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라는 권력이 된 때가. 이 시기는 영화 속 TV속보 등을 통해 나온 듯, ‘KKK단의 흑인테러사건’, ‘인권운동가 살인사건’ 등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던 시기이다. 특히, 남부지역은 예부터 흑인들을 노예로 자신들의 ‘물건’으로 취급했던 곳이고, 그중의 미시시피의 잭슨 주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흑인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정부로 취직하는 것 말고는 없었고,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돌보지도 못하며 백인들의 아이를 키워낸다. 차별과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조차 불법이 되고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 되는 흑인, 백인과 흑인의 화장실 공동사용을 금지하는 법안 까지 내며, 흑인이 총에 맞는 일과, 버스에서 중간에 내리는 일도 그들의 대우가 아닌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닌 그들의 삶은 언제 쫓겨나갈지 모르는 전전긍긍하게 사는 것 또한 그들이 사는 삶의 전부이다.좀 더 들어가면 여기서 또 다른 약자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여성이다. 특히 흑인 여성들. 이 영화는 좁게는 흑인, 흑인 여성, 그리고 더나아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1960년대는 남성의 사회였고, 당시 이 곳의 여성들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정원과 가정부가 딸린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게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친구들과 달리 ‘스키터’라는 백인의 여성이 있다. 그녀는 흑인 가정부 손에서 자랐으며, 대학 졸업 후, 다시 미시시피의 잭슨 주로 오게 되어 지역 신문사에 취직을 한다. 살림 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게 되었고, 베테랑 친구네의 가정부 ‘에이블린’ 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어릴 적에 가정부가 되어 17명의 백인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봤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사고로 잃은 에이블린. 스키터에게 살림 노하우를 알려주던 그녀는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에이블린 자신과 흑인 가정부들의 인생을 책으로 써보자는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처음에는 제안을 거부했고, 그다음에는 하되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때 마침 주인집 화장실을 썼다는 황당한 이유로 쫓겨난 가정부 ‘미니’가 합료 함으로써 이들의 프로젝트에는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차별과 불만을 이야기 하는 것조차 생명을 위협받는 시기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엄청난 용기를 넘어 목숨을 건 도전 일 것이다. 하늘이 도운 듯, 그 도전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들의 용기 있는 고백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책을 탄생시키며 결과 또한 엄청난 긍정적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영화를 다보고 나서도, 따뜻한 여운이 한 켠에 남아있다. 흑인들은 그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믿음과 마음 잃지 않고, 굳건히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나아가, 성실하고 마음 다해 백인의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 또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너는 착하고, 똑똑하고 소중해” 에이블린이 아이들에게 자주 속삭이듯 하는 말인데, 이 말을 할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시큰해졌다. 에이블린은 그 말을 하면서도 아이가 그렇게 자라길 바랐고, 평생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겼을 테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멀어져버린 과거의 아이들과 아마 가장 그 말을 해주고 싶은 아이는 자신의 죽은 아들이었을 것이다. 흑인에 여성인 그들이, 계급사회도 아닌 1960년대에, 피부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정부라는 직업까지도 정해진 삶.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한탄하고 체념하며 삶 일 텐데, 그 속에서도 희망 또한 놓치 않으며 묵묵히 자신들이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지금의 현 모습 또한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가족과젠더Antonia's Line, 1995- 페미니즘이 도달하고자 하는 유토피아도영화에서 그려진 행복하고 즐거운 식사와 다를 바 없는 것!영화 마지막 부분의 사라가 환영을 보는 시퀀스는 몇 번을 봐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가족이 모두 모여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와중 이미 사망 했던 이들이 한 명씩 등장해 함께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쟁 이후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은 채 자살했던 굽은 손가락을 시작으로, 많은 아이를 낳고 몸이 쇠약해져서 죽은 레타, 우울증으로 사망한 미친 마돈나와 개신 교, 트랙터 사고로 죽은 미친 입술, 바람피우던 남편이 준 상처를 평생 간직했던 일레곤다, 적대적인 관계였던 댄의 가족까지 모두 식사에 참여한 가운데 다시 젊 어진 안토니아와 바스가 함께 춤을 추는 것으로 환영은 절정에 달한다. 이 시퀀 스에서는 지금까지 억압의 대상뿐만 아니라 주체였던 이들까지 모두 등장했다는 점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나에게 묵직한 여운으로 남아있다.또한 남성과 여성을 극렬한 대립으로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 다.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 분노와 절망을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로 승 화시키면서 여성적 사회의 유토피아를 제시한다는 점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의미인 듯하다. 이 때 삶은 인간이 살아가며 추는 춤이 된다. 그리고 이 연대의 전제조건은 바로 성별에 주어지는 의무가 아니라 ‘주체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 즉, 권력의 경계, 죽음과 삶의 경계, 모든 경계가 무너지며 함께 어울리는 것. 이 수평적 연대가 ‘주체’가 되어 더 이상의 반목 없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것’으로 형상화 되면서, 나아가 안토니아 가족의 계보를 훑어 가면서 대안적 삶에 대하여 역사적인제시를 하는 것 또한 ‘마를렌고리스’ 감독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 인 듯하다.역사적인제시 여성화로서 나타내고자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일까? 페미니즘은 흔히 풍문으로 한번 정도는 들어 봤을 만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 할 수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실로, 그만큼 오용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특히 웹상에서 달린 댓글은 페미니스트의 단어 형태가 달라져 '꼴페미'는 비하의 의미를 지닌 욕이 된 지 오래이다. 정확한 뜻과 의미는 알지 못한 채 그저 현재 권력 구조를 정 반대로 의미로만 오용해서 상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비하 되어 상용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현실사회를 반영하는 의미도 내포되어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실사회와 가상세계, ‘1차 페미니즘 물결’이 일어난 19세기의 모든 페미니즘과 영화에서 시사하는 페미니즘과 그것을 지향하는 유토피아도 영화에서 그려진 ‘행복하고 즐거운 식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식탁에 다 같이 모여 식사하고 춤을 추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는 것. 성이 원하는 것인 여성을 잘 대접해 달라는 것도 아니며, 무조건 취업에 있어 우선권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능력에 따라 남성과 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인데도 이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남성이 우세한 직종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똑같이 뽑고, 남녀가 능력이 비슷하다면 성 다양성 측면에서 여성을 뽑는 것이 바람직하고, 여성이 우세한 직종에서는 이와 반대로 능력이 비슷하다면 남성을 뽑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안토니아스라인은 페미니즘 영화이지만 결코 여성의 관점에 치우쳐 남녀평등을 외치거나 남성들 가운데 우뚝 서는 단 하나의 여성상을 보여주려 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와 사랑으로 한 마을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인 여성상인 것이다.그렇다면 이상적인 페미니즘의 여성상은 어떤 것일까?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남녀불평등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제도 개선을 통해 점점 그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이 지금 현재로써의 최대관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는 제도개선, 사람들의 인식변화도 필요하지만,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모두 함께하는 준비 한다는 점. 남성과 여성의 권력구도로서 집중 조영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 시대에 갇혀진 ‘젠더’로서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 다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동 말이다. 젠더에 관해 생각을 많이 일깨워준 안토니아스 영화를 계기로 우선은 나부터 ‘나’ 스스로의 가치부터 높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겠다. 페미니즘과 젠더를 너머, 나아가 또한 그 마저도 포용 할 수 있는, 윤희답고, 윤희스러운 선한영향력 말이다. 끝.
‘남한산성’을 읽고한 나라의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백성도 버린 사건이 있었다. 1636년 인조14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47일간 피신했다가 결국에 청나라에게 항복을 한 치욕적인사건. 병자호란이 이 책에 시대적 배경이 된다. 결국엔 청군들이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백성들은 식량 보급도 끊어져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짚신 한 켤레와 지푸라기 한줌으로 눈보라와 강추위를 버티며 청나라를 상대로 전투를 빙자한 화살받이가 되는 백성들. 살고 싶어 처절하게 싸우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직도 무거운 잔잔함으로 여운이 남는다.전쟁을 피하자는 ‘주화론’을 내세운 최명길과 끝까지 청나라와 맞서 싸워야한다는 ‘척화론’을 내세운 김상헌의 나름대로 소신 있는 두 충신의 신념 대립이 이 책 에서 또 다른 시사점으로 그려지는 듯 한다. 최명길은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달려가지만 세자를 볼모로 내놓으라는 적장 용골대의 엄포를 들을 뿐 청은 그에 관해서는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칼에 베여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며 임금에게 초지일관 화친에 읍소 하는 최명길과 그에 비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며 우국충절의 굳은 절개를 그리는 김상헌이 이 책에 주된 대립내용이 인성적이다. 나는 충심을 위한 김상헌의 신념 또한 존중하지만 최명길의 주장에 의견을 더하고 싶다. 물론 백성들의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크지만, 김상헌의 얼음길을 안내해 준 ‘손녀를 키우는 한 어르신’을 살해 한 행동을 보면서, 그가 공적인 충심으로 척화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또한 들었기 때문이다.청나라 사람들과 마주하게 될지 안할지, 길을 안내해 줄지 해주지 않을지도 모를 노인을 상대로 길을 안내할 의사가 있을 것 같다는 노파심에 무참하게 노인을 살해한 김상헌.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 노인은 같은 조선인이기에 굶주림과 정에 호소하며 매달리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청나라에 길을 안내 할 수도 있다는 염려와 노파심에 살해한 김상헌은 충성심을 넘어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의 조선의 명분과 신의인 명나라를 꺽은 청나라라서가 아니라, 명나라의 의미까지 덧 데여 생각한 김성헌 본인의 생각과 자존심 말이다.한 나라를 상대로 싸운다는 게 과연 자존심과 의지만으로 될 일 일까? 의지만으로 된다 할지언정 조정이 흔들리는 판국에, 그 또한도 남한산성에 갇혀 눈보라와 강추위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의지를 바라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계급 이라는 신분으로 눈과 귀를 막고,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고 연장이라고는 호미와 갈고리 밖에 잡아본 적이 없는 백성들에게 고장난 엽총을 쥐어주며 싸우라니. 대의명분이란 전적인 벼슬아치들의 자존심 싸움이 맞다고 생각한다.‘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요,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최명길이 뱉은 말 중에 한 구절이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뼈가 이것임을 알아 차렸다. 개개인의 독자와 ‘우리’라는 전체를 대상으로 뱉은 말. 힘을 키우고 세계의 흐름을 읽으라는 작가의 뜻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존심도 이와 같다. 단순히 무력으로 싸워 이긴다 한들 칼부림에 피 바다인 곳에서 피비린내 맡으며 축배의 잔을 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백성을 죽음으로 몬 것에 대해서는 왜 비통해 하지 않는 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한 것, 왕자들이 청으로 인질로 잡혀가고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노리개로 끌고 간 것. 그 결과만을 생각하면서 병자호란 전체를 두고 굴욕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적어도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굴림 하는 게 일인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이란, 살고 싶어 처절하게 싸워 죽은 백성 한명 한명을 앞에 두고 비통해하며 시체로 산을 쌓은 백성들을 앞에 두고 굴욕이고 치욕이라 생각해야 하는 게 맞는 순서 이지 않을까 싶다. 감투를 쓴 자로서의 자존심. 꽉 쥔 주먹에 분에 못 이겨 가슴을 때려 치는 듯 사람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원통함 말이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를 이 시점에 서인과 남인으로 나눠 당쟁 할 때만 쓰는 머리를 굴림. 이럴 때를 두고 ‘무지’라는 표현을 쓰는 게 아닐까 싶다. 알지 못해 생각이 들지 않고, 생각이 들지 않아 행동도 이뤄지지 않는 無知. 어찌 보면 작가는 지금까지도 만연하고 여전한 당파 싸움을 두고 세태를 꼬집고 싶은 마음에 극대화시켜 서인과 당쟁하는 이 부분 또한 적나라하게 글을 썼는지도 모른다.대의명분을 본인들의 자존심이라 일맥상통하는 이들이라 청나라의 속국으로 복속되는 화친에 대해서만 치욕스럽다는 생각하며, 물론 나 또한 후손으로서 굴욕적이라고 느끼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이 든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 원인이 있어 결과 또한 당연한 결과가 되는 것. 방대한 힘을 가진 청과 힘없고 무지한 조선이라 백성들이 고생하는 게 당연한 이치가 된 것처럼 말이다.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에 대해서 굴욕적이다, 치욕적이라고 생각만 하고 그쳐서는 안된다. 감정은 감정 일뿐, 행동에 대해서 미래를 보고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 법. 그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 또한도 마찬가지이다. 내 몸 전체를 조선으로 생각한다면 하루에도 열 두번도 더 많은 여러 감정 여러 생각이 든다. 여러 감정과 여러 생각을 나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 위한 워밍업중의 하나로, 한 생각 한 생각씩 드는 생각을 이쪽파와 저쪽파의 당파 싸움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이치에 바른쪽으로 생각 하자고 스스로를 다잡아 지게 될 것이다. 감성적으로 모든 일에 있어 나태해 지는 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에 있어 훌륭한 조선이라는 ‘나’를 위해서 라고 생각 한다면 생각정립이 이성적으로 곧추세워질 것이라 생각이 든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을 읽고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이라는 사자성어가 불현 듯 스친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즐거움이요, 둘째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즐거움이며, 셋째는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가르치는 즐거움이다. 나는 어떤 위인이나 업적을 쌓은 인물에 대해서는 닮고 싶거나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물론 그분들이 행동이나 발자취를 가타부타 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 분들께서 만들어 일궈 내신 오늘 내가 이 땅에 살아 숨 쉴 수 있게끔까지도 연동이 되어 있는 빛과 소금과 같은 그분들의 행보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세상 모든 이 들이 좀 더 뚜렷한 산물이 있는 분과 그렇지 못 한 분, 나아가 존경받기 합당하고 본받을 점은 각각의 모든 사람들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 현재, 지금을 보내면서, 값어치 있게 보낸 순간과 순간들이 모여 일궈내 미래의 값어치 있는 값으로 드러나 보여 지는 것 또한 남들의 잣대로 저울질 대고 남들의 눈으로 칭송 받아지는 것 보다는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마음, 보람으로 보낸 오늘하루 나의 만족, 개개인마다 생각과 마음이 다르듯이 본인의 가치를 본인이 존중하면서 지내는 자신 스스로를 나는 조금 더 뜻있게 생각한다. 이런 모든 종합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나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성품과 진취적인 정신과 박애정신을 닮아가고픈 마음이 크다.전부터 나이팅게일에 관해서는 위인으로 응당 잘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에 관해서 어떤 업적으로 오늘날 간호학의 베이스가 됐는지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루어 내고 싶은 포부와 어우러진 관대함과 진취적인 정신 또한 헤아리고 “그 또한 나의 어떤 성격으로 한 부분으로 스며들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본받고 닮아가고 싶어 전자도서관 싸이트를 접속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관한 책으로만 4권을 읽었다.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Florence Nightingale, 이하 나이팅게일) 오늘날까지도 간호계열에서는 ‘나이팅게일선서’ 로서 또한 다짐을 되새기며 칭송 받기 합당한 위인이며 그분의 업적 또한 그때 당시의 상황을 견주어 보면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영국의 부유계 집안의 모든 형식과 관념을 탈피하여 남을 위하겠다는 온전한 마음정신 하나로 본인의 업으로 간호사로 택하며,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결부시키지 않고 오로지 생명을 생명으로서 고귀하게 여기는 근본적 일념 하나만으로 주변 만류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진취력에 이어 오늘날까지 그 뜻 또한 계승되어 내려오는 병원ㆍ의료제도의 개혁으로 불릴 만큼의 의료적 자료. 크림전쟁 중 이스탄불에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한 칠흑 같은 암울함에서 벗어나게 하였다하여 ‘광명의 천사’ 나이팅게일.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값 보다는 값어치를, 베풀 듯 깨닫게 해주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진 것 또한 나이팅게일과 나와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목적이 있으면 주변의 만류와 상황 또한 여의치 않으며 이루어 내려는 신념 또한 멘 땅에 헤딩하듯 지금의 나 자신을 만들어낸 나 또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나와 생각했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태어난 시기 또한 다르지만 책을 읽은 동안만큼은 마치 내가 나이팅게일이 된 듯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에 있어서 만큼은 나를 동질화 시키듯 매료되듯이 읽은듯하다.친구들 다 가는 대학에 혼자 가슴 치듯 통곡하며 나는 왜 학교 가면 안되냐며 소리치듯 집을 뛰쳐나와 왜 우리집만 가난하냐면서 왜 돈 벌어서 아빠를 줘야 되냐면서 울기만 하던 나의 고등학교 3학년그때. 다른 부모들은 공부하라고들 난리라는데 왜 우리집은 엄마 하는 식당일에 도우라고만 하는지. 공부 하나마나 대학교도 못 간다는 생각에 연필을 놓은 고등학교 3학년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해봤자 필요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만 부정적인 생각에 이은 부정적인 행동만 일삼는 아이였다. 그렇게 집이 싫어 가족들 모두 있는 터를 두고 혼자 광주에 와서, 혼자 직장을 구하면서 터를 잡고, 또 혼자 스스로 오늘 지금에 이 자리에 앉아있는 광주대학교까지 입학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 가겠다고 하는 나를 극구 말리던 우리 부모님들이셨다. 학교 가봤자 졸업해봤자 무얼 하겠느냐면서.지금의 나는 나 스스로를 부정적인 아이로 구분 하지 않는다. 되레 긍정적인 아이로 자부하는 편. 언젠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빨간색을 빨간색으로 보고 파란색을 파란색으로 보고 받아드리라는 말. 왜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니냐고 물어보면 세상의 이치가 그렇고 사람들이 빨간색이라고 부르자고 약속한 사회적인 약속이고 빨간색이 또한 빨간색인 이유가 있듯이 나또한 지금의 내 모습으로 태어난 이유먼저 받아들이라는 말. 그런 생각이 문득 들고 나서는 ‘그때 내 옆에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물론 모든 이 들을 다 어우를 수는 없지만 나에서 나온 에너지가 어떤 누군가에게 어떠한 희망과 사랑으로 읽혀 질 수 있다면 마치 5볼트의 전구처럼 내 주변부터 시작해 나부터 실천할 수 있는 사랑부터 비록 내가 최대한으로 낼 수 있는 밝기가 5볼트일지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전해주고 싶다. 나의 행동의 한 여파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여파로 전파 될 수 있다면 비단 직접적이진 않을지라도, 그 또한 내가 사랑을 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그마저도 나에겐 감사한 소중한 옅음의 5볼트 빛일지라도.그러기 위해선 ‘궁극적인 나의 사랑의 관념적 개념을 실현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나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키우는 것. 언제 어느 상황에서 나의 역량이 필요로 할지 모르기에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히며 적시적소에 나의 역량을 극대화로 발휘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선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는 영어, 영어에 관해서는 2년째 영어회화클럽에 스터디멤버로 속해 회화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 또한 가득하기에 즐기듯 공부를 계속 이어 갈 생각이다. 두 번째는 스치듯 지나는 인연에게도, 흘리는 듯 지나치는 인연에게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줄 것. 말도 경청하며 최선적인 마음으로 대응하기. 광주광역시 청소년 자살률이 20% 라는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자살이라는 엄청난 행동을 실행함에 있어 그만큼의 용기면 어떤 것 이든 못할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다. 그 엄청난 용기와 에너지를 자살을 위해 쓰는 미래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한 청소년이라는 아이들. 그 엄청난 용기가 비단 주변에 본인의 상황이나 마음에 대해 말할 그런 미연의 용기보다도 못할 용기 였을까. 반대로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지언정 이야기를 들어 주려 하는 사람은 있기나 했었던 걸까. 스치는 듯 흘리는듯한 말 한번 마음한번에도 마음 쓰며 대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세 번째로는 간적접인 선한영향력. 물론 어떤 행동으로 보여 짐에 있어서 누군가에게 본보기다 되는 게 바람직한 교훈적인 모습이겠지만, 나 스스로가 어떤이 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건 어떨까. 책을 통해 읽고 느끼는 간접적인 경험을 포함하여 나는 스스로 겪고 느끼며 알아내며 나만의 지금 내 모습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이 자리에 있기까지의 나의 모든 삶의 경험과 함께 앞으로의 나 또한 모든 나를 사랑하기.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밝음의 미소한번, 소소하더라도 자주 웃으며 상대방을 위하는 말 한번 마음한번,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한번에 모든 이들의 분위기마저 포용하며 누구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랑받기 충분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바라봐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