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학년도 가을 인문학기행 연구보고서]조선시대 향교의 교육적 기능 연구“향교[鄕校]와 교육[敎育] 사이”? 20113 박범수1. 서론 - 향교의 역사적 의의학교 교육은 형식교육으로서 예로부터 발달해왔다. 에서 말하길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학교를 설치하여 인덕을 수양하고 인간 사회의 윤리적 질서 체득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교육기관, 즉 향교[鄕校]도 이러한 학교 중 하나이다. 향교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지방(향촌)에 설립되어 국가에서 운영하던 중등 교육 기관이다. 향교의 뿌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뻗어나가 있으며 이번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조선의 향교는 유학(성리학)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은 조선 왕조가 숭유배불 정책을 통치 체제로 삼아 이에 따라 백성들을 유학의 소양을 갖춘 관리로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향교는 교육 이외에도 종교 기관, 사회 교화 기관, 공론 소재처,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기능도 함께 하였고 향교 건물 자체도 조선시대의 대표적 목조 건축물로써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이번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향교의 교육적 기능과 방법을 탐구하고 이를 현대 교육에 접합시키는 과정을 통해 모둠원들의 교육 철학을 정립함을 목적으로 한다.2. 본론가. 향교의 교육 대상 및 방식1) 향교의 교육 대상향교가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질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확실한 교육목표가 주어짐에 따라 향교의 교육대상은 양인 전반이 되었다. 조선이 신분제사회인 만큼 상류신분층이 다른 계층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향교는 소수의 귀족문벌뿐만 아니라 많은 양인 신분층에게 유학교육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에 양인들은 향교에 입학하여 교생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신분상승의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된다든지, 학업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진사 시험 회시[會試]에 직접 응시하게 하거나 고강[考講]에서 우수한 사람에게는 호역[戶役]을 면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등의 부여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특전이 주어지는 교생의 정원은 제한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6세 이상의 양인에 한해 학업의 기회를 허락했다. 조선시대에 학업의 시작은 7, 8세부터이지만 교생의 연령이 16세로 제한을 받는 것은 16세부터가 바로 국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연령의 상한선은 분명하지 않으나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하거나 이에 준하는 입사[入仕]의 기회가 되면 향교를 떠나도록 되어있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우가 없으면 늦게까지 향교 교생의 신분을 유지했는데, 이 경우에는 학생신분이 사회신분으로 대치됨에 따라 호적[戶籍]에까지 교생이라는 신분으로 표기되었다.조선왕조의 유교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농민들에게 향교교육을 허락한 점 등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러다 보니 16세기 이후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교생은 평민들이 상당수 점유하고 있었다.그리고 16세 미만인 경우 정원에 관계없이 향교에서 교육이 가능하며, 이들이 바로 ‘동몽’들이다. 군액[軍額]의 대상이 부족할 경우는 연령의 상한선을 20세까지 제한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40세까지는 향교에 머무르며 학생신분을 허락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2) 향교의 교육 방식향교는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한다.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를 함께 공부하였다. 장려조에는 “교생으로서 독서한 일과를 매월 말에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순행하여 고강[考講]하고, 영에 따라 권장함을 문부[文簿]에 기록하였다가 교관이 전최[殿最]할 때에 그의 월과·일강을 빙고하여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헤아려 감한다.”는 내용을 통해서 향교에서의 공부내용 수 있다. 여기에서 관찰사의 고강에 낙강한 교생은 교생신분을 박탈당하였다.교생들이 강습한 교재는 , 사서오경을 비롯한 제사와 , 등으로 성균관이나 서원의 그것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과 는 조선 초기부터 교생들에게 권장된 책으로서, 각종의 고강이나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부과되었다. 향교에서의 수업방식은 먼저 동재와 서재의 유사 각 1인이 교관 앞에 일강을 청하고, 이어 동-서재에서 각각 1,2인을 선발해서 독서를 강한 다음, 학생들이 개인별로 독서한 것을 교관 앞에서 강하고 의문 나는 것을 질의하는 개별학습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먼저 배운 내용을 완벽하게 익혀야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완전학습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학력평가에는 일일평가, 월례평가, 6개월평가 등 정기적인 평가와 불시에 행해지는 부정기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실시된 일일평가이다. 이는 담당 교수에 의해서 실시되며, 서당에서부터 성균관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던 평가방법이었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그 시험하는 방법도 달랐던 것이다.나. 향교의 교육적 기능1) 인재 양성의 기능향교는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리들을 배출해 내기 위하여 지방에 설치된 학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인재 양성의 기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관리를 배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곧 과거 시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조선시대의 과거는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문과와 무과로 구분되었고, 시험 과목에 따라 유교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명경과[明經科]와 시문을 짓는 제술과[製述科]로 나뉘었다. 소과에서 명경과 합격자인 생원과 제술과 합격자인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300일 동안 공부한 뒤에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향교의 학생들은 과거 급제를 목표로 공부했기 때문에 교육 과정도 과거에서 출제되는 시험 과목에 맞추어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인재 양성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2) 사회적 교화의 기능향교는 풍화지원[風化之源]으로써 향촌 사회를 교화시키는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석전이나 삭망, 분향 등 문묘 향사도 사회 교화 기능의 일종이라 할 수 있지만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을 상대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미풍양속을 장려하는 사회 교화 기능과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사회 교화기능’ 에서 교화[敎化]의 사전적 의미는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즉 지배층의 영향력을 받아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부터 향교를 통해 지방민을 교화하고자 했던 국가의 의도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교생의 신분이 평민이라는 점에서 향교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데, 이는 인재양성보다는 사회질서 확립의 경향이 강했음을 말해 준다. 사실상 향교의 교화의 기능 안에 교육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지배층은 백성들이 자신들이 주도하는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 체제의 안정성을 깰 수 있다고 인식하여 향교를 통해 백성들을 교육시켰다. 이러한 사료들이 향교의 사회적 교화기능이 지배층의 피지배층 지배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향교는 조선후기에 들어서 실제적 교육을 통한 교화기능이 쇠퇴하고, 제향을 통한 교화기능과 향악을 주관으로 하여 지방의 풍속과 기강을 확립하는 것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지방 양반들이 향교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은 또 아니다. 신분제가 급격히 요동치는 바람에 몇몇 양반들이 자신의 신분보전을 위해서 향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극도의 피해를 입은 뒤 백성들을 통제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됨에 따라 향교의 운영에 더욱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기도 했다.다. 향교의 교육적 역할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는 기본적으로 교화의 근본이 학교에 있고 학교를 통해 인륜[人倫]을 밝히고 인재를 양성하려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성리학을 백성들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또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향교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었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아니었지만, 과거의 소과, 즉 지방의 과거에 합격하여 신분상승을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결국 요점은 오륜을 깨닫고 실천하게 하여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며 유교의 정교[政敎]이념을 백성들의 의식과 삶에 뿌리내리게 하고 나아가 이러한 교화를 시키는 것. 즉 유교 정치의 구현이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 초기 임금들의 고민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곳곳에 드러난다.‘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 모범적으로 실천하여 아래 사람이 본받게 되는 것을 풍화[風化]라 하고, 훈훈하게 쪼여 점점 물들게 하는 것을 교화[敎化]라 한다.’‘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륜을 두텁게 하고 풍속을 이루는 것뿐이다. 교화를 일으키고 풍속을 장려하는 방도를 의논하라’이는 지배층의 도덕적 영향력과 백성의 의식, 생활 습관이 지배층의 도덕적 영향력에 따라 형섬됨을 알려준다. 이처럼 교화는 지배층이 백성의 도덕적이며 백성은 제자라는 것이니 지배층이 백성을 훈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라. 타 교육기관과의 차이점1) 고려의 향교와 조선의 향교고려시대의 향교와 조선시대의 향교는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상호간의 큰 차이는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 설립된 향교는 그 당시 향학[鄕學]이라 불렸으며, 조선시대의 향교와는 달리 특정 지역에만 설치되어 조선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것들 외에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다.2) 서원과 향교우선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함은 서원은 ‘사학’이라는 것이고 향교는 ‘관학’이 라는 것이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유학의 소향을 갖추게 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 교육 기관이다. 반면 서원은 사림세력이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에 대한 교화라는 명분을 동시에 갖고 설립된 사립교육기관이다. 또 서원은 중국 선현은 배향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선현만을 배향하는 반면에 향교는 중걱 선현을 배향하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는 향묘의 방법, 관리 등용 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