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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현대사 중국 공산당 모택동 대장정 리포트 A+ 확정
    REPORT제목과목명동양현대사담당 교수님제출일2019. 11. 17학과학번이름1. 서론1-1. 대장정(大長征)을 선정한 이유2. 본론2-1. 소년 시절의 모택동2-2. 대장정의 서막, 모택동의 출현2-3. 장개석의 공산당 공격◎ 국민당의 공산당 근거지 공격◎ 일본의 무력침공과 항일전쟁2-4. 대장정의 길◎ 제 4, 5차 초공(剿共)작전◎ 국가의 이동◎ 대도하의 도강◎ 대평원 횡단3. 결론3-1. 대장정 대한 평가와 나의 견해4. 참고문헌제목1. 서론1-1. 대장정(大長征)을 선정한 이유평소 모택동(毛澤東)에 대해 좋은 시각을 가지지 않았다.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이라는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인해 많은 중국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사특강 수업을 들으며 내가 모택동에 대해서 편협하게 바라보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통해 잘못된 점도 있지만, 모택동의 기여가 있었기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있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지도자 중심의 혁명만 지속되던 상황에서 농민들과 함께 중국의 혁명을 가능한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는 왜 기존의 혁명가들과 다르게 농민들을 함께 혁명의 주체로 일으키려 했으며 어떻게 농민들과 함께 일본, 장개석을 피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살펴보려면 바로 모택동이 대장정을 하던 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의 어린 시절과 대장정을 하게 된 배경, 과정,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2.본론2-1. 소년 시절의 모택동(毛澤東)모택동(毛澤東)1893.12.26.~1976.9.9모택동은 1893년 12월 26일 호남(湖南)성 성도인 장사(長沙)에서 멀지 않은 상담(湘潭)현 소산(韶山)이라는 조그만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와 불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모택동은 8세부터 마을 서당에서 교육을 받아 5년 동안 수학하였다. 유교 경전 중심의 전통교육을 받은 그는 지루한 경전보다는 ≪서유기≫나 손문 사이에 이뤄진 국공합작 협상 결과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모택동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모택동은 상해의 국민당 조직부 비서로 임명됨으로 국민당 안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랐다. 모택동은 국민당과 합작에 상당히 적극적이었으며 손문의 강령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 등 국공합작에 많은 기대를 한 것 같다. 그러나 국공 합작은 일부 공산당원의 반대에도 코민테른의 권유에 따라 성사된 것이기에, 공산당원의 일부는 이러한 모택동의 활동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특히 손문이 사망하자 국민당 안에서 모택동의 활동은 더욱 많아졌다.1926년 3월 장개석은 반동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중산함사건을 일으켜 손문 사망 뒤의 국민당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장개석을 그해 7월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북벌(北伐)을 시작하였다. 1927년 2월 북벌군이 모택동의 활동무대였던 장사를 통과한 뒤로 모택동을 고향 부근 농촌에 일어난 변화를 흥분과 희망으로 묘사한 보고서 를 작성했다. 당시에는 이 보고서는 빈농들이 농촌에서 지주와 지배계층에 대항해 일으키는 반란을 찬양하면서 중국의 변화의 힘이 빈농들의 혁명적 열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혁명은 만찬파티나 고상한 문화행동이 아니라는 비유를 하며 농촌에서 농민들이 일으키는 폭력과 처형을 정당화 하였다. 이는 곧 농민에 의한 폭력적 혁명은 자신의 평생과업임을 말한다. 당시의 중국공산당원들이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을 전형으로 보아 도시 노동자를 조직하고 혁명의 첨병으로 삼고자 하는 목표에 주력하고 있었던 점과는 대조된다. 중국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고 도시 노동자계층이 아주 미미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객관적인 상황이었다. 이렇듯 그가 농민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농민 출신이라는 점 말고도 국민당 내부에서 농민과 노동자 조직은 공산당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광동에서 농민을 훈련하기 위한 기구인 농민강습소를 모택동이 잠시 담당하였던 경험도 작용하였을 것이다.2-2. 대장정의 서막, 모택동의 출현1의 병력으로 장사를 다시 공격하였다. 두 번째 공격은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13일 동안 계속되었으나 전세는 홍군에게 절망적이었다. 모택동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 동지들을 설득한 뒤 강서성 남쪽의 근거지로 철수하였다. 이에 이르자 이립삼도 계획을 포기하였으며 그 후 중국 공산당에서는 즉각 도시로 진격하자는 주장이 잠잠해지게 되었다. 이 무렵 장개석은 북벌 완성 이래 거의 2년동안 끌어온 군벌들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정치·군사의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에게 ‘홍군, 장사점령’이라는 소식은 숙적 공산당이 재기를 노리고 있음으로 받아들였다.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홍군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국민당군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공산당 세력은 지방군벌과는 다르다는 것을 국민혁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장개석은 1930년 겨울 호북·호남·강서의 성장에게 홍군 토벌에 관한 작전을 지시하였으며 10만병력이 강서성 중부의 중앙 근거지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대항하는 홍군은 불과 4만명 뿐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홍군은 토벌군을 소비이트구 안으로 깊숙이 유인하여 격파하였다. 1차 전투에서 패배한 장개석은 1931년 3월 하응흠을 총사령으로 삼아 제 2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군은 토벌군의 취약점을 노려 각개격파하는 전술로써 5차에 걸친 전투에서 토벌군을 제압하였다. 제1, 2차 토벌에서 공산군이 사용한 전술은 전형적인 유격전으로 확실히 독창적인 전법이었다. 1, 2차 토벌에서 패배한 장개석은 30만 병력을 직접 지휘하여 1931년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공산군은 다시 취약한 부대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여 3차에 걸친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장개석의 주력 부대는 소비에트구로 계속 진격중이었으며 9월에는 중심 도시 서금(瑞金)으로 포위망을 압축하여 승리를 앞두고 있었다.◎ 일본의 무력침공과 항일전쟁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경 심양(봉천) 북쪽 유조구의 만주 철도선이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은 이를 에 수십만개의 토치카를 구축하고 군용도로를 건설하여 토치카와 연결시키는 철의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에는 1백만명의 병력과 전차, 비행기까지 동원되었다. 그리고 경제까지 봉쇄하였다. 하지만 홍군은 약 20만명의 빨치산과 홍위병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총이 10만 자루에 미치지 못하는 화력을 보유하였다. 그들은 대포는 한 대도 없었고 매우 제한적으로 소화탄, 포탄, 병기들이 보급되었는데, 그 모두가 서금에 있는 홍군 병기창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장개석의 경제 봉쇄작전은 효과를 바로 거두게 된다. 식량과 의약품, 소금의 부족이 심각해지게 된다. 모택동은 포위망을 돌파하여 소금을 구입 할 부대를 파견하였으나 국민당군에 바로 체포되었다. 홍군의 소규모 군사 기지는 홍군을 봉쇄하기 위해 채택된 군사적·경제적 양동 압력을 물리치기에는 부적절했다. 특히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는 5차 공세 동안에 자연스럽게 저항의 새로운 발판을 만들었음에 틀림 없다. 동시에 홍군의 전사들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중국 농민들은 단지 토지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강서 주민들은 국민당의 복귀가 곧 지주들의 복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개석의 승리가 보일 때 쯤 1933년말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진다. 1933년 11월 채정개의 19로군이 홍군 토벌의 임무로 복건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에서 진명추, 이세침과 함께 복건 인민 정부를 수립하고 항일구국을 내세워 독립정권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은 이 같은 채정개의 반란에 민감하게 대처하여 복건성에 군대를 파견하여 공산당과의 접촉을 저지하는 한편 채정개의 19로군에 공격을 가했다. 이렇게 복건 인민정부는 장개석에 궤멸되고 만다.모택동 홍군의 대장정 경로복건 사태가 일어나자 모택동은 전략을 제안한다. 홍군의 주력 부대를 장개석의 주요 지역인 항주, 소주, 남경, 남창 등에 투입시켜 토치카 없는 지역에서 싸움을 벌이고 동시에 흑이족(나나족)의 자치 영토로 들어선다. 사나운 나나족들은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을 싫어했는데, 어떤 중국군도 그 경계를 넘어오지 못했다. 따라서 장개석은 홍군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체해서 쇠진했다고 믿고 있어서 대도하의 북부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킨다. 하지만 홍군은 귀주와 운남의 원주민들인 묘족(苗族)과 탄족(?族)의 자치구를 무사히 통과하는 우애를 보였다. 홍군은 나나족 자치구 경계에 있는 몇 개 마을을 접수하는 도중 중국 지방 군벌에 인질로 잡혀있는 많은 나나족의 추장들을 찾아낸다. 그렇게 인질이던 나나족의 추장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자 홍군들을 칭송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또한 나나족의 언어를 할 수 있었던 유백승은 나나족과 협상을 하게된다. 나나족은 독립을 유지하기를 바랬으며 국민당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홍군의 정책은 중국의 모든 소수 민족들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홍군의 투쟁을 돕기 위해 무기와 총탄을 지원해주었다.대도하에 걸려있는 노정교이렇게 몇 백명의 나나족들은 홍군과 함께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 대도하를 건너기로 하였다. 나나족들의 일부는 북서쪽으로 전진하였다. 그들은 장개석 군대를 속이기 위해 두툼한 나뭇잎으로 몸을 둘러싸 남경 정부 조종사들이 그들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나나족들이 좁은 협곡 너멀 홍군을 안내했다. 홍군의 선두가 고지에서 강둑을 내려다 보니 급하게 만들어진 나룻배 세척 중 한 척이 빠르게 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대편 해안에는 고작 사천지방의 연합사령관 유문휘 장군이 통솔하는 1개 연대가 있을 뿐이었다. 남경 정부에서 지원된 다른 사천군이 대도하를 향해 천천히 행군하는 중이었다. 남경정부는 대부분이 북쪽에 정박해 있어서 이 지역에는 1개의 연대만이 있었다. 이를 본 홍군은 급작스럽게 마을을 점령하고 연대장과 그의 배를 생포한 다음 북쪽으로 향하느 길을 차단한다. 홍군이 산기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강 건너 적이 노출된 위치에서 했다.
    인문/어학| 2020.01.03| 17페이지| 1,500원| 조회(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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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한반도와 홍산문화 PPT중국의 역사왜곡동북공정(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중국 정부의 승인으로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등 동북 3성과 중국사회과학원이 2002년 2월부터 연합하여 추진하는 국책사업으로, 과거 역사와 그로인해 파생된 현대사와 미래사가 주요 연구대상.구체적 연구 과제는 고대중국 강역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중-조(中-朝) 관계사 연구, 한반도 정세 변화 및 그에 따른 중국 동북변강 안정에 대한 영향 연구 등이다.실질적 연구 목적은 향후 한반도에서 예상되는 정세 변화가 중국 동북 지역에 미칠 정치적ㆍ사회적 영향과 충격을 차단해서 동북 지역을 안정화시키고, 동북아 국제질서에 적극 대처하기 위함으로 파악된다. 이를 위해 중국은 국가주의 역사관, 특히 각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동북 지역에 적용하여 중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완결하려고 한다. 동시에 조선족이 중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가져 동요하거나 이탈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방지하려고 한다. 한국의 역사인식에 대응하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역 사이에 역사적 관련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다.동북공정에서 제기하는 고구려 인식에 따르면 고구려 정권은 '서한(前漢) 현도군 고구려현 경내의 변강민족이 수립한 소수민족 정권'으로 중화민족의 역사 범주에 속한다. 고구려 정권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 일파와 서한 고구려현 경내의 기타 민족에 의해 공동 수립’되었다고 하여 정권수립 주체가 한민족(韓民族)과 무관하다는 것이다.또 고구려 민족의 원류 역시 ‘모두 서한 시기 동북변강지구에서 활동한 민족’이라고 해 한민족과는 무관한 중국 변강민족임을 강변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한사군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계속 역대의 중국 중앙왕조와 신속(臣屬)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고구려 정권이 ‘초기에 서한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있었고’ 고구려의 활동지역이 ‘중국 역대 왕조우위를 점령한 일본은 1904년 한일 협정서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국권을 강탈해 갔고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으로 국권을 완전히 빼앗았다.위안부일본군 '위안부'란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전선으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했던 여성들을 이른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이러한 처지의 사람들을 ‘일본에 의한 성노예'라고 한다.이처럼 피해 여성들과 각국 정부, 국제 사회가 한 목소리로 일본 정부의 범죄 사실 인정과 진상규명, 정당한 배상과 사죄를 촉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일본 정부는 1990년까지는 민간 업자의 소행이었다며 일본군의 관여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1992년 1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된 위안소 관련 자료가 공개되자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관여와 동원의 강제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형식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 보상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특히 2012년에는 일본 극우파 세력들이 미국 일간지에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광고를 실었으며, 일본 측에서는 위안부 모집이 민간차원에서 행한 일이라며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독도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 28일이다. 이후 2월 22일 시마네현(縣)은 현(縣) 고시 제40호로 우리의 독도를 다케시마[죽도(竹島)]로 명명,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 사실을 1906년 4월 대한제국에 통보하였다. 이후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SCAPIN(연합국 최고 상부지령) 677호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고 이를 한국에 반환시켰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과 동시에 정부는 독도에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를 부여하는 행정조치를 취하였으며, 195유권 논쟁의 시작이다. 그 뒤 1951~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 과정에서 독도는 두 나라 간의 논쟁 대상이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일본이 독도 영토 편입을 주장하는 근거는 근세 초기 이래 독도는 일본 영토였고 영토 편입 직전까지 일본이 실효적 경영을 했으며, 영토 편입 당시 독도는 주인 없는 돌섬이었으므로 무주물 선점(無主物先占)을 한 것이며,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대일평화조약에 실려 있는 제2조 등을 들고 있다.지리적 근거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87.4km, 일본 오키섬에서는 157.5km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역사적 근거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신라에 귀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기록한 일본 정부의 문헌이 없는 등 독도가 자국 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을 취하고 있던 일본이 1905년 도근현시 40호 행정조치를 취한 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이다.국제법상 근거1946년 국제법상 연합국 기관인 연합국최고사령부는 독도의 영유권에 대하여 한국 영토로 판정, 독도를 주한미군정에 반환하였다. 또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독도를 즉각 인수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토로 통치하면서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국제사회의 합법적 주권국가로 승인받아 당시의 영토(독도 포함)에 대한 통치권을 공인받았다. 그리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재확인되었다. 그리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재확인되었다.임나일본부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는 369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로 진출했고, 이후 임나(가야) 지역에 일본부를 설치해 다스렸으며, 562년 신라에 의해 쫓겨났다는 내용이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의 일부 문구도 “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그러나 《일본서기》는 부정확하거나 나중에 덧붙여진 내용이 많아 믿기 어렵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 당시 우리의 역사책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나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명확히 뒷받를 정신적으로 굴복하게 만들기 위해 악의적으로 왜곡한 역사를 식민지 주민에게 가르쳐서 세뇌 목적으로 만든 역사 관점이다일선동조론(고대)"일본과 조선의 뿌리는 같다"는 이론.일본 침략의 정당성을 고대사의 오랜 연원에서 찾는 논리다.한민족은 일본인에게서 갈라진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고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한동조론'(日韓同祖論),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라고도 한다. 이 주장으로 인해 일제의 한일합방을 일본의 한국을 위한 배려와 도움인 것으로 꾸몄다.일선동조론은 1930년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 사상의 근거가 되었다. 또 일본 제국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 침탈과 동화정책, 황국신민화, 민족말살정책 정당화에 이용되었으며, 일선동조론에 만주·몽골을 '동족'에 끌어들인 '대아시아주의(大亞細亞主義)'는 일제의 만주,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대동아공영권'의 근거로 이용되었다.만선사관(고대)만주와 한반도가 단일한 역사, 문화적 지역이었고 한반도는 만주에 종속됐다"고 보는 관점이다.타율성론, 반도사관(고대)한국사 안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부분은 최대한 줄이고, 타율적이고 종속적 역사만을 강조한 것이다. 한민족은 자율적인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외세에게 지배와 영향을 받음으로써 발전을 이룩해 왔다는 주장이다. 타율성론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은 중국 대륙에 종속적인 관계라는 것을 주장한다. 일본은 만주를 대륙 침략에 있어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을 만주에 부속시켜 한국인의 주체성을 꺾을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역사는 독자적이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과 영향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식민사관은, 조선은 어차피 타율적이고 종속적인 역사발전단계를 거쳤으므로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해도 부당하지 않다고 함으로써 타율성론으로 뒷받침한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조선인의 전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배포된 내선 일체론 또한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한 타율성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반도적성격론,반도사관반도적하였다.
    인문/어학| 2020.01.03| 8페이지| 1,000원| 조회(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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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민의 총리, 주은래. 리포트도 有 리포트와 함께 발표하고 A+
    역사교육전공 ‘ The moved mover’ 인민의 총리 , 周恩來Ⅰ. 주은래 Ⅱ. 사상적 바탕 , 유년기 Ⅲ. 외교활동 Ⅳ . 모택동과 주은래 Ⅴ . 평가와 비판 Ⅵ . 참고문헌 Ⅶ.Q A INDEX세계사 특강 Ⅰ. 주은래 저우언라이 ( 周恩來 ) 출생 1898 년 3 월 5 일 , 중국 ~ 사망 1976 년 1 월 8 일 인민의 총리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여 총리와 인민의 마음이 서로 이어졌다 .” 모택동 다음의 2 인자 ? ‘The moved mover’세계사 특강 Ⅱ. 사상적 바탕 , 유년기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세 여인 인생의 전환점 : 신해혁명 현대식 교육 : 남개학교 일본유학 : K. 마르크스 이론 5.4 운동 : 각오사 , 이대조 유럽 : 중국 공산당세계사 특강 Ⅲ. 외교활동 국내 외교 : 공산당과 국민당 , 국공합작 국제 외교 : 외교부장 , 1954 제네바 회의세계사 특강 Ⅳ . 모택동과 주은래 대장정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세계사 특강 Ⅴ . 평가와 비판 공직의 삶 : 인민의 총리 , 정치인 , 외교관 개인의 삶 : 성격과 가치관 부정의 측면 긍정의 측면세계사 특강 Ⅵ . 참고문헌 ■ 바르바라 바르누앙 , 위창건 , 유상철 역 . (2007. 01. 22). 저우언라이 평전 . 베리타스북스 ■이경일 . (2004. 09. 20). 다시보는 저우언라이 . 우석출판사 ■김상문 . (2009. 05. 30. UN 도 감동한 위대한 지도자 , 저우언라이 . 아름다운 사람들 ■ 야부키 스스무 , 신준수 역 . (2006. 05. 15).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 역사넷세계사 특강 Ⅶ.Q A Q A 질문은 부담 갖지말고 자유롭게 !감사합니다 .{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20.01.03| 10페이지| 1,000원| 조회(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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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민의 총리, 주은래 리포트 A+ 확정
    REPORT‘The moved mover’인민의 총리, 周恩來과목명동양현대사담당 교수님제출일2019. 11. 17학과학번이름Ⅰ. 들어가며Ⅱ. 주은래(周恩來)Ⅱ-1. 사상적 바탕 ‘유년기’Ⅱ-2. 외교활동Ⅱ-3. The Power of Great Partnership, ‘모택동과 주은래’Ⅱ-4. 평가와 비판Ⅲ. 마치며Ⅳ. 참고문헌Ⅰ. 들어가며“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여 총리와 인민의 마음이 서로 이어졌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가 서거하자 중국의 인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천안문광장에 추도비를 세우고 쓴 말이다. 그는 모택동의 뒤에서 2인자로 활약했지만 꼼꼼함과 총명함을 동시에 지녔고 따듯하고 자애로우며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 임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로인해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인민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인민들의 애정은 어느 인물 못지않게 강하다.주은래는 모택동에게 자신에게는 부족했던 지도자적 자질이 있음을 간파하고, 그를 홍군의 사령관으로 추대하는 결단을 보이며 자신 스스로 2인자로서 권좌에 머물렀다. 때문에 중국인민들은 주은래를 실천적으로 인민을 위하는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모택동이 산이면 주은래는 물이다. 산은 남들 앞에서 우뚝 서기를 좋아하지만, 물은 수평을 유지하고 공명정대하며 산의 독존도 삼켜버린다.” 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중국인민들이 과연 주은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The unmoved mover’, 즉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진 거인이란 뜻이다. 이는 1971년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모택동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그리고 이에 빗대어 『다시보는 주은래』의 저자 ‘이경일’은 ‘The moved mover’, 즉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자질·능력을 겸비한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주은래를 칭했다. 본 리포트의 필자는 ‘이경일’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며 시작해보고자 한다.주은래는 현대화의 래의 어린 시절에는 유모 장씨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세 번째 여인이다. 그녀는 종종 주은래를 가난하나 행복이 가득한 고향 산양으로 데리고 갔었는데, 이로 인해 주은래는 어렸을 적부터 궁색한 환경에 접하게 되었고 그들의 곤경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외가인 완씨 집안의 서당에서 공부했던 주은래는 중국고전인 논어·대학을 배웠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이를 일생을 통하여 실천하고자하는 원칙으로 삼았으며 공자의 가르침인 ‘과유불급’ 역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자기 억제’는 그가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이는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 ‘천 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추가로 생모 또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생모는 일 처리와 중재에 있어 탁월한 판단력을 보였고 그는 자라며 이러한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자신이 정치 투쟁의 상황과 관련하여 비슷한 역할에 놓였을 때 어머니와의 경험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인생의 전환점주은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은 191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2살 때 그는 삼촌을 따라 중국 동북부인 만주에 살며 동관모범학단에 입학했다. 그는 그 학교에 다니며 중국의 전통적인 학습 과목과 함께 선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서양의 교육과목도 배웠다. 이렇듯 현대의 교육을 받은 그는 당시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변화 하나하나가 자신의 사고뿐만 아니라 훗날 장래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굳게 믿었다.1900년에 들어서자 비밀단체였던 의화단은 결국 폭동을 일으켜 북경 주재의 외국공사관들에게 위협을 가했고, 열강들의 연합으로 인하여 진압되는 바람에 청 정부는 막대한 금액의 손해 배상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청조 고위 지도층은 중국을 근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황제는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교육과 사법 제도를 개혁하려는 조치를 취했으며 입헌정부의 구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청조의 개혁은 비판적인 인사를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으며 그로 인해 청조는 19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주은래 역시 일본에서 위기에 빠진 중국을 구원할 방법을 찾길 바랐다.교토에 있을 때 그는 박사인 가와카미 하지메의 글을 접하면서 공산당의 사상적인 이론과 근거를 제시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K.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알게 되었다. K.마르크스는 자체 내부에 파멸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결국 공산주의에게 밀려날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브루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계급투쟁이 벌어질 경우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불가피하기에 공산주의 사회 도래는 역사적으로 불가피 한 것이라 주장했다.5.4운동그러던 1919년에 중국에서는 열강의 모욕적인 처사에 대하여 항의하기 위해서 벌어진 시위인 ‘5.4운동’이 일어났고, 주은래는 이 사건을 보고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천진으로 복귀한 그는 시내에 벌어진 과격한 저항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리고 시위에 가담하며 중국 사회를 개편해야 함과 더불어 중국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분산되어 있는 여러 시위 단체들을 보다 효율적인 하나의 조직으로 단합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 ‘각오사’라는 조직을 결성하고는 남자는 물론 여자도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천진에서 각오사를 조직한 주은래는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인 이대조를 북경에서 초청하여 각오사 회원들에게 강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주은래는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흡수되기 시작했다.이후 5.4운동을 진행 중이던 학생들은 중화민국 건국기념일인 쌍십절의 기념을 구실로 남개학교 운동장에서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지만, 경찰의 운동장 포위로 결국 진압당하고 만다. 이때 주은래는 젊은 동료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탄압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분노하여 더 이상의 평화적 설득 보다는 폭도화된 경찰과 군인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또한 일본상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방식의 매판상인들이 일본상품에 불매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자 그는 1920년 1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집회에 참여하여 일본군사를, 주은래는 외교와 협상·교육 문제를 주관했었는데, 특히 외교와 협상에서 주은래는 그의 능력과 개성을 가장 잘 나타냈고 결과를 통해 그는 결국 인정받았다.국내외교주은래는 공산당 대표로서 다른 정당들과의 관계를 담당하였고 협상을 통하여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뽐냈다. 이러한 그의 대표적인 사례로 시안시건과 국공합작을 들 수 있다. 그는 시안사건으로 인해 납치·감금 중이었던 장개석의 석방을 동의하여 난징으로 복귀한 그가 현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그를 설득하고 협상을 통해 결국 공식적으로 공산당을 인정하도록 함으로써 국공내전을 중단시키고 국공합작을 통하여 항일투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손문의 죽음으로 결렬되었던 국민당·공산당의 2번 째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거국적인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항일전이 발발하고부터는 우한·충칭의 공산당 대표로서 국민정부의 국방위원회와 군사위원회 등의 요직을 맡아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았다.주은래가 성사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업적은 건국 직전에 정치 협상 회의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다른 민주제 당파들과의 연합을 통한 연합정부를 약속하고 전국적인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 전략은 모택동의 연합정부론에 의해 창안된 것이지만 다양한 전술의 구사로 구체화한 것은 주은래였다.이와같이 주은래는 공산당은 물론, 국민당을 비롯하여 다른 정당들과의 사이를 조율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 같은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국제외교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주은래는 공산당 내에서 지도자적 위치를 유지하며 27년간의 총리를 연임하고, 58년까지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인사로써 국내·외 중요한 사안들을 해결했다.1954년 4월의 제네바 회의에서는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과 주은래가 국제무대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국제적으로 이미 평가가 높은 외교가 중 하나로, 중국이 주권을 가진 당당한 한 나라로서 중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국제 정세에도 역시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중국을 뒤엎는 씨앗이 된다. 또한 이를 계기로 모택동은 지도노선을 확립하였고, 주은래는 이후 40여 년 동안 충성을 다하여 그를 지지하였다.대약진운동주은래는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달성할 과업으로 여겨 모택동과는 달리 과도한 공업화 실현의 가속화 선언이나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다.그가 오직 경제문제에 있어서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실사구시’였다. 그는 객관적인 사회 현상에 비추어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정을 도모하고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리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때문에 그는 ‘많이, 빨리, 좋은 것과 더불어 절약’이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아닌 현실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실사구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국민의 경제발전 속도를 합리에 근거하여 정하는 한편, 균형 잡힌 국민경제의 발전을 지향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모든 사상이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그래서 경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이고 급진적인 현상으로 인한 재정수지의 불균형으로 30억 원의 적자가 발생하자 그는 회의를 통해 우경보수를 반대하는 한편 급진적인 모험도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결정되자, 기본적인 건설규모를 조정함으로써 1956년 경제발전을 비교적으로 안정적이고 건전하게 이끌었다.반면에 모택동은 빨리, 좋게, 절약하는 방법은 우경이고 후퇴라 말하며 오히려 반급진은 사기를 저하시킨다며 앞으로 우경보수만이 반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모택동의 행동은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의 준비이자, 여론몰이를 위한 것이었다.제 2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58년, 모택동에 의해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 제기되며 그의 주도하에 경제적인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설립하려는 전국적인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다. 심지어 이때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3가지 경제정책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인문/어학| 2020.01.03| 12페이지| 1,500원| 조회(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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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학기제 리포트, 자유학기제 배경과 현황, 장점, 단점
    REPORT이상적 교육제도자유학기제과목명담당 교수님학과학번이름자유학기제《목차》Ⅰ. 자유학기제 도입의 배경Ⅱ. 자유학기제 시행의 현황Ⅲ. 자유학기제의 문제점Ⅳ. 자유학기제 문제점에 따른 해결책Ⅴ. 마무리Ⅵ. 참고문헌Ⅰ. 자유학기제 도입의 배경우리나라의 학생들은 꽤나 높은 학업성취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적성과 진로, 자아정체성의 확립 등의 정의적 영역에서는 낮은 평가가 기록되고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지나친 ‘성적 경쟁’의 구조라는 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전의 박근혜 정부는 학교교육의 개혁으로 ‘꿈과 끼를 살리는 교육실현을 위한 자유학기제’를 제시했다. 여기서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때 단 한 학기만이라도 학생들이 성적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고, 자신의 학습동기를 점검함과 동시에 진로 및 미래의 목표를 수립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학기제가 도입되면 기존의 수업 형태였던 주입식교육이 아니라 실습·토론·프로젝트학습 등의 과정중심의 평가를 도입하여 학생참여주도형 수업으로 확대된다. 즉, 자유학기제의 도입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주도적인 자율적 참여를 이끄는 공부가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목적 아래 도입되었다. 그리고 현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다.Ⅱ. 자유학기제 시행의 현황자유학기자유학기제를 도입하여 시행할 전국 42개의 연구학교를 교육부는 선정, 그리고 9월부터 시범시행, 2014~2015년 말까지 희망학교의 신청을 받고 2016년 중학교 전체에 도입한다는 「자유학기제 시범운영계획」을 발표했다. 2013~2014년까지 1차 연구학교 시범운영, 2014년 2차 희망학교 및 선도교육지원청 운영, 2015년 3차 전면 확대 실시 2016년에 이르면 4차 전면 실시 순으로 추진이 이루어진다. 이에 따르면 자유학기제 연구학교 학생은 중간고사, 기말고사 와 같은 지필시험을 치지 않고, 고등학교입시에도 자유학기의 성적은 반영되지 않는다. 자율과정은 동아리 활동, 진로탐색 활동, 선택 프로그램 활동, 예술·체육 활동 등으로 시행된다. 또한 한 학기에 두 차례 이상 종일체험 활동을 하여 학생이 스스로 진로체험 계획을 수립하면 학교가 출석으로 인정하는 자기주도 진로체험도 실시된다. 이 같은 학생들의 진로탐색 활동 내용은 학교생활기록부에 점수 대신 서술형으로 기록된다. 이에 따라 2016년 자유학기제 실시 로 수준별, 맞춤형 교원 연수, 학교 컨설팅으로 교사의 전문성 향상과 수업 우수 사례를 발굴하여 확산 시켰다. 그리고 자유학기제의 시행으로 두드러진 학교현장의 변화로는 교육 수요자의 자유학기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 및 학교생활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가 증가하였다. 또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학생들은 학교생활 만족도 0.14%증가하였고 수업참여도는 0.15% 증가, 교사는 교육과정의 자율성 0.28%증가, 다양한 수업운용 0.31% 증가함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학부모는 학생의 자기주도 학습 평가와 전반적인 만족도가 0.11%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학업성취도의 측면에서도 자유학기제 경험 학생이 미경험 학생 보다 국어·영어·수학의 학업성취도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Ⅲ. 자유학기제의 문제점‘자유학기제의 시행으로 학생들은 자신의 꿈과 끼를 찾는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상적인 교육제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학기제 역시 문제점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교사들의 업무 부담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교과교육과정 수업과 학생생활지도를 교사의 주된 업무로 보았다면, 자유학기제가 시행된 후 그 외적인 요소로 직업체험 프로그램의 기획 및 현장컨설팅, 점검 등으로 교사들의 업무 부담은 나날이 증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과한 업무 부담으로 기존의 교과수업에 대한 질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두 번째는 여건상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학생들은 다양한 가치와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진로와 각자의 요구 역시 다양하다. 더불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직업의 종류는 11,655가지나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직업 중 학생들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진로체험의 장을 과연 열어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세 번째는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의 교육격차이다. 서울과 각 광역시, 광역시와 각 시·도 지역이 지닌 진로체험의 기회는 분명 크게 차이가 난다.네 번째는 자유학기제를 시행했을 때의 경제적 손실과 교육예산의 재정적 부담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체험기간 동안 일부 작업장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체험을 운영하면서 발생 할 수 있는 교통비나 식비 등의 추가비용이 이에 해당한다.마지막으로 자유학기제의 운영과 더불어 주요교과목에서 부족해진 수업시수를 보충하기 위해 학부모들은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사교육 의존도가 더 과열될 것이라는 것이다.학교가 학생들이 정녕 꿈과 끼를 개발하고 학부모들이 만족하며, 교사가 진정으로 보람을 느끼는 교육의 장이 되려면 이러한 문제점들의 해결과 추가 계획들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Ⅳ. 자유학기제 문제점에 따른 해결책지금부터는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하나씩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먼저 진로교사, 동아리강사, 예술·체육 강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채용하여 교사의 수업 및 학생지도 외의 추가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오히려 자유학기제를 시행하며 수업의 형식이 암기·주입식에서 토론과 실험, 프로젝트학습으로 다양화되었기에, 이에 따라 교사 따라 교사들에게는 알맞은 수업지도 연수를 통해 교사의 수업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오늘날 사회에서는 학생들의 개성이 존중됨에 따라 학생들의 진로와 요구에 대한 다양성도 분명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진로 체험학습 기회를 열어주기에는 예산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사전에 학생들의 진로학습 및 진로상담·검사 등을 통해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군을 알아볼 수 있도록 권장하고 그 직업군 내에서 대표 직업군을 선정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면 꽤나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시와 농촌이 지닌 기회의 차이는 불가피할 수 있지만 최대한 진로체험센터나 교육부와 중앙행정기관의 주도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기회의 격차를 줄여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추가로 자유학기제 시행에 따른 예산문제에 관해서는 각종 진로 체험활동에서 학부모가 자발적인 재능기부를 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인적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학부모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 싶다. 자유학기제에 따라 줄어든 정규 교과목 수업시수와 예체능·재량활동의 증가로 인해 부족해진 기본 교과목 공부에 대해 걱정하는 학부모와 학생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는 보완책으로 보충학습 및 심화수업,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 활성화 등이 있다. 방과 후 학교에서 기본 교과에 대한 보충학습 수업을 개설하고 운영한다면 부족해진 주요과목시수의 사교육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정부의 제도적인 추가 지원이 필요하지만 교사들이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과정중심의 평가를 실시하고, 학생들의 만족도 조사 결과에 귀를 기울여 제도를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운영하여 해결하길 바란다.
    교육학| 2020.01.03| 5페이지| 1,500원| 조회(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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