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이라는 책은 1945년 해방 이후 역사학자가 본격적으로 작성한 최초의 안중근 의사의 전기이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까지 서술하고 있다.첫 장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응칠(應七)’이라는 아명을 가진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지만, 갑신정변 이후 청계동으로 이사를 가 학문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인용하여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부는 급진 개화파뿐만 아니라 급진개화파가 일본에 파견하려고 하였던 유학생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이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는 화서학파 유중교의 제자인 고능선(高能善)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을 공부하였다. 백범 김구 또한 고능선(高能善)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고능선(高能善)은 백범에게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는 실천의 삶을 중시한 안중근 의사와 백범 김구의 모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장을 읽으면서 안중근 의사의 신념과 용기,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님의 신념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4장에서는 ‘나라를 찾아 나라 밖으로’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1907년 이후 국외로 망명을 결심하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이 발각되어 폐위를 당하였고,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아래 강제적으로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가 해산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교육으로는 백년대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국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원산을 출발하여 북간도에 도착하였는데, 북간도 용정은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이상설 등 민족 운동가들이 선택한 망명지였다. 간도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간도 동포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우치게 하고 국내에서는 의병운동보다는 계몽적 민족운동에 힘쓰고자 하였다. 1907년 10월 20일 간도를 떠난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는데 러시아행의 최종 목적은 의병 세력을 결집하여 국내로 들어가 일본 세력을 물리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국외 망명을 보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발걸음으로 보여 진다. 그는 계몽적 의식을 가지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 봉기를 촉구한 일뿐만 아니라, 교육과 실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던 것이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 한인 사회의 국권 회복의 선결과제로 ‘단합’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의 확고한 신념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생각되어지며, 이는 『인심결합론』을 통해 역설됨으로써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신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6장에서는 ‘대한의 위대한 손’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이 장에서는 영산 전투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한인 순방을 하였는데, 당시 연해주의 침체된 상황과 한인 사회의 지원과 협력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단지동맹’을 조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09년 2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연추 하리 마을에서 동지 11인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 독립 회복’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해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는 독립을 향한 안중근 의사의 뜨거운 열망이 붉은 피로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생각되었다. 단순히 정상인의 손과 다른 손이 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쳐진 대한의 위대한 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동의단지회’의 취지서 또한 서술되어 있는데 생전에 안중근 의사는 ‘동의단지회’의 동맹 취지서를 자신이 썼다고 여러 차례 밝히며, 그 목적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라고 요지만 진술하였다. 이는 안중근 의사의 영산전투 패배로 떨어진 자신과 동지들의 위상 회복과 국권 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 한다. 안중근 의사 외 11인의 동지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결사대를 조직해 항전하고자 한 것은 의병 전쟁의 분위기가 점차 식어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투쟁 방략의 일환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7장에서는 ‘그날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평화적 총탄을 발사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국내 진공 작전 이후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향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이 거사에는 최재형이 주목이 되는데, 최재형은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거사를 준비하는 안중근 의사는 꾸준히 후원하였다. 1910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성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10월 21일 안중근 의사는 국내 진공 작전 때의 전우인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25일 오후 1경에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역에서 기사를 읽고 이토 히로부미가 26일 오전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얻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인 거사를 행하게 된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자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10여 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준비해 간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총 4발을 발사하여 가슴과 옆구리, 복부를 관통시켰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자 “코레아 우라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면서 러시아 헌병장교 미치올클로프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현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신문을 받았는데 당시 그의 진술은 성명은 대한국인 안응칠, 연령은 31세, 국적은 한국, 신앙은 가톨릭이며, 이토 살해를 결심한 것은 그가 “한국 국민에게 가한 압제에 보복하고 또한 그가 공창규, 이항기 및 기타 많은 동지를 처형한 것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이 장에서 서술한 일들은 안중근 의사의 신념을 정확히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되어진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라에 부당한 일을 저지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었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는 후대의 항일 의병 정신과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느껴진다.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Ⅰ. 서론역사교육과로서 서양사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배워오면서 지금의 유럽이 형성되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쳐온 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어디에서 기원되어 어떤 특징을 가졌고,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두 문명이 서로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바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를 통해 이를 자세히 배우고 망설임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자세를 기르고 싶기 때문에 작성하게 되었다.Ⅱ.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ⅰ. 헬레니즘‘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말은 19세기의 독일의 역사가인 드로이젠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정복한 이후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로마 속주로 만들었던 약 300년 간의 시기를 ‘헬레니스무스’(그리스화)라고 표현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드로이젠에 의해 등장하게 된 헬레니즘이 끝난 시기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악티온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한 시점인 기원전 31년이나 혹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자살하여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화 된 기원전 30년으로 정하고 있다.즉, 위에 따르면 헬레니즘의 시의 시기는 ‘알렉산드로스 시대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이다. 이 시기 동안에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이집트 등 이전의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전부를 포함하는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헬레니즘 문화는 후대에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도교와 서로마 제국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던 나라는 1453년에 멸망한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헬레니즘 문화를 광의적으로 본다면 15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처럼 동서문화의 통일, 제민족의 융화를 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책은 그의 사후에도 세계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가 세계로 전파되어 가면서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 각 나라, 혹은 민족들 간의 대립은 줄어들었다. 이는 많은 그리스인이 아프리카 및 아시 지방으로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보급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이러한 헬레니즘 문화가 세계로 전파되어 가면서 각국의 군주들은 경쟁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상업·무역 및 학문·예술의 중심으로 삼는 데 힘썼는데, 대표적인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치오키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뭄, 로도스 등으로써 이들 도시는 헬레니즘 사회의 중심을 형성하면서 동서양의 문화 교류 등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Ⅱ.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ⅱ. 헤브라이즘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과 더불어 유럽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로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 즉, 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헤브라이즘은 기원전 13세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에서 비롯되어 야위스트나 엘로히스트 등의 역사가와 율법의 기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B.C 6세기 초에 남왕국의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멸망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전쟁 포로가 되면서, 종교 사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제2아시야의 ‘고난의 중복’에서의 구제사상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구제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나자렛 예수의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면서 결국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이처럼 과거 유럽의 사상의 뿌리를 이루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 사상과 깊은 상호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성장할 때 헬레니즘 사상과 접촉하게 되면서 이에 영향을 받아 철학적이며 이론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헤브라이즘은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이와 같은 그리스 도교이자 헤브라이즘의 중심에는 절대자인 신이 존재한다. 신은 항상 도덕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신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은 항상 신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헤브라이즘은 현세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현세를 부정하고 그것을 초월한 피안의 영역을 추구하는 비극적인 태도로 귀결된다.Ⅱ.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ⅲ.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비교위와 같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서양 문화의 2대 원류이다. 헬레니즘은 인간의 자연적 본능이 주를 이루는 반면에 그리스도교의 헤브라이즘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화 윤리가 중점을 이룬다. 그러나 이렇게 반대적인 성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두 문명 사이에도 공통점이 분명 존재한다.우선 첫째, 이성이 아닌 감정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헬레니즘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헤브라이즘에서 말하는 사랑이 감정을 중시하였다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둘째, 카타르시스의 효과이다. 헬레니즘은 인간의 감정과 육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비극을 지닌 주인공들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오이디푸스와 티에스테스, 메이디아의 이야기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헤브라이즘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리스도교의 경전 속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다양한 흉악한 범죄가 등장한다. 카인과 다윗의 이야기나, 예수의 죄 없는 죽음 등은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심술과 시기를 풀어서 순화하는 과정이며, 이들의 희생적인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위안을 받고 만족을 얻는다.
이상주의자의 영원한 라이벌-역사의 격변 속 개혁자-목차Ⅰ. 주제 관련 지식백과 발췌ⅰ. 두산백과 --------------------------------------------------------- p. 3ⅱ. 21세기 정치학대사전 ------------------------------------------- p. 4Ⅱ. 서론 --------------------------------------------- P. 5Ⅲ. 현실주의자ⅰ. 이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 P. 6ⅱ. 이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저술 ------------------------------------ P. 8ⅲ. 이소크라테스의 시대 --------------------------------------------- P. 9ⅳ. 교육자 이소크라테스 --------------------------------------------- P. 10a. 이소크라테스의 교육이념b.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 학교 운영Ⅳ. 이상주의자ⅰ. 플라톤의 생애 및 사상 ----------------------------------------- P. 13ⅱ. 플라톤의 인간관 ------------------------------------------------- P. 14ⅲ. 플라톤의 교육관 ------------------------------------------------- P. 17Ⅴ.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ⅰ. 이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공통적 배경과 인간이해 ------------ p. 19ⅱ. 이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교육적 인간상 ----------------------- p. 20ⅲ. 이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교육비교 ----------------------------- p. 21Ⅵ.서평ⅰ.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 P. 25ⅱ. 전환기 그리스의 지식인 이소크라테스 -------------사였다. 소피스트는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인간 세계에 유용한 실용적인 지식을 탐구함으로써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제시했다. 또한 그들은 회의론적인 시각에서 인간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소피스트를 들자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 수사학의 대가 고르기아스 등이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소피스트의 영향력이 지대했는데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 정치가 페라클레스 등 당대의 말은 지식인들이 소피스트의 교육을 받았다. 더욱이 아테네와 같은 민주제 국가에서는 동료시민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언변이 중요한 출세수단이었기 때문에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의 인기가 대단했다.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적 관점은 플라톤에 의해 비판되었고 그로써 그들은 궤변론자라는 가치관, 왕성한 교육활동이 고전기 그리스문화의 지적 토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이소크라테스가 수사학(어떠한 생각을 특별한 방법으로 전달하려 할 때에 표현과 설득에 필요한 언어의 표현기법)을 교육을 받은 후 이소크라테스는 실제 정치생활에 투산 하지 않고 수사학 교육의 길로 나섰다. 그의 천성으로 정치생활에 뛰어들지 않고 수사학 교육의 길로 나섰다.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소크라테스는 아직 젊네. 그러나 내가 그에 대하여 갖고 있는 예감을 말하면…….그는 수사에 있어서 리시아스보다 더 많은 소질을 타고난 것 같고, 뛰어난 학습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네. 그러나 이런 발전에 그가 만족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네. 어떤 신적인 추동이 그를 보다 위대한 곳으로 인도할 것일세. 왜냐하면, 나의 친구여, 그의 생각 속에는 본질적으로 지혜의 추구(Philosophia)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네 라고 말할 정도로 이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에게도 인정받는 사상가였던 것이다.Ⅲ. 현실주의자-ⅱ. 이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저술이소크라테스는 저술과 교육활동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긴 문인이었다. 그는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자신의 생각을 학습하고 또 그것을 저 도덕성이 결여된 수사학 교육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수사학 교육이 공익을 위한 대국적인 주제를 다루고 시민적 덕성을 함께 배려한다면 인간을 더욱 지혜롭고 유익한 존재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b.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 학교 운영소크라테스의 문장은 고전적 연설과 수사의 전형으로 수세기 동안 경탄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정치적-윤리적 민족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하여 언어 교육, 특히 수사학이 근본임을 밝힌 자였다. 학교의 설립자로서 그는 당대의 가장 성공적인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수사학으로부터 도야의 이론을 정립한 자였다. 그리하여 서구의 교육 사상사에 오랫동안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청소년 교육과 학교 수업의 영역에서 이소크라테스는 플라톤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교는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등록의 절차를 밟은 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선정하고 계획한 일정한 기간 안에 가르치는 제도였다. 이소크라테스는 학교교육에서 학생들의 소질, 근면성, 가치 추구, 자아의식 등 일정한 관점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들을 국가의 문화과업보다 하위에 두었다. 그는 교육의 목적을 그의 시대의 그리스가 필요로 하는 정신적 엘리트의 양성 에 두었다. 이소크라테스는 집중적이고 집단적인 수업을 하였다. 수업을 집단을 형성하되, 하나의 수업 집단이 9명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농도 짙은 인격적 사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소크라테스의 학교는 다른 소피스트들의 학교와 교수방법에 세 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되었다. 첫째, 이소크라테스는 학생들과 평생을 지속하는 존경과 순종으로 확인되는 인격적 사제관계를 유지하였다. 둘째, 이 학교의 전혀 새로운 특징으로 14-18세의 청소년들에게 3-4동안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교육을 시켰다. 그의 학교는 음악 교육과 체육 교육이라는 기초 교육으로 시작하여 국가 방위의 연령인 청년이 될 때까지 계속되는 교육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이소크라테스의 교육 활동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야와 훈위해서는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이데아를 상기할 수 있는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는 철인정치론을 전개하였다.철인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훌륭한 통치자를 키워내는 것이 그의 교육론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출생 전의 교육부터 강조하여 우수한 종족을 출생시키기 위한 우생학적이 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였고 이것이 위정자의 임무라고 보고 있다. 결혼연령도 남자는 30-50세, 여자는 20-40세 사이로 통제하고 재산과 부인의 관리를 공유케 하며 우수한 아이의 출생을 위해 남녀결합을 관리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플라톤의 이러한 교육관이 모든 면에서 제대로 운영된다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교육관은 엘리트주의, 계급주의이며 남녀 차별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고 전체주의로 흐를 우려도 있다.Ⅳ. 이상주의자-ⅱ. 플라톤의 인간관플라톤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보편적 정의의 개념을 착안하여 이데아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이데아론은 보편적 정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써 개별적 사물에 대해 초월적으로 실재하는 ‘이데아’라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인데, 두 개의 세계, 즉 동굴의 어두운 세계와 빛의 밝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에 대한 그의 반론이었다. 플라톤에 있어 지식이란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확실한 것이었다. 지식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 가장 실재적인 어떤 것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사물의 다양성과 계속적인 변화에 감염된 나머지 참된 지식의 가능성에 관해 언제나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므로 다양성을 띠게 되며 따라서 각자에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우리의 감각적 경험에 준거하는 지식이 상대적이며 다양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소피스트의 사고를 인정할 수 없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무지한 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모든 행위 속에서 그들이 . 플라톤은 그러한 신념에 도달하는 철인의 경지를 교육의 마지막 목표로 설정하였고, 이것은 교육을 단순한 좁은 의미의 직업훈련이 아니라 도덕적인 전인(全人)의 형성과정이라고 관념하게 하였다. 또한, 전인의 형성과정은 그의 인간관과 결합하여 인격과 영혼의 교육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이러한 의미에서 교육은 영혼은 자양물로 비유된다. 참된 자양물과 소양이 있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의 충만함과 건강에 도달한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인격을 형성하는 견문이며 형상(FORM)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은 자양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성질이 다른 토양에 씨앗이 뿌려지거나 옮겨 심게 된다면 모든 잡초 중에서 가장 유해한 잡초가 된다고 표현한다.플라톤 교육관의 다음 특징은 인문주의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기술교육과 직업훈련의 목적이 아니라 국가를 통치해 나갈 수 있는 철인의 양성이 목적이었다는 것은 자연히 인문주의와의 결합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인문주의는 플라톤의 국가관과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도구로서의 교육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정적이고 계급화 된 즉, 장인-기사-철인이라는 도식으로 표현되는, 사회 내에서 인문주의는 계층화와 상위지향의 당연한 결과로 이어졌다.다음으로 플라톤 교육의 기본은 엘리트 중심의 교육이다. 이 점은 후대에서 비판받는 부분인데, 그렇다고 하여도 플라톤이 대중교육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즉, 플라톤은 국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위하여 특수한 자리인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비워두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중교육 혹은 엘리트 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현대의 평등교육, 교육의 권리로서의 의미는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플라톤은 이상국가의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강조하였으며, 대중과 엘리트에 대한 교육은 그러한 수단 내에서만 고려될 뿐 개인의 능력 계발과 자이다.
-중국의 항일운동, 5·4운동-Ⅰ. 서론ⅰ. 주제 선정 이유Ⅱ. 본론ⅰ. 배경1) 정치적 좌절2) 신문화운동3) 경제·국제적 배경ⅱ. 전개1) 북경의 학생운동2) 상해의 ‘3파’투쟁ⅲ. 결과Ⅲ. 결론ⅰ. 의의와 평가ⅱ. 나의 생각Ⅳ. 참고문헌Ⅰ. 서론ⅰ. 주제 선정 이유역사교육과라는 학과에 입학한 후 역사교사를 목표로 세계사특강이라는 강좌를 수강하면서 중국 현대사에서 다양한 민족운동을 공부하였다. 그 중 1919년에 발생한 5.4운동에 대하여 흥미가 생겼다.5.4운동은 대내적으로는 반동복고의 풍토 즉, 원세개의 제제운동, 장훈의 청제복벽 등의 어수선한 국내 상황과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21개조 요구 등으로 인해 일어난 운동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발생한 5.4운동은 북경에서 학생들의 주도로 처음 발생하여 결국 전국적으로 퍼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해의 3파투쟁이었다. 상해의 많은 학생, 노동자, 상인들이 파업을 함으로써 5.4운동은 절정으로 향하였고 이는 결국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었다.이러한 5.4운동을 배우면서 한국에서 일제에게 저항하는 3.1운동이 있었듯이 중국에서도 일제에 반항하는 5.4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이에 따라는 나는 5.4운동에 대하여 책을 찾아보고, 논문을 찾아보는 등 더 알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따라서 그 배경과 전개과정, 결과와 의의를 기반으로 한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주제로 선정하였다.Ⅱ. 본론ⅰ. 배경 - 1) 정치적 좌절5.4운동의 배경인 정치적 좌절에는 원세개의 제제운동, 장훈의 청제복벽 등 2가지를 예시로 들 수 있다.우선 원세개의 제제복고이다. 원세개는 1913년 3월 국민당이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송교인을 암살하였고, 선후대차관을 체결하여 독재체제를 위한 재정기반을 확보하였다. 또한 국민당계 도독 3명을 파면하면서 무력권을 회수하여 독재체제 기반 마련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에 1913년 7월에서 9월까지 원세개의 독재를 반대하는 제2혁명이 발생하였다. 이이 단기서를 면직시키는데, 이때 단기서가 독군을 통해 여원홍 타도를 시도하면서 장훈이 북경에 입성하게 된다. 북경에 입성한 장훈은 다시 황제체제로 돌아가기 위해 복벽사건을 일으킨다. 장훈은 선통제 부의를 1917년에 다시 복위시키고 부하에게 변발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벽 기간은 1917년 7월 1일부터 7월 13일까지 2주간 이어졌으며 이때 여원홍은 일본 공사관에 피신하여 대총통 옥쇄를 풍국장에게 양도하고 다시 남경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단기서는 일본의 100만원 지원을 받고 독군은 동원하여 장훈으로 공격하였고 북경을 탈환하여 장훈은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복벽사건이 끝이 난다.원세개의 제제운동과 장훈의 복벽사건 등으로 인해 ‘민국’ 혁명에 의한 공화정 수립이 좌절되었고 중국에는 반동복고 풍조가 팽배해졌다.대외적으로는 일본의 21개조 요구가 존재하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열강의 중국 간섭이 축소되었고 일본은 이틈에 중국지배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우선 일본은 영일 동맹의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를 공략하였다. 또한 청도와, 제남을 점령하였고 중립선언을 하였던 원세개에게 산동 권익에 대한 일독협정의 중국정부 승인, 남만주·동부내몽고에서 일본의 우선권, 여대·남철 조차 연장, 한야평공사의 합작 경영, 영토 불할량 등의 내용을 담은 21개조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21개조 요구로 중국민 각계층의 망국 위기감이 증대되었고, 요구거절의 여론이 비등해지자 일제불매, 애국저금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일본은 제5호를 삭제해 5월 7일 최종안을 제시하였고, 5월 9일 최후통첩을 하였는데, 원세개가 이에 굴복하여 수락하자 국민들은 격분하여 5월 7일과 9일을 국치일로 정하고 반일 시위와 집회를 열었다. 이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1919년 5·4운동의 발발 원인이 되었다.ⅰ. 배경 - 2) 신문화운동이러한 정치적 좌절로 인해 민국수립이 좌절되자 이 원인을 민중의 공화정 이해 부족으로 보 신중국건설의 대안으로 자아. 배경 - 3) 경제·국제적 배경우선 경제적 배경에서는 민족사업의 성장과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예시로 들 수 있다. 1차 대전 중 열강의 중국지배가 약화되자 외국상품이 감소하고 국내 ‘경공업’ 중심 즉, 방적·제분·성냥 등 생필품 생산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경공업이 성장하자 민족 부르주아지와 도시 소부르주아지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철강·석탄·기계가 일제에게 예속되었다. 또한 군벌과 관료가 민족산업을 탄압하여 민생수탈을 자행하였고, 군벌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인해 시장이 혼란스럽게 되었다.1차 대전 중 미국과 일본의 중국투자가 증가하였는데 이로 인해 신구 공장이 풀가동되어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였다. 노동자 수의 증가에 비해 노동조건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갔는데 저임금, 13시간의 중노동, 결사·파업 금지 등으로 1914부터 1919년까지 노동자의 파업은 매년 증가하게 되었다.두 번째는 국제적 배경이다. 1917년 볼세비키혁명 즉, 러시아혁명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는 무착취의 노동자 농민의 나라 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는 핀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영향을 주어 열강의 세계분할이 동요되었다.미국에서는 윌슨 대통령이 에 입각한 민족자결주의가 1918년에 제창되었다. 이는 약소국 원조, 구독지배 하 민족자결 주장, 터키의 민족해방 투쟁, 조선의 3·1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정치적 좌절, 신문화운동, 경제·국제적 배경 하에 민족 감정은 고조되었고 결국 5·4운동이 발발하여 폭발하게 되었다.ⅱ. 전개 - 1) 북경의 학생운동직접적인 원인은 파리 강화회의였다.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동문제가 결절되었다는 소식이 4월 24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5월 1일부터 3일에 걸쳐 북경의 신문에 산동 권익을 일본에 빼앗긴 뉴스와 그 요인이 일본과 영국·프랑스의 밀약, ‘혼연동의’의 교환공문 때문이라고 보도되었다.5월 1일 오후 각 학교 대표가 북경대학에서 긴급회의를 열었고, 각 학교의 학생도 자주 대표에 의한 비밀회의를 열었다자!”라며 선동을 하였다. 시위대는 공사관 구역의 서편을 따라 나아갔고 출발 후 약 1시간이 지난 4시 반경에 조여림 집에 도착하였다. 선동자들은 벽의 창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후문을 열었다. 집안으로 진입한 학생들은 조여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는 몸을 감춘 뒤였고 마침 그곳에 있던 장종상이 붙잡혀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에 경사 경찰총감 오병상 및 보군통령 이장태가 다수의 경관, 병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서 32명의 학생을 체포하였다.5월 4일 이러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정부는 4일 저녁 및 5일 아침에 연속하여 긴급각의를 열었다. 회의 끝에 정부는 학생활동을 금지하고 이에 따르지 않을 때는 퇴학시킨다는 교육부령을 내렸다. 한편 학생들도 4일의 저녁부터 곧 체포학생의 구출활동에 착수하였다. 각 학교마다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북경대학의 집회에는 채원배 교장의 얼굴도 보였다. 채원배는 학생의 운동을 시인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체포자의 구출에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하고, 아울러 학생들이 ‘격렬한 움직임’으로는 치닫지 못하도록 요청하였다.5일 아침 9시부터 각 학교대표자회의가 북경대학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파과, 즉 수업 거부의 방침을 둘러싸고 북경대학 대표와 고등사범 대표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결국 북경대학의 방침이 채택되어①대총통에게 체포자 석방을 청원해 주도록 각 학교 교장에게 요청한다.②각 학교가 연합하여 조여림·장종상·육종여를 처벌하도록 대총통에 상서한다.③체포자가 석방될 때까지 각 학교는 일제히 수업을 거부한다.등의 각항이 의결되었다. 이러한 ‘파과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긴급한 과제는 체포자의 석방이었다. 이제 조여림 저택의 방화·파괴, 학생의 체포라는 생생한 현실이 파리의 외교문제를 급속히 학생들의 신변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수 년 이래 없었던 학생들의 파과라는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그 관리자인 채원배 등의 교장들도 북경대학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체포자 구출의 방책으로서 우선, 경찰과 담판기로 하여 체포학생의 석방요구라는 공통의 과제로 수렴되고 나아가 정부반대의 행동으로 전환되어 가는 조짐이 나타났다.5월 9일 북경대학의 학생들은 채원배의 고별사를 전단으로 만들어 뿌렸고 각 학교 대표회의도 소집되었다. 이에 운동의 확대와 발전을 두려워한 서세창은 14일 채원배에 대한 유임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론에 양보하여 운동의 진정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에는 이 유임령이 육종여에 대한 유임령 뒤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채원배와 육종여로 균형을 이루려 했던 것이 드러났다.이처럼 사태는 더욱 첨예한 대립을 내포하면서 이전과 거의 동일한 양태를 띠어 갔다.이러한 운동은 지속되어 이어졌다. 그 사이 학생들은 거의 막다른 곳으로 몰렸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인민대중의 궐기를 촉구하고 운동의 확대를 꾀하는 것 외에는 달리 취할 방법은 없었다. 2일 밤의 회의에서는 가두연설의 부활이 결성되었다. 앉아서 운동의 좌절을 기다리기보다는 혈로를 개척하여 전진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3일 오전 10시 전날 밤의 결정대로 수백 명의 학생이 그룹으로 나뉘어져 정해진 지점에 집결하고 연설을 하였다. 이에 즉시, 경찰이 달려와 깃대를 든 학생과 연설자를 체포해 갔고, 그 날의 체포자는 170 여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6.3투쟁으로 북경대학의 문과도 이과도 모두 유치장으로 대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태가 발생했다. 4일에는 여학생도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북경뿐만 아니라 전국의 학계, 상업계, 기타 사회의 각 계층이 학생들에게 동조하는 낌새를 보이고 있었고 금융계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정부의 정면 돌파를 노린 강경작전은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학생을 비판하고 체포하고, 결국 석방시키고 마는 실태를 두 번씩이나 연출한 정부가 권위를 세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북경정부는 이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에 있어서도 통치기능을 상실하고, 무정부상태까지는 되지 않았다고 해도 말하자면 통치 권력의 부재상태가 중국정치의 ‘중추’에 생겨났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5월 것이다.
-옹정제(雍正帝)의 황제독재권 강화와 반만 사상 통제-Ⅰ. 서론ⅰ. 주제 선정 이유 ------------------------------------------ 3ⅱ. 옹정제(雍正帝) 생애 ------------------------------------- 3Ⅱ. 본론ⅰ. 주접(奏摺)제도 ------------------------------------------ 4ⅱ. 군기처(軍機處) 실시 ------------------------------------- 4ⅲ. 태자밀건법실시 ------------------------------------------ 6Ⅳ. 반만 사상 통제와 『대의각미록(大儀覺迷錄)』 -------------- 6Ⅲ. 결론 ---------------------------------------------------- 7Ⅳ. 참고문헌 ------------------------------------------------ 7Ⅰ. 서론ⅰ. 주제 선정 이유역사교사를 목표로 역사교육과라는 학과에 입학한 후 동양현대사라는 강좌를 수강하면서 청나라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라는 3명의 황제에 대해 배웠다. 그중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옹정제에 대하여 흥미가 생겼다.옹정제(雍正帝)는 강희제(康熙帝)의 네 번째 아들로 삼번의 난 등 난을 진압하여 계몽군주이자 수성 군주였던 아버지인 강희제(康熙帝)를 이어 내치에 주력하여 각종 제도를 성립하고 민생의 안전을 도모하는 등 청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옹정제(雍正帝)가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황제 독재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옹정제(雍正帝)는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고 주접(奏摺) 제도를 실시하고, 태자밀건법을 시행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옹정제(雍正帝)가 나라를 평화롭게만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옹정제(雍正帝)는 문자의 옥 사건을 일으켜 반만 사상을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유혈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책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황권 독재권 확립이었다.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들은 다양하였고, 이러한 정책들로 옹정제(雍正帝)는 청 제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나는 이러한 옹정제(雍正帝)의 정책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고 그렇기 때문에 옹정제(雍正帝)의 황제 독재권 확립을 위한 정책들과 반만 사상 통제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주제로 선정하였다.Ⅰ. 서론ⅱ. 옹정제(雍正帝) 생애1678년에 태어난 옹정제(雍正帝)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며 이름은 윤진으로 청나라 제5대 황제이다.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시호는 헌제인 옹정제(雍正帝)는 1722년부터 1735년까지 약 14년간 재위에 올랐으며 세종 재위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를 바탕으로 옹정제(雍正帝)라고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인 옹정제(雍正帝)는 강희제(康熙帝) 후기에 조정과 신하 사이의 심각한 붕당 싸움이 있자 즉위 후 동생인 윤당과 윤사를 서민으로 삼고, 당시 권신이었던 연갱요와 융과다 등을 숙청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중앙관제로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겨 정무가 잘 처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을 두고,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여 이것이 내각을 대신해 6부를 지배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의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에도 힘을 써서, 지방에 주접(奏摺) 제도를 설치하여 지방관이 직접 지방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을 직접 뜯어서 보고 주필로 비평을 써, 다시 지방관에게 돌려주어 명령을 했다.너무 적은 지방 관리의 봉급을 대처하기 위해서 양렴은제를 실시하여 관리에게 양렴전을 지급하였다. 또한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으로 하여금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 정책을 실시하여 내치에 주력하였다.대외적으로는 청해를 귀속시키고, 티베트에 연갱요를 파병하여 평정한 후 보호령으로 삼았다. 또한 1727년 러시아와의 캬흐타 조약을 통해 외몽고부터 시베리아를 잇는 국경선)는 재위 13년이 되는 해에 병으로 사망하면서 옹정제(雍正帝)의 치세는 끝이 났다.옹정제(雍正帝)는 내치에 주력하여 국가를 안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영토를 넓혀 청의 힘을 보여준 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강희제(康熙帝)와 마찬가지로 문자의 옥을 다시 대대적으로 일으켜 청 제국의 정통성에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엄벌을 주는 등 엄격한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Ⅱ. 본론ⅰ. 주접(奏摺)제도주접(奏摺) 제도는 강희제(康熙帝) 때 지방 행정의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옹정제(雍正帝)에게 보고를 보고서 형식으로 올리게 하고 중앙의 경관 또한 상주를 하도록 한데서 유래했다. 강희제(康熙帝) 시기의 주접(奏摺) 제도는 비공식적이었으나 옹정제(雍正帝)가 즉위한 이후에는 모든 지방관으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자세한 보고서를 주기적으로 황제에게 올리도록 하여 황제가 지방의 행정을 정확하게 판단을 할 수 있는 눈과 귀의 역할을 하였다.주접(奏摺) 제도는 과할 지방관이 그 지방의 주요 정세에 관해 황제에게 직접 올리는 사신 형식의 보고 제도였다. 그 내용으로는 지방관의 인사 문제, 농작물 생장 상황, 기후 및 재해 상황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개별 사안마다 황제의 친서가 하달되었다. 이로써 지방관과의 직접 소통을 통한 친정체제를 구축하였고, 각 지방관들이 독립 보고를 함으로써 상호 견제와 허위보고체제가 불식되어 황제 독재권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주접(奏摺) 제도는 군기처(軍機處)가 창설되면서 행정상의 공식 제도로 정착하였다.Ⅱ. 본론ⅱ. 군기처(軍機處) 실시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옹정(雍正)의 조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기처(軍機處)의 설립으로 군사 문제를 직접 처리한 것이다. 군기처(軍機處)는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천하는 한 사람이 다스린다.”라고 주장했던 옹정제(雍正帝)는 몇 차례의 정쟁과 정변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혔다. 즉, 연갱요와 융과다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중신들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의 권위와 제위를 공고히 하고, 중앙집권친왕과 대신간의 정책협의 기구로 힘이 강해지자 강희제(康熙帝) 때 남서방을 설치하여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을 억제하였다. 강희제(康熙帝)의 뒤를 이은 옹정제(雍正帝)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였다. 군기처(軍機處)는 서북방의 준가르정벌을 위해 군수방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시기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주접(奏摺)들을 처리하면서 중요한 기구로 강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군기처(軍機處)는 처음에는 임시적인 군사행정기구로 설치되었다가 점차 상설화되면서 내각을 대신하여 중추적인 정책결정 기구로 변화하였다.군기처(軍機處)는 긴급 사무를 처리하는 기구로서 황제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고, 기밀을 다루었기 때문에 황제의 침궁과 지척에 두어야 했다. 최초의 군기처(軍機處)는 임시로 지은 목조 건물로 보잘것없었지만, 건륭 초기에 이르러 벽돌로 새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옹정제(雍正帝) 8년에는 정식 명칭이 판리 군기처(軍機處)로 바뀌어서 ‘군기처(軍機處)’는 약칭이 되었으며, 옹정제(雍正帝) 10년에는 인신이 주조되었다.군기처(軍機處)는 집무실은 있었지만 관아는 두지 않았다. 군기대신은 10명 이내였는데 대학사, 상서, 시랑 등 황제의 측근 대신들 중 임시로 지정하여 업무를 보게 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군기처대신상행주’, ‘군기대신재학습행주’ 이지만, 일반적으로 군기대신으로 불렸다. 이러한 군기대신 밑에는 군기장경이 있었는데, 이들은 내각, 한림원, 육부, 의정처 등이 아문에서 선발되었다.군기처(軍機處)는 기밀이나 긴급 사무에 대한 황제의 구술을 어지로 작성하여 황제에게 보인 뒤 병부에 넘기고, 병부는 다시 각지로 발송했다. 군기처(軍機處)는 사안의 중요성에 상관없이 모든 사항을 하루에 완결한다는 원칙을 지켰으므로 업무 처리의 효율성이 매우 높았다. 내용의 긴급한 정도에 따라 서한의 앞면에 ‘즉각 전달’이라고 표기하면 하루에 300리의 속도로 전달되었고, 매우 긴박한 사무는 하루에 4500리, 가장 빠를 경우에는 역참이 800리의 속도를 냈다. 당은 더욱 강화되었다. 황제의 교지 작성, 국가와 군대의 대사 논의, 군대 인사이동, 문무 관리들의 임면 문제, 주요 안건과 국가재저의 심의 등을 처리하는 군기처(軍機處)의 권한은 점차 내각을 대신하게 되었다. 결국 군기처(軍機處)는 내각을 능가하며 정무를 총괄하고 황제가 전국에 발하는 명령을 대리하는 중요한 기구로 부상하게 되었다.군기처(軍機處)의 설립은 행정 제도상의 일대의 개혁이었다. 모든 상소가 직접 군기처(軍機處)로 올라가고, 대학사가 군기대신을 맡아 정사에 참여함으로써 내각의 유명무실해졌다. 의정처의 형편도 마찬가지였기에 1791년 황제의 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이러한 군기처(軍機處)는 황권의 막강한 권력 도구가 되었다. 관료의 행적 결합을 차단하였기에 관료에 대한 효율적 통제가 가능해졌고 붕당의 폐해를 없애버렸다.Ⅱ. 본론ⅲ. 태자밀건법실시태자밀건법이란 선황제 사후 자금성 내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名)]이란 현판 뒤에 비치한 비밀 상자를 열어 선황제가 미리 적어둔 유서를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공개토록 하여 황위 계승자를 결정하는 방법이다.강희제(康熙帝) 시기 황태자 옹립을 둘러싼 황자들의 싸움이 존재하였다. 강희제(康熙帝)의 아들은 모두 35명으로 효성인황후가 낳은 유일한 아들인 둘째 윤잉을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희제(康熙帝)는 1697년 3차 준가르 원정 시기에 본인은 직접 원정에 참전하였고, 황태자인 윤잉을 북경에 두어 정사를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윤잉은 강희제(康熙帝)의 신임을 잃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심복을 보내 부친인 강희제(康熙帝)를 감시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이에 강희제(康熙帝)는 참지 못하고 윤잉을 황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감금하였다. 이로써 황태자 자리가 비자 황자들 사이에서 황태자가 되기 위해 싸웠고 붕당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강희제(康熙帝)는 1709년에 다시 윤잉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712년 윤잉이 몇몇 대신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었고 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