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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한 리포트
    우리나라 문화 유산 탐구조선시대(朝鮮時代) 도자기(陶瓷器)조선시대 도자기는 크게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磁)로 구분된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퇴락한 청자를 모태로 하여 일신되었으나, 16세기 후반경에는 분청사기가 쇠퇴하면서 백자만 번창하여 이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외에도 청자·흑유·철채·철유 등이 있다.백자는 이미 통일말~고려초부터 만들어졌으나 고려백자는 유약이 떨어지기 쉬운 연질이었으며, 청자가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왕조 초기는 우리나라 도자사의 일대 전환기로서, 도자기의 제작 중심이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연질 백자도 경상도 일원에서 만들어지지만, 중국에서 등장한 치밀질 백자인 소위 추부백자의 영향으로 치밀질백자가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확산된다.전기 백자는 15세기에 만들어진 상품(上品)의 경우 대접·접시 및 병 등의 입술이고 바깥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항아리는 주둥이가 밖으로 말린 형태와 안으로 숙여 세워진 형태가 있다. 이들은 모두 동체의 선이 유연하고 유색은 담청을 머금은 백색으로 빙렬(氷裂)이 없으며, 두텁고 깊은 맛이 있다. 굽은 안정되고 단아하게 처리하였으며, 가는 모래를 받쳐 구웠다. 또 백토로 기형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우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투명한 장석계 유약을 씌워 구워낸 맑고 고운 푸른 색의 무늬가 있는 청화백자도 15세기 중엽부터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안료로 쓰이는 회청을 수입하였으나, 점차 수요가 증가하면서 도청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후기 백자는 17세기 후반이 되면 유색이 밝아지고 그릇의 입술이 내만한 새로운 기형이 나타나며, 굽은 집경이 좁아지는 등의 변화를 보인다. 18세기 초가 되면 수운(水運)이 편리한 우천강(牛川江) 하류인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 조선 최후의 관요(官窯)로서 분원(分院)이 자리잡게 된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백자는 병렬이 거의 없어지고 그릇의 두께가 두터위지며, 대접·접시류의 급 구운 토기는 굽는 과정에서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기 때문에 바탕흙 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붉은 색을 띠게 된다. 굴가마는 산이나 구릉하부의 경사진 곳을 이용해 굴을 파서 만드는데 토기를 굽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땔감을 충분히 넣어 둔채 입구를 막아 버린다. 그러면 가마내부가 환원상태가 되어 토기표면은 회청색을 띠게 되는데 삼국시대의 회청색토기는 전부 이 굴가마에서 구워진 것이다.경기도 연천 전곡리유적1978년 연천군 전곡리의 한탄강 강변 일대 현무암용암층(玄武岩鎔巖層) 위에 쌓인 황토대지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전형적인 주먹도끼(Acheulian Hand-axe)가 발견되어 알려진 유적이다. 출토된 석기로는 석영암이나 규암 등으로 만들 찍개류(외날찍개 양날찍개)와 주먹도끼(Hand-axe 또는 Biface)·가로날도끼(Cleaver)·사냥돌(Bola) 등의 큰 석기들과 소형의 긁개류(Scraper) 등이 있다. 특히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가 함께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석기의 형태가 아프리카 전기 구석기말의 아슐리안 후기문화의 주먹도끼와 유사하나, 황토대지 아래 기반층의 절대연대 분석결과 약 4만 5천년전으로 확인되어, 이 유적은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빙하시대가 끝나고 후빙기로 접어들면서 지질학적으로 충적세가 시작되고 한반도의 식생은 지금과 같은 낙엽활엽수림대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의 선사인들은 어로와 수렵·채집 위주의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도토리나 물고기·조개 등의 음식물을 요리하거나 저장하기 위하여 토기를 사용하게 된다. 울진군(蔚珍郡) 후포리(厚浦里)에서는 이 시기의 매장유적이 발견되어 사자(死者)에 대한 매장의식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 나온 숯을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 B.C.5170년 등의 연대가 나와 기원전 6천년기에는 한반도에서도 신석기문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문화내용상 신석기시대는 융기문과 압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先빗살무늬토기문화와 빗살무늬수하였다. 또한 안으로는 16관등제와 5부,5방제를 확립하였으며, 신라와 군사적으로 연합하여 한강유역의 영토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신라의 기습으로 한강유역을 잃게 되었다. 무왕(武王)대에는 왕권을 재정비하고 국력을 회복하였으나 의자왕()말기에 이르러 국정이 문란해지고, 결국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백제의 문화는 도읍(都邑)이 바뀜에 따라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한성시대(漢城時代:B.C.18~A.D.475)는 지금의 서울에 있는 몽촌토성(夢村土城)이 중심지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 외에 풍납토성과 석촌동, 방이동의 무덤들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석촌동에는 고구려식의 계단식 돌무지무덤(積石塚)과 토착적인 널무덤(土壙墓)이 다수 분포되어 있으며, 방이동에는 돌방무덤(石室墳)이 많이 있다. 출토유물로는 소량의 철제품과 화분모양의 토기, 단지, 세발토기 등이 대부분이며, 중국 도자기와 고구려식 토기가 출토된 경우도 있어 당시의 고구려,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웅진시대(雄鎭時代:A.D.475~538)에는 왕궁이 있던 공주의 공산성이 중심지였으며, 최근 발굴조사에 의해 건물터와 연못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무덤으로는 돌방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이 대표적이며, 특히 왕릉은 송산리에 집중되어 있다. 그 가운데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조사되어 다양하고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지권(買地券 ,땅을 다스리는 신에게 무덤으로 쓸 땅을 산다고 표시한 것)에 기록된 내용에서 무덤의 주인공과 당시의 장례제도 등을 알 수 있으며, 삼국사기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남조(南朝) 및 왜(倭)와 문화적으로 활발한 국제교류가 이루어졌다.사비시대(泗時代:A.D538~660)에는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시기로 부소산 남쪽에 왕궁을 마련하고 부여의 외각에 나성(羅城)을 쌓아 본격적인 도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정림사와 익산 미륵사 무덤에서 출토된 「梁官瓦爲師矣」의 문자전돌은 전돌의 제작에 있어서 양(梁)나라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고, 무령왕릉(武零王陵)에서 출토된 「○○士壬辰年作」 문자 전돌은 왕릉의 축조시기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한편 부여의 규암면 외리(窺岩面 外里) 유적에서 출토된 무늬전돌은 산수, 도깨비, 봉황, 구름,연꽃 등이 회화적인 수법으로 장식되어 있는 전돌로서 백제적인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품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부여(扶餘) 능산리(陵山里) 절터부여 능산리 백제시대는 사비도성(泗都城)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羅城,사직 제58호)과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사직 제 14호)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내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伽藍配置) 를 하고 있으며,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祈願寺刹) 또는 능사(能事)이다.목탑터는 이중기단으로 남쪽과 북쪽에 계단시설이 있다. 중심부의 삼초석 위에 명문(名文)이 있는 사리감(舍利龕)이 발견되어 축조연대 및 발원자를 알게 되었다. 금당터는 목탑터와 마찬가지로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5칸, 측면3칸이다. 강당터는 길이가 37m나 되는 거대한 집으로, 서실(書室) 내부에는 온돌시설도 있다. 그 형태가 고구려에 속하는 만주 집안(輯安)의 동대자유적(東臺子遺蹟)과 흡사하여, 양 지역간의 문화교류를 짐작케 해준다. 공방(工房) 시설도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제 3 건물터의 중앙방의 목곽수조(木槨水操)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발견 되었다.절터는 유존상태가 양호하여 삼국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건축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또한 목탑터에서 발견된 사리감의 명문에서 밝혀졌듯이 567년에 성왕(聖王)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660년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된 것으로 추측된다.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고·미술사 연구에 편년자료가 될 다양한 유물들며, 전국각지에서 우수한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출신도(道)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시험을 치러 입학하였다. 공주여자사범학교에는 심상과(尋常科)와 강습과(講習科)의 두 과정이 있었는데, 심상과는 4년간수학(修學)하는 정식과정이었으며, 강습과는 여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과정으로 수학기간은 1년이었다. 또한, 최신교육 이론을 적용하고 보급하는 학교로 부속 소학교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상과의 입학생 정원은 100명이었으며 이들은 전원 기숙사생활을 하였다. 한국전쟁 기간중에는 학교 건물이 소실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다른 학교의 건물을 빌려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공주사범학교 1951-1962광복 후, 대부분의 사범학교는 남녀공학제로 전환되었으나, 공주여자사범학교는 여자사범이라는 전통을 계승하여 여자사범학교체제를 유지하여왔다. 1951년 학제가 개편되면서, 공주여자사범학교는 중학교 3년을 마친 학생들이 입학하는 공주사범학교로 승격되었다. 공주사범학교는 병설중학교와 부속국민학교가 달린 사범학교(3년)이었다. 이 무렵 공주사범학교 입학생의 절반정도는 병설중학교 출신이었다. 공주사범학교는 공주여자사범학교와 마찬가지로 학비가 면제되고 졸업을 하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것이 보장되었으므로, 전국 각지 특히 대전, 충남지역의 우수한 중학교 졸업생들이 입학하였다. 1950년대 초, 중반기에 공주사범학교는 ' 새교육운동'에 앞장 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공주교육대학 1962-1982공주사범학교는 1962년 2년제 공주교육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18개의 사범학교가 있었는데 이들 사범학교를 모두 교육대학으로 승격시켜주는 것이아니라, 1도(道)1개 교육대학을 원칙으로 하여 사범학교 수를 줄이기로 방침이 세워졌다. 당시 충청남도에는 공주사범학교와 대전사범학교가 있었는데, 공주사범학교는 그 전통과 교육실적을 인정받아, 교육대학으로 승진되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 기구가 달라져, 대학의 부속기관으로 박물관, 과학교육연구소 등이 신설되었으며, 교수들의 연구 논.
    사회과학| 2016.11.21| 25페이지| 2,000원| 조회(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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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개의 찬란한 태양 서평 평가A좋아요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고이슬에게 태양이란맨 처음에 “찬란한 태양”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무엇에 대한 책인지에 대해 감이 안 잡혔다. 작가가 숨겨놓은 제목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이 책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라고 생각해서 천개의 찬란한 태양의 제목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태양은 찬란하다. 태양의 눈에는 모든 것은 찬란하고 말쑥하기 그지없다. 지상과는 멀고 먼 태양의 눈으로는 말이다.지상에는 태양의 ‘찬란함’도 고통스러운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이슬이다. 태양이 하늘의 정중앙에 뜨면, 이슬은 속절없이 사라진다. 이렇듯 태양의 찬란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체들도 있는 반면에 이슬과 같이 태양의 찬란함 앞에 사라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슬과 같은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비극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중에 작가의 말을 찾아보니 천개의 찬란한 태양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이름은 17세기 아프간에 살았던 시인 사이브 에타브리지의 카불을 노래한 시에서 가져온 이름으로,호세이니는 역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책은 고난의 삶을 살아온 아프간 여성들의 용기에 대한 헌사이며, 태양은 부르카 속의 그녀들의 진정한 인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태양의 의미를 설명했다고 한다.책을 읽으면서는 제 작년에 CNN에 보도되었던 코와 귀가 잘린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성이 떠올랐다. 시댁식구의 학대를 피해 친정으로 도망쳤다가 잡혀 남편에 의해 잘렸다는 것이었다. 어렸던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 때 봤던 사진 속 그 여자의 눈빛은 단단히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했던 그 표정에 그 여자가 살아왔던 시대의 모순, 아프가니스탄 여성으로서의 아픔, 슬픔, 절망 모든 것이 담겨있는 듯 했다. 한동안은 그 여자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가 내일이 아니니까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표정을 조금씩 지워나갔던 것 같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으면서 그 여자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찬란해야하는 그녀들의 이야기‘천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간의 두 여자 마리암과 라일라가 등장해서 그들의 삶에 대해 다룬다. 두 여자는 당시 전형적인 아프간의 여성을 대변하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 이 두 여자를 통해 우리는 아프간에서의 여성들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삶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전쟁은 사랑하는 사람과 집을 앗아가고, 탈레반은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다. 둘은 시대의 관습에 의해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마리암은 하녀가 낳은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결국 자신보다 30살이상 많은 라시드와 결혼하게 된다. 라일라는 사랑하는 티라크가 있었지만 자식을 위해 결혼을 결정한다. 처음에 그녀들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있는 사이가 된다. 터무니없는 폭력과 가난 앞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한 두 여자의 우정과 사랑은 감동적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삶의 행로를 결정한 마리암의 결심으로 라일라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라일라가 괜찮은 삶, 고마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의 찬란한 태양이 되어 벽 뒤에 숨은 마리암의 선택이 아름답다웠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나이 차도 많이 나는 두 여자가 연대하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참 인상깊었다.평생동안 한 배우자와 사는 것이 결혼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신중해야하고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해왔던 나이기에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해야 했던 이 책속의 마리아과 라일라, 나아가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의 조혼 풍습에 하루하루를 절망으로 살아가야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내 또래 친구들이 정말 안타까웠고 화났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의 한 커플이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피해 도망쳤다가 총살당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그 사례를 접하고는 처음에는 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정말 행운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아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매우 기본적인 권리이고 그 기본적인 권리조차 지켜주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이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행복을 추구할 권리조차 억압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현 정부인 탈레반의 악행에 대해 우리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너의 목소리를 들려줘“...그래서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 없이 견디잖니......”“단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것)이다.”아프가니스탄 여성의 무기력한 인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시드에게 있어 여성은 애완동물이나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두 부인을 때리는 장면이 나올 때면, 굳이 그 글을 읽지 않더라도 라시드의 행위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술술 넘어갈 만큼,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라시드의 행위에 진절머리가 쳐졌다. 그들을 지켜준다는 말은 단지 사탕발림 일뿐 사실은 그녀들의 하루하루를 치욕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내가 의아했던 점은, 그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성이 오히려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자신은 남편에게 오히려 보호받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라고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만 몰두하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책 속 아프간 여성들의 행동이 참 답답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아프간의 주위사람들의 평판에 유난히 신경쓰는 현실이 싫었다. 그러한 감정들은 마리암의 무지와 불가항력적인 그들의 사회 분위기에서 오는 것이지, 그로 인해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에 라일라 또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부분에서는 남성이라는 동물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성의 그러한 감정을 이용함을 느끼고 다시금 라시드의 교활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고, 인간의 이중성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일라와 마리암에게는 차도르를 강요하고 자신은 포르노잡지를 보는 장면에서는 라시드가 얼마나 모순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라일라의 딸과 아들을 차별하는 부분과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엄마로서 목소리를 내어 꾸짖거나 교육시키는 부분은 없고 쩔쩔매는 듯한 장면은 정말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작품 속 사건들이 피해자의 입장인 라일라와 마리암의 시선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악의 근원이 라시드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라시드는 여성을 천대하는 탈레반 체제 속에서는 평범한 남성 그 자체이다. 라시드는 이 책 속의 단순한 악인이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부조리함이다.결국 마리암이 탈레반체제 속 평범한 남성을 죽인 것과 둘이 힘을 합쳐 라일라가 마리암의 찬란한 태양이 된 것은 이 체제 속의 반항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된다.어느 사회에서나 이른바 기득권층이 권력을 가진 이가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답게 살 권리, 저항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기에 그러한 권력에 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도 그러한 권리 에 대해 “무기력한 인내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마리암과 라일라가 힘을 합쳐 보여주었던 체제안의 조그만 반항처럼 자신의 권리를 위해 외치는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인문/어학| 2016.11.21| 4페이지| 1,000원| 조회(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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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한국교육 문제의 역사적 근원 탐구
    저희 조에서는 한국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첫 번째로 입시 경쟁의 과열화로 인한 가치전도현상을 꼽았습니다. 자녀에게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오직 입시를 위한 공부를 시키다 보니, 어떤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토의했습니다. 두 번째로 교육자에 대한 교권추락에 대해 토의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스승에 대한 존경과 교육자의 사명감으로 비롯된 사제관계가 아닌, 계약중심의 인간관계로 변화하면서 생긴 것이고, 교사를 객체화한 교원평가제 또한 교사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었다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희 조는 이 문제를 교사와 제자와 학부모가 연대한 전인적 교육을 통해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암기식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의 창의적 사고력을 키우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고, 5지 선택중 하나를 고르는 능력만을 키워냈다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주 바뀌는 입시제도 때문에 학생들이 혼란을 겪고 어떻게 공부할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다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저는 저희조가 논의한 여러 문제 중에 현대 한국교육의 대표적인 문제로,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교사가 지식을 전달만 하는 일방향적 방식의 수업방식과 획일화된 평가방식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를 창의성이 결여된 주입식 교육 때문이라는 생각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며 가장 크게 다가왔던 점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살펴보면, 한국사회는 6.25 전쟁이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정부 및 시스템에 종속 되어야 했으며, 기업입장에서도 특정업무에 적합함을 판단하기 위해 다양한 평가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빠른 경제성장과 사회의 안정화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생존을 이유로, 기업은 성장과 효율을 위하여 평가중심의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렸다는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가 왜 다양한 평가보다는 획일화된 평가를 실시해왔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이후 우리의 부모님들께서는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녀의 교육에 매진했고, 우리의 교육수준은 많이 높아졌지만 교육환경은 많이 열악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교사의 설명 위주로 이루어지는 주입식이론교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학생의 수준과 개성에 맞는 체험적이거나 창의적인교육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한국교육이 왜 획일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일방향적 소통방식의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제가 생각한 이 문제의 해결방안은 첫 번째, 아이들의 각기 다른 개성과 적성을 존중하는 수업을 진행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초등학교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음악 미술 체육과 같은 예체능과목들을 잘하는 친구보다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주요과목을 잘하는 친구가 더 격려 받고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나이에 주요과목에 치중한 수업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정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은 나중에 커서도 기억 속에 중요하게 자리 잡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영수 뿐만 아니라 예체능에 대해 더 강화를 해 아이들의 다양한 재능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몇몇 중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자유학기제 또한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학기제는 중간ㆍ기말고사를 보지 않는 대신 토론ㆍ실습 수업이나 직장 체험활동과 같은 진로교육을 받는 제도입니다. 획일화된 목표를 위해서 달려야하는 입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제도인 것 같기 때문에 많은 학교에서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두 번째로는,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업이 아닌 아이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서 만들어나가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한 측면에서 교실에서 토론수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토론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를 대는 것 인데, 주장에 대한 근거의 타당성을 따지는 과정, 수집한 자료들 중 필요한 것을 선별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논리적사고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또한 토론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대의 의견을 잘 들어야 하는데, 토론을 통해 아이들은 적극적인 청자로 바뀌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 수업시간에도 아이들은 상대방의 의견에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면서 더 이상 수동적인 청자가 아니라 선생님과 같이 수업을 만들어나가는 학생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학| 2016.11.21| 3페이지| 1,000원| 조회(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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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24일 금요일
AI 챗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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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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