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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 철학과 회의주의
    『플라톤 철학과 회의주의』 - 회의주의의 길이제부터 회의주의의 길을 걸어가겠다. 1개월 전 까지만 해도 나는 ‘회의주의’를 ‘비관주의’로 알고 있었다. 허나 지금까지 배워온 회의주의에 대한 내 생각을 깨뜨리는 수업을 듣게 되었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회의주의 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롭게 배운 회의주의 철학은 22년동안 살아온 내 삶의 태도를 성찰하게끔 만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와 사상 시간에 배웠던 회의주의는 독단적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하며, 그 어떤 것도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의도 없고, 옳은 것도 없는 비관주의자들이 바로 회의주의자였다. 허나 이는 틀렸다. 회의주의는 다른 어떤 철학들보다 ‘동화’를 추구한다. 독단을 경계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회의주의야 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가치관이다.고등학교 윤리시간에 회의주의자에게는 정의란 없다고 배웠다. 이는 아마 카르네아데스의 예시를 잘못 해석한 결과인 것 같다. 회의주의자 카르네아데스는 하루는 정의를 정당화하는, 다음날에는 정의를 부정하는 연설을 펼쳤다. 그의 모순된 연설에는 회의주의적 방법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정의 개념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보다 정의에 대해 긍정논리를 펼치는 사람이나, 부정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 모두 논리적 한계, 즉 불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올바르지 않은 까닭은, 그 어떤 것도 완전히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이 책은 회의주의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계승자라는 것도 보여준다. 물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변증법을 통해 절대적인 진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여러 저서에서 ‘회의주의’에 가까운 결론은 도출했는데, 아르케실라오스는 바로 이 부분에 집중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비판철학을 받아들여 사물에 대한 ‘파악 불가능성’과 ‘판단유보’를 강조한다. 이때, 전자는 감각을 통해서든 마음을 통해서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회의주의적 입장을 정식화 한 것이고, 후자는 파악 불가능성이라는 입장을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자신의 회의주의를 논박법과 변증법적 탐구 아래에서 구현한다.아르케실라오스는 특히 스토아학파, 제논을 비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제논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 과도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제논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악 인상이다. 인간이 감각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하면 인상이 생기고, 이를 영혼이 동의하면 파악 인상이 생긴다. 그런데 파악 인상은 오류 없는 참된 것이다. 허나, 아르케실라오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인식은 항상 속임수와 착각에 노출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술 취한 사람, 광기 상태의 사람의 경우 참되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적 한계점들을 비판하면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파악가능성은 부재하며, 우리는 일종의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회의주의적 철학을 관철했다.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이 있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 회의와 의심을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 말은 독단과 아집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허나 현대인들은 여전히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지배 아래에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 특히 어떤 종교 전쟁도 겪지 않은 우리나라는 서로의 종교적 신념을 증오한다. 정치적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감정적 대립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갈등 속에서 불안하고 불행하다. 과연 이러한 불안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 의식 하에서 저서는 고대 회의주의를 방법론으로서 제시한다.고대 회의주의는 판단 유보를 통한 마음의 평화(아타락시아)를 얻고자 했다. 허나 현대의 회의주의는 지식의 형성 가능성에 의문을 갖고 그것을 부정한다. 전자가 불확실한 현실에 대응하는 하나의 삶의 기술이라면, 후자는 지식만을 문제 삼는 인식론적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회의주의와 차별된 고대 회의주의의 개념은 실천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이나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박혀 있는 회의주의의 개념은 인식론적 관점에서의 회이주의다.피론주의 회의주의의 완성자인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가 갖는 실천철학적 의미를 잘 포착한다. 그리고 어떤 주제여도 그 문제의 진위를 놓고 경쟁하는 모든 사태에 대하여 판단을 유보할 것을 권유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회의주의는 인식적 측면 뿐만 아니라 윤리적, 실천적 측면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다. 그에게 회의주의의 길은 탐구의 길이다. 탐구주의자로서 회의주의자는 독단주의자도 아니며 인식 불가능성을 옹호하는 자들도 아니다. 진정한 회의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보이는 것들과 사유되는 것들을 대립시키는 능력이며, 서로 대립되는 사태나 진술들이 힘에 있어서 평형을 이루는 능력이며, 그러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판단 유보와 마음의 평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진리에 대한 탐구 가능성을 믿고, 계속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다.마지막 강의 시간, 또 『플라톤 철학과 회의주의』 마지막 구절 첫번째 줄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 “철학은 광기에 독단에 맞서, 인간 정신의 자유와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근대인들이 이러한 고대 회의주의적 가치관을 지니며 살았다면 종교 전쟁, 세계 대전과 같은 비극적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1세기는 수많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다. 그것이 종교나 정치처럼 커다란 줄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씩 다르다. 자신의 생각이 독단이 아닌지, 광기가 아닌지 끝없이 생각해보고 성찰해본다면 갈등 없는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판단을 유보해 독단에 맞서는 가치관과 더불어 인간은 ‘탐구’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인간 역사상에서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이 있는가? 내가 알기론 단 한번도 없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앞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야한다. 멈춘 상태에서 잘못된 생각이 굳지 않도록 생각하고, 공부하고, 탐구해야 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진리에 가까워지도록 매 순간 노력할 것이다. 삶의 자세에 있어서 고대 회의주의의 실천철학을 방법으로 삼아 회의주의의 길, 탐구의 길을 걸어 가겠다.
    독후감/창작| 2017.12.28| 2페이지| 2,000원| 조회(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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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침입자 서평 A+
    정치학 특강 2 기말 대체과제공간침입자 서평오늘날의 사회 연구는 약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허나 이 저서는 사회적으로 고위 계층에 위치한 소수자의 삶을 엿본다. 특히, 영국 의회, 학계에 진입한 소수자와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의무교육 기관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개인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배워왔다. 허나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소수자의 비율은 적다. 여성 의원의 비율이 17퍼센트인 우리나라의 경우 유리천장은 보이지 않는 ‘유리’도 아니다. 견고하게 계단을 막고있는 회색 콘크리트 벽이다. 우리는 보편적 신체가 아니기 때문에 차별받는다.오늘날 여성과 흑인은 더 이상 사회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위층에 공식적으로 진입하며, 그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너멀 퓨워, 2017: 243) 서구 사상의 보편성에 맞서는 비판자들은 남성 신체를 부인하는 강경한 노력에 맞서, ‘개인’은 육화된 존재이며 신체규범의 기준이 실은 변화하는 하비투스를 가진 백인 남성이라고 주장해왔다(너멀 퓨워, 2017: 244). 남성 백인이 아닌 자들은 모두 배제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이 잘못된 유산은 진행중에 있다.소수자들이 고위층이 올라왔을 경우, 내부자들이 그들을 보고 겪는 ‘당황스러움’은 이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고위층은 흑인이, 황인이, 여성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다. 존재해선 안되며, 존재했던 적이 없었던 이들이 걸어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내부자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원주민들은 야만적이고 반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그들이 ‘펜’을 드는 순간 그들은 ‘야만’적이고 ‘반 이성’적인 존재에서 탈피된다. 허나 원주민의 본래적 속성에서 벗어났기에 보편적 신체들은 깜짝 놀라며, 존재의 부정을 느낀다.공간의 백인성(혹은 남성성)이 제공하는 편안함, 친숙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인종화된(젠더화 된) 구성원의 출현은 괴물 같다고 표현된다. 왜 그런가? “괴물은 간담을 서늘케 하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 그들이 실제로 위협하든 위협하지 않든 간에 바로 그것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너멀 퓨워, 2017: 93).예술가 곰리는 더 필드라는 작품에서 특정 신체가 예기치 않게 사회적 공간에 들어오는 것이 불안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너멀 퓨워, 2017: 85). 권위의 플랫폼에 존재했던 관람자가 인물상들보다 더 높이 서 있으면서도 인물상이 강렬하게 올려다보는 역설적 응시는, 관람자라는 우월한 지위를 일관성을 뒤흔든다(너멀 퓨워, 2017: 87). 그것들은 공간을 가졌고 우리는(관람객은) 들어갈 수 없다(너멀 퓨워, 2017: 87). 이처럼 공간 침입자들은 보편적 규범에서 어긋났기에 내부자들의 시선을 받는다. 그들의 존재는 부풀려서 과장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여성은 열 명의 남성보다 눈에 띈다. 존재가 과장 되는 만큼 감시도 과장된다. 여성은, 소수자는 탈육화된 제도적 서사 속에서 보편적 신체규범을 지닌 이들보다 몇배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소수자들의 단한번의 실수는 개인의 실수가 아닌, 소수자 집단 모두의 잘못이 된다.이 책으로 인해서, ‘일 못하는 여성’, ‘운전 못하는 여성’, ‘게임 못하는 여성’ 등 무언가를 너무 ‘못’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왜 많이 들리는지 알게 되었다. 일상 생활에서 자주 들려오는 김여사라는 단어가 왜 생기는지, 게임 속 팀 보이스에서 말을 하는 순간 들리는 발언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은 과잉 감시 당한다.친구들과 부산 여행을 갔을 때, 부산에 살던 남자 후배가 하룻동안 가이드를 해준 적이 있었다. 후배는 면허를 획득한지 몇일 지나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렌트해 하룻동안 이곳 저곳을 데려다 주었다. 숙소에 가던 길에 갑자기 어떤 차가 깜빡이 없이 들어왔고 후배는 욕을 하면서 끼어든 차량의 운전자를 비난했다.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저거 분명 아줌마야. 김여사.” 밤이었고, 앞의 차량은 안이 보이지 않는 썬탠한 유리였다. 지난해 발생한 교통 사고 중 남성 운전자의 교통사고 비율은 65%다. 자동차 운전자의 성비가 남성이 많다고는 하나 단순 교통 사고 발생 비율로만 본다면 여성 운전자보다 남성 운전자의 사고율이 높은 편이다. 심지어 남성운전자의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는 88%에 임박한다.(통계청, 2016) 이런 와중에 아직도 김여사라니, 김남사가 아닌가. 참으로 신기하다. 저 날을 끝으로 후배와 다신 연락하지 않았다. 답이 없는 믿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이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운전은 본래 남성 위주의 공간이었지만, 여기에 여성이 침입했다. 그렇기에 여성 운전자의 행위와 사고는 더욱 가시화되었다.요즘 하나의 게임을 재미나게 하고있는데, 이 게임은 팀의 합이 매우 중요하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팀 보이스(헤드셋으로 같은 팀과 말하는 것)를 킬 수밖에 없다. 허나 다섯에 하나 사회의 암(癌)들이 존재한다. 여성인 나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우와 여자다.”(당황스러움), “아나(캐릭터 이름) 누나 몇살이에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후 각종 패드립과 성희롱 발언을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여성들이 받는 불이익의 원천은 남성들이 야기하는 고도의 이성애적, 성차별적 문화로 인해 극대화된다. 무리 지은 남성들이 여성을 아예 배제하는 것과 달리 이러한 문화는 여성을 포함하지만 주변화 시키며 통제한다(너멀 퓨워, 2017: 155).본래 게임이라는 것은 남성들의 서사였으며, 그 속에 침입자인 내가 존재했다. 우리 팀이 지고 있을 경우 모든 잘못은 여성인 나의 것이며, 다른 이들(남성)의 실수는 비가시화 된다. 분명 같은 티어의 사람들인데 말이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 커다란 실책은 “여자가 집에서 빨래나 할 것이지.”라는 말도 듣게 끔 만든다.이번 해에 미국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테러는 남성이 저질렀으며, 여태껏 일어난 총기 난사들, 테러들도 모두 남성이 저지른 일이다. 허나 이들의 잘못은 남성 전체의 잘못이 아니다. ‘이상한’ 개인들의 잘못이다. 남성의 신체는 규범적 신체이기에 보이지 않지만 비규범적인 여성의 신체는 눈에 띈다. 우리가 중립적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단어들, ‘기사’, ‘교수’, ‘경찰’을 보거나 들으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여성을 상징하게 하려면 이 단어 앞에 여(女)가 들어가야 한다. 이 단어들은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며 남성성을 상징한다. 모든 규범, 보편은 남성 중심이다. 현대 사회가 이런 남성화된 서사 속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고위층에 올라간 소수자들이 존재한다.영국의 여성 수상인 ‘대처’는 어떻게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 중심부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대처는 여성처럼 입고, 남성처럼 행동하는 연극 각본을 제대로 수행한 내부자였다. 남성성과 여성성 역할의 특징을 세련되게 결합한 대처의 방식 때문에 그녀에게 ‘대행 남성’, ‘내각에서 유일한 남성’, ‘철의 여인’ 등 유명한 별칭들이 붙었다(너멀 퓨워, 2017: 174). 여성 의원들은 대처가 여성이면서 수상이라는 자리를 결합한 방식에 흥미를 가졌는데, 대처는 가령 의회에서 고함 치는 ‘남자’ 게임을 하고,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술자리 문화에 동참하고 ‘특정 쟁점에서 남성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는 등 남성처럼 행동했다고 한다(너멀 퓨워, 2017:176). 이것이 바로, 위로 올라간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대한민국의 전 대통령은 박근혜다. 그리고 여성이다. 몇몇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여성 대통령도 나온 시점에서 무슨 여남차별?”(이 와중에 남녀차별은 오타에 걸리지 않고, 여남차별은 오타 수정에 걸리는게 짜증난다.) 허나, 박근혜는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위에서 군림했던, 박정희의 딸이었다. 고위층 남성보다 더 높은 곳에 존재하는 일종의 왕이었다. 우리의 전 수장은 ‘여성’ 대통령이 아니었다. 선거에서 ‘박근혜 여성 대통령’이란구호는 있어도 여성 정책에 대한 토론은 없었다(권김현영, 권미혁, 이유진, 황정아, 2013: 442). 박후보와 새누리당은 ‘여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도 여성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민주당보다 여성 정책이 허술했다. 단적인 예시로 1997년부터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해왔던 ‘대통령 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가 박후보의 거부로 무산되었다(권김현영, 권미혁, 이유진, 황정아, 2013: 444). 새누리당은 민주당의 ‘맏아들’과 대비하여 ‘맏딸’의 이미지를 강화 시키고자 했을 뿐이다.이 저서의 결말에서는 비 가시화된 백인의, 남성의 권력이 명명되고 문제시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우리는 특권층의 권력을 문제화 하지 않는다. 소수자들의 힘듦과 고통을 말할 뿐이다. 허나 이 주장들은 이제 더 이상 효과가 없다. 육화의 존재론적 부정은 존재론적 공모에 내재되어 있는 게임의 일부일 뿐이며 권위의 상징적 상상뿐만 아니라 제도적 구조와 실천에서 남성성과 백인성이 갖는 원심적 지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중심성이 명명되고 문제시 되어야한다(너멀 퓨워, 2017: 260). 하층 계급의 고통과 상층 계급의 권력을 모두 가시화해야 한다. 여성 국회의원수가 17%인 것을 알리는 것 뿐만 아니라, 남성의 국회의원수가 83%인 것도 말해야 한다. 그들의 권력을 가시화하여, 이를 빼앗아 와야만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을 획득해야 한다. ‘도덕’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여론을 형성하자. 이로서 투쟁이 힘을 얻고, 새로운 거점이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한다.참고 문헌너멀 퓨워(2017), 『공간 침입자』, 현실문화, 85, 87, 93, 155, 174, 176, 243, 244, 260p권김현영, 권미혁, 이유진, 황정아(2013), 『누가 여성인가 – 박근혜 시대의 여성주의 정치』, 창작과 비평, 442, 444p
    사회과학| 2017.12.28| 3페이지| 1,000원| 조회(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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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삶의 자세 A+ 평가D별로예요
    철학은 왜 비판이고, 의심이어야 하는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서론 : 다원주의 사회.현대는 다원주의 사회다. 다원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이나 가치관, 목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다. 말은 좋지만 다원주의라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부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의 가치관은 모두 다르다. 이익을 보는 자가 있다면 손해를 보는 자도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입을 열어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이야기 한다. 우리는 언제나 커다란 문제에 있어서 전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아래의 글을 보자.오늘날 우리는 여러 사회적 현안 문제나 도덕적 문제에 대해 좀처럼 일치된 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아니 합리적 토론을 통해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국가가 일정한 정책적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엔, 이른바 국민의 ‘대표’ 들이 이른바 ‘정치적’ 협상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그들이 이끌어낸 합의의 정당성에 공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다원주의는 절대적 가치의 부재를 의미하며, 전체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뜻한다. 오늘날사회는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다원성을 존중하라고 지시한다. 허나 이를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가벼운 예시로서 외국인 이민자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내의 ‘외국인 이민자’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 그들의 피부 색, 생김새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생김새와 다르다.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에 대해서 알지 못해도 그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고 여기며 배척한다. 현대인은 이러한 흑백논리, 이분법적 논리에 익숙해져 있다. 허나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의 폐해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인류는 십자군 전쟁, 세계 대전, 파시즘 등과 같은 비극을 만들어 냈다. 나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진 참사는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을 선사한다. 절대적인 가치를 놓고서, 사람이 존재는할까?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여 모두를 감싸 안고 나아가야 한다.다원주의 사회 속 이분법정치 공간의 이분화사람들이 가지는 다원적인 속성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치적인 색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수국 보수에서부터 빨간색의 진보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모든 한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이 속에서 결정된다. 허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을 규정할 때 이 스펙트럼을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는 보수를 꼴통 혹은 꼰대라 말하며, 보수는 진보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중도는 없고, 진보가 아니면 보수라는 양 극단으로 편입된다. 이분법적 구조에서 인간이 지니는 색채는 새빨간 색이 아니면 새파란 색이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가지각색들은 (딸기라떼 색이라던가, 블루 하와이 색이라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현대 사회의 정치 공간은 이분화 되어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만든다. 이 갈등은 풀리지 못하며 그 상처만 곪고 있다. 토론의 장이라 불리는 대학 내 동아리에서도 싸움의 씨앗을 말리기 위해 정치적 이야기를 금지시키는 규칙을 만들어낸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방법은 매우 이상하다. 시장주의 혹은 평등주의라는 경제주의적 관점도 아니고, 큰 정부인가 작은 정부인가라는 정부의 개입 문제도 아닌,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관점으로 나뉜다.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맞는가?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양 극단으로 편입되고 있다.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로 본 오늘날의 정치.국민 국가는 인민주권의 논리로 만들어졌다. 인민주권의 논리는 국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국가의 주인으로 설정한다. 국가는 주인인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들을 통치한다. 오늘날의 국민 국가는 대부분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현실을 주도하며, 보편적 정치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 인식의 상대성에 관심을 갖고 ‘인간공동체의 척도로서 보편적 인간을 뜻한다. 허나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이 존재하는가? 공동체의 척도로서 보편성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의 신념이 이렇게 갈릴 수 있을까? 인식의 상대주의와 공동체의 척도로서의 강력한 ‘보편성’은 양립 가능한가?오늘날의 정치인들은 소피스트일 수도 있겠다. 철저하게 수사학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지지하는 세력이 원하는 말을 건네준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로서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지향하는 것을 생각했고 이를 소피스트들의 철학적 입장과 결합시켜 시민들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마치 오늘날의 진보나 보수당이 사람들이 원하는 공약을 내세우고,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과 같지 않은가. 과거에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허나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수많은 정보들을 볼 수 있다. 허나 이 정보들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며 누군가가 해석한 상태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의 ‘성향’에 맞는 ‘해석자’들이 집필한 정보들을 골라서 보며,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한겨레 신문을 읽는 사람은 종편 뉴스를 보지 않고, 종편 뉴스를 보는 사람이 한겨레 신문을 읽지 않는 듯이 말이다. 인간 인식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말이 진리인 양 군 소피스트들과, 이를 믿은 아테네 시민들이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나는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신념과 생각이 올바른 것이며, 보편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아집으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정치인들 사람들의 아집을 이용한다.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고, 자신에게 투표하라고 유혹한다. 현대 사회의 정치인들은 프로타고라스를 넘어 고르기아스의 수사술을 사용한다. 진리와는 무관한 말을 상대방을 현혹해 설득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시각을 사로잡는 미디어와 정치 세력의 유착은 기득권층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이처럼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 소피스트의 수사술은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다원화로 가기 위해서: 삶의 방법으로서의 회의주의인식의 상대주의를 주장한다면 공동체의 척도로서의 강력한 보편성을 주장해선 안된다. 고대 회의주의의 실천 철학이야 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자신의 주장이 ‘보편적’이며 ‘올바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고집쟁이 현대인들의 토론은 찬반 논쟁을 넘어 감정 싸움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하나의 논쟁 거리에서 나와 같은 의견이 있다면 다른 의견이 나올 수도 있음을 깨닫고, 모든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고대 회의주의의 ‘파악 불가능성’과 ‘판단 유보’를 삶의 자세로 삼아, 마음의 평안을 갖자. 회의주의적 실천은 현대의 다원성을 존중해 만인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아카데미 회의주의의 시조인 아르케실라오스는 모든 사태에는 필연적으로 반대 의견이 성립되기에 일체의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문제라 하더라도 찬성이 있다면 반대가 있을 수 있다. 판단 유보야 말로 마음의 평안을 준다. 스토아 학파가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헬레니즘 시기는 독단주의가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인간들에게 독단으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제시해준 것이다. 『플라톤 철학과 회의주의』의 저자는 고대 회의주의가 삶에 대한 지적인 태도, 나아가 삶의 기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저술한다.“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이 있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 독일의 작가 괴테의 말이다. ‘회의’와 ‘의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 말은, 독단과 아집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는 괴테의 이러한 충고와 달리, 강력한 종교적 도그마와 편파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배려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이 말처럼,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편파적인 정치 공간에 편입되어 있다. 찬반 논쟁에서의 감정 싸움은 기본이며, 국회에서의 몸싸움도대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이다.결론: 철학은 비판이고 의심이어야 한다.다원주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이나 가치관, 목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과거 전통사회 내의 공동체가 동일한 이념, 가치관을 지니면서 보편적이지 않은 것을 평가절하했던 것 달리, 다원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목표는 존중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다수’의 가치는 ‘보편적인’ 가치로 설정된다. 여기서의 다수는 단순히 수(數)적인 의미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을 의미한다. 숫자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권력 계층들의 가치관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 이에 반해 소수자들의 이념은 부정적인 언어들과 접합되고, 매도되어 손가락질 받는다. 쏟아져 나오는 정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이런 현대적 상황에서 판단의 유보는 다양성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오직 철학만이 삶의 자세, 삶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끔 만든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는 나의 존재 이유도 모르며,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존재의 규정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과연 옳을까? 불확실성의 불행 속에서 오직 철학만이 삶의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렇기에 철학은 비판이고 의심이어야 한다. 비판이 있어야 진보가 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우리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하기에 철학은 비판이어야 한다. 의심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에 대하여 ‘옳은’지 항상 생각하고 아집을 버려야 한다.철학은 ‘광기’와 ‘독단’에 맞서, 인간 정신의 자유와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독단은 배척하고 척살해야 하는 대상이다. 허나 현대인들의 가치 구조, 언어 구조 속에 거미망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분법적 논리와 독단은 우리의 생각을 포획한 상태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의 고집과 독선을 알고 있다. 이를 나라는 존재의 일상 생활 속으로 넓94p
    철학| 2017.12.28| 5페이지| 3,000원| 조회(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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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프러제트 감상문 A+ 평가A좋아요
    서프러제트 감상문영화 ‘서프러제트’는 주인공인 모드 와츠가 서프러제트의 시위를 보고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에 대해 불편함을 갖게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쯤엔, 모드 또한 한 명의 서프러제트가 되어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서 당시 사회상을 잘 반영해 주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성으로서 울분이 터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당연한 권리를 그 당시 여성은 갖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여성을 권리로부터 배제시키면서 가정 내에서 많은 역할과 의무를 지게 만들었습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나누고 여성이 머무르도록 만든 사적 영역을 폄하했습니다. 여성의 일은 하찮고 가치가 없지만 여성에게는 ‘모성’이 존재해야만 했고 아이를 케어하고 양육해야만 했습니다. 이 모순적인 매커니즘이 당시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영화가 제게 준 충격이나 깨달음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왜 내가 배운 세계사 속에서도 이들은 배제되었는가?’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수능 선택과목 중 세계사를 선택했습니다. 영국의 명예혁명, 권리 장전 등 굵직한 사건들을 배우고 이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암기했던 제가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 혁명이 왜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박애, 자유, 평등’이었습니다.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정치적 권리를 얻었습니다. 허나 그 이후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간략하게 ‘여성은 참정권에서 배제되었다.’ 라는 서술이 쓰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일을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해 만들어낸 세계 역사에서도 여성의 참정권 운동, 여성 권리에 대한 운동은 다른 혁명들보다 가치 없는 사건들로 치부되어 있었습니다.두 번째로는 어떤 권리도 없었던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은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소유가 되며, 배로 나은 자식에 대한 양육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권리만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권리도 없었으며 친자에 대한 권리도 없었습니다. 여성이 사회에서 존재하려면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했습니다. 여성은 여성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많은 부분에서 여성은 여성으로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임산부석의 경우 임산부의 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미래의 아이’를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16년 12월 말에 만들어진 전국 출산지도는 여성을 여성이 아닌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국가적으로 행해지는 제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여성을 배제시키는지 알 수 없습니다.세 번째로는 나라라는 집합체(사회)와 그를 구성하는 개인들 사이의 모순을 느꼈습니다. 19세기의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산업 자본주의의 완성기였으며 대외적으론 세계의 중심이자 단 하나의 축이었습니다. 영국 최고의 전성기 시절에도 여성은 그림자 속에 살았습니다. 나라의 부가 최고조에 다다랐던 시점에서 그 나라의 구성원들의 삶은 피폐하고 메말랐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갖기 위하여 항쟁했으며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움직임은 여성 참정권을 인정받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오늘날에는 본 영화의 배경보다는 나아졌습니다. 허나 아직까지도 성 차별은 존재합니다. 여성의 일을 가치 없게 여기는 사회적 구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역사를 바꾸어 나갑니다. 서프러제트의 참정권 운동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여성에겐 참정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슬람 국교의 국가는 2015년이 되어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습니다. 소수 민족이 주를 이루는 국가들은 여전히 악질적인 방법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미래의 여성들을 위하여 온 몸을 바쳐 투쟁했던 여성들을 잊지 말고 더욱 노력해야함을 일깨워 준 영화였습니다.
    독후감/창작| 2017.11.01| 2페이지| 1,000원| 조회(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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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학 82년생 김지영 서평 A+ 평가A+최고예요
    82년생 김지영(조남주)-여성을 위한 공간은 없다.-서론김지영.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인 김(金)씨와, 흔히 볼 수 있는 생물학적 여성의 이름 지영. 이 소설은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한다. 특별한 사람의, 유별난 사건이 아닌,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담았다. ‘한국 여성’인 김지영이 평생동안 어떤 억압을 받는지 보여주며 그녀의 삶을 풀어나간다.첫 부분에서는 34살 김지영씨의 ‘증상’을 보여주며 억압이 그녀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받은 억압들을 털어 놓는다. 김지영씨는 젠더 위계에서 남성보다 아래에 속한다. 사회의 모든 공간에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며, 사회의 모든 공간에는 젠더 위계가 만연하다. 여성인 김지영씨는 가정에서, 초, 중,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직장, 카페, 지하철 등 사회의 모든 공간에서 차별 받는다. ‘정상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이(시간)에 따라 존재해야 하는 모든 공간 속에서 억압당한다.본 서평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우선 김지영 씨의 관계 속에서 보이는 차별을 보며 나의 경험과 이어 보았다. 그 후, 관계 밖 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동 시장에서 통계적으로 보이는 남성 선호 현상과, 어떤 공간이든 불편한 여성들, 모성애와 아이 양육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미디어에 대해 논의한다. 마지막으로는, 김지영씨 주변의 남성의 시각을 관찰하고 결론을 맺는다.관계 속의 차별(OO년생 OOO)김지영씨는 매우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하게 공부를 하고, 평범하게 대학에 진학 했으며, 평범하게 직장에 들어갔다. 평범한 김지영씨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매우 평범하다. 무섭게도 말이다. 그녀는 나도, 내 친구들도, 여성이라면 한 번쯤 당해본 사건들을 겪는다. 아래는 김지영씨가 관계 속에서 받았던 억압과 차별에 관한 내용이다. 김지영씨의 경험이지만, 나 또한 겪었던 일을 위주로 서술했다.김지영 씨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남동생의 분유 가씨에게 남학생은 말했다. “너 항상 내 앞에 앉잖아. 프린트도 존나 웃으면서 주잖아. 맨날 갈게요, 그러면서 존나 흘리다가 왜 치안 취급하냐?” 김지영씨는 몰랐다. 뒷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프린트를 전달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통로를 막고 선 사람에게 뭐라 말하며 비켜 달라고 하는지. 그녀가 인간을 대우할 때 비추는 최소한의 호의는 그녀를 ‘흘리는’ 여자로 만들었다.김지영씨가 대학 졸업을 이틀째 남겨놓았을 때, 회사의 수많은 불합격 통지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이 상태로는 졸업식에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고 그런 김지영씨에게 아버지는 정신 상태를 운운하며 막말을 가했다. 막말에도 김지영씨가 딱히 반응이 없자 아버지는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라 한다. 이 말을 들은 김지영씨는 참을 수 없는 느낌을 강하게 받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82년생 김지영씨가 아닌, OO년생 OOO씨로 만들어도 될 만큼 김지영씨의 경험은 나의 경험과 중첩된다. 그저 남동생이 아닌 오빠였고 분유가 아닌 약과였을 뿐, 고등학교 때가 아닌 대학교 때 흘리는 여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아닌 이모부가 시집이나 가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사실, 위의 내용들 외에도 많다. 된장녀를 하나의 개그코드로 사용하는 남자 상사(내 경험의 경우 남자 선배), 명절 때 일하지 않는 아버지 등. 너무, 많다. 앞으로 내가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OO년생 OOO씨의 이야기는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김지영들은 사회의 관계속에서 일방적인 모욕과 차별을 받는다. 안락한 가정, 의무 교육 기관, 소비자로서 돈을 내고 다니는 학원, 학교도 여성에게는 차별 받는 또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구조 속의 차별노동 시장 속 여성시간은 흐르고 사회는 발전을 떠들고 있음에도 차별과 억압은 여전했다. 아니, 김지영씨가 나이가 들면서 더 심해졌다. 김지영씨의 학창 시절엔 불공평함에 싸워 학교 규칙을 바꾸는 여학생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학교는 (언짢아 했지만) 이들의 제안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여줬다. 허나 성인이 을 기업에 추천했다. 항의는 소용이 없었고 윤혜진씨는 포기했다.김지영씨가 졸업하던 2005년의 여성 채용 비율은 채 30퍼센트에 다다르지 못했으며, 2005년 여성관리직의 비율은 10퍼센트에 불과했다. 2017년 10월이 발표된 보고서를 보면 여성 관리직 고용의 성 격차는 79%에 불구한다(김태훈, 2017: 사회면). 이 뿐만이 아니다. 2014년 OECD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남녀 임금 차가 가장 큰 나라로, 남성이 100만원을 벌 때 여성의 임금은 63만원이 조금 넘는다. OECD 평균 여성 임금이 84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성차별이 현저히 큰 것을 알 수 있다.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 여성의 노동 시장 진입과 유지를 방해한다. 육아 휴직을 쓰면 이래서 여자는 안된다는 눈초리를 준다. 이는 육아 휴직제도를 휴지조각으로 전락시킨 사회구조의 탓이지,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직원이 육아 휴직을 사용하면 기업은 대체되는 인력을 구해줘야 한다. 허나 기업은 새로운 인력을 구하는 것을 손해보는 일로 생각하며 인력을 구해주지 않는다. 다른 직원의 업무는 증가하고, 늘어난 업무량에 대한 불평과 짜증은 기업이 아닌, 육아 휴직을 사용한 사람에게 간다. 헌데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노동 시장에 남아있는 미혼 여성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 미혼 여성은 출산률 저하의 주범이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노동 시장을 포기하고 가정에 몸을 담근 여성은 ‘맘충’이라 불리는 벌레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여성은 항상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 공동체 유지를 망치는 이기적인 여자다.미디어 속 여성임신 후 김지영씨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은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정말 그렇다. 나는 여고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출산의 과정과 그 고통에 대해, 출산 후의 출혈이나 몸의 변형에 대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TV나 영화에사람들이 아이를 위해서는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종 미디어를 보면, 모성애를 강조하는 프로그램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허나 왜 부성애를 다루는 영화는 없나? 왜 영화 마더는 있는데 파더는 없는가? 아버지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가? 모성애는 모든 여성에게 존재하는가? 모성애는 억지스럽게 과장된 면이 많다. 여성에게 모성애가 있다면 여성이 가정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 이런 프로그램은 가정은 여성이 책임져야 한다는 남성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텔레비전, 영화,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여성들은 국가 권력 이데올로기를 위해서나, 남성 권력의 영향을 받은 채로 재현된다(히라타 유키에, 2005:16). 모성애는 종교가 아닐까라는 김지영씨의 의문에 긍정을 표한다.요즘에는 아이 양육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대표적으로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있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에게 아이들은 예쁘고 귀엽다는 생각을 심어주곤 한다. 동의한다. 아이들은 예쁘고 귀엽다. 허나 이 리얼리티 쇼는 육아의 힘든 부분을 배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로그램 속 가족보다 빈곤하다. 그리고 빈곤한 사람들은 쇼에서 나오는 방식처럼 육아를 하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자녀와의 외출, 놀이, 육아는 실제 가정과 동떨어져 있다. 허나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현실을 왜곡시킨다. 소수 가족이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삶’이 된다. 실체는 없고 그 주변을 감도는 이미지만 존재한다. 현실의 모든 가족이 그렇다는 듯이.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 서투르지만 열심히 육아를 하는 아버지, 그야말로 안락하고 바람직한 가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존재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남성의 시각에서 본 김지영책의 마지막에는 김지영씨의 주치의인 ‘남성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씨를 진찰한 후 상념에 빠진 모습이 나온다. 남자는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 자신의 아내가 없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나는 마지막 말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아내를 통해 아이를 가진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듦을 이해했다. 허나 그에게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일 뿐이다. 본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내가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가정에 머물게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남자 의사나 김지영씨의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행복을 바란다. 허나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감정적으로 공유하고 사회적 불공정함을 인지할 뿐 아니라 고통을 제거하려는 노력까지 포함된다(김미덕, 2016:177). 그들은 부정의를 인지할지라도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여성들에겐 만연한 젠더 위계는 남성들의 시야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남자들도 이와 같다. 내 말에 동의한다. 허나 나와 함께 여성 억압에 대항하지 않는다. 눈 앞에 보여도,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기에, 눈을 돌리고, 입을 닫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딸의, 누나의, 동생의 행복을 바란다.결론이 소설은 김지영의 경험들을 그녀의 시각에서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읽는 내내 억울하고, 견딜 수 없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살면서 지나쳐가는 모든 공간 속에서 김지영은 제대로 숨쉬지 못한다. 여성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있는 곳, 심지어 여성만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자신을 검열하며 숨죽인다. 김지영씨도, 김지영씨의 어머니도, 언니도, 선배도 마찬가지다.이 소설에 대한 불만점을 꼽자면, 계속 입을 다무는 김지영씨의 행위다. 화가 끌어 오르지만 혼자서 삭히고, 거울을 보며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기업에서의 부당한 처우 말고, 사람의 관계가 중요한 공간들에서의 부정의에는 목청 높여 화내도 되지 않았을까. 가정에서 들은 부당한 발언에 대립하고, 대학교 엠티에서 남자 선배의 모욕적인 발언은 공론화해도 되지 않았을까. ‘나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거야. 라는 생각은 성격 차이인 것인가, 내가 그녀
    사회과학| 2017.11.01| 5페이지| 2,000원| 조회(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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