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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부상
    과거부터의 중국을 살펴보자면, 중국 봉건사회의 경제는 지주 계급 토지 소유제로 통치되는 자급자족의 농촌 자연경제였다. 비록 각 시대의 경제발전이 아주 불균등하기는 하지만, 중국의 농업과 수공업 기술의 발전은 비교적 빨리 이루어져서,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의 고대 봉건 경제는 세계에서 선진적인 지위를 계속하여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기 17∼8세기에 이르러, 서방에서는 산업 혁명이 발생하여 세계가 공업 경제 시대로 접어들었는데도, 중국은 여전히 봉건 농업 경제에 머물러 있었다. 19세기 중엽 서방 자본주의 세력이 중국에 침입하여 중국의 자급자족적 봉건 경제는 마침내 파괴되는데, 그렇다고 해도 반식민지 반봉건의 경제로 대체된 것일 뿐이었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 자본주의의 압박 아래, 계속해서 이어진 전쟁의 파괴가 더해지면서 근대 중국의 경제는 아주 몰락한 상태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대별로 중국의 성장을 살펴보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뒤 지금까지의 중국 경제는 다음의 네 시기를 거쳐 발전하였다. 1949년에서 1957년까지는 국민경제의 회복과 사회주의 개조의 시기였다. 인민 정부는 우선 국민경제를 회복시키는데 3년의 시간을 사용하였다.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제 2차 5개년 계획과 국민경제의 조정 시기였다. 제 2차 5개년 계획에서 중점은 여전히 중공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공업건설이었는데, 이와 함께 국민경제의 기술 개조를 추진하는 동시에 전민 소유제와 집체소유제를 공고히 하고 확대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경제 사업을 지도하는 생각이 성급하게 성과를 구하려다 보니, 당시 중국의 실제 상황을 벗어나게 되었고, 생산력 발전의 규율을 위배하게 되었으며,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을 진행하고, 삼 년 연속의 자연재해가 겹친 결과, 결국은 국민경제가 균형이 심각히 실조되어 국가와 인민은 심각한 경제 곤란과 손실을 겪게 되었다. 1961년부터 시작하여 정부는 국민경제에 조정을 진행하여 뚜렷한 효과를 거두었다. 1965년에 이르러서는 국민경제가 원래의 힘든 국면을 되돌렸을 뿐 아니라, 비교적 큰 발전도 거두게 되었다. 1957년과 비교하자면 공업 방면에서 구성이 뚜렷이 개선되었고, 부문이 비교적 굳건해졌으며, 생산액이 상당히 많이 증가하였다. 농업 방면에서는 기본생산력이 회복되고 1957년의 수준을 넘어섰다.1966년부터 1976년까지는 제 3, 4차 5개년계획시기였다. 1966년 중국은 제 3차 경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전 몇 년의 조정을 거치면서 국민경제에는 이미 번영의 모습들이 나타났는데, 경제성장속도는 물론이고 경제 효율면에서도 모두 비교적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정치의 동란과 이념의 착오는 중국의 경제 사업을 심각히 파괴하였고, 중요한 경제관계에 새로운 혼란과 균형의 실조가 나타났다. 문화대혁명동안 주은래나 등소평으로 대표되는 정치가들이 경제 질서를 정돈하려고 노력하여 국민경제가 나아지는 전기가 나타나려고도 하였으나, 사인방이란 음모 집단으로부터 심한 방해와 파괴를 받았다. 제 3, 4차 5개년 계획동안 중국 경제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 식량 생산 비교적 안정된 증가를 유지하였고, 공업교통, 기본 건설 및 과학기술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손실이 너무 컸고, 원래의 경제발전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상황이 차차 악화되어, 붕괴의 한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1978년 이후는 개혁·개방의 시기로 경제발전이 가장 좋았던 때였다. 1976년 10월 사인방이 축출되고, 10년 동안 지속되던 문화대혁명이 끝났다. 1978년 중국공산당은 11기 3중전회를 소집하여 4개현대화 실현을 목표로 삼고, 경제 건설을 국가정책의 중심으로 하겠다는 것을 확실히 선포하였다. 몇 십 년의 힘든 우여곡절을 겪은 뒤 중국 마침내 정상적인 발전궤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 기간에 제정된 제 5, 6, 7차 국민경제 5개년 계획은 모두가 기간에 맞춰서, 혹은 앞당겨서 임무를 완수하였다. 특히 개혁·개방의 힘찬 실행은 중국경제가 구경제체제의 속박을 돌파할 수 있게 해주었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농업은 해마다 풍년이고, 공업은 활발히 발전하였다. 무역 규모는 빠르게 증가하고, 시장은 아주 번영하였으며, 국가의 능력이 아주 증강되어서, 인민의 생활은 차츰 향상되게 되었다. 당연히 발전하면서 문제점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짧은 시간 안에 공업 생산 발전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보니, 고정 자산의 투자규모는 지나치게 되고, 소비가 맹렬히 증가되었으며, 물가는 지나치게 올라가고, 외환보유액은 하락하여, 일정 정도 균형이 상실되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비교적 적절히 조정되고 교정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선 뒤, 중국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며 조화로움 속에서 고속발전의 신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1991년부터 1995년에는 제 8차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치리정돈(治理整頓)의 핵심인 긴축정책을 1989년 말부터 부분적으로 완화, 1990년 12월 7중전회를 계기로 보다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정책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주요정책기조는 다음과 같다. 농업을 최우선 산업의 하나로 설정, 농업 중점 정책 지속 실시하고 기초공업과 기초설비에 대한 우선 정책 실시한다. 그리고 집약경영을 통한 경제효율 제고를 경제건설과 경제운용의 핵심과제로 하여, 상업, 상품, 기업 등 구조조정 추진하며 경제체계의 국제화 차원에서의 개방 확대한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연해 중심 개발전략을 탈피, 주변국과의 경제교류 확대, 아태지역의 경제공동체 형성에 능동적인 참여를 한다는 내용이다.이 후. 제9차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이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실시되었다. 대외중시정책으로부터 대내중시경제성장 방식의 채택, 경제운영 메카니즘의 시장화, 정부의 기능개혁(정부조직 및 기능개편)에 힘썼고 성장 중심에서 경제, 사회 균형발전의 모색을 4대 방침으로 정하였다. 2000년까지 연평균 GDP 성장률을 9.3%로 올리고. 고정자산투자 증가율을 30%까지, 1인당 GDP 성장률을 도시는 6.7%, 농촌은 5.4%까지 올릴 계획을 세웠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7%이내, 재정수지는 2000년까지 수지균형 달성, 국제수지는 경상수지 균형과 함께 자본수지의 적절한 흑자유지 등의 거시경제 지표 달성을 목표로 하였다.이 후 2010년까지 장기 발전전략에는 5대 경제특구와 상해, 포동 특구에 대한 기본정책 견지 및 금융, 유통 등 분야에서의 국내시장의 단계적 개방 확대를 기본 기조로 하고 국유기업의 경영체질을 시장경제체제에 맞게 개선하고 대형화, 그룹화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배양하는 동시 세계인구의 22%를 차지하는 데 비해 경지면적은 10%에 불과한 것을 감안, 농업개발에의 외자도입 및 황무지 개간을 적극 추진하기로 하였다. 또한 장강 삼협댐, 황하댐, 남북도수로(南水北調), 북경-상해간 고속철도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균형 있는 고용구조 형성 및 산업발전에 부응, 3차 산업 대폭 육성, 군수기술의 산업화 활용, 내륙진출 외자기업에 대한 우대정책 확대, 인프라 우선건설 등을 성공적으로 시행, 2010년에 2000년 GNP보다 2배 증가를 목표로 하였다.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공업은 국민경제를 주도하는 것으로, 공업의 발전 속도는 한 국가의 발달 정도를 결정한다. 구중국은 농업국가로 공업이 지극히 낙후되어 있었는데 신중국이 성립한 뒤 공업은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중심이었다. 1992년에 이르러서, 국가의 공업의 기본 건설에 대한 투자는 누계가 11,810.7억 원을 넘어섰고, 전체 기본 건설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국에는 180여만 개(개체 기업은 제외)공업 기업이 생겼고, 공업의 고정 자산 총액은 1949년에 비하여 80여배 확대되었다. 공업 생산의 절대인구수는 6621만 명으로 1952년에 비하여 6배나 늘어났다. 1992년 공업 총생산액은 36802억 원으로 1950년보다 330배 증가하였다. 1950년부터 1992년까지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11%이상의 속도로 증가하였다. 공업의 각 부문과 구조·구성은 점점 튼튼하고 합리적으로 변했고, 연해에서 내륙으로, 중공업에서 경공업으로, 일반 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이미 비교적 완전하고 일정 기술 수준과 생산능력을 갖춘 공업 체계를 형성하였다.
    경영/경제| 2017.11.23| 3페이지| 6,000원| 조회(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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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관계와 한류
    2. 경제적 측면-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두 번째로 저희 조가 생각한 중국이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8년 등소평이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이다. 개혁개방이란 중화인민공화국의 덩샤오핑의 지도 체제아래에서,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3회 전체회의에서 제안되었고, 그 후 시작된 중국 국내 체제의 개혁 및 대외 개방정책을 말한다. 1978년에서 1992년도는 시장경제의 이행기로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현실파 덩샤오핑은 「네 개의 현대화」를 내걸어 시장경제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하였다. 기본 원칙은 선부론으로 대표되는데 먼저 부유해질 수 있는 조건을 정하고 부유해져서, 그 영향으로 다른 것이 풍요해지면 좋다고 하는 생각이다.이것에 따라 이후 개혁은 먼저 농촌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농촌은 해방 후의 토지개혁(土地改革)과 합작화운동(合作化運動)을 거쳐 비록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러나 이후의 경제체제와 경제정책은 갈수록 농촌경제의 발전에 부응하지 못했다. 주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인민공사(人民公社)의 `일대이공(一大二公)`을 강조하여 인민공사를 정부와 경제조직인 공사(公社)로 분리하지 않고 관리에 너무 융통성이 없었기에 농촌경제가 경제원리에 따라 운행되는데 불리하였다. 또한, 생산 집체화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경영과 독립 채산단위(核算單位)가 지나치게 커져 농민의 생산 의욕을 충분히 고취시킬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식량증산을 경제시책의 중심에 둔다(以糧爲綱)`는 정책을 강조하여 각지의 실정에 맞게 대책을 마련하는 다각적인 경영을 제한함으로써 농촌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괄구입(統購) 일괄판매(統銷)를 전면적으로 실행하고 농민의 매매행위를 금지하여 농민의 재산 증식의 길을 차단하였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1978년 이후 기존의 농촌 경제체제 중의 폐단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일련의 새로운 농업정책을 연속적으로 공포하여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도시 지역에서는 외자의 적극 유치가 장려되어 광둥성의 선쩐, 푸젠성의 아모이 등에 경제특구가 상하이, 톈진, 광저우, 따롄 등의 연안부 여러 도시에 경제기술개발구가 설치된다. 화교나 구미 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으로 자본이나 기술 이전 등 완수하는 한편, 기업의 경영자주권의 확대 등의 경제체제의 개혁이 진행되었다.1992년 이후, 다시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경제성장은 단번에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 연해부와 내륙부의 지역 격차는 심화되어, 특히 농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공산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아래에서, 장쩌민, 주룽지 정권은 격차 해소와 경제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게 된다. 격차 해소를 서부 대개발, 국영기업 개혁에 따른 실업자의 증대, 민공조, 삼농문제라고 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서도, 지금 중국 경제는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하여, 생산대국의 지위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뒤를 잇는 제4의 시장으로 기대되고 있다.
    농/수산학| 2017.11.23| 2페이지| 5,000원| 조회(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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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산자로써 대림동 조선족을 바라본다면
    ‘생산자로써 대림동 조선족을 바라본다면.’2016321021 이서영영화 ‘청년경찰’,‘황해’를 보고 있으면 서울시 대림동은 칼부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무서운 조선족이 사는 곳 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영화 ‘청년경찰’에서는 무방비로 가출한 가출소녀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데 그들이 납치되어 가는 곳은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난자적 출고장이다. 또한 영화 ‘황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람들의 청부에 따라 살인청구업자를 한국으로 보내는 마적과 같은 개장수 명정학, 그리고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한국으로 간 택시운전사 김구남,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 속에 조선족들은 사람도 스스럼없이 죽이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국내 거주 외국인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찬밥 신세를 받고 있는 조선족을 주목하여 한국사회가 가지는 사회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고 나아가 통일이라는 영원한 과제 앞에서 우리사회가 ‘조선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서 조선족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자면 조선족은 중국 땅에 흩어져서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 혈통을 가진 중국 국적의 주민들로, 약 250만 명에 이른다. 1982년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선족의 한국 친척 방문을 허용하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이래로 고향방문, 노동이주, 유학 등의 목적으로 한국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한국 체류 조선족은 급증하였다. 그 중 대부분은 이주노동자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유입의 원인으로는 중국에서 조선족의 지역적 안정성 상실, 원화가치의 상승, 한족·조선족에 대한 한국정부의 포용정책, 3D업종 등에 대한 한국 노동자들의 기피 현상 등을 들 수 있다.여기까지는 크게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족과 한국사회는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불법체류, 위장결혼, 보이스 피싱, 각 종 흉악 범죄의 소식을 미디어로 접한 사람들은 어떤 한 개인의 이상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조선족은 잔인하다’ ‘조선족은 인육을 먹는다’ 는 둥의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다. 이러한 조선족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는 조선족 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출·입국이나 취업 등에 있어서 재미 동포와의 차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렵게 한국에 들어왔어도 조선족이 대부분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는 것을 덜미삼아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조선족과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로 살펴보면 첫 째, 민족적 동질성의 결여를 들 수 있다. 조선족은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이중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할아버지 때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지금 젊은 조선족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자신들은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컸던 만큼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에서 큰 차이가 생겼을 것이고 따라서 한 민족이라는 연결고리가 희미해져 조선족도 그냥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다보니 그들도 서로를 동포 보다는 이용하고 범죄를 저지를 대상으로 보기가 어쩌면 더 쉬웠을 것이다.두 번째로는 문화적 우월성과 한국 중심주의다. 한국은 자기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지나쳐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다. 조선족 뿐 만아니라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 개방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우리보다 낮게 보고 함부로 대하거나 차별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물론 상대적 강자로서 그들을 포용해야 하는 건 맞지만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들을 단순히 외국 인력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국내 외국인 거주자들을 법적·경제적·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이 부분은 의식적인 차원인데 조선족에 대한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조선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뉴스에서 접한 소식만 듣고 조선족 전체에 대해 일반화 할 때가 너무 많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족은 한민족의 일원으로 함께 미래로 나아갈 우리의 동반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우리 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였고, 그 속에서 국내 거주 외국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에 따른 수많은 정책들과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들 중 우리와 가장 많이 닮은 조선족들과의 부딪히는 부분은 여전히 많다. 서로에게 우리가 하나였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고, 우리에게 남은 건 서로를 향한 편견과 쌓여만 가는 불만들뿐이다. 한국이 바라본 조선족은 불법 체류자들이었고, 범죄자였으며 사기꾼이었다. 조선족이 바라본 한국사회는 자기밖에 모르는 매정하며, 부당한 곳이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이유에는 할아버지 세대 이전이기 때문에 민족의 동질성 자체가 희미해져가는 상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이 갖고 있는 문화 우월주의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한 부정적인 눈을 갖게 한다. 이러한 시각에 차이를 좁히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법적인 노력과 더불어 한국입국기회의 확대, 또 이주민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 모든 구성원이 고정관념을 버리고 조선족과 우리사회는 함께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동반자로써 통일은 준비해 나가야 한다. 단언컨대 ‘통일’은 한국사회가 풀어가야 할 가장 큰 사회문제이다. 조선족이라는 위치는 이러한 통일이라는 문제에 있어 유리한 해결방법을 제시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모를 간과하고 특정적인 조선족이 ‘불법위장, 체류’ 등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공학/기술| 2017.11.23| 2페이지| 5,000원| 조회(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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