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죄 없는 죄인 영희는 소리친다.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다. 아니 들어주지 않는다. 영화 ‘죄 없는 소녀’에 나오는 영희는 같이 놀던 친구 경민이의 자살로 경민을 자살로 이끈 유력한 가해자로 몰린다. 경민의 부모,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반 친구들까지 모두 영희의 잘못이라며 영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영희가 이렇게 가해자로 몰린 이유는 무엇인가? 반 친구들, 선생님들 그리고 자살한 경민의 부모는 이유 모를 경민의 죽음을 설명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어쩌면 경민이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을지도 모를 본인들의 죄의식을 외면하기 위해서 원망하고 비난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그 책임을 영희에게 묻는다.여기서 나타나는 게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이란 폭력적 성향의 집단적 전이현상으로, 공동체가 어떠한 문제나 위기에 놓여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힘없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쏟아부어 공동체 간의 갈등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화를 입힌 사람에게 복수할 수 없을 때 다른 대체물을 찾아 분노와 복수심을 해결하려고 한다. 폭력은 전염성이 강해 이는 집단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해 무고한 희생양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희생양들은 가해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다. 처음에 가해자들은 죄와 사악함과 연관시켜 희생양의 희생을 강요하지만, 이후에는 이런 희생양들의 희생 덕분에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를 되찾았다며 그 희생에 성스러움의 옷을 입힌다. 이렇게 가해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정당화시킨다.하지만 희생양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든 행동이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자신의 희생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한다고는 하지만 희생양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된다. 영화에서 영희가 희생양으로 선택된 이유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희생양의 선택은 터무니없이 작은 차이로 시작하여 한 개인을 구별하고 양극화시키며 나타난다. 건강한 사회라면 오히려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개인을 기회 삼아 잔인하게 짓밟는다. 어느 누가 희생양이 되고 싶어 할까? 어느 누구도 희생양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중들도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다른 희생양을 찾아내는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공동체에 암묵적인 희생양이 발생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삶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으로 1970년대부터 케인스 이론을 도입한 수정자본주의의 실패를 지적하고 경제적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영화 에서 찾아볼 수 있다.영화 는 이름과 나이 심지어 가족까지 어느 것 하나 진실하지 못한 경선의 이야기가 나온다. 경선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가족을 잃고 자식까지 잃었다.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경선은 결국 신분 위장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렇게 경선은 선영이란 인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것만 같았던 삶은 문호를 만나고 들통나게 되는데 이에 포기하지 않고 경선은 다시 한번 신분 위장의 계획을 세운다. 이렇듯 영화 속의 경선은 연민의 대상이지만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난다. 도대체 무엇이 경선을 이러한 괴물로 만든 것인가.경선은 자신의 불행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택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기존의 자유주의가 재산을 소유한 부르주아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이동, 무역과 투자, 제한 없는 자본 축적을 보장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중산층의 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 정치의 오랜 교의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는 신구 중산층의 삶과 몰락을 배경으로 하면서 불안정한 삶을 사는 프레카리아트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한 스페인 화가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화가이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귀족층의 엄청난 후원을 얻었고 그것을 유지해가면서 평생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영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의 대략적인 스토리와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종교에 대한 사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간단한 줄거리를 이해한 뒤 영화를 보았다. 아무래도 종교와 역사에 관련된 영화여서 모든 장면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줄거리대로 따라가며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정리한 간단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생각보다 줄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1792년 마드리드의 가톨릭 종교재판소는 사제들을 괴물로 묘사하는 고야의 작품들을 보며 고야를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로렌조 신부는 고야의 편을 들어주고 오히려 이 작품들이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며 고야를 위대한 예술가라고 칭찬한다. 로렌조의 말에 대한 사제들의 반발에 로렌조는 그 대신 이단의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고 고야의 뮤즈였던 아이네스를 이단의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소환한다. 그는 아이네스를 무자비하게 고문하였고 끝내 거짓된 자백을 받아낸다. 억울하게 잡혀간 딸을 구하기 위해 아이네스의 아버지인 토마스는 고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고야는 토마스와 로렌조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다. 토마스는 로렌조 신부에게 막대한 돈을 성당의 재건축에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아이네스를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로렌조 신부는 아이네스가 고문을 통해자백을 했고 이는 재판에 큰 효력이 있다며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토마스는 로렌조 신부를 아이네스오 똑같이 고문함으로써 로렌조 신부 자신을 원숭이라고 인정하는 종이에 서명을 하게 한다. 토마스는 이 문서를 공개한다고 로렌조 신부를 협박했고 로렌조 신부는 마지못해 토마스의 요청을 들어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종교재판소에서는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고 토마스가 후원하겠다는 돈만 받게 된다. 이에 로렌조 신부는 감옥에 갇힌 아이네스를 찾아갔고 아이네스에 매력을 느껴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가지게 하는 일을 벌인다.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자 토마스는 로렌조 신부가 서명한 문서를 공개했고 로렌조 신부는 그로 인해 도망자 신세가 된다. 15년이 흐른 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고 로렌조 신부는 프랑스군과 함께 스페인을 점령한다. 이에 프랑스군은 종교재판소를 폐지하고 모든 죄인을 풀어주게 되는데 이때 아이네스도 같이 풀려난다. 풀려난 아이네스는 고야를 찾아갔고 감옥에서 낳은 아이를 찾아야 한다며 고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감옥에서 낳은 아이네스의 딸 앨리시아는 바로 수녀원에 보내졌지만 그 곳을 탈출했고 매춘부로 생활을 이어왔다. 고야는 아이네스를 돕기 위해 로렌조 신부를 찾아 갔지만 로렌조 신부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아이네스를 또 다시 감금하고 앨리시아를 미국에 보내려 한다. 그러나 영국군의 습격으로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이 쫓겨나고 종교재판소는 다시 문을 열게 된다. 도망을 치던 로렌조 신부는 붙잡혀 종교재판소의 심판을 받게 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공개처형을 당한다. 이를 지켜 보던 아이네스는 죽은 로렌조의 손을 잡고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영화가 끝난다.이 영화를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토마스가 억울하게 종교재판소에 잡혀간 딸을 위해 로렌조 신부를 똑같이 고문을 하던 장면이다. 토마스의 가족과 고야 그리고 로렌조 신부가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그들은 아이네스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하던 중 아이네스의 가족들은 아이네스가 종교재판소에서 고문을 받았고 이에 거짓된 내용을 자백한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들은 고문을 통해 한 자백일 뿐이라며 로렌조 신부의말을 부정한다. 하지만 고문을 통해서 한 자백일지라도 이는 재판에서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며 로렌조 신부는 토마스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에 토마스는 로렌조 신부도 고문을 받아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로렌조 신부는 없다고 대답했고 받더라도 주님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다며 자신한다. 로렌조 신부를 진짜로 고문할 듯한 토마스를 본 가족들은 토마스가 농담을 하는 거라며 지나가려 했지만 자신의 딸이 당한 일을 생각하며 화가 난 토마스는 로렌조 신부를 똑같이 고문하게 되고 자신이 원숭이라는 망신스러운 내용에 로렌조 신부의 서명을 받아낸다. 이 장면은 토마스의 아이네스에 대한 지극한 부성애가 나타나는 장면이다. 처음 가족들이 아이네스의 고문 사실을 들었을 때 별로 놀란 반응이 없어서 의아했지만 토마스의 행동을 본 뒤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내가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토마스처럼 신부를 고문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로서 참 대처를 잘 한 것 같다.두 번째로는 아이네스가 감옥에서 풀려 난 뒤 로렌조 신부와의 만남에서 “나에게 남자는 당신밖에 없어요” 라고 한 장면이다. 감옥에서 얼마나 자신의 딸과 로렌조 신부만을 생각하면서 버텼을지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로렌조 신부는 자신의 앞길에 아이네스가 방해가 될까봐 아이네스를 정신병원에 가두기까지 했는데 로렌조 신부가 죽는 마지막 장면까지도 로렌조 신부를 믿고 그에게 중독된 아이네스의 삶이 너무 불쌍하게만 느껴졌고 처량했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책의 제목인 아날로그의 반격과는 다르게 나는 이 책을 전자책으로 읽게 되었다. 전자책으로는 처음 읽는 것이기도 했고 전자책의 장점을 생각하며 약간 기대가 되기도 했다.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잠자기 전에 불을 끄고 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편리함보다는 불편한 점이 더 많이 생각이 났다. 오랫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눈의 피로는 물론이고 읽다 보면 배터리가 없어 읽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책의 내용에 쉽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이가 없어지고 디지털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듣곤 했다. 또한 인공지능의 발달로 로봇이 사람을 대체해 미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디지털의 시대에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디지털의 성장과 더불어 아날로그도 사라지지 않고 줄어들었던 자신의 영역을 다시 넓혀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종이와 오프라인 매장, 학교이다. 종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나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종이가 주는 편안함과 마음의 안정을 통해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편리함을 추구해 종이가 없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널리 퍼져 있지만, 여전히 서점을 찾는 사람들은 많이 있으며 스마트폰의 플래너가 아닌 다이어리를 사용한다거나 노트를 사용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다. 따라서 나는 종이가 완전히 없어진다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 LP판처럼 소수의 취향을 위해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두 번째로는 오프라인 매장이다. 이 부분의 내용을 읽으면서 ‘이것 또한 아날로그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상품이 판매되고 소비된다. 나 또한 인터넷 쇼핑을 자주했던 편이라서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옷을 구매하다 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여기서 실패한다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핏이 아니거나 색이 조금 다르거나 사이즈가 달라서 맘에 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럴 경우 반품을 통해 상품을 교환할 수 있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위험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방문해 상품을 구매하는 수밖에 없다. 나도 여러번 이런 경우를 겪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인터넷으로는 옷을 구매하지 않는다.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가서 만져보고 입어보고 구입한다. 이게 편리한 인터넷 쇼핑몰이 많이 생겨나지만 오프라인 매장이 없어지지는 않는 이유이다.마지막으로는 학교이다. 종이와 마찬가지로 학교 또한 없어질 것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교사와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 앞에 모여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이다. 흡사 인터넷 강의와 비슷하다. 학생들은 수업을 원하는 시간에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선생님들은 잠옷차림으로도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수업을 들어야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선생님의 말을 받아적고 외우기만 하면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의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착한 일을 한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해 준다거나 친구들과 손을 잡고 등하교를 하며 친밀감을 키우는 것이 그렇다. 이런 면을 고려해 본다면 학교 또한 없어지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소설은 불한당이 가득한 술집에 모친상을 당한 청년이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술집의 사람들은 청년의 슬픔을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것에 서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막상 청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침묵으로서 위로를 대신한다. 그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아내의 이야기로 이어져 남자와 여자의 과거 이야기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이렇게 이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역순행적 구조로 쓰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전에 제목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 소설에서 꿈이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아내가 바라는 평범한 삶을 의미한다. 평범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역설적인 상황이다. 아내는 이러한 평범한 삶을 꿈꾸고 남편이 가장의 역할에 충실한 가정을 꿈꿔왔다. 하지만 이는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의 꿈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아내의 시선과 과거의 이야기가 모두 남편의 꿈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과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아내의 입장이 되어보고 아내와 처음 만난 시간을 추억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또한 이 소설 속에는 우리 사회의 온갖 폭력들이 존재한다. 부부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 조리장의 영양사에 대한 성폭력,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폭력까지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이렇게까지 우리 사회에 깊이 스며들었고 작가는 이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을까?바로 소통의 단절이다. 우리의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을 알아도 모른척하기 일쑤이고 멀리서는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사회에는 소설 속의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대화,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소설 속에 이러한 폭력을 나타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