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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DU 노벨상과 과학사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과학문명과 기술)
    삼국시대 중 고구려의 과학문명과 기술(천문학, 의학, 건축, 미술, 군사기술)과목 : 과학사의 이해학번 : U0620155070이름 : 윤정민1. 고구려의 시대상황 및 당시 과학기술 배경고구려는 부여 왕실의 서자인 주몽이 세운 나라다. 최초에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었고, 국가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결정하던 귀족회의인 제가회의가 있었다. 연맹왕국이었던 고구려는 1~2세기 태조왕이 옥저를 정복하고 왕위를 세습제로 바꾸면서 왕권 강화를 시작한다. 계루부 고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형제세습이지만2~3세기 고국천왕이 부자세습으로 바꾸고 5부족 연맹체였던것을 다섯 행정구역으로 바꾼다. 중앙집권화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을파소를 등용해서 우리나라 역사의 최초의 복지정책인 진대법을 시행한다. 중국에서 조조가 다스리던 위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겪는다. 4세기 미천왕이 한사군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낙랑군을 몰아내지만 아들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또 다시 세력이 약화된다. 하지만 4~5세기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10관등으로 서열을 정리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인 태학을 설립하고 중국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면서 고대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렇게 1세기 태조왕이 왕권강화, 4~5세기 소수림왕이 율령반포,불교수용을 기반으로 같은시대인 5세기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게된다. 광개토대왕은 요동, 북만주 정벌하면서 신라가 왜구로부터 어려움을 겪었을 때 도움을 준다. 장수왕시절에 중국의 북조, 남조 두 세력 모두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하정책을 펼치기위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를 한다. 남진정책을 통해서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으로 차지하게 된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나제동맹의 결과를 낳게된다. 이후 수나라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오지만 을지문덕장군이 살수대첩으로 막아낸다. 수나라는 총 네 번이나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고구려가 잘 막아내는 바람에 국가 재정이 바닥이 되어 망하게되고 당나라가 탄생한다. 이 당나라도 고구려를 쳐들어오는데 이때는 연개소문이 지켜낸다. 이 당시 고구려왕은 영류왕이었는데 친당정책을 펼쳤는데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을 세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연개소문이 죽고 장남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688년 멸망하게 된다.2. 고구려시대의 과학문명과 기술덕흥리 고분 벽화를 보면 별자리는 아니면서 아주 희한한 모양을 한그림이 북쪽 하늘을 상징한 곳에 그려져 있다. 북두칠성의 바가지 아래쪽에는 몸은 하나인데 사람 모양을 한 머리가 둘이고, 다리가 네 개인 인두전수의 벽화이다. 이러한 신화적인 그림 옆에는 지축일신양두라는 설명글이 보인다. 이 지축상을 유심히 보면 왼쪽의 머리는 남자형태이고 오른쪽의 머리는 여자형태를 하고 있다. 몸은 파충류를 신령화한 용의 몸을 하고 있다. 글씨 그대로 지축이란 지구의 횐전축을 뜻한다.① 천문학상고시대인 고구려떄에 지구의 자전이 밝혀지기는커녕 멀리 배타고 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는다고 하였던 서양의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구려가 그 당시에 자전축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엄청난 충격과 놀라움을 주고 있다. 고대에 천구의 회전운동을 상징하는 가장 확실한 별자리인 북두칠성과 함께 지축상의 벽화를 남겼다는 것은 이미 고구려의 천문학은 지구의 자전축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증건인 셈이다. 고대에는 칠성별을 음두성과 양두성으로 나누어 음양신으로 모셨는데 벽화에 나타난 지축상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양두성과 음두성을 뜻하는 음양신을 지구의 자전축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녀를 음양신으로 나타낸 것은 극과극을 뜻하는 것이며 극과극은 북극과 남극을 상징하는 것이다. 벽화에 남겨진 이 한 개의 지축도는 고구려 신화와 천문이 담겨져 있고 고구려인들의 천문학이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음을 엿볼수 있다.② 의학조선중앙통신은 고구려 시기의 전통 의술에 대한 소개 기사를 소개하며 이 시기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의학기술 성과가 민족의학 발전에 큰 밑천이 됐다고 평가했다. 고대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의술을 배운 안작득지는 침놓는 기술이 뛰어나 그에게서 침을 맞으면 나지 않는 병이 없었다고 통신은 전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약효를 인정받고 있는 인삼역시 고구려가 세계 처음으로 재배, 질병치료에 사용했던 약용식물이었다고 말했다. 1천500년 전에 씌어진 중국의 한 의서에도 고구려 인삼의 뛰어난 약효를 소개한 인삼노래가 기록돼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당나라 때의 손사막이 쓴 천금요방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만성위염과 위궤양을 치료하기 위해 대황, 더덕뿌리, 생강, 족두리풀, 작약, 꿀 등으로 제조한 알약의 처방이 적혀 있다고 소개했다. 700년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부여계의 정통성이 확보되는 문화적 계통을 이어가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을 과시했던 찬란한 문명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의학적 지식기반도 당연히 확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에서 ‘군자국(君子國)’이니 ‘불사국(不死國)’이니 지칭하였듯이, 국가의 체계가 정비되고 민생이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군자국’이라 지칭하였고, 이에 따른 의학에 관한 지식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형성되었기에 ‘불사국’이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날 전해지는 , , , , 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약재들이 기재되고 있음도 그러하거니와, 에 기록되고 있는 이나 과 에 기재되어 있는 의 ‘폐옹방’과 ‘정종방’은 오늘날 임상에 적용한다 하더라도 탁효를 볼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신효한 처방들이다. 비록 이들 의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중국문화의 최성기에 해당하는 당나라 왕도(王燾)가 귀한 신분에게 쓰이는 ‘노사(老師)’라는 존칭을 써가면서 에 기록하였다는 것만 봐도 당시의 고구려 의학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우열 교수는 “고구려의 한 의사가 중국 위나라에 가서 침을 놓았는데, 한 치 되는 머리카락을 10개로 동강을 내고 침으로 꿰뚫어 보고 머리털 안이 비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들며 침놓는 실력이 비범했음을 말하고 있다.③ 건축쌍영총 :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고분으로, 전실과 현실이 있으며, 통로에 한 쌍의 팔각 기둥이 세워져 있어, 쌍영총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분의 벽화에는 불교 행사 장면, 기마 인물, 여인상 등의 인물 표현이 세련되었고, 고구려 벽화 가운데서도 완숙한 회화로 널리 평가된다. 특히 주름 치마의 여인상은 다카마쓰 무덤벽화와도 연결되어 양국간의 문화 교류를 엿볼 수 있다.고구려의 건축은 통구지방의 고구려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가장 오래 된 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평양의 청암리 절터에서 고구려의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에 세워진 청암리사지는 현존하는 절터 중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로 추정되며 이절터는 중앙의 8각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과 서에 당, 남으로는 중문지, 북으로는 동서에 있는 당의 규모보다 큰 당을 배치하여 1탑 3금당식 배치를 하고 있다. 의 천관서에 나타난 오성좌의 구성을 그대로 적용하여 지상에 재현한 중국의 궁전 배치와 유사한 원리를 가진다.④ 미술우현리 대묘의 사신도 : 사방 벽에 사신도를 그린 것인데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표현한 것이다 사신도에서는 역동감이 있고 박진감이 넘치는 필치를 느낄 수 있으며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B.C 1~2 세기 경 만주에서 일어나 퉁거우 지방에 자리잡은 고구려는 인접한 다른 민족과의 끊임 없는 싸움으로 씩씩한 기상을 길렀다. 이와 같은 기질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씩씩하고 패기가 넘치는 생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만주의 퉁거우 지방과 평양 부근에 많은 유적과 미술품을 남겼다.풍속도 : 고구려인들이 사냥, 씨름, 무용 등을 하는 생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특히 무용총의 고분 벽화인 무용도와 기마 수렵도 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생활을 즐기는 모습과 씩씩한 기상 등을 엿볼 수 있다.조각 : 금동 여래 입상, 금동일광 삼존불, 전불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교의 전래가 이 시대의 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⑤군사기술고구려는 성을 축조하는 것으로부터 잉태되었고, 그 이후 영역을 확장하는 곳마다 성을 쌓은 그야말로 ‘성의 나라’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성을 중심으로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입체적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구간의 경우, 초기에는 국내성 외곽에 동심원 모양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바깥에 하천 연안로를 따라 종심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구려가 얼마나 물샐틈없는 방어망을 구축했으면, 당나라 관리조차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잘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당의 국내외 정보를 총괄하던 진대덕도 641년 외교 사절을 가장해 고구려의 군사 기밀을 정탐하다가 깎아지른 산줄기로 둘러싸인 오골성의 위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실제 수양제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무려 세 차례나 고구려 정벌에 나섰지만 단 하나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당 태종 역시 주변국을 거의 모두 정벌하고 진대덕까지 파견해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수립했건만, 안시성의 덫에 걸려 눈물을 머금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독후감/창작| 2018.06.13| 7페이지| 2,0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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