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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23편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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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포트| 2022.06.24| 10페이지| 2,000원| 조회(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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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이하리라>를 읽고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이하리라>를 읽고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이하리라래리 L. 라이크의『아가와 히브리 성서의 사랑신학: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이하리라』에 대한 요약 및 소감문소개의 글아가서에는 하나님이 언급조차 되지 않으며 외설스럽기까지 하여 정경성에 대해 논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라이크는 처음부터 아가서가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동안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반응력’을 통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서론성서에서는 주로 성적 행위를 통제하고 금지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아가서는 인간의 사랑과 욕망을 찬양하는 시가이며 하나님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본문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정경이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반응력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초기 유대교 해석은 아가를 출애굽 동안의 구애로 시작해서 상상의 제 3성전을 기대하기까지의 하나님과 그들의 오랜 연애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초기 기독교도 아가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지속적인 친밀감에 대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성서적 해석에 근거가 있는가? 그에 대한 옹호자들은 히브리성경에 나타난 사랑신학과 관련되 구절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 사랑신학의 첫 번째 기둥은 그것들은 결혼/간음 모티브와 관련되어 있다. 에스겔서 24장에서 제1성전의 멸망의 징조가 것이 바로 에스겔이 아내를 잃는 것이다, 또한 애가는 강간당한 여인과 성전을 연관시킨다. 성전-여성 모티브가 내포되어 있다. 이 사랑신학은 이제 여성 샘 지혜 그리고 율법과 관련하여 발전한다. 집회서는 여성이면서 지혜가 다름 아닌 율법이라는 주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사랑신학의 두 기둥에 살펴보면 하나님은 남성으로 이해되었고 성전과 ‘배우자’는 여성으로 이해되었다.제1장 결혼, 배신 그리고 이혼 예언자 비판결혼과 간음의 언어와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는 예언자적 관용어이다. 예언어서에 이 모티브가 진화하고 발전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가서와는 반대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다른 애인들에게 모두 너무 빠르는 느낌을 피하기 여렵다. 아시리아와 아시리아의 종교적 행위가 야웨의 아내가 눈 돌린 바알과 같은 남성 애인들이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행동으로 고동당할 매춘부 혹은 음녀로서 인식된다. 니느웨가 여성으로 이해될 때. 이스라엘은 틀림없이 니느웨의 잠재적인 남성 구혼자들중 하나로 여겨질 것이다.에스겔에스겔에서 결혼/간음 모티브에 충실한 두 본문 16장과 23장을 만나게 되는데, 이 본문은 각각 예례미야 3장의 “음탕한 자매”를 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에스겔은 결혼/간음 모티브의 이전 예와 공동적인 어휘, 비유적 표현 그리고 열정을 가져와 사용한다. 에스겔 16장은 예루살렘이 매춘을 하고 간음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전념하고 있는 63개 절고 구성되어 있다. 알몸 노출 모티브와는 상반되는 것을 보게 된다. 유다의 알몸을 덮어주는 것은 유다와 야웨가 언약을 맺음으로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호의 부분이었다. 야웨는 유다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이용하고, 행음하고 지나가는 자들에게 그녀의 애정을 쏟아 붓는 것에 대한 비난한다. 야훼는 그녀가 야웨의 선물인 자신의 아이들을 다른 이방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고 말하고 있다. 유다의 행위가 화대를 받는 음녀의 수준에 조차 오르지 못했다며 야웨는 계속해서 비난한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는 애인들에게 값을 치루기까지 하였다.에스겔 16:44-63에는 예레미야 3장에서 먼저 보았던 자매 모티브가 등장한다, 에스겔이 유다의 여동생을 소돔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댜의 죄가 그녀의 자매들이 오히려 의로워 보이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특별히 야웨는 그녀가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그녀 자신을 더럽혔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신 오홀라의 알몸을 드러낸 것은 야웨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아시리아 연인이라는 점에게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에스겔 23:38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간음을 자신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성전의 더럽힘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을 본다.예언자의 지판 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여성으로 비유된다. 유딧서는 애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필요에 따라 개정하여 전형적인 적인 아시리아가 성전을 유린하지 못하게 막아낸다. 이러한 유형의 허구는 과거에 심한 타격을 받았던 문화권에서는 공통적인 것이다.성전과 에덴에스겔 28:13-14에서 창조자가 그랬으면 하고 바랐을 모습대로의 세상으로서의 성전개념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전을 에덴동산과 동일시하는 부분은 풍요로움에 대한 비유적 표현에 의존해 있다. 여성의 자궁으로 이해되는 성전은 또한 히브리 성서 일부에서 에덴과 더불어 인간 생명의 시작과 연관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전은 인간이 그들의 생명의 시작과 연관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전은 인간이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고 그들의 궁극적인 시작과 최종적인 회복을 찾아낼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제3장 여성, 우물, 지혜 그리고 율법예언자의 결혼/간음 모티브와 여성으로서의 성전 모티브에 필수적인 것은 풍요함과 하나님 현존의 결합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의 가치는 물이나 풍요함과 연관된 비유적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시냇가의 심은 나무) 여호와의 가르침을 공부하거 낭독하는 학자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비교되고 있다. 지혜로운 자를 나태내는 나무는 잘 번식하여 과실을 내기에, 이는 충분히 풍요로움을 대변한다.창세기창세기 1:28에서의 인간을 향한 첫 명령인 생육하여 번성하라는 것에서, 창조와 풍요함의 연관성을 볼수 있다. 식물, 비 그리고 땅을 경작할 인간이 없는 세상으로 시작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신다. 그 동산에서 강이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네 개의 강줄기로 뻗어 나가게 하였다고 언급될 때에 풍요함의 이미지들이 점차 증가하여 나타난다. 에덴은 인류가 시작된 자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자와 여자는 히브리어로 이쉬/이샤로서 본질적으로 분가분의 관계에 있다. 두 사람의 벌거벗음과 뱀의 간교함은 동산에서의 성생활의 순결함이 감교함과 의심스러운 성적 욕망리가 “두 샘을 가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아비멜렉이 교활하게 샘으로서의 사라의 태도 자신의 집안 여인들의 태처럼 다쳐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이것은 변호와 불임 모두를 의미하는 이중적 의미일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서 아비멜렉을 책망한다. 여성과 우물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볼수 있다.창세기 21:30-31에 따르면 우물의 명칭인 브엘세바는 맹세와 일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26장의 리브가가 아비멜렉의 궁에 있었던 것과 연결된다. 위험에 빠진 여선조와 우물분쟁이 그것이다.창세기에서의 동산, 샘 그리고 우물의 요약잠언 5장 이방여인을 피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젊은이의 아내는 우물, 샘, 도랑물 같은 것으로 언급된다. 지혜는 여성명사이며 젊은이가 충실해야 하고 결혼해야 한는 여성을 암시한다. 여성으로서의 지혜는 젊은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잠언에서의 성은 거꾸로 뒤집혀 있다. 그의 아내 지혜에 대한 신실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침 받고 있다. 지혜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지혜가 여성과 우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허나 연관성은 또한 풍요함과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는 발상을 지혜에 대한 개념으로 가져온다.집회서 24장지혜는 자신의 역할이 거룩한 천막에서 야웨를 섬기는 것이며, 시온 산 위에 세워진 성전 안에서도 그 역할을 분명히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나는 레바논의 향백 나무처럼, 헤르몬 산에 서 있는 삼나무처럼 자랐다” 집회서의 저자는 지혜를 아가의 여성처럼 매력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지혜가 1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전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집회서에서 풍요함, 여성, 말씀, 장막/성전의 비유적 표현의 행렬을 보게 된다. 집회서 저자는 지혜를 장막과 성전이라는 장소를 포함하여 모든 풍요와 관련된 것과 동일시하면서 이에 더하여 지혜를 율법으로 이해한다. 가랍바 1장에서의 첫 미드라쉬는 초기 해석자들이 아가와 이 책의 의미를 이해했던 방식을 잘 보여준다. “내가 모략고 지략과 지식에서 ‘세번’을 너를 위해 기록하지 아니하였느냐?”여기에서 랍비들은 이 세 번을 전통적으로 잠언, 전도서, 아가라고 인식한다.잠언 22:29에서의 “자신의 일에 능숙한 자”는 누구인가? 랍비들은 이것을 요셉이라고 확신한다. 요셉이 자신의 일에 헌신한 것의 의미는 그로 하여금 보디발의 아내와 관련해서 순결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또 아가 랍바 2장에서 “그의 일에 능숙한 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바로 모세이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모세는 자신의 일에 능숙했으며, 왕 앞에서 섰으며, 결국 자유를 얻게 되었다.아가 랍바 3장에 “그의 일에 능숙한 자”가 거룩한 자 축복받는 자의 일로 바쁜 의로운 자에 대한 언급이라고 제시한다. 미드라쉬는 앞에서 서는 것이 율법 안에 확고히 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4장에서, 그들은 “그의 일에 능숙한 자”가 랍비 하니나라고 주장한다. 아가 랍바 5장은 그의 일에 능숙한 자가 솔로몬 자신이라고 설명한다. 솔로몬이 자신의 궁전을 짓는 것을 성전을 짓는 것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해 솔로몬의 변호로 이 잠언의 언급을 이해한다. 그는 그저 성전을 짓는 데에 훨씬 더 숙련되고 근면했다는 것이다. 해석자들은 성전이 스스로를 세웠다고 제시한다. 랍비 베레키아이 경우는 “돌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벽에 세워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랍비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유지에 있어서 성전 건축이 그 구심점에 있음을 가정한다. 솔로몬이 잠언 22:29에서 성전을 건축한 것이 자신의 최고 업적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해석자들은 아가랍바 5장 끝에 솔로몬이 잠언, 아가, 전도서 이 세권의 책을 기록하였다고 회상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솔로몬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미드라쉬”
    독후감/창작| 2024.11.28| 13페이지| 1,000원| 조회(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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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갈의 지위에 대한 연구
    창세기가 말하는 하갈의 지위에 대하여서론창세기에서 하갈은 사래가 자식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준 애굽 여종이다. 그녀는 바로가 아브람에게 주었던 여종들 가운데 하나로 추측된다(참조: 창12:16). 성경에서 사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빌하와 실바도 종으로서 야곱의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녀들은 자식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그 자식들은 다 주인의 아들로서 유업을 받았다. 그렇다면 사래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을 때 하갈은 사라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인가? 이것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1. 하갈이란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들-애굽사람(?????????)16장 1절에서는 창세기 저자는 하갈을 “애굽사람 하갈”로 소개한다. 그리고 3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종 애굽 사람 하갈”로 소개한다. 창세기 21:9절에서도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라는지라.”라고 말한다. 창세기 화자는 이스마엘을 낳은 이후에 하갈을 애굽 여인으로 계속해서 표현한다. 창세기 화자는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아브라함이 애굽 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마음의 걸림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여종(??????????)그러나 16장 3절에 이미 사래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 이후에도 여전히 사래는 하갈의 여주인으로 불리고 있다. 임신한 하갈이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자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불평을 한다. 그 때 아브라함이 하갈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당신의 여종이 당신의 손에 있으니 좋을 대로 행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는 것을 그냥 방치한다. 만약 동침 이후 하갈의 지위가 사라와 같은 아내의 지위로 부상하였다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도는 부당하다.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쳐 나왔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를 동일하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관점을 정확히 대변한다. 하나님에게 하갈은 여전히 사래의 여종이었고 주었다.-이샤(????????)이 단어가 가장 논란에 중심에 있다. 아내와 첩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구분된다. 대하 11:21절에서 두 단어가 동시에 등장한다. 르호보암이 모든 처(이샤)와 첩(필레게쉬)들 보다 마아가를 더 사랑하였다고 말한다. 둘은 분명 구분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6장 3절에서 ‘첩’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창세기 저자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을 아내로(??·?? ??·????????) 주었다는 하는 것일까? 꼭 그렇게만 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역개정에는 사래가 하갈을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로 주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전치사 ??의 용법은 매우 다양하다. 개역개정에서는 이 전치사를 간접 목적어로 사용하여 번역하였지만 전치사 ??는 직접목적어로도 사용가능하다. 이것을 적용하면 창세기 16장 3절의 번역이 “사래가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그 여자를 주었다.”라고 번역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노예소녀(??????)창세기 21장 10절에서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이때 하갈이 사용한 단어는 히브리어 ‘아마’인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여자노예를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종종 아내나, 아내가 될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룻은 보아스에게(룻3:9), 아비가일은 다윗에게(삼상 25:25) 밧세바는 다윗에게(왕상1:17)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 중에 아비가일의 경우에는 아직 자신이 다윗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을 때 쓴 표현이다. 그러므로 아비가일은 절대 다윗에게 자신을 ‘아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룻의 경우에도 이방여인으로서 아직 보아스와의 결혼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아내’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세 경우 모두 여인들이 자신이 존중하는 남편이나 남편이 될 사람 앞에서 겸손과 순종의 의미에서 스스로 낮춰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아마’라는 표현을 쓸 때는 ‘아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21장 10절에서 사래가 하갈을 쫓아내라고 말할 때 사용한 ‘아마’라는 단어의 의미는 여자노예이다. 문맥상 사라가 매우 화가 난 상태에서 여전히 자신이 소유한 여종을 승격시키는 ‘아내’라는 표현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하갈은 여전히 사래의 여종으로서의 지위가 변하지 않았다.창세기 21장 12절에서 또 한번 이 단어가 쓰인다. 쫓아내라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인하여 근심하게 된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이나 여종(아마)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아마’를 ‘아내’라는 의미로 사용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아내를 버린 게 한 장본인이 되신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으며 그것을 나누는 것에 대해 반대하신 것을 감안한다면 이 단어는 ‘아내’가 아닌 ‘여종’으로 해석되어야 이치에 맞다.2. 아브라함과 하갈의 동침은 정당했는가?족장이나 부호와 같은 상류 계층에서 부부간에 자식이 없을 경우, 아내가 자신의 여종을 남면에게 주어 후사를 보도록 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관습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 태어난 아기는 여종에게가 아니라 아내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래의 행동은 당시의 생활풍속을 따른 어쩌면 자연스런 행위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이 (1)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했다는 점과 (2)이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일부일처제를 파괴하였다는 잘못은 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심판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분명 그것은 처음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고대근동의 사회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일부일처제를 기대했을 것이다.1)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을 준 것에 대해 성경은 부정적이다.창세기 16장 2절의 “들으니라”는 단순히 문맥상 단순히 ‘듣는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동의하고 순응했다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사래가 제시하는 요구와 방법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 것인지 알고서도 아브람이 이에 응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즉 그는 사래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상반되는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면서도 이에 한마디의 반론도 제기하지 않은 채 수락한 것이다.2) 창세기16장과 창 3장의 연관성아들을 가지려는 사라의 계획은 1 창세기 3장에서의 타락에 대한 기사와 의도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보인다.창세기 16장창세기 3장창 16:2a“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창 3: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창 16:2b“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3:17“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창 16:3a“ 사래가 하갈을 가져(took)”창 3:61“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took)”창 16:3b“사래가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준 때는”
    인문/어학| 2024.11.28| 3페이지| 1,000원| 조회(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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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칼바르트 성경관에 대한 비판 및 개혁주의적 성경관
    칼바르트 성경관에 대한 비판 및 개혁주의적 성경관
    칼바르트 성경관과 개혁주의 성경관칼 바르트의 성경관과 전통적 개혁주의 성경관에 대한 고찰1. 칼 바르트 성경관에 대하여바르트는 자연과 은총 사이에는 어떠한 접촉점도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자연 안에서 말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유일한 가능성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바르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 교의학의 시금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주님의 말씀을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의 세 형태로 나누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책에서 “하나님의 계시 된 말씀은 우리가 교회의 선포에서 받아들인 성서에서만 알 수 있거나 혹은 성서에 근거를 둔 교회의 선포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단지 선포를 성취시키는 계시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알려면 단지 성서에 증거된 계시나 혹은 계시를 증거 하는 성서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매우 난해하여 이해하기 힘들다.단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계시된 말씀이란 성경 그 자체가 아니며 그것은 구체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수단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를 기억하게 되고, 장차 올 계시를 기다리도록 부르심을 받고 이에 따라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능력 받고 인도 받음을 의미한다. 즉 성경계시라고 함은 성경의 말씀이 증언의 말씀으로 기능을 다할 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신구약 성서에 계시된 분이다. ‘기독교적 신’의 정의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바를 들을 뿐이다’라는 한 마디에 그친다. 즉 성서는 하나님 자체를 계시한다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힘찬 행동의 책이다. 단지 우리가 그 성서에서 하나님 존재와 행위와 계시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르트는 교의학과 교회가 절대적으로 성경에 근거하며 성경의 내용을 선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나 교의학의 절대적 기반과 내용이 하나님은 성경이며, 이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증거 또는 선포이며 따라서 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시라는 바르트의 견해는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바르트가 교의학 개요에서 서술한 성경, 계시, 하나님의 행동, 역사, 그리스도는 교묘한 불일치를 말하고 있어 난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사변적 늪에 빠질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요 말씀이라는 당연한 의미를 너무 지나치게 사고하고 분석하므로 설정한 몇 개의 용어들이 그 의미에 있어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히다가 통일성을 지닌듯하나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애매모호하게 된 것 같이 느껴진다.2. 칼바르트 성경관과 개혁주의 성경관의 유사점과 차이점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초월주의적 경향은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자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성경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증거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개혁주의는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바르트는 성경은 인간이 쓴 글이기 때문에 인간적 오류가 많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오류 투성이의 성경일지라도 하나님이 이것을 계시의 증거로 사』용하실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질 수 있다. 이런 계시관을 가지고 바르트는 성경자체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독자성 신임성이나 무오성을 믿어온 정통주의 신앙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을 하게 되었다.그는 성경을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의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 그의 영감론을 일컬어 사상 영감론이라 할수 있다. 그의 영향으로 유럽대륙 학자들의 대다수가 사람들의 개혁주의적 성경 영감론에서 벗어나 사상 영감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 라인리히 프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학적인 소양이 단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이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으므로 성경을 순진하게 신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사상영감은 ‘말씀과 사상’사이를 구분하기 시작하고 말씀이 아니라 생각만 영감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리서 그치지 아니하고 영감을 성경에 있는 종교적인 내용에만 제한시키고, 나머지는 인간적인 것으로 판단해서 영감으로부터 제외시켰다. 영감을 특정 내용에만 제한시키게 되면 성경 내용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의 텍스트를 인위적으로 신적인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어떤 것이 하나님이 말씀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를 판단하게 되는 인본주의적 성경해석이 되고 마는 것이다.바르트는 말하기를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할 때는 반드시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신앙과 방어의 위험에서 발생하는 결단의 진술로써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영감되었다는 말과 역사적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그래서 그는 정통적인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교리를 거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현상론적 교리는 자연히 그로 하여금 기독교의 역사적 섭리교리도 거부한다.결국 바르트는 20세기의 역사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지나치게 계시의 초월성을 강조하다 기독교를 하나의 초월종교로 전락시켰다. 바르트의 이러한 불안정한 계시관은 자연히 신앙고백의 영속적 가치성을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대치시킨 신학자들이 바르트주의의 신학자들이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직 성경의 객관적 권위가 인정되는 곳에 성경에 근거한 기본교리가 변하여질 수 없는 것이다.3. 전통적 개혁주의 성경관을 회복하자한국의 개혁 주창하는 ‘영감 된 하나님의 책’으로서의 신앙적 전제는 선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며, 참된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영감(초자연적인 신적 개입)하심으로 그의 교회 백성들을 위해 쓰게 하신 것이라는 기본 입장을 담고 있다. 그것은 성경을 이해(해석)하기 위해서는 ‘인간저자’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신구약 성경 전체 말씀의 설계자이신 ‘하나님 저자’에 대한 인식과 인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성경의 무오성은 이 성경의 영감성에 근거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 역사를 전제할 때 그 계시된 말씀인 성경의 무오류성은 당연하다. 성경이 인간저자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 저자의 초자연적인 영감을 통해 존재한다는 점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강조라는 논리적인 귀결을 가져온다. 이와 관련하여 신앙적 개혁주의는 세 가지의 영감설을 강조한다. 만전 영감설, 축자 영감설, 유기적 영감설이 그것이다.만전 영감설은 영감의 범위가 성경 전체임을 강조한다. 영감되지 않은, 즉 예외가 되는 성경의 부분은 없다는 것이다. 그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각각 영감되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 해당된다.축자영감설은 성경에 쓰여진 단어 하나 하나에도 영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어떤 단어도 영감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것은 없다. 물론 엄격히 말해 원본의 정확무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의 어떤 사상 또는 특정한 윤리적인 주제만 영감된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 하나 모두에 영감된 것이라는 이 이론은 그 어떤 성경의 말씀도 소홀히 하지 않게 한다.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유기적인 방법으로 인간 저자에게 역사하셔서 기록을 남기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을 받아쓰기 한다는 식의 ‘기계적 영감설’과 차별이 되는 이론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기적인 협력사역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인간 저자의 개별적 특성이 드러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1) 만전 영감설(신학적: 딤후 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되었다.)해석자로 하나님이 두신 성경의 전체적인 신학과 부분적인 의미 모두에 주목하게 만드는 해석학적 전제가 된다. ‘전체적’인 측명을 강조하는 신학 방법은 하나님 나라, 언약신학, 구속사 등을 다루는 성경신학일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이 자유쥬의 진영보다 상대적으로 성경신학을 중시하는 이유는 저자로서의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말씀 사상을 찾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한편 ‘부분적’인 의미라 할 때는 그것은 본문 중심의 해석학적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전 영감설은 성경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 라는 고백적 신앙 교리에서 시작해서 해석자로 하여금 보다 구체적인 해석학적 노력을 기울이는데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인문/어학| 2024.11.28| 4페이지| 1,000원| 조회(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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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이한수 교수의 <로마서>를 읽고
    이한수 교수의 <로마서>를 읽고
    이한수 교수의 『로마서』에 대한 요약 및 소감문‘기독교 교리의 집약서’인 로마서의 저작권은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편지들을 받아 적은 필사자 ‘더디오’에게도 있다. 바울이 유대인인 것과 그가 이방인으로 사역했던 두 측면은 그의 자의식 세계를 지배했던 결정적인 요인들이었다. 바울은 평생 이방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아 헌신하면서도 결코 유대인인 것을 포기한 일이 없다. 둘째, 그는 다메섹 사건을 ‘회심’으로 생각하기 보다 ‘소명 또는 위임’사건으로 이해한다.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사도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저술상황과 저작연대그가 로마사를 집필하게 된 이유는 스페인 선교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국의 중심에 위치한 로마 지역 교회들이 후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순위는 이방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기 어려웠다. 바울은 회심 이후에 유대주의 반대파로부터 집요한 공격과 비난을 받았으며 자칫 자신이 세운 이방교회들의 대한 정당성도 거부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학자들은 보캄의 견해를 따르며 로마서의 제1수신자는 로마교회이지만 예루살렘교회도 감추어진 수신가 될수 있다고 본다.로마교회의 기원과 성격가능성이 가장 높은 견해는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믿음을 갖게 된 로마의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온 뒤에 회당 중심으로 모였다고 보는 것이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이방기독교인 주임의 교회로 탈바굼해 갔다면, 그 과정에서 유대교의 뿌리를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움직임에 대해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 간에 논쟁이 일어났을 것이다.로마서 저술 목적로마교회 성도들의 후원으로 스페인 선교를 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변증적 목적이다. 오랜 선교 사역과정에서 그들 둘러싸고 각종 비난과 의구심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기에 그것을 변증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 견해와 관련해서 발전된 이론은 로마서를 바울의 “마지막 유언과 증언”으로 보기자신의 힘으로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악이다.”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 중심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율법, 아브라함과 관련된 것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모든 민족의 하나님 또는 모든 대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거나 자신들을 특별 대우 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선민의식이 유대인들에게 뿌리깊게 박혀있다. 이는 신분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매우 자만한 태도이다. 필자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사상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영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영지주의자들이 생각 난다.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나 스스로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또는 영적으로 타인들 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물론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며 영적으로 우월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바울이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울이 율법을 믿음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다. 율법은 전적으로 선한 것이다. 물론 율법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율법을 통해 결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인간의 영혼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어떤 작용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폐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 31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요점은 믿음이 율법을 폐하기보다 도리어 그것을 “굳게 세운다”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또는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믿음 칭의의 궁극적 목적은 그것을 경험한 신자의 삶을 통해서가 오늘날의 성도나 목회자에게 있어 왔다는 것은 비약적인 주장이 아니라 슬픈 현실이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과 행위의 상관 관계를 선포하기 보다는 믿음을 지나치게 아니, 잘못된 방향으로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잘못된 방향으로’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믿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지나치게 주장하다 보니까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믿음이 없는 것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수개월 전에 70-80여명의 성도들 앞에서 믿음과 율법의 상관 관계와 관련된 말씀을 선포했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아 그렇구나”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해야지 어째 행위를 강조하는 것 같네!”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필자의 의도는 믿음이 잘못 강조되어 왔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기에 바른 믿음과 행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한 것인데 행위에 대해 말하면 본인들은 무척이나 경건하고 믿음이 강한 것처럼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물론 바울은 로마서 4장 초반부에 언급된 ‘행위’는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해 보려는 인간적 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았을 때 바울이 말하는 ‘행위’를 통한 구원의 성취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은 믿음과만 상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행위는 구원과는 상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지만 믿음과는 상관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행위는 구원과 직접적인 상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 그런데 그 믿음은 행위와도 적잖은 상관 관계가 있다. 즉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에는 율법의 행위들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즉, 그는 무할례자로 있었고 율법은 아직 오지 않았다.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의 종교적 신분과 정체성을 표시하는 근거로 사용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새로운 메시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규정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없다. 결국 믿음과 행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한 사람의 영혼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믿음 이외의 방법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행위로 말미암는 공로적 의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의를 얻은 것이지 행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율법의 의 즉, 행위의 의는 구원과는 상관 없는 것으로 결코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는 차별이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과 함께 율법은 어느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고 선민인 자신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상당한 자부심이 있는 것이고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을 통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부여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믿음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과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이야기 이다. 아브라함의 구원에 이르는 의의 믿음은 결코 그의 순종적 행위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은 순종적 행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지만 그 믿음에는 필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필수적으로 행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3. 하나님 백성의 진정성(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에 대한 논의하나님은 이스라엘 있다고는 하지만 그 중 소수의 남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신실하게 언약을 이행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 쪽은 버리고 다른 한 쪽은 취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취하시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버리시는 것이다.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즉, 이스라엘 안에서도 버려지는 자들이 있고 남겨지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특이할 점은 대다수가 버려지고 소수의 사람들만 남겨졌다는 이야기다. 대다수가 버려진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사람들을 버리셨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인 백성을 창조하는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창조적이며 은혜롭고 자유로우며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성격을 갖는다. 창조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선택행위가 그의 창조적인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린 것 같다. 하나님의 선택은 창조적이며 은혜롭고 자유로우며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말에 그 해답이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적인 백성을 창조해 나가신다. 이를 필자는 재창조의 과정 중 하나라고 보고 싶다. 하나님 형상의 백성들을 만드시기 위한 재창조의 작업을 하나님은 시마다 때마다 적절한 환경 가운데에 행하시고 계신다. 율법의 수건에 가려져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죄악가운데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작업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을 만들고 계신다. 비록 많은 수의 택한 백성이 버려진다 하더라도 이는 은혜롭고 자유로운 것이며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정당성을 인간인 우리 모두는 인정해야 한다.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혈통이나 혈연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이 생각
    인문/어학| 2024.11.28| 10페이지| 1,000원| 조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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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읽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읽고『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읽고해방신학자들은 교회의 임무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임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 만일 하나님의 긍휼을 지닌 교회로서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관심과 응답을 촉구하는 해방신학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신학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회가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해방 신학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해야 하는 교회 공동체를 희생시켜 경제적? 정치적 해방이라는 명분에만 초점을 맞추게 하는데 있다. 교회는 하나님를 위한 공동체이다. 성경이 이루려는 정의 또한 하나님의 정의이지 인간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의가 아니다. 신학도로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책은 나에게 교회에 사명에 대하여 깊히 숙고해 볼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이 책은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라는 교회의 두가지 사역의 적적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사회활동이 복음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 구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소 정치적인 언어를 택한다. 복음주의 우파들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동반자적 관계’라는 개념을 꺼려한다. 복음주의 좌파는 복음전도의 우선권에 대한 것을 꺼려한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정의하는데 있어서 동반자적 관계와 우선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동반자적 관계라는 것은 아마도 31p부터 나오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세 종류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해도 될 것이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회활동은 복음전도의 결과와 목표로서 복음전도를 뒤따르고 또 복음전도의 다리로서 복음 전도를 앞설 뿐만 아니라 또한 복음 전도의 동반자로서 복은전도와 동반한다.”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이 동반자 관계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 다음 문장에 쓰인 “새의 두 날개와 같다”는 말에서 마음이 걸렸다.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대등한 입장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이 책에서 존 웨슬리를 예로 들어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양자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존 웨슬리의 사역은 영국 사회에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웨슬리 뿐 아니라 조지 휫필드도 탄광에서의 아동노동을 대한 금지법을 통과시키고 감옥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도구가 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수많은 기관들을 시작했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산업혁명이 처음으로 무르익으면서 발생한 탐욕을 누그려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자들에 관하여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복음전도를 최우선순위에 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는 사회적 활동없이 복음전도를 행한 것에 대해서 많이 볼수 있다. 물론 복음전도를 동반하지 않은 선행에 대해서도 정죄하지 않는다. 문제는 복음전도는 교회의 최우선적이며 최고로 중요한 사명이며 사회활동은 그와 동반자적 관계라고는 할 수 있으나 결코 동등한 위치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교회는 빵을 주는 곳이 아니다.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세상의 기관이 줄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능력을 주는 유일무이한 공동체이다. 예를 들어 구제는 분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중에 하나이기는 하나 구제를 하지 않는 교회라 해도 복음사역이 있으면 그곳은 교회다. 그러나 구제를 많이 해도 복음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즉 구제사역은 중요하나 교회의 표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사회적 활동을 교회의 사명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대등한 위치에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사회적 활동은 반드시 복음사역 직간접적으로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활동이 복음사역에 종속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해야 할 교회가 인간적 판단에 근거한 정의를 외치며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착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복음을 중요시하는 교회들 중 많은 수가 하나님 나라 정의와 동떨어진 인간적 판단에 근거한 정의를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성경이 정죄하고 있는 동성애를 과연 성소수자라는 약자로 판단하고 법적 보호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왜 교회들이 성경의 진리를 떠나 엉뚱한 사회운동에 참여 하고 있는가? 사회주의체제를 지지하는 교회들도 있다.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는 사실이다. 교회가 진정 실현해야 할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적 활동은 복음사역이는 큰 명제 아래 두어야 한다.또 이 책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신 것을 예로 들어 사회적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배고픈 자들을 먹이신 것은 복음집회 현장에서 한번 있었던 일이었고 이후에 이것으로 인하여 왕 삼으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라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치신 것은 단지 사회적 활동의 범주에 집어 넣는 것은 잘못된 분류라고 판단된다. 예수님은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약초상자를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다니신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치유사역을 통해서 시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영적인 일이었다. 복음사역의 일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책을 읽으면서도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존 스토트가 교회라는 말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는데서 기인한 것 같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형식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교회가 다양한 형식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듯 하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교회의 사명을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정당을 만드는 것은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관여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계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몫인 것이다.존뉴턴은 윌버포스를 격려하여 정치인으로 남게 하여 노예무역과 제도를 자체를 폐지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영역주권을 이야기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고, 기독교 노동조합을 창설하고,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그와 유사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어조로 교회로서의 교회가 이런 운동을 주도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 일들에 책임을 져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분명 교회가 넓은 사회에 미치는 경건한 영향력의 가치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보다 넣은 사회참여에, 교회로서의 교회가 말려들지 않도록 상당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과 교회로서의 교회가 하는 일을 기본적으로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교회는 본연의 사역을 통해서 사회정의에 영향력을 발하는 기능을 해야한다.
    독후감/창작| 2024.11.28| 3페이지| 1,000원| 조회(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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