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귀비와 생아편양귀비는 아편이 추출되는 꽃식물로, 그 시작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된다. 어떤 이들은 자연적으로 진화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손에 길러지면서 진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는 양귀비가 너무 특이해서 아예 식물계의 돌연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돌연변이설이 가장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식물들은 환경 변화에 불규칙한 형태로 끊임없이 적응해 가고, 실제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변종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흔히들 아편을 진홍색의 우아하고 예쁜 꽃만 떠올리거나, 아편을 만들 수 있는 식물 정도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양귀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만만하게 볼 식물이 아니다. 양귀비는 28개 속과 250개 이상의 종으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다양한 품종을 자랑한다. 이렇게 많은 양귀비 품종들은 대부분 북반구의 온대, 아열대 지역에만 분포되어 있다. 그 중 특히 사람들의 사랑 속에 귀빈 대접을 받는 종은 파파버 솜니페룸과 파파버 브랙테아툼 뿐이다. 이 두 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의 아편이 나온다.이 중에서도 파파버 브랙테아툼은 아편의 원료보다는 관상용 꽃으로 재배되어 많은 잡종들의 어미 노릇을 해왔다. 이에 비해 파파버 솜니페룸은 아편을 수확하려는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대를 이어왔다.파파버 솜니페룸은 약 120일 정도의 성장 주기를 가진 1년생 식물로 자양분과 수분이 넉넉한 흑토에서 잘 자란다. 성장기인 30~90일 사이에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거나 비가 많이 내리면 수확량이 크게 떨어지며, 역에다 12시간 이상의 일조량이 없으면 아예 꽃을 피우지 않는 까다로움도 있다. 하지만 일정 정도 자란 다음부터는 병충해에도 강하고, 특별히 물을 주거나 관리하지 않아도 잘 자란다.보통 양귀비 씨앗 500그램이면 5,000평방 넓이의 면적을 파종할 수 있다. 양귀비의 꽃잎은 네 장으로 되어있고 꽃이 핀 지 2~4일 정도가 지나면 꽃잎은 모두 떨어진다. 꽃잎이 지고 나면 팥알 이 경우 많은 양의 양귀비 짚들을 가공해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르지만 아편 외에도 모르핀과 코데인 및 테베인 등을 추출할 수 있기 때문에 이익을 크게 남길 수 있다.2. 고대·중세의 아편기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양귀비는 기원전 34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주변에서 재배된 것이다. 이들은 양귀비에서 얻어낸 물질들을 그들의 문자, 문명과 함께 주변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전파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 말까지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아편은 기원전 1500년에 만들어진 이집트 한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이집트 테베는 양귀비 밭이 많기로 유명했으며, 이런 이유로 이집트 아편은 테베 아편으로 불렸다.1) 그리스의 아편그리스의 아편은 지금처럼 금기시되는 물질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아편은 정신적, 초자연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좋은 물질 중 하나였을 뿐이다. 특히 데메테르 종파의 입문자들에게는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전설에 따르면, 데메테르가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가 들판에 핀 양귀비꽃들을 발견하고는 무심코 그 꼬투리에서 분비되는 수액을 맛본 뒤 잃어버린 딸에 대한 고뇌를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데메테르를 새겨놓은 조각상이나 그림에는 여신이 다른 농작물이 아닌 한 송이의 양귀비꽃을 쥐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또 여신의 재단에도 양귀비꽃으로 장식되어 있다.아편은 의약적인 측면에서도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제들에게 매우 유용한 물질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환자들에게 아편을 복용하도록 하였으며 활자들은 사제가 병을 치료하는 동안 아편의 약효에 의해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아편은 사제들에 의해 신비한 물질이나 병을 치료하는 치료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힘을 간직한 것으로 대접받던 아편은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끝을 보게 되었다.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는 아편이 누려왔던 정도나 되는 양을 먹고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아편에 심각하게 중독되었다는 말과 같다.기원 후 1세기, 2세기에 유명한 의사였던 가렌은 아편이 해독작용 외 두통, 현기증, 귀먹음, 간질, 약한 시력, 기관지염, 해소, 기침 등 모든 전엽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아편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치료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머더스 황제 및 세베루스 황제 등에게 아편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처방했다.아편은 문학에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기원전 70년에서 기원전 19년 사이에 살았던 로마의 국민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작품 , 에서 아편을 수면제로 언급했다.3) 중세~근세 유럽의 아편유럽 남부에서 아편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고, 중세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거의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편의 끈질긴 생명력은 사람들의 기억 제일 아래쪽에서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편은 다시 사람들의 기억 밖으로 나올 기회가 생겼다.아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아랍인들과 온몸으로 부딪혔던 십자군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선물은 아랍인으로부터 얻은 아편에 대한 지식이었다.십자군 기사들에게 아편은 다른 마약류와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기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경험과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전설을 만들어냈다. 해시시를 복용하고 사자처럼 용맹해진 페르시아 군대, 지쳐 쓰러져가던 타타르의 사신과 말들이 이 신비의 물질을 복용하고 되살아나는 모습, 아편의 힘으로 강철같이 강력해진 터키 전사들에 고나한 무용담 등이 발전하면서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이와 더불어 약용식물이나 마시는 약의 마법적인 효력에 관한 소문들까지 퍼지기 시작했다.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찾아 항해를 나섰을 때, 아편은 그가 가져올 물품들 중에 하나였지만 별로 중요 상품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마젤란이나 바스코 인들의 아편이 대영제국의 아편으로 둔갑했다. 그는 2만 80상자의 아편을 내놓았다. 도광제는 승리에 흥분했고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가 아직도 더 많은 뇌물을 위해 흥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웠다.청나라의 강경한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 자본가들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의 양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무렵 영국 정부를 이끌었던 휘그당의 파머스턴 내각은 중국무역을 안정된 기초 위에 두는 데 필요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20척의 함선과 4,000여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영국 의회는 토리당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를 승인하였다. 영국 의회는 결국 자본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마침내 전권대사 엘리어트(조지)는 1840년 6월 육해군 약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도 정부가 영국을 대표하여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군 앞에 중국의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범선이 대부분이었고 군사 장비는 240여 년 전에 주조된 낡은 것이었다.영국은 주산 군도를 점령하여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천진(톈진) 인근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천진에서 교섭을 책임지고 있던 직례총독 기선은 오랑캐를 다독인다면서 일단 영국군을 무마하여 광동으로 돌려보냈다. 임칙서가 파면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기선은 광동에 도착하자 영국군의 힘을 깨달았다. 12월 영국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기선은 엘리어트와 개인적으로 배상금 600만 냥의 지급 · 홍콩 할양 · 평등 대우 등을 조건으로 한 기초협약인 '광동협정'을 맺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크게 노한 도광제는 기선을 파면하고 체포하였다.1841년 가을, 전쟁이 재개되어 영국군이 영파를 점거했다. 이제 영국군의 병력은 1만으로 불어나 있었고, 증기선 14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강구와 주산에서 중국군이 용감하게 저 계기가 되었다.- 영국 정부가 내외의 격렬한 비난을 무릅쓰고 굳이 아편 문제로 개전하게 된 이유의 하나는 아편의 전매수입이 인도재정 안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듯이 아편 무역이 영국의 당시의 인도 지배에 빼어 놓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한걸음 더 나아가 아편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얻어지는 은이 영국을 중심으로 미국, 호주, 중국, 인도를 연결하여 시행되고 있던 세계 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편 무역 자체를 수호하고 합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1825년의 첫 번째 공항 이래로 절실히 요구되어온 중국 시장의 개방, 즉 연안제항의 개항과 무역에 대한 중국 측의 여러 제한의 철폐, 유리한 무역 제조건과 무역·군사상의 근거지 획득 등의 요구를 일괄하여 실현할 것을 목표로 했다.- 경과 : 1840년 여름 48척의 함선과 4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영국함대가 북상하여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위치한 따꾸·텐진을 위협하자 청조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철저한 항전파였던 런쩌쉬를 전쟁 도발자로 몰아 면직시키고 강화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화평을 위한 초안이 쌍방에게 불만인 것이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해 1만 명의 증원 부대를 추가한 영국군은 양쯔강으로 침입하여 난징에 육박하였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하고 장기에 걸치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입장이 못 되었다.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 지배자인 청조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욱 정규군의 군규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일부를 제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영국군의 사상자 전체가 520명인데 대하여 청조의 사상자는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청조는 난징의 함락이 가져올 황제의 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그 직전에 영국의 요구를 전부 수락하고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광저우 교외의 삼원리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격분한 수만의 농민이 무기를 가지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등 민중이
게르만 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정착(7, 8, 9, 11)7. 게르만족(1) 이주 전·후의 게르만족- 북유럽 원주지에서 이동 시작 전까지 여러 게르만족들은 언어나 관습에 있어 차이가 없었을 것? 다른 집단과 떨어지게 된 각각의 집단은 이주해간 지역 환경과 생활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고유한 언어적 ? 문화적 특성을 발전시키기 시작함 ? 여러 게르만족 사이에 갖가지 차이점이 나타남- 4세기, 가장 주목할 차이점은 (개개의 게르만족 사이에서가 아닌) 서부 게르만족과 동부 게르만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른 현상(2) 서·동부 게르만족의 특징① 서부 게르만족- 색슨·수에비·프랑크·알레마니족은 (북유럽에서) 남하하여 대체로 동질적인 자연 환경을 지닌 여러 지역으로 이동 & (이동하지 않은) 앵글·쥬트족 등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② 동부 게르만족- 롬바르드(Lombard)·반달(Vandal)·고트(Goth)족은 북서 유럽으로부터 아주 먼 지역으로 이동- 헝가리 평원과 흑해 북쪽의 대초원 지대는 기본적으로 방목 지역이었는데, 그곳에서 게르만 정복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유목 생활을 함- 고트족은 (오래 전부터 농경을 주업으로 삼던 슬라브족·흑해 연안에서부터 이주해 온 그리스인·아시아 대초원 유목민 사이의 경계였던) 러시아 남부의 초원 지대의 지배 민족으로 군림하는데 성공(3) (동부 게르만족)고트족의 발전- 지배 민족이 된 이후 고트족은 두 집단으로 나뉨- 왕을 정점으로 통일하며 다른 게르만족보다 진보된 정치적 조직을 발전시킴- 4세기, 로마 제국과 밀접하게 접촉 ? 적대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평화기에는 문화적 교류도 이룸- 4세기 중엽, 성 울필라를 필두로 고트족의 개종이 시작됐으며 곧 대다수 고트족이 기독교도가 됨- 고트족은 아리우스파 옹호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 중에 아리우스파 전도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그 뒤로 계속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신봉 ? 고트족이 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들어간 뒤 중요한 영향을 미침(4) 타키투스(Tacitus)의 서세기까지 중세유럽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라 할 수 없음프랑크 왕국과 로마 카톨릭의 제휴, 카롤루스 제국(15, 16, 17)15. 비잔틴의 우상파괴운동 : 프랑크와 교황의 제휴(1) 8세기 이탈리아 상황- 이슬람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공통된 하나의 종교로 지배될 가능성이 사라짐- 8세기 초 로마의 선교 사업으로 북유럽이 개종을 하게 되고 이로써 라틴 문명과 튜톤족 및 켈트족 문화 융합 가능성이 생김- 반면 콘스탄티노플을 기반으로 바진틴 세력이 부활하여 그리스적인 축소판 제국이 등장함- 8세기 중엽 로마 교황이 북유럽 게르만족과 제휴 정책을 맺으며 중세 특징적인 서양 문명이 나타나게 됨? 이는 “유럽의 출현”의 결정적인 사건(2)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 신학상 논쟁 전개 과정- 이후 교황이 프랑크와 제휴를 맺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음? 롬바르드족의 재침략에 대한 황제의 방어 부족?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신학 상 논쟁 전개- 7세기 중엽 칼케돈의 종교 회의에서 기독교의 공식 입장이 양성론임이 분명해짐- 그러나 이집트 단성론자들은 신성만을 고집-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이집트 탈환을 위해 이집트의 편을 들어 교묘한 교리를 내놓았고 황제는 이를 공인 교리로 선포함 (당시 교황 호노리우스는 이해 못하고 교리 받아들임)- 그 뒤 교황 마르티누스 1세는 그 교리를 칼케돈 정통 입장과 벗어남을 비난- 이때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이슬람 세력 축출에 집중해 교황의 비난에 의해 로마 적대적으로 봄- 따라서 마르티누스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였고 그 후 교황은 귀양 떠나 하직함- 681년, 황제는 이슬람으로부터 이집트 탈환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단성론을 이단으로 선언- 692년, 교황은 비잔틴 공회의에서 선포한 교령을 거부하며 여전히 로마와 비잔틴은 적대적 관계(3) 콘스탄티노플의 우상파괴령① 우상파괴령 등장 배경-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구한 ‘황제 레오 3세’로 인해 양 교회는 다시 위기 직면- 그의 생각으로 국가 안전 대해 대제후들 탐내지 않았음? 이론상 군주는 필수적인 존재였고 카페 왕조는 든든한 군주였음(6) 강력한 봉건제후- 카페 왕조 권력은 ‘필립 1세’ 치세 초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음- 필립 1세는 왕령지 축소를 중단시키고 확대를 꾀하였음 ? 부르즈 자작이 1차 십자군 자금 구할 때 그의 봉토를 되샀으며, 자신의 형을 감금하여 새로 앙쥬 백이 된 찬탈자 공인해주어 퐁뗀느블로 남쪽 앙쥬 백령 일부를 받아냈음 ? 그러나 여전히 빈약하였으며 당시 대봉건 제후령 안정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음? 플랑더즈 백령(서부 벨기에~프랑스 최북단) - 플랑더즈 백은 어떤 봉신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조직된 봉건제후국을 다스렸음? 노르망디 백령(그 아래 해안지방 바이킹 롤로 후손들이 보유하고 있었음) - 플랑더즈 백령보다 더 조직력이 높았으며 공은 상급재판권과 중요 요새를 장악했음? 부르고뉴 공령(부르고뉴 반도의 켈트인과 그 동쪽 경계를 따라 낭뜨 아래 몽-생-미셸 지역)? 메인 백령 + ?앙쥬 백령(부르고뉴 동쪽, 서부 노르망디 남쪽)? 블로아 가의 거대한 백령(메인·앙쥬 백령 동쪽위치 일 드 프랑스 동부와 서부지역 장악하여 왕령지를 두 방향에서 포위하고 있었음) ? 11세기, 스스로 블로아 백 또는 트르와 백이라 자칭 ? 12세기, 팔라틴 백 칭호 갖게 됨(편의상 샹빠뉴 백 이라 칭함) & 블로아와 샤르트르, 상세르, 모, 프로뱅, 트르 등을 소유한 백령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였음? 부르군디 공령(샹빠뉴 백령 남쪽, 옛 부르군드 왕국 최북단 지역)? 아뀌뗀느 공령(르와르강 남쪽, 낭뜨~비스케이 만~피레네 산맥, 론강 서쪽 제국 경계의 해안지역까지)? 뚤루즈 백령(왕국 지중해 연안~뚤루즈)- 각 제후는 자기 영지(領地)에서 그의 봉신을 지배하고 복종 강요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음- 부르고뉴 공령은 다른 제후국들과 대조적으로 사실상 독립적인 백령의 집합에 불과했고 부르군디 공의 가장 부유한 영지는 샹빠뉴 백에게 봉토로 넘어가있었음- 아뀌뗀느 공은 보르도와 바욘느를 중심라(카스틸레, 레옹, 포르투갈) = 봉건적이라고 부르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봉건적 위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음(3) 남부 이탈리아- 회교도는 시칠리아 정복하고 이탈리아 본토에 약탈군을 보냈으며 로마 시 자체를 위협하였음- 이후 그들은 교황의 군대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남부 이탈리아는 여전히 정치적 혼란상태였음- 비잔틴 제국의 관리 통치 지역과 롬바르드족 족장 통치 지역이 동시에 존재하였음① 노르망디 기사들- 11세기 초, 노르망디 기사들은 예루살렘 순례 후 남부 이탈리아 지나가면서 그들의 지배하에 둘 수 있음을 깨달음? 땅크레드 드 오뜨비유- 노르망디 소제후 ‘땅크레드 드 오뜨비유’는 그러한 모험가들 중 한 명이었음- 그의 아들 ‘윌리엄’은 ‘아풀리아’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후 땅크레드 아들들이 모험에 합류했음- 그 가운데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로베르’와 ‘로졔’였음? 오뜨비유 가(家)의 진출 - 로베르와 로졔- 1059년, 교황은 로베르를 아풀리아 및 ‘칼라브리아’ 공으로 인정하였고 두 봉토에 대한 그의 봉서를 받았음- 그 후, 로베르는 비잔틴 황제 장악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였음- 그는 로졔에게 시칠리아 공격을 지시하였고 성공을 거두었음- 1071년, 바리의 함락으로 로베르는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고 1072년, 팔레르모를 함락하였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로베르는 그리스 침략을 시작하였으나 당시 ‘황제 알렉시우스’는 능력있는 장군이었음- 반면 1091년, 로졔는 시칠리아 정복을 완수하고 로베르의 아들 아풀리아 공 휘하의 백령이었던 그의 나라를 정비하기 시작하였음? 로졔 2세- 1103년 시칠리아 백이 된 오뜨비유 가의 ‘로졔 2세’는 로베르의 손자가 1127년에 죽자 아풀리아 공령을 찬탈하였으며 교황은 그에게 시칠리아 왕 칭호를 제수하였음- 1130년, 로졔는 시칠리아를 교황으로부터 봉토로 보유하게 되었음? 오뜨비유 가의 진출 결과- 그들은 통치 내내 여러 종족들을 동등하게 취급하려 애썼음-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로 문서 발행을다’라고 말하도다.”를 그 출발점을 삼았음- 안젤름은 “증명”은 “하나님은 없다”라는 진술이 본질적으로 자기모순임을 드러내려는 시도였음- 정의에 따라 하나님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고 논하였음- 그러나 실재하는 존재는 인간의 주관적 상상 속에서만 있는 존재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가 하나님의 신재를 전제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없다는 진술은 자기모순이었음 = 이 같은 논의는 실제 ‘고딜로’라는 수도승 등에 의해 공격을 당하였음- 고딜로는 모든 좋은 점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성(城)을 생각할 수 있다면 성이 반드시 실재한다고 논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으며, 안젤름은 이에 대해 그 논의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답변하였음? 즉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완전한 존재가 반드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의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것이었음?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고 동시에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 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음② 보편 개념의 본질 규정- 개체들의 집단 전체를 칭하는 데 사용하는 보통명사인 보편개념은 구체적일 수도 추상적일 수도 있음- 문제는 보편개념에 합치하는 것이 자연 속에 실재하는가 하는 것이었음- 따라서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있었으나 공통적으로 어떤 실질적인 성질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명사가 어떻게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음- 플라톤은 감각경험의 모든 개체는 이 다른 세계에 저장되어 있는 원형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음 = 철학적 “실재론(實在論)”- 이에 대립되는 것은 “명목론(名目論)”이라 불림- 11세기 말, ‘로셀리누스’는 극단적인 명목론을, ‘윌리엄’은 플라톤의 극단적인 실재론을 가르쳤음- ‘아벨라르’는 보편개념이 실재하긴 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개체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음- 즉 개체와 별개의 일이었음
“너 자신을 알라.”, “브루투스 너마저!”, “악법도 법이다.” 등 많은 사람이 어떤 상황을 비유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말들이다. 나 역시도 이러한 말들을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고는 하였다. 하지만 정작 누가, 언제 한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이번 학기 서양 고대사란 강의를 들으면서 이러한 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물들이 했으며, 그들의 생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고, 그들의 말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와 사용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한, 이름만 알고 있던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등이 남긴 업적과 그들과 관련된 일화들을 듣는 것이 흥미로웠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야기를 더 알아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서양 고대사와 관련된 몇 권의 책 중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이란 책을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처음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읽어본 적이 있는 그리스 ? 로마신화를 읽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플루타르크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궁금했고 새로운 책을 읽어보고자 이 책을 택하게 되었다. 항상 책을 읽기 전에 저자를 확인하는 나로서 저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다. 플루타르크는 로마 제정기의 시인이며, 로마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관직에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읽을 영웅전을 쓴 저자로서 유명하며, 이 영웅전을 통해서 50인 이상의 그리스인과 그와 유사한 로마인 전기를 비교하였다고 한다. 아마 내가 서양 고대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지 않아서 책을 읽으며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까 봐, 책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수업을 통해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책을 읽어보고자 한다.처음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전기가 일화들이 나와 있으며 곧이어 플루타르크는 테세우스와 로물루스를 비교하였다. 목차만 보고 플루타르크는 왜 굳이 50명이라는 많은 인물 중에 이 둘을 비교하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 궁금증은 해결되었고, 플루타르크가 책을 전반적으로 어떻게 써 내려갔는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두 사람은 모두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신의 후손이라는 명성을 가졌고 힘과 현명함이 결합된 인물이었다. 또한, 두 사람은 각각 세계적인 도시인 로마와 아테네의 시조이며, 국내의 불화와 친족 간의 재난을 피치 못하였다. 즉 그 둘은 알맞은 비교 대상인 셈이다. 플루타르크는 비교를 통해 테세우스는 국민에 대한 사랑과 용기를 지녔으며,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악당들도 다른 이들을 위해 없앴다며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하였고, 반면 로물루스에 대해서는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피해만을 생각했다며 인색한 평가를 하였다. 이어서 리쿠르고스, 솔론, 카밀루스, 알키비아데스 등 다양한 인물에 대한 일화와 평가를 진행하였다.특히 수업시간에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관계와 일화에 대해 알게 되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들의 일화를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알키비아데스를 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늘 알키비아데스가 좋은 환경에 둘러싸여 진실한 충고를 들을 기회가 없음을 걱정하였고, 좋은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늘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이에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참된 애정과 인간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를 우러러 섬겼다고 한다. 그리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부자와 유명명사들을 멀리했다. 둘은 함께 식사와 운동을 하고, 같은 천막에서 잠을 잤다.’ 라는 구절을 통해서 그 둘은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위해주고 친구나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였음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훗날 교사가 되어 누군가의 스승이 되었을 때 소크라테스처럼 제자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진실한 충고를 해줄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고, 평소 남이 하는 충고나 조언 듣기를 싫어하고 자기 생각에 갇히는 것이 심한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알키비아데스와 관련된 일화를 통해 그의 폭력성도 볼 수 있었다. ‘알키비아데스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에게 호메로스의 책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선생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자 그는 주먹으로 선생을 때렸다.’, ‘그는 무척 잘생기고 큰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개는 특히 꼬리가 아름다웠는데 알키비아데스는 그것을 잘라버렸다. 깜짝 놀란 친구들은 아테네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비난할 것이라 걱정하자 그는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거야. 아테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퍼뜨리노라 나에 대해 더 나쁜 소문을 퍼트리지 않을 테니까.” 라고 말하였다.’ 는 구절을 통해 그가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고, 일반적인 상식에서 이해될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이러한 기질이 훗날 그를 배신자로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는가?’ 생각도 들었다.책을 다 읽고 나서 여러 인물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중에서도 ‘페리클레스’라는 인물이 제일 기억에 남았으며 훌륭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의 삶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페리클레스는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에게서 등을 돌리고 수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책을 펼친 정치가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국민을 두려워하였는데, 특히나 자신 스스로가 전제군주가 되려고 함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젊을 때부터 정치를 멀리하려 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는 용감한 군인이었다. 훗날 아리스테이데스가 사망하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추방되고, 키몬이 멀리 출정하여 그리스를 오랫동안 떠나 있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정치가가 되었고, 즉시 자신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위엄을 지켰다. 이렇듯 그는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만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귀족 출신 즉, 기득권층의 인물이 평민의 편에 서서 정치를 한다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이 틀림없는 데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정국을 운영했다는 것에 먼저 감명을 받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했다는 것에 두 번째 감명을 받았다. 사람이란 존재가 욕심이 끝이 없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어서 자신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은데 자신을 절제하고 생활방식을 바꾸어 정치에 임했다는 것에 두 번째 감명을 받았다. 아마 21세기에도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말년의 페리클레스는 불행하였다. 두 아들을 비롯한 많은 측근이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맏아들 크산티포스와의 갈등은 아들이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 때 아들 크산티포스, 동료들, 측근들 등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러한 큰 불행을 당하고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보이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누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식결혼에서 얻은 막내아들 파랄루스가 죽었을 때, 그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장례식 때 파랄루스의 머리에 화환을 씌워주는 순서가 되자 슬픔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고 한다. 평생에 걸쳐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가 좋은 정치가, 군인이었음을 떠나 두 아들의 죽음을 마주했던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너무나 가여웠다. 또 공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자신의 슬픔을 참고 혼자 삭혀야 했던 불행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사망하자 아테네인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생전에는 그의 권세에 불만을 느꼈던 사람들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페리클레스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자주 해주시는 말씀 중에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된다.”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페리클레스도 훗날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좋은 정치가이자 군주였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그가 많은 것들을 잃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는 생전에 모든 권력과 지위를 포기하고 좋은 아버지,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조지오웰의 1945년 8월에 발표된 이 소설은 레닌 뒤를 이은 스탈린 독재체제에 대한 풍자를 우화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등장인물 각각은 스탈린주의에 누군가를 대표하고 있다. ‘메이저’는 마르크스 혹은 레닌을, ‘스노우볼’은 트로츠키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가리키고 있다. 이외에도 직접적으로 “누구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시대를 살았던 어떤 계층 혹은 파(派)를 가리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화 형식이어서 다른 소설들보다 쉽게 읽혀졌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렇다고 그 속에 담겨있는 시대상이나 당시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사상이 아이들이 읽는 우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각 인물과 집단을 나타낸 동물들의 구체적인 행동과 생각에 대해 읽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그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책을 읽으면서 감명 깊었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구절을 인용하면서 당대의 생활상과 사람들의 사상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떻게 된 것도 모르는 사이에 “혁명”을 이룩한 뒤 젊은 수퇘지 두 마리 스노우볼과 나폴레옹은 동물들의 대표로서 역할을 도맡아했다. 책에서 아래와 같은 구절을스노우볼과 나폴에옹이 다른 어느 동물들보다 가장 열심이었는데,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 둘이 의견에 일치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소련에서 레닌의 11월 혁명이 성공한 후 소비에트 정권이 어느 정도 기반을 잡게 되었지만 죽게 되고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는 것과 관련된 부분이다. 후계자 문제를 두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러시아의 이 양자 간 대립은 두 세대 혹은 두 가지 기질 간 대립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내외의 모든 문제에 있어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였다. 따라서 소련 내에서도 우익세력과 좌익세력 두 파의 싸움이 불거졌다. 스탈린은 부하린의 우익 노선을 지지하였고, 좌익세력은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 둘은 이전의 1920년대 레닌의 신경제 정책에 대해 논쟁을 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해석 차이로 노선의 방향의 격차가 점차 커지게 된다. 이 역시 동물동장 내용 중에 언급되어 있다.스노우볼의 생각은 주변 농장의 동물들에게 비둘기들을 더 많이 보내 혁명을 선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인간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않으면 다시 정복될 수 있으니 전국 각지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면 동물농장을 방어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나폴레옹 생각은 우선 무기를 확보해 이를 동물들 스스로 다룰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스노우볼은 혁명을 확대하고자 한다. 이는 곧 사회주의를 러시아 한 곳에서만 성립할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공산주의 확립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하는 트로츠키의 입장이다. 반면 나폴레옹은 무기 확보를 통해 동물농장 내 동물들의 훈련을 주장한다. 이것은 당시 전 세계적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소련에서 먼저 발전해야한다는 일국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스탈린 입장을 의미한다. 공산당원 다수의 지지를 통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공산당에서 제명하고 축출하며 결국 암살까지 하게 된다. 이는 책 속에서 큰 개 아홉 마리가 스노우볼을 몰아내는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당시 러시아는 이렇듯 스탈린의 사회주의 공세에 의해 본격적인 사회주의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국제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열강에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일국 사회주의 건설의 노선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의 사람들은 이 상황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이 역시 동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엿볼 수 있다.복서의 구호인 “내가 더 열심히 일한다.”와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가 그에게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것 같았다.이처럼 동물농장에서 (대다수의 소련 인민 중 한 명으로 표현된) 말(馬) 복서는 독재라고 여겨지는 스탈린 체제에 아무런 저항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숭배하기까지 한다. 그(나폴레옹이자 스탈린)가 곧 신이며, 그의 말이 곧 법인 것 마냥 따른다. 아마 당시 러시아인들도 복서와 같이 그러 했을 것이라 사려 된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 독재아래 시키는 대로 농업과 산업화에 동참했으며 두려움과 공포에 오히려 독재자를 숭배까지 하였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혹은 국가에서 말해주는 생산력 증대를 독재의 성공이라 여기며, 스스로 노동을 독려하고 위로했을 것이다. 또한 동물농장의 여러 동물이 나폴레옹에 의해 죽어나가는 것, 실제 스탈린이 대숙청을 단행하는 것을 보며 소련 사람들은 더더욱 순종적이고 독재에 충성을 맹세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20세기 초 러시아는 독재라는 이름하에 많은 이들이 인권 탄압, 언론과 사상의 억압, 자유의 몰락이 출렁이는 대공포의 시대를 경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더더욱 무지몽매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 수레에서 나올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이 모습을 통해 현재 북한이 떠올랐고, 20세기 초중반의 러시아의 국민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나를 비롯해서 북한사람들을 제외한 사람이라면 북한의 공산주의 아니 어쩌면 독재가 그들의 생활을 파멸로 내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북한국민들은 원수를 숭배하고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인다. 처음부터 그들이 무지하고 우매한 존재였기에 그랬다고 할 수 있을까? 언론 탄압, 자유의 몰락, 독재수단으로서의 교육, 대숙청 단행 등을 보고 들으며 세뇌를 당하고 순종적이게 된 것이 아닐까? 20세기 초중반 러시아인들 역시 그러했을 것 같다. 물론 사회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거나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했을지라도 생존하기 위해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혹은 혼자만의 생각으로 마무리 지어야했을 것이다. 이 역시 동물농장의 여러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잘 나타난다.동물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자신들의 기억과 스노우볼이 존즈의 앞잡이였다는 스퀼러의 주장을 어떻게 끼워 맞춰야 하는지 몰랐다. 의심을 하지 않는 복서 같은 동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 장면을 그렇게 기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이 여전히 개운하지는 않았다.
역사과 교수-학습 지도안대단원명1.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대상 학년중 2학습주제2. 인류의 출현과 선사 시대의 문화교과서 쪽p. 18~21학습 목표1.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통해 그 당시 생활모습과 문화를 설명할 수 있다.2. 신석기시대의 농경과 목축이 가지는 의미를 말할 수 있다.3.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생활모습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단계교수-학습 과정교사학생수업방법유의점도입5′(5′)▶인사 및 수업 환경조성“안녕하세요, 여러분.주말은 잘 보냈나요?”▷인사 및 수업 환경조성“안녕하세요. 네.재미있게 보냈어요.”일제식프린트를모두 받았는지 확인한다.▶PPT를 통해 이전 시간에 학습한 내용을 환기시킨다.“지난 시간에 우리 뭐 배웠는지 기억나나요?”“맞아요, 그리고 인류의 출현에 대해서도 배웠죠? 그럼 우리 O/X퀴즈로 지난 시간 배운 내용 잠깐 확인해 보고 갈까요?”▷PPT를 보며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네. 역사의 의미요.”“네.”“O”"X"일제식,문답식,PPT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PPT를 활용하여 복습하고, 대답을 이끌어낸다.▶PPT와 칠판에 적힌 학습목표를 다함께 읽어보도록 한다.“자 그럼 우리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볼까요?다 같이 칠판을 보고 오늘의 학습 목표를 함께 읽어봅시다.”▷학습목표를 다함께 읽어본다.PPT,일제식학습 목표를 읽으면서 배울 내용을 인식하도록 한다.1.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통해 그 당시 생활모습과 문화를 설명할 수 있다.2. 신석기시대의 농경과 목축이 가지는 의미를 말할 수 있다.3.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생활모습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전개33′(38′)▶구석기 시대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제시하고, PPT와 학습지를 통해 자료를 제시한다.“자 우선 동영상을 하나 보고 갈까요?”“잘 봤나요? 어떤 모습들이 보였어요?”“맞아요. 여러분이 말한 것들이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이에요. 채집과 사냥을 하고,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먹었어요. 동굴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사냥과 채집에요. 이런 것들은 큰 돌을 깨트리거나 떼내어 만든 돌로, 뗀석기라고 해요. 그리고 뗀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구석기라고 해요. 이해가 되나요?“뗀석기도 생김새별로 명칭이 달라요. PPT의 2개의 사진을 봅시다. 둘 사이의 차이가 느껴지나요?”“이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우리 교과서 18쪽에 나와 있어요. 다 같이 읽어봅시다.”“잘 읽었어요. 우리 그러면 이제 한반도 내의 구석기문화에 대해 알아봅시다.”선생님이 나눠준 학습지를 꺼내봅시다. 활동 1의 지도가 보이죠?”“그 곳이 한반도 내의 구석기 유적문화가 발굴된 곳이에요. 이 중에서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4곳이 있어요. 교과서 19쪽을 잠시 읽고 학습지의 지도에 이 4곳을 표시해 볼까요?”"다 했나요? 그러면, 우리 학습지 활동 2를 통해 배운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다 하였나요?”“몇 번이 정답이죠?”“잘했어요. 보기의 내용은 구석기시대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거예요. 그리고 구석기시대와 관련된 그림은 3번의 뗀석기이죠?”▷동영상을 보고 구석기 시대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과서와 PPT를 보며 구석기 시대의 문화와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네.”“돌을 사용해서 사냥활동을했어요.”“동굴에다 그림을 그렸어요.”“불을 사용해서 음식을 익혀먹는 것 같았어요.”“이곳, 저곳 옮겨 다녀요.”“강가에 나무집에서 살아요.”“네.”“네.”“깨진 돌 같아요.”“네.”“네.”“찍개란 큼직한 자갈돌을 깨트려 만든 가장 오래된 뗀석기이다. 주먹도끼란 짐승을 사냥하고 땅을 파는 등 거친 작업에 적합한 뗀석기이다.”“네.”“네.”“네.”“네.”“네.”“3번이요.”“네.”PPT,일제식, 강의식,문답식학습지,일제식,강의식동영상을 통해 관심을 가지도록 한 후, 교과서와 PPT를 통해 구석기 시대의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한다.학습지를 통해 구석기 문화를 학습할 수 있도록 한다.▶신석기 시대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학습지를 제시하고, PPT와 학습지를 통해 학습을 돕는다.“그럼 이제 우리 구석기 다음 시대인 신석기”“어떤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나요?”“다들 맞았어요. 동기의 하루에는 신석기시대의 생활문화가 많이 나와 있어요. 선생님이랑 하나하나 살펴볼게요.”“동기의 하루에서 보았듯이 신석기시대에는 돌도끼와 돌괭이와 같은 간석기를 사용했어요. 우리 구석기시대에서 배운 뗀석기는 이제 무엇인지 알고 있죠?“근데 간석기는 무엇인지 잘모르겠죠?”“간석기는 뗀석기보다 돌을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갈아서 만든 돌을 뜻해요. 알겠나요?”“다음으로 신석기 때는 농사를 지었답니다. 여러분 구석기 시대에서는 주로 무엇을 해서 식량을 마련하였죠?”“맞아요. 그런데 신석기에 들어서는 사냥했던 동물들을 사육하기 시작하였고, 농사를 시작하였어요.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구석기와 신석기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랍니다. 왜냐하면 농경과 목축을 통해 남는 식량이 발생하였고, 따라서 식량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되어서 움집이라는 집을 짓고 정착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신석기시대와 같이 농사를 짓는 사회를 농경사회라고 불러요.”“그리고 ‘동기의 하루’에서 동기가 어디에서 저장된 곡식을 가져왔죠?”“맞아요. 위에서 배웠듯이 신석기시대부터는 농사와 가축사육을 통해 식량이 남게 되었고, 이것을 저장할 곳이 필요했어요. 따라서 토기를 만들게 되었어요. 우리 교과서 21쪽에 나와 있는 빗살무늬 토기 사진을 보고, 설명을 읽어봅시다.”“잘 읽었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동기의 하루’와 관련된 질문을 할게요. 동기와 공동체 마을사람들이 무엇을 했죠?”“아주 잘 대답해주었어요. 신석기시대부터는 태양, 물, 바위 등 자연물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를 주도했던 제사장은 공동체를 이끌면서 점차 권력을 쥐게 되었답니다. 다들 이해가 되나요?”“그럼 우리 이제 한반도의 신석기생활과 관련해서 수업을 해볼게요.”“우리 아까 전에 곡식을 어디에 저장한다고 했었죠?”“맞아요. 한반도 내에서 여러 가지 토기를 사용했다고 해요. 토기의 모양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설명한다.“이제 우리 모둠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나 해볼 거예요.”“학습지의 활동3 ‘동기의 하루’에 큰 빈칸 다들 보이죠?”“‘동기의 하루’는 그림일기인데, 지금 그림 부분이 빠져있어요. 여러분이 읽은 일기내용을 토대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주세요. 완성한 그림은 모둠별로 발표를 할 거예요.”“다들 완성하였나요?”“그러면 1모둠부터 순서대로 발표를 할게요,”“다들 잘 발표해주었어요. 이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생활문화에 대해 잘 알겠나요?”▷학습지와 PPT를 통해 신석기시대의 생활과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를 이해한다.“네.”“신석기인의 일기인 동기의 하루를 읽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표시해봅시다.”“네.”“네.”“돌도끼와 돌괭이를 사용해서 땅을 일구고, 나무를 베는 거요.”“가축들에게 먹이 주는 부분이요.”“토기에 저장되어 있는 곡식이요!”“제사 지내는 거요.”“네.”“네.”“네.”“네.”“채집과 사냥이요.”“토기요.”“토기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명한 창조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제사요.”“네.”“토기요.”“네.“덧무늬 토기요.”“누른무늬 토기요.”“빗살무늬 토기요.”▷모둠별로 활동지를 완성하고 발표를 할 수 있다.“네.”“네.”-1모둠부터 마지막 모둠까지 활동지를 들고 그린 그림을 설명한다.“네.”PPT,학습지,강의식,일제식,문답식PPT학습지,일제식,문답식학습지,발표식학습지를 통해활동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있는 학생을돕는다.모둠별 활동을 통해 신석기시대의 생활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발표할 수 있도록 한다.정리7′(45’)▶형성평가를 통해 수업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그럼 오늘 배운 내용을 십자말풀이를 통해서 한번 정리를 해 볼까요?”“PPT를 통해 답을 확인해볼게요.”▷형성평가를 통해 학습한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네.”강의식, PPT,학습지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형성평가를 통해 간략하게정리한다.▶다음 시간에 배울 내용을 예고한다.“다음 시간에는 고조선과 여러 나라의 성장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볼 거 에요. 오늘 공부한 내 작성하기보다는 쪽을 이어 제시할 것.1.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 성립 (2) 인류의 출현과 선사 시대의 문화●강가에서 막집을 지어 살았으며채집과 사냥을 통해 식량을 마련하였습니다.●대표적인 유적은 경기도 연천전곡리, 평남 상원 검은모루동굴 등이 있습니다.●이동생활을 하였으며, 불을 사용할줄 알았습니다.학습 목표1.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통해 그 당시 생활모습과 문화를 설명할 수 있다.2. 신석기시대의 농경과 목축이 가지는 의미를 말할 수 있다.3.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생활모습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활동 1. 위 지도에 표시된 곳은 구석기 유적이 발굴된 곳입니다. 이 중 교과서 19쪽에 나와 있는 4곳을 표시해보고, 자세한 발굴 장소를 적어봅시다.활동 2. 에서 설명하는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은 무엇입니까?2학년 ( )반 ( )번 ( )활동3. 신석기인의 일기인 ‘동기의 하루’를 읽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표시해봅시다.오늘 아침 일찍 어머니가 나무를 베고, 땅을 일구고 나무를 베러 가야된다고 동생들과 나를 깨우셨다. 왜 나무 베야 되냐고 여쭈니 다음 주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돌도끼와 돌괭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저번 주에 친구들이랑 새 돌괭이랑 돌도끼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오늘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땅을 일궜고, 나무가 잘 베어졌다. 덕분에 빨리 일을 끝낸 것 같다. 일을 다 끝내고 집에 돌아와 점심 먹을 준비를 하였다. 어머니가 토기에 있는 곡식들을 꺼내오라고 하셨다. 귀찮았지만 땅에 박혀있는 토기 속의 조와 피를 꺼내왔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친구들과 물고기 잡이를 하러 갔다. 오늘도 역시 석구가 제일 많이 잡았다. 꼭 언젠가는 내가 제일 많이 잡아서 석구를 이기고 싶다. 너무 많이 움직였는지 피곤하고 잠이 와서 움집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이번에 아버지가 소들 먹이 주고오라고 나를 깨우셨다. 그래서 소들 먹이를 챙겨주고 돌아왔다. 저 멀리서 바위 제사 준비를 하고 계시는 제사장님이 보였다.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