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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쁜 여자 전성시대 2장 요약발제 및 소결
    나쁜여자 전성시대 2장대분수령, 운동권과 페미니즘의 분열68년 당시 급진여성들은 독자적 여성조직구성에는 동의했지만, 분리의 성격과 목표를 두고는 의견이 갈렸음. 남성을 모임에서 배제하는 것이 옳은가? 오직 여성주의만 다뤄야하나? 전쟁, 인종주의 반대 투쟁에도 전념해야하나? 여성 내의 차이는 어떻게 고려해야하나? 누가 조직대상인가? 무엇이 적인가? 본서 2장에서는 67-69년 사이 여성해방운동의 발전과정, 운동초기의 운동권-페미니스트 간 분열을 연구함.발제에 앞서 본서에서 운동권/좌파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둘 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용되는 의미를 지칭하지 않음을 지적해 둠. 여기서 지칭하는 운동권 내지 좌파는 68년 당시 미국 주류 운동세력이었던 블랙파워, 노동조합, 평화운동 세력을 의미함. 페미니스트는 여성의제에 집중했던 세력으로 이해해야함. 이때, 둘 다 사회변화를 바라는 진보적 세력이지만,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냐, 주요하거나, 부차적인 의제가 존재하냐를 두고 갈등이 있었음을 이해해야함.다만, 두 세력이 배타적인 집단인 것은 아니었음. 좌파 활동가이면서 페미니스트인 사람도 있었고, 페미니즘 운동에 주로 적을 두면서도, 좌파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도 분명 있었음. 이들을 굳이 구분하는 것은, 초기에 여성의제를 어떤 위상으로 둘 것인가를 두고 갈등했다는 점, 좌파 활동가가 자동적으로 페미니즘적 윤리를 갖추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인간적 갈등도 존재했다는 점, 이후 소위 운동권과 페미니스트는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점에서 비롯함. (갈라서는 과정에 대해서는 3장을 참조.)운동권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체제에서 유래한다고 보았고, 여성해방그룹도 ‘운동’ 일반에 계속 연결되고 헌신해야한다고 주장함. 여성해방을 ‘좌파의 중요한 한 부문’으로 생각함. 여성해방운동은 좌파와 연결된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지만, 동시에 운동권에 지배되었음. 쉽게 말해 다른 여자들보다 좌파남자거물들로 구성된 청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였음.운동권의 반대세력인 ‘페미니스트’들은론 때로는 좌파에 실망한 페미니스트들이 좌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음. 이상의 정치적 견해차는 상대적인 것이었음.‘조 프리드먼은 운동권이 지배하는 시카고의 웨스트사이드 그룹에서는 자기가 굉장한 페미니스트라고 느끼지만, 뉴욕급진여성에 속한 페미니스트들을 마주친 때는 스스로 대단한 운동권이 된 듯 했다.’■ 자넷 랭킨 여단의 시위자넷 랭킨 여단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여성 단체들이 모인 연합체. 미국여성을 결집해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라는 청원을 제출하려고 함. 급진 페미니스트들에게 이 시위는 무의미한 것, 온순하고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여김. 자넷 랭킨 여단이 여성다움을 평화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 이런 비판은 다음 문장으로 요약됨. ‘그 사람들은 부인과, 어머니, 애도하는 사람이다.’이 시위는 더 젊고 전투적인 많은 여성들에게 실패작이었지만 이틀에 걸쳐 만나서면서 급진 여성들을 위한 강령과 조직을 발전시킨 30~50세의 여성들에게는 실패작이 아니었음. 워싱턴여성들은 이 만남들을 계기로 모임을 시작함.그러나 이때부터도 소위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과 ‘운동권’ 여성들은 충돌하기 시작함. 파이어스톤, 세라차일드 등은 여성에게 중요한 문제를 중심으로 여성을 조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웹은 급진 여성들을 ‘기업권력, 군사주의, 빈곤, 베트남, 68선거’ 등을 통해 조직하고자 했다.■ 초기의 이론 만들기1968년 발표된 글을 보면 두 진영 간 그리고 진영 내 차이가 드러남. 몇 가지 글을 살펴보겠음. 프리먼- 여성은 자기이해를 중심으로 전체 ‘운동’안에서 조직되어야한다.- 여성해방을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혼동하지 않기를 바람. 여성해방은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뜻하지 않음.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 평등이란 무의미. 여성억압은 운동내의 개인적 해방에 국한되지 않음.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회문제. (이후 ‘여성해방’이라는 단어와 그 사용은 페미니즘 세력 및 여타 운동단체들과 중대한 논쟁거리가 됨.)- (운동권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의 체제에 맞선 싸움을 인을 폭로·종식해야함.- 여성억압이 체제만의 잘못은 아니며, 여성이 부차적인 존재고, 여성의 삶은 남성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고에 뿌리를 두었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고 주장. (여성억압의 심리적 차원 강조)- 는 운동권의 분석에 대한 거부., 이블린 골드필드, 시카고 웨스트사이드 그룹- 를 반박.- 여성그룹들이 행동보다는 의식고양에 집중한다고 비난. 또한 독자적 여성운동이라는 관념자체가 분열적.- 오직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만 국한하는 여성운동은 급진적일 수 없다고 선언.- 독자적인 여성운동은 자유주의로 바뀔 수 있다고 염려. 여성문제가 운동 일반에 통합되기보다, 여성해방그룹 내부에 고립되는 상황을 우려함. 골드필드는 여성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전체 ‘운동’안에서도 제기해야한다고 주장함.- 그러나 골드필드의 주장은 남성이 변화할 책임이 있다기보다, 여성이 남성의 변화를 도와야한다고 암시하는 듯 읽히기도 함./존스, 브라운- 운동권의 ‘차별 철폐 모델’에 맞선 ‘급진적’ 대안을 제시. 운동권의 견해에 맞선 정면 공격.- 브라운은 모든 남성이 적이라고 선언. 개인적 삶에서도 남성을 배제해야한다고 주장. (여성이 좌파에서 발을 빼야한다고는 하지 않은 파이어스톤과 달리) 존스는 “여성들이 자기 자신의 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라는 압력에 저항해야한다” 고 주장함.- 레즈비어니즘 주장. (동성애를 계속 두려워하는 것은 남성질서가 우리를 뒤로 끌어당겨 운동을 고의로 방해할 수 있는 최후의요소일지 모른다.)- 성차가 생물학적 사실에 뿌리를 둘 수 있다고 제기초기 여성 해방 그룹들본서에서는 뉴욕급진여성을 당시 페미니즘 운동 전반을 보여주는 케이스 사례로 판단, 상세하게 살피고 있음.① 시카고 웨스트사이드 그룹- 민권운동 참여. 신좌파, 민주사회학생연합에 강한 일체감. 새정치전국회의 실패 이후 모임.- 주요 성원: 헤더 부스, 나오미 웨이스타인, 에이미 케설먼, 수 뮤네이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조 프리먼, 프랜시스 로민스키, 이블린 골드필드, 비비언 로권적 지향을 가짐.: 개인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토론 회피. 이론을 정식화하고자 함.: 소비주의가 여성을 착취하고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방식을 폭로하는데 관심.: 시간이 흐를수록 페미니즘 색채가 짙어짐. ‘여성해방은 모든 정치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동시에 운동권의 몇몇 가정을 계속 고수함. 이를테면 여성 혁명은 ‘전체 혁명의 맥락’ 안에 계속 남아야한다는 주장 등.: 좌파 안에서 오래 활동한 덕에 유능한 조직가로 활동.② 워싱턴디시여성해방- 워싱턴 좌파 공동체에 깊숙이 관여하는 경험이 많은 급진주의자들- 주요성원: 주디스 코번, 샬럿 번치, 수 오린, 린다 카시오니, 수 스래셔, 바버라 헤이버, 마샤 캘런, 앨리스 울프슨, 하이디 스테픈스, 노마 레서 등- 지역 좌파 공동체와 잘 지냄. 운동권-페미니스트의 구분선에 따라 분열되지 않았음. 두 진영의 요소들을 통합한 분석을 내고자 노력.: 그러나 통합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자기문제를 어떻게 자본주의에 연결시킬지를 주로 보았기 때문.- 배타적인 그룹분위기. (여학생클럽)③ 뉴욕급진여성- 주요성원: 캐시 세라차일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앤 코트, 케이트 밀레트, 로민 모건, 엘런 윌리스내부쟁점 A. 운동권 vs. 페미니즘- 미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여성해방론자에 견줘, 운동과 운동진영 남성들에게 미미하게 연결. 대체로 시카고 급진 여성들과 비교해 신좌파 정통 이념에 제약을 덜 받음. 이는 역으로, 운동권/페미니즘의 분열선을 따라 쉽게 분열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음.- 주로 운동권과 페미니즘의 분열에 관한 문제를 논의.- 운동권과 페미니즘의 분열은 각 분파의 핵심 성원들이 페미니즘과 무관한 문제들에 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악화됨. 뉴욕급진여성은 주로 민권운동이나 좌파 다른 집단을 상대로 극심하게 충돌하는 전략과 전술을 추구하는 특정 좌파 정치 경향에 이끌렸음.한편 민권운동을 경험한 세라차일드나 해니시는 ‘운동’에 무관한 보통 사람들에 관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충격과 여성이 참여. 긴장이 고조됨.- 성격차이, 교조적인 방식 등도 문제였으나, 본질적인 견해차이가 그룹을 둘로 갈라놓음. 운동권은 자본주의(소비주의와 광고, 미디어)를 비난하는 반면, 여성억압에 남성을 관련짓는 논의는 회피함.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여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시도라고 보며 분노. 남성우월주의를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함.- 실제 뉴욕급진여성의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여성이 남성 우월주의, 자본주의 둘 다에 억압을 받는다고 주장했음. 이들은 본인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운동권들이 곧바로 이들을 (자본주의에 무관심한) ‘남성혐오론자’로 희화화한다고 지적.- 그러나 급진 페미들의 반박에도 결점이 있었음. 여성해방이 자동으로 남성 우월주의와 자본주의의 토대를 허문다고 주장. 페미니즘은 사회주의를 포함한다고 주장. 따라서 계급분석도 불필요하다고 주장. 이는 이후 문화 페미니스트들의 등장으로 이어짐.- 운동권들은 이전에 흑인인권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해방운동도 체제에 흡수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 뉴욕급진여성의 페미니스트들이 반좌파였는지는 쟁점적. 외부에서는 그렇게 봤지만, 좌파단위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었음. (여성은 여성으로서 억압받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방식으로 또한 억압받기 때문.) 그러나 동시에, 노동계급문제를 중심으로 조직하면, 여성이 아니라 노동자로 조직화된다고 주장하기도 함.- 뉴욕급진여성 성원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남자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이의를 제기해야한다는 쪽이었음.내부쟁점 B. ‘의식고양’- 또 다른 쟁점은 ‘의식고양’. 어떤식으로 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고, 해결하기 위해 함께 싸워야한다고 설득할까? 일단은 각자 자기가 여성으로서 어떻게 억압을 느꼈는지 설명해보는 방식으로 ‘의식을 고양’함. 그러나 몇몇 여성 해방론자들은 과연 이론을 주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해야하는지 의문을 품음. 시카고의 말린 딕슨은 좌파 이론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지성주의’라고 주장. 또한 의식고양이 행동을 배제한 체 진시됨.
    독후감/창작| 2020.07.28| 6페이지| 1,0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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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관리의 중요성 ppt /심플ppt /깔끔한 ppt
    시간관리의 중요성 ○○대학교 경제학과 학번 171234 김○○들어가며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제목을입력해주세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Index내용을 입력해주세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1. 제목을 입력해주세요내용을 입력해주세요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1. 제목을 입력해주세요QnAT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비즈니스| 2017.12.26| 6페이지| 1,500원| 조회(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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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의 진경산수화 ppt 평가A+최고예요
    정선의 진경산수화 미술학과 17123456 김 @@정선 , 독서여가도 ( 讀書餘暇圖 ) , 『 경교명승첩 ( 京郊名勝帖 )』 중 , 1740-1741 년경 , 비단에 채색 , 24.1×16.9cm, 간송미술관 소장 .출생과 초년 시절 1676 년 ( 숙종 2) 출생 - 3 대 째 벼슬을 하지 못함 = 가세가 기울어 있는 상태 1689 년 14 세 부친 타계 1689 년 기사환국으로 서인 축출 18 세 전후로 하여 도화서 화원 - 김창집의 도움작가미상 , 〈 김창집초상 〉, 《 기사계첩 》, 1720 년 , 비단에 채색 , 36×52㎝, 보물 제 929 호 , 국립중앙박물관 . 지원자 : 안동 김씨 조선 후기 정치와 문화의 강한 영향력을 미침 김창흡초상화가로의 성장 1711 년 36 세 『 풍악도첩 』 - 김창흡과 함께 금강산 방문 1712 년 37 세 『 해악전신첩 』( 전하지 않음 ) - 화가로서 명성을 알리는 결정적 계기 - 김창흡 등이 제화시문 1713 년 38 세 첫 벼슬 시작 ( 김창집의 도움 ) - 이후 주로 지방의 관직들을 맡음 경상도 , 경기도 , 강원도 , 서울 지역을 유람하고 그림을 그려냄 내연산삼용추도 (1733) 금강전도 (1734) , 박연폭 (18 세기 ) 『 사군첩 (1737)』( 전하지 않음 ), 『 관동명승첩 (1738)』, 『 경교명승첩 (1741)』대가의 경지 1745 년 70 세 관직에서 물러남 1747 년 72 세 『 해악전신첩 』 1751 년 76 세 인왕제색도 1756 년 81 세 종 2 품 동지중추부사에 오름 1759 년 84 세 타계진경산수화의 배경 실경산수화 전통의 계승 - 고려 이녕 예성강도 , 천수사남문도 - 조선 초 강희안 박연폭포 , 조속 금강전도 남종화풍의 수용 절파의 쇠퇴 , 명말 동기창의 ‘ 남북종화론 ’ 과 문인화풍 유행 민족적 자주성에 대한 강조 - 명청교체기 / 조선중화주의 여행 붐실경산수화 전통의 계승 한시각 , 칠보산전도 , 『 북관수창록 』, 17 세기 , 비단에 채색 , 30×44㎝, 국립중앙박물관정선의 진경산수화의 특징 기행사경도 - 관념 산수화로부터의 탈피 - 직접 전국의 명승지를 여행 / 사실적 전달 화면의 재구성 화풍과 기법 - 풍부한 먹과 힘찬 필세 - 화강암이 많은 한국자연의 특색을 살리기 위함 - T 자형 소나무 - 미법산수화풍 - 피마준법단별령망금강산 , 『 풍악도첩 』,1711 단발령망금강산 , 『 해악전신첩 』, 1747해산정 , 『 풍악도첩 』,1711 해산정 , 『 관동명승첩 』,1738정선 , 내연산삼용추도 , 조선 18 세기 전반 , 종이에 수묵 , 134.7 x 56.2cm, 리움 미술관 소장정선 , 박연폭 , 18 세기 , 종이에 수묵 , 52×119.1㎝, 개인소장작품 감상작품 감상 정선 , 금강전도 , 조선 1734 년 , 종이에 수묵담채 , 130.7×94.1㎝,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국보 제 217 호작품 감상 정선 , 인왕제색도 , 1751 년 , 종이에 수묵 , 79.2x138.2cm, 리움 소장 , 국보 제 216 호결론 진경산수화는 한국적 자연미에 대한 탐구 !QnA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예체능| 2017.12.22| 21페이지| 1,500원| 조회(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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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시미술 레포트: 서양 회화에 나타난 자연주의와 원시주의의 경향에 관한 비교
    서양 회화에 나타난 한 자연주의와 원시주의의 경향에 관한 비교- 19세기부터 20세기 초 풍경화를 중심으로 -들어가며우리는 현대문명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개인주의의 팽창에 따른 인간소외, 전통의 부재로부터 비롯된 가치관의 혼란, 벌어져가는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환경오염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점점 인류는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손에 닿지 않음은 긍정적인 의미로 치환되었다. 즉, 문명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자연을 동경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연으로의 회귀와 원시적인 생명감의 추구는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의지였다.자연주의는 자연으로의 동화를 꾀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소박한 소망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었다. 미술에서의 자연주의 양식은 합리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을 띠며, 자연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 한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반면, 원시주의는 재현을 위해 기교에 얽매였던 이전에 비해 창작성이 자유분방하게 표출되어 근원적 생명력을 지향하고 있다. 아직 문명이 닿지 않는 자연의 자유분방함과 솔직함을 활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표현한다.이처럼 산업화, 기계화, 획일화로 메말라가던 현대 사회의 자연과 인간 정신의 조화가 필요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동경하는 자연주의와 보다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추구하는 원시주의가 ‘인간성 회복의 모색’이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에 풍경화라는 형태로 드러났다.풍경화의 시작 - 자연주의풍경화는 역사 이래로 좀처럼 그 자체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7~18세기에 걸쳐서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변화해갔지만 여전히 자연의 풍경 그 자체가 주제가 되지는 못했다. 상징주의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신념과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아래에서 상류층의 기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을 기반으로 한 자연주의적인 철학이 확산되면서 풍경화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자연주의는 자연 대상을에 대한 반발로 생겨났다. 기존의 화가들은 예술작품에 반영된 자연 대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는데 이는 양식화된 것으로 사실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예술작품 자체가 아름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영국 자연주의19세기 영국에서 자연주의가 싹을 틔웠다. 영국의 풍경화가들은 자연의 대기와 빛을 주된 소재로 야외 사생 위주로 표현하였다. 정확한 자연의 관찰을 통해 밝고 경쾌한 색채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선구적인 풍경화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와 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친다.존 컨스터블그림 1 솔즈베리의 풍경, 18세기 말그림 2 건초마차, 1821그림 3 맬번 홀, 1821실제 야외의 빛을 색으로 표현하여, 사실적인 소재를 다루었다.윌리엄 터너그림 4 멀리 만이 보이는 강가 풍경, 19세기 경 풍경화의 급진적인 전환점의 시작으로 대기 효과와 자연의 경이를 회화적으로 탐구하였으며, 비와 증기를 표현한 것이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늘, 구름, 안개 등의 순간적인 일면을 사생하였으며, 컨스터블과는 다르게 명확한 형태 보다 분위기를 강조하였다.그림 5 베네치아의 카날 그란데, 1835그림 6 비, 증기,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1844프랑스 자연주의 - 바르비종파19세기 중엽 파리 근교의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화가들이 이 마을에 하나 둘 모여들어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바르비종파의 시작이다. 혁명 등으로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낀 화가들은 퐁텐블로 숲 속에 자리 잡은 아주 조용한 마을인 바르비종을 사랑하게 되었다.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바르비종의 자연에 마음을 빼앗긴 화가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집단을 이루었다. 이들의 그림은 너무나 소박하고 조용하였기에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주류였던 아카데미적인 이상적 풍경화와는 달리 농민 생활이나 풍경화를 꾸미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자연관을 거부하였으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넘어가 1874년 경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태양광선과 날씨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친근한 풍경을 포착하였다.그림 10 모르트퐁텐의 추억, 19세기경,그림 11 마을 입구, 부아장리유 옆의 보배 근교, 19세기경테오도르 루소그림 12 오솔길, 1855년 경,서정적인 분위기의 자연과 풍경화를 제작하였다.그림 13 봄, 19세기경그림 14 바르비종의 풍경, 1850년 경자연주의적 풍경화의 발전과 원시주의적 풍경화의 시작자연주의적인 풍경화는 점차 다른 양상을 갖게 된다. 사실적으로 자연 풍경을 묘사하려던 경향은 사진기술에 의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화가들은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역동성과 생명력으로서 원시주의적인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인상주의1863년에는 오랫동안 화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던 ‘살롱’의 심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반발이 거셌다. 이 불만을 잠재우고자 낙선한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낙선전람회’를 열었고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이다. 인상주의에서는 자연주의적 회화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전의 자연주의적인 풍경화 방식 즉,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격언은 인상주의에 의해 다르게 생각되었다. 인상파는 눈에 보이는 방식 그 자체에 주목하였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되 정확한 묘사보다 그때그때마다 바뀌는 ‘순간적인 인상’을 그려내려고 노력하였다.인상주의의 태도는 이전 자연주의보다 훨씬 더 자연주의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객관적, 과학적 정신에 의해 눈에 비치는 형태를 기록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17세기부터 진행되어온 자연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철학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상주의자들은 대부분 경험론자들로서 경험 이외의 어떤 선험적인 원리나 본질을 부정하였고, 오직 경험에 의해서 설명하였으며 그렇기에 현세와 찰나를 중시한 것이다.그러나 인상주의에는 완전한 주관으로 이행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인상주의에 의하면 대상의 ‘지각’은 빛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순간의 인상이기에 개인마다 다르다. 그 지각을 작품 제작의 기반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빛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짧은 터치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원근법, 구도, 채색, 드로잉을 무시하고, 대상의 윤곽선이 대기에 용해되어 각각의 대상이 구별되기보다 빛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 묘사하였다. 그는 풍경을 통해 즉각적인 인상의 효과를 주려 했다.그림 15 건초더미, 옅은 안개속의 태양, 1891그림 16 건초더미, 지베르니의 여름 끝자락, 1891그림 17 인상 : 해돋이, 1872그림 18 수련, 1904알프레드 시슬레그림 19 루브시엔의 거리, 1878 인상파 중에서도 특출나게 순수한 풍경화가이다. 그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근교의 풍경을 대상으로 하여 물과 숲의 반짝임을 묘사한 많은 수작을 남겼다.그림 20 마를리 항의 센 강, 1875그림 21 루앙 강변의 집들, 1889신인상주의인상주의의 경험적인 사실주의에서 출발한 즉흥적인 색채 사용의 회화 기법에 반발하여 생겨났다.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고전주의의 엄숙한 질서에 빛과 색채의 형태인 인상주의를 접목하였다. 인상주의의 색채 이론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여 하였으며 동시에 고전주의적인 정신, 즉 자연주의적인 정신의 부활을 꿈꾸었다. 다시 말해 인상주의의 주관성을 객관적인 형태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조르주 쇠라색을 섞지 않고 좀 더 선명한 색을 얻기 위해 그림에 과학 이론을 적용하여 분할묘법을 사용하였다. 원색을 팔레트 위에서 섞어 원하는 색을 내는 기존의 방식에 따르지 않고 각각의 물감이 섞이지 않도록 캔버스에 점을 찍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볼 때 각각의 점이 아니라 팔레트 위에서 자연스럽게 섞인 색처럼 보인다. 이것은 눈의 착시 현상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쇠라의 그림은 유화라기보다 모자이크에 가깝다하여 점묘주의라고 불렸다.그림 22 빌 다브레, 하얀 집들, 1882년 경그림 23 그라캉의 저녁 풍경, 1885그림 24 그랑트 자트 섬의 센 강, 봄, 1888폴 시냐크과학적 점묘주의에서 나중에그림 27 초록색 돛, 베니스, 1904후기인상주의20세기 이후 인상주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인상주의에 회의를 느낀 화가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후기 인상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지나친 빛에 대한 집착과 신인상파의 지나친 과학성에 반발하여 생겨났다. 물론, 후기 인상주의자들 역시 인상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인상파의 화풍에 자신의 개성과 내면 표현을 강조하였다. 부연하자면, 경험적인 인상주의가 무시한 사물의 본질에 대해 근원적인 관심을 보인 것이 후기 인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폴 세잔세잔은 인상파의 화풍에서 공간 표현의 애매함과 대상의 형태 외곽선의 불안전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에 거쳐 물체의 실재감과 공간 구성을 추구한다. 대상의 실체를 기본적인 형태들로 집약하여 파악하였으며 형태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질감과 선원근법의 규칙은 무시되었고 대상은 기하학적인 입체로 묘사되었다. 그의 다시점적이며 분석적이고 구축적인 표현은 입체주의에 영향을 미친다.그림 28 생트 빅투아르 산 기슭으로 난 실, 1898 ~ 1902,그림 29 에스타크 ? 마르세유의 골프 만, 1878그림 30 가르단 근교, 1886 ~ 1890반 고흐고흐는 강렬한 색과 붓터치로 내적 생명력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상주의의 밝은 그림과 우키요에 판화를 접함으로써 밝음 색과 풍경을 소재로 자신의 불안과 고뇌를 표현하였다. 강렬한 색채와 꿈틀거리는 터치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것은 나중에 표현주의로 이어진다.그림 31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19세기 경그림 32 삼나무가 있는 밀밭, 1889그림 33 별이 빛나는 밤, 1889그림 34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 1890그림 35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20세기 풍경화 속의 원시주의표현주의20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으로 미술에서 자연의 재현은 부차적이며, 주관의 표현이야말로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선에 의한 형태를 강조하고 색채는 단순.
    예체능| 2017.12.22| 9페이지| 1,500원| 조회(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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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학레포트 관료의 (무)책임성에 대한 재해석
    관료의 (무)책임성에 대한 재해석1. 들어가며2014년 4월 16일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라는 전국민적인 트라우마를 겪었다. 당시 정부의 대처는 무능함 그 자체였다. 신속하고 정확한 현장파악과 지시가 핵심인 구조작업임에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나아가 애초에 참사가 일어나는 데에 관료들의 부패가 있었다는 점은 국민들을 더욱 분노와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국가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서 2015년에는 중동호흡기질환인 메르스가 확산되면서 다시 한 번 국가에 대한 전국민적인 불신을 가중시켰다.그리고 16년 늦가을부터 17년 초봄까지 사람들은 그 분노를 참다못해 촛불집회에 나섰다. 국가권력의 정당성으로서의 선거를 거치지지도 않은 채 비선실세들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사유화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도층의 권력의 사유화는 박근혜 정부에서는 유독 관료들의 무책임성과 무능이 강하게 두드러졌는지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은 정부에게 기대되는 책임들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질문처럼 많은 국민들은 관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부패하고 무능하며 무책임하다는 관료제의 병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때문이다. 하지만 관료제 그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여전히 관료제가 가진 안정성과 합리성은 현대의 복잡한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권력공백기에도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들은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이는 관료제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꿔서 ‘해경 해체’와 같은 관료제에 대한 터무니없는 공격이 아니라 관료제의 혁신 방향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왜 관료들은 어떤 일에는 책임을 다하고 탁월하지만 어떤 일에는 무책임하고 무능한가?’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 본 글에서는 세월호 사고를 중심으로 한국 관료의 책임성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 책임성 검토를 위해 Romzek & Dubnik(1987)의 책임성 유형을 이론적 틀로 제이므로 통제수준이 강하다. 법적 책임성은 법률적 제제 및 공식적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외부 통제 기관(의회와 사법부 등)과 관료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통제의 원천이 외부기관에게 있고 공식성으로부터 비롯한 통제의 수준이 강하다.그리고 통제 정도가 낮은 책임성이다, 전문가적 책임성은 관료들의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문제해결의 중요한 요인이기에 전문성이 중요한 통제수단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행정부의 역할이 강조됨에 따라 전문성은 관료 책임성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왔다. 통제의 원천이 내부에 있고 통제의 정도가 낮다. 정치적 책임성은 관료들이 대의정부를 근간으로 해야 함을 말한다. 이 때 대의의 대상은 매우 다양한 집단들(여론, 선출직 공무원, 기관장, 이익집단 등)일 수 있다. 바로 이들의 정책적 우선순위와 요구에 정보공개를 통해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Romzek & Dubnik 1987) 통제의 원천이 외부에 있고 그 정도가 낮다.3. 한국 관료의 책임성 분석: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확산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발생한 메르스 확산은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는 단단히 한몫을 했다. 둘 모두에 있어서 관료들은 제대로 된 대응들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구체적인 현상들을 통해 현재 한국 관료의 책임성 경향을 도출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Romzek & Dubnik의 책임성 유형은 챌린저호 폭발이라는 ‘대형사고’에서의 관료의 책임성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대형재난’인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확산을 분석하는 데에도 유용한 틀이라고 본다.1) 사례분석 : 세월호 참사를 중심으로(1) 계층제적 책임성계층제적 책임성은 고위직에 보다 많은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하위 관료들은 상관의 지시나 명령에 순응하도록 하여 책임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국가공무원법 제 57조가 계층제적 책임에 들어갔다. 선박안전의 감독의 의무가 있는 정부가 감독대상인 해운사들과 유착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위 해피아라고 불리는 정경유착이다. 이처럼 세월호의 출항 전 관료들은 법적인 책임성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② 사고발생 이후의 책임해경에서 수난구호법을 관할하고 있기에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를 못한 해경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조직법은 제 43조 ②항에서 “해양에서의 경찰 및 오염방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해양수산부장관 소속으로 해양경찰청을 둔다.”고 하여 경비와 오염방제가 주된 기능임을 시사하고 있다. 나아가 ‘해양경찰청과 그 소속기관의 직제’에 관한 대통령령 제25244호에서는 안전은 국 단위 업무가 아니라 경비안전국에서 관할하여 경비안전국의 핵심업무는 경비다. 즉, 해경이 법적 책임성을 망각하고 있다고 막무가내로 비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책임성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적, 법적 차원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3) 정치적 책임성정치적 책임성은 국민이나 언론, 정치권의 요구에 관료들이 정보공개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 관료들은 정치적 책임성을 제대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성과와 실적이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책임을 회피하기 급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은 구조성과가 명확히 드러날 때에는 언론보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알렸다. 실제 동원되고 있는 구조인원과 장비를 부풀려 알렸으며, 구조된 인원만을 강조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리려고 했다. 반대로 해경은 민간구조인력에 대해 구조에 대한 책임을 일부 떠넘기려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4) 전문가적 책임성공무원이 법을 위반하지 않고 상관의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하였을 경우, 집행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책임을 묻기 어렵다. 그렇기에 대형사고 발생 시 현장 집행공무원을 제외하고 처벌을 하기 어렵다. 실제로 세월호 사고와 관련하여 현재까지 공무원 중에서는 현장에 있던 해경 1) 사례분석 : 메르스 사태를 중심으로마찬가지로 Romzek & Dubnik의 책임성 유형의 틀을 이용해서 메르스 사태를 분석하면, 한국 관료의 책임성이 잘 드러난다. 재난이라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전문가적 책임성이 부족했음이 잘 드러났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보다 메르스 사태는 정치적 책임성과 관련하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 정치적 책임성메르스 사태의 경우, 세월호 참사의 경우보다 위험 대상 집단의 범위가 불특정하고 위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으며 위험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병섭, 김정인, 2014) 이처럼 위험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데도 위험을 단순히 관료들은 스스로 내부적으로 통제했다. 일반국민과 관료 사이에 정보비대칭성이 생기면서 정치적 책임성은 달성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감염자 경로, 병원공개와 같은 투명한 정보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메르스와 관련한 유언비어 유포자를 엄정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질병관리본부 트위터 운영자는 계정을 폐쇄하였다.그런데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은 위험적용 대상 집단의 범위가 불특정하기 때문에 일반대중의 위험인식은 높았다. 일반대중의 위험인식이 높아져있는 상태에서 정보공개를 막은 것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자초했고 이는 바로 국민적 패닉 상태로 이어졌다. 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은 한국 정부가 정보 공개를 늦춘 탓에 초기 메르스 방역 정책의 실패를 불러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병섭, 김정인, 2014)(2) 전문가적 책임성전문가적 책임성도 마찬가지로 부족했는데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최초감염자에 대한 검사 요구를 두 차례 거부했다. 최초감염자가 방문한 국가인 바레인이 메르스 발생국이 아니라는 것이 사유였다. 그러나 이후 환자는 메르스 발생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들렀음이 확인되었다. 담당 의사가 메르스 감염을 의심해서 검사를 요구했을 때, 법무부에 출입국 기록만 확인해봤어도 될 문제였다. 이는 질병관리본부가 마땅히 갖춰야 할 전문적 책임성을 소홀히 한 것이다인은 ‘관료에 대한 지나치게 강한 통제’이다. 먼저, 지나치게 강한 통제는 관료의 계층제적 책임성에 대한 과몰입으로 나타나고 상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관료들의 ‘의전’에 대한 집착이 발생한다. 또한, 법적인 책임성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인 관료제의 병폐인 복지부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반면, 통제의 정도가 높기에 관료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저하되어 전문적 책임성과 정치적 책임성은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현장의 관료들은 전문가로서 전문성과 윤리를 갖출 의욕과 의무가 없다. 또한, 적극적으로 국민들이나 선출직 공무원 등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무사안일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문적 책임성과 정치적 책임성은 꼭 제고되어야 한다.4. 관료의 책임성 제고의 방향성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 관료의 책임성은 현재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고 급변하는 환경과 다양한 문제해결에 적합한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관료의 자율적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적극적 책임성 확보’다.서양에서는 공무원 인사제도가 엽관제에서 실적주의제도로 변화하면서 관료의 책임성이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던 측면에서 법적 제도적 책임을 강조하는 측면으로 변화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Jackson, 2009) 한국의 관료의 책임성 역시 이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향은 ‘Friedrich-Finer debate'에서 Finer(1941)가 관료의 제도적이고 법률적인 책임에 주목하고 국회나 사법부를 통해 확보되는 관료의 제도적 책임성을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반면, Friedrich(1940,1946)은 관료의 내재적 책임성을 강조하였다. 관료는 자신의 전문지식이나 기술을 중심으로 책임 판단 기준을 삼으며, 이 과정에서는 관료의 양심과 직업윤리 등이 중요시 된다고 보았다. 또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관료의 ‘자율적 책임성’을 강조하였다. R있다.
    경영/경제| 2017.12.22| 8페이지| 3,500원| 조회(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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