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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웹툰 <겟백>에 나타난 신자유주의 - 폭력의 연쇄와 해방
    웹툰 <겟백>에 나타난 신자유주의 - 폭력의 연쇄와 해방
    : 폭력의 연쇄와 해방을 중점으로신자유주의 체제가 대두한 이후, 사회의 변화 속도는 급류를 탔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 시장의 유연화에 성공했고, 그에 따라 노동이 가진 의미가 변했다. 이전의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숭고한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현대의 많은 이가 노동에서 가치를 찾는 것보다는 그 노동이 낳는 화폐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사회에서 자본가 계층은 노동자 계층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환경에 놓였으며, 노동자 계층은 언제든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영리한 자본가 계층은 이를 파악하고, 노동자 계층 내에서의 분열을 유도했다. 그들의 시도는 성공했고, 노동자 계층은 그 근저에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자본가와 싸우지 않는다. 노동자의 적은 노동자가 되었다. 자본가에게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채찍질하는 삶이 도래했다. 이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선대는 후대에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공포를 전염시켰다. 그리고 이는 사슬처럼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다.이러한 사회에서 능력이라는 함은 자본가에게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이 있는 이들을 인재라고 부르며, 그중에서 특출난 이들을 천재나 영재, 수재라고 부른다. 현대의 교육은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사회는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방식으로 끝없는 경쟁을 채택했다.현재의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인간이 아닌 ‘인적자원’이다. 자본가가 운영하는 기업에 필요한 부속을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은 농사에서 작물을 골라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부에게 상품 가치가 없는 식물은 ‘잡초’이듯, 현대 사회에서는 ‘인적자원’으로 활용성 있는 이만이 의미가 있다. 즉, 이전까지 뒤처진 이들에게 내밀어지던 온기의 소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시장 숭배적인 사회 분위기와 결합하여, 공동체를 파괴하고 개인의 타락을 야기했다. 챈 철수가 문을 열고 다정을 구한다. 직후, 원장이 보일러실에 들어가 전등을 켜는 와중에 스파크가 튀며 누출된 가스와 결합해 화재 사고가 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먼저 이 ‘담록원’이라는 기관을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다. 이곳에서 매겨지는 급수는 1급에서 7급까지다. 7급이 되면 퇴출당하며, 그룹 차원에서 신원을 말소하기에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퇴출된 아이들은 원래 있던 보육원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데, 이 또한 갑인 영성 그룹에서 을인 보육원에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엔론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를 확장하여 사회에 적용했을 때, 담록원은 학교가 아닌 기업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내는 성적은 직원이 내는 성과와 동일하며, 급수와 그에 따른 대우는 성과에 대한 보상과 같다. 그리고 담록원에서의 퇴출은 해고와 동일시된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해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이직의 가능성도 있고, 다른 분야로의 진출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여유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전 세계적으로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1명의 노동자가 곧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는 직장에서의 수입이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물론, 사회에는 해고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간극을 줄이고자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갑작스럽게 생겨난 잉여 인력을 활용하려는 방안이며,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유예된 기간에 다시 취업하지 못한다면, 결국 사회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서의 퇴출은 갑의 권력이 작용한 것이다. 현실에 적용해보자면, 취업 요건을 제한하거나 업계에 부정적인 소문을 돌린 것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갑의 행사에 무력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점에서 은 사회에 만연하는 폭력과 그 앞에 무력한 개인을 잘 드러냈다고 사료된다고자 한다.먼저, 작품 속에서 자본가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염계식과 윤건, 윤환에 관해 다루려 한다.언급한 세 인물은 자본가의 굴레를 보인다. 윤환은 초기 자본가로 나타나며, 이후 자본가 계층이 가진 노동자 계층에 대한 인식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윤환이 담록원을 만들며 했던 대사를 종합해보면 이들은 노동자 계층을 사람이 아닌, 자신들의 자본 축적을 위한 도구로 본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에서 직업학교와 특성화 학교로 나타난다. 자본가 계층은 신자유주의의 유연함 아래 포스트 포디즘에서의 전문화된 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전문인력은 성인 이후에 기술을 배우기에, 키워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이에 어렸을 때부터 바로 쓸 수 있는 인력을 만들어내는 곳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것이 지금의 특성화 학교와 직업학교다. 이들은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인력이며, 그 공급이 항시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윤환이 설계한 담록원과 크게 닮아있다. 즉, 윤환이 설계한 담록원을 통해 확인한 신자유주의는, 자본가 계층의 특권화와 그 계층의 유지를 위한 노동자 계층의 소모품화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이렇게 윤환에게서 시작된 자본가 계층은 염계식과 윤건에게 내려와 다르게 꽃을 피웠다. 윤환이 쌓아 올린 자본은 염계식에게 가서는 비틀린 노동자 출신의 자본가가 되었고, 윤건에게 가서는 온실 속에서 자란 도련님이 되었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염계식을 완전히 노동자 계층으로 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작중 나타나는 염계식의 모습이 노동자의 것이 아닌, 자본가의 것이기에 자본가로 분류했다.염계식의 모습은 현재의 한국의 자본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게 노동자, 자식이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본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공장주나 사장이 아래의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게 보인다.이러한 점은 윤환이 염계식의 폭력성을 간과했던 것과 염계식을 사람이 아닌 도구 하루하루에 달렸으며,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없다. 반면, 자본가 계층은 반대에 놓여있다. 트랜드를 이끄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며, 그들의 시선은 현재가 아닌 미래가치에 있다. 즉,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사라질 리가 없다는 믿음과 살짝 늦어지더라도 사회에서 퇴출당할 리가 없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안일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를 실현해야 하는 노동자 계층에게 압박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본가가 생각하는 속도에 따라오지 못했을 때, 노동자에게 남은 것은 일자리에서 쫓겨나, 사회에서 제외되는 폭력뿐이다.이렇게 만들어진 폭력의 연쇄 앞에 개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작품은 무력하다고 말한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강소희’와 ‘염철중’이다. 이 두 인물은 유약하고, 양심적이다. 소희는 다정의 집안 사정을 듣고도 자기 집에 받아들였다. 철중은 염계식 아래에서 다정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다정을 염계식에게 데려간 판단을 계속 의심하고 후회한다.앞서 자본가 계층은 노동자 계층을 소모품으로 본다고 정의했다. 이는 즉, 목숨조차 동일 선상에 오르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다정을 집에 들여 도움을 주려 했던 강소희는 부모를 포함해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있어서가 아닌, 염계식이 다정이 자신에게 거역하지 말라는 경고의 제물로 삼았기 때문이다.철중 또한 마찬가지다. 철중은 다정과 철수에게 최대한 인격적으로 대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다정이 원하는 삶을 주고 싶어 하던 인물이다. 이렇게 봤을 때, 철중은 염계식에게 있어 걸림돌일 뿐이다. 때문에, 철중의 필요도가 내려가자 염계식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여기에는 다정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적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이렇게 자본가 앞에 무력한 개인이 폭력의 연쇄를 끊고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이 3부다.염계식의 잘못됨을 인지하고, 철중의 죽음 이후로 다정과 철수를 챙겨주던 나연은 강회장의 손녀인 강수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염계식의 뒤를 봐주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줄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눈감고 넘어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전의 사회는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움직임이 먼저였고, 죽음은 그 움직임에 부어지는 기름과 같았다. 그러나 현재에 들어서는 죽음 그 자체가 움직임의 시작이다. 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계식의 뜻에 따르던 다정이 철중과 나연의 죽음으로 계식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시대는 죽음 없이는 아무것도 타오르지 않는 ‘재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앞서 현대 사회를 ‘재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약자는 강자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냉엄한 공간이 된 지 오래다. 즉, 아무리 계기가 있어도 개인 한 명의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로 떠오르는 것이 이전 시대에 있었던 공동체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성질을 갖는 새로운 공동체다.이전 사회의 공동체가 공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면, 현대의 공동체는 각자의 이익과 비물질적 공간이 중심이다. 이전의 작업장, 지역과 같은 공간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는 중심이 되어 준 공간이 와해되었을 때, 존속할 수 없다. 공간의 소멸이 공동체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익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공동체는 다르다. 이들이 추구하려는 이익은 자본가의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희생에서 나온다. 그래서 자본가 계층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 즉,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이 간극이 새로운 공동체에 기존보다 더 확실한 결속을 가져온다. 이 채워지지 않는 간극이 잘 드러난 것이 최근에 일어났던 택배 파업이다.자본가 계층은 저들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하지만, 노동자가 바란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임금은 그대로였으며, 일하는 곳의 설비만 정비되었을 뿐이었다. 즉, 자본가에게는 일시적인 손해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장기적인 이득을 창출한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다시 파업을 단행했다. 과거였다면 만족했을지도 모르는 것에, 만족하지
    인문/어학| 2024.08.30| 6페이지| 3,000원| 조회(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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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 판타지의 기능 데스노트를 예시로
    한국에서의 서사는 고대에서 현대로 오면서 점점 더 환상적으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자연 현상의 규칙을 찾아내고 그 원리를 규명한 현대와는 달리, 고대에서는 모든 자연 현상이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신은 실제로 존재하며, 자연 현상들은 신의 노여움의 표출이거나,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현대에 와서는 그 모든 것들이 환상요소로 격하되었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 있어서만큼은 사실이었다. 즉, 인간은 고대에서부터 사실을 표현해 온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서사 곳곳에 환상적 요소가 유입되며, 사람들은 그 환상적 요소에 열광한다.환상적 요소의 유입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과 실존주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의 모더니즘은 전전(戰前) 때에 들어왔지만, 실질적으로 꽃을 피운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 전후(戰後) 때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의 문단은 새로운 이념을 내세웠다. 그것이 모더니즘이었다. 모더니즘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보는 것으로 사회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모더니즘의 시대에 실존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모더니즘 아래에서 나타난 실존주의 소설은 당대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존주의는 많은 문제를 내포했다. 실존주의와 계급주의적 문학이 만나 카프를 이루게 되면서 그 문제는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계급주의 문학 특유의 계급 각성의 목소리가 들어가게 되면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대중을 가르치려 들고 다그치는 문학이 된 것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카프가 존재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정도지만, 이 이후에도 실존주의는 문학계에 크게 작용하였다. 이후, 이러한 시대를 뒤로하고 한국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하게 됐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 이후의 모더니즘으로 기존의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개선한 사상이다. 기존의 모더니즘이 행위자 중심이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수용자, 즉 대중을 중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중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점에서 사회를 인지하고 문제점을 고발하는 문학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는 현대의 문학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판타지가 나온 이유는 더는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의 빠른 발전은 현재에 사람을 묶어두지 않게 되었다. 더 앞을 내다보게 만들고, 현재 없는 것을 상상하도록 했다. 회색의 공간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현실에 좌절하게 된다.미래 지향 주의는 양날의 검이다. 이는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시간이 지난 현대에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역할이 됐다. 타국보다 빠른 경제 발달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찬란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하면 된다는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미래는 어떠한가? 색으로 표현하자면 검은색이다. 과거와 달리 일자리는 없으며,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계층이동이 막힌 사회다. 그 때문에 불안한 미래보다 존재하는 현재를 즐기자는 욜로족이 나타났다. 판타지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판타지가 환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것이었다면 현대의 판타지는 수용자의 욕망을 대신해서 보여주며, 사회를 고발하는 하나의 창구로 작용한다. 즉, 개인의 개성이 수없이 늘어난 현대에서 그들의 공통적인 욕망을 보여주며, 사회 곳곳의 문제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문제임을 고발하고 이를 수용자에게 자각시키는 방아쇠이다.작품 에서 이가 잘 드러난다. 작중에서 주인공의 행위는 작품 밖의 수용자들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욕망이다. 뉴스에서 다뤄지는 정치인과 기업가의 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것은 이제 일상이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 혹은 입 밖으로 말해봤을 만한 것이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데스노트’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도입하여 그 욕구를 실행시켰다. 죄를 지은 이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주인공에게 수용자는 감화된다. 윤리, 도덕적으로는 주인공이 하는 행위가 범죄임을 알면서도 응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란다. 작품 안이 아닌 현실에도 이러한 ‘심판자’ 혹은 사회 정화를 이끌 ‘구원자’가 등장하기를 말이다. 이는 판타지가 수용자와 공명한 것이다. 과거, 경제 개발 때는 배척받았던 것이 현대에 돌아와 주목받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욕망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앞서 기술한 경제 발전의 시대에는 현실에 적합한 욕망을 품었다면, 현대에는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욕망을 품게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라는 사회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이어진다.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와 합쳐져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 타국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룬 것을 단기간에 따라잡았고, 그 결과 현대의 한국 사회는 삐걱거리는 톱니가 있다. 맞물려야 하는 것이 맞물리지 못하고 엇나가고 있다.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편의를 봐 준 결과, 노동자의 삶은 피폐해졌다. 현재 이를 수정하고 개선하고 있지만 오래된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데스노트나 사신과 같은 초월적인 것을 상상하게 된다. 즉,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버린 결과가 판타지로 이어진 것이다.에서의 물음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필자는 ‘구원자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삶에 대한 회의가 드는 현대에 누구든지 마음 한편에서는 구원자의 존재를 생각한다. 에서는 키라가 그에 해당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작품의 끝은 어떻게 되었는가?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현실에는 구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함과 동시에 수용자들에게 각성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이다.판타지의 순기능, 바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판타지라는 장르는 수용자들의 흥미를 끄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히 인간을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것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 호기심을 자극하여 작품을 보게 하고,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모든 판타지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판타지와 현실의 반영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균형이 이루지 못한 판타지는 과거와 같이 그저 유흥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인문/어학| 2018.07.25| 3페이지| 2,500원| 조회(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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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과 인간 영화 터널을 예시로
    과거부터 사건은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었다. 현대와 다른 점이라면, 과거에는 사소한 실수로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는 실수가 아닌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사고’라는 이름으로 정의 내려진다. 목재를 이용해 짓던 건물은 현대에 이르러 대다수가 콘크리트로 짓게 되었으며, 마을 공동체는 사라지고 개개인의 공간에 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사건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이는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악화한 사람의 욕망이 작용한 결과이다.한국은 타국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내부는 병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의 편의를 봐 준 결과, 노동자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현대에 이르러서 과거에 눈 감고 넘어갔던 문제가 터지고 있다. 특히, 건설 쪽에서의 문제는 처참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과 붕괴사고로 대표되는 붕괴사고는 당시에 있었던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가와 정치인이 손을 잡은 결과, 대형사고를 몰고 왔다. 안전을 위해 설정한 기둥의 개수가 맞지 않거나,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되는 곳에 건물을 짓는 등의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 많은 인명이 사라졌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터지는 사건, 사고가 더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인재(人災)임을 증명하고 있다.자본가와 정치인은 이러한 사고조차 그들이 운영하는 기업, 그리고 정치인 자신의 이미지 만들기의 장으로 삼는다. 안타까운 사고라며 사고자의 가족을 위로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선한 이미지를 쌓는다. 이런 행위의 효과는 소비자와 유권자의 뇌리에 남아 이후에 영향을 미친다. 즉, 사건이라는 것은 자본가와 정치인에 의해 일어나고, 후에는 그들을 살찌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에서 비롯된 사건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그 중 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이라는 작품은 터널 붕괴를 중점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터널이 붕괴하여 내부에 갇힌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의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이다.작중에서 터널이 무너졌을 때, 주인공이 119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작 119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터널이 무너져 피할 곳도 없음에도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라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을 하고, 이후 구조대가 현장에 파견된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다. 게다가 그 와중에 언론 통제가 안 돼서 기자들이 섣불리 갇힌 ‘이정수’에게 연결하여 전달되면 안 되는 정보를 전달하여 그를 불안하게 한다.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구조를 위해 허가된 인원만 출입해야 하는 현장에 통제가 되지 않아 방송국 차량이 진입한 것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속해있는 단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정보 보호와 피해자에 대한 배려 등의 지켜져야 할 것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의 모습이다. 이는 단체 속에서 개인은 오직 단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부품임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있어 사건의 피해자는 그들의 시청률을 올릴 좋은 재목일 뿐인 것이다.이와 같은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난다. 현장에 정치인들이 찾아왔지만, 그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이렇다 할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또한, 구출을 위해 인근 다른 터널의 공사를 연기시켜 달라는 요청에 장관이 내린 답은 “협의해서 진행하라.”였다. 이 대사는 사람의 목숨과 경제적 가치를 같은 저울에 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사람의 목숨도 재화의 일부로 보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일상이 된 일이다.이후에도 사람의 목숨과 자본의 대립은 계속된다. 공사를 계속 진행하지 못함에 따른, 시공업체의 경제적 손실이 컸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어 미뤘지만, 이후 관심이 사그라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손실을 우선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다. 특히, 한국에서 이러한 예시를 찾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고 피해자를 위해 국가가 나서서 돕겠다고 하지만 정작 관심이 사그라지면 방치하는 것을 일상에서 볼 수 있다.작품이 진행되면서 언론에서는 터널 공사에 대한 비리가 폭로된다. 이는 건설업자가 비용을 줄이려고 일부러 부실공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사고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득에는 ‘취해도 되는 이득’과 ‘취해선 안 되는 이득’이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취해서는 안 되는 이득을 취했다.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임에도 자본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한국은 이미 이러한 사고를 경험했다. 그런데도 변한 것이 없다. ‘취해도 되는 이득’보다 ‘취해서는 안 되는 이득’이 이윤이 더 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자본가들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공사현장에서 필수인 부분을 일부 제외한다. 사고가 일어나면 다른 자본가는 그것을 기회 삼는다. 한국이라는 무대에서 자본주의가 작용하기 위해서 사고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앞서 언급했듯, 기업은 사고를 이용해 선한 이미지를 쌓는다. 터널 내에 갇힌 ‘이정수’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주파수를 가진 라디오는 그를 위해 매일 5분 정도 소식을 전하겠다고 한다. 이는 착한 마케팅의 일종이다. 후에 라디오 청취자들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이 라디오를 들으려 할 것이다.현장에서 취재하고 있는 기자는 ‘이정수’의 구출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그가 하루만 더 갇혀 있기를 바란다. 이전 붕괴사고의 기록을 깨길 바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구출되었을 때의 효과를 더욱 극적으로 올리기 위해서다. 이 또한 자본주의와 관련된다. 높은 시청률이 나오면 기업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익에 눈이 멀어 피해자조차 돈으로 보는 것이 자본주의가 오작동하고 있는 사회다.이후‘이정수’가 위치한 곳을 알려주는 환풍기가 설계도면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이정수’가 갇힌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구멍을 뚫은 상태다. 자본가의 욕심 때문에 구할 수 있는 목숨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이후에 모든 언론에서는 ‘이정수’의 생존을 부정적으로 본다. 이 타이밍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본가는 하루에 보는 손해와 지금까지 보는 손해를 말하며, 이전 ‘도롱뇽’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었을 때의 상황을 예시로 들어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도롱뇽과 사람을 같은 저울에 둔 것이다. 여기서도 앞에서 계속 지적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다시 나타난다. 그 어떤 것보다 자본을 제일 위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목숨을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야 한다던 여론은 구조 현장에서 다툼 때문에 사망자가 나오자 돌아선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이때를 노려 ‘이정수’의 부인에게 공사 진행에 동의해 달라고 한다. 계속되는 설득에 ‘이정수’의 부인은 결국 허락한다는 사인을 하고 만다. 이로 인해 ‘이정수’라는 개인의 구출작업은 중단된다. 이는 단체 앞에서 무력한 개인을 보여준다.
    인문/어학| 2018.07.25| 3페이지| 1,000원| 조회(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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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문화와 사상 -드라마 속의 감성강조와 프로파간다-
    대중문화 속의 예술과 사상-드라마 속의 감성 강조를 중점으로-서사는 과거에서부터 계속 존재해왔다. 때론 권력자를 미화하는 신화로 존재하였으며, 때론 교훈을 담아 민중을 교화시키는 작용을 해 왔다. 근대에 이르러 서사는 두 종류로 보인다. 지배 권력이 편하게 지배하기 위해 그들의 이념을 삽입하기 위한 것과 유흥으로 소비되는 서사이다. 크게 보면 이렇게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두 서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유흥으로서 소비하였는데 이념이 담겨 있다거나, 이념을 담았는데 재미있다고 소비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서사는 계층과 연관이 짙다. 이러한 점을 드라마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최근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가 있다. 가족과 사랑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특이한 구조를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타국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타국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구조가 나타났다. 본원적 축적과정을 통한 농민들의 도시로의 대거 이주이다. 이전까지의 사회에서는 가장은 주로 논이나 밭일을 하며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가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며 노동환경이 이전까지의 논이나 밭이 아닌 공장으로 변하며, 가장들은 가정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나게 됐다. 이로 인하여 가부장제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대에 접어들며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며, 가부장제로 유지되던 가정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지배층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이러한 현상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는 개인이지만, 개인만으로는 사회가 구성되지 않는다. 개인이 이룬 집단 중에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이야말로 실질적인 사회의 기본 근간이다. 이러한 근간이 흔들리고 해체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큰 위협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만든 사회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방송을 통해 가정의 복원을 강조하고자 했다. 현재 드라마의 방영 시간이 저녁때로 몰려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직장인들이 퇴근한 후, 집으로 돌아와 휴식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속해서 같은 주제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일종의 세뇌와 같다. 마치 저렇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뇌에 학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현재 40 ? 50대들은 가정을 중요시하며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가정에 충실하다. 그들은 구성원들에게 위치에서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그로 인해 가정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것에는 드라마에서 설정된 가족관계가 크게 작용하였다. 물론, 보는 이들의 흥미를 끌어내야 하기에 굴곡이 많게 설정한다. 하지만 결국, 결말에 이르러서는 화목한 가정을 강조한다. 이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행복은 개인이 아닌 가정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학습시키는 것이다.드라마 속에서의 감성 강조는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예측하기 쉬운 성격이다. 저녁 시간대의 드라마를 보면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드라마 서사에는 언제나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이 대립한다. 그리고 결말에 가서는 선한 인물이 행복을 쟁취하며 끝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조이다. 하지만 이는 현대 사회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 현 사회는 착하게 산다고 꼭 보답받는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악하게 살았을 때 얻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권선징악의 내용을 넣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서 얻은 효과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더 그 누구도 착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악하게 사는 것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가 많은가에 대한 질문에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기득권층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드라마는 기득권층이 원하고 있는 사회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또한, 드라마에서 강조되는 감정이 한 가지 더 존재한다. ‘사랑’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그 어떤 드라마를 보더라도 ‘연애’가 나타난다. 드라마에서 연애가 나타난다고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극이나, 수사물에서까지 연애가 나타난다는 것은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가족애와 비슷한 이유로 강조된다. 가족애는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서야 사람의 뇌리에 심을 수 있지만, 사랑은 다르다. 가족애보다 더 근본적인 감정인 사랑은 지속적인 반복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성적인 부분이 있다. 드라마는 이러한 부분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보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뭉클한 감정을 느낀다. 예전부터 그러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두 해당했다. 하지만 앞서 기술했듯 현대의 한국의 드라마는 그 정도가 남다르다. 이는 한국인 특유의 정이라는 감정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다른 국가의 사람들보다 남의 문제에 관심을 더 가진다. 최근에는 서양의 관점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부분을 오지랖이라고 멀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직 한국 사회 전체는 자신보다 남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또한, 이 현상은 이전 세대에서 일어난 사업의 여파라고 볼 수도 있다. 전두환 정부에서 주도한 3S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민중들을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펼친 이 정책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정부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국민에게 자극적인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드라마는 극단적인 상황을 제시해왔다. 이러한 부분이 현재에까지 계승되어 일종의 클리셰로 작용하고 있다.
    인문/어학| 2018.07.25| 3페이지| 1,500원| 조회(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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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준어와 방언, 문화를 중심으로
    21세기에 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수많은 언어를 만들어내고 유통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회 방언에 속한다. 많은 사람이 쓰고 있음에도 표준어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표준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방언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러한 관계에 주목하여 글을 쓸 필요성을 느꼈다.우선 표준어와 방언의 개념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표준어라는 것은 방언이되 특별한 대접을 받는 방언이다. 방언과 방언 사이에서의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정한 것이다.표준어의 자격을 얻은 방언은 교과서, 신문, 방송 등에 두루 쓰이게 된다. 즉, 표준어를 사용할 때 소통되지 않는 경우가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허나, 표준어가 다른 방언보다 언어학적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아니다. 흔한 오류로, 방언이 체계가 없고 조잡한 언어이며 표준어는 올바르고 우수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방언은 표준어에 비해 자유로운 언어이다. 즉, 인간의 손때를 타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소비된다. 이 방언에는 그 지역의 고유 특성이 나타난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도시의 경우에는 바다에 관련된 어휘가 더 발달하고 평야지대의 경우 그 평야와 관련된 단어들이 발달한다.정리하자면, 표준어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강제적으로 제한한 언어라면 방언은 자연을 받아들이며 필요에 따라 즉각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표준어와 방언의 관계란 것은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모여살고 나라가 커지게 되면서 기반이 되는 언어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서 발달된 언어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조건에 의해 표준어가 결정되었다. 즉, 표준어는 각 지방에서 발달한 언어, 방언 중에 하나를 고른 것이다. 즉, 방언이 있었기에 표준어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방언이 중요한 이유는 그 언어의 지역별 발달양상을 앎으로서 기록되지 않은 과거를 알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현재의 표준어 중에는 방언이 그 원류가 된 것도 있다. 이처럼 방언은 표준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즉, 방언은 살아있는 언어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방언이 중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경상도 지역의 방언에서는 의문형 어미가 ‘-가?’인데 이것은 중세국어의 의문형 어미와 그 특징이 일치한다. 즉, 과거의 언어상과 그 변화 양상을 방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또한 방언은 그 사회 고유의 특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어투에서 방언이 생겨나는 경상도에서는2 ^{2},2 ^{e},e ^{2},e ^{e}를 구분할 수 있지만, 서울 지역의 방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 즉, 이것은 경상도 지방만이 가지는 특색이며 타지방에는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상도 지방의 방언 발달 양상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방언이 사투리라고 저급 취급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정부에서는 표준어 교육에 중점을 두었기에 한때 방언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세대가 자식을 교육함에 쓰는 말에 그 지역의 방언이 녹아있어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학교에서 그건 ~라고 했어요. 그거 안 좋은 말이래요.’라고 말이다. 언제부터 방언이 안 좋은 말, 저급한 말이 되었는가. 이는 정부 차원에서 실시한 우리말 죽이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표준어와 방언은 분명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넘어 모자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다른 하나도 사라질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방언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이용되는 방언의 경우에는 표준어로 채택이 된다. 즉, 표준어의 생성이 방언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문학에서 방언의 중요성은 더욱더 증가한다. 많은 문학작품에서 방언이 등장한다. 이렇게 등장한 방언들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욱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딱딱한 분위기에 쉬어갈 공간을 주는 것이다.방언이 문학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작품 내의 등장인물이 방언을 사용하면 그 방언 지역의 독자는 그 인물에게 더욱 공감을 할 수 있다. 작품의 이해도가 올라가는 것이다.예를 들어 ‘토지’에 나오는 경남 방언은 지금까지도 작용하여 이 작품을 읽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또한, 충청도 지방의 ‘-유’로 끝나는 종결어미는 읽거나 듣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제공하며 전라도 특유의 구수한 욕이 담긴 방언은 독자로부터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문학 외에도 방언은 크게 작용을 하고 있다. 개그에서도 일반적인 표준어를 사용한 개그보다 방언을 가미한 개그가 더 큰 호응을 얻는 경우가 많다. 또 드라마의 경우에도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라면 그 지역의 방언은 필수로 사용된다. 그 지역민에게 다가가는 방법의 하나가 방언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위의 사례들로 방언은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그 위치가 확고함을 알 수 있다.그리고 방언을 보면 그 지역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타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싸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데 그것은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바다를 끼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언어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다 위에서의 생활은 급격하게 변하는 경우가 많으며 비나 파도가 심한 날에는 작은 목소리나 여유로운 말로는 즉각적인 대처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지고 상대의 귀에 때려 박는 느낌의 어투가 발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경상도 방언의 어조로 굳어진 것이다.만일 이러한 방언이 사라지고 표준어만이 남는다면 그 지역의 특색을 잃은 것과 같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같은 언어를 쓴다면 그것은 분명 재앙이리라. 언어란 것은 공산품이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과 같이 언어는 소비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다양한 방언이 존재한다는 것은 즉, 인간의 무한한 발전성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말을 터득하면서 발전하였으며 지금도 말과 함께 나아가고 있다. 방언이 끝없이 분화되며 제 기능을 수행해야지만 그 사회, 국가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말은 문화와 큰 관련을 맺는다. 같은 글자를 쓰는 나라일지라도 그 발달과정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는 것이다. 당장에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과 중국 일본만 보아도 그 차이가 실감이 난다.한국에서의 인사는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이다. 하지만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은 “귀중한 시간을 점용하여 죄송합니다.”가 인사이다. 즉, 주체인 자신을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있다.이러한 차이에는 배경이 존재한다. 서방의 존재가 완전히 알려지기 전까지 중국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며 황제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라의 위치가 가장 높으니 그 국민도 덩달아 자신을 스스로 높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에 비교해 한국은 상당히 상대적이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약자에게는 자신을 높인다. 이는 한국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 위에 위치했던 중국을 형의 국가라고 부르며 떠받들고 아래의 일본은 왜라고 하여 오랑캐 취급하며 천대하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 결과, 그 형태가 백성들의 언어에 녹아내러 온 것이다. 이렇게 녹아내린 언어습관은 윗대에서 아랫대로 언어를 가르치며 전수되었다.이러한 문화의 차이는 한 나라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한국에 국한하여 본다면 당장 여자와 남자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그 차이가 나타난다.한국은 조선 시대부터 유교를 근본으로 삼아온 국가이다. 지금은 유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일상생활 깊숙하게 유교는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여자들의 언어는 지극히 감성적이다. 그와 비교했을 때, 남자들의 언어는 극단적으로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를 본다면 여자들은 ‘이크, 어머, 너무, 어쩜’ 등의 감탄사를 주로 사용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침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는 유교 문화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를 잘 선택하지 않는다. 남자는 그의 반대이다. 이 또한 유교적 이념이 언어에 적용된 예이다. 남자는 밖의 일을 하며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기에 자신을 드러내기보단 그 조직에 기반을 둔 언어가 더 많다. 사회적인 일보단 가정적인 일을 더 많이 하는 여성들은 조직에 기반을 둘 필요가 없기에 스스로 감정 상태를 말하고 상대에게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지칭하는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이처럼 종교에 의해서도 언어는 차이가 날 수 있다.
    인문/어학| 2018.05.18| 4페이지| 2,500원| 조회(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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