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O년-1학기 [중국신화의 세계] 기말레포트상상력에 대한 오해를 풀면서- 鬼神을 노래하는 鬼才, 李?강의명 : 중국신화의 세계지도교수 :전공 :학번 :이름 :< 목 차 >- 여는 글1. 빨리 오해의 半을 풀자2. 「夢天」꿈속에 본 하늘3. 「夢天」 속에 나타난 신화적 모티프- 이하의 꿈- 항아의 꿈4. 나가는 글상상력에 대한 오해를 풀면서- 鬼神을 노래하는 鬼才, 李? -◆ 여는 글「마징가Z」,「메칸더V」,「그랜다이저」,「건담」,「2020원더키디」등 온갖 로봇세상을 간접 체험하던 코흘리개 시절을 거쳐,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선 으레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사회를 그리곤 했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타워즈」와 「에일리언」시리즈에 중독됐던 중고교시절, 교실에선 '인간복제'에 대한 토론을 벌이곤 했으며, '복제양 돌리'가 수능문제에 까지 출연했던 11월을 보내고 어렵사리 대학문턱을 넘었을 쯤엔 「매트릭스」를 주제로 레포트를 제출했던 내게 '상상력'이란 다소 황당무개한 미래사회를 예견해보는 도구였을 뿐, 그것이 멀어도 한 참 먼 과거의 '신화'와 깊은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또래들과의 수다를 엮어가던 어느 날 발견한 것은 이 '상상력에 대한 오해'는 비단 나만 홀로 범한 우(愚)가 아니었다는 사실. 이 보고서를 그 오해를 푸는 데 방향성을 두고 전개해 보고자 결심하게 된 계기가 바로 여기 있다.1. 빨리 오해의 半을 풀자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언급할 수밖에 없는 키워드는 바로 상상력이다. 이는 신화나 문학이나 모두 인간의 상상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는 글에 밝혔듯이 '신화'라는 단어를 염두 하지 않았을 때, 일부 젊은 세대가 떠올리는 '상상력' 은 신화의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는 '미래과학'이라는 아명(雅名)까지 달아가며 오늘날의 과학이 오직 미래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응원해온 우리 사회가 인간 활동의 모든 방향성을 미래에 둔 경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동양적 상상력은 무시되고, 서양적 사고관에 중독된 미래향에 가깝다.그런데 이 편협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 최근의 ‘동양신화의 소개’다. 그리스 신화의 ‘열풍’에 비교할 때 비록 그 반향의 범위는 아직 협소할지 모르나, 그 충격의 정도와 동양신화를 접한 이가 얻는 감상의 재미와 깊이는 뒤지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런 신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새삼 '언어의 힘'에 다시 놀라게 된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언가가 언어로 정의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지만, 그것이 언어로 정의 되는 순간부터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바로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6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신화적 상상력'은, 학계에서 부턴지, 출판계서인지, 언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에 의해 이 6글자로 정의됐다. 비로소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면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이는 신화의 범주도 넓히고 상상력의 개념도 재정의 하는 계기였다.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6글자의 탄생 자체가 앞서 고백한 상상력에 대한 오해를 반(半)쯤 풀어주는 핵심적 사건인 셈이다.'신화적 상상력'은 너무 오래 전에 태어났기에 이미 그 수명을 다했어야 마땅하지만, 불로장생의 주술적 마력 덕분인지 여전히 정정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적 공백이 너무 커서 감히 그것이 우리의 문화에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거나, 혹은 아예 알지 못한다. 이에 그것이 탄생하던 그 시절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인간 활동 중에서도, 상상력이라는 힘을 근간으로 삼는 문학 장르를 통해, 그리고 저 긴 시간의 중간 지점 쯤 되는 고대문학을 통해, 그리고 중어중문학 전공자로서의 일말의 양심 탓에 중국 문학작품을 그 징검다리로 삼아보고자 한다.2. 「夢天」꿈속에 본 하늘신화와 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실재한 사물이나 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발휘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 즉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과 인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의 창조를 신비로운 신화로 설명하였고 문학작품 또한 세상에 존재한 만물을 바탕으로 문학적 허구와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작되기에 이르렀다.짚고 넘어갈 것은 이런 신화와 문학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것의 발생이 상상력에서 출발함 뿐만이 아니라 듣는 이, 읽는 이의 우뇌를 자극하여 제2의 새로운 상상력을 촉발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엔 축약과 생략, 은유와 상징 등의 장치들이 그 촉진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런 장치들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학장르가 시(詩)다. 중국 시에서 독특한 점은 그런 상징의 장치로 또한 신화가 사용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화가 현재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 되짚어보기 위한 장르로 선택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그림 1 이하이런 이유로 찾아 본 중국의 고대 시 중 선택한 것은 당(唐)대 시인 이하(李賀)의 「夢天」이란 작품이다. 이하는 재능이 뛰어나고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지만, 겨우 27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한 시인이다.귀족출신으로 귀하게 자랐기에, 두보나 장적, 원진, 백거이 등과는 달리 세태나 힘겨운 삶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의 집안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신체적으로 매우 병약했던 것이 그의 불행일 것이다.그의 작품이 비록 사회시적인 풍모는 갖추지 않고 있다고 하나, 어떤 소재로 글을 쓰든 기발한 착상과 독특한 시어로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 대별되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풍을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 특성이 바로 신화적 영감을 바탕으로 한 ‘귀신’, ‘혼불’, ‘죽음’, ‘무덤’, ‘혼백’ 등의 모티브다. 이것이 그가 ‘귀재(鬼才)’라 불리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夢天 老兎寒蟾泣天色 雲樓半開壁斜白玉輪軋露濕團光 鸞佩相逢桂香陌黃鹿淸水三山下 更變千年呂走馬遙望齊州九點煙 一泓海水杯中瀉(번역) 달 속의 늙은 토끼와 한기 느낀 두꺼비가 우는 듯한 하늘 빛구름누각 반쯤 열리자 벽 사이로 비스듬히 내비치는 새하얀 달빛옥 바퀴 이슬에 구르자 물기를 머금은 듯 달빛은 몽롱해지고계수나무 꽃향기 피어나는 길에서 선녀를 만난다.삼신산 아래 인간 세상을 바라보니 누런 먼지와 맑은 물뿐변화를 거듭하는 천년 세월도 달리는 말처럼 한순간이다.아득히 바라보이는 중국 땅은 아홉 점 먼지넓은 바다도 쏟아 낸 한 잔의 물에 불과한 것을3. 「夢天」 속에 나타난 신화적 모티프「夢天」은 그의 시 중에서도 매우 직접적으로 신화적 모티브가 사용된 예라고 할 수 있다. 확연히 눈에 띄는 시어는 노토한섬(老兎寒蟾), 즉 토끼와 두꺼비다. 여기서 우리는 달의 여신 항아(嫦娥)를 떠올릴 수 있다. 또한 꽃모양의 옥패를 의미하는 난패(鸞佩)는 옥패를 찬 선녀를 나타내며, 삼산(三山)은 삼신산(三神山)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이들 역시 이하의 신화적(혹은 선화적) 시세계에 부합하는 시어로 꼽을 수 있다. 제주구점(齊州九點)은 전설상의 행정구역으로 옛날 우(禹) 임금이 중국을 아홉으로 나누어 다스렸다(九州四海)고 하는 데서 유래되어 중국 전체 영토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이런 시어들의 단편적 확인 후에 이 시 속에서 꿈을 꾼 이가 이하일수도 있고 항아일수도 있다고 봤다.◆ 이하의 꿈쇠락의 길로 접어든 왕조의 무너진 기강으로 환관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조정의 정사를 좌우하던 중당(中唐)시기, 현실이 반영된 사실주의 문학관이 대두하는 가운데, 이하는 이 시기의 문인들의 창조적인 시풍 위에 고대 남방 시가인 초사(楚辭)와 한(漢)나라 민가의 특색과 남조(南潮)시가의 농염한 시풍을 가미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츅한다. 한유(韓愈)의 인정을 받아 관직으로의 진출을 도모했던 그는 경쟁자들의 질투로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리고 그나마 생계유지를 위해 맡고 있던 말단 관직은 그 조직의 생리에 거부감을 느껴 고향으로 내려와 시작활동에 전념하게 된다.그림 2 갸날픈 용모의 이하이렇게 시인의 삶 자체가 현실세계에 대한 좌절과 불운으로 엮이면서 그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시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시인은 무한한 환상이 가능한 꿈이라는 공간을 설정해 하늘과 달과 인간 세상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을 펼쳐 보이고 있다. 시의 첫 구에서 하늘에 올라 달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신화와 전설을 동원하여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달에서 바라본 인간 세계의 신간과 공간이 얼마나 허무하리 만치 짧고 좁은가를 마치 하늘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이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시인은 독특한 시공 의식을 보여준다. 시인은 현실에서 급속한 시간의 흐름과 지극히 편협한 세상을 경험한다. 현실에서 펼쳐 보이지 못한 꿈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신간과 공간적인 제약이 없는 꿈, 신선, 혼귀 등의 세계를 빌려 잠시나마 보상받고 싶었던 것일 수 있다.병약하여 일찌감치 머리가 희어져 버린 이하는 이러한 기발한 착상들을 통해 소진해 가는 자신을 위로하는 하나의 방편이면서 결과적으로는 다른 시인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시풍을 이루며 그 나름대로 현실을 반영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항아의 꿈항아도 자신의 현실에 대한 좌절이라는 점에서 이하의 심경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 예가 얻어온 불사약을 혼자 다 먹고 하늘나라로의 귀환을 꿈꾸던 항아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수치심으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 온것은 이하의 시 「夢天」의 전개와 유사하다.하늘로, 하늘로 솟아 날아가다 부끄러워진 항아도 달의 노토한섬(老兎寒蟾)을 발견했을 것이다. 난패상봉계향맥(鸞佩相逢桂香陌)이라는 구절은 어쩌면 구름에 에워싸인 그 곳에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항아의 감회일 수도 있다. 그렇게 달에 자신의 근거를 마련하고 지구를 내려다 본 항아의 눈에도, 인간세상의 탐욕과 경쟁이 허무하고 부질없게 보이는 선인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기말 레포트경복궁 답사기담당교수 :전공 :학번 :이름 :한국미술사 기말레포트 XXXXXX OOO또 다른 추억의 장소많은 이들이 어릴 적 즐겨 찾던 아련한 추억의 장소가 하나 쯤 있을 법 하다. 내겐 아버지의 고향이자 할머니 댁이기도 한 부여가 바로 그런 추억의 장소다. 백제의 수도였던 탓에 지금도 백제 문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그 곳. 할머니를 뵈러 갈 때면 근방의 정림사지 10층 석탑, 궁남지, 몇 해 전에 지어진 국립 부여 박물관까지 통과의례인 양 두루두루 한 바퀴 돌아보곤 했다.해질 무렵 할머니 댁 대문을 밀고 나가 정림사지 10층 석탑을 멀리서 지켜보며 10여분 앉아있다 보면, 지나는 바람을 문득 석탑에 녹아있는 백제 석공의 숨결이라 착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느긋한 마음으로 궁남지를 휘휘 돌며 마치 왕이 된 양, 뒷짐 걸음을 걸었던 것도 비슷한 환상에서 비롯된 행동거지 일 것이다. 서울 어딘가에서 거닐던, 시멘트 바른 인공연못과 달리 궁남지는 어린 내게 도덕책 속의 ‘물아일체’를 어렴풋이 느끼게 해준 곳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 가끔씩 역사의 공간에서 호흡했던 탓일까, 버스를 혼자 탈줄 알게 된 후, 주말이면 친구들과 서울 도심 곳곳을 쑤시고 다니다 ‘경복궁’이라는 또 다른 역사적 시공간을 발견하게 됐다.첫 만남, 그 이후로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을 거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처음 갔을 때 박물관 뒤편에 있는 경회루를 보고 사뭇 놀랐던 기억이 난다. 친숙한 궁남지의 소박함과는 다르지만, 서울의 한가운데 돌을 두른 연못이 갖춰진 그런 여유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때는 일본 총독부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는데, 역사공부에 더딘 내게도 이 총독부 건물의 이물감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물감의 원인을 이해한 건 좀 더 자라 일제 강점의 역사와 그들이 궁궐을 감시하고 그 맥을 끊기 위해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다. 아마 경복궁을 찾지 않게 된 데 그 역시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1995년, 총독부 건발표가 있었고 곧 실행에 옮겨졌다. 학창시절 한 선생님 “총독부 건물이 비록 우리에겐 치욕의 상징물이긴 하나, 역사와 민족을 차치하고 바라볼 때, 건축적 문화적 가치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의 건물”이라는 말을 수업 중에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 때는 ‘일본=무조건 나쁜 놈’이라는 적대감이 학생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터라 부러 흘려들었다. 이상하게 경복궁을 다시 찾은 오늘, 이 말이 문득 생각이 난건 왜일까. 총독부 건물을 과감히 ‘삭제’해 버리고, 다시금 복원된 경복궁은 지나간 치욕의 역사를 깨끗하게 씻어줄 수 있을까. 혹은 어릴적 즐겨 찾던 부여에서의 환상 따위를 다시금 환기시켜 줄 수 있으려나.내게 토요일 아침은 정신없이 떠밀려 겨우 정박한, 잔물결만 살랑이는 평온한 항구와도 같다. 조금은 나른해져도, 다소 게을러져도, 나름 당당한 그런 시간인 것이다. 그런 귀한 시간을 뺏긴 것 마냥, 알람시계 머리통을 때려 껐다. 그러면서 하필 토요일에 경복궁을 찾기로 결심한 내 머리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다행히도 다녀오고 나서는, 오늘의 답사가 나의 평온한 토요일을 조금도 헤치지 않고 풍요롭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할 수 있었다.궁과의 재회, 그리고 감회가까운 곳을 생각다 다시 찾기로 한 경복궁, 도착 전까지 ‘복원했다지만 뭐 얼마나 달라졌겠나’하는 의심뿐이었다. 심지어 종종 뉴스에서 보던 ‘문화재 복원이 문화재를 더 망쳐 놨다’는 유의 보도들도 떠올라 끔찍한 상상도 서슴치 않았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아름다움과 정겨운 정취를 온 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경복궁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 건방진 상상들을 걷어냈다. 복원한 후에도 어린 나의 눈을 홀렸던 경회루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에 또 한 번 놀라며 다시금 나른한 토요일을 깨워준 오늘에 감사했다.나는 꽤 이른 시간에 광화문 앞에 섰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파를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넓은 공터가 전혀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비록 낯선 사람들이지만 활력 넘쳐 보이는 관람객들의 표정과 아름다운 경복궁을 하 묘한 뿌듯함도 느껴졌다. 특히 견학을 온 듯한 외국인과 어린 학생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들의 반짝거리는 눈빛 때문에 경복궁이 반사광을 내뿜는 것도 같았다. 또 다시 ‘나대로식’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젖어드는 내 자신을 겨우 추스르고, 광화문에서 바라보는 궁궐 전체의 흘러넘치는 활력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왔던 구절이 문득 떠올랐던 것도 이 즈음이다. 저자는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이 사람 하나 없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내고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집이란 사람이 살고 있을 때만 살아 있다. 사람이 떠나면 집은 곧 죽는다.” 비록 조선의 왕조는 쇠하였지만, 아직 그 궁궐을 사랑하고 유지시키려는 사람들이 궁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경복궁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한 무리의 역사학과 학생들을 졸졸 쫓아다닌 덕분에 이번 답사는 겉모습만 훑던 오랜 습관을 수정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로만 구성된 걸 보면, 어느 여대 학생들이지 않았을까. 나는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누구 한명 붙들고 말 한 번 못 붙이고 그저 발만 열심히 그들을 쫓고, 귀만 열심히 열어 놓았다. 그들을 따라간 답사는 광화문부터 시작됐다.광화문에서 봤을 때 북악산, 광화문, 경복궁을 일직선으로 배치해 기의 흐름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은 풍수지리학과 관련돼 있다고 한다. 앞에 해치와 동십자각도 원래 일직선상에 놓였어야 했는데 복원이 잘못돼 일직선을 이루지 못했다는 설명을 들으니 내 집도 아닌데 괜히 서운하다. 현대 기술로 복원하는 문화는 종종 복원이 아니라 파괴가 된다는 한 뉴스 앵커의 멘트를 재확인하는 셈인가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또 일찍이 일본 총독부 때문에 틀어지게 된 작업이라는 설명까지 들으니, 그저 또 다시 망국의 역사를 토닥토닥 위로할 뿐이다. 문화재 복원은커녕 감상에도 짬을 내기 힘든 현대인들이 복작거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풍수지리적 ‘일직선 배치’까지 복원해달라는 주문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자, 들어서서 휘 둘러보고-영제교광서면 중간 지점쯤에 영제교가 보인다. 각 궁궐 법전 앞에 있는 이들 다리는 법전에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법전에서 임금이 임하는 크고 작은 조회가 열릴 때면, 참석하는 문무백관들은 일단 다리 남쪽의 정해진 위치에 각기 대기한다. 문반은 동쪽에, 무반은 서쪽에 형식을 갖춰 대기하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정리의 안내를 받아 법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근정전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이 나오고, 근정문에 들어서면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을 만나게 된다. 근정전 앞을 보면 신하들이 품계에 맞춰 설 수 있도록 문무를 구별하여 양쪽에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정이품 자리 뒤쪽에 보면 조그만 쇠고리가 땅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근정전 기둥에 박은 쇠고리와 연결해 차양을 쳤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정삼품 아래의 신하들은 햇살이 아무리 세도, 비가 억세게 퍼부어도 차양 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근정전 앞의 넓은 공간엔 크고 약간 울퉁불퉁한 돌들이 오늘날의 바닥타일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는 침입자가 왔을 때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다.근정전은 다른 나라 궁궐의 크기에 비하자면 웅장하다고 형용할 순 없을지라도, 그 아름다움만큼은 겨뤄봄직 하다. 근정전은 높게 세우기 위해 그 기단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이는 건물의 위엄을 드러내주며, 중앙에 답도를 세워 새겨 넣은 조각은 아름다움을 더한다. 지난 여름엔 중국 자금성을 방문하고, 그 웅장함 앞에서 기가 죽기도 했고 높게 쌓아올린 기단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금성의 위압적이고 인공적인 멋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져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근정전에 더욱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민족주의적 역사관 때문일까? 긍정전의 천장에는 7조룡이 그려져 있는데, 원래 우리나라 궁전의 대부분은 중국의 아래 있다는 의미에서 5조룡까지만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고종 때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좀 더 높은 국력을 바라는 의미에서 7조룡을 그렸던 것이라 한다. 중문학을 공부하면서 중국에 대한 역사적 열등감에 치를 떨었던 얻었다.근정전의 뒤쪽으로는 왕이 정치를 하고 신하들이 왕을 접견하는 공간이었던 사정전, 왕이 침수를 드는 공간인 강령전, 식사를 하고 잠을 자며 신하를 접견하기도 하는 경성전 등이 있다. 그 옆으로 수정전이 있는데, 이 곳은 다른 건물보다 그 크기가 큰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다른 건물과 그 특징을 달리했던 이유는 세종 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로, 왕이 집현전을 우대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경회루와 교태전수정전의 앞으로 나오면, 내 어린 눈을 사로잡았던 경회루가 한 눈에 들어온다. 경회루는 35칸으로 상당한 규모이며 경사가 생길 때 왕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탈 때 돌만 남았었는데, 현재의 것은 고종이 복원한 것이다. 일단 그 크기에서부터 왕이 연회를 했던 곳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 도심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 장소는 왕의 연회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극진히 접대할 때도 사용했다고 한다.경회루를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교태전이 나오는데 이곳은 중전이 머무는 곳으로 아낙들만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선 왕과 왕비가 동침할 날짜를 정해 잠자리를 같이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교태전과 강령전에는 다른 건물 지붕에는 다 있는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강령전은 왕이 머무는 곳, 즉 용이 거처하는 곳이며, 교태전은 용을 잉태하는 곳이기 때문이라 두 마리의 용은 필요치 않다는 의미란다. 교태전은 여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인지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다. 교태전 후원이 그 중 하나다. 조그마한 둔덕이랄까, 텃밭 같은 것이 있어서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심고, 제법 아름답게 꾸며 놓은 굴뚝과 석조물이 주변 경관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이 조그만 둔덕은 경회루를 만들 때 땅을 판 흙을 쌓아 만든 곳으로 아미산이라 칭한단다. 왕비가 있는 공간에 딸린 정원이라 그런지 아담하지만 매우 아름답고, 특히 굴뚝은 그 용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게다.
1. 국립중앙박물관 들어가기4월4일(화) 3시15분, 수업을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전철역으로 달려갔다. 공교롭게도 이번 학기부터, 주말마다 어머니 가게 일을 도와야 하는 집안사정 때문에 평일 시간을 쪼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본인촬영(이상 촬영)1. 국립중앙 박물관 전면도착하자 시각은 4시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 시간 반 내로 관람을 마쳐야 하는 나는 마음이 다급해 졌다. 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동선을 확인하고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3위의 대규모를 자랑하는 넓은 박물관 안에서, ‘길치’인 나의 방향감각은 조급한 마음과 달리 버벅대고만 있었다. 안내데스크 옆에 진열된 안내책자를 집어 들자, 그제야 층 구별도 되고 어느 계단으로 올라갈 것인지, 뭐부터 봐야할지 등의 알고리즘이 엮어졌다.어쨌든 제한된 관람시간 때문에 걸음이 빨라진 나는, 자세한 관람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구미가 당기는 2층 미술관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3층 미술관 까지는 보겠지’하는 심산으로. 한 손에 1층 홀에서 가져온 안내책자를 펴들고, 사전조사랍시고 프린트 해온 A4종이 뭉치를 훑어 봤다. 핸드폰에 찍혀있는 ‘PM 4:42’이란 숫자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발바닥에 불이 붙은 마냥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2. 수집가와 예술가박물관 홈페이지(이상 박물관)2. 전시2층안내책자에서 안내하는 대로라면 기증관 205호부터 둘러봐야 경제적인 동선이 성립된다. 그런데 내가 올라탄 에스컬레이터는 반대편 끝, 즉 214호와 맞닿은 방향이었다. 순간 잠시 망설였다. 길고 긴 복도 끝자락에 희미하게 보이는 205호부터 시작할 것인가, 그냥 코앞의 214호부터 볼 것인가. 결국 전자를 택했다. 앞서 밝혔듯 길치인 내게, 안내책자는 절대자의 명령과 같은 것이다. 감히 어겼다가 후에 더 복잡한 미로에 갇힐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결국 205호를 향해 긴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관람 후 카톡으로 박물관에서 조차 길을 헤맨 얘기를 하자 친구는, “길치 주제에 왜 혼자 갔냐?”는 매정한 ‘위로’를 ‘파워 워킹’을 하듯 긴 복도를 가로질러, 205호 이홍근 기증실에서부터 박물관 관람 시작! 셔터를 열심히 눌러대며 작품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기느라 바빴다.① 이홍근실수업 시간에 배운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중 . 슬라이드 밖에서 마주하고는 괜한 반가움이 밀려왔다. 옆에 친구가 있었다면 “야, 저거 수업시간에 본 거다”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속닥거릴 수 있었을 텐데, 그저 혼자 촬영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대신했다.촬영3 송도기행첩박물관4 ≪매화초옥도≫개인적으로 이 이홍근실에서 마음에 든 그림은 고람 전기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였다. 관람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수업시간에 고람의 또 다른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가 스크린에 뜨는 것을 보며, 역시나 점점이 찍혀있는 하얀 매화가 안겨줬던 아스라한 감상이 다시금 떠올랐다. 30세에 요절한 작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고람의 작품은 잔잔하면서도 다소 애잔한 감상을 안겨준다. 설령 매화가 문인들의 고매한 품격을 상징하는 꽃이었대도, 전기의 매화는 서생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고아함이다. 선으로 그려진 꽃송이와 점으로 표현된 꽃의 흐드러짐이 주는 느낌의 차이일까. 올바른 감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자의 매화는 과묵하고 엄숙한 학자의 얼굴이, 후자의 매화는 마찬가지로 과묵하나 보일 듯 말 듯한 연약한 미소가 연상된다.② 김종학실촬영5. 멕시코 인류학 물관지난겨울, 학교 프로젝트를 통해 멕시코에 다녀오면서, 멕시코 인류학 박물관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마야문명의 크고 작은 유물들 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갔던 것은 재미있는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수많은 토기 인형들이었다. 김종학실에서 나는 멕시코에서 얻은 재미와 비슷한 작은 재미를 선물 받았는데, 바로 몇 점의 목(木)인형들이 그것이다. 동자승 등을 묘사한 그 인형들은 아기자기한 가운데 소박하면서도 은근히 세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촬영6. 김종학실 나무 인형인형들 대부분이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들이었는데, 나는 이런 것을 ‘동양적인 미소’눈길이 쏠린 것은 벽에 걸린 4폭의 기와 사진이었다. 어려서부터 박물관 같은 곳을 둘러 볼 때면, 유독 기왓장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그 높은 곳에 올려놓는 기왓장을 누가 본다고 저렇게 정성껏 뭔가를 새기고 깎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일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내 발길을 잠시 붙든 막새와 기와들 앞에서, 다시 생각해봤다.분명 단순히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목적에서 기와에 그런 아름다운 문양들을 새겼을 것 같진 않다. 연화문이나 도깨비, 보살 등이 주로 새겨졌던 것으로 봐서 분명 초월적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한 옛 조상들의 관념이 반영된 것이리라. 집의 제일 높은 곳, 누가 눈 여겨 보지 않을 그 곳은 또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에.촬영8 기와전시 벽면에 부착돼 있던 4폭의 현수막 인쇄물 그 중 특히, 도깨비 무늬의 기와가 마음에 들었는데, 이유는 어릴 적 보았던 도깨비 관련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크다. 그 만화를 보며, 크면 나고 도깨비를 연구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져보기도 한터라 도깨비 무늬 수막새 앞에서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3. 글씨, 글, 그림, 삼절의 공간시간에 쫓기는 죄로, 기왓장들의 달그락거림을 뒤로 하고 미술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본격적으로 그간 수업시간에 감상한 많은 작품들을 그 곳에서 다시 만나니, 조금 과장해서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정말 TV속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실제로 본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면가루인지 수면가루인지가 떠다니는 학관지하 강의실에서 스크린에 영사된 그림들만 보다, 실물들을 보며 “아~이 작품, 그거네!’”라는 감탄이 머릿속에서 순간순간 번쩍거릴 때 은근히 짜릿하다.① 서예실사실 서예실은, 그 방면에 무지한 내게 큰 감흥을 주는 공간은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곳이지만, 명색의 ‘한국미술사’ 수업 수강생인데 배운 풍월이나마 다시금 되짚어봐야 했다. 수업에서 글씨를 세부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핵심설명 하나는 “글씨, 문장, 그림에 창작자의 살이 된 사촌동생이 좀 더 크면 데려올 심산으로, 아니면 나중에 내 아이를 데려와 설명해줄 심산으로 제법 찬찬히 들여다봤다. 마침, 서예실에 들어선 다음부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진 탓에, 사진 찍느라 흩어졌던 집중력까지 감상에 쏟을 수 있었다.붓글씨는 컴퓨터 모니터에 타다닥 찍히는, 열과 행이 고른 글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격해졌다가 완만해 지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하고 뭉툭하기도 하는, 지점마다 선마다 확실히 생동감이 있다. 그리고 붓을 휘두른 이가 누구냐에 따라 그 글씨의 맛이 이리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더 놀라웠던 것은, 한 문장 속의 수많은 글자들이, 어쩜 그 하나하나가 모두 똑같은 농도로 작가의 개성을 담아내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폭의 문장을 멀찌감치 바라봐도 그 작가의 개성이 느껴졌고, 그 느낌은 가까이서 한 글자 한 글자 따로따로 볼 때도 여전하더라는 것이다.박물관9 원교 이광사 선생의 《과동정호》박물관10 또다른 형태의 전서체 능호관 이인상 선생의 서첩사실 어떻게 써야 잘 쓴 글씨고 못 쓴 글씬지는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나 표암 강세황 선생의 글씨 등,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주인공의 글씨는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때문에 마냥 감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글씨 그 자체가 독특하고 재밌어서 눈여겨 본 작품이 있었다. 바로 원교 이광사 선생의 「동정호를 지나며[過洞庭湖]」라는 작품이다. 마치 타이포 그라피 디자인을 한 듯, 재미있고 조형적인 느낌이 나는 글씨였다. 뒤에 능호관 이인상 선생의 작품까지 보고나니, 전서체가 다소 그림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글씨체인가 보다. 원교 선생의 작품 옆에 설명글귀를 읽고 나니 더 마음에 든다. ‘조선적인 글씨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서예가’라는 수식 말이다. 내가 우리나라 문화 정체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한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자라는 글자의 태생이 그러하듯 중국 문화권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그 시대에 그런 변화와 도전을는 것은 이야기가 있는 그림, 풍속화다. 마치 어린 시절 동화책의 삽화처럼, 무슨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듯한 그런 그림들. 가만히 살펴보면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뭐니뭐니해도 풍속화 하면 김홍도 선생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명랑만화를 읽을 때와 비슷한 재미가 있다. 어떤 고고한 정신세계를 논하거나 교훈을 담고 있지는 않은 듯하나, 일상이 전하는 재미와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전하는 생동감과 즐거움이 전자보다 미천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당대의 서민들 삶의 가치를 화폭에 담아낸 김홍도 선생의 풍속화가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가 아닐까.회화실을 둘러보며 아쉬운 점은,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많은 작품이 전해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비록 전국 여러 곳의 박물관 급 기관들에 뿔뿔이 흩어져 보관되고 있는 작품들을 모아보면 보다 더 많겠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 중앙국립박물관의 소장된 회화 작품 수가 이렇게 적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해지는 그림들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들도 분명 많았을 건데, 그런 작품들이 불멸의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가루가 돼 버렸다는 것이 참 아쉽다. 아쉬운 마음에 정말 짧은 한숨 뱉어내면서 불교 회화실로 향했다.③ 불교회화실불교회화실에 들어선 순간 놀랬다. 일단 종교화인 만큼 그림의 규모나 그 강렬한 색채의 사용도 놀라웠지만, 그 그림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아마도 불화 속엔 항상 부처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모태신앙이라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가끔 만약 모태신앙이 아니었다면, 즉 처음 접한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었다면 불교를 믿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불교회화실을 둘러보고 나니 그런 마음이 슬쩍 엷어졌다. ‘무서웠다’고 고백하면 다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무서웠다. 비록 수업시간에도 불교화를 보고 그 의미 및 그림 속 기호와 상징도 배웠지만, 그
"破鞋〃的《?金?代》-王小波 작품 《황금시대》작품 분석:여주인공 천칭양을 중심으로1. 서론(1) 왕샤오뽀는 누구인가중국 현대문학 작가의 대표로 추앙받고 있는 왕샤오뽀(王小波)는 "문단 밖의 고수", "위대한 아웃사이더"라는 별칭을 가졌던 바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매우 중국적인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중국 대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히려 해외의 학계에서 먼저 인정을 받곤 했던 것이다. 생전에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한 무수한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왕샤오뽀의 작품과 그의 세계관 등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주류 문단의 관심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지금은 중국 유명작가 대열에 들어서 많은 ‘王小波?下走狗‘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의 장례식장 풍경을 떠올려 볼 때 이는 어쩌면 ’코미디‘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가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던 날, 수많은 사회학자들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과 그의 문학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독자들이 찾아 그에게 예를 올렸지만, 중국의 주류 문단에서는 어느 학자도, 어느 작가도 찾아와 조의를 표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 최근 10여년 사이 갑작스레 불꽃이 일어난 그에 대한 관심에 대해 하늘에서 왕샤오뽀는 과연 어떤 말을 할지 사뭇 궁금해진다.그의 광인적 재능과 독특한 성향은, 근현대 중국 주류 문단이 그를 배격했던 이유에 너무 부합했기 때문에, 생전에 그의 작품들이 큰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가 죽은 후에야 그 문집의 값어치는 천정부지로 솟구쳤고, 그의 철학과 작품들이 문학 연구 활동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를 추종하는 많은 평론가들은 뒤늦게나마 왕샤오뽀의 작품세계가 대륙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 현대 문학 계에 있어서의 큰 복으로 평가한다.왕샤오뽀 작품의 가장 큰 특성이라면, 그 해학이 빚어내는 사회에 대한 조롱과 통렬한 비웃음은 물론,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 특유의 사상과 개성일 것이다. 또한 진실보다도 더욱 진실에 접근해 있다는 평가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우지 "현대사회의 인권" 어쩌구 저쩌구 운운한다면, 이는 사회주의의 ‘신성한’ 도덕관에 대한 모독으로 연결된다. 이는 결코 어떤 도덕적 문제로만 성격을 규정하기엔 무언가가 더 있다. 즉, 어떤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집단이 요구하는 획일화된 질서 체계에서 벗어나려 하는 일탈을 의미한다. 또한 집단의 귄위에 대한 멸시를 나타내는 것이거나 그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것이다.시시콜콜한 작은 일들마저 정치적 논리로 비난하거나 처단하던 당 시대에, ‘문란한 남녀관계’라는 것은 심지어 그 사실 여부와도 관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후환'이 기다리는 일로 결코 감당키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왕얼과 천칭양 역시 이후 벌어진 공개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왕얼의 “진술서(交待材料)”에는 “불법적인 성교(非法性交)”라는 네 글자가 등장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성관념이 용트림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더욱이 자유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에 황당하기 그지없는 네 글자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혁명 시기의 잔혹하리만치 엄격했던 사회분위기를 한 번 굴절시켜 비춰주는 결정적이 단서 중 하나일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화혁명'이라는 네 글자가 대표하는 비상식적 억압과 유린이 횡행하는 사회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칭양이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헤진 신발짝’이 될 수 없는 사회였음을 역으로 반증해 보여주는 것이다.남편은 감옥에 갇혀 있고 의지할 곳 없이 고독 속에 고립된 한 여인이, 이런 엄혹한 문혁시기에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감히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在大家都管?叫破鞋,弄得?魂不守舍,?乎自己是?都不知道了。지금 모두가 그녀 보고 ‘헤진 신발짝’이라고 하니, 그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며, 자기가 누군지 조차 분간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 옛 말에 대중의 입은 금도 녹인다고 한다. 그만큼 여론의 힘이란 나약한 한 사람 쯤은干部,接管了??,就下令不准斗破鞋。理由是不?政策。但到了?民共建?期,又下令?可以斗破鞋。이 당시의 ‘해진 신발짝’이란, 혹은 '해진 신발짝'으로 매도된 자들이란, 기본적인 자유라든지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리 따위는 이미 박탈당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 인류에게 부여한 권한은 이처럼 공포 정치의 통제와 억압 아래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싹을 틔우지도 못했고,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편 앞서 언급한 이 시대의 위선적인 도덕규범들은, 인간이 본래 누려야 할 것들을 밀어내고 독하게 빨아들인 양분들이 과잉됐던 탓인지, 일반 민중의 본능과 욕망을 내리누르다 못해 지하로 침잠시켜 버릴 듯 했던 것이다.이런 규범들의 내리 누름은 민중들의 영혼을 학대하고 오염시켰으며, 그들을 점점 더 결핍적인 존재로, 그리고 각박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더욱이 군중을 대상으로 한 계급투쟁적 사상교육에 있어서는 장기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고, 문혁시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억눌린 분노는 푝력성으로 진화돼 그야말로 전에 없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가 됐다. 의지할 곳 없는 연약한 개인에 불과한 천칭양이 대중의 폭력적이고도 정치적인 모욕과 규탄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이처럼 시대적 상황과 현상들과 맞물려 돌아가는 문제였던 것이다.부대에선 우리 보고 선전대 활동을 따라다니라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 우리 둘은 인민내부의 모순이기 때문에, 즉 죄악이 분명하게 판별되지 않아서, 정책을 주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또 말하길, 혹여 군중들이 분노에 휩싸여 우리를 규탄하라고 요구하면, 재빨리 대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군중들은 우리를 보자 바로 분노했다.?里叫我??宣??活?,是??交待的:我??是人民?部矛盾,?就是罪?不彰,要注意政策。但是又?,假如群??怒了,要求斗我?,那就要?活掌握。?果群??了我?就?怒。따라서 《황금시대》라는 작품을 해석하는 데, 천칭양과 ‘해진 신발짝’의 함의와 확장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 그녀를 '해진 신발짝'으로 지칭하고 있는 군중들의 심리 밑바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이 어쩌다가 너무도 황량한 이 땅에 흘러들어 왔으며, 또 어쩌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진 신발짝’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믿기 어려웠다. 그리고는 결국 정말로 ‘해진 신발짝’이 하는 짓을 해버렸다.???相信自己?莫名其妙地?到??荒凉的地方,又无端地被人?做破鞋,然后就?的?起了破鞋。소의 고환을 으깨 거세시키는 생산대장의 눈에, 지식청년은 소와 마찬가지로 일을 하는 동물과도 같은 존재이므로 ‘죄악’의 문제를 논하는 도덕적 욕망 따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장은 이렇게 호통치곤 했다.이런 소새끼 같은 놈들, 너희도 그 놈의 물건을 박살내줘야 정신을 차리지.??些生牛蛋子,就欠?上一槌才能老?우리 모두가 알다시피(도대체 이 것이 '안다, 모른다'의 문제조차 되는지 모르겠지만) 왕얼은 사람이지, 결코 소가 아니다. 정상적인 생리적 욕구를 가진 청춘의 그에게 있어서, 그의 생식기는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귀하고 중함을 벗어나 그것은 곧 그 자신의 존재와도 같은 것이다.아열대 지역의 건기에는 태양빛이 내 온 몸을 벌겋도록 내리쬐어, 간지러우면서도 따끔따끔한 느낌이 참기 힘들 지경이었다. 나의 귀여운 돌부처도 탱탱하게 곧추 서서 하늘을 똑바로 가리키는데, 전에는 본적 없는 길이로 뻗어 있었다. 바로 이것이 내 생일날의 모습이었다.???旱季的?光把我?得?身赤?,痛痒??,我的小和?直??地指向天空,尺寸空前。?就是我?生日?的情形。억압에 짓눌린 생명체는 결국 거침없이 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 하기 마련이다. 왕얼이 천칭양에게 성관계를 제안한 것은 물론 욕망적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따지고 보니 그 행위가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그녀를 '해진 신발짝'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이득까지 안겨 주는 게 아닌가. '성(性)'을 죄악시 하던 시대에 천칭양과 왕얼의 '부적절한' 관계는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해진 신발짝'임을 대중 앞에 선포하고 공언하는 것과 다름 없었지만, 그녀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고 마음을 열고나자, 마치 무슨 결심을 내린 듯이 돌진하듯 왕얼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규탄대회 이후, 번번히 그녀의 성욕은 어김없이 폭발했고, 또한 어김없이 그녀가 먼저 '위대한 우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으며, 심지어 항상 왕얼이 진술서를 작성하는 그 책상위에서 했다.그녀는 그 책상 위에서 마치 코알라 마냥, 물결이 일어나는 듯한 쾌감에 참을 수 없다는 듯 자주 탄성을 뱉어내곤 했다.?在那??子上像考拉那?,快感如潮,?常禁不住喊出?。食色性也. 이 점에 대해서는 도덕군자의 전형인 공자도 다 인정한 바 있다. 성적 욕망은 인류의 원초적 욕구다. 다른 누군가의 방해가 없다는 전제 아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정상적인 성관계을 즐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박탈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별개의 것이 아니 것이다.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는 전통적인 도덕관념과 권위주의적 체제의 이중 압력의 포악성 밑에서.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그 원초적 행위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박탈 당했다. 천칭양이든 왕얼이든, 그들 모두는 육체와 영혼에 가해지는 이중의 폭압을 견뎠다.천칭양은 '해진 신발짝'이라는 꼬리표를 끝까지 질질 끌고 다니면서, 정신이 마비되고 온갖 비정상적 심리 상태에 취한 대중들에게 온갖 지탄과 모욕적인 대우를 받아낸다.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단상에 올려져서는, 너덜해진 '해진 신발짝'을 목에 건 그녀는, 자유와 존엄과 인권을 무정하게 유린당한다. 그러나 천칭양은 모든 것에 개의치 않게 되며, 그저 있는 힘껏, 온 마음을 다해, 그 육체적 광란의 욕정을 체험하고자 했을 뿐이다. 어쨌든, 그 지점은 분명 그녀의 '황금시대'인 것이다.5. 부단히 고독한 "破鞋"일부 평론에 따르면, 왕얼과 천칭양의 미칠 듯한 환희의 절정 이른 성행위를 통치 권력의 기제, 즉 헤게모니에 대한 반항을 완성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정황들에서 천칭양은 성관계가 진행되는 것이다.
《삶과 철학》논술과제3군인은 잠재적 살인자인가?처음엔 ‘죽음’을 삶의 가치와 더불어 논하고 싶었다. 죽음에 대해 심히 시니컬했고 건방지기만 했던 나는, ‘지금 당장 죽는대도 별 미련 없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친구들에게 과시하기도 했다. 한 번도 죽음의 공포 앞에 적나라하게 놓여본 적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다 친구와 함께 무전여행을 하던 중,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 끝에 찾아온 안도감을 맛 봤다. 그리고 다시는 삶과 죽음 앞에서 건방을 떨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공포는 진정 무엇에 대한 공포였으며, 삶과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개요를 잡아나가던 중, 수업시간 어느 발제자의 발표를 듣고 이 주제와 개요를 뒤집었다.지난 수업에서 한 발제자는 ‘전쟁에서의 살인은 왜 도덕적 판단에서 면죄부를 얻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 내용의 기저엔 ‘전쟁의 목적은(혹은 목적 중 하나는) 무고한 다수를 죽이는 것’이라는 걸 깔고 있다. 어머니가 군인 출신이고, 나 역시 해군장교 지원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뭔지 모를 억울함과 불만이 들었다.1. 살인자의 길을 택한 것인가?나는 자원입대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아마 젊은 시절 3년간 직업군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혹은 남자 애들이 하는 건, 서서 오줌 싸는 것조차 ‘나도 할 수 있노라’고 오기를 부렸던 초등학교 시절부터의 고집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런 생각들은 직업군인이 되겠다는 생각과는 꽤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죽음의 공포’를 체험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진로고민을 하면서 많은 생각이 뒤집어 졌다. ‘뭐 해 먹고 살 것인가?’를 걱정하기에 앞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는 당연한 과제를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생각을 거듭할수록, 지금껏 집착해왔던 삶의 목표들이 새삼 치졸하고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자본의 논리’에 잠식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논리의 전개를 방해하므로 ‘돈’에 덕목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으로써의 희생과 헌신을 의미한다. ‘도덕적 욕구’란 것이 이 과정에서 크게 표출된 셈이고, 나는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미래상으로 군인을 선택했다.위와 같은 나의 진로 결정 과정이 ‘무고한 다수를 죽이는 계획’과는 모순적이지 않은가. ‘나의 목숨을 걸고 인류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결심이 ‘직업적 의무를 이용해 무자비한 살인을 불사’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내게 놓인 ‘전쟁과 윤리’라는 문제에 대해 고찰로 대신하기로 한다.2. 모든 전쟁은 비도덕적인가? - ‘정의로운 전쟁’군인은 ‘왜 싸우려 하나, 왜 싸워야 하나?’에 대한 물음부터 던져봤다. 수업에서의 발제자는 “모든 무력의 사용은 악이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무력’이라는 말이 주는 폭력적 이미지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세상에는 선을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악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무력의 사용은 ‘악’이라는 등식은 불가능 하다. 물론 이 주장에는 국가와 그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싸우는 군인들이 무력을 사용할 때 용인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대답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정의로운 전쟁(도덕적으로 선한 전쟁)’에 대한 고찰이 선행 돼야 할 것 같다.「전쟁과 평화의 윤리」(철학과 현실사, 2006)에서 저자 더글라스 P. 래키는 국제 관계에선 각 문화의 고유한 도덕관이 상대적으로 적용되므로, 전쟁에 대해 도덕과 윤리를 논하는 것은 소모적이라는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반론을 제시한다. 가령 ‘고문, 핵무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악하고 야만적이라 욕할 상황과 그에 따른 보편적 판단이 존재하므로,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의 윤리적 책임의 회피는 부당하다고 설명한다. 그가 제시한 근거에서 핵심은 ‘많은 사람들’이다. 즉, 칸트가 세운 도덕의 보편성 원칙을 전쟁에도 적용한 셈이다. 즉, 이 도덕의 보편성 원칙은 도덕적으로 허용도덕적으로 제제를 가할 우선적 대상은 정책결정자다.허용할 수 있는 전쟁이란, 자기 방어적 전쟁을 의미한다. 즉, 직접적 침략이 자행됐을 때 이에 대한 방어로써 무력을 사용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력이 아닌 다른 해결 방안도 찾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므로 ‘의무’와는 구별되는 ‘허용’하는 전쟁이 된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축소해서 생각해보면 ‘정당방위’로써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을 하게 될 경우 법적으로(도덕적으로도) 무죄, 또는 정상참작이 이뤄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기방어라는 이유가 주어 졌다 해도, 무력이 아닌 다른 대응책을 분노나 적개심의 감정, 혹은 개인이나 집단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고의적으로 무시했다면 이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면키 힘들다. 또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악’이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악’보다 더 많다면 이 역시 허용되기 힘들다. 또 정의로운 전쟁의 결과물로써 정의로운 평화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3. 어떻게 싸울 것인가?전쟁의 시작이 도덕적 명분을 얻었다고 해도 그 전투의 과정과 방법이 비도덕적이었다면 그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마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재고 역시 중요하다. 때문에 국제 협정은 전시 법규들을 정해놓고 있는데, 그 수많은 법규들이 전제하고 있는 기본 원리를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첫째, 필요성의 원리로, 생명과 재산의 파괴는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따라서 공격의 목적 이외의 파괴는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군사적 균형원리다. 어떤 목적이 지나친 파괴를 가져올 경우 목적자체가 배제돼야 한다. 셋째, 비전투원 보호 원리로 차별의 원리라고도 한다. 이에 따라 일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은 군사력 사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그러나 협정의 결과물이란 으레 ‘합의’에 의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합의’가 꼭 도덕적 측면을 완전하게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은 협정 당사자들의 관심 밖일 것이다. 그러면 이는 단지 코너와 다름없는 충돌이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운전자끼리, 혹은 교통법규 상으로 ‘우측통행만 하자’고 ‘합의’를 봤다고 하자. 이 경우 만약 실수로 좌측통행을 한 사람은 법적으로 위반을 했을이언정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협약’이라는 ‘합의’의 결과물만으로 전투 규칙이 지켜지리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그런데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약속’이라는 측면이다. 즉, ‘합의’라는 것 자체는 도덕적 책임을 벗는다 해도 그 합의로써 이행하는 ‘약속’은 도덕적 구속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의 맹점은 협약에 서명하지 않은 나라에게 어떤 도덕적 구속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론대로라면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됐는데, 양측 모두 ‘양민을 포로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법규를 똑같이 위반했다. 그런데 한 나라는 이 협약을 비준했고, 한 나라는 거부했다면, 전자는 도덕적 비난을 받고, 후자의 행위는 용인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여기에 공리주의적 접근을 시도한다면 보다 넓은 도덕적 구속력을 적용할 수 있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쪽을 택한다는 논리를 근거로, 더 적은 손실을 택한다는 소극적 공리주의 입장을 취해보자. 앞서 제시한 정의로운 전쟁의 요건으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선과 악의 문제가 공리주의적 차원의 판단 범주로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대전제의 틀 속에서 전쟁의 규칙 역시 이 도덕적 논리를 따라야 한다. 즉 선한 것을 파괴하는 a모든 행위는 그르다는 공리주의적 개념에 근거해 도덕적 근거를 얻을 수 있다.그러나 공리주의와 의무론은 역시나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앞서 말한 비전투원 보호의 원칙에서 보면, 민간인 1명을 죽이는 ‘악’을 낳는 전략과 적군 1천명을 죽이는 ‘악’을 낳는 전략 사이에서 양자택일만이 가능하다면 ‘정의로운 전쟁’은 전자를 택할 수 없다. 즉, ‘악’이 적은 것을 택한다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전쟁에 있어서가졌는가의 우열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측면과, 작전 사령관이나 전투 지휘관은 오늘날의 전쟁에서 전투 현장에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전투원 보호의 원칙은 사실상 기준으로써의 입지가 약화된 듯하다.4. 군인의 도덕적 딜레마의 해결은?처음의 대(大)질문, ‘군인은 잠재적 살인자인가?’에 대한 답은 희미하게나마 구해졌다. 궁극적으로 군인은 도덕적 기준에 위배되는 살인을 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전쟁 ? 군대 ? 군인’ 자체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 ? 집단 ? 개인’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입장이고, 현실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무자비하게 벌어지는 전쟁과, 비도덕적 명령자를 포함한 군대와, 절대복종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군인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어쩌면, 앞에 세운 대질문은 이런 현실적 딜레마의 저 아래 놓여있는 소소한 의문, 심지어 호기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켄 부스(Ken Booth)는 “자유 사회는 군에 의해서 위협 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군에 의해서 보호돼 온 것”이라고 말했단다. 전쟁이 갖는 딜레마 그 자체일 것이다. 군에 의해 보호 받는 ‘선’은 도덕적이기 어렵고, 군의 보호가 없는 ‘선’은 깨어지기 쉬운 것이 우리 사회일 것이다. 본문에서 군대의 가장 주요한 임무인 - 빈도나 양적인 측면이 아니라 사안의 중대성에 있어서 - 전쟁에 철학적, 도덕적 원칙들을 적용해봤다면, 잠시 군 입대를 신청한 예비 군인으로서, 개인적 문제로 돌아가 봐야겠다. 상급자로부터 비도덕적 명령을 받았을 때 어떻게 행위 해야 할 것인가? 또 그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군인으로써 복종해야 할 원칙과 인간이기에 복종해야 하는 원칙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참여자인 병사에게는 절대적 복종이 강요된다. 대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명령을 내린 상관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