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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왕조의 왕위계승<적장자왕위계승원칙을 통한 이양과 승계>
    조선시대 초기 왕위계승-적장자계승원칙을 통한 이양과 승계---Ⅰ. 서론1Ⅱ. 적장자계승원칙이 아닌 승계 11) 태종2) 세조Ⅲ. 적장자계승원칙을 통한 이양 21) 문종2) 단종Ⅳ. 비교3Ⅴ. 결론5참고문헌7Ⅰ. 서론이 글은 조선 왕조 왕권의 이양과 승계를 다룬다. 적장자 계승이란 정실 소생의 맏아들에게 조상의 제사를 단독 봉사하게 하고 재산상속에서 절대적 우대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적장자계승원칙은 조선시대 유교적 정책으로 인해 건국 초기부터 정착되었다. 조선은 건국 후 적장자 계승원칙을 1471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제화했고 1543년에는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서 서자의 상속권 조항을 삭제하는 등 유교적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유교적 정책에서 고려의 자녀균분상속을 없애고 적장자 계승원칙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였다. 적장자 계승원칙은 조선의 다음 왕을 계승할 때 최고 우선순위였다. 위의 내용을 고려해 추측해본다면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이 대부분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라 승계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적장자로써 왕이 된 자들은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에 불과하다. 몇 명의 왕은 적장자 계승원칙을 따르지 않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위의 왕들 중 적장자라는 명분을 제외하고 몸이 약하거나 어리서 또는 성품이 어질지 못해 왕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적장자 계승원칙을 따르지 않고 왕위를 계승한 자들은, 기본적으로 왕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컸다. 하지만, 반란을 통한 왕위 계승과정을 거쳤다고 하여 성품이 포악하거나, 어질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들은 적자라는 명분과 정통성이 없었을 뿐, 실제 정치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왕들도 존재했다.이 글에서는 적장자계승원칙을 따르지 않은 왕은 태종 이방원과 세조, 적장자계승원칙에 따라 왕위에 오른 왕은 문종과 단종을 다룰 것이다. 또, 이 왕들의 왕위계승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이나 왕들의 성품 등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적장자계승원칙에 따라 왕위에 오른 왕과 따르지 않고 승계태종과 세조가 왕이 된 과정을 살피며 이들의 왕위계승을 알아보고자 한다.1) 태종태종은 조선의 3대 국왕이며 태조 이성계의 5번째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는 무인세력과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조선을 건국했고 이 과정에서 종친 특히 이방원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방원 등 한씨(韓氏) 소생 왕자들은 조선이 건국되고 난 후 태조의 8남 강씨(康氏) 소생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맞물려 정치권력에서 소외되고 있었다.이방원은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정치적으로 추락하였고 급기야 태조 7년(1398)에 이르러 소위 ‘제 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게 된다.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이 죽고 이방과를 정종으로 세워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방간과 이방원의 세자 갈등으로 인해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방원이 승리하여 왕위 다툼이 끝이 났다. 이후 정종 재위 2년,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2) 세조세조는 세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7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세조는 적장자라는 명분이 없고 반란을 통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수양대군은 한명회·양정·홍달손 등의 30인 무인세력과 함께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세력을 잡아 왕위에 오르기 위해 명나라의 힘이 필요했고, 그 목적으로 수양대군은 자처하여 명나라로 갔다. 이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전된 것은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단종 1년(1453)부터이다. 이 계획은 결국 성공하여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고,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Ⅲ. 적장자계승원칙을 통한 이양문종과 단종의 왕이 된 과정을 살피며 이들의 적장자계승원칙에 따른 왕위계승을 알아보고자 한다.1) 문종문종은 조선 왕조 최초의 적장자 출신 왕이다. 문종보다 앞선 선왕들(태조·정종·태종·세종)은 적자는 맞지만 장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문종이 최초 적장자라는 명분을 갖춘 왕이라고 할 수 있다.문종은 세종의 맏아들이고 소헌왕후의 심 는 사실상 국왕 업무를 대신 도맡았고,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세종의 3년 상을 치른 후 문종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어린 세자 단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문종은 아내 복이 없기로 유명했다. 두 명의 세자빈을 거쳤지만 후궁 중 새로 세자빈을 간택하였고 단종을 낳았다. 하지만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하였다. 이후 세자빈 자리는 계속 공석이었고, 문종은 왕위를 이은 뒤에도 왕비가 없는 유일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단종이 왕위를 이은 후 그를 보호해 줄 조력자가 없어 왕권이 약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2) 단종단종은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문종의 재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세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다. 또한, 그에게는 그의 세력을 뒷받침해주거나 조력해줄 모후(母后)나 대왕대비(大王大妃)도 없었다. 유일하게 조력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선대의 정치에 참여한 경험이 있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보이지 않게 문종에게 견제당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단종 1년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하였다. 계유정난은 왕권이 취약한 틈을 노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행위였다. 야심을 가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의 준비가 완료되자, 단종의 측근이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후 안평대군까지 제거해 권력을 탈취하였다. 수양대군은 수족을 다 잘라 단종을 고립시켜 놓고, 공포에 떨고 있는 그를 겁박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수양대군은 문종과 단종이 즉위하였을 당시 위험세력들 중 약한 세력에 속해있었다. 만약 문종이 몸이 약하지 않았다면 또 단종이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었을 때 왕위에 올랐더라면 수양대군의 세력은 강해지지 않아 계유정난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Ⅳ. 비교위 글에서는 적장자계승원칙을 따르지 않은 태종과 적장자계승원칙을 따른 문종과 단종을 살펴본 결과 적장자계승원칙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적장자계승원칙을 따르지 않은 태종은 분 외에 건강이 좋지 않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왕권이 약화되고 정세가 혼란스러워졌다.우리는 태종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화를 달성하고, 유교 국가인 조선의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선 이방원이 행한 숙청은 왕 중심 국가에서의 왕권을 확립하는 것이었고 이에 관한 부작용을 최소화하였다. 또한 세자 책봉과 한양 정도, 대표적 공신 인척의 축출하는 훈척 제어와 육조를 승격하여 행정체계를 장악하였고 그는 민심을 수습하고 취약한 정권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존의 유교적 개혁을 이어받아 충실히 이행하면서 유교이념의 제도화를 이루어가고자 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국초기의 혼란 속에서 여러 정치세력 간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조정하면서 유가적 통치원리의 확립과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의 제도화를 달성해 갔는가를 설명하고 있다.태종은 명문과 정통성이 없어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회복을 시도했으며, 이를 왕권강화의 명분으로 삼았고, 권력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가졌다. 태종은 이를 통해 정변의 제약 조건에서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고, 계승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정치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또한 ‘태종’이라는 묘호는 건국 초기 혼란스러운 정국의 기틀을 잡아 안정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는 군주에게 붙이는 것이다. 이렇듯 태종은 나라의 기틀을 잡아 왕권을 강화한 왕이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적장자 계승원칙에 부합하는 정통성과 명분이 없더라도 왕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고 보인다.세조는 적장자계승원칙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 없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당 최고의 석학과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로 유학에 식견이 깊었으며 불교에 한 이해 역시 넓었다. 무예실력도 출중해서 ‘달리는 아홉 마리 노루 여섯 마리를 일거에 활을 쏘아 잡을 정도’였다. 그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井間譜)를 16정간으로 줄여 정대업(定大業)을 종묘제악에 실제 연주할 수 있게 했다. 안정적인 정치운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즉위한 직후부터 재위 말년까지 난언(亂言)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며, ‘사육신’ 관련 역모 음모가 터져 나왔다. 만일 세조가 적장자라는 명분에 연연하지 않고 뛰어난 역량으로 왕위에 올랐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뛰어난 군주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문종과 단종은 세종으로부터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라 왕이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러나 왕권은 정통성과 명분에 하자가 없다는 것만으로 유지되고 강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권은 국정 운영이나 군신과의 권력관계, 인사권 행사를 바탕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단종은 왕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으며 그의 세력을 키워줄 조력자가 없었다. 이를 틈타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였다. 문종과 단종은 적장자라는 정통성과 명분이 있었지만 왕권을 유지하고 키워낼 능력과 배경이 부족했다.Ⅴ. 결론지금까지 태종과 세조의 왕위계승과 문종과 단종의 왕위계승을 살펴보았다. 태종은 정통성과 적장자라는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 정종을 왕위에 앉히고는 결국 나중에는 태종 자신이 왕위 자리에 앉았다. 이러한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을 성공한 군주로 볼 수 있다면, 그 원동력은 그의 자기성찰 능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왕이 되기 전에 관료이자 유학자였던 태종은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유교 지식인으로서 태종의 자기성찰 능력은 정치에 있어서 비도덕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통치의 새로운 도덕적 기반을 찾음으로써 불완전한 시작이라는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애쓰도록 만들었다.세조도 적장자라는 명분이 없었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였고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세종만큼이나 문무악(文武樂)에 관심이 있었고 정치적 역량도 출중했다고 평가 된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계유정난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여 포악한 군주로 평가되기도 떠났다.
    역사학| 2017.12.03| 8페이지| 3,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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