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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로 보는 한국사] 오성과 한음 레포트
    조선 최고의 공직자오성과 한음과 목 명 : 인물로 보는 한국사담당교수 : 송기중 강사님제출일 : 2013년 10월 30일충남대학교 인문대학사학과 1학년 201300448성명 : 임수빈1. 서론조선 중기의 역사에서 위인전이나 심지어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중에 오성과 한음이 있다. 오성은 이항복이며, 한음은 이덕형이다. 오성과 한음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임에도 둘 모두를 선택한 것은, 관포지교에 이은 오한지교의 주인공인 그들을 역시 따로 떼어 놓고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선조와 광해군 대에 걸쳐 명재상으로 나라에 크게 공헌한 문신들인데, 우리가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지금껏 이들에 대해 다루어진 것들은 익살, 재치, 기지를 통한 오성과 한음의 우정만을 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정작 그들의 공로와 인간으로서의 고뇌, 학문, 정치, 외교 등은 소홀히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흔히 오성과 한음을 어렸을 때부터 죽마고우였던 개구쟁이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 두 사람은 죽마고우가 아니었으며 나이 차이도 오성이 한음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오한지교의 개구쟁이 시절 이야기는 모두 지어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다른 관점으로 조선 최고의 ‘공직자’로서 오성과 한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2. 경진삼이1556년과 1561년, 오성과 한음은 명종 재위 시절 재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오성은 이이를 만나 학문을 배웠는데 이 때문에 훗날 율곡 이이를 축으로 형성된 기호학파의 서인 계열에 서게 되었다. 또한 권철의 손녀에게 장가를 드니 바로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의 사위가 된 것이다. 한편 한음은 사상적으로 한평생 퇴계 이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동인의 거물이었던 이산해의 사위가 된 한음은 경진년 등과자로 첫 벼슬로 승문원 부정자 벼슬을 오성과 함께 받았다. 이 때 비로소 이항복과 이덕형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이 씨 성을 가진 유생이 또 한 사람 등용문에 올랐다. 이정립이다. 이들 세 사람은 율곡의 추천으로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호당에서 학문을 닦고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일하는 젊은 관리인 ‘옥당’에 뽑혀 나라의 인재로 유생들의 선망의 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을 사람들은 경진삼이(三李)라 부르고, 삼학사로 칭송했다.오성과 한음은 조정에 출사한 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외삼촌 유전이 당시 좌의정이었고 장인 이산해가 이조판서였던 한음은 조정의 이목이 껄끄러운 나머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예문관과 같은 관직에 나아가길 사양했다. 이에 유전이 이덕형의 앞날을 위해 한직으로 나아가길 요구했으나 선조는 덕형을 신뢰하여 그를 놔두었다. 이 때, 선조가 중국 송 대 사마광의 의 강목을 만든 을 강독하기 위해 재능 있는 신진 벼슬아치들을 선발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태학사였던 율곡 이이는 오성과 한음을 선발하는데, 그들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출내기라며 선발을 탓하는 한 재상에게 딱 잘라 말하며 항복과 덕형을 향한 시기질투를 직접 쳐냈다. 이 정도로 오성과 한음은 벼슬의 시작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이런 일도 있었다. 덕형이 홍문관 박사 시절 하루는 항복과 함께 숙직하자 선조가 두 질을 내주며 각각 제목을 써서 올리게 했다. 또 하루는 선조가 한 질을 내주며 덕형에게만 제목을 써 올리도록 한 것이다. 항복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덕형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함께 벼슬길에 올라 꾸준히 함께 지내온 두 사람의 우정은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비 온 뒤의 땅처럼 더욱 단단한 신뢰와 존경이 돈독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10년도 안 돼 벼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조정랑 자리에 오른다.3. 난정을 극복한 외교가이자 정치가1591년 이덕형은 31살의 나이로 조선 역사상 최연소 문형, 즉 대제학(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지성균관사 등 세 군데 기관장을 겸직하는 학문 최고의 벼슬)에 올랐다. 대제학은 본인이 원하고 임금이 추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 원로들이 엄선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 이항복 또한 도승지의 자리에 올랐다. 이 당시 조정은 일본의 통신사 파견을 두고 동서로 갈라져 싸우고 대립하며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저울질하던 시기였다. 동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내온 국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침략야심을 단순한 오랑캐의 허풍정도로 취급하며 전쟁은 없다 단락 지으며 동인의 주장을 동의한 선조는 명나라를 안심시키기 바빴다.결국 1592년 왜란이 일어나고 신립이 패해 선조의 어가는 북으로 몽진하게 되었다. 상주가 함락되었을 때 강화협상을 바라는 선봉장이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협상에 이덕형을 보낼 것을 적은 공문을 보낸다. 이덕형이 선위사 시절 왜인의 존경을 받은 터였다. 조정 중신들이 이를 말렸고 선조 또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한음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류성룡과 장인 이산해가 있는 동인 쪽에 기울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당론에 무조건 따른 것이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오성은 한음을 믿었다. 한음의 결연한 태도에 더는 말릴 수도 없었다. 조금 후 항복은 병조판서가 되어 명에 원병을 청하는 일에 덕형을 맡겼다. 덕형을 요동으로 보내고 항복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향했다. 항복은 경상, 전라, 충청 3남의 연락 문제를 해결해 근왕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선조가 몽진 길을 떠난 지 2개월만이었다. 덕형은 슬피 울며 호소해 명의 출병을 받아내었다. 명은 군사를 보내면서 조선이 오히려 왜와 함께 명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에 항복이 신묘년에 왜장이 보낸 교만 방자한 내용의 서찰을 보여주며 의심을 풀었다.한번은 명의 원병으로 온 이여송이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인 것을 알고 동성(姓)혼인이라 하여 오랑캐의 풍습이라 조롱했다. 본관이 다르다는 말은 통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 때 이항복이 덕형의 성은 원래 이(李)가 아니라 계(季)였으므로 동성혼인이 아니며, 선조의 총애로 어성(御姓)을 하사받은 것이라 재치를 발휘했다. 선조는 항복의 번뜩이는 기지를 칭찬했으며 덕형의 명성은 높아졌다.평양 탈환 후 병조판서 항복과 덕형은 명 장수들과 함께 한양 수복과 복구에 힘쓴다. 이 때 이덕형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데, 기복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두 달 만에 선조의 성화에 견디지 못하고 조정에 출사했다. 이조판서가 된 덕형은 시무 9조를 올려 국리민복에 도움 되는 헌책을 간했다. 또한 덕형은 명에 화약제조를 배우며 훈련도감 일에 더 열중이었는데 이를 본 선조가 덕형을 병조판서로 삼고 이조판서를 항복에게 맡겼다. 오성과 한음은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아 난세를 헤쳐 가는 주무 장관으로서 그 소임을 다했다.전란이 끝나가면서 좌의정 우의정이 된 오성과 한음은 전란이 끝나고 류성룡, 이원익, 윤두수, 이산해가 떠난 조정에서 이항복이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전란 후 이덕형은 4도 제찰사가 되어 남쪽을 돌며 전란이 쓸고 간 자리의 아픔을 다스리느라 노력했다. 그 후 덕형 또한 영의정이 되었다.4. 짧은 생애, 굵직한 삶임진왜란과 관련된 공신에는 3가지가 있다. 싸움터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으로서 공신자는 주로 무관들이다. 1등 공신에 이순신, 권율이 속해있다. 다음은 선조를 호종한 호성공신으로서, 1등 공신에 이항복이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 분조에 호종한 위성공신이 있다. 그런데 이 3가지 공신록에 이덕형은 그 어디에도 이름이 없다. 왜란 당시 그 누구보다도 건강을 돌보지 않고 때로는 싸움터를 누비며 공을 세운 이덕형이었다. 그런데 왜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을까? 이항복은 선조에게 비밀리에 아뢰며 이덕형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까닭은, 이덕형이 왜와의 협상으로 몽진 중 남하해 뒤늦게 평양에 합류했으며 명나라에 청원하러 간 탓에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을 호종하지는 않은 일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 한다. 임란 중 덕형의 정성과 슬기를 알고 있는 선조는 덕형의 녹훈을 명했지만 이덕형은 말썽 많은 녹훈을 사양했다. 그러한 까닭에 한음 이덕형의 공이 축소되어 있는 것이다.
    인문/어학| 2017.06.13| 5페이지| 1,000원| 조회(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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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갈량(제갈공명) 발표 피피티
    불세출의 정치가 제갈량 임수빈목 차 1. 서론 2. 제갈량의 족적을 따라 3. 신이 아닌 인간 제갈량 4 . 불세출의 정치가서 론일본 코에이 사 진삼국무쌍 ( 좌 ) 삼국지 시리즈 ( 우 ) 중국 드라마 신삼국지 중국 영화 적벽대전소설과 정사 속의 제갈량 소설 속 : 천재 , 전무후무한 책략가 , 제갈건담 ? 정사 속 : 노력형 인물 , 뛰어난 정치가 제갈량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어 공정한 정치를 행하였다 . … 그러나 매년 군세를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 군 ( 軍 ) 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 정사 삼국지 촉서성장통 정치 적 이 상제갈량의 족적을 따라제갈 諸葛 량 亮 공 孔 명 明후한 말 혼란기 황건적 , 군벌의 혼전 암울했던 청소년기융중융중 무수한 군웅 할거 이후 조조 vs 원소 관도대전 조조 승 손책 ( 손권 ) 의 강동 6 군 장악 눈치만 보고 있는 형주의 유표 조조 손책 유표 유비 ★ ★ ★융중 삼고초려 三顧草廬융중 융중대 隆中對 형주와 익주 점령 삼국 정립 천하 통일 한실 부흥 유비의 방향 제시 촉한과 삼국 정립 청사진 “ 촉한의 건국 강령 ”융중 수어지교 水魚之交적벽적벽 천하통일 위한 조조의 남정 유비 + 손권 연합 주유와 제갈량의 활약 조조의 패배형주 적벽대전 후 삼국의 정립 구도 결정 유비촉촉 익주목 유장 , 한중 장로의 침입으로 유비 불러들임 형주 입지 다진 유비 , 신세력과 입촉 낙성 전투 방통 죽음 이후 제갈량 , 장비 , 조운 입촉촉 유비의 한중 공격 제갈량 , 깨끗하고 바른 정치 실현 법제를 바로 세우고 관리 치적 바로 잡음 촉과 ( 蜀科 ) 법전 공포촉 유비 vs 조조 한중공략 유비 승 유비 일생 가장 찬란한 업적 융중대 전략목표 성공적인 실현 유비의 한중왕 칭왕촉 양양과 번성의 전투에서 오나라의 배신 관우의 죽음 , 형주 잃음 “관우가 패하고 자귀가 순식간에 넘어가니 , 이런 일은 정말 예측하기 어려웠다”촉 조조의 죽음 , 아들 조비 한나라 찬탈 위 ( 魏 ) 건국 유비 한 왕실 정통 촉한 ( 蜀漢 ) 건국 승상 제갈량 “짐은 황실의 불행을 만나 황제 자리를 공손히 이어받아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감히 편안히 있지 않았으며 ,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원하는데 아직 안정을 얻을 수 없어 걱정하고 있다 . 아 ! 승상 제갈량은 짐의 마음을 잘 알아 주고 게으름 없이 짐의 결점을 보좌하며 , 짐을 도와 공덕을 드날려 천하를 비추도록 하라 . 그대는 힘쓸지어다 .” 정사 삼국지 촉서촉 오나라 정벌 ? 조운 ( 조자룡 ) 과 여러 군신 반대 제갈량의 찬반 여부촉 이릉 전투 패배 삼국의 병립의 국면 최후 확정촉 유비의 죽음 어린 황제 유선 무향후 익주목 제갈량남만남만 제갈량의 남만정벌 칠종칠금 七縱七擒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았다 민족 간 화합북벌북벌 출사표 出師表 출정 때 황제 유선에게 올림 충신의 지표 조위 북벌을 통한 한실 부흥의 꿈북벌 육출기산 六出祁山 읍참마속 泣斬馬謖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벤다 : 대의와 공정함을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법을 제대로 세운 제갈량북벌 후 ( 後 ) 출사표 잇따른 북벌 실패 5 차 북벌 오장원 사마의 식소사번 食少事煩북벌 234 년 8 월 오장원 54 세의 나이로 병사 ( 病死 )북벌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도망가게 한다 “제갈량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움이 없는 ‘천하의 기재로다 !” - 사마의신이 아닌 인간 제갈량제갈량의 성장통 한 집안의 어린 가장 조조의 서주 양민 대학살의 피해자 태평성세와 한실 부흥의 꿈형주의 풍요로운 인문 문화 정독 x 전체적 맥락 o 관중과 악의 제갈량의 사상 형성 “황제의 권위가 이미 실추되어 한 왕조가 기울어지려 할 때 종친 중 걸출한 인물 을 도와 끊어질 듯한 한 왕조를 다시 일으켜 옛 수도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 배송지제갈량의 주변 인물 서서 방통 조운 강유 장완 법정 마량 마속담박명지 영정치원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박하지 않으면 뜻이 밝지 못하고 ,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생각할 수 없다 제갈량의 정치적 이상불세출의 정치가‘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뛰어난 인재로서 관중 , 소하와 비교할 만하다 .’촉한을 유지한 최고의 ‘ 정치적 ’ 능력鞠躬盡力 , 死而後已 ‘온 힘을 다해 ,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다 .’{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7.06.13| 44페이지| 1,000원| 조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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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갈량(제갈공명) 레포트 평가A좋아요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꿰뚫은 불세출의 정치가제갈량과목명 : 동양사입문담당교수 : 장인성 교수님제출일 : 2013년 10월 8일충남대학교 인문대학사학과 1학년 201300448성명 : 임수빈목 차1. 소설과 정사 속의 제갈량 22. 제갈량의 생장한 시대와 그의 가계 23. 융중에서 10년간 농사짓고 독서하다 34. 천하를 삼분할 기틀을 갖추다 45. 정족의 형세가 이루어지다 56. 조위의 북벌에 온 힘을 쏟다 77. 불세출의 정치가 78. 참고 문헌 71. 소설과 정사 속의 제갈량제갈량 또는 제갈공명. 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이 아니라도 그가 유비, 관우, 장비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탁월한 인물이었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한 이문열의 삼국지나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으로서 연의를 접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제갈량을 전무후무한 책략가이자 변설가, 타고난 천재, 못하는 것이 없는 ‘제갈건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연의 속 그는 모든 면에서 유능한 존재로 나올 뿐만 아니라 동남풍을 부르는 등 온갖 신기한 재주를 다 부려버려서 후대 사람이 마치 요술가처럼 보인다고 비판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 정사 속의 제갈량은 그와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타고난 천재가 아닌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며, 군사장군으로서의 면모보다는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가진다. 이는 정사를 지은 진수의 평가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제갈량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영토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중략. 그러나 매년 군세를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임기응변의 군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제갈량이 계책을 냈다고 하는 전투들은 대부분 유비가 한 것이었다. 그의 군사적 부분은 허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연의를 최대한 존중하되, 정사를 기반으로 하여 한 시대에 속해있던 인간으 이런 혼란기는 그의 삶이나 정치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고향까지 파급된 전란으로 숙부를 따라 남하했었다. 조조의 서주 목 도겸에 대한 아버지의 죽음의 복수로 벌어진 서주 양민대학살그러한 유랑생활은 그에게 태평성세의 꿈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한 군벌의 혼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면서 제갈량은 한 왕실의 앞날을 걱정했고, 백성들의 고통에 깊은 동정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제갈량에게는 그가 생존한 사회 토양, 접촉한 시대적 정보, 불안정한 정국, 날마다 겪는 상황 그 어느 하나도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余明俠,『제갈량 평전』, 지훈, 2007, 39-40p3. 융중에서 10년간 농사짓고 독서하다그 후 제갈량은 양양성 서쪽에서 20리 떨어진 남양 등현 융중산으로 들어가 초막을 세우고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당시 그가 터를 잡았던 형주 일대는 채 씨 가문이 세를 떨치고 있었다. 형주 자사 유표가 채풍의 작은딸과 혼인하며 형주 사족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던 것처럼, 형주 사족이자 채풍의 큰딸과 혼인하여 유표와 동서 관계가 되었던 황승언의 딸 월영과 혼인함으로써 제갈량은 형주의 상류사회로 진입하게 된다.형주의 평화로운 환경과 양양의 풍요로운 인문 문화는 제갈량이 널리 여러 책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고 꿰뚫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유가 경전 이외에도 법가, 병가, 종횡가 및 도가의 책을 읽었다. 담박명지 영정치원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박하지 않으면 뜻이 밝지 못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생각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도가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그가 책을 읽을 때 특이한 점은, 바로 “정독하려”하지 않고 “그 전체적 맥락을 보려고”했다는 것이다. 즉 한 대의 유생들과 달리 깊이 들어가 그 요체를 간파하는 방식이었다. 그가 세상에 나서 학문을 펼치려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그는 키가 여덟 자로 용모에 위엄이 있었으며 늘 자신을 관중과 악의 전국시대의 뛰어난 전략가. 관중은 춘추 시대 제나라 환공이 그를 상국으로 역사상 약하고 적은 군사로 강하고 많은 군사를 이긴 관도 대전이다. 또한 그 동안 북방의 싸움이 지속될 때 강남 지역에서는 손견 사후 그의 아들 손책의 역량이 강대해져 강동 6군을 장악하며 남쪽의 실력자로 떠오른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손책은 허도를 몰래 습격해 헌제를 모셔오기로 했다. 그러나 그 해 4월 뜻밖에도 원한을 품은 자들에 찔려 치명적인 상처로 죽고 말았다. 그는 조조도 두려워한 맹장이었으니 그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관도의 싸움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제갈량평전, 104-105p)천하의 중심에 있고 10만의 대군을 거느렸음에도 조조와 원소의 싸움에서 눈치만 보던 형주의 우유부단한 유표는 결국 북방을 평정한 조조의 칼끝이 형주로 향하게 만든다. 이 때 황실의 후예라 칭하나 실력이 없었던 유비가 그의 객장으로 신야에 의탁해있었으니, 수년 동안 사방을 표류하며 변변한 근거지도 한 곳 얻지 못한 유비의 이러한 고민이 제갈량과의 만남을 재촉하게 된다.수경선생 사마덕조(사마휘)와 서서의 강력한 추천으로 유비는 삼고초려 끝에 207년 마침내 와룡과 봉추 중 와룡(臥龍) 제갈량을 만난다. 이 때 제갈량의 나이 스물일곱, 유비의 나이는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마흔일곱이었다. 천하의 영웅이 몸을 낮추고 삼고초려를 하며 성심을 다하자 감동한 제갈량은 손권과 연합해 천하를 삼국으로 나눈 후 천하를 통일하고 한 황실을 부흥시킬 계획인 ‘융중대(隆中對)’ “중략. 장군은 이미 황실의 후예인 데다가 신의는 천하에 빛나고 영웅들을 널리 불러 받아들이며, 목이 마른 것처럼 현인들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주와 익주를 점거하여 그 요충지를 지키고 서쪽으로는 각 만족과 조화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이월을 위로하며 밖으로 손권과 맹약을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하면 천하에 변화가 생길 테니, 상장 한 명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대를 완현과 낙양으로 진군시키고 장군 자신은 익주의 병력을 이끌고 진천으로 출격한다면 백성이 어찌 감히끌고 돌아갔다. 유비는 마침내 강남을 되찾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과 계양과 장사 세 군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 부세를 조달하여 군용물자를 충실하게 했다. 陳壽,『정사 삼국지 촉서』,민음사, 2007, 116p이 승리들은 제갈량이 융중에서 제시한, 오에 연합해 조조에 저항한다는 전략의 정확성을 증명한 것이다. 적벽대전으로 인해 삼국의 정립 구도가 결정된 것이다. 제갈량 평전, 158p5. 정족의 형세가 이루어지다211년 익주목 유장이 법정을 보내 유비를 맞이하고 장로를 치게 했다. 형주에서 입지를 확고히 한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사천에 입성한다. 그 가운데 낙성에서 봉추 방통을 잃는다. 그 후 오랫동안 낙성을 포위하고만 있을 때 2년 뒤 제갈량이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촉을 공격한다. 드디어 214년 두 군대가 만나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투항을 받아 낸다.성도를 평정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아 좌장군부사를 대리하도록 했다.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는 동안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 지키면서 식량과 군수물자를 충분하게 했다. 그 후 제갈량은 촉지를 다스리게 되는데, 이를 보고 위나라의 가후는 ‘제갈량은 치국에 능하다’고 평가했다. (인의로 천하를 얻다, 227p)그는 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선결 조건이 안정된 형국과 깨끗하고 바른 정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갈량은 법제를 바로 세우고 관리의 치적을 바로잡는 일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법정, 이엄, 유파, 이적 등과 법률 자문인 ‘촉과(蜀科)’를 만드는 일을 직접 주도해 완전한 법전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공포했다. 또한 신하들을 훈계하고 격려하는 법률 조항을 특별히 제정해 법에 의거해 공평타당하게 공을 따지고 죄를 결정하도록 했다. 제갈량이 전력을 다해 치세에 힘쓰자 촉지의 경제는 빠르게 나아졌다. 성도 평야가 비옥해지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 된 것은 다 제갈량이 이 때 치세에 힘쓴 덕분이었다. 인의로 천하를 얻다, 227-230p유비가 한중을 공격해 전 영역을 확보하는 데는 전후 3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유비는 황제 자리에 오르고,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는 책문에서 이렇게 말했다.“짐은 황실의 불행을 만나 황제 자리를 공손히 이어받아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감히 편안히 있지 않았으며, 백성의생활을 안정시키기 원하는데 아직 안정을 얻을 수 없어 걱정하고 있다. 아! 승상 제갈량은 짐의 마음을 잘 알아 주고 게으름 없이 짐의 결점을 보좌하며, 짐을 도와 공덕을 드날려 천하를 비추도록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정사 삼국지 촉서, 117p이 글 속에는 유비의 정치적 이상과 제갈량에 대한 기대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제갈량으로서도 난감했던 것은 유비의 오나라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유비는 관우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오나라 정벌’을 고집함으로써 ‘한실의 부흥’에 필수적인 조위의 북벌을 한쪽으로 제쳐두는 모순을 범했던 것이다. 촉한의 여러 장수 중 가장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조운 “나라의 도적은 조조지 손권이 아닙니다. 만약 먼저 위나라를 멸한다면 손권은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지금 비록 조조가 죽었지만 아들 비가 나라를 훔쳤으니 응당 사람들의 마음을 쫓아 관중에서 먼저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중략. 위나라를 두고 먼저 오나라와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쉽게 마무리되기 어려우니, 상책이 아닙니다” (제갈량 평전, 220p)과 촉한의 여러 군신들이 오나라 정벌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관우와 장비를 잃고 복수심에 불탄 유비는 끝내 이릉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 이후 삼국의 병립의 국면이 최후로 확정되어 각국의 경계가 나누어지게 된다. 여기서 제갈량의 ‘찬반 여부’에 대해 사적 중에는 어떠한 기록이 없다. 그 또한 오나라 정벌에 일말의 기대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한 헌제에 대한 복수가 더 중요했다. 그는 유비가 불같이 화내고 있고 그의 형이 동오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상황에 감히 직언으로 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유비에게 직언을 해 벌을 받은 비시와 진복 등의 인물을 다시 중용한 것만 보아도 알 다.
    인문/어학| 2017.06.13| 8페이지| 1,000원| 조회(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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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평 평가A+최고예요
    #서평,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를 읽고.『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은 유럽이 바다를 통해 그들의 세력을 키우고 세계 각 지역의 주민들과 조우하며 형성되어진 근대 세계의 전반적인 구조와, 세계 문명권들이 상호 접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 상호 접촉과 고통은 곧 갈등과 지배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세계의 수직적인 구조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머리말5p)적인 관계의 구조화,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근대 세계에서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종합적인 전망으로 살펴보고 있다.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 사이에 유럽인들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 마젤란 일행에 의해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이 시기를 ‘발견의 시대’, ‘팽창의 시대’, ‘대항해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럽이 주도한 ‘발견’과 ‘팽창’은 아메리카 대부분, 아프리카와 아시아 해안 지역,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정치적 지배로 이어졌으며, 이 정치적 지배는 비유럽에 대한 유럽의 경제적 착취와 종교적 지배를 초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유럽인들의 ‘대항해’는 유럽인의 세계 지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김원중, 『대항해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민음인, 2010, 8p)주경철 서울대학교 교수의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에서는 주로 대륙문명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했던 그동안의 학풍과 달리 해양문명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해양 세계의 발전과 그에 따른 근대 세계의 팽창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특히 유럽중심주의 이에 따르면 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활발하게 해상 팽창을 한 주체는 유럽이며, 따라서 유럽이 근대 이후 세계사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나머지 지역들은 수동적인 자세로 있다가 결국 유럽의적으로 늘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다는 주장이 아니라 유럽이 절대적 보편성을 가진 ‘기준’이 되어 나머지 모든 지역의 역사를 그 기준에 맞춰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대항해시대』, 머리말7p-으로 수정되어 극복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한다. 그 예로 레판토 해전에 대한 국내외 보통의 해석과 터키 역사가들의 해석이 차이가 나고 있음을 들고 있는데, 그처럼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해양 근대사를 재해석할 예정임을 미리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주경철 교수가 유럽이 이후 세계의 핵심세력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유럽중심주의적인 사관에 얽매여 있는 본디의 우리는 흔히 근대 이후에 유럽만이 강력한 힘을 행사하면서 해외 팽창을 했으며, 나머지 지역들은 가만히 앉아서 유럽의 침입을 기다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유럽이 처음부터 이렇듯 독주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5세기 대항해시대는 단지 유럽의 팽창이 아닌 세계의 팽창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주경철 교수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명권이 유럽보다 세계 지리를 훨씬 잘 알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남아프리카를 그린 지도를 들고 있다. 『대항해시대』, 11~12p바다를 통한 교역은 아시아에서 일찍이 발달하였는데, 유럽의 독주의 조짐이 보였던 것은 아시아인들의 다문화적이고 평화로운 교역 관습에 진출이 용이했던 유럽인들이 ‘무력’을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다. 낯선 지역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경우에 따라 무력 행사를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 가능했던 것#서평,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를 읽고.이다.포르투칼의 '에스타도(Estado)체제'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country trade)’은 완전히 반대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타도(Estado)체제’는 무력을 통해 상대방의 이윤을 빼앗는 방식, 즉 ‘재분배’형태 이윤을 창출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이윤의 일부를 자기가 취한다는 의미 (『대항해시대』, 24p)였다. 이러한 약탈 상품을 사서 다시 다른 곳에 판매하는 식의 연쇄적인 거래관계를 말한다. (『대항해시대』, 25p)그들은 기본적으로 교역을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아시아 현지의 시장경제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고 볼 수도 있었다. 스틴스고르(N. Steensgaard) (『대항해시대』, 25p)전 세계 3대륙에 걸친 거대한 식민국가가 되었던 포르투칼의 무역 방식은 ‘군주 자본주의’를 띄었다. ‘카레이라 체제(Carreira, 국왕선박항로)’와 카르타스(Caraz) 제도가 그것이다. 카레이라 체제는 국왕의 계정으로 사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왕 소유의 선박에 국왕의 상품을 싣고 가서 거래를 하고 그 이익 역시 국왕에게 돌아간다. 카르타스 제도는 폭력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주요 항로의 길목을 지키면서 안전통행증을 판매하는 식으로서 운영 방식을 합리화한 해적 행위 혹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대항해시대』, 56p)포르투칼이 아시아에서 이룩한 것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칼 해상 제국은 근본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국을 내적인 부패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포르투칼의 무역 전진 기지들은 1600년경 동아프리카와 일본 사이에 약 쉰 개에 이르렀다. 유럽의 가난한 국가인 포르투칼이 그처럼 넓고 분산된 점령지를 유지하고, 이익을 남기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내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김원중, 『대항해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민음인, 2010, 75p)17세기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하나둘 뒤처지며 현지 세력들도 포르투칼을 버리고 네덜란드와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포르투칼은 실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아메리카 대륙은 우선 심각한 전염병의 발병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인구의 극적 감소는 곧 다른 대륙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인구 유입을 불러왔다.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가 형성되면서 소수 지배자와 다수의 노동자 집단이 상품 작물을 경작하는 플랜테이션 사회비하며, 또 외국 상인들이 식민지에서 직접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에스파냐 본국의 세비야(16-17세기) 혹은 카디스(18세기)에 와서 식민지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대항해시대』, 71p)으로 수많은 아메리카산 은이 유통 화폐 역할로서 세계의 경제적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유럽이 아시아의 문호를 열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세계 여러 문명의 만남은 대개 평화적이기보다는 폭력적이었다. 근대 유럽이 가공할 무력으로 세계에 큰 충격을 가했고 이것이 결국 그들의 지배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해외로 나갔을 때 최대의 이윤을 얻으려 했고 그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인 쿤(Coen)이 그들의 폭력성을 합리적으로 포장한 말이 있다.#서평,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를 읽고.“여러분들이 경험으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시아에서 교역은 무기의 보호와 도움으로 이루어지고유지되지만, 또 그 무기는 교역 이윤으로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교역은 전쟁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전쟁은 교역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Parker 1991: 179-180) 『대항해시대』, 236p근대 초기는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시기였다. 근대 초기부터 유럽이 전 세계 여러 문명에 비해 절대적인 군사력 우위를 확보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핵심적인 지점을 장악하고 그것을 쐐기로 삼아 점차 내부로 뚫고 들어가고는 한 것이다. 군사상의 혁신이 일어난 곳은 유럽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 결과는 유럽 바깥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 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하고 식민지 개발의 주도권을 쥔 것은 에스파냐였지만 점차 영국과 프랑스가 경쟁에 뛰어들었고, 곧 이들이 더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팽창을 시도했으며 프랑스는 세인트로렌스 강 연안 지역에서부터 식민지 건설을 시작했다.(이영림. 주경철. 최갑수,『근대 유럽의 형성 16-18세기』, 까치이고 사람의 소유를 통해 소득을 취한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사회에서 국왕과 귀족은 지주가 아니라 노예주이다. 아프리카에서는 가혹한 처우를 받는 노예도 있었지만 훨씬 나은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노예들도 적지 않았다. 노예는 투자 대상이고 부의 과시 수단이며 세력을 증대시키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소모적인 방식으로 노예들을 혹사시킬 이유가 없었다. (『대항해시대』, 293~295p)그러한 아프리카의 기존 노예제와 유럽인이 주도한 대서양 노예무역의 관계에 대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의 희생을 강조하는 견해이다. 흔히 생각하듯 노예무역이 기존 노예제를 더욱 악화시켰으며 인권적,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더 많은 전쟁을 불러왔음을 주장한다. 또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수정주의’ 견해이다. 노예무역이 아프리카 사회에 결정적인 악영향은 끼치지 않았으며 내부의 수요 증가에 대응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가증스러운 주장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본 의도는 유럽중심주의를 수정하자는 것이다. 속절없이 아프리카 인들의 피해만 강조하다 보면 결국 그들이 무능력한 존재로 그려질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어찌되었든 아프리카 인들 역시 역사의 중요한 주체였음을 밝히려 하는 것이 그들의 의도이다.대서양 노예무역 이전에도 노예 거래는 존재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노예무역과 대서양 노예무역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만은 지적할 만하다. 사상 유례 없이 비극적인 성격의 노예무역이 만들어진 데에는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의 형성과 관련이 있었다.노예 매매는 식민지 아메리카 경제의 핵심 요소였다. 그것은 저생산성, 저성장, 고위험을 특징으로 하며, 실제로 이 사업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국가들도 포르투칼처럼 경제 성장에서 뒤쳐진 후진국이었다. 말하자면 포르투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 노예무역으로 도피했고, 더 나아가서 노예무역에 특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포르투칼 노예무역은 대서양 경제의 주류 밖에서 돌아갔던 것이다.(『대
    인문/어학| 2017.06.13| 5페이지| 1,000원| 조회(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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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서의 과학
    진리 그리고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서의 과학 -인간은 진리를 좇는 존재이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인간은 항상 불변하고 보편적인 절대적 가치와 존재를 추구해왔고 그 과정 속에서 철학, 과학, 종교, 예술이 꽃피워왔다. 그 중에서 과학은 수학적 증명과 과학적 관찰에 의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신뢰받아지며 절대적인 가치라는 ‘진리’에 가까워 보인다. 중세가 신 중심의 종교의 시대였다면 이성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 근대 사회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고 인류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번의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 대결에서 본 것과 같은 인공지능(A.I) 즉 기술과 과학에 대한 두려움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이끌었다. 인간은 우리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했고 발전, 성장, 기술 같은 것은 이 시대의 주도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겪은 과학기술의 폐해와 산업사회의 부작용, 머리로 이해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 특히 그 정수에 해당하는 과학에서도 불완전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진리’에 대한 태도는 변화하고 있다.사실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과학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이다. 더군다나 과학의 역사가 절대적인 것들의 연속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이해가 되는 사실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그 때의 상식에 부합했고, 수학적으로 예측되었으며, 이 땅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종교적 관점에서도 옳았기 때문에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졌다.그 이후 뉴턴과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의 과학은 수학과 관찰을 토대로 완벽한 고정불변의 진리를 찾고자 했다. 이 때까지의 과학을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고 예측된다. 특정 시점의 우주의 물리적 조건에 대해 정확히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나타난 양자역학은 철저히 확률의 물리학이다. 즉 비 결정론적 세계이다. 예측될 뿐 확정되지 않는다. 진리라고 여겨졌던 과학이 상대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과학자였던 닐스 보어에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라고 답했다.
    교육학| 2017.06.13| 1페이지| 1,000원| 조회(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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