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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의 생애, 느낀점, 나의 생각 평가A+최고예요
    목 차서 론본 론1. 김옥균의 생애와 사상1) 김옥균의 성장과정2) 개화사상가 김옥균2. 갑신정변 지도자로서의 김옥균의 활동3. 갑신정변의 영향4. 김옥균의 최후5. 김옥균에 대한 나의 생각6. 내가 만약 김옥균이었다면결 론사 진 자 료참 고 문 헌서 론김옥균은 한말의 대표적인 개혁적인 정치가로써 그가 주도한 1884년의 갑신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와 상황, 그리고 누가 평가의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여러 갈래로 엇갈리어 왔다. 그뿐 아니라 갑신정변 차제가 실학사상의 발전을 통하여 얻어진 자주적 근대사상의 맥락 속에서 그 사상적 기반이 이해 될 수 있는 반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낸 양상에서는 외세와의 결탁 내지는 의존적인 측면도 엿보이기 때문에, 평가의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는 것으로서〈근대화운동의 선구자〉〈위로부터의 부르조아 개혁을 위한 쿠데타〉〈근대 한국민족주의의 선구적인 운동〉혹은〈정치세력 간의 주도권 경쟁〉등의 다양한 표현이 제기 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갑신정변의 수장 김옥균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지금까지 김옥균과 갑신정변의 평가가 아닌 나만의 새로운 평가를 내려 보고 싶었다. 그래서 김옥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본론에서는 김옥균의 전반적인 생애를 다룰 것 이고 그리고 결론에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나만의 새로운 평가를 도출할 것이다.본 론1. 김옥균의 생애와 사상1) 김옥균의 성장과정김옥균은 1851년 1월23일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백옥 같이 맑고 아름다워 그의 부친은 이름을 옥균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병자호란 때의 두 명신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출한 명문이었으나, 그 후 실세하여 그의 부친 김병태는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였다. 1852년 그가 2세 때 천안으로 집을 옮겨 아버지가 서당 훈장질을 하며 근근이 살아갈 정도로 어려웠었다.김옥균의 총명함은 그의 나이 6세 때 있었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기가 뜻하는바 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이러한 상황에서 김옥균은 22세 때인 1872년 2월 문과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 등을 거치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젊은 인재로 이름을 날리는 한편 어윤중 김홍집 김윤식 등과도 친교를 맺으며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렇게 그는 30세 이전에 쟁쟁한 나라의 청년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1873년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면서 외세의 침입이 더욱 적극적으로 바뀌고 나라의 민족적 위기가 다가온다. 이에 김옥균으로 하여금 나라를 근대적으로 변혁하는 것이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역사 발전의 요구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였으며 국가 변혁을 위한 실천적인 정치활동에로 그를 추동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경에 우리나라 정치무대에서는 나라의 근대적 변혁을 지향한 새로운 정치세력 즉 개화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서양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김옥균은 이러한 서양 문물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도 특별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개화에 뜻을 둔 인물이었다. 김옥균, 유대치 등이 주장한 개화사상을 우리나라 사회 경제 발전과정에서 새로 자라나는 자본주의적 요소의 반영이었으며 사상적으로 부르조아 정치사사의 최초의 조류로 되었다. 김옥균의 지도하에 개화파들의 정치적 활동이 전개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드디어 여러 세기에 걸쳐 실학자들이 이상하던 “부강한 조국”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인 낡은 봉건제도의 청산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단체가 시작된 것이다.김옥균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선진제국의 경험으로부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도를 연구 섭취하여 국정개혁을 준비하기 위해 1881년 12월에 이동인 스님의 소개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 6개월 동안 일본전역을 돌아보며 일본의 구미자본주의 침략을 당자제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청년을 일본의 군사 사관학교와 게이오의숙 등에 유학시켜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 사상을 배우게 했다. 그밖에도 외국 서적을 소개하거나 한성순보를 간행하는 등의 계몽 활동을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종에게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화파의 활동에 힘입어 근대적인 성격을 띤 상회와 회사, 신문 등이 만들어 졌다.1882년 임오군란 뒤 민씨 정권이 청에 더욱 의지하고 그동안 시행한 개화정책을 후퇴시키고, 조성된 긴박한 정세와 준비된 개화파의 지반에 기초하여 수구파 반동세력과 그와 결탁한 만청 침략세력의 방해 책동을 물리치면서 개혁 운동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개화파들이 추진한 평화적 개혁운동은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개화파는 민씨 정권에 대한 인식과 외교정책, 개화 방법을 둘러싸고 두 계열로 나뉘게 되었다.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은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청과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하면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기술문명만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들은 민씨 일파와 타협하여 점진적으로 부국강병의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 기술문명뿐만 아니라, 근대사상 제도까지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청과의 사대 관계를 끝내고 근대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았다. 또 민씨 일파의 부패와 무능에 불만을 품고 나라가 부강하고 문명개화하려면 하루빨리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민씨 정권을 타협이 아닌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민씨 정권도 처음에는 청의 근대화 정책을 본떠 겉으로나마 개화정책을 실시했지만 그것은 체제를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수준에 그쳤다. 아직 정치권 안에서 세력이 우세하지 못했던 개화파는 한동안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을 지원하는 체제 안의 개혁운동에 힘을 쏟았다. 김옥균은 고종을 개명하게 하려고 힘쓰는 한편, 승려 이동인 등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와 일부 궁인과 위기가 절정에 달하고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정치적 대립이 엄중하게 첨예화된 조건하에서 개혁운동의 평화적 발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때에 포착하고 모든 역량을 수구파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무장정변을 준비하는 데로 집중하였다. 김옥균의 그러한 결심은 아주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만약 개화파가 결정적 행동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개화파는 수구파의 반혁명적 공세 앞에서 정치적 세력으로서 청산도리 것은 명백하였고 나라의 운명은 헤어날 수 없는 부패와 예속의 진흙탕 속에 더 깊이 빠져들어가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정변을 준비하는 시기에 개화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김옥균의 비범한 정치적 자질은 정변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가능성들을 주어진 불리한 조건에서도 기민하게 포착해 나가는 데서 뚜렷이 발현되었다. 그는 개화파의 역량은 미약하고 그에 반하여 조청 두 반동세력의 연합역량은 엄청나게 큰 것이라 할지라도 변천하는 국제정세의 유리한 국면을 주동적으로 이용한다면 불리한 점을 보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민하게 포착하였다. 그는 1883년 3월에 만청 통치층 내에서 정변이 일어나고 4월에는 청불 관계의 악화와 관련하여 조선에서의 만청 지배층의 지위가 동요하기 시작한 정세를 정변 단행에서 극히 유리한 정세로 평가하였다.1884년 6월 봄 안남 문제를 두고 청과 프랑스가 대립하였다. 그 해 7월 일어난 청불 전쟁에 앞서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3천 명의 청군 가운데 절반을 철수 시켰다. 개화파는 이때를 민씨 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로 삼았다. 일본침략자들은 이 정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며 조선에서의 침략행동을 적극화할 목적으로 그 해 9월에 다께조에 공사를 급작스레 조선으로 향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다께조에 공사를 급작스레 조선으로 향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그들의 교활한 야욕을 간파하고 오히려 개화파들의 정변 목적에 역이용하기 위한 적극적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유리하였다. 왜냐하면 청군의 반정변 무장진출을 견제할 수 있는 약하고 사랑하는 조국산천을 등지고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3. 갑신정변의 영향이처럼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 정변은 개화파가 조선 사회를 낡은 봉건 체제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 체제로 발전 시키려한 최초의 정치적 시도였다. 근대화의 주체로서 근대적 시민 층과 민중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앙 권력 안에서 성장한 선진적인 청년 관리가 주체가 된, 봉건 권력 안에서 일어난 부르조아적 개혁 운동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을 살펴보면 먼저 청의 세력을 너무 무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나라 군대는 약 1,500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국의 군사력을 견제키 위해 개혁파들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있었던 일본군은 고작 12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갑신정변 당시 우리나라 안의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은 10대 1이상의 비율로 중국이 우세하였던 것이다. 정변 3일째 되는 날 청나라 군대가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개화파들과 일본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당장에 개화파와 일본군대는 중과부적으로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일본이 패배를 시인하고 도망침에 따라 갑신정변의 운명은 순식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 갑신정변은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을 왜곡하고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달성키 위해 개화파들은 폭력의 수단을 빌어 총칼을 휘두르며 반대파 인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궁을 피로 물들게 하였다. 비록 개화파의 목적이 고귀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한 폭력 수단이 처참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방법과 목적이 동일시되어 개화의 사상마저 일반 국민들에게 참혹한 것으로 비치게 되었다. 국왕은 일반 민중들에게 대단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화파들은 정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고종을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경우궁에서 계동궁으로, 계동궁에서 창덕궁으로 끌고 다녔다. 그리고 정변 마지막 날 청나라 군대가 왕궁하였다.
    인문/어학| 2018.04.26| 11페이지| 3,000원| 조회(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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