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은 1607년 생으로 14대왕인 선조부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다양한 시대를 겪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약 3천 번의 이름이 등장하며,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 되었을 만큼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에 대한 많은 비판적인 안목이 있음에도 오늘날 그의 이름이 널리 전해진 것은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으로써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 보고서에서는 송시열의 행적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평가하며 그에 따라 조선에 미친 영향을 논하였다.조선과 주변국의 상황은 송시열의 행적과 업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먼저 인조와 효종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보내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승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왕조를 유지 할 수 있었기에 조선은 명나라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일본의 침략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만주지역에서 금나라가 건국되었고 중원에서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광해군은 명과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명의 은혜를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받았으며 이는 광해군이 쫓겨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조선 16대 왕)는 친명배금 즉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금나라를 배척하는 외교책을 펴는데 이때문에 후금은 1627년 조선에 대한 1차 침입을 하게 된다. 이때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하게 되지만, 청나라는 압박과 약탈 등을 하며 군신관계를 형성하려 함으로써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이 늘게 된다. 1636년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금은 조선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 맞춘 자기중심적인 사상 이였으나, 송시열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 중심의 사상이었다. 그 사상이 기반이 되었기에 송시열은 우리나라가 치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있어 매우 큰 슬픔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북벌이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한편 송시열은 효종과는 다르게 군사적인 북벌에는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어떻게 보면 혀로만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송시열은 조선이 힘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청을 정벌하는 북벌론이 아닌 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겨 의리를 지키고자 한 북벌론 으로도 볼 수 있다.대체로 삼강(三綱)과 오륜은 천지의 떳떳한 의리로서 사람이 사람다운 구실을 하고 나라가 나라다운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또 가장 크고 더욱 절실한 것이 있으니 이른바 ‘인(仁)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義)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임금과 신하 가운데 망극한 은혜를 입기로는 또한 우리 조정과 명나라의 사이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효종실록, 1657년 8월 16일 -다시 말해 정벌의 북벌론이 아닌, 청의 압박 없이 청과의 국교를 끊고 명을 섬길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길러 청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자는 제한적인 북벌론 이였다. 반면 효종의 북벌론은 군사력으로 청을 정벌하는 말 그대로의 북벌이었다. 북벌을 해야 소현세자와 그 아들 대신 자신이 왕이된 명분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기에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군비확장계획을 시행하며 원두표에게 국방정책을, 이완에게 그 실행을 맡겼다. 효종은 비상시에 필요한 인재는 문관이 아니라 무관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무관을 적극 등용하기 위해 관무재를 활용하였으며 영장제도를 부활 시켰다.상이 이르기를, “어찌 나라가 작다고 인재가 없겠는가. 우리 나라는 이제 만수전(萬壽殿)이 이미 완공되어 정성스런 효심을 폈으니 이제부터는 토목 공사를 일체 중지하십시오.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군사를 모집하는 것은 재물을 축내는 것이 아닙니까. 재물을 축내고 백성을 해쳐서 지나치게 사치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효종실록, 1657년 5월 13일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을 줄이고 민병을 활용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다. 즉 앞서 언급하였듯이 실제 준비보단 이념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을 생각한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었지만 효종과는 다르게 명분만 가진 북벌은 자신과 자신의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더 크게 사용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멸망하고 있는 명나라만 받들며 당시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청나라를 완강하게 거부한 행적은 부국강병을 위해 필요한 유연적인 외교의 부재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가 추구한 성리학적 측면에서는 명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이는 자신의 생각이 강했기에 국제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부국강병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예송논쟁에서는 송시열과 그에 대립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인 입지와 사심이 보다 잘 드러난다고 생각되어진다.예송 논쟁은 두 차례 일어났었는데, 예송은 예론이 정치 문제화하여 붕당간 논쟁이 일어난 사건이다. 결론적으로는 환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1차 예송은 기해예송으로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다. 조선 사회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인 경우는 3년상을, 그 이하 차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인 이 사상은 가부장 중심의 종법질서를 합리화 하는 것이고, 이 종법 질서는 왕가라 하여도 어길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논리에 근거하여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다 하더라도 인조의 둘째아들이라는 종법은 변할 수 없기에 1년상이 되어야 했었다. 반면 1년을 주장한 서인의 경우 사상적 종주는 율곡이이로써 상대론적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대론적인 사상을 근거하여 보면 비록 장자가 우위에 있다는 종법은 변하지 않지만 이는 때에 다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3년상이 될 수도 있다. 왜 이처럼 반대되는 견해를 보였는지 생각해보면 이 당시의 서인은 왕통의 종법적 지위마저도 새로 확정지을 만큼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집권당 이였기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남인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야당이기에 막강한 신권에 불만을 느끼는 왕을 자신들의 당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3년을 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왕권을 인정함으로써 왕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허목 등의 갈등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결과로 [경국대전]에 장차와 차자의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하는 규정에 의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면서 서인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다. 1차 예송은 후에 2차 예송의 빌미가 되는데 2차예송은 갑인예송으로 1674년에 일어난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1차 예송에서 장자, 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나 인선대비가 죽으면서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 이유는 효종을 차자로 보면 9개월인 대공복이고, 효종을 장자로 보면 1년인 기년복을 입어야하기 때문이다.이 때 서인은 1차 예송과 마찬가지로 효종을 차자로 다루어 대공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장자로 다루어 기년복을 주장하였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기년복으로 하였다가, 대공복으로 바꾸었다.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재 복제(服制하는 것이 도리어 물고·아약과 인족(隣族)의 수보다 여러 갑절이 될 것이니, 나라에서는 사방에서 원망을 더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숙종실록, 1677년 12월 14일 -앞서 언급하였듯이 예송 논쟁을 이념논쟁으로도 볼 수 있지만, 논쟁에서 이기냐 지느냐에 따라 권력의 주체가 바뀌기에 이념논쟁을 넘어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느껴진다. 즉 예송은 성리학적 이념논쟁을 초월하여 정치적 대립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정치 논쟁이 성향을 더 드러낸다고 생각되어진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1차 예송에서 이들은 그들 당파의 철학적 견해와 상반되는 주장을 하였고, 2차 예송에서의 대립을 통해 이들의 주장이 순순한 예로써의 견해가 아닌 송시열과 허목 등 각각 소속된 당파의 이익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 뿐만은 아니겠지만 예송논쟁에서 보듯 송시열은 당의 이익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후에 장희빈 소생의 왕자가 원자로 책봉되는 것을 막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자신과 의견이 다른 남인 소생 여인의 아들이 원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여 자신과 당에 정치적으로 유리하게하기 위함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숙종의 미움을 사 유배를 가게 되고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지난해 11월 초(初)에 지금의 영상(領相) 신(臣) 김수흥(金壽興)이 글을 급히 신에게 보내어 알리기를, ‘후궁(後宮)에 왕자(王子)의 경사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일전(日前)에 매양 같이 근심하던 일이므로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속히 알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쇠약하여 정신이 혼몽하고 귀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저절로 기쁨에 넘쳐 입이 벌어졌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저으기 듣건대, 제신(諸臣)중에서 위호(位號)가 너무 이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철종(哲宗)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가왕(嘉王)·기왕(岐王) 두 왕의 혐핍(嫌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