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_루쉰루쉰은 필명이며 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한 그는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중국인들의 계몽을 위해 문학을 공부한다.아Q정전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고 중국근대문학의 시초이기도 하다.그의 문학은 모든 허위를 거부하고, 현실에 기초하여 그 당시 중국인들을 계몽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글속에서 저자로 나오는 이는 아Q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하는데 아Q는 어디서 기억될 인물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거니와 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글쓴이는 제목을 열전이나 자전으로 할지 아니면 별전이나 소전으로 할지 고민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적합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전이라고 명명하기로 정했으나 더욱 고민스러운 것은 이 정전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아Q라고 불리는데, 아구이인지 아쿠이인지 어느 집안 사람인지 글쓴이는 아는 바가 없고, 마을 사람들도 그가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가족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그래서 글쓴이는 그를 영국에서 유행하는 철자법에 따라 아Quie라 하고 아Q라고 생략해서 쓰기로 한다.서두에서 제목만을 가지고 이렇게 고민하는 장면이 주저리주저리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Q라는 인물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미리부터 가늠이 된다.아Q는 웨이좡이라는 시골에서 일정한 일거리 없이 다른 사람들이 집에서 품팔이를 한다. 명확한 거처도 없어서 토곡사에서 살았다.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라 그는 재산 같은 것은 고사하고 돈이 생기면 노름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데 탕진한다. 마을 안에서도 우습고 만만한 존재라 그 마을 건달들은 그를 괴롭히고 놀리는 것이 일상이다. 일을 해주고 돈을 못 받을 때도 있고 오히려 덤탱이를 쓸 때도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감이란 일손이 필요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인물이라는 것 정도다. 그가 동네건달들에게 맞고 있던, 누군가와 싸움을 벌이던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좋아할 뿐이다.이처럼 그는 이 동네에서 억울한 일도 당하면서도 적당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아주 비겁하고 비루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도 않고 분해하지도 않는다. 본인만의 “정신승리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다.건달들에게 맞은 건 “아들놈이 아비를 때리다니”하고 아들로 치부해버리면 웃음이 나면서 분이 풀리고, 욕지거리를 하고 덤비면 되레 당하는 일이 많으므로 “흘겨보기”로 방법을 바꾼다. 가해한 이들에게 물리적인 힘으로 보복을 가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스스로 보복하는 방법인데 그 모습이 가소롭기 그지없다.간혹 정신승리법이 먹히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자신보다 더 볼품없어 보이는 이를 괴롭히는 것으로 쾌감을 느낀다. 지나가는 여중을 괴롭힌다던지 품팔이를 하는 지주집의 여종을 희롱한다던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더 독한 매가 되어 돌아온다. 그는 웨이좡에서 가장 만만하고 하찮은 이이기 때문이다.그런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Q는 성안에 갔다가 혁명단의 일원이라는 이의 목이 잘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고는 웨이좡에 돌아왔을 때 마을의 지주들이 혁명의 소식에 동요하는 것을 보게 되고, 혁명당의 일원이 되면 본인이 존경받을 인물이 될 것이란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그는 공공연하게 “혁명이다!!”를 외치고 다니며 마을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하고, “혁명”을 입에 올리며 협박을 일삼기도 했다. 혁명당에 들어가기 위해 그가 마음으로만 무시해왔던 가짜양놈에게 찾아가보지만 말도 꺼내지 못하고 쫓겨난다.그날 밤 요란한 폭죽소리와 함께 웨이좡의 지주집이 혁명당에 의해 약탈당한다. 그것을 목격하게 된 아Q는 혁명당이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하지만 그에게 별 다른 방법은 없다.나흘 뒤 토곡사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아Q를 성안으로 끌고 간다.아Q에게 “혁명당이 어디로 갔느냐” 묻지만 아Q는 “혁명당이 나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며칠 뒤 그는 뚜껑 없는 수레에 양손이 뒤로 묶인 채 태워지고, 그것이 형장으로 가는 길임을 직감한다.이 소설에선 줄거리는 크게 중요치 않은 듯하다. 소설 속 줄거리보다 아둔하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기까지 하는 주인공 아Q를 주목하는 것이 올바르다.소설 속 시대적 배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 저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한계가 있지만 아큐의 모습에서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혁명이란 것이 사람들을 동요시킨다는 것 정도는 느꼈으나 시대적 흐름에 무지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무모하고 어리석었다. 과거에 있지도 않은 영광을 혼자 되뇌며 착각 속에 빠져 사는 모습이나, 억울한 일에도 억울한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답답하다. 아큐에게는 모든 일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정신승리법 따위로 혼자 통쾌해하며 넘어가는 것이 아주 쉬운 방법인 것이다.이런 모습에서 우리 현재의 모습도 비춰진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대항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그럴만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내가 앙갚음 할 방법 따위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지는 것이다.험한 일을 당하고도 당한 줄 모르고 대응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가해자에게 그 특정인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라는 인식이 박히고, 가해하고 갈취하는 일을 반복하고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가깝게는 우리 주변인들과의 관계나 회사생활을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고, 나아가서는 정치인들의 행태도 떠올릴 수 있다.아큐를 더 비루한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강한 자에게 당한 후 약한 자에게 분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는 이런 아큐의 모습을 보고 나와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정말 우리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나는 웨이좡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와 더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