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개헌사)대한민국의 헌정사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과 같은 해 9월 11일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뿌리로 하여, 1948년 7월 17일에 제헌 국회에서 제정한 제헌 헌법 이후 9차례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이다.구분대통령제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성립 배경- 몽테스키외의 3권분립론 → 미국의 독립과정에서 삼권 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식 대통령제 정부 형태 출현-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의회 정치의 기틀 마련 → 18세기에 내각이 정치적인 실권을 가지게 되면서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 성립특징-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며 행정부를 구성(국가 원수=행정부 수반)- 행정부는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짐(국민의 투표로 인해 선출되었으므로)- 엄격한 삼권분립- 의원은 행정부의 각료 겸직 불가- 대통령에게 법룰안 거부권 부여- 의회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권- 대통령 또는 군주는 형식상의 국가 원수- 의회에서 내각을 구성하고 총리가 정치적 실권 행사(국가 원수≠행정부 수반)- 내각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짐(의회로부터 구성된 것이므로)- 의회는 내각 불신임권 보유- 내각은 의회 해산권 보유- 의원은 내각의 각료 겸직 가능장점- 대통령의 임기 동안 정국안정-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으로 정책의 연속성 보장- 다수당의 횡포 견제(법률안 거부권)- 정치적 책임과 국민의 요구에 민감(임기 보장 x)- 의회와 내각의 상호 협조를 통한 능률적인 정책 수행 가능단점-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 행사에 따른 독재 정치의 가능성- 의회와 정부의 대립 시, 완만한 해결 곤란- 다수당의 횡포- 군소 정당 난립 시 정국 불안정※ 우리나라는 제2공화국 때의 의원내각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통령제.현재는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가미한 정부 형태로 운영.◎제1공화국 시기 개헌(1948. 7. 17. ~ 1954. 11. 29.)- 제헌 헌법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그 헌법의 이념과 정신을 계승하여 수립된 것이다. 1948년 5월 1상일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에 의해 의원내각제 개헌안이 제출되었으나 정부와 여당의 극렬한 반대와 백지투표 등으로 인해 부결되었다. 이어 시행된 총선거에서는 야당이 압승했으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승만 정부는 전시특별법령을 양산하며 비상계엄하의 통치를 지속해 나갔으며, 부통령 이시영은 이러한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사퇴하였다.의석의 다수를 점한 야당은 1952년 4월 17일, 123명이 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위기를 느낀 정부는 국회의원을 연행하여 의사당 내에 감금하고, 국회해산을 노린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일어나면서 국회해산을 보류한 정부는 7월 4일,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과 야당의 국무위원 불신임제를 발췌해 만든 일명 발췌개헌안을 제출하고, 경찰과 군인이 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국회의원의 기립 투표를 통해 개헌안을 가결시켰다.- 제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1954년 5월 20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하자, 정부는 9월 8일에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을 포함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11월 17일에 국회에서 열린 표결의 결과는 재적 203명,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득표수에 1표가 모자랐으므로 부의장 최순주는 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틀 뒤,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를 반올림 시에는 135명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여 부결 선포를 번복하고,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시기통치자헌법 개정내용1948. 7. 17.헌법 제정- 대통령중심제(임기 4년 1회 중임)- 대통령 국회 간선, 국회 단원제1952. 7. 7.이승만제1차 개헌(발췌개헌)- 대통령/부통령 직선제, 국회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권1954. 11. 29.이승만제2차 개헌(사사오입)-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국무총리 폐지- 국민투표제 도입, 사유·사영의 경제원칙(자유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 사헌과 총선거를 통하여 시국을 수습하기로 결의하고 5월 2일, 허정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민주당의 주도로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기초위원을 선임하고, 본격적인 개헌을 시작하였다. 국민의 자유권이 크게 강화되었고, 종래의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전환하여 대통령의 지위를 원칙적으로 의례적, 형식적 지위에 한정하였다. 또한 위헌입법의 심사와 기타 헌법사항을 관할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헌법체제는 1961년 5·16의 군사 정변으로 인해 불과 10여 개월의 짧은 시간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4차 개헌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4·19 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는 점점 강해졌고, 1960년 10월 11일에는 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였다. 이에 10월 17일, 민의원에는 헌법 부칙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 반민주 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주요 내용으로는 1960년 4월26일 이전에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으며,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에 대한 민·형사상의 처리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였다. 그고 이를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시기통치자헌법 개정내용1960. 6. 15.장면제3차 개헌- 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 헌법재판소 설치, 대통령 국회 선출1960. 11. 29.장면제4차 개헌- 부정 선거 관련자, 민주 반역자 처벌 특별재판부, 검찰부 설치◎제3공화국 시기 개헌(1962. 12. 26. ~ 1969. 10. 21.)- 제5차 개헌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군사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민의원, 지방의재건최고회의는 국민투표를 12월 17일에 실시했다. 이 당시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투표에서 확정된 헌법으로, 12월 26일 공포되어 1963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되었다.제5차 개헌은 이전의 헌법보다 대통령의 지위가 강화된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내용에 따르면,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원수이며(제63조)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선출한다(제64조).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1차에 한하여 중임이 가능하며(제69조) 국무총리 임명 시,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제84조).국회의원은 반드시 정당의 소속이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제 36조 3항), 임기 중에 당적을 이탈, 변경하거나 소속 정당이 해산된 경우에는 그 자격을 상실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제38조). 이는 정당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권자의 안정적인 집권과 소속 의원에 대한 단속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헌법재판소는 폐지하고 위헌법률심사권과 위헌정당해산권은 법원에 부여하기로 하였다. 제8조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모든 국민이 갖는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보다 명확히 규정하였다.제5차 개헌으로 마련된 헌법안은 미국식 대통령제에 가까운 제도를 취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운영실제에 있어서는 공작정치, 선거부정, 국론분열 등 전형적인 후진국정치의 모습을 띠면서 3선 개헌과 함께 박정희 장기집권의 노골적 독재정치로 나아가게 되었다.- 제6차 개헌(3선 개헌)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박정희는 거의 1인 독재를 운영하며, 국가안보라는 이름 아래 언제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였다. 1968년, 민주공화당의 윤치영 의원이 개헌논의를 공식화시키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개헌에 대해 언급했고, 이에 민주공화당 내 개정을 추진하는 간부들은 여론만 성숙되면 개헌안을 빨리 처리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야당인 신민당의 유진오 총재결에 들어갔다. 122명 전원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고, 개헌안은 10월 17일에 국민투표에 부쳐져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다. 이 개헌으로 박정희는 3선의 기회를 얻었고,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시기통치자헌법 개정내용1962. 12. 26.박정희제5차 개헌- 대통령중심제, 국회 단원제 환원- 헌법재판소 폐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1969. 10. 21.박정희제6차 개헌- 대통령 3선 허용, 국회의원 각료 겸임 허용- 대통령 탄핵소추의 발의와 의결 요건 강화◎제4공화국 시기 개헌(1972. 12. 17.)- 제7차 개헌(유신헌법)제6차 개헌 이후에는 이전과는 달리 여당과 야당의 차가 적어져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균형을 이룬 여야의 대립이 심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의 긴장 완화에 지장이 있다는 명분하에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이어 12월 27일에는 야당의 반대 속에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그 내용은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경제 규제나 국가 동원령, 옥외집회 및 시위의 규제, 언론·출판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특정한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의 제한이나 군사상의 목적을 위한 세출 예산의 조정 등’을 규정하고 있다.이어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남북 간의 긴장 완화가 이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10·17 비상조치를 선언하였다. 이는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단시키며,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킬 뿐만 아니라, 국회의 권한은 비상국무회의가 대행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곧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며, 대학의 휴교 조치나 언론의 검열 등이 시작되었다.이어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6일 헌법개정안을 의결하고 공고했다. 11월 21일에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확.
한국 근현대사 탐구 study-경제사-?이승만 정권(6.25 전쟁 전)?- 잇단 경제정책의 실패로 극심한 경제적 불안에 직면 ? 특히 토지개혁을 합리적으로 추진하지 못하여 농민들의 불만 고조- 토지개혁의 문제는 미군정 시기에 몇차례 시도하였으나 지주층을 대변한 정치세력의 반대로 지연되던 중 1948년 3월에 입법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한공사(미군정이 동양척식회사를 개편한 회사)가 관리하던 옛 일본인 소유지를 유상으로 경작농민에게 분배하는 작업을 단행- 이승만 정권은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으나 이 개혁은 삼림·임야 등 비경지가 제외된 가운데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농지개혁에 그쳤으며 개혁 자체가 농민이 배제된 채 지주층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므로 목적 달성에 실패?6.25전쟁 후?-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이 1951년부터 한국의 재건과 구호사업에 착수 ?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출자한 자금으로 각종 시설을 복구하고 산업을 부흥시키는데 큰 역할- 외국 원조 외에 한국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전재복구사업을 추진? 정부는 산업복구국채 등을 발행하여 내자를 마련하고 산업부흥에 힘써 복구사업이 급속히 진행되고 생산활동도 재개? 소비재의 생산과 재건사업에 필요한 기간산업도 갖추어 지면서 섬유공업, 제분·제당업은 국내수요를 초과하고 시멘트·비료·판유리의 생산도 증가- 그러나 많은 문제점 내포?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건설에 치중하여 생산재부문의 공업건설이 늦어짐? 공업생산의 원료 90% 이상이 해외에서 도입되면서 국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원자재의 개발이 상대적을 늦어짐. 이는 한국의 경제를 외국에 의존하는 허약한 체질로 만들어간 원인 되기도 함.- 산업시설이 개선되고 경제개발도 이루어 졌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재와 일부 재벌과의 결탁으로 인해 신흥재벌을 탄생시킨 반면에 국민경제를 불안하게 함.? 정권과 결탁한 특정 재벌들은 정부로부터 융자를 받고 외국의 원조에 의하여 도입된 외자를 특별 불하 받는 등 각종 특혜를 받으며 국민경제를 독점? 중소기업들은 성장이 저지되었고, 국민생활의 어려움은 더해짐-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의 상승이 발생 ? 1953년 화폐개혁 실시? 화폐개혁으로 한국은행권 발행고를 상당히 수축시켰으나 물가상승 억제는 실패?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정책?- 1962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 1차 : 1962~19662차 : 1967~19713차 : 1972~19764차 : 1977~1981- 이전의 경제재건이 수입대체산업에 치중하였던 것에 비해 수출주도형의 산업건설을 택함.- 농업과 공업간의 균형을 이루기 보다는 공업건설을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공업의 발전이 농업부문에까지 파급되도록 하는 불균등 성장전략을 추진? 공업부문 가운데에서도 전략산업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 1.2차 경제개발에서는 주로 경공업부문, 3·4차 경제개발에서는 중화학공업부문이 해당- 종래의 민간주도형에서 벗어나 정부가 적극 관여하는 정부주도형으로 추진? 정부가 금융·세제·외환 등 모든 국민경제 내부에 깊이 관여하여 시장경제의 가격이나 경제정책을 주도해 나감- 50년대에는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하였으나 60년대 이후에는 외자도입을 적극화하여 경제계발의 주된 재원으로 삼고 외자의 적극적인 도입을 추진- 경제계발 5개년계획결과 한국경제는 성장을 이루어냄? 수출은 3,380만 달러에서 150억 5,550마 달러로 격중? 1인당 국민소득도 20배 이상 증가? 수출상품에 있어서도 광석류·해산물·식품류 등이 대종을 이루었던 것에서 의류·신발 등 경공업 제품이 증가하였고, 점차적으로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출이 증대- 많은 부작용도 존재? 우선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사회계층간의 갈등을 초래? 공업위주의 개발정책으로 인하여 농업부문의 침체와 농촌의 낙후를 가져왔으며 도시인구집중 현상이 나타남? 정부주도형의 성장정책이었기 때문에 민간기업들은 자주성을 거의 상실한 채 정부에 예속? 외국자본&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외채가 증가? 국제경제의 무역의존도가 높아 국제경제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야 하는 취약점 내포- 공업중심의 개발로 인해 도시·농촌간의 사회적 격차가 더해지자 1970년부터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새마을 운동 전개- 1965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들여오려는 정부의 계산과 미국의 극동전략이 일치하여 이루어짐- 월남에 군대를 파견?전두환정부의 경제정책?- 구체제의 부산물을 제거하고 정의로운 민주사회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제시하며 새시대·새사회·새역사의 창조라는 구호 아래 과감한 체제개혁을 표방- 1982년부터 새로운 경제계획실시 ? 이전 5개년계획에서 양적확대정책을 추구한 것을 반성하면서 장기적인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경제전략이 모색- 양적성장보다는 국민경제발전의 체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질서로의 전환을 통해 장기적인 발전을 한다는 의미에서 ‘경제개발’에서 ‘경제사회개발’으로 이름을 바꿈-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개서하고 국민복지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에 역점을 둠- 5차 계획은 대체적으로 성공하였다고 완수됨..(한국사통론이 그래쪙)? 연평균 7.9%의 성장률 달성? 1인당 국민총생산도 2,300달러 달성? 수출의 지속적인 신장과 수입증가율 감소로 46.2 달러 규모의 흑자가 나타남? 외채도 점차 감소? 물가의 안정과 수출초가·경상수지흑자의 성과를 이룸?노태우 정부?- 1988년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수정? 수정계획에서 경제정책의 기조를 국민복지증진고가 분배개선, 사회적 형평을 도모하는 데 역점을 두었음? 1991년 말에는 1인당 국민소득을 5,500달러로 끌어올리고 무역흑자를 냄- 제6공화국은 경제면에서 어려움 겪기도 함? 국민총생산은 해마다 증가하고 성장률도 높은 편이었으나, 수출과 수입면에서 다시 적자로 돌아감? 고임금에 따른 국제경쟁력의 하락은 수출을 감소하게 하였고, 수입자유화에 따른 무분별한 수입 증가는 수입초가를 발생시킴? 이는 노태우대통령의 무능에 따른 결과이며 그의 비자금 축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볼수 있음(한국사 통론이 그래쪙..)
문학과 영화 정리본-목차-1. 오페라의 유령2. 세 얼간이3. 양들의 침묵4. 오만과 편견5.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7. 호프만 이야기8. 피에타9. 잠수종과 나비10.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11. 희랍인(그리스인) 조르바1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3. 모터사이클 다이어리14. 리플리15.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오페라의 유령①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1919년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의 경매장이다.- 휠체어에 기대앉은 노인은 원숭이가 장식된 뮤직박스를 낙찰 받게 되고 뮤직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히상에 잠기는 순간, 다 낡아 버린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며 1870년 화려했던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웅장한 무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새로운 극단주 앙드레와 피르맹 그리고 후원자인 라울 자작은 새롭게 무대에 올릴 오페라 을 감상하던 중 갑자기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오페라의 유령이 한 짓이라고 수근대고 화가 난 프리마 돈나 카를로타는 무대를 떠나 버린다.- 하지만 발레 단장인 마담 지리의 추천으로 크리스틴이 새로운 여주인공을 맡게 되고 공연은 대성공을 거둔다.- 축하객을 뒤고 하고 대기실에 홀로 남은 크리스틴은 거울 뒤 반쪽 얼굴을 가린 채 나타난 팬텀을 따라 마치 마법에 홀린 듯 미로같이 얽힌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세계로 사라지게 된다.- 크리스틴의 실종으로 일대 혼란에 빠진 오페라 하우스에 팬텀의 경고장이 도착하고,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크리스틴도 돌려보내지 않고 큰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한다.- 하지만 기회를 주겠다며 크리스틴을 돌려보낸 팬텀과는 달리 극단 측은 그의 협상을 무시한다.- 결국 오페라 하우스는 원인 불명의 괴 사건에 휘말리며 문을 닫기에 이른다.- 한편 지하세계에 끌려갔다 온 후 크리스틴은 날마다 팬텀의 공포에 시달리고 크리스틴을 위로하던 라울은 그녀와 사랑을 맹세한다.-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팬텀은 사랑과 질투에 싸여 복수를 결심한다.② 간략한 정보감독조엘 우수 외국작품상과 크리틱스 초이스 신인 여우상 그리고 새턴 어워즈 최우수 신인배우상을 수상했다.④ 작가 소개-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 1868-1927) : 당대 최고의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로서 1900년대 초에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은 아마추어 탐정인 조제프 룰르타비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노란 방의 수수께끼』(1907)였다.⑤ 소설과 영화- 파리 오페라를 무대로, 천상의 목소리를 타고 났지만 사고로 흉측하게 변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괴신사가 아름답고 젊은 프리마 돈나를 짝사랑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오페레타 형식으로 각색하기에 안성맞춤인 작품이었다.- 배경과 이야기의 내용이 오페라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극과 음악을 접목시키는 일이 다른 어떤 문학작품을 각색하는 것보다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쓴 가스통 르루가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를 쓴 영국의 코난 도일이나 괴도 루팡을 탄생시킨 프랑스의 모리스 르블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추리 소설이나 공상과학소설이 문학작품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프랑스적 전통 때문인지 프랑스에서는 이 소설을 영화화 하거나 뮤지컬로 만든 경우가 없었다.- 미국에서 3회, 영국에서 2회, 이탈리아에서 1회에 걸쳐 영화화 되었고 독일과 영국에서 수차례 뮤지컬로 각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프랑스에서는 아무런 시도도 없었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시종일관 공포, 불안, 긴장감, 신비, 마법, 의문,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이자, 순수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틴을 두고 팬텀과 라울 자작이 사랑을 다투는 흥미진진한 연애소설이다.- 호기심, 긴장감, 박진감, 치밀한 구성 등 추리 소설의 진수를 보여 주는 이 작품이 지금까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그 안에 소외, 증오, 질투, 연민, 사랑, 희생, 화해 등 인생의 본질적인 주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 동굴 장면, 즉 한 여인을 두고 두 남자가 애절하고 처절하게 결투하는 대목은 눈물샘을 자극한다.- 영상 미학을 최대한 살린 흑백과 컬러의 극명한 색채의 대비 또한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2. 세 얼간이① 줄거리- 에서 주인공 아미르 칸은 성적과 취업만을 강요하는 일류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 ‘란초’역을 맡았다. 란초는 사진가의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정해준 공학도의 길을 가는 파르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족의 운명을 짊어진 라주와 가까워지면서 기존의 교육체계를 조롱하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친구의 이름으로 뭉친 ‘세 얼간이’. 삐딱한 천재들의 진정한 꿈을 찾기 위한 세상 뒤집기 한판이 시작된다.- 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주제의식을 담았을 뿐 아니라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여러 요소들을 곳곳에 담아냈다. 란초는 기상천외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밝힌다.② 간략한 정보감독라지쿠마르 히라니원작체탄 바간각색비두 비노드 쇼프라라지쿠마르 히라니애브히짓 조쉬주연아미르 칸마드하반셔먼 조쉬카리나 카푸르보만 이라니오미 베이디아장르코미디/드라마제작국가인도제작연도2009년상영시간141분등급12세 이상 관람가③ 감독 소개-라지쿠마르 히라니 : (2003), (2006), (2009)④ 작가 소개? 체탄 바간 :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 명연설자로도 활동 중인 체탄 바갓은 1974년 인도에서 태어난 델리 인도 공과대학과 아마다바드 인도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대표작으로는 『세 얼간이』(2004), 『콜 센터에서의 하룻밤』(2005), 『내 인생의 세 가지 실수』(2008), 『서로 다른 주에서 온 연인』(2009)이 있다.⑤ 배우소개- 아미르 칸 : 아미르 칸은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인도 내에서는 이미 스타 자리에 오른지 오래다. 2009년도 를 통해 국내 관객들에게도 얼굴을 알렸다.?아미르 칸은 인도 내에서 지성과 인성, 감성까지 갖춘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최근 그가 인도 내에서 진행 중인 ‘진실만이 승리한다’는 토크쇼는 12억 를 지구 밖에서 떨어진 듯한 신비로운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고, 똑같이 공부를 안 해도 시험에서는 1등을 차지하는데다, 주변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는 이 남자는 사실상 가 지닌 매력의 심장부다.- 영화의 주제 또한 그의 입에서 나온다. “너의 재능을 따라가면 성공은 뒤따라올 거야”,“사람을 브랜드와 가격표로만 평가해서는 안돼”,“공부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는 우정과 사랑, 가족애, 교육에 대한 가치와 진정한 삶, 그리고 춤과 노래까지 다양한 테마를 즐길 수 있다.- 는 기존에 개봉된 인도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 ,처럼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는 보편적 감동 코드가 아닌,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경쟁 위주의 교육 시스템을 독특한 캐릭터 속 촌철살인의 대사와 유쾌한 웃음으로 그려내며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에서는 , 에서 볼 수 없었던, 인도 영화에서는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만한 화려한 뮤지컬 시퀀스를 만날 수 있다.⑦ 문학작품의 각색- 앙드레 바쟁을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문자와 그것이 지닌 고유한 정신을 어떻게 내면 깊이 소유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또한 각색을 서로 다른 장르간의 기호 체계 고유성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상호전환이나 변형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각색을 서로 다른 장르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원전마저 변형시킬 수 있는 창조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각색의 종류를 구분한 연구들 중에서 루이스 자네티는 원작에 대한 충실도를 기준으로 느슨한 각색, 충실한 각색, 원작 그대로의 각색들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며, 마이클 클라인과 길리안 파커는 축자적 각색과 자유 각색으로 양분하고 있고 지프리 와그너는 전환, 논평, 유사, 차용, 교차, 변형 등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의 각색 이론을 기초로 각색의 기준을 원작에의 충실설과 분량을 기준으로 삼아 한귀은은 아래와 같이 분류한다. 먼저 원작의 충실성고양이와 쥐의 대결이다. 그녀의 체취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스탈링이 사용하는 스킨 크림부터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이나 그녀의 부친, 감추려고 애쓰는 버지니아 사투리까지 정확하게 알아 맞춘다.- 그의 투시력에 당황한 스탈링은 냉정을 되찾고 침착하고 조리있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대형 방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지만 스탈링은 자신의 어린 시절 악몽을 들키면서까지 천재 독심술사인 한니발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기 시작한다.- 스탈링은 렉터에게 인간 심리의 통찰에 관해 신뢰감을 갖게 되고 렉터는 끝까지 자신을 신뢰하는 스탈링에게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범인은 잡히게 되지만 영화는 연쇄 살인범을 수색하는 것보다 렉터와 스탈링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② 작가의 작품 목록- 영화 은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공포 영화일 뿐 아니라 (1934)과 (1975)와 함께 주요 5개 부문(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한 세 편에 속한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스텔링의 과거 아픈 상처가 치유되었는지를 묻는 렉터의 질문 “양들은 침묵하는가”에서 따온 것이다.③ 간략한 정보감독조나선 드미원작토마스 해리스각색테드 털리주연앤소니 홉킨스조디 포스터스콧 글렌장르스릴러/공포/범죄제작국가미국제작연도1991년상영시간118분등급18세 이상 관람가수상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④ 감독 소개- 조나선 드미 대표작: (1980)(*대부호와 가난뱅이 청년의 만남을 그린 작품), (1984)(* 뉴웨이브 록 그룹인 토킹 헤즈의 라이브 다큐멘터리 영화)(1987), (1988), (1991), (1993)⑤ 작가 소개- 토나스 해리스: 1975년 『블랙 선데이』로 데뷔한 이래 『레드 드래곤』(1981년), 『양들의 침묵』(1988년)등 3편의 소설을 발표,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 되었다.
박용진, 「샤를마뉴의 대관식 의례와 그 의미」 요약800년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로마제국 게르만족-기독교의 결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샤를마뉴의 식에는 로마, 게르만, 기독교에 기원을 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프랑크 왕국 연대기(Annales regni Francorum)』는 카롤링 왕조의 궁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간주되는 기록으로서, 궁정의 공식인 입장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식이 명백히 ‘대관’과 ‘환호’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옛 황제들의 방식으로”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과거 로마제국 시절의 방식으로, 그리고 그것을 전승한 비잔티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그러나 이 의례에서는 눈에 띄게 다른 점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의례의 순서이다. 대관식은 대관, 환호, 성사(도유), 그리고 경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하지만 본래 비잔티움에서는 환호가 있고 나서 대관이 거행된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대관식에서는 대관이 거행된 이후에 환호가 이어졌다. 다시 말하면 비잔티움에서는 신이 황제를 선택하고 시민이 환호로서 황제를 선택하므로 황제는 이미 ‘신의 섭리’(vox dei)와 인민의 선택’(vox populi)에 의해 황제에 오른 후 대관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로마에서는 신의 선택이 이루어진 이후에 인민의 동의가 진행되었단 것이다. 대관을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교황으로서 그가 “손수”(manibus suis propris) 해주었던 것이다.프랑크 왕국 연대기의 경배(adoratio)는 황제에 대한 존경과 복종의 의례이다. 하지만 『교황 전기 집성』을 작성 한 교황 측근들로서는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경배를 생략하였다. 대신 “도유(adoratio)”가 기록되어 있는데, 도유는 기름을 부어주는, 혹은 발라주는 행위로서 왕의 신성함을 보장해주는 의례다. 그러나 이 “도유”라는 의례는 로마 황제의 식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비잔티움 황제의 식에서도 9세기 후반에서야 등장한다. 이 의례는 비잔티움 제국에서보다는 서로마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의례가 게르만족의 전통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게르만 족의 왕들은 도유를 받음으로써 그들의 전통인 주술사에서 기독교의 사제로 변해갔다. 그러나 정작 800년 크리스마스에 거행된 샤를마뉴의 식에서는 도유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이 당시 샤를마뉴는 프랑크 족의 왕으로서 이미 도유식을 받은 상태기 때문에 800년에 로마에서 다시 도유를 받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대신 샤를마뉴는 교황으로부터 축성(consecratio)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