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특강들어가는 말1592년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촉발된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 만주의 여진족이 얽혀들었던 국제전의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다. 전 국토에 대한 약탈 파괴가 자행되었으며 국가의 공적 체계가 일거에 무너졌을 정도로 전쟁은 참혹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고,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임진왜란이 남긴 후유증 가운데 주목되어야 하는 부분은 포로에 대한 문제이다. 10만 이상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가 가족과 고향을 등져야 했던 상황은 조선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임진왜란은 무엇인가? 이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산도 대첩, 최근에 주목받은 ‘명량’이라는 영화 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역사를 볼 때 영웅과 역적, 적과 아군 그리고 남성들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남겨진 아픈 흔적, 힘없는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연구 자료는 비록 적지만 현재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여성포로인 오타 줄리아에 대하여 관련된 사건을 통해 어떠한 부분을 반성해야하며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기억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겠다.2. 소녀포로, 오타 줄리아1) 오타 줄리아, 이 여성은 누구인가?오타 줄리아(?∼1651)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그 곳에서 순교한 조선인 동정녀(童貞女)다. 오타(大田)는 일본식 성(姓)이고, 줄리아는 세례명이다. 그녀의 가문에 대해 다양한 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왕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나이도 정확치 않다. 일본에 포로로 끌려갈 당시 어린 나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줄리아는 임진왜란 때 천주교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四行長)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간 뒤, 고니시 부부에게 입양되어 어려서부터 양 어머니 유스티나의 종교적 교육을 받아 성장했으며, 예수회 선교사 모레혼(Morejon)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수도자에 비견될만큼 청정한 생활을 했다.1600년 양부모가녀로 들어갔고, 그 뒤 도쿠가와의 천주교 박해령으로 일본 내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당하게 될 때 줄리아도 도쿠가와에게 배교(背敎)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목숨을 버리면 버렸지 신앙은 버릴 수 없다며 끝내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21세 때인 1612년 유배형을 받아 오오시마(大島), 니이시마(新島)를 거쳐 그해 6월 절해고도인 고즈시마(神津島)로 유배됐다.고즈시마에 도착한 줄리아는 양 아버지 친구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후손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어렵게 생활했으나 항상 극기와 인내,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는 40년간의 긴 유배생활 끝에 고즈시마에서 독실한 신앙인이자 한국의 딸로서 순결을 지키며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그녀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앙생활에 충실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남몰래 양식도 많이 나누어 주었다. 특히 유배 40년 동안 10여 가구의 고즈시마 주민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 한국 재래 농사기술과 생활의 이기(利器)를 한국식으로 만들어 전하기도 했다. 그녀는 사후에도 ‘신앙을 가진 완고한 조선여인’으로 섬사람들에게 기억되면서 300년 넘게 섬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졌다.2) 오타 줄리아의 묘토 환국(還國), 어떻게 추진됐나지난 1971년 고즈시마에서 ‘제2회 줄리아제’가 열렸을 때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이듬해 72년에는 지학순 대주교와 박희봉김옥균양병묵 신부가 동경교구장 사로야나기(白柳) 주교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줄리아 묘지에서 기념미사를 가졌다. 이때 고즈시마섬 마쓰마도(松本一) 촌장과 주민들이 줄리아가 이제라도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동남아관광 길에 줄리아 묘토 일부를 한국에 가져다주겠다는 취지를 전하자, 한국 천주교측에서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환국이 급물살을 탔다.오타 줄리아의 환국은 1972년 10월26일에 이뤄졌다. 마쓰마도 촌장, 아오키 시즈오(靑木靜男) 동경교구 선교담당 신부 등 묘토 봉송단 30여 명은 NWA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입가 생전에 많이 거닐었던 바닷가의 조약돌 5개, 묵주 한 개가 들려 있었다. 조약돌이 5개인 까닭은 줄리아 묘지에 찾아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던 다섯 할머니를 상징한 것이었다.묘토는 곧바로 절두산순교박물관 기념광장(현 야외전시장)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지학순 대주교 등 한국 천주교측에서 나와 기다렸으며, 봉송단으로부터 묘토를 인계 받아 김대건 동상 왼편에 마련된 유택(幽宅)에 정성스럽게 안장했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환국 추진 배경이라고 생각된다. 일본 주민들이 줄리아가 고국 땅에 묻히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묘토 일부를 한국에 가져다주겠다는 취지를 전한 것이다. 만약 일본 주민 측에서 환국할 의사가 없었다면 한국에 과연 올 수라도 있었을까? 다음 기사를 통해서 환국한 뒤 우리나라는 오타 줄리아에 또 한번 어떤 상처를 입혔는지 살펴보겠다.3) 환국한 고국 땅에서 사라져버린 오타 줄리아 묘토『줄리아의 묘토(墓土)는 고즈시마에 있는 줄리아 묘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환국 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순교박물관 기념광장(현 야외전시장) 김대건 동상 왼편에 안치됐으며, 생애가 기록된 묘비석도 세워졌었다. 당시 줄리아의 환국행사가 워낙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됐고, 영화제작에 소설까지 출간돼 일반인은 물론,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도 아직 성녀 줄리아를 기억하고 있고, 줄리아의 묘가 야외전시장에 그대로 안장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런데 지난 3월 절두산순교박물관 취재과정에서 오타 줄리아의 묘비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됐으며, 순교박물관 한 관계자로부터 “누가, 언제, 왜 없앴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답변을 듣고 미스터리에 빠졌다. 단지, 묘지가 사라진 때를 모 언론에 소개됐던 지난 2007년 5월 이후로 추측할 뿐이다. 줄리아의 묘지를 철거했다면 분명 박물관측의 인지하에 집행됐을 텐데,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뒤늦게 천주교 서울대교구측으로부터 답변이 전해져 왔다. 80년대까지 일본 천주교 동경대교구와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각각 오타 줄리아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줄리아는 시복된 적이 없으며,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본 고즈시마에 있는 줄리아 묘도 정확치 않다는 것이었다. 절두산성지에 있던 줄리아 묘는 동경대교구의 요구도 있어 2000년 이전에 철거했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의 ‘윗분’만 아는 선에서 줄리아의 묘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한국 천주교는 줄리아 묘를 철거한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하며,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한국이 오타 줄리아를 임진왜란에 이어 두 번 죽이는 꼴이 된다.』 발굴취재-절두산순교박물관 순교자묘지 ‘증발 미스터리’http://wrn2991.blog.me/50087490100위 내용은 세계종교신문 제17호에 게재된 기사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포로가 되어 끝내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오타 줄리아, 그 소녀포로의 묘토를 한·일 두 나라 천주교의 협력으로 환국했지만 끝내 명확한 이유도 없이 천주교 서울교구측에 의해서 철거된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부끄러운 역사를 또 다시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환국할 당시에는 환영을 받으며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됐고, 영화제작에 소설까지 출간되기도 하였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철거된 사건에 대해서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인터넷 기사나 자료를 찾아보아도 환국했다는 기사는 남아있지만 어떠한 이유로 철거되었는지 정확한 사실을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한 외국기자가 사라진 오타 줄리아의 묘를 취재하기 위해서 절두산 박물관에 가서 묘토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책임자는 지금도 창고에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창고에 보관할 목적으로 묘토를 환국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줄리아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역사는 있는 그대로 알리고 기록돼야지 감춰서는 안 될 일이다. 오타 줄리아가 조선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평범한 인물이라도 그 자체로 재평가하면 될 일이지, 죽은 자를 놓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최만으로 오타 줄리아의 묘를 철거하였다면 정말 깊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일본이나, 전쟁을 겪은 후 자신들의 백성들을 잃고 나서 희생자들을 기억하기는커녕 환국한 묘토를 창고에 보관하는 우리나라와 무엇이 다른가. 힘없는 백성들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는 양국 모두 똑같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일본 백성들의 마음이나 조선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한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 백성들이나 조선의 백성들은 서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을 통한 피해는 온전히 하층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것을 그들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4) 오타 줄리아와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한 제주4.3사건오타 줄리아와 같이 힘없이 희생되었던 피해자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생각해보니 가장 최근에 기억되는 사건이 있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정권 때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제주 4·3사건에 대해 제주에서 정부 차원의 사과를 했다. 이는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동시에, 억울한 국민의 아픈 상처가 대통령에 의해 회복되는 대사건이었다. 제주 4·3사건의 본질은 이승만 정권 때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정치권의 분열과 제주도에 가해진 폭정, 그리고 서북 청년단의 무자비한 폭력과 약탈이 만들어지면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제주 4·3사건 때 3만여명의 피해자들 중 33%가 힘없는 노약자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빨갱이로 몰리면서 처량하게 학살되었다. 이 부끄러운 사건을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는 것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당연히 해야 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같다.
기억의 습작-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으로 살펴본 왜구의 문화재 약탈-이름:학과:학번:번호:제출일:한국사특강도진순 교수님1. 너의 의미“약탈당한 것이 내 것이면 무조건,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이 가져와도 되는 것인가?”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신 이 한마디가 기억의 습작을 하게 된 계기였다.‘왜구’란 무엇인가? 영토나 정치·외교적인 의도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납치하거나 경제적인 재원, 대표적으로 문화재를 약탈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일본과 중국인 그리고 고려, 조선인들도 포함되어있는 다국적 구성 집단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약탈한 문화재는 대부분 환수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일본에 있으며 그 결과로 다수의 고려, 조선의 불교 문화재가 전래된 것을 볼 수 있다.과거에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약탈당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환수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환수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문화재가 그것을 증명해 주듯이. 그러나 최근에, 왜구에 의해 약탈당했던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우리나라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약탈문화재가 다시 우리나라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절도범들에 의해 돌아오게 된, 이것은 ‘환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환수(還收): 도로 거두어들임.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절도범들에 의해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왔다는 것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했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러운 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잡고 보존하는 것을 우리들의 빛나는 미래의 원동력으로 삼아 이를 소중히 여기고 역사를 알아 나갈 때 더욱 밝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재는 각자 제자리에서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더욱 가치 있고 빛날 수 있다. 하지만 절도범들에 의해 돌아오게 된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더욱이 악화시킨 것 같기도 하다. 그로 인해 왜구에 의한 약탈 문화재 ‘환수’ 문제가 불상 ‘반환’ 문제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이 뒤바뀐 듯한 이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든다.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아이유·김창완 ‘너의 의미’」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어떠한 것이고, 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2. 금동관음보살좌상의 반환과 그것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부석사에서 일본 대마도 관음사로 옮겨진, 고려시대 후기에 제작된 문화재다. 객관적인 자료로서 아주 중요한, 이것이 약탈을 당했다는 증거는 존재하는가? 일본 관음사에 정당한 교류에 의해서 건너갔다면 반드시 있어야 할 복장품은 그 어디에서도 이 불상이 옮겨졌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것은 약탈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복장품 조사를 통해 대마도 관음사에 소장되어 있던 이 좌상이 1330년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부석사에서 현세에 재난을 없애고 복을 누리며 내세에 아미타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30여 명의 발원에 의해 주존불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지기도 하였다.약탈 문화재인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2012년 10월 6일 김씨 등 4명은 대마도의 관음사에 침입한 뒤 불상을 훔쳐, 그해 말 마산의 어시장에서 판매하려다 덜미가 잡히면서 세간에 드러나게 됐다. 골동품 상가를 중심으로 100억원 대의 국보급 문화재를 20억에 판다는 소문이 돌았고, 경찰과 문화재청 역시 훔친 문화재를 판매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아 수사에 나서면서 결국 범인들은 사건을 수사한 지 약 두 달 만에 체포됐다.일본 정부는 이에 불상 반환을 요청하였지만, 부석사는 불상 반환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하였고, 민사부는 부석사의 가처분 신청을 수용하여 “불상을 보관하고 있던 대마도 관음사가 이 불상을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것이 재판에서 확인되기 전까지는 국가는 부석사가 위임하는 집행관에게 불상을 인도해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이 결정에 따라 최종 판결 시까지 불상을 일본에 반환할 수 없게 되었고, 현재 이 불상은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가처분 효력이 3년 기한임에 비추어 그 안에 한국과 일본 양측의 합의를 통해 불상을 일본에 반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왜구의 약탈에 의한 불상이라는 주장의 학계와 불교계를 중심으로 대립되고 있다. 도난과 약탈이라는 두 가지 범죄가 얽힌 이 불상의 처리를 위한 국제법도 없고 비슷한 이전의 사례도 거의 없었다. 절도에 의해 반입된 문화재는 반환해야 한다는 국제규약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한국과 일본이 가입하고 있는 ‘유네스코 불법문화재 반환협약’은 1970년 이후 도난을 당했거나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규정하고 있다. 반면, 약탈된 문화재의 경우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천명된 ‘전시 약탈문화재 반환 원칙’이 관습법으로 굳어져 가며 19세기 이후 전시 약탈된 문화재가 일정부분 반환되어 왔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수백 년 전 약탈당한 문화재에 적용할 국제법이나 국제관례는 없다.그런 점에서 부석사 불상의 처리를 국제규약 등 관련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은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현행법에 따라 부석사 불상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포한 것으로 부석사 불상을 단지 도난문화재라는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다. 이 입장에 따라 불상을 반환한다면, 부석사 불상이 일본에 전래된 경위를 둘러싼 역사적 상황을 학문적으로 보다 깊이 논의하고 연구할 수 있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단 불상을 돌려준 다음에는 불상이 야기했던 문제의식이 불상과 함께 실종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적 물증으로서 문화재의 일차적 가치를 저버리는 우를 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중도적인 입장에서는 명백한 약탈의 증거가 없는 한, 일단은 돌려주고 약탈문제는 별로 다루어야한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이 입장에 따르더라도 반환에 앞서 명백한 약탈의 증거가 무엇이며 그 증거는 어느 정도이면 충분한지를 규명하고 입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단 불상을 돌려준 다음에는 일본 측이 약탈논의에 냉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약탈 문화재이므로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도 많다. 우선, 약탈을 입증해야 하며, 약탈된 것으로 확실히 입증되었다 해도 그 입증만으로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수백 년 전 약탈된 문화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국제법규나 관행이 없기 때문이다, 약탈의 입증 여부와 반환문제는 직접 관련이 없다.
Les Miserables- 하나님의 피조물 -史학과20130122신은화처음에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다고 해서 2012년에 휴 잭맨이 출연했던 작품일 줄 알았다. 그래서 “오! 보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다가 어두침침한 화면과 리암 니슨의 젊은 시절을 보고 “아.. 그 전의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1998년 ‘빌 어거스트’ 감독의 이 영화는 32번째로 영화화된 고전이다.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소설, 그 이상으로 TV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뮤지컬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도 어릴 적 “장발장”으로 나온 동화책이나 그의 이야기를 다룬 칙칙한 화면의 영화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신부님이 촛대마저 내주는 장면, 장발장이 수레에 깔린 사람을 구해주기 위해 힘을 쓰는 장면, 자베르를 살려주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이처럼 같은 작품이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지는 힘은 어디일까.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호소하는, 그리고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독자에게 안겨주는 원작의 힘 때문일 것이다.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프랑스의 대 문호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인 이다. “빅토르 위고”의 머릿속에 이라는 것이 떠오른 것이 1829년쯤이었고 이 이야기가 완전히 완성된 것이 1862년이니 3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대하소설인 것이다.이 소설이 1862년 4월에 전10권으로 파리와 룩셈부르크에서 동시에 출판되자 위고의 명성은 전 세계에 드높이 퍼지게 되었으며, 지난 세기 동안 거의 모든 나라에 번역되어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며 이 이야기 속에 깃들여 있는 평화와 자유와 정의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첫 장면에서 어딘가 더러워 보이는 옷에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리는 듯이 어두운 곳에 앉아 있던 한 청년, 그는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 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이었다. 그는 먹을 것을 조금 얻기 위해 한 신부의 집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훔쳤지만 신부의 자비로움에, “새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했다.사람이 한순간에 변한다는 것은 쉽지도, 흔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며칠 사이에도 변화가 생길 만큼, 신부가 그에게 베푼 자비로움은 나에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특히나 감옥에서 막 출소한 다소 거친 그는 신부에게 자신이 범법자이며 살인자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신부의 반응은 담담했다. 이 장면은 어떻게 보면 신부와 장발장이 말장난을 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웃긴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범법자라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도 없을뿐더러, 다시 그 이전처럼 돈을 벌고 일반 사람들처럼 먹고 사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단순 도둑질에도 아주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시기에, 살인자라고 주장하는 장발장을 보고도 담담한 신부의 태도는 나로써는 매우 놀라웠다. 요즘같이 많이 개방되었다고 하는 시대에도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장발장의 대사를 빌리자면, 신부는 “당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오.”라는 말을 아주 단적으로 드러내는 태도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관대함을 베풀어야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비록 살인자라도.새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한 후, 장발장은 파리로 떠나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방직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러다 그가 관리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판틴이라는 여성이 창녀라는 소문을 듣고 공장에서 쫒아내었다. 하지만 그 후 우연한 사건으로 그녀와의 오해를 풀게 되고,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느끼던 그는 그녀에게는 코제트라는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장발장은 끊임없이 자신을 쫒던 자베르의 의심으로 인한 재판이 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억울하게 장발장으로 의심받는 사람을 보고 자신이 장발장임을 자백하여, 다시 자베르에게 쫒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시 한번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곧 판틴은 병으로 앓다가 죽게 되었고, 유언으로 코제트를 장발장에게 맡겼다.파리로 향하던 장발장은 어느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코제트를 만나게 되었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양육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베르에게 쫒기면서 함께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 도착한 장발장은, 그가 방직회사 사장으로 있었을 당시 목숨을 구해줬던 수도원장의 수도원으로 가서 10년 동안 지내었다. 이 기간 동안 쟈베르는 장발장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10여년이 지나자 장발장은 숙녀로 성장한 코제트와 함께 수녀원을 나와 새 삶을 시작하였다.그러다 우연히 코제트는 연설 중인 마리우스를 만나게 되었다.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마리우스는 자베르에게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곧 코제트도, 동시에 그녀를 돌보던 장발장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베르는 코재트의 아버지, 곧 장발장에 대한 강한 의문을 품기 시작하며 그의 집을 수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장발장과 코제트는 도주를 한 이후였다.마리우스 집단의 혁명 전날,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만나는 순간 이를 습격한 자베르는 오히려 역으로 마리우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자베르가 마리우스에게 사로잡혀 아지트로 끌려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본 장발장은 곧장 마리우스의 아지트로 갔다. 마리우스의 아지트에 도착한 장발장은 포박된 자베르를 처형하려는 마리우스를 말리며 자신이 처형하겠다고 말하며 쟈베르를 골목으로 끌고갔다. 여기서 정말 놀랐다. 몇 십년을 자베르 때문에 쫒기며 살았고, 잡히기만 한다면 곧 죽음이다. 하지만 장발장은 허공에 총을 쏘며 자베르에게 '자베르 넌 죽었다.' 고 말하며 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