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인간 리포트 2- 투모로우 감상문-지구 온난화로 인해 결국 지구의 빙하기가 다시 찾아오는 영화의 내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면서도,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는 이상기후들을 떠올리면 어쩌면 곧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기후들을 내 일이 아닌, 그저 다른 사람들 혹은 미래에 일어날 먼 이야기로만 받아들이던 나는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도 우박이 내렸다는 기사,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토네이도 등의 많은 기사들을 봤지만,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큰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흘러가듯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나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영화 속에서만 바라보던 일들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난 후, 영화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 영화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정도로 과학적이라는 글을 읽고 나서 더욱더 충격을 받았다.이미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많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고, 수많은 섬들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버리면 해수면의 상승과 더불어, 해수순환을 느리게 하거나, 멈추게 함으로 지구의 기후를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현재도 계속 증명되고 있다고 한다. 15년 겨울 한파의 직접적인 원인이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벌어진 일이었으며, 북극 주위에서 빠르게 돌며 추위가 하강하는 것을 막아주었던 제트기류가 바다 수위 증가로 속도가 느려져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혀졌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영화 내용에서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대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년 동안, 우리는 아무런 피해 없이 우리의 천연자원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틀렸습니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분노한 자연 앞에서 인류의 무력함을... 인류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대로 쓸 권한이 있다고... 허나 그건... 오만이었습니다.”입니다. 이 두 가지 대사는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사용가능하고, 인간을 위해서는 환경 파괴를 합리화하고, 당연시했던 인간들의 우월사상이 드러났던 부분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간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환경을 파괴하는 활동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환경을 파괴하고 이 환경파괴가 어떤 미래로 다가올지 예측하면서도, 계속 진행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파괴로 인해 일어난 이상기후 등 다양한 자연 재해들은 인간이 예상과는 다르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자연재해는 인간이 막을 수 없고, 피해도 인간이 복구하는데 오래 걸릴 만큼 크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 사업을 진행할 때, 환경적으로 어떤 피해가 가는지, 어느 정도의 피해인지 등의 자세한 것들을 조사하고, 안 다음에 환경에 피해가 가는 일은 그만두고, 혹은 시작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피해가 예측되지 않는다면 함부로 시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창조성-창조적부정과 확장 : 새로운 예술로의 확장, 비디오 아트-창조적 부정에서 나온 예술로 비디오 아트를 둘 수 있다. 비디오 아트란 1970년대 전반부터 성행한 현대 예술의 한 경향이다. 비디오아트는 크게 나누어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예술적 가능성의 추구에서 생겨난 것과 형식주의적인 예술에 대한 반발에서 생겨난 것이 있다. 비디오 아트는 미술이 대중문화의 위세에 눌리자 그 반격이자 대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분야이다.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과 상영이 편리하며 영화와 같이 대자본에 종속될 염려가 없다는 점, 그리고 특히 대중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도구라는 점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형식주의적인 예술에 대한 부정과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가능성의 추구, 대중문화로 인한 미술의 위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바디우의 우연론적 부정에 있어, 바디우의 진리관은 세계는 불안정하게 펼쳐진 순수한 다수고, 진리란 세계의 이 같은 참 모습을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다수다. 이때의 다수는 평상시에는 안 보이다가 진리를 향한 벗어남의 사건을 통해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한 벗어남의 사건을 통해 도래하는 다수로서 언제나 하나로 묶임을 벗어나는 다수가 바로 진리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바로 이 우연한 벗어남이 곧 바디우가 말하는 부정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우연론적 부정에서 비디오 아트는 그동안의 형식주의적인 예술로 나타나던 미술을 부정하면서, 비디오로 새롭게 예술을 표현했다. 창조적 부정으로 인해 나타난 예술의 새로운 영역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형식주의적인 예술에서 벗어나면서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가능성을 추구하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위기를 부정을 비디오라는 새로운 재료로 예술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를 기존의 미술의 재료로 선정하면서 비디오 아트가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서, 대중을 잡으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비디오 아트는 아직 확실한 형식이 이뤄지지 않고 있고, 표현 방법도 제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연장, 또 한편으로는 예술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거기에 공간이나 환경의 구성과도 결부되어 있어 어떤 방향에 더 가능성이 있으며, 또 어느 방향으로 귀착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비디오 아트는 이미 창조적 부정에서 나타난 창조적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비디오 아트는 기존의 미술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극복한 형태다. 미술이란 누군가 만든 작품으로 움직이는 피사체를 한 장면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디오는 비디오라는 도구는 이러한 미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비디오라는 매체 특성상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할 수도 있고, 빛을 통한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형식주의였던 기존의 미술과는 다르게 표현에 있어 확실한 형식이 없다.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충분하며, 어떤 방향으로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한이 없다. 이와 같이 비디오 아트는 원래의 미술 예술의 한계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표현 방법을 만들어낸 것으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헤겔의 필연론적 부정에 의해서도 창조적 부정에 의한 창조적 영역의 확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변증법의 3단계 전개인 정-반-합의 3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기존의 예술인 형식주의적인 미술에만 관심을 갖고, 그러한 양식을 따라 만들고 있었다. 기술의 발전과는 달리 미술, 예술의 영역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않고 기존의 것만 이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세계가 자신 속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는 단계인 정의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감상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형식주의적인 미술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하고, 새로운 대중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형식적인 미술은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가 세계 속에서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자기부정의 단계인 반의 단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형식주의적이지 않은 미술의 형태인 비디오 아트를 만들어 냈다. 이 단계가 세계가 자기를 부정하는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결국은 보다 발전적으로 종합 통일된 제3의 합으로 나아가는 단계, 세계에 대한 서로 모순되는 두 규정이 지양되는 단계인 합의 단계다. 기존의 미술과 달리 비디오를 이용한 예술로, 멈춰있는 예술에서 움직이는 예술이 되었고, 빛과 영상 등을 이용하여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켰다. 부정의 방법을 통해서 변화와 발전을 나타낸 것이다. 게다가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라는 도구를 표현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음과 동시에 비디오를 나타내는 도구인 텔레비전, 모니터, 라디오 등의 도구 자체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창작자는 비디오를 틀어 표현할 수도 있고, 텔레비전 등의 기계 자체로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술의 정적인 특징을 부정하고, 움직이는 동적인 형태로 표현하도록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뿐만 아니라, 표현 형식 또한 발전시켜 예술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예술과 창조성-창조적 부정과 확장 :촛불집회로 넓어진 국민들의 정치 영역-창조적 부정과 그에 따른 창조적 확장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라는 한 사건에서 나타난다. 먼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에 대해 설명을 하겠다. 2016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으로 불거진 이른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같은 해 10월 29일 전국 각지에서 국정 농단에 대한 진실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11월 12일에는 15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한 '2016 민중총궐기대회'가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려 역대 최대 규모인 100만 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은 26만 명)이 참여하였다. 11월 26일에는 전국에서 190만 명(경찰 추산 33만 명)이 참여하여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기록하였으며, 12월 3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어 12월 9일에 가결됨으로써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어 3월 9일부터 3일간 계속된 20차 촛불집회까지 참여자 누적 연인원이 15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에서 만장일치로 탄핵소추안을 인용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헌정 사상 최초로 재임중에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이 되었다. 이 촛불집회는 깨어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부당한 권력을 심판하고 몰아냄으로써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헤겔의 필연론적 부정으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를 창조적 부정과 그에 따른 창조적 확장을 설명할 수 있다. 먼저, 헤겔의 필연론적 부정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부정의 방법을 통한 변화와 발전의 논리를 펼치며, 사회와 역사의 경우 사회와 역사는 절대정신의 본질을 점차로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헤겔의 필연론적 부정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촛불집회는 절대정신의 본질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절대정신의 외와와 자기복귀 운동은 매번 끝나고 다시 시작할 때마다 조금씩 더 높은 단계로 고양된다. 정-반-합의 단계를 거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촛불집회도 이 단계를 거쳤다고 볼 수 있다.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대의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을 대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대신 전달해 주고 국민들을 위해 일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권한과 힘을 믿고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익만을 추구했다. 그러면서 적폐와 특권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마치 당연한 것같이 누리고 일했다. 국민들은 이를 이상한 일이 아니라, 모든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그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주어진 일만이라도 제대로 해주기만 했으면 한다고 생각한다. 모순을 느끼는 사람이 있어도, 문제를 삼고 개선하려고 하는 것까지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정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최순실 국정개입 논란과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 다수의 국민들이 모순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논란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체계의 부실과 정부의 무능함이 드러났고, 국정개입 또한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권한과 능력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이것을 반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을 느낀 다수의 시민들이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여 부당한 권력을 심판하고 몰아냈다. 촛불시위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고, 이후 열린 조기 대선과 총선에서도 과거 정권과 지방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 정당의 현직 단체장에 대한 심판을 내려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사람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결국은 보다 발전한 종합 통일된 제3의 합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를 합의 단계로 볼 수 있다.촛불 집회를 통해서 국민들의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그동안 점차 떨어지고 있던 투표 참여율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적폐 청산을 통한 공정하고 부패 없는 사회에 대한 기대를 대선과 총선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촛불집회 이전의 국민들은 그동안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정치적 주체에서 벗어나면서 투표 참여율이 낮아지고 있었다. 또한 정부와 국회에서 무슨 짓을 하던 그냥 넘어가던 국민들이 최순실의 국정개입 논란, 세월호 사건 등의 사건들로 인해 국민들의 의식을 깨웠고, 정치적 주체가 되는 것을 포기하던 국민들이 다시 새롭게 정치적 주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더불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에도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관심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새로운 선거제도와 다양한 개선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국민들은 그동안의 제도 속에서 느꼈던 문제와 정부와 국회에 대한 불신, 무관심함으로 인해 줄어들었던 정치적 참여에 대한 정치 영역을 다시 넓혔고, 새로운 선거 제도와 현재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주제 보고서- 징병제 사회 -선정한 주제는 징병제 사회이다. 징병제는 국민개병제로, 현재 한국 사회가 실시하고 있는 군복무제도이다. 징병제는 시민-군인모델로 하며, 사회-군 : 시민권이다. 징병제를 실시함으로 외부로부터 자기방어를 할 수 있으며, 상호의무적인 관계를 갖고있다. 군대의 존립 목적은 국가의 생존과 이익을 지키기 위한 국가방위다. 분단국가인 한국은 군대의 중요성이 다른 국가보다 더 강조된다. 강조되는 만큼 군복무에 관련된 문제는 다른 문제에 비해 예민한 사회적 이슈다. 군 복무와 관련된 이슈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과 ‘군 추행죄’, ‘병역거부자’ 이렇게 3가지 이슈에 대해 수업시간에 다뤘다.이 보고서에서는 병역 거부자에 초점을 둬,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해야하는가?’, ‘인정한다면,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병역의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설정해, 그에 대한 답을 밑에서 알아보려 한다. 앞의 질문에 답하기 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 순서에 질문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말하려 한다.먼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정의부터 설명하겠다. 양심적 병역 거부란 자신의 신앙이나 도덕률 및 철학적·정치적 이유에 따른 양심상의 결정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인명을 살상하는 병역 의무의 일부 또는 전부를 거부하는 행위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징집대상자로서 양심상의 이유나 종교적·인종적·도덕적·인도주의적·정치적·철학적 또는 유사한 동기로부터 나오는 깊은 신념에 따라 군 복무 혹은 다른 직·간접적인 전쟁 및 무력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양심은 도덕적이고 착한 의미가 아닌 신념과 권리의 문제로 양심의 자유는 법규범 혹은 강제적인 명령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수용될 수 없을 때, 저항할 수 있도록 한 헌법적 기본권이다.한국 사회는 군 복무제를 징병제로 실시하고 있다. 남성들은 병역의 의무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군 입대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수용될 수 없는 군대에 가는 것에 저항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병역거부를 하는 이유는 크게 4자기로 이해할 수 있다. 전쟁반대, 군사주의비판, 국가폭력 동참 거부, 진짜 남성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전쟁반대는 말 그대로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으로 일어나는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살상에 반대하는 것이다. 군사주의 비판은 적과 아군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들 던진다. 적의 실체가 있는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들을 던진다. 국가폭력에 동참을 거부하는 이유는 군이라는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고 군인이라는 가해자의 위치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진짜 남성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호전적 남성중심성으로 이뤄져 폭력과 위계문화가 자리 잡은 군대를 거부하는 것이다.병역 거부, 그중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찬반 논쟁은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찬반은 국가의 법(안보) vs 개인의 양심(인권)으로 볼 수 있다. 병역거부에 대해 찬성하는 유엔의 입장은 인권, 자유권을 근거로 한다. 세계인권선언, 자유권규약에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에 양심적 병역 거부 권리를 명시해뒀으며, 군복무를 선택할 권리인 자유권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이 근거이다. 유엔은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을 중지하고 적절한 조치를 권고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징벌의 차원의 처벌을 그만두고, 비 전투 혹은 민간 업무로 대체 복무제를 시행하도록 하도록 권고한다.그렇다면 병역 거부를 반대하는 근거로는 무엇이 있을까? 병역 거부를 반대하는 근거로는 분단국가의 조건(국가안보)으로 양심의 자유권은 제한이 가능하다는 것과 병역 기피에 대한 합법적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적 공감 형성이 되지 않았다는 여론이 강하다는 것을 근거로 두면서, 대체복무제를 하더라도 형벌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 거부는 개인의 신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자료와 기준으로 이들을 판단해야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증명할 수 있는, 눈에 가시화되는 자료가 없으며,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가에 대한 문제를 근거로 주장한다.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판단 기준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대체 복무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판단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야 하며, 이를 악용하여 병역 기피하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대비해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병역 기피에 대한 합법적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완전히 병역의무에서 배제해야하는지, 비전투 혹은 민간업무를 맡아 대체 복무제를 시행해야하는지, 형벌의 의미가 들어간 대체 복무제를 하도록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한다.마지막으로 앞서 질문했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해야하는가?’, ‘인정한다면,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병역의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문제에 대한 필자의 답을 이야기하겠다. 분단 조건에서 군사력이 필요하고, 병역 거부를 인정하면 군사력 보유에 문제가 생긴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서 이미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에 동의하기에,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해야한다고 생각 한다.
여성의 군 참여 논쟁:영미 페미니스트들의 평등 프레임과 탈군사화 프레임을 중심으로제출일 : 12월 13일1. 선정이유남성만의 병역의무, 군가산점 폐지, 페미니즘 이슈, 여남 평등, ‘임신 vs 군대’로 나눠지는 여남의 온라인상의 다툼 등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한 논쟁이 불거지면서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경우, 병역의 의무가 없고,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직업으로 선택을 해야 하며 남성은 병역의무로 인해 필수적인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여성의 군 참여를 둘러싼 논쟁과 여성의 군 참여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이 글을 선택하게 되었다.2. 논문 요약이 논문에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바는 영미 페미니스트들의 평등프레임과 탈군사화 프레임에서 살펴보면서 이 두 프레임이 전개된 쟁점을 이해하고, 넘어서서 평등과 탈군사화를 모순되나 동시에 고려하기 위한 다초점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평등 프레임과 탈군사화 프레임으로, 서구사회와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군참여 논의 배경과 유형, 군 참여 이유, 군 참여 정도, 군 참여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며, 평등 프레임과 탈군사화 프레임을 넘어선 다초점 접근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조한다.여성의 군 참여 논쟁은 한국과 서구 사회 모두 국가 안복의 맥에서 일어나는 것보다는 성평등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크다. 특히 한국 사회의 경우, 분단국가로 서구사회의 국가 안보 논리와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또한 남성만의 병역의무제로 인해 남성 중심성이 강한 형태를 띠고 있어, 평등과 탈군사화 프레임으로의 논의가 서구사회보다 힘들다.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한 논의는 평등프레임으로 진행됐다. 지원제와 징병제 맥락으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지원제의 경우 평등한 고용 기회와 공직 참여를 확대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졌고 여성이 안보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안보책임성을 강조하는 영미 성 평등주의자들의 논지와 통한다. 징병제에 맥락에선 선언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으나, 탈군사화 프레임을 취한 침묵과 소극적 대응으로 나타난 경향이 크다. 또한 여성 징병 이슈는 페미니스트들의 아젠다가 아닌 사회적 여론으로 돌출되었다. 이렇듯 저자는 여성의 군 참여 문제는 젠더, 국가, 안보, 평화 등 다양한 요소들의 상반된 이해 속에서 복합적인 물음들로 구성된 것이므로 다초점 접근을 통해 복합성을 입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3. 여성 군 참여에 대한 내 의견저자가 말하는 내용처럼, 여성의 군 참여 논의는 평등 프레임과 탈군사화 프레임을 확장하여 여성의 군 참여 논의를, 모순되나 복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남 평등을 위해서는 막연히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병역의무를 행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문제들을 이 논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한 논의를 다초점 접근으로 바라봐야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감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군 진출은 마치 성 평등의 완성인양 가시화 되지만, 성차별을 야기하는 군 구조와 문화는 보이지 않은 채, 개인이 자기 계발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겨진다라는 문장을 읽고 막연히 ‘여성도 병역의무를 지면 성 평등에 가까워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나를 반성하게 됐고, 저자의 의견에 더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막연히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해 한 프레임에서만 바라봐서는 여성의 군 참여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모든 분야에 여성들이 진출하고, 남성과 같이 기본적 권리들을 누리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정상인데, 여성들이 여성이란 이유로 하지 못하는, 진출할 수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의 경우 남성만 병역의무로 군대를 필수적으로 가야하며, 여성의 경우 직업으로 선택해야함 군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서구사회도 마찬가지로 여성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전투참여에 배제되는데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남성 중심성이 강한 군사 활동에서 여성이 무작정 군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직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성 평등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 조직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도 생긴다.저자의 주장대로 다초점 접근으로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초점 접근은 물음을 달리한다. 여성의 군 참여가 성 평등으로 이어진다는 설정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도록 질문한다. 이는 다초점 접근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평등 프레임이나 탈군사화 프레임의 경우 여성의 군 참여를 성 평등에 다가가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다초점 접근은 여성의 군 참여가 생산하는 의미들을 다양한 맥락에서 포착한다. 인종이나 국가 간의 권력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주시하면서 여성의 군 참여가 갖는 의미를 다차원적으로 짚을 수 있다. 세 번째는 평등의 초점을 여성들에게만 맞추지 않고 남성성과의 관계를 조명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미시적 현상과 글로벌하게 재편되는 군사활동의 거시적 현상을 동시에 포착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대로 이는 징병제를 폐지한 서구사회의 군은 시티즌십의 논리가 아닌 시장의 논리에 기댄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초점 접근으로 여성의 군 참여 논쟁을 바라보면 한 프레임으로 바라보던 것들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나 현상 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알고 나서는, 여성의 군 참여에 대한 논의를 다초점 접근으로 바라보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군대는 혁신적 변화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외부적 압력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군의 태생적 한계라고 분석한 것에 동의한다. 군의 특성상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관행을 유지하는 안전 지향적 선택을 하는 것은 이해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아직 분단국가이기에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쪽을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하기에 여성의 군 참여 논의에 대해 다초점 접근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4. 인상적인 내용특히 여성들의 군 진출은 마치 성 평등의 완성인양 가시화 되지만, 성차별을 야기하는 군 구조와 문화는 보이지 않은 채, 개인이 자기 계발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겨진다라는 문장을 읽고 막연히 ‘여성도 병역의무를 지면 성 평등에 가까워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성차별을 야기하는 구조와 문화는 보지 않고, 개인이 자기 계발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겨두는 것은 회사 등 조직 문화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군 참여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막연히 여성도 병역의 의무를 지면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