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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1. 국공내전의 배경(1) 종전이후의 중국제 2차 세계대전은 반파시즘 제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각국의 정부와 민중은 장래에 대해 밝은 희망을 안고 있었다. 침략전쟁의 원흉이라고 간주되었던 파시즘의 소멸은 바꿔 말하면 전후세계의 평화와 변영을 보장하는 것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항일전쟁에 승리한 중국국민이나 정부도 전후의 중국 재건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임하고 있었다. 침략자 일본을 완전히 패망시켰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각국과의 불평등조약이 철폐되고 중국 자신의 국제적인 지위도 상승되어 국민정부의 미래는 충분히 약속된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참승’이라는 말과 같이 8년간의 전화가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사회경제에 손톱자국을 남긴 것도 한편으로 엄연한 현실이었다. 전후 중국의 재건은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 승리한 중국이 전후 부흥에 거는 희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영토를 회복하여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고, 전쟁 전보다 나은 사회경제적 번영을 실현해 주기를 절실히 원했다. 국민당의 일당독재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적인 헌정을 실현하리라는 기대 역시 컸다.국민당과 공산당은 전쟁 이후의 중국에 대한 설계에 몰두하였다. 국민당의 수장인 장개석이 구상하고 있던 전후 중국의 부흥은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당나라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 으로서 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고 국력을 강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다시 도약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국민당이 중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반면 공산당의 수장인 모택동은 전쟁 이후,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들을 단결시켜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든 후 중국의 모든 인민들을 이끌어 하나의 독립된 자유 민주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일본의 참략에 저항하기 위 보태 총 38인이 출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국민정부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어, 이를 시정하기 위해 공산당을 비롯한 야당이 정권에 참가하여 국민당의 주도권을 제약한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선 정부의 개조 방침에 관해 정부위원(각료)의 4분의 3을 국민당원으로 한다는 국민당 원안을 수정하여, 국민당원은 반수로 제한하기로 하였고, ‘헌법제정국민대회’의 대표 문제에 대해서도 국민당의 원안을 수정하여, 이미 선출된 900여 명에 더해 새로 1,100명을 추가 선출하기로 했다. 또 군대 내에서 군인들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정치협상회의의 결과, 국민당의 주도권이 크게 제약받고 국공 양당을 중심으로 민주동맹까지 참가하는 연립정권 수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국민당 내부에선 점차 반발에 조짐이 나타났고 협상에서 의결한 군인들의 탈정당화도 끝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정당 간 대립이 무력 다툼으로 발전할 여지는 계속되었다.(3) 결렬정치협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사이에도 국공 양당 간의 항쟁은 계속되었다. 1945년 8월 이후 공산당군은 몰래 부대를 동북으로 이동시키고, 쓰핑자를 비롯한 동북 지방의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공산당 측의 움직임에 국민정부군도 상당수의 군대를 동북에 투입하고 무력으로 요충지를 탈환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에 운남성 곤명에서는 공산당계열에 학생 단체를 군인들이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고, 충칭에서는 민중단체들이 정치협상회의에 성공을 자축하는 집회에 일부 국민당원들이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국민당 내에서는 정치협상회의에서의 공산당 등에 대한 양보에 반발이 격화되어 정치협상회의에 결정사항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1946년 3월,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려는 결의를 채택하였다.같은 해 6월에는 수도 남경에서 국민정부에 대한 상해로부터의 ‘내전반대청원단’이 폭도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국민당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강화하고 있던 민주동맹의 간부 2명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성하기에 이른다.?요심전투요심전투는 임표가 지위하는 동북야전군 54개 사단 70만여 병력이 만주를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먼저 공산당군 25만여 명은 요동 지방의 진저우를 에워싼 뒤 맹렬히 공격한다. 열하루 만에 진저우는 함락되고 국민당 군 10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힌다. 진저우 함락 소식을 들은 창춘의 국민당 군 10만여 명은 스스로 항복한다. 진저우와 창춘이 무너지자 선양(瀋陽)의 국민당 부대는 고립된다. 공산당군은 선양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대공세를 편다. 5일 만에 선양은 함락된다. 두 달 동안의 전투로 만주의 국민당군은 몇 개 사단만 바다를 통해 탈출했을 뿐 47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완전히 궤멸된다. 국민당에게 더욱 국민당에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이 사단들 가운데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사단이 많았다는 것이다.?회해전투회해전투는 화동지방으로 불리는 장쑤성과 산둥성 등 내륙에서 벌어졌고, 공산군이 동북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사적 균형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모두 공산당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전투의 초점은 쉬저우였다. 쉬저우에 총사령부를 둔 국민당의 류즈 군단 60만 명은 쉬저우 부근에서 공산당의 화동 야전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중원 야전군과 연결되는 것을 막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회해전투는 3단계로 전개되었다. 1단계로 (1948년 11월 6일 ~ 11월 22일) 공산군의 공격으로 국민당의 황보타오병단이 섬멸되고 쑤현이 공산당에 함락되었다. 이로 인해 쉬저우의 류즈군단은 포위되고 병력은 분할되게 된다. 2단계로 (1948년 11월 23일 ~ 12월 15일) 국민당의 황웨이병단이 섬멸되고 사령관 황웨이가 포로로 잡힌다. 두위밍 집단군이 포위된다. 3단계 (1948년 12월 16일 ~ 1949년 1월 10일) 국민당의 두위밍 군단이 섬멸되고 두위밍이 포로로 잡힌다. 66일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공산당의 전사상자는 13만 3500명이었고 국민당은 1개 전략 집단군 55만 5000명이 와해되었다. 이 중에는 장개석의 5대 주력군인전투를 거부하였고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일이 지속되자 심각한 내부 분열이 발생하며 지휘관들의 능력을 보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명예만을 고려하게 되기 때문에 계속 개별 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또한 1920년 초기에는 러시아 군대를 모방하여 모든 부대 단위에 정치위원을 두는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북벌이 진행되면서 지휘권을 통일하기 위해 폐지되었다. 이렇다보니 정치교육은 경시되어 전의는 약해지고 군인정신은 완전히 실종되었다.결국 국민당군의 부패 수준은 심각하여 각급 지휘관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척하고, 어떤때는 명령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전투 보고를 허위로 하기도 했다. 병사들 또한 마땅히 보호해야할 백성을 마구 해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조직은 전혀 없었다.그 결과 지휘관에 대한 감사나 견제가 적절하게 행해지지 않았고, 전투 결과를 명확하게 판단할 방법이 없었으며, 공산당 첩자나 공작원들은 정부와 군대 내 주요기관에 침투해 정보를 빼돌리고 허위사실을 유포해 불안감을 조성했다.전략적인 부분에서도 국민당군은 군사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보다 넓은 지역에 분산시켜서 한 번에 많은 지역을 점령하려는, 일명 ‘선을 길게 장악하고 점을 장악한다’는 전술을 펼쳤다. 하지만 이 전술로 인해 국민당군이 전장에서 공산군을 만났을 때, 기동력을 상실하고 공격당하는 곳을 제때 구원해 주지 못할 경우 각개격파의 형식으로 공산군에게 괴멸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언제나 전력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⑤ 경제정책의 실패내전 시기에 국민당의 지배하에 있던 대부분의 도시들이 엄청난 물가 상승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현물 사재기는 계속되었으며, 국민당의 지폐였던 법폐는 점점 가치를 잃어갔다.예를 들면 상하이의 쌀 가격이 1월에서 5월까지 4개월 동안 무려 5배로 오른 것인데, 이러한 인플레이션이 심하게 발생하게 된 까닭은 항일전과 내전으로 인해 국가예산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아48년 봄에 임표 군이 만주에서 일곱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취하고, 많은 군대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고 군수물자를 잃어버렸으며, 11월에 만주는 완전히 중공에게 넘어갔다. 1949년 1월 중공군은 천진을 맹공 하여 무력으로 이를 점령하고 화북초비사령관인 부작의를 회유, 설득하여 북평 평화에 합의 하여 중공군은 무탈하게 북평으로 진입하였고, 소수의 장개석 직계 부하장군들만 북경을 탈출하였다. 부작의 부대는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었다.1948년 9월말에 중공군은 유백승, 진의 등 80만 대군을 집결시켜 서주를 공격하였고 정부군은 40만 군으로 대적하였지만 서로 통신이 두절되어 작전은 실패하고 피해가 막대하였다.국민정부 군이 서주 전에서 실패한 후 정부안에서 다시 화의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2월 24일 화중초비총사령관인 백숭희와 호남성 주석인 정잠은 정부에 대하여 중공군과의 통보하고, 미국과 소련에게 국·공 사이를 조정하여주도록 청하자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호남성 주석인 정잠은 장개석 총통의 하야를 요구하였다.미국대사 슈트어트는 이종인의 정치 고문 감개후와 함께 공동으로 정부에게 5개항을 요구하였다. 1) 장 총통의 하야 2) 정치범의 석방 3) 언론, 집회의 자유 4) 양군은 각각 전선으로부터 30리 씩 철수 5) 상해를 자유시로 하여 정부의 주둔군을 철수하고, 각 당파의 인사들을 지명하여 상해시 연합정부를 조직하고 정부와 중공의 대표가 상해에서 화의를 의논하자고 하였다. 정부군이 계속 패하자, 11월 9일 장개석은 미국에게 원조를 조속히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장개석은, 11월말 송미령을 미국에 보내 마샬과 트루먼 대통령을 차례로 만나 미국의 지지를 요구하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다.스튜어트는 공개적으로 장개석의 하야를 주장한다. 장개석은 12월 31일 저녁, 이종인, 손과 등 당·정의 주요 인사 40명을 관저로 불러 하야문제에 관한 의견을 물었는데, 이 자리에서 장개석의 하야를 찬성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장개석이 하야하원인
    인문/어학| 2017.10.18| 15페이지| 2,5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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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전쟁사 레포트(2)-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을 읽고-Ⅰ. 서 론전쟁사 수업의 과제로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의 챕터 50부터 100까지 읽고 그 소감을 작성하게 되었다. 근현대사의 현대전의 흐름을 바탕으로 러일전쟁부터 2차대전까지, 그리고 몇 가지 현대전을 공부하고 조사해보며 책을 읽은 소감을 작성하게 되었다.고대.중세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전쟁이라 함은 직관적으로는 부국과 강병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또한, 전쟁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일반적으로 전략 전술 장비(무기) 군의 사기 기강 대장의 리더십 군사의 훈련 국가의 경제력 그리고 시대와 장소 등이 있다. 이제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을 읽으면서 전쟁에 있어 영향을 주는 다양한 상황과 전략. 전술 등에 대해 파악하고 공부한 것을 작성해 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러일전쟁일본은 세계에서 최초로 서양무기를 도입해 현대전을 수행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현대화를 실행했다. 정치와 경제의 대변화 속에서 일본은 동양의 최강국으로 성장했다.일본은 특히나 군대의 현대화에 힘을 쏟았다. 육군의 장비와 훈련은 독일의 제도를 따랐으며, 해군의 장비와 훈련에 대하여는 영국의 제도를 채택해 군대제도를 개편했다.이 당시 세계열강들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를 원했고, 영국, 프랑스 등이 지속적인 야심을 보였다. 일본은 당시 대륙진출을 위해 한반도에서 청나라와의 전쟁을 했고, 승전국이 된 일본은 한반도를 기반으로 대륙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만주까지 진출하게 된 일본을 보고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계속해서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1904년 2월 일본의 함대는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의 함대를 공격했다. 러시아는 물자수송의 어려움과 정권의 불안정함이 합쳐져 일본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더욱 힘든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여순항에 점령전이 시작되었고, 러시아는 요새시설로 방어를 했다. 일본군은 야간을 활용해 공격했고, 1905년 1월 1일 여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방어계획으로 신속히 전환했다.러시아의 전쟁계획은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동원이 덜 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군은 독일에 크게 패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게는 대승을 거두었다.8월 하순 서부전선은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파리를 향해 하루 20마일씩 행군했다. 독일군은 파리에서 보급 난을 겪고 병력도 충분하지 못했다. 독일은 파리를 점령하는 계획을 포기하고 동남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다 마른전투에서 약 200만 정도의 전투가 일어났다. 독일은 이 전투에서 패했고,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전쟁은 장기전과 소모전의 양상을 보이며 4년을 끌게 되었다.5. 탱크의 출현마른전투 이후 서부전선에서 지휘관들은 교착된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전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회가 불가능하고, 한곳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수도 없었다. 참호 내에는 깊은 대피호를 마련하고 상대방의 포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머물렀다.1915년 독일군은 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하게 된다. 주로 염소가스를 사용했는데 질식, 최루, 수포 등에 의한 살상효과를 냈다. 하지만 독가스로 오염된 공기가 정화될 때 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신속한 돌파를 하지 못했다.영국은 전차를 비밀리에 계획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전차를 ‘탱크’라 했다. 탱크는 속도도 느렸고. 행동반경도 좁았다. 솜 전투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지만 많은 결함을 보였고,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전차를 사용해 전선돌파를 시도했고, 성공적이었다. 그 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전차기술을 정교하게 다듬어 갔고 참호전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 후 지상전은 전차전이 중심이 되었다.6. 미국의 참전미국은 전쟁이 발발하고 중립을 선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합국 편으로 기울였다. 독일은 군국주의와 독재의 상징과 같았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문화적으로 훨씬 가까운 나라였다.전쟁 중 미국은 전쟁물자 수출에 열을 올렸고, 1916년 말경에 미국은 연합군의욕을 당하게 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너무 가혹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연합국을 향한 분노와 증오, 적개심으로 바뀌었다.1929년 대공황으로 온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져 혼란을 겪으면서, 독일 정치는 변화했다. 바이마르 공화정이 무너지고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다. 독일은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체제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기존의 국제질서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한 후 군부를 대우해주었다. 그러나 기계화 부대를 창설하고 공군을 창설하는 데 있어서 그 자신이 매우 열정적으로 나서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독일은 재무장 서서히 재무장 되었다. 히틀러는 1934년 총통이 되고, 1935년 징병제를 도입해 재무장하고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또한 인종차별주의자인 히틀러는 유태인과 아리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한 것은 영토에 대한 회복이 아니고 유럽을 지배하는 것이었다.10. 일본의 팽창러일전쟁의 승전국인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무한한 팽창을 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승전국이 된 일본은 중국에 대한 독일의 이권과 함께 마셜제도를 차지했다. 미국이 함대를 태평양으로 진출시키면서 영국과 일본, 미국 3대 열강은 본격적으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중국에 대한 팽창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대공황 이후 열강들의 해외진출에 대한 관심은 떨어졌다. 이 때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아시아 대륙에 대해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고,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패퇴하고, 명맥만 유지한 채 퇴각했다.중국군은 소련을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보급품에 의존했으나, 총 10%사단만 장개석에 충성을 바쳤다. 병사들은 급료와 급식을 제대로 지급밪디 못했고, 질병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 일본군의 만행이 겹치는 가운데 공산당은 점차 성장했다.중국과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일본은 만주와 소독일군은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공했따. 이때는 이미 독일이 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싸우고 있었던 중인데,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소련과의 전쟁을 벌였다.독일의 군부는 소련의 작전지역이 워낙 광활하고 대규모 예비대를 보유하고 있어 서유럽에서 단기결전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3개월 정도면 충분히 소련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과신했다.독일의 집중 포위공격은 성공적이었다. 소련의 항공기를 파괴하고, 전격전 전술로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독일군은 초기에 엄청난 전과를 올리고 대승했지만, 소련을 정복하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2차 대전은 동부전선에서 4년 동안이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파멸했다.15. 일본의 진주만 기습독일의 전격전 군대가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서유럽 일대를 석권하던 틈을 이용해,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하자,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다.미국은 상당수의 배를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옮겼다. 기계화전의 원동력인 연료부족을 늘 걱정해온 일본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동남아시아 자원지대를 확보하고자 했다.일본해군은 함대 수를 늘리고, 낡은 배를 현대화했다. 일본군은 중국에서 전투경험을 쌓았고, 전장에서 목숨을 버리는 희생정신이 있었다.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 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공격했다. 진주만의 미태평양함대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했다. 한나절도 안되서 태평양함대가 박살났다.맥아더 장군이 있었던 필리핀도 공습을 받고 미 해군기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 후 일본은 5개월 동안 최강으로 군림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목표의 성공을 거두고, 점령지역을 확보하고자 했다. 연합군은 이에 대해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6. 알 알라메인 전투2차 대전 중 유명한 장군들이 서로 대결을 벌였다. 독일의 롬멜 장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의 싸움이었다. 북아프리카는 지중해를 장악하는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중요한 곳은 언제나 유1944년 12월 독일군은 최후의 반격을 실시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독일 분할을 결정했다.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무솔리니가 군중에 의해 처형된 이틀 뒤였다. 5월 7일 되니츠 제독은 약 200만 명의 잔여병력과 함께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20. 미국의 반격과 일본의 패망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은 그들이 원하던 섬들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연합군 해공군력을 완전히 분쇄한 것은 아니었다.진주만에서 미태평양함대가 불구가 된 것은 일시적이었다. 특히 항공모함 피해는 전혀 없었으므로 곧 작전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다행히도 그곳에 없었다.1943년부터 본격적인 반격을 위해 미국은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일본은 항모에서 발진한 미 폭격기로부터 도쿄가 공습 받는 사건을 당했다.1942년 5월 사상 최초의 항공모함 전투가 전개된 산호해 전투에서 미국의 항공모함은 일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태평양전쟁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미군은 삼군 합동작전을 최대로 활용해 탈환작전을 개시했다. 하나의 섬을 탈환하고 그 다음에 차례로 인접한 섬을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적 기지를 파괴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상륙작전을 펼쳤다.1944년 6월 니미츠의 함대가 마리아나 군도의 사이판과 괌 섬을 공격해 점령했을 때 일본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이 필리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해군력을 집결시킴에 따라 1944년 10월 레이테 만에서는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은 가미카제 공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너무 무모했다.1945년 1월 맥아더의 육군은 루손 섬에 상륙해 5월경에는 거의 모든 필리핀 지역을 탈환했다. 미군은 4월 오키나와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오키나와에서 일본은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공군이 폭격에 가세함으로써 일본은 패색이 짙었다. 다.
    인문/어학| 2017.10.18| 13페이지| 2,5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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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영익과 보빙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미관계 대하여 - 행적과 업적을 중심으로
    한미관계사 레포트민영익과 보빙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미관계 대하여-행적과 업적을 중심으로-과 목 :교 수 :학 과 :학 번 :성 명 :- 목 차 -1. 서 론2. 보빙사 파견의 배경3. 보빙사의 전권대신 민영익4. 보빙사의 미국시찰5. 보빙사의 귀국이 가져온 영향6. 결 론1. 서 론척화론의 강력한 주자였던 대원군의 하야 이후 고종 치하의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76년 일본과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그 뒤 점차 서양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을 택했는데, 그 결과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 까지 청나라와 일본 이외에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 9개국과 차례로 외교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이 시기를 한국사에서는 통칭 ‘개화기’라 하는데, 한국 근세사에서는 개화를 통한 신 문물 도입과 사회 변혁이라는 의의와 외세의 본격적인 유입이으로 불거지게 되는 외교·경제적 문제점 도출이라는 의의 사이에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시기로 바라보게 된다.한 편, 그 중에서도 한미관계에 관련해서 더 다가가 보면, 미국은 조선이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서양 국가로서 1882년 이홍장의 알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수교를 맺게 되는데, 이는 거중조정을 포함하며 협정관세율이 비교적 높게 책정되었다는 점에서 불평등한 부분이 있었지만, 타국의 그것에 비해서는 관대한 편으로서, 고종과 관료들은 미국의 거중조정에 기대를 걸고 의존하는 정책을 택하게 된다. 그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고문관, 기술자, 교사를 초빙함은 물론 선교사도 받아들였는데,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고, 1888년엔 워싱턴에 주미 공사관을 개설하기도 하였다.미국은 조선에 대해 내정 불간섭 정책을 견지함으로서 전략적 동기보다 경제적 문화적 동기로 조선에 접근하여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알렌을 비롯한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류에 힘입어 개화 세력과 제휴해 조선나머지 하나는 고종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의 근거는 임오군란이후 중국이 한국에 대해 간섭정책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에서 최고책임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과시하려 외교사절을 미국에 보낼 것을 권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친청파인 민영익이 보빙사절의 전권대신으로 선발된 사실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근거로서 조선 정부는 1883년 보빙사 파견을 최종 결정하고 전권대신으로 민영익을, 부대신으로 홍영식을 임명하였는데 보빙사 일행으로 선발된 인물은 총11명이었다. 핵심인물로는 민영익,홍영식 그리고 서기관 서광범 등 세명이었다. 민영익은 중국과 일본에 대사로 파견되었던 경력이 있는데, 민영익,서광범,홍영식의 공통점은 이미 일본과 중국 등 해외에 나간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 수행원으로 유길준,최경석,변수,고영철,현광택 등 5명이 수반하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민영익이 선발된것이유가 중국과의 관계가 돈독해서라기보다는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인물이면서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등 해외 외교업무의 경험이 있는 능력 있는 관료였기 때문으로 외국사행에 적임자였다. 따라서, 한국의 보빙사절의 파견결정에는 중국 측의 의지보다는 고종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정리하자면, 조선정부가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한 목적으로는 첫째로 공식적인 목적은 조미조약체결 다음해인 1883년5월 미국정부가 서울에 미국외교관을 상주 시킨것에 대한 조선정부의 외교적 답례로서 조미조약의 외교사절교환 조항에 의거하여 미국대통령에 국서를 전달하고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의례적인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 중국을 위시한 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조선의 실질적인 자주독립을 꾀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려 했던 고종의 정책과 연관되어 있었다. 즉,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보빙사를 파견한 것이었는데, 조선 정부 내에서 미국에 외교사절을 보내는사의 미국방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이유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으며, 한반도에서 정치적 우위를 이용하여 모든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중국의 외압을 제거하고 동등한 무역의 기회를 획득하여 상업적 이익을 확대시키겠다는것이었다.3. 보빙사의 전권대신 민영익그러면, 보빙사의 전권대신으로 임명된 민영익이 어떠한 인물인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는 고종 12년인 1875년에 민비의 오빠인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삼아졌으며,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다. 그는 개화당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는데,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의 직책과,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을 지내며, 1882년 7월에 일어나는 임오군란 이전까지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다.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사이의 갈등과 마찰로 인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씨를 처결하려는 세력에 의해 가옥이 파괴당하였다. 임오군란 진압 후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일본에 대한 사죄사절이 파견될 때, 김옥균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의 개화 진행 상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천진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이 1882년 외아문과 내아문으로 개편될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이 되었다. 이러한 이력으로 겪게 된 외국과의 외교 경험은 그가 보빙사의 전권대신으로 임명되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된다.이후 1883년 5월 주한 미국공사 푸트가 내한하자, 그 해 6월 이에 대한 친선사절 보빙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미국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한글로 작성된 국서를 주며,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어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이하부터 세계여행까지의 내용은 차후 보고서에서 찾아볼 청나라에 납치,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회국 의사를 표명해 온 북양대신 이홍장과 대원군의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천진에 가서 대원군의 회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뒤 협판내무부사로서 지리국, 군무국의 총판을 겸직하고, 이어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를 지내며, 선혜청 당상까지도 오르지만, 고종 폐위사건에 연루되어 홍콩 등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4. 보빙사의 미국시찰1) 여정보빙사 일행이 미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883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였다. 보빙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6일을 체류하면서 체류 기간의 대부분을 캘리포니아의 상인들을 만나는데 할애했다. 이후 보빙사 일행은 시카고를 거쳐 9월15일, 워싱턴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은 뉴욕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곧 뉴욕으로 떠나야만 했다. 이후 9월17일 뉴욕에 도착하여 그 다음날인 18일에 마침내 미국대통령을 접견하고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였다는데, 이후 미국정부가 보빙사 일행을 위해 마련한 공식 일정은 정부가 주선한 사찰지역인 동부의 주요 세 개 도시인 뉴욕,보스턴,워싱턴 에서의 일정이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한후 시작한 보빙사의 공식일정을 더 파헤쳐 보면, 먼저 보스턴을 방문하여 보스턴의 외국박람회와 월코트 농장을 시찰하며, 월코트 농장에서의 최신 농기구와 농업기술 그리고 농장시설 등의 시찰을 통해 귀국후 최경석의 농무목축농장의 개설에 영향을 줄 수 이는 견문을 쌓게 되었다. 이후 보스턴에서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6일간 체류하였는데, 이 기간동안 병원, 전신회사, 소방서, 우체국, 제당공장,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등을 시찰하였다. 전신회사를 방문했을 때 유길준은 고국으로 돌아가 전기부터 개설해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 파급은 엄청났으며, 이런 효과에 보빙사의 귀국 이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는 창덕궁의 전등 가설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뉴욕의 일정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가서 체류한 10여 일 동안 보빙사는 본격적으로 미국에 온 조선정부의 외교국인 고문관을 초빙할 뜻을 밝혔다. 농무부로부터는 조선에서 재배 가능한 모든 농작물의 종자를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이로서 보빙사의 40여 일간의 미국 공식일정은 10월12일을 기해 끝나게 되고, 미국 대통령은 민영익에게 그가 선발한 두명과 함께 미국의 배인 트랜튼 호를 타고 대서양을 통해 유럽 일대를 돌아보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귀국하는 일정에 대한 제의를 했다. 민영익은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보빙사 일행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다른 루트를 통해 각각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보빙사의 부사인 홍영식은 통역관 로웰, 오례당, 미가사카와 조선인 수행원 최경석 ,고영철, 현홍택을 데리고 워싱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다시 태평양을 건너 1883년 12월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한 편, 민영익과 서광범 은 미국선박인 트랜튼호를 타고 대서양을 통해 유럽 일대를 돌아보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1884년 5월 31일 한국으로 귀환하였다. 민영익은 서광범 변수와 함께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6개월간의 세계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2) 민영익 일행의 세계일주민영익 일행의 세계일주간 여정을 살펴보면, 1883년 12월1일에 민영익, 서광범, 변수 일행은 포크 소위와 함께 트랜튼호를 타고 뉴욕을 출발하였는데, 포크 소위가 수행한 민영익 일행의 일정은 뉴욕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 근해의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마르세유,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의 주요도시들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이후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이집트, 예맨을 거쳐 인도양을 건너 인도, 스리랑카 등을 들린 후 싱가포르, 홍콩, 나가사키를 경유해 제물포에 1884년 5월31일 도착하는 일정으로 꾸려졌다. 미국 정부가 민영익 일행에게 트랜튼 호를 통한 여행을 제공한 이유는 민영익이 조선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고위관료로서 성장하게 되며 서구문물을 많이 접하게 만들어 미국에 우호적인 인물이 되기를 기대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민영익을 서양문물에는 우호적이게 만들었으나 정치인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는데, 푸트향
    인문/어학| 2017.10.18| 7페이지| 2,5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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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블랙 감상문
    특수교육 이해를 위한 영화 및 도서 감상문- 영화 ‘블랙’ -나는 특수교육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이전에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블랙’에 대한 감상문을 쓰며, 선천적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아무것도 보고 듣고 말할 수 없는 미셀을 보며 나 자신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그러함으로 빚어지는 상황, 그를 극복하기 위한 특수교육에 대한 내 생각과 감정을 고찰하고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할 것이다.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면, 영화의 제목인 ‘블랙’이 의미하는 뜻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미셀의 경우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블랙’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 매일 매 일상 반복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이 ‘블랙’이라고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이에 대해 당연하게도 미셀에게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당연한 빛과 소리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잃은 채 태어난 미셀은 보지도 듣지도 못 하는 어두움에 갇혀 있게 되는데, 이런 미셀에게 아빠는 그녀를 시설로 미셀을 보내려 하며 위협과 불안을 준다. 심지어 미셀은 몸에 방울을 달게 되고 그로 인해 울리는 방을 소리로 부모님은 미셀을 인지하고 찾게 된다.이런 어두움만이 존재했던 미셀에게 빛과 같은 존재가 한 명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사하이 선생님이었다. 미셀은 사하이 선생님을 만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느끼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하는 미셀에게 어떻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며 이 부분을 봤던 것 같다. 하지만 이윽고 사하이 선생님이 미셀에게 단어와 수화 등을 가르치는 모습이 나타나며 나는 감탄을 했다. 미셀은 물을 직접 만져보며 촉감으로 물을 느끼며, 선생님의 입모양을 느끼며 자신의 입으로 워터 라는 단어를 알파멧 하나 하나 말하게 된다. 그러한 선생님의 정성과 미셀에 대한 의지에 나는 정말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또한, 선생님은 절대 그녀에게 ‘불가능‘ 이라는 말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미셀이 ’불가능’ 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았다면, 미셀 본인도 불가능 이라는 개념을 인지하여 조금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쉽게 불가능을 외치며 포기했을 것만 같다. 왜나하면 우리 역시 불가능 이라는 단어를 인지하고, 알고있기 때문에 조금 힘들어도 불가능이라 외치며 포기하고, 의지가 약해지며 용기가 줄어드는 현상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이러한 사하이 선생님의 노력으로 미셀이 느낄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서 결국 여러 단어의 뜻을 알게 된다.정상적인 신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아동들을 가르치는 것도 교직이수의 과정을 밟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소 벅차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하물며 장애를 가진 아동을 가르치는 것이 그보다 쉬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과 역경을 모두 극복하며 미셀을 마음을 다 해 가르치는 사하이 선생님의 모습이 정말 진정한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감탄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미셀은 단어의 의미와 개념을 알게 된 것을 시작으로 점점 더 어렵고 다양한 개념들을 깨닫게 되고 점점 더 지식이 높아져 결국 대학교에 진학하기에 까지 이르른다. 단어 하나를 배울 때 있었던 어려움과, 그러한 작은 개념들부터 차근차근 알아갔던 과정을 보고 나니 이 장면에서 결국은 큰 관문을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물론 이후에도 미셀에게는 난관들이 쉬지 않고 닥쳐오게 된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미셀에게 사하이 선생님은 모든 강의 내용을 기록해 미셀에게 수화로 알려준다. 하지만, 그녀에게 문제가 된 것은 시험이었으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두 장애를 가지고 시험을 보면 늘 실패하고, 시험에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셀은 낙담하지 않고, 불가능을 배우지 않았듯이 포기하지 않으며 열심히 노력하고 달려간다. 자신의 어려움을 긍정으로 이겨가고 끝없는 노력과 노력 끝에 결국 40년 만에 대학교의 졸업을 하게 된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 때 사하이 선생님은 알츠하이머 에 걸리게 되는데, 그러한 탓에 사하이 선생님은 미셀마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이윽고 미셀은 그러한 사하이 선생님의 곁에서 사하이 선생님이 자신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똑같이 마음으로 사하이 선생님이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를 가르치게 된다. 선생님의 기억을 다시 되돌려 놓으려는 이러한 노력을 끝으로 영화가 끝나게 된다.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과연 나는 사지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나 자신에게 감사한 적 있는지, 건강한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매사 불평만 늘어놓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반성이 먼저 들었다.나는 나의 건강한 신체를 당연하게만 느껴왔고, 자연스레 그러한 당연함에 대해 소중함을 느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내 신체 내 신체 어느 한 곳에 장애가 있지 않고, 신체 모두가 그러한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에 늘 감사한 마음과 소중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어야 하는데 말이다.물론, 가끔 뛰다가 무릎에 찰과상과 열상이 일어나 샤워 하거나 일상생활, 운동을 할 때 그 쓰라림과 아픔에 불편을 느끼고, 건조한 입술이 터버려 작은 상처가 생겼을 때 입을 벌릴 때 마다 살이 갈라지는 그 따끔함, 오른 새끼발가락의 작은 통증 하나로 말미암아 걸음 자체가 불편해지고 발바닥을 놓을 때 마다 느껴지는 고통 등으로 인해 내 자신의 신체가 조금이나마 불편해 본 적이야 있지만, 그것이 장애를 딛고 버텨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불편함에 비할 수 있으랴. 그에 비한다면 이것은 정말 사소한 불편과 고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17.05.14| 3페이지| 2,000원| 조회(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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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대 주자학의 성립과 발전 평가D별로예요
    송대 주자학의 성립과 발전-목 차-Ⅰ. 송학의 발흥Ⅱ. 주자학의 성립Ⅲ. 주자학과 사공파Ⅳ. 주자학과 육학Ⅴ. 주자학이 후대에 끼친 영향Ⅰ.송학의 발흥1.송학의 발흥송 왕조는 중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이전과 이후의 사회가 뚜렷이 구분되는 기준점이 되는데, 중국 사상사에서 이를 살펴보면, 송대 이전에는 주로 도교와 불교 사상이 주도하였으나, 송대 이후에는 유교가 불교와 도교를 누르고 사상계에 있어 지배적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이후 유교 사상은 명과 청대에 와서도 지배적 위치를 유지한다.이런 송대 이후의 유교는 여러 면에 걸쳐 송대 이전의 그것과 차이를 보이며 그 성격상의 차이로 인해 송대 유교를 이르러 송학이라 부르며, 한나라대의 경학, 당나라의 주소학과 구분하게 된다. 주자학은 송학 중의 한 학파로서 남송 중기까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송대의 정치 문화가 지니는 새로운 분위기는 유교에 대한 자유롭고 비판적인 재해석과 창조정신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러한 자세를 기반으로 성립한 주자학은 점차 사상계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며 결국 송학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른다.이렇게 주자학이 형성. 확립되는 과정 속에 다양한 사상, 학술과 도교.불교의 일부 내용까지 수용되었는데, 당시 경제성장과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북송은 인종 중기가 되며 관료기구의 경직화, 계급분화 등의 내부 문제와 서북 국경지대의 서하가 송에 침입하며 북송의 정치,사회,군사,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재정적 궁핍과 관기의 해이, 관료의 부패 토지제의 문란 향촌사회의 붕괴 등에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경력의 정학운동은 이런 국가적 위기에 대한 사대부의 대처방안으로서 범중엄 손복 구양수 호원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정치 사상운동인데, 기존의 훈고,주소학과 도교 불교의 사사에 대항하여 유학을 지배적 사상으로서 확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정학은 당시 송대의 현실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지도원리를 끌어낼 수 있어야 했으며, 성장한경학과 정학 등 여타 송대 유학과 구별되는 근거는 사상 내용 면에서 주자학이 수용한 도교 불교의 요소를 들 수 있으나 이런 성격을 뒷받침해주는 유교의 경전적 근거로서 사서를 표창하게 되었다. 사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가리키는데 당대 이전까지 유가에서는 주공과 공자를 찬양해 태학에서 반드시 오경 등을 교재로 하며 논어는 이와 동일시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이단시하며 대학과 중용은 모두 예기의 한 편에 불가하다 하여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런 사서가 모두 존승되기 시작한 것은 송대부터였으며 주자학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그 내용이 정리되었는데 이후 주자학자들은 사서를 오경 못지않게 중시하였다. 주자는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는 공부할 것은 적어도 그 얻는 효과는 많으며 육경(六經)은 공부할 것은 많으나 그 얻는 효과는 적다.”라고 말하였듯이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를 중시하여 그 연구에 평생토록 정력을 기울였다. 이에 의해 주자의 사서연구가 그의 사성형성(思想形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알 수 있다.송대 주자학의 성립과 사서의 중시는 유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한 신유학 성립이란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였고, 본래 유교가 지니고 있던 家나 國의 질서체계를 재조화시켜 이를 형이상학화 하였다는 점에서 사상적 의의가 크다. 주자학자들이 사서의 중시하는 의의는 유교의 철학화 내면화 및 새로운 성격을 기전 유교의 질서와 연결 조화시키려 한 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주자학은 사서학의 수립을 통해 경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상의 경전적 기초를 확립 할 수 있었다.Ⅱ. 주자학의 성립1.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우주론유한에 있어 우주론의 전개는 주돈이에 의해 시작되고 장재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고의 복성성론을 계승한 주돈이는 성을 인식하는 것의 어려움 때문에 복성성성(復姓成聖)의 방법으로서 우주론을 전개한다.우주론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변해가는 육체에 있는 것인 반면에 불변의 본래성인 성(性)은 내면에 있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는 관찰할 수 없으 변화, 소멸현상을 기(氣)의 취산(聚散)으로 보고 있다. 그는 우주만물의 본질과 현상을 기(氣)의 취산(聚散)으로 설명하여 주돈이의 무극과 만물과의 상관관계에 관한 설명의 불충분함을 보완하였다. 그의 우주론은 우주 만물의 본질과 현상을 기의 취산으로 파악하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이다. 그러나 이 기일원론은 애초 만물의 생성, 소멸 현상에 대한 이론으로 출발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물질에 기반한 것이다.장재는 만물에 있어서는 기와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형기(形氣)와 덕(德)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다시 이와 덕에 그 우위를 부여한다. 또한 기를 태극과 만물로 이분하여 태극에 우위를 부여하므로, 전체를 기일원론적 입장에서 만물로 이분하여 태극에 우위를 부여하므로, 전체를 기일원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와 기, 덕과 형기는 모두 기의 세계에서 일원화된다.장재는 우주의 통일성을 물질적인 실재인 기로 귀결시키고 사물의 생사를 기의 취산으로 설명하였다.3) 정이의 이(理) 성격정이의 이(理)론은 주자의 이기이원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理)라는 개념을 이치(理致), 조리(條理)정도의 의미에서 학문, 사상체계의 중심개념으로 발전, 확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우선 이의 성격은 정의(情意)도 아니고 조작(造作)하는 것도 아니다. 즉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기론(理氣論)전개 자체의 목적이 진성하여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므로 성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는 신체에 있지만 부동자가 아니면 안된다. 성은 주관적인 것이고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변화하는 외부사물 가운데에서 부동자를 인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우주론을 전개한다. 즉 이기론이다. 여기서 변화하는 것인 기(氣)이고 부동자는 이(理)이다. 그래서 성(性)은 이(理), 신분은 기(氣)가 된다. 그러므로 부동성(不動性)은 이의 속성이 된다.-하늘이 부여해준 것을 명(命)이라하고 부여받아 나에게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한다. 그리고, 사물에 나타난 바를 이(理)라고 한다. 이(理). 성(性과 육·왕학의 주된 논쟁대상이었던 것이다.주자학의 공부 방법은 거경과 궁리로 요약되는데, 거경(居敬)은 심성 자체의 내적 함양을 뜻하고 궁리(窮理)는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대표되는 객체화시킨 심성을 포함한 외적 대상의 원리와 법칙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장재의 공부 방법은 기질의 성을 개변(改變)시켜 천지의 성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말하여 강한 실천주의의 경향으로 “궁리진성(窮理盡性)하면 성(性)은 천덕(天德), 명(命)은 천리(天理)가 된다.”고 말하였다.정이의 공부 방법은 “함양(涵養)은 반드시 경(敬)을 이용해야 하고 진학(進學)은 치지(致知)에 있다”을 통해 심성자체의 수양을 위한 공부가 ‘경(敬)’임을 밝혔고, “함양은 정(靜)의 공부이면서도 정(靜)이 아니다” 심성을 함양할 때는 ‘동(動)’의 입장에서 할 것을 말하였다.심성의 함양은 미발(未發)의 상태, 다시 말하면 감정의 활동이 없는 상태에서보다도 감정이 활동하는 이발(已發)의 상태일 때 그 장단점을 명확히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으므로 단순한 ‘靜’만으로는 불가능하며 ‘動’의 관점이 필요하였다. 동적 입장을 중시한 정이의 함양론은 심성의 부정적 측면인 ‘정(情)’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심성의 절제와 금욕을 강조하는 성격을 보이게 되었고, 감정의 부정적 측면을 강한 의지로 억제?극복하여 이를 초월하는 것이었다.‘경’의 공부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는 정제엄숙(整齊嚴肅)을 통해 주자학의 강한 예절과 명교중시 경향을 보여주어 ‘심’에 어떠한 구체적 가치 판단을 실시하지 않는 육?왕학의 함양론이 심의 긍정적 측면인 ‘양지(良知)’의 계발과 확충을 중시한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를 나타내었다.한편 정이는 ‘궁리’에 대해서 《二程全書》를 통해 “격물(格物)은 물(物)에 즉(卽)하여 그 이(理)를 궁치(窮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궁리(窮理)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각각의 사물에 응하여 그곳에 내재된 ‘이(理)’를 지적인 방법 즉 사색과 성찰을 통하여 밝혀내는 것이며을 주기의한 경세적 입장에서 경서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여 '이재(理財)'의중요성을 강조하여 이는 정당한 국가행위이며 단순한 조세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취렴(聚斂)'과는 다른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활동은 주자에게 경세의 의의와 관련하여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훗일 '전체대용'의 사상의수립과 사창법의 실시등 주자의 일련의 사상적. 실천적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에 의하면 주자는 도.불의 무적(無的).절대적 입장의 가치를 암암리에 인정하여 이의 개조에 의해 당시의 공리사상의 '비속성'을 공격하는 한편 도.불을 공격하려 했다. 이의 성과가 사창법을 비롯한 경계법(經界法), 황정(荒政) 의 실시등 일련의 정치. 사회활동 및 예학의 연구이다. 한편, 를 저술하여 방대한 예학 체계를 구상하였다.영강학파는 주된 사상적 연원은 금계학(金谿學)·영가학(永嘉學)과 함께 정자(程子)에게서 발원했지만 주자학(朱子學)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정자의 학통(學統)과는 영가학에 비해 연관성이 훨씬 희박하다. 이 학파의 주된 사상적 경향은 성명설(性命說)을 반대하고 공리(功利)를 주장한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공(事功)의 입장에서 심(心)·성(性)·명(命)·리(理)에 대한 이학자(理學者)들의 논의를 공담(空談)이라고 비판하면서, 의리는 이욕(利欲) 중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利)는 의(義)를 체현(體現)하고 인욕(人欲)은 천리(天理)를 체현한다고 하는 의리쌍행론(義利雙行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왕(王)·패(?)에 관한 변론을 일삼는 리학자들의 도덕적 역사관을 엄격하게 비판하여 왕패병용(王覇幷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리사상(功利思想)에는 백성들의 이익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으며, 이 점에서 중요한 사회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 학파의 사상은 동일한 사공학파의 한 분파였던 영가학파에 비해 훨씬 과격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을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의 근저를 동요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주희에 의해 불교·노장학(老莊學) 및 육구연(陸九淵)의 심.
    인문/어학| 2017.05.14| 16페이지| 4,000원| 조회(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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