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후예를 읽고(현재를 살아내는 삶)1. 소설의 시대적 배경2. 줄거리3. 개인적인 감상1. 소설의 시대적 배경화랑의 후예는 1935년에 씌여진 작품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2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숭상하던 나라로 주변 나라들 심지어 중국 대륙을 모두 차지하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된 청나라까지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하던 나라였다. 조선이 몇 백년에 걸쳐 갈고 닦은 성리학의 학문적 성취는 대단했고, 이에 대한 자부심에 고취되어 고고하게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유자(儒者)의 나라” 가 조선이었다.하지만 그러한 조선의 자위적 세계관은 세상이 급변하면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변화 없이 고여 썩어온 기나긴 세월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위기였다. 서양의 철갑선이 거대한 화포를 싣고 조선의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조선의 지배층인 유자들은 더 굳게 문을 걸어 잠궈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나마 현실을 인식한 식자들은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안타까운 리더쉽의 부재 속에 조선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 하다 결국 일본의 식민지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살고 있던 ‘나’는 우연히 황 진사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시선으로 그 사람을 관찰하며 소설의 이야기가 전재되어 간다.2. 줄거리어느날 소설의 화자인 ‘나’는 숙부를 통해 황 진사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그는 60세쯤 되는 노인으로 뚜렷한 직업도 없이 그저 탑골공원에서 남의 관상을 보아 주는 것으로 소일하며 지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황진사를 통해서 슬픈 조선의 자화상을 소설 속에 그려낸다.황 진사의 본명은 황일재 이며, 충청도 출신이다. 그는 과거 정승, 판서를 많이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그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장난스럽게 황 진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진사’는 과거 소과에 합격한 이들에게 붙여 주는 명칭이었고, 소과에 합격한 이들은 과거의 본 시험인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 즉 진사는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황 진사는 장난이라도 진사로 불리는 것이 내심 뿌뜻한 눈치였다. 그는 과거 조선의 유자들이 보던 주역책을 끼고 다니며 ‘지략’과 ‘조화’를 운운하며 돌아다니는 인사였다.황 진사는 ‘나’와 알게 되면서 가끔씩 찾아와 당황스러운 언행을 보여준다. ‘쇠 똥 위에 개똥 눈 것’을 가져와서는 만병의 명약이라며 선물로 주기도 하고, 낡아 못쓰게 된 책상을 가져와 억지로 팔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려 했다. ‘나’는 그런 황진사가 한심스러웠다.'나'의 숙모는 황 진사에게 젊고 돈 많은 과부를 하나 중매하려 했다. 황 진사는 과부를 중매 해주겠다는 숙모의 제안에 펄펄 뛰며 화를 냈다."당찮은 말씀유……. 흥, 과, 과부라니 당치 않은 말씀을…….""황후암 육대 종손이유.""황후암 육대 손이 그래 남의 가문에 출가했던 여자한테 장갈 들다니 당하기나 한 소리요……? 선생도 너무나 과도한 말씀이유."결국 숙부가 나서서 황 진사를 타일렀다. 조선시대 내내 과부에게 가해진 불합리한 사회적 억압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던 시대였다. 황 진사가 과거의 관념 속에 얼마나 깊게 사로잡혀 있는 인물인지는 드러내 주는 일화였다.이 후 ‘나’의 숙부가 대종교 사건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나'도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나'는 감옥에 수감된 숙부를 면회하고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황 진사를 만났다. 황 진사는 '나'를 붙잡고 호들갑을 떨며 한쪽 구석에 불러 놓고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아, 이럴 수가……. 온, 내 조상이 대체 신라적 화랑이구랴!"
광해군, 개혁군주의 허상(광해군 비판)1. 선조는 무능했나?2. 재평가3. 서자 콤플렉스4. 편집증 정치5. 폐모살제6. 대동법7. 궁궐병8. 중립외교9. 폐주 광해1. 선조는 무능했나?광해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빠질 수 없는 문제적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 다. 선조에 대한 평가는 필연적으로 임진왜란과 연결된다. 그가 임진왜란 때 보여준 모습이 워낙 형편없고 비호감이었던지라 안타깝게도 선조는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우리는 그가 임진왜란 전 25년 동안 조선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조는 광해군보다 훨씬 유능하고 똑똑한, 정치를 꽤 잘하는 왕이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선조라는 인물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가버려서 밑천이 다 드러나게 되었지만 말이다.앞서 언급했듯이 선조가 즉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 무려 25년이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어떤 정치를 했을까? 당대의 신하였던 김성일은 선조에 대해서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는 왕"이라 평했다. 알다시피 요순은 고대 중국의 성군으로 잘 알려진 전설 같은 인물들이고, 걸주는 주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암군이자 폭군인 걸왕을 일컫는 말이다. 이 평가가 선조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면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과정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아들이 죽고 없었던 명종이 어느 날 훗날 선조가 되는 하성군과 두 형인 하원군, 하릉군을 궁으로 불렀는데 명종이 대뜸 익선관(왕이 쓰는 모자)을 벗어 한 번씩 써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두 형은 시키는 대로 썼는데 하성군은 신하가 어찌 왕의 관을 쓰겠냐며 극구 사양하고 쓰지 않았다 한다. 이를 본 명종이 하성군을 기특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광해군 일기에 실려 있다.선조가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빠르고 처신이 영민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아들이 없는 명종에게는 수많은 조카들이 있었는데 명종은 선조를 선택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원자가 되고 세자가 돼서 왕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수사로 말을 가려하지 못하는 성미였던 이이는 선조에게도 꽤 불편한 신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한번 이이를 파직시킨 후 그를 재등용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다른 신하들의 반발도 무마해 가면서 이이의 개혁을 지원했었다. 심지어 선조는 “나는 이이가 속한 붕당의 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이이는 속한 붕당도 없었다.)앞서 언급했듯이 선조가 즉위했을 무렵 이미 조정에 사림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어 파벌을 형성하는 붕당정치가 태동하기 시작했었다.선조는 이를 어떻게 관리해 나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조는 정치적으로 붕당을 잘 이용했고, 이를 통해 상당히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을 지켜갈 수 있었다.이렇게 잘 유지하며 이끌어 갔던 기간이 무려 25년이다. 당대가 태평성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선조 본인의 입장에서는 아주 무난하게 조선을 이끌어 나가면서 왕권을 향유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만 없었다면 선조의 재위기간은 아주 무난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올바른 정치가 아닌 술수, 공작으로 붕당정치를 이용해 신하들을 길들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경우도 선조가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붕당정치 하에서 선조의 통치 술수를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여립의 난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정여립이 모반을 획책했었는지는 아직도 설왕설래하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선조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고, 이 사건을 통해서 선조는 당시 왕권과 조선사회의 기반을 위협할 만한 인사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유명한 고승들, 명사들도 있었다. 그 유명한 정감록이 떠돌면서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던 조선사회의 불안요소를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잠재웠다.이 사건으로 정철을 위시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지만 정철이 세자책봉과 관련해 광해군을 추천하면서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선조는 무섭게 입장을 바꿔 정국을 반전 전쟁터를 누볐다. 당시 왕실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민심이반은 매우 심각해서 왕자들을 잡아서 일본군에 넘겨주는 일까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분조를 이끌고 사선을 넘나들던 광해군은 분명 존경받아 마땅한 세자였다.그렇게 모두의 기대 속에 광해군은 왕이 되었고, 15년간의 재위기간 끝에 반정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조는 명분에 사로잡힌 외교정책을 고집하다가 조선의 왕이 머리를 땅에 박고 항복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치욕을 경험하게 된다.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 내내 광해군은 폭군으로 남아있었다. 광해군은 1920년대 와서야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의 논문인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는 처음으로 광해군의 외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신채호 선생도 광해군 대의 집권당인 북인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왜 그 시점에서 광해군이 재평가 받기 시작했을까?일본의 광해군 재평가 작업은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가진 포석이라 할 수 있었다.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라는 글 자체가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려는 일본의 만선경영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또한 조선이 붕당정치의 폐해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민사관에 따라광해군은 그 희생양으로 이미지 메이킹 하기에 적합한 존재였다. 신채호 선생과 같은 당대의 역사학자들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했다.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이자 독립자주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연개소문보다는 연개소문에 의해 살해된 영류왕의 국제정치에 대한 안목을 더 높게 평가한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호전적인 무인의 기질을 가진 북인들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닐까?인조반정이 개인적인 원한과 정치적 탐욕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점에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하지만 광해군이 15년동안 유능한 국왕으성이 본래 그렇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태종도 세조도 다른 많은 왕들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혈육들을 죽였다. 결정적으로 광해군이 그들과 다른 점은 이 피바람이 본인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갈 때 이를 제어할 정치적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서자출신의 왕들은 광해군 말고도 얼마든지 많다. 그들 모두 정통성 노이로제로 인해 정치를 망치지는 않았다. 광해군은 영창대군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동복형제인 임해군도 살해했다. 그가 죽인 신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광해군 대 옥사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자주 일어났다. 광해군은 숙청작업을 통해서 권력을 강화해 나가고자 했겠지만 오히려 반대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다른 군왕들에 비해 정치적 감각이 매우 떨어지는 왕이었다. 결국 인조반정의 가장 큰 책임은 광해군에게 있었다.4. 편집증 정치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극심한 왕권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대북파 중 이이첨 일파들은 광해군의 불안증을 노골적으로 증폭시켜 나갔다. 광해군 초기부터 수많은 역모 모의 사건들이 발생하는 데 이 사건들 대부분은 과장된 허위성 고변에 불과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왕권 확립을 목적으로 이를 잔혹하게 처리했고, 이이첨 일당들은 옥사를 주도하며 권력을 강화하게 된다.문제는 이 과정에서 붕당 간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조는 인물들을 붕당에서 적절히 뽑아 적재적소에 쓰면서 붕당 간 균형을 잘 유지했고, 필요하다 판단되면 붕당 간에 싸움을 붙여 이를 통해 왕권과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노련함도 보였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정무적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왕이었다.그러다 보니 대북, 대북 내에서도 이이첨 일당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패악질을 일삼게 되었다. 소외된 세력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고 왕은 신뢰를 잃어 갔다. 붕당 간에 균형을 맞추고 양쪽에서 다들 왕의 눈치를 보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한쪽으로만 권력이 쏠렸고, 그렇게 권력을 강화한 일파들은 이제 오같은 존재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조선이 사회를 통제하는 카르텔이었다. 이런 조선에서 불효를 저지른 임금은 지배층 내부에서 벌어지는 암투에서 명분 상 매우 불리해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오로지 물리적인 힘으로만 권력을 지탱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광해군은 본인에게 정치적으로 전혀 유리할 게 없는 인목대비 유폐를 왜 강행한 걸까? 인목왕후의 친정 집안은 그리 내세울 게 없는 집안이었지만, 왕실과 혼인한 딸을 이용하여 상당히 거하게 부정 축재를 일삼았다. 또한 영창대군에 대해서 법도보다 과하게 입히고 마치 세자처럼 행동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광해군 입장에서는 인목대비가 탐탁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어머니인지라 처음에는 그냥 두고 보고 있었을 것이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축옥사가 벌어진다. 정인홍, 이이첨을 위시한 대북파가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단순 강도 사건을 영창대군 옹립 모의 역모사건으로 둔갑시켜서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목대비 친정식구들이 몰살당하고, 영창대군은 귀양을 갔다가 살해당하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대북파는 서인, 남인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강화하게 된다. 계축옥사는 대북파의 권력욕과 광해군의 편집증적인 의심병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그리고 이렇게 정권을 장악한 강경 대북파는 인목대비 마저 압박하기 시작했다. 권력의 속성 상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광해군 5년부터 이이첨 일파의 사주를 받은 폐모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당시 서인, 남인, 이이첨 일파가 아닌 대북, 소북, 왕실 사람들까지 이에 반대했었지만 광해군은 결국 광해군 11년 인복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광해군은 어떠한 입장이었을까? 처음 폐모상소가 올라온 시점부터 실제 강행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광해군이 직접 나서 논의 자체를 중단시키려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정치적 파장이 큰 일이었다. 광해군이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개인적 감정을 떠나었다.
모비딕을 읽고 (도전하고 실패하는 삶의 가치) 1. 소설의 배경 2. 줄거리 3. 해석들 4. 개인적인 감상 1. 소설의 배경 소설 은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신흥 공업국가였다. 미국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뒤엉켜 자신들의 생존과 욕망을 위해 분투하던 기회의 땅이었다. 그런 미국은 수많은 고래를 필요로 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주요한 기름인 석유는 19세기 말에야 개발이 이루어 졌다. 그때까지 고래 기름은 산업에 필수적인 요소였고 미국의 포경선들은 전 세계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렇게 신흥 공업국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래를 죽이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돛을 단 나무 범선으로 대양을 항해하며 고래를 잡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미국인들은 일확천금의 욕망에 이끌려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다. 소설 의 인물들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피쿼드 호에 승선했다. 2. 줄거리 작품의 화자가 “자신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해두자”고 말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꽤 낯이 익다.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과 첩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 이스마엘이었다. 그후 본처인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으면서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함께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권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추방자, ?겨난 자를 의미한다. 이스마엘은 다른 것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다로 나가게 된다. 은 소설의 화자 이스마엘이 포경선에 올라 이 항해의 목적을 알게 되기까지를 그린 부분,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항해 부분, 마지막으로 모비 딕과의 결투와 ‘피쿼드’호의 침몰을 그린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낸터컷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려던 이슈메일은 뉴베드퍼드에 묵게 되고 그곳에서 온몸이 문신이 가득한 강인한 남자 퀴퀘그와 만나게 된다. 그는 마지막까지 이스마엘과 함께 여정을 이어가는 인연이 된다. 이스마엘은 피쿼드호에 승선하게 된다. 그의 운명의 단짝 퀴퀘그도 그와 함께 배를 타게 된다. 배를 타기 전 일라이저라는 이름의 사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피쿼드호와 선장 에이허브에 대해서 부정적인 예언을 이들에게 들려준다. 이스마엘과 퀴쿼드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배에 올라 출항하게 된다. ? 피쿼드호에는 선장인 에이허브부터 일등항해사인 스타벅(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전문점 상호의 유래가 되는 이름이다), 이등항해사인 스터브, 삼등항해사인 플래스크가 승선했다. 그 밖에여러 역할을 나눠받은 선원들이 승선해있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큰 키에 성실한 사람이었고 피쿼드호에 오른 여러 사람들 중 가장 이성적인 인물로 보였다. 이등항해사인 스터브는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었으며, 삼등항해사 플래스크는 꽤 남자다운 거친 인물이었다. 에이허브는 화자인 이스마엘과 함께 소설 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다. 자신의 다리를 잃게 만든 모비딕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힌 에이허브는 선원 모두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에이허브의 분노는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만다. 태평양에서 펼쳐진 3일간의 대혈투가 이스마엘의 눈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마지막 싸움에서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 딕에게 던진 작살의 밧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끌려가고, 성난 모비 딕이 피쿼드 호를 들이받아 박살내며, 이스마엘을 제외한 전원이 바닷속으로 삼켜지고 이스마엘만이 구조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3. 해석들 3-1.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하는 해석 소설에서 이스마엘은 에이허브 선장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선원들에게 에이허브 선장은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판단력이 경도된 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자신과 성향이 아주 다른 인물들(가령 퀴쿼그)과 우정을 나누고 그들의 미신적인 종교적 관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또한 소설은 그의 사색들을 통해서 그가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에이허브와 완전히 다른 인물임을 계속 드러내 준다. 결정적으로 모비딕에 대한 에이허브와 이스마엘의 관점은 그 둘을 완전히 대비시킨다. 에이허브는 모비딕을 하나의 악으로 독단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타인에게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반면 이스마엘은 모비딕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사색을 시도하고, 모비딕의 온전한 의미에 자신이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림으로 그 의미의 다양성, 개방성을 수용하고자 한다. 당시 미국 사회는 수많은 인종과 문화와 사상들의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펄펄 끊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그 안에서 분출되는 수많은 갈등들에 대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가 이스마엘이 보여준 관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3-2. 에이허브를 중심으로 하는 해석 에이허브는 모비딕에게 큰 부상을 당해 불구가 되었다. 화자인 이스마엘은 그것이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는 모비딕에 대한 에이허브의 증오가 단순히 자신이 입은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더 복잡한 이유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이허브는 선원들에게 흥미로운 말을 한다. 그는 피쿼드호의 항해가 모비딕을 추격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 하면서 모비딕을 모든 가시적인 일들 뒤에 가려진 인간을 벽에 죄수처럼 가두는 그 무엇인가라고 말한다.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계속해서 에이허브는 “그 알 수 없는 것이 내가 증오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떤 비밀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는 존재로서 모비딕을 바라보고 이에 대한 증오를 나타낸 것이다. 모비딕은 바다에 존재하는 고래라는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닌가? 작가는 이 소설에서 모비딕을 단순한 고래가 아니라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비딕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모비딕을 미국이라는 사회가 극복해야하는 어떤 알 수 없는 벽으로 바라보면 하나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작품 곳곳에서 피쿼드호는 미국의 배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앞서 언급했듯이 심각한 사회 갈등에 직면해 있었다. 피쿼드호는 당시 미국의 정치적 장을 상징하며 그 안의 선원들은 미국의 국민들을 상징한다. 실제로 피쿼드 호의 선원들은 다양한 인종과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인원은 당시 미국을 구성하는 주들의 숫자와 같은 30명이었다. 피쿼드호는 미국 그 자체를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피쿼드호가 모비딕을 추격하는 그 항해는 미국이 극복해야하는 무언가를 향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4. 개인적인 감상 에이허브 선장은 저돌적이고 무모한 사람이다. 그는 모비딕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돌진했다.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부서져 버리는 결과를 맞게 되지만 그의 열정은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에이허브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모비딕에게 한쪽 팔을 잃은 ‘새뮤얼 엔더비’호의 선장은 에이허브에게 이런 말 했다. “놈을 죽이면 대단한 영광이겠지. 그건 나도 알아. 놈의 머릿속에는 귀중한 기름이 배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놈은 가만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야.” “나머지 팔은 절대로 주지 않겠어. 이제 흰고래는 딱 질색이야” 심정적으로 너무 이해가 가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움츠러들기 쉽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작가는 에이허브 선장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 거야. 천벌이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에이허브 선장은 앞에 놓인 벽을 부수기 위한 강렬한 도전의지와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이야기를 절정으로 이끌어 갔다. 비록 그 끝이 처절한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그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료해 보였다.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딕을 잡는데 실패 했지만, 실패 그 차체로서의 가치를 더욱 드러냈다. 새뮤엘 엔더비 호의 선장은 도전하지 않음으로 실패하지 않았지만, 실패하는 삶보다 도전조차 없는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단 한번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모비딕은 도전과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용기 있게 나아가는 삶을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1. 서문2. 20세기 전쟁의 시작3. 비스마르크의 시대4. 비스마르크 체제의 종말5.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6. 방아쇠 당겨지다7. 최후 통첩8. 발칸반도를 넘어서는 위기9. 공격우위의 신화10. 대전쟁의 시작1. 서 문1918년 독일은 처참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독일은 주요 군사저지선을 결국 지켜내지 못했고,독일의 국력으로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점점 명백해져 갔다. 군인들과 시민들은 기아상태로 내몰리고 있었다. 결국 빌헬름 2세가 독일 해군의 항명사태와 시민 혁명으로 퇴위하면서 독일제국은 붕괴되었다.11월 독일의 새 정부는 프랑스 콩피에뉴에서 협상국과 종전협정을 체결한다.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이렇게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매우 컸다. 1차 세계대전으로 1000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죽었으며 부상자, 실종자를 합친 숫자는 양측 합쳐 3800만 명이 넘는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명 손실이었다.유럽은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각국은 국내 총생산(GDP)의 수십 배에 이르는 전비를 소모했고, 승전국들은 이를 패전국에 뒤집어 씌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이후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커다란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승전국, 패전국 할 것 없이 유럽 전체를 지옥 속으로 밀어 넣은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정치체제를 수립하고 사회적,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유럽은 왜 정신이 혼미한 몽유병자처럼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을까? 그 흥미로운 과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2. 20세기 전쟁의 시작1905년 전 세계는 러시아의 충격적인 패배 소식을 마주하게 된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이 러시아를 꺾은 것이다. 대영제국을 압박하던 러시아 제국은 이렇게 고꾸라지고 말았다.반면 영국은 이 모습을 팔짱을 낀 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영일동맹의 실효성에 반신반의했지만 일본을 이용한 영국의 한 수는 적중했고 영국은 다시 경쟁자를 무너뜨렸다. 거의 100년에 걸친 그레이트가장 중요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라는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말처럼 독일은 러시아에 공을 들였다.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는 숙명적으로 양면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었으며, 이는 독일에게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을 비스마르크는 잘 알고 있었다.독일에게 영국도 매우 중요한 상대였다. 영국은 기본적으로 유럽대륙의 문제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했고, 조금 더 나아가자면 유럽대륙에서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중재자 역할 정도를 하고자 했다. 영국의 관심사는 오히려 유럽 밖에 있었다. 영국은 국가의 경제체제가 해외 식민지를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대영제국의 해군이 전 세계를 바다를 누비고 있었다. 한때 프랑스가 이들의 경쟁자였고, 러시아 제국이 영국의 패권에 대항했었다. 이제 영국은 경쟁자들을 꺾고 영광스러운 중립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비스마르크는 영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성공적으로 프랑스를 제압했던 보불전쟁에서도 프랑스의 해군이 해안을 봉쇄했을 때 독일의 해군은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진땀을 빼야 했다. 프랑스가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면 제법 고생을 했을 터였다. 하물며 세계최강 영국 해군이 해안을 봉쇄하며 독일의 목을 조인 상태로 프랑스를 상대해야 한다면 비스마르크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이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해주기만 한다면, 러시아가 독일과 가깝다면,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로 감히 전쟁을 벌이지 못할 것이었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독일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 독일과 러시아의 동맹관계는 아무래도 불안한 것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와 친밀해 지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또 다른 대비가 필요했다. 또한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소홀히 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프랑스와 가까워 진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양면전쟁(서, 남)의 위험이 있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장에서도 독일은 매우 중요한 동맹일 수밖에 없었는데 혼자 힘으로는 당시 최대 위협되는 발칸반도에서의 외교적 불안을 제어하며 프랑스에 대한 압박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신생 독일제국의 복잡한 상황을 뒤로하고 1890년 비스마르크는 수상직에서 해임되었다.독일은 비스마르크를 구시대의 유물처럼 한편으로 밀어냈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 들떠 있었다. 젊은 황제 빌헬름 2세를 위시한 독일의 팽창주의자들은 이제 독일의 패권의 영향력이 전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며 조국에 큰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 확신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와 대조적인 세계정치를 채택하며, 사모아, 키아우초우와 톈진 등을 식민지화했다. 빌헬름 2세의 용감한, 혹은 무모한 태도는 외교에 있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비스마르크가 사임한 1890년,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의 마지막 협조이자 평화였던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거부했다. 점차 악화되어 가던 러시아와 독일어권 사이 대립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이르렀고 결국 러시아는 1894년 프랑스와의 동맹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의 수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또한 독일은 영국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독일은 오스만제국에 접근하며 베를린과 바그다드를 철도로 연결하고자 했다. 이는 독일이 장기적으로 페르시아 만을 통한 아시아 진출을 노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영국은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이후 독일과 영국은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치열한 건함 경쟁을 벌여나갔다,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강국 독일의 도전에 영국의 불안은 가중되었고, 이제 영광스러운 고립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프랑스와의 대립 역시 점차 격화되어 갔다. 1904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고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1905년 빌헬름 2세는 직접 모로코의 탕헤르를 방문해 모로코가 주권 국가로서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며 제1차 모로코 위기(탕헤르 위기)를 촉발했다. 1911년에는 모로코 주민들의 반란에 프랑스군이 개입하자 독일이 이를 구실로 전함을 파견일과 동맹을 맺고 독일의 힘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다. 유럽에서 점점 고립되어 가던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렇게 독일은 자신도 모르는 채 대전쟁으로 이끌려 가고 있었다.6. 방아쇠 당겨지다1914년 6월 28일 오전 11시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주변국들은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급박한 상황 속에서 세르비아는 신속히 애도의 뜻을 표했고, 이번 사건을 개인적인 단순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르비아의 수상 파시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이념의 신봉자였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현실론자였다.그는 우선적으로 이미 여러차례 전쟁을 치른 세르비아를 경제적으로 회복시키고자 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정부는 군부 내의 극단적 민족주의 파벌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 사건에 세르비아의 군부 내 세력이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세르비아 정부의 발표와 별개로 세르비아 내 대중과 언론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자극하는 반응은 쏟아내고 있었다. 거리의 카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일격을 가한 행동을 기뻐하는 애국자들로 넘쳐났고, 일부 언론도 암살자의 행동을 영웅적 행위로 묘사하고 지지했다.파시치 수상은 8월에 전국적인 선거를 앞두고 있어 이러한 민족주의적 열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주저하고 있었다. 심지어 본인 자신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 불행한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세르비아인들은 분연히 일어나 조국을 지킬 것이라는 다분히 대중을 의식한 강성발언을 하기까지도 했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어떻게든 보복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강경파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있어서 세르비아는 범슬라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존재 자체가 거북스러운.7. 최후 통첩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훗날 윈스턴 처칠은 이 최후통첩에 대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례한 외교문서"라고 평가했다. 1914년 7월23일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문 가장 문제가 된 조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표자들이 세르비아 내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경찰, 사법권에 개입하겠다는 조항이었다. 이는 주권국가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렇듯 이 최후통첩은 사실상 전쟁을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최후통첩을 받아 든 세르비아 정부는 격론에 휩싸였다. 아무리 수치스러운 요구라 하더라도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정부는 답변서를 작성하기 전에 먼저 러시아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었다.세르비아의 서신을 받은 러시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러시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러일전쟁의 패배 이후 군사력이 약해진 러시아는 외부적인 압력에 계속 굴욕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다. 군대의 사기와 준비태세가 유럽의 강대국들에 대항할 수 없는 상태임을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많은 보강이 있었지만 아직 전쟁을 벌이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내부적으로도 불안이 계속되고 있었다. 1914년 상반기 최대 규모의 노동자 파업이 진행 중이었고 경제사정과 민심은 흉흉했다. 아직 러시아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계속 이렇게 밀려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지금 세르비아를 외면한다면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고, 러시아가 세상으로 나가는 관문인 보스푸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이 통제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굴욕적인 태도는 러시아를 평화가 아니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결국 러시아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단호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