 자손을 낳았는지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다른 산파와는 달리 처음부터 불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오는 어떠한 진리도 소크라테스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대화 상대자의 영혼으로부터 출산된 것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교육법 몇 가지 교육적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는 전적으로 학습자에게 학습에 대한 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는 사람들에게 ‘학습’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래 알고 있던 것을 ‘회상’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본문182쪽부터 189쪽까지의 대화를 통해 그 ‘회상’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본래 알고 있던 것을 ‘회상’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역할은 단지 그의 무지를 일깨워주고 진리를 깨닫게 하도록 유도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도 가르침을 받는 이에게 사고하는 법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학생이 올바르게 사고하도록 인도하는 것일 뿐이다. 둘째로, 교사가 없는 교육의 유의미성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교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지혜는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무지를 깨닫는 것’을 ‘지혜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았다. 아이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줄 수 있는 가르침은 단지 그들의 진리에 대한 무지를 일깨우고, 그들이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면서 살아서 영혼을 돌보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가르치는 자신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는 사람들의 삶이 개선의 여지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즉,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의 삶의 지상과제는 ‘영혼을 돌보는 일’인데, 이 영혼일 돌보려면 참된 진리를 추구해야하고, 참된 진리를 추구하려면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그들의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지식의 몰가치한 주입식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이성과 논리로 대화를 함으로써 학습자 스스로 반성을 하게하고, 깨닫도록 돕는 과정이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세 번째 특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교육법은 인간 삶의 전체를 나아지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단순한 지식 획득이 아닌 삶 전체를 지도하는 효과를 지닌다. 교사가 산파술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자질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먼저 이는 학습자의 ‘안목’에서 출발해야 하므로(무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아동중심주의’ 혹은 ‘학습자 존중’의 태도를 반드시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산파술의 목적은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만큼, 교사는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있어서 자신의 지식(혹은 견해)을 가능한 한 배제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이 산파술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그것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논의하는 대상에 있어서 자신은 무지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서 학습자 스스로 논리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스스로 그릇된 의견에 빠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학생에게만 집중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논의하고 있는 대상이 아닌 대상은 아예 논의에서조차 배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학습자가 오직 학습자의 언어로 자신의 시각을 표현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교육법은 실로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서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라는 죄목에 반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본다면, 소크라테스 한 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흔들어 놓았는지 알 게 될 것이다. 지혜가 신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모방하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러한 모방이 아테네의 전통적 가치와 도덕성에 치명적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는 죄명으로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끌고 가기에 이른다. 소크라테스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보살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삶이 일상화된 아테네의 입장에서는 놀랄만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보살핀 다는 것이 정치적 삶을 배제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말로 해명을 하면서, 자신을 쉬파리에 비유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을 준마에 비유하고, 자신을 쉬파리에 비유하며, 준마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자신을 신이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없애면 이후에는 더 많고 젊은 쉬파리들이 나타나서 당신들을 괴롭히리라고 예언한다. 소크라테스의 예견대로 그 이후 어느 시대에나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은 존재했다. 비록 그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철학과 논리를 사람들에게 알리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해 남몰래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중의 갈채'에 대한 유혹으로 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알키비아데스처럼, 또는 아예 대놓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에 따라서 '영혼을 돌보는 일'을 좇는 사람들처럼 소크라테스의 삶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그러나 부와 권력 그리고 대중의 갈채에 휘둘려 진리를 추구하고 영혼을 좇는 이들이 핍박받는 것, 그리고 그 핍박하는 이들이 실은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남몰래 옹호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비극’인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이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될 때, 즉 현재의 질서에 맞는 발언이 기득권을 가질 때 빈번하게 발생한다. 예를 들어서 천동설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과감히 지동설을 지지했던 코페르니쿠스가 핍박을 받았던 것처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만연했을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이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던 것처럼 말이다. 관용이 기본이 되는 민주주의의 발생지 아테네에서조차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일 뿐인 소크라테스를 비극으로 이끌고 간 데에는, 다수의 횡포가 잠재되어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20.04.20| 2페이지| 1,000원| 조회(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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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신출세를 위한 교육, 이대로 괜찮은가
    [교육 과정과 수업]입신출세를 위한 교육,이대로 괜찮은가과목명 :교육과정과 수업담당교수 :학과 :학번 :이름 :제출일 :I. 서론이번 학기의 수강한 어느 수강생의 글에는 명백한 오류가 있다. 이 학생은, 교육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옛날의 교육과 오늘날의 교육의 차이점과 같은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진다. 명백하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고, 교육의 내용도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옛날과 오늘날의 교육이 단지 모두 '개인의 입신출세를 위한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가 없다. 본인은 이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학기 중에 수업했던 교재 및 논의를 참고한 분석, 두 번째로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신념에서 비롯한 분석이다. 결론에서는 본고를 정리하며, 앞으로 본인이 가져야 할 교육적 가치관에 대해 제언을 하면서 본고를 마무리하겠다.II. 본론2.1. 수업 내 논의에서 비롯된 접근수업 내에서 반복되어 다루어져 온 「지식의 구조와 교과」에서는 ‘지식의 구조’에 대한 논의와 이에 따른 교육과정의 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교육의 목적에 대해서도 명백한 제언을 하고 있다. 특히 지금 이 글에서 논의의 주제로 삼고 있는 ‘어느 한 수강생의 글’에서 본인이 오류라고 지적한 부분에 있어서도 확실하게 답을 해주고 있다.‘교육과 사회복지’의 부분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다. 오늘날의 교육현실로 볼 때, 교육이 입신양명의 수단이 될 수 있고,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는 바이다.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사람, 즉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기 용이하고, 이에 따라 사회에서 최대의 복지를 누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육받은 뒤의 복지’에 관한 것이고, 우리는 ‘복지로서의 교육’과 ‘’교육을 받는 동안의 복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한다. ’복지로서의 교육‘을 생각한다면, ’교육의 복지화‘가 지상과제로 떠오른다. 즉,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비해 현재의 교육의 기회가 확대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수강생의 글‘ 첫머리에 말한 옛날의 교육과 오늘날의 교육의 차이점이다. 이것과는 다르게 ’교육받는 동안의 복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교육받는 것을 충분히 가치 있게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가치가 교육받는 동안에 자신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입시출세를 위한‘ 교육은 ’교육받는 동안의 복지‘에 전혀 기여할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시험을 위한 교육이라면, 우리는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시험에 가장 최적화된 방법으로,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들만 골라서 가르치면 그것을 교육이라 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육을 통해 배우는 내용이 이에 관한 노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고민을 동반하지 않는 교육의 내용은 날이 갈수록 생기를 잃어가고, 학생들은 주입식 교육방법으로 인해 점점 메마르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치 없는 교육‘을 존속하게 된 결과로 입시를 무사히 통과한 어느 누군가가 사회의 요직에 오를 경우, 그 사회는 ’가치 없는 교육‘의 영향을 분명히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지사회실현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육을 ’개인의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부작용이며, 그릇된 결과이다.또한 우리가 교육을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규정하게 될 경우, 학생들의 교육방법에 있어서도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선 주입식 교육이 바로 그것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학생들을 ‘메마르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주입식 방법’으로 가르쳐진 지식은 학습자의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자고로 학습을 한다는 것은, 학습자의 보는 눈과 안목을 기르게 하는 것인데, 주입식으로 교육을 행하다 보면 학습자의 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해 결코 그것이 안목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학습자의 안목을 길러주는 교육을 하기 위해 옛날부터 숱한 노력을 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고, 조선시대의 경연과 같은 것들이다. 교육자와 학습자가 끊임없는 토론을 함으로써 지식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의 목적을 단지 입시로 한정지을 경우, 당장의 시험에 필요한 것들을 효율적으로 학습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안목을 기를 기회가 사라진다. 지식은 가르치되 안목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지식이 학습자에게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교육을 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학습자의 동기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시험성적이라는 것은 학생들의 ‘외적 동기’를 일으키는 중요한 원천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동기는 개인에게 공부를 지속시키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만약 시험성적이 떨어진다면, 이 학생은 ‘외적 동기’를 한순간에 잃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외적 동기는 내적 동기에 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 학생들이 공부를 재미있게 여기고 지속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내적 동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적 동기’란 그 공부 자체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갖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공부에 대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 아이디어가 학생들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시험에 나오는 것이고, 학생들은 내적 동기의 부수적인 결과로 좋은 시험점수를 얻게 되는 것이다.‘입시 위주의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다 보면 정말로 중요한 교육의 요소들을 놓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고 이것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과정에서 인격을 도야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인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다.2.2 본인의 신념에서 비롯된 접근교사에 대한 구체적인 진로를 정하게 된 고등학교 시절 이전까지만 해도 본인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대학은 단지 취직을 하기 위한 기관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린 나의 생각만 돌이켜 보아도 입시 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요즘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통폐합 하고 있는 대학가의 움직임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리던 대학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취업을 위한, 취업에 의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우리의 배움의 목적은 인간다운 삶을 향해있어야 한다. 역사라는 과목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단지 시험이나 취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과거의 과오를 돌이키고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수학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과목의 학습이나 생활 주변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능률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그 결과를 활용할 수 있는 수학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 따라서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면 창의적 사고 능력, 비판적 문제 해결 능력, 통합적으로 문제를 형식화하는 능력 등이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의 목적은 시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를 인지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교육의 기류가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본인도 학창시절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었고, 그랬기 때문에 공부하는 과정에 있어서 내적동기를 찾기 힘들었다.교육의 목적이 개인의 입신출세로 향하게 된다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가 있다. 첫째로 모든 교육기관이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학교는 단지 취업을 위한 공간으로, 선생님은 취업을 도와주는 도우미로 격하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교육방법 역시 최종학교의 입시 방법이 정하게 된다. 결국 선생님은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교육학| 2020.04.20| 6페이지| 1,000원| 조회(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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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월부인전 감상문
    < 고전문학강독 제 4차 과제 >명월부인전: 박씨전이 넘은 한계와 넘지 못한 한계은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고대소설로, 흔히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초인적 능력을 가진 박씨가 병자호란 때 전쟁의 영웅으로 활약한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 나오는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병자호란 때 병조참판까지 지낸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를 드높인 소설이 아닐 수가 없다.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과연 진정으로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는지 반문하고 싶다. 물론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던 유교사회에서,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여성이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센세이션이 아닐 수 없다는 점에서는 공감한다. 지금도 군담소설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이 흔하지 않은데, 그 당시에는 더더욱 모두에게 충격을 준 혁명적 소설이었을 것이란 말이다. 나라가 외적에 짓밟히자 직접 오랑캐의 장수에게 가서 이를 물리치며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한 박씨 부인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여성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싶다.첫째로, 박씨 부인은 꼭 환골탈태를 해야만 했을까하는 점이다. 이시백은 박씨 부인이 박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하다가, 그녀가 추한 허물을 벗고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되자 박씨 부인에게 마음을 연다. 여성은 꼭 아름다워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점에서 의문점이 드는 것이다. 박씨 부인이 허물을 벗지 않았더라면, 혹은 아름다운 선녀로 변모하지 않았더라면 이시백은 여전히 박씨 부인을 홀대했을 것이고,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소설은 초장부터 은연중에 외모지상주의, 그것도 여성에게 있어서 엄격한 외모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부터 여성에게 있어서 중요한 덕목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둘째로, 박씨 부인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말이 주제넘은 참견으로 치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왕대비를 직접 구하고, 청나라 장수에게 항복을 받아냈지만, 전쟁 자체를 온전한 승리로 이끌지는 못한다. 이것은 소설에서부터 여성의 한계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박씨 부인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이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점이 말이다.
    인문/어학| 2020.04.20| 1페이지| 1,000원| 조회(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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