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빅제프 헤이든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온라인 매거진 Inc.com의 인기 칼럼니스트이자, 링크드인에서 팔로우가 가장 많은 인플루언서. 온라인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그의 글을 과학과 감성,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교차하기로 이름나 있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목표 달성에는 영적인 각성도, 어느날 갑자기 번개처럼 떨어지는 영감도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명료하고 반복적인 루틴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밝혀 사람들이 각자의 꿈을 이루고 더 나은 삶을 향하도록 돕는 데 앞장서 왔다.처음엔 제목에 반어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직역하면 “작은 큼”이니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왜 작가가 “스몰 빅”이라 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스몰을 “소형”으로 해석하면 “소형 빅”이 된다. “빅”을 단지 크다는 개념 외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성공으로 대체한다면, “언제든 주머니에 넣고 꺼내 볼 수 있는 성공”쯤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즉, 크고 작은 성공을 더욱 쉽게, 자주 맛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동기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놀랍게도 동기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행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 한 걸음을 옮기면 동기가 생기고 그 동기가 다른 동기를 일으켜 무언가를 성취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를 성취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또한 중요한 목적이다. 혹여나 성취에 실패한다 해도 얻는 것이 있다. 그러나 결과에만 집중한다면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보화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작은 성취, 곧 “스몰 빅”일 것이다.어찌됐든 목표는 중요하다. 내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이정표, 그리고 작은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살을 빼기위해 헬스를 배운 적이 있다. 처음 시작할 때 그저 커진 몸을 슬림하게 하고 싶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설레임이 있었다. 체육관에 등록하고 막상 운동이 시작됐을 땐 트레이너가 설정해 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했다. 집에 돌아와선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데 집중했다. 분명 운동을 시작하기 전 처음 목표는 살을 빼고, 멋있는 몸을 갖는 것이었지만 운동을 시작했을 땐 작고, 쉽게 달성 가능한 목표들로 세분화되었다. 점점 몸이 변화하는게 보이고, 예전엔 입지 못했던 옷들이 넉넉해지기 시작하자 새로운 동기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목표를 세우고, 더 많은 성취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헬스 트레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운동이 끝났을 때 멋있는 몸은 덤으로 얻었다.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목표 성취와 동기의 관계에 대해 막연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저 멋있는 몸을 갖고 싶었고, 헬스를 등록했고,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 결과를 성취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겼던 새로운 목표들과 보태지는 동기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편협된 생각을 넓혀 주었다.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분명한 동기가 있어야만 목표를 향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표를 이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며 목표의 성취만이 유일한 기쁨이 아니란 것을 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결연한 마음을 갖고,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열정이 열매를 맺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결과는 요원해지고, 과정은 느슨해진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은 너무나 험난하고, 고되다는 편견을 갖게 되고, 결과를 더욱 손쉽게 얻기 위해 지름길을 찾는 일이 반복된다. 과정을 버텨내기 위한 관건은 시간이다. 그 지루한 시간들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좀 더 빠른 길은 없나 기웃거리며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우직하게 수도승처럼 버틸 것인가? 그 지루함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목표를 향한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성취를 얻는 것밖에 없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목표를 성취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 과정을 겪었다.목표를 성취한다는 것,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내 삶을 사랑하고, 나의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다. 단지 어떤 목표를 이루는 것만을 나의 목표로 삼는 것은 맹목적이다. 그것은 상장이나 칭찬을 받을 땐 기분좋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것과 같다. 목표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로 이어져야 한다. 즉, 나의 가족, 친구, 건강, 경제력, 가슴설레는 꿈이라는 지지대 말이다. 목표를 이루는 것은 내 삶의 많은 부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빚이 많은데, 돈이 많이 드는 목표를 가질 순 없으며 또 건강이 좋지 않은데, 심한 체력 소모가 필요한 무분별한 목표도 가질 순 없다. 그러나 설정한 목표가 내 삶을 떠받치는 기본적인 토대를 더욱 강화하고 풍요롭게 한다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기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그렇다면 이젠 실천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는가? 나는 훌륭한 지식을 얻었지만, 솔직히 그 후로도 오래동안 제자리 걸음만 하고있다. 지식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너무나도 자주 겪어왔다. 왜 지식이 있는데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지식을 정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고대 헬라인들은 지식을 철학적인 개념, 즉 많은 부분을 생각에 한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지식을 행동과 연결시켜 생각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어떤 지식을 배웠는데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잘 못 이해했거나, 여전히 모르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이 살고있는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는 동적인 여러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에만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지식이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지식의 한 면은 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한 면은 그것을 실제 적용해 보는 것이다. 그럴때 비로소 지식은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식을 대하는 태도가 헬라인과 같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책들을 읽어서 지식을 쌓았지만 그것과 비례해 나의 삶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지식을 배우는 건 좋아하지만 실천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알았다. 몸은 그대로인데 머리만 커지는 거랄까? 아는게 많아서 말은 많아지는데, 여전히 행동은 유치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진짜 지혜로워지고, 변화하고 싶다면 알고있는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그러나 실천은 타성에 젖은 삶에 여러가지 변화를 요구한다. 내가 좋아하거나 유지하고 싶은 행동이나 생각마저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어려워 실천에 옮기지 않지만 나는 책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책은 행동하기 위해 읽어야 한다. 진정한 변화와 기회는 여기에서 갈라진다. 이 독후감을 읽어보면 바로 윗 문단까지는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 갑자기 자성모드로 논조가 바뀌는 것 같다. 얼핏보면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고백은 내 자신을 위한 쓴소리요, 앞으로도 유익한 독서를 위한 큰 전제이기 때문에 반성하는 의미로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스몰 빅”의 저자가 어느 분야에서 최고의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했던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이 그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칠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흉내 내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왜 최고의 프로들이 그렇게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가보지 못한 곳을 경험하기 위해선 몸소 뛰어드는 방법밖엔 없다. 위험한 정글을 탐험하는 것과 정글에 대해서 지식으로만 아는 것엔 분명 큰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나의 “스몰 빅”은 낯설고 불편한 경험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동기와 기회가 되어 내게 돌아올 것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 지음저자는 1934년 스위스 툰에서 출생했다. 제네바대학 교수와 같은 대학 부속 제3세계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강의했고,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의원(사회당)을 지냈다. 실증적인 사회학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인도적인 관점에서 빈곤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한 글을 의욕적으로 발표하는 저명한 기아문제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불쾌한 진실을 주저 없이 도마 위에 올리는 작가로도 유명하다.진정한 문제는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 데 있다. 내가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이다. 처음엔 어떻게 저자와 같이 헌신적으로 남을 위해 살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물론 그 질문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책을 읽어가며 더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책 제목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지만 나는 그 부제로 “왜 세계의 절반은 문제를 외면하는가?’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철없던 어린시절 어느 추운 날 나는 한 호빵기계 앞에 서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옷 차림이 남루한 두 형제가 그 기계에서 호빵을 꺼냈다. 그 빵은 언뜻 보기에도 기계안에 너무 오래 있어 상품성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형제들은 그것을 너무나도 맛있게 나눠 먹었다. 그때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졌는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너무나도 측은하게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동정심이 전부였다. 나는 그 형제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끔 티비에 나와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며 수많은 파리가 몸에 들러붙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눈으로 우리를 보는것만 같은 아프리카의 아이들. 우리는 그들을 안타까워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가 나눠먹을 수 있는 충분한 곡식이 있어도 그들에게 곡식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나가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지구상에 쓸모없는 하등한 인류는 죽음으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들도 있다. 누가 필요한 인간과 쓸데없는 인간을 나눠 놨는가? 그 기준을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가? 나 역시 나만의 바운더리 안에서 그런 기준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진 않았는가?인간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많은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맨몸으로 이 땅에 생존하기 위해 던져졌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많은 걸 누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갈망하고 조금도 뺏기고 싶어하지 않는 걸 보면 그 믿음은 거의 병적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걸 누리면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까? 책 속엔 아무리 한 나라의 정책이 인본주의적이고, 철저히 국민을 위한 것이라 해도 이해관계에서 어긋나면 가차없이 무시당하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진정한 인본주의는 자본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신성한 영역이어서 자신이 침해당할 경우 인간의 생명까지도 요구하는 무서운 영역이다. 일례로 힘없는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은 나약하여 강대국의 원조없이는 스스로 독립할 수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지.정.의를 가진 인간이며 똑같이 행복과 자율을 추구한다. 그들에게 독립의 의지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독립시키고 싶지않은 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떤 나라나 회사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의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독립을 꿈꾼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통치 속에선 비정상적인 상황만이 진실이 된다. 권력에 빌붙은 군부세력이 왕 노릇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부금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흘러갈 것이라 생각하지만 엉뚱한 사람들의 배만 부르게 할 뿐이다.이런 상황에서 정말 희망이 있을까? 나는 왜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이 나와 똑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부와 양식을 쌓고있는데, 남반구의 사람들은 부조리속에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가깝게는 우리와 한 핏줄인 북한은 또 어떤가. 그들도 저 아프리카의 참혹한 현실 못지 않다. 왜 그들과 내가 누리는 권리가 달라야만 하는가? 하지만 이제 북반구와 남반구를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다. 세계의 모든 가치가 자본 논리의 경제법칙을 신봉하기에 많은 불합리와 갈등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인권이라는 최고의 가치도 자본논리 앞에 무기력할 뿐이다.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믿어왔던 가치가 여지없이 무너졌고, 그 어디에도 해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 나온 해가 2007년이다. 이 책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폐해가 여지없이 공개됐고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지만 지금 우리는 얼마나 변했을까?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보아도 여전히 해답은 요원해 보인다. 자본주의와 정치적 이념을 앞세워 약자들을 보듬지 못하는 모습은 꼭 우리를 이렇게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생이 장난이야? 살기위해서 발버둥쳐야 하고, 내가 타야할 배를 신중하게 골라야해, 그렇지 않으면 다 끝장이야.” 먼 나라는 고사하고 이웃 북한의 사정마저 돌아볼 여유가 없다. 꼭 강건너 불 구경 하듯이 스쳐지나가는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삭막한 삶을 버티기에도 버거운 우리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나는 인간의 소중함을 믿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치를 위해 눈에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인간을 무시할 때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광기로 치닫는지 우리는 충분히 보지 않았는가? 인간이 인간을 무시하면 모든 도덕률이 코메디가 되어버리지만 인간이 인간을 소중히 여길 때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눈물과 원망보다 감사와 웃음을 더 많이 보며 살아야 한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에 육체의 배부름으로만 살 수 없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에 다른 이의 상처와 기쁨이 그대로 전달된다. 물론 양심이 마비되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도 있겠지만 왜 우리가 다른 이의 행복과 슬픔에 쉽게 이입되는지 생각해보라. 부정적 영향력이 쉽게 전이되는 만큼 긍정적 영향력도 쉽게 전이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인간의 소중함을 소리쳐야 한다. 삭막한 삶에 묻혀 나하나도 살기 힘들다고 불평만 늘어놓는 대신 누리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고, 작은 일일지라도 주변을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기적인 힘보다 배려하는 힘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자본 논리에 빠져있는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그 힘이 확장되어 남한은 북한을 생각하고, 유럽은 아프리카 대륙을 생각하며 북미는 남미를 생각해야 한다. 작은 날개짓이 커다란 태풍을 만들 듯 우리부터 각자의 자리에서 날개짓을 시작해야 한다. 어떤 기구를 만들어 국민적 혹은 국가적인 연대를 이룰수도 있지만 인류애의 정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UN도 하지못한 일을 소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경이로워 우리가 보듬는 순간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솟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일례는 수없이 많다. 작고, 약해보이지만 삼삼오오 모여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시작하고, 작은 마을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행하며, 한 사람의 희생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볼 때 이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가까이에선 분단의 땅으로부터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까지 온 지구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사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주변에선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랑으로 연대하라고 말이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김범석 지음서울대 암 병원 18년차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가 만난 암환자와 그 곁의 사람들, 의사로서의 솔직한 속내를 담은 에세이. 이 책은 그렇게 얻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 저자가 틈틈이 남겨온 기록이다.죽음은 언제나 멀리 있어 보이지만 언제나 가까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죽음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실인 듯 애써 잊고 살아보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다시 생각해야만 할 때 그 죽음이 곧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을 깨닫는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후 다시 삶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 온전히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과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가? 그 죽음은 고통스러울까, 평안할까? 이 세상과 연결된 내가 죽음으로 단절된다면 나는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사후세계가 존재할까?”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내 영혼이 죽음의 블랙홀에 빨려드는것만 같아 곧 멈추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미래의 어느때에 죽음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때로 미뤄진다.항상 이런 죽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에게 뭔가 시원한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이 책을 펼쳐본 이유였다. 책 속엔 여러 명의 시한부 환자들이 나온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 그 환자들이 겪고 있는 감정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그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몇일동안 이유없이 아팠고, 그 증상에 대해 알아보던 중 내가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곧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를 짖누르는 것을 느꼈다. 특히 아래 단전에 힘이 풀리면서 인생 중 가장 무기력함을 경험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경험은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한없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동정심,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사실 나는 이렇게 힘 없는, 불쌍한 존재였는데 무언가에 씌어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처럼. 큰 질병이 아니라 그저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날의 경험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착각했지만 임박한 죽음을 기다리는 저 환자들은 그 사실이 실재이고, 하루하루 몸과 마음을 통해 생생하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하고 있을까? 문득 전에 읽었던 호스피스 병동에 관한 책이 생각났다. 죽음의 징후가 임박하여 온 환자들이라 다양한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정하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 그로 인해 분노하는 단계, 결국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로 진행된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결국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다만 시간과 방법의 차이만 있음을 알게됐다. 그래도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은 적어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도 허락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닥뜨린다. 이를통해 연약한 인간은 죽음의 방법도, 그 시간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말 그대로 나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인생의 한쪽 면에선 인생을 즐기라고, 인생을 다스리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다른 면은 죽음은 예고없이 다가온다고, 죽음이 찾아왔을 땐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 외엔 아무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모순적인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누구에게나 죽음은 곧 현실이 된다는 것, 죽음이 오면 거절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만 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허황된 망상을 갖기보단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통해 뭔가 지혜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죽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게 한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기는 시간이랄까. 그리고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한 기회의 시간이 멈추었음을 자각하는 시간이다. 보통 죽음 전에 이렇게 깊이 돌아보는 사람들은 비교적 평안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들의 고백속엔 동화처럼 ‘누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성급하고 무책임해 보이는 마침표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삶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많이 쓰긴하지만 죽음을 앞둔 자들의 고백엔 그보다 훨씬 무겁고 엄중한 경고와 후회가 섞여있다. “어떻게 살아도 삶의 마지막엔 후회가 남을거야. 그 후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 싶다면 네게 허락된 시간을 우습게 여기지마. 삶은 신이 주신 기회야. 그것을 가볍게 여긴다면 너의 마지막은 지극히 초라할거야.” 내겐 이렇게 들려왔다. 그들의 죽음에서 나의 삶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내 삶에 여백과 무의미하게 버려진 공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살아왔던 나의 삶이 내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삶의 의미는 죽음으로부터 얻어지는 역설이 있다. 즉, 죽음을 곁에 두지 않으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난 그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모든 사람을 변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떤 환자는 죽음이 임박하고, 일을 핑계로 방임했던 가족들이 허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여전히 일에 매달리는 걸 보면서 나는 당황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죽음이 곧 세상과 가족들을 영원히 분리시키려 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노트북을 열 수 있을까? 이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왜 그렇게 일에 붙들려 살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죽음의 절벽앞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던 모습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세계였고, 공간이었다. 그 좁은 곳에 죽음으로 인한 유한한 인생을 돌볼 여지는 없었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 사람에겐 그 순간이 남들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다른 환자는 자신의 피붙이 동생과 금전적인 관계로 오랜시간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은 멀어져버린 동생마저도 다시 곁으로 불러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동안 형을 볼 낯짝이 없었던 동생도 한 걸음에 달려왔던 것 같다. 그러나 형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나를 다시 당황하게 했다. “너 내 돈 갚아라.”한푼도 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려는 자가 여전히 돈을 생각하고 있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책을 보며 내 자신과 타인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서로 모습은 달라도, 인간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죽음 앞에선 인류애가 발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류애마저도 사치가 되어버리는 너무 좁은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는 걸 알게됐다. 그 안타까운 모습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얼마전 서울 한복판에서 150명이 넘는 젋은이들이 압사로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들 중 어느 누가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그리 허망하게 삶을 마감할거라고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비록 죽음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들과 모습은 조금 다를지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미리 예고하지 않으며, 희로애락을 거쳐 인생이라는 탑을 쌓아올린 한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허망하다는 사실 말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죽음은 떼어내고 싶은 인류의 끈질긴 질병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소망은 줄 수 있다. 우리도 곧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지금의 생각과 행동의 가치가 얼마짜리인지 계산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를 때지은이: 전승환읽은기간 : 2021/1/20-27지은이 전승환은 좋은 글귀로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북 테라피스트이자 세 권의 에세이를 쓴 작가이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 채널을 운영하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을 진행하며 매주 150만명이 넘는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글과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삶은 언제나 물음표 투성이다. 그 물음은 어른이 된다고 자연히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물음은 더욱 깊어지고 다양해진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기에 늘 서투르게 나이들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혹여나 누군가의 삶을 보며 모델을 삼아보려 하지만 그들역시 온전한 답을 내렸다는 증거는 없다. 사실 속내를 알고 보면 불안한건 누구나 다를 바 없다. 삶의 모든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진리, 그 진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인류역사 내내 진리를 찾기 위한 투쟁은 계속 이어져왔고,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심지어 같은 신을 믿는다는 종교 내에서조차 진리의 증언들은 엇갈리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저자는 인정하기와 사랑하기로 그 돌파구를 찾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어떤 자유함을 느꼈던 것 같다. 꼭 어느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리고 있었는데, 이미 그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인정한다는 것은 나를 찾기위해 어딘가로 떠나는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확실하지 않아 늘 불안해하고, 잠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지만 작은 것에 감동하고, 안도하고, 다시 일어서는 독특한 존재, 그것이 나이고 그런 나는 이상할 게 전혀없는 정상인이었다. 그리고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건 미래에 대한 소망인데, 그것은 사랑을 동반한다. 사랑 혹은 사랑의 관계없이 소망은 아무 의미없다. 내가 어떤한 소망을 꿈꿀지라도, 그것은 항상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할 사람, 그리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내 자신을 인정하는 것과 그런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의미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나는 책을 읽기 전 나름대로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돈과같은 물질이 풍족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겠지만 진정한 행복을 이루기엔 분명한 한계가 느껴졌다. 먼저는 풍족한 사람들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었고, 또 직감적으로 내 안에서 갈망하는 행복은 그런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곳에서부터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내가 내린 답은 행복해지기로 결단하는 것이었다. 어느누구도 내게 불행해지라고, 우울해지라고, 부정적인 감정을 달고 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한 일이었다. 물론 환경의 원인도 있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알게되었다. 나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나 생각을 맞닥뜨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했다.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감정을 통제하며 지금까지의 습관대로 반응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외부의 원인 때문에 내부의 감정을 결과로 받아들였다면 이젠 내부의 통제적인 원인으로 인해 외부의 상황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나만의 명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든 나만의 문구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거부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해석하라‘ 였다. 나는 이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 상황에 이 문구를 들이대며 부정적인 감정이나 해석을 멀리했다. 이것은 내게 큰 효과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문구에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구의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마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부정적이며 긍정적이라는 것 자체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우연이 만나게 되었고, 이 모호한 정의를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부정적이라 함은 내가 불완전하기에 느낄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상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관계의 어려움, 일관성이 없는 성격, 가끔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분노...두려워하며 외로워하지만 잘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남들과 계속 비교하게 되는 불완전한 나이기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들 말이다. 가끔은 옳은 감정과 생각같지만 마음과 같지 않게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먼저 이런 모습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진정한 나라고 결론 지어선 안된다. 여기서 행복한 삶을 위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저 현재를 부정하고, 억지로 좋은 감정을 끌어내 봤자, 그 효과는 잠시뿐이다. 저자의 글을 힘입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먼저는 부족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저 사랑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남들과 비교해도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지만 나라는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면 그래도 나만이 갖고 있는 좋은 모습들이 있다. 적어도 우주에 나라는 존재는 내가 유일하며 그 유일한 존재가 살아간다는 건, 나만이 낼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남들과 비교하며 내게 없는 것들에 집중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남들이 갖고 있지 못하는, 그것이 남들에게 관심받지 못할지라도 나를 나답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그 모습들에 집중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존재 자체로 만족스럽고, 사랑받을만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정의하는 몇가지 해석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사랑을 ’ 상대가 나보다 더 나은 점을 높여주고, 그들의 모습이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존재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 으로 정의한다. 내 주변에 부모님을 포함해 아픈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그들의 탄식이 언제나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뀐 뒤에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탄식하지만 더 나은 삶, 더 건강한 삶을 꿈꾸며 자신과 같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는 그들의 질긴 생명력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
적당히 가까운 사이지은이: 댄싱스네일읽은기간: 2021/2/28-3/1지은이는 홍익대학교에서 디지털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디자이너 체질은 아님을 확신, 그 후 그림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명지대학교 미래교육원에서 미술심리상담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담센터에서 미술치료사로 일하면서 나부터 돌봐야 함을 깨닫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매일 그리고 쓰는 자가 치유를 생활화하고 있다.적당히 가까운 사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생각도 많고, 감수성도 풍부한 편이다. 어쩌면 예민한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는게 좋으면서도 늘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느때는 세상편하게 웃고 지내다가도 어느때는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 한마디에 세상 어려워지기도 한다. 마음을 다 내어주자니 내 패를 다 보여주는 것 같고, 적당히 사귀자니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예민한걸까? 아님 아직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걸까? 이 책을 보며 이런 고민을 하는게 나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위로받기도 싫었다. 그동안 받았던 어설픈 위로들은 마음만 들뜨게 해놓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번엔 다를 수 있을까? 나는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이 책을 펼쳤다.저자는 살아가며 맺는 모든 관계가 불확실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완벽한 관계를 꿈구지만 그런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많은 오해와 다툼이 생기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유기적이지만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삶이 오히려 다채로워 지는 걸 알게된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속에 내어던져진 나를 관계속에서 건강하게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무엇보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너무나도 변덕스러운 존재이다. 상황에 따라, 이익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법과 도덕, 양심과 유익에 따라 살아가고 있기에 언제나 사적으로만 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사람은 믿지 말되, 관계를 믿으라고 말한다. 사회적 위치로부터 부여받은 관계에 집중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 관계는 사적인 영역을 넘어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공적으로 연결되어있기에 마음가는 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는 제약이 있다. 이런 제약이 사적인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 제약이 나와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적인 관계라 하여 사적인 부분이 완전히 무시될 순 없겠지만, 아무런 틀 없이 사적인 감정과 생각으로만 관계를 맺는 것보단 훨씬 안정적일 수 있다.내가 어렸을 때 나보다 더 씩씩했던 누나는 언제나 심적으로 약한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었다. 그때 누나는 '너가 일할때 어떤 상사를 만나든, 결혼해서 어떤 장인, 장모를 만나던 상황에 따라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관계속에서 너가 해야 할 일만 똑바르게 처신해, 실수하는 일이 생길수도 있지만, 그것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라고 크게 말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거야, 어떤 상황에도 기죽을 필요 없어.' 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때는 그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다 공감이 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고, 저자의 책을 읽다보니 이젠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것같았다.저자는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생각하는 방법으로 이어서 관계 미니멀리즘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는 정리하라는 것이다. 그럼 그동안 도움이 되지도 않으면서 계속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건 왜 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을수도 있고, 나보단 상대방의 기분만을 맞추려고 했던 이유일수도 있고, 아니면 맘에 들진 않지만 이 사람을 정리하면 내가 만날 다른 사람이 없다는 측은한 이유때문일수도 있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이유로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 감정적으로만 혹은 편협적으로 생각해 쉽게 결정해버리면 오히려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과 같이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정했을때, 혹 그로인해 친구가 없어진다 해도 나를 위한 올바른 결정이라 생각했다면 과감히 실행해야 한다고 생간한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의 출발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있고, 그 관계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자신이 원하는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어서 서로 관계를 맺을 때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는 게 아닌 상대가 내게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줘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상대가 싫은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만나고 오면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몸은 더 피곤해지는 관계가 있다. 저자는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요구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그렇다고 이야기 한다.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다. 나는 나보단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좋은 관계이고, 좋은 만남이며,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헤어지면 왠지 밀려드는 공허함과 피곤함은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저자의 말대로 나보단 상대방의 의견과 기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상대방에게 내게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서로가 더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 해보라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선 먼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나아가 스스로 내 삶과 자신에 대해 어떤 기준과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스스로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상대방에게 기회를 줄 순 없지않는가. 나는 그래서 저자의 글이 더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운명' 이 아닌 '선택'을 하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과 이루어진 모든 상황들이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안에서 주어졌다고 믿는다면 그 만큼 나의 결정은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주체가 내가 아닌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아닌 선택이 내 삶을 이루어 간다고 믿는다면 주체는 내가 된다. 지금까지 내 삶속에 들어온 모든 것은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스스로의 기준과 틀을 세우고, 관계의 의미를 정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삶은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통해 선택을 해 나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