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조선왕조실록 기반)
- 최초 등록일
- 2016.12.05
- 최종 저작일
-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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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송시열은 1607년 생으로 14대왕인 선조부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다양한 시대를 겪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약 3천 번의 이름이 등장하며,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 되었을 만큼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에 대한 많은 비판적인 안목이 있음에도 오늘날 그의 이름이 널리 전해진 것은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으로써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 보고서에서는 송시열의 행적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평가하며 그에 따라 조선에 미친 영향을 논하였다.
조선과 주변국의 상황은 송시열의 행적과 업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먼저 인조와 효종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그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보내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승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비록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왕조를 유지 할 수 있었기에 조선은 명나라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일본의 침략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만주지역에서 금나라가 건국되었고 중원에서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광해군은 명과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명의 은혜를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받았으며 이는 광해군이 쫓겨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조선 16대 왕)는 친명배금 즉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금나라를 배척하는 외교책을 펴는데 이때문에 후금은 1627년 조선에 대한 1차 침입을 하게 된다. 이때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하게 되지만, 청나라는 압박과 약탈 등을 하며 군신관계를 형성하려 함으로써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이 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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