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어디에선가 ‘훌륭한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선 쇳물을 잘 다루어야한다’라는 글귀를 본적이 있다. 칼과 망치, 쇳물을 이용한 도구를 만드는 대장장이에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 글귀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갔다. 동시에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과연 의학을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써 사람의 몸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고 있었을까?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의 몸이란 단순히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오랜시간 봐왔던 의사들의 모습은 나의 이런 부족한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병원에 가면 환자는 아픈 부위를 의사에게 내밀어보인다. 그리고 의사는 이것을 보고 판단을 한다. 끝에 가선 알 수 없는 전문용어를 내뱉고, 수많은 약들을 처방한다. 의학을 배우고 있는 나를 비롯해 병원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것이지만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나쁜지, 왜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스레 의사들은 전문용어를 쉽게 풀어 설명해주려 하지 않는다. 환자들이 알려하지 않고, 이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태는 결국 사람의 몸이 단순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다.몸을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잘못된 사고는 여러 문제점들을 유발하고 있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이런 사고를 기반으로 자신이 인식하는 몸, 타인이 인식하는 자신의 몸에 집착한다. 눈, 코, 입을 비롯해 이마, 뒤통수까지 성형을 하는 세태를 보면 이런 몰지각한 사고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이러한 사고는 몸의 일부분인 정신적인 부분까지 좋지 않게 만든다. 외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니 무조건적으로 예쁘다/못생겼다, 건강하다/건강하지 않다 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된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인간을 어떤 범주 속에 스스로 갇히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회를 비상식적으로 만들어버린다.사람의 몸이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이외에도 많은 연결고리들이 있다. 사랑,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사회를 외적인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사고로 인해 우리는 꼭 경험해야하고 얻어야 하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처음 ‘몸과 인문학’이라는 책을 보고 이 책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았을 때는 단순히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라는 대목을 보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떠한 시선으로 보고 생각해야 동의보감의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인지 그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에 널리 퍼져있는 이분법적인 사고 형태를 반박하며 몸은 많은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어떠한 주제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책은 몸을 몸, 여성, 사랑, 가족, 교육, 경제, 운명 등 여러 주제들 안에 또 세부 주제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면을 제시하고 있었다.첫 번째 장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의사vs환자, 몸을 탐구하라-통즉불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사vs환자 이야기는 세상과 기술이 발전하지만 왜 병이 줄지 않고 탄생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탐구하기보다는 아프면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간다. 나부터도 아프면 약을 먼저 찾고 병원에 가는 것이 먼저이다. 이 병원에 가더라도 의사들은 환자와 ‘소통’하는 것보다는 모니터에 있는 여러 데이터들을 ‘수용’ 하기만 한다. 이러한 행위들이 진정으로 의사가 하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계속 위의 행위들만이 반복된다면 데이터들을 수용하고 해석할 수 있으면 의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의사들이 지식만을 환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선생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의학이 원래 추구하려던 것이 아니다. 책에서처럼 나와 있듯이 동의수세보원에서도 얼마 전 내가 한의학 한문시간에 배웠듯이 의학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 이롭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의학이 추구하는 바이다.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해진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 안으로 향해진 본능이 적대감과 원한으로 바뀌어 자기를 학대하거나 타자를 짓밟고 우울증, 자살충동, 맹목적 분노. 폭력중독으로 나아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생명의 물리적 법칙으로 이분법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순환과 운동이 있는 몸의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상적인 차원의 소통, 즉 이분법적인 사고로 현상에 접근하기보다는 생명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순환에 전체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한다.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 사회의 발전하는 방향등이 문제라고 하지만 작가는 이를 몸의 원리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 새로웠다. 또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몸의 원리 탐구라는 것이 신기하였지만 구체적으로 몸의 원리를 탐구해야한다는 것이 학교폭력 가해자나 우울증, 자살충동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였다.아프고 괴로우면 그때 비로소 세상과 타인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앓는 병은 그 반대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기보다는 무관심하다. 역지사지의 윤리가 우리들 사이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가 고통을 느끼고 힘들 때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다라고 느끼는 것이 같은 맥락인 것 같다. 하지만 또 반대로 남에게 관심은 없지만 남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강하다. 이러한 인정욕구는 하면 할수록 더 빠져나올 수 없도록 인정욕망의 늪을 만들어낸다.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이러한 모순적인 행동을 해결하기 위해서 역지사지의 윤리를 실천하면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를 남을 대하듯 잘 탐구하면 인정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관심을 받기를 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자신의 불행,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 하였다.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다하고 스스로 수양하여 개인 내면의 마음 확충하는 충과 남에게까지 자신의 마음이 미쳐 남을 감화시킨다는 서를 실천하는 것이 인정욕망의 늪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있다.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사랑의 힘에 이끌려 누군가가 내 삶 속으로 느닷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선택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차고 차인다는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사랑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실연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슬퍼하는 그런 행위를 의식적으로 주도하는 주체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행동 자체는 무용지물이다. 이 때 해야할 행위는 본격적인 탐구이다. 이분법적 회로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사랑, 삶도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다. 실연을 통해 이분법적 회로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삶의 지침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서 작가는 실연을 행운이라고 표현한 것 같았다. 실연을 이분법적 사고와 연관시켜 이를 반대하며 본격적인 탐구의 기회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말 새로웠다. 실연에 슬퍼하고 이를 이겨내는 것이 사람을 더 단단하게 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이 행위가 무용지물이라 표현하며 탐구가 필요한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힘들고 말이 안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실연을 당했다고 슬퍼하기보다 자신을 탐구하고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조금 힘든 말인 것 같았다.몸과 가족 주제에서 작가는 아기를 업어야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아기가 업힌 모습보다는 안긴 모습이 많다며 업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명의 이치상 3가지 이유를 들어 말하고 있다. 아기는 양기 덩어리기 때문에 음이 필요하다. 안고 있게 되면 맞붙는 모양이 되어 아기의 양기가 더욱 증가하게 된다. 족태양방광경이 지나가는 등은 서늘하여 아기의 몸전체에 양기가 차분하게 수렴되는 것을 돕고 아기의 시선을 넓혀준다. 또한 자신의 아기만 특별하다는 망상을 막고 관계를 바꾸기 위해 등에 업어야 한다. 아기를 등에 업거나 안거나 이 단순한 행설명하여 이해를 도왔다. 할머니에게 아기가 품에 안겼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조차 음양의 조화가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떤 하나 하나 작은 행동조차도 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부분에서 잘 드러난 것 같았다.몸과 교육 주제는 내가 학생이고 지금까지 교육의 늪속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더 나에게 깊이 와 닿았다.‘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힘을 내거나 그것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이를 열심증으로 연관시켜 심에 열이 받으면 기는 안에서 흩어지고 혈은 기를 따라 흘러 영위가 혼란하므로 온갖 병이 공격한다는 동의보감의 말을 설명하였다. 현대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수면과 집중력이다. 집중력이 부족하여 할 일을 모두 끝내지 못하면 이는 늦게 자고 빨리 일어나 수면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음을 비운 채 온몸으로 터득하는 것이 공부인데 현대에는 그저 열심히라는 구호처럼 지식과 정보에 우리를 묶어 빠르고 많이 습득하도록 한다. 몸과 마음을 분리하고 지식과 존재를 분리하고 앎과 삶을 분리하는 이분법 사고에서 소통을 바라는 것은 모순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지식과 몸이 완벽하게 분리된 상태에서는 심장이 뜨거워지고 집중력은 약화되다. 이렇게 현대인들이 수면과 집중력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지식과 몸을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지식과 몸을 소외시키지 말고 이를 소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많은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더 많은 지식을 누가 더 많이 습득하여 이를 겨루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조기교육이 판을 치고 이는 생로병사의 흐름을 깡그리 무시한 것과 같다. 즉 열심증이 악화된다. 지식과 삶의 능동적 교감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하고 앎은 순환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앎이 순환하지 않으면 앎이 아니고 우정과 지혜는 그 순환의 최고 기술이다. 이처럼 앎을 작가의 말처럼 순환하고 자신의 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우정과 지혜라는 발판을 통해 자기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