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드러내는 문학의 의미문학은 언어를 사용한 예술 작품이라고 정의된다. 언어란 사람들의 생각, 느낌을 나타내는 수단이다. 이러한 언어에는 언어를 사용하는 무리의 특성, 즉 사람들의 문화나 삶이 담겨져있다. 문학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화와 삶, 문화의 화(化)가 꽃(花)을 뜻하는 단어와는 다르지만, 문화를 꽃피우다라는 말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로써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삶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삶이란 그 자체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으로 살아야한다고 서로를 다독이곤 했다. 또 TV나 라디오, 가까이는 선생님들에게도 인생은 롤러코스터다 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는데, 이것이 나타내는 건 삶이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다라는 뜻이지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라고 이해했다. 불행이 찾아와 힘들더라도 그 뒤에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고, 행복이 지나 다시 불행이 찾아와도 참고 이겨내면 행복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도표의 시작점과 끝점을 어디로 잡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자 했다. 물론 지금도 나에게 삶에 대해 묻는다면, 적어도 “내 삶은 불행합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중학생 2학년, 사회에선 중2병이라고도 부르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라고 칭하던 그 시절. 나는 성장 소설을 좋아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좋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무기력해있던 시절이라 어둡고 칙칙한 것을 좋아할 법도 한데 유독 그때는 성장 소설이 좋았다. 교과서에 나왔던 완득이나, 감성적인 일본 느낌이 물씬 나는 소설들을 특히 좋아했다. 그 배경에는 인물의 가난이나 소외같은 불행한 모습도 있었지만, 결국은 주인공이 성장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좋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영화는 해피 엔딩이 좋았고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죽지 않았으면 했다. 삶이란 단어에 있어서도, 문학이 어두운 면이나 좌절하는 부분을 드러내기보단 감싸주기를 바랬다.긍정의 문학이 아닌, 비행운」은 이러한 내 생각에 정면으로 부딪힌 소설이었다. 소설의 너무나도 현실적인 모습은, 그리고 그것을 담담하게 직시하는 작가의 태도는 사뭇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랑 다른 느낌이였다. 「비행운」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지독하고도 현실적이게 우리 삶을 나타내는 문학이, 나에게 무슨 모습으로 받아들여질까? 그리도 또, 나는 이러한 문학속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할까?”「비행운」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벌레들’, ‘물속 골리앗’ 등 총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고, 저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사연 또한 다르지만 작중에는 공통적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형성되어있다. 「비행운」의 책 표지는 이러한 작품들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책에 표지엔 물속에 잠겨있는 사람이 밧줄 위에 한발을 디딛는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물속에 잠겨있다는 표현은 물 때문에 눈, 코, 입, 귀가 모두 막혀 숨을 쉴 수 없고 주변을 살펴볼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밧줄에 발 하나만을 올려놓은 것은 외줄타기 마냥 위태위태하며,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숨쉬기 힘든 답답한 현실 속에서, 외줄타기마냥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삶의 의미를 바라보기「비행운」에 담긴 여러 소설들의 내용은 일단 현실적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의 미영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선배에게 현실에 찌든 부탁을 받고 상처받는 모습은 어쩌면 내 모습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외적으로는 고민할 게 별로 없었던 고등학생 시절과는 다르게, 성인으로 자람과 동시에 된 대학생이라는 위치는 고민할 게 많았다. 인간 관계, 금전적인 문제, 시간의 문제까지 모두 다 껴안고 가기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하나씩 흘리거나 까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작중의 선배의 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용대는 워킹 푸어(Working poor)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그에게 명화를 사랑하는 건 사치였을까, 그녀가 암으로 죽고 그녀가 남긴 중국어 녹음 테이프만을 반복하며 끝나는 소설은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자는 진취적인 메세지와는 정반대의 느낌이다.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기서 멉니까”라고 묻는 질문은 답을 바라고 내뱉는다는 느낌보다 현실을 부정하고 체념하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지금의 나에게 미래의 내 자리는 어딜까? 라고 물으면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여기서 머냐는 질문 역시 막연하지만, 그것에는 응당 멀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내 자리를 찾아갈 날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용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환경을 가졌지만, 그 질문에 체념하듯 담담하게 따라하는 ‘용대’의 모습이 이해가 된다.두 소설을 읽으면서, 이해, 공감이라는 감정이, 삶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들이 처한 상황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게 아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마음 한켠에 고통을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듣는 과정을 통해서, 해피 엔딩으로 끝난 책을 보고 느끼는 성취감이랑은 또 다른 느낌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성취감이라는 것이, “내가 그들을 이해했다!”라는 문제 풀이를 통해 얻는 성취감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무작정 불쌍한 것으로 바라보는 동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책장을 덮고나서 그들이 왜 그랬는지, 어째서 그럴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살펴보고 이해하려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새로운 시선과 태도를 얻는 것,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앞서 말한 또 다른 느낌의 성취감을 얻을 수 있겠다는 말한 소설보다 더 지독하게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현실의 우울함과 같은 내면을 드러내는 소설들을 이해와 공감을 통해 읽어냈다면 이 작품에 접근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은 한없이 어둠고, 쓸쓸하다. 임금 체불 시위를 하다 타워 크레인에서 실족사한 아버지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삶의 의지를 놓은 어머니, 그리고 모든 것이 침식되어 말을 걸수도, 들을 수도 없는 환경에 부유되어있는 주인공까지 「비행운」 소설집에서 우울함이 가장 극에 치닺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수된 타워 크레인에서 라면과 사이다를 발견했을때, 포기하기 직전의 주인공은 원초적인(본능적인) 기쁨을 느꼈으나 이내 모든것이 침수된 주변에서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엔딩은 지독하다 못해 절망적이다.또 「벌레들」이란 소설 역시도 같은 느낌을 지닌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려했지만, 현실적인 고민과 문제에 직면하며 점점 지쳐가는 현대인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부부는 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형편없는 집에 들어가 열심히 청소하고 정리하며 살지만, 형편없는 집은 여전히 벌레가 들끓고, 소음에 찌든 형편없는 집이였다. 현실적인 문제때문에 출산이 다가오는 아내를 두고 야근할 수 밖에 없는 남편, 그리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아내의 모습은 생명을 품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기만 하다. 실수로 결혼반지를 베란다 밑으로 떨어트려서, 벌레들이 들끓는 재개발 구역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양수가 터져버린 아내를 묘사하는 장면은 마치 공포영화의 한장면처럼 읽으면서 생생하게 께름칙했다. 도와달라고 다급하게 소리치지만, 주변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상황은 그녀를 더욱 초조하고 절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이 두 소설의 끝을 보았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구심이였다. 왜 이렇게 절망적이여야만 했을까. 소설의 엔딩을 보고 있는 나에게 절망스럽다는 느낌을 남기는 것도, 소설 속의 배경이 되는 사회의 분위기가 절망적든 것이 의구심으로 남았다. 교수님과의 수업 중“단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더 노력해야할까?” 라는 물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조차 통하지 않는 느낌이였다. 저자는 더 노력해야 한다는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명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까지도 했었다. 소설로 다시 들어가서, 「물속 골리앗」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침수시키고 주인공만 덩그러니 혼자 남겨둠으로써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소설에서의 작가는 창조자이고 신이니까, 불공정하고 이기적인 소설속 사회를 벌주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한 소설 속 아버지의 죽음이 께림칙하다. 분명 실족사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주검은 축축한 상태였다. 그랬어야만 했을까, 결국은 아버지에게 물을 쏘아댄 사람들도, 아버지의 주검도 모두 물에 파묻혀 똑같은 상황이 될텐데 꼭 그랬어야만 했을까라는 분노마저 일기도 했다. 「벌레들」에서도 아내를 도와줄 사람이 왜 없었을까. 왜 남편은 야근을 해야했으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할 수 없었을까. 「벌레들」에서 주변으로 묘사되는 건 옆집이 아닌 밑에 있는 판잣집들과 재개발 구역의 큰 나무뿐이었다. 소설의 전개부터 그들은 이웃과 마주하지 않았으며, 마주할 여유도 없었다. 재개발 구역은 마치 건드려서는 안될 미지의 영역으로 묘사되었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헤쳐봐야할 분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아무도 건드리려하지 않는, 그저 외면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한 두 소설은 우리의 삶과 사회의 절망적인 모습만을 추려내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무서움과 의구심은,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절망적인 사회를 생생하게 인지하게끔 만들었다. 의구심을 비판과 경각심으로 승화하는 과정은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을 무서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제의식을 꺼내며 비판하고 또 현상에 그대로 머무르는
단속당하는 사회일까, 단속하는 사회일까단속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경찰이 생각났다. 음주단속, 노점단속, 주차단속 등등. 물론 나에게 아직은 해당되지 않는 일이겠지만, ‘단속’이라는 그 자체의 단어가 내 삶에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보다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단속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이렇다.단속1(團束)[단속] [명사]? 1.주의를 기울여 다잡거나 보살핌.? 2.규칙이나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나는 두 번째 의미로 단속을 이해하고 있었다. 주어진 규칙이나 법제를 지키게 만들기 위해서 통제하는 권력의 작용으로 알고 있었다. 간단하게 비교하면, 경찰은 권력이었고, 단속은 통제와 제재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그래서일까, 첫 번째 의미로서의 단속은 생소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 보살핀다는 것이 어째 입에 잘 붙지 않는 느낌이었다. 종종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입단속’ 하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이것이 그런 뜻일까? 입단속도 ‘나’라는 주인이자 권력이 내리는 명령의 한 그림일 텐데.엄기호의 「단속사회」를 고른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사회를 단속한다는 것의 주체가 궁금했다. 어떤 주체가 우리 사회를 통제하는지 궁금했다. 저자는 책에서 ‘단속’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어딘가에 늘 접속해 있으면서 어떤 경우에는 벼락같이 연결을 차단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는 관계의 전면적 단절이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 접속하고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가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저자가 단속의 주체에게 던진 질문이다. 사회가 ‘단속’되었다는 표현을 하기 이전에, 언제 어느 곳에 접속하는지,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지가 저자가 밝혀야 할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답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사회가 단속되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권력의 작용이 필요할 것 같았는데 저자는 개인의 시선으로 시야를 좁혀서 글을 시작했다. 질문을 보고 내가 떠오른 대답은 모순적이었다. 사회를 단속하는 것은 사회가 아닐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형태로. 단지 겉모습의 차이로, SNS로, 집단으로, 개인의 모습으로 사회 스스로를 단속하고 단속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단속사회」는 크게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고통에 대면하기, 사회에 저항하기”.일단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앞서 말한 세 개의 부분 중 두 개에 들어가 있는 ‘곁’이라는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간적인 의미로는, 바로 내 옆을 지칭할 수 있다. 당장 내 옆에 있고, 내 앞에 있는 것들이 곁에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형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곁이라는 단어는 사용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에게 맞닿아있을 수 있는 것들 또한 곁에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내가 글과 말을 팔아먹고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곁’과 ‘이야기’다. ‘곁’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에 가깝다. 때로는 신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곁에서 듣는 이야기는 고통 혹은 슬픔에 찬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곁에서 듣는 이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듣는다.저자에게 ‘곁’이란 중요한 것이다. 나를 주체로 칭하면, ‘곁’은 주체로써 행해지는 나의 결정과 선택을 듣는 자리이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나의 결정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지 않는다. 책의 표현처럼 ‘말이 되지 못한 말’에서 ‘말’이 되려면 곁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또한 ‘곁’으로써의 나도 중요하다.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체를 등지고 귀를 막는 것이 아닌 ‘들음’으로써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곁이, 저자에게는 악몽으로 보이고, 쓸모없어졌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말 걸지 않음으로써 곁이 악몽이 되었다. 사회는 몽상처럼 쓸모없는 곁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단속’ 되었음을, 또 ‘단속’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근거일 것이다.“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의 내용은 이렇다. 폐쇄적인 공동체의 끝은 내부의 적에 의한 폭로이다. 곁이 곁이 아닌 상황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개개인은 자기 검열하며 침묵한다. 침묵은 ‘예의바름’ 이라는 형태로 또 등장한다. ‘예의바름’이라는 프레임에 자신의 몸과 말을 맞추며,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명목하에 스스로의 모습을 속이고 감춘다. 그런 관계 사이에서 ‘친밀성’은 무엇인가. 스스로가 이끌리는 곳으로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닌, ‘계획’되고 ‘구속’되는 것이 아닐까. ‘예의바른’ 친구들과만 지내는 것이 과연 ‘친밀성’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친밀성’으로 구성된 집단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지 않는 폐쇄적인 집단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또 폭로를 낳고, 폭로를 두려워하며 서로가 서로를 단속할 것이다. 저자는 이 상황을 이루는 ‘곁’을 악몽에 비유했다. 이런 ‘곁’은 ‘곁’이 아니다. 서로가 단속하고, 단속당하며 말걸지 않는 ‘곁’은 벗어나고 싶고 깨어나고 싶은 악몽이였을 것이다.나도 종종 악몽을 꾸곤 한다.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 등골이 오싹한 기분은 상상만 해도 께름칙하다. 그런데 웃긴 것은, 악몽을 꾸었을 때 단순히 그 날의 컨디션이 안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란 점이다. 악몽은 가려진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기도 한다. 가령 예를 들면, 소중한 사람이 죽는 꿈을 꾸었을 때 그 사람 생각이 사무쳐서 전화를 건다거나, 내가 죽는 꿈을 꾸었을 때 괜스레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해지는 것들 말이다. 저자가 악몽이라고 표현한 것이 후자에 집중했기를 바라고 싶다. 악몽으로서 놓친 것들을 다시 살피게 되고,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되새기기를 바랐음을 기대하고 싶다. 우리는 단속하기 전에 ‘말’해야 하고, 악몽처럼 공포로 둘러싸는 것이 아닌 진짜 ‘곁’을 이루어야 된다고.폐쇄되고 잘못된 ‘곁’도 문제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곁’ 또한 문제일 것이다.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룬다. 악몽같은 곁은 ‘단속’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면 쓸모없는 곁은 ‘말’에 관해 집중하고 있다.자신의 진정성을 방해하는 세계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와의 불화가 언어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세계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혹은 상대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된다.‘곁’은 듣는 자리에 가깝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말’은 곧 ‘질문’과도 뜻이 이어지는데, 질문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만든다. ‘왜’라고 질문 하는 것,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질문하지 못하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가 그 예시다. 정해진 질문과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질문하지 못하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질문하지 못하며 말하는 것은 또한 소통의 부재를 나타낸다.묻고, 물어가며 나누는 것이 아닌 뱉고 하소연하는 것이 소통으로 해석된다. ‘곁’은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말’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쓸모없는 ‘곁’은 ‘말이 되지 못한 말’을 그대로 ‘말이 되지 못하게’ 남길 뿐이다. 질문도 없고, 소통도 없는 사회는 몽상 단어 그 자체의 뜻마냥, 사회를 헛된 생각으로 남긴다.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팔고 있는 게 물건이 아니었더라구요. 제가 팔고 있던건 사람이었어요, 언니. 그런데도 저는 끝까지 그 일이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 애썼어요. 하부 판매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모든 판매원들에게 득이 되는 일. 그러니까 나 역시 그 순환에 기여하고 그 구조를 받쳐주면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돌아갈 몫이 커진다고 착각했던 거죠. 그리고 제가 그렇게 단순한 논리에 매료된 건,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있는 사람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기 떄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내가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거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요.김애란의 「서른」은 사회의 이런 모습을 절실히 보여준다. 왜라고 묻지 못하고,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못하며, 소통하지 못함으로써 “나만 아니면 된다”에 익숙해져버린 주인공을 보며 쓸모없는 ‘곁’이 무엇인지 다시금 느끼게 된다. 주인공이 ‘왜’라고 묻는 것에,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한 것에 응답해줄 곁이 없었다. ‘말이 되지 못한 말’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주인공은 처참히 망가진다. 여기서 망가진 주인공이 말한 ‘모두에게’ 좋은 일은 무엇인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이미 개개인에게 만연해있다면, 그것이 정말 모두에게 ‘좋은’ 일인지도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개인이 모여 모두를 이룬다면 그것이 진짜 모두가 될 수 없음을, 잘못된 사회를 만들고 있음은 우리는 알게 된다.저자는 악몽으로 인한 고통을, 그릇되고 헛된 사회를 대면과 경청이란 단어로 마무리하고있다. ‘질문’을 통해서 그릇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성장하기 위해선 낯설고 모르는 타자와의 대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대면하는 것 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음을 ‘우정’을 통해 말한다.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이 ‘우정’은 자칫 잘못하면 연민으로 헷갈리기도 한다. 이건 나와 그 사람이 같은 상황이 아니기때문에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해석된다.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생각과 틀이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승리는 저자가 말하는 ‘우정’으로써의 대면과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