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언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기에 앉아 있는 피고인은 6세의 어린 여자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무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범행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피고인이 범행 당시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고인이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하며, 이 법정에 서기 전까지 피고인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제가 증인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이유는 피고인이 잔인하게 살해한 어린 여자아이가 저의 소중한 딸이기 때문입니다.아이는 어렸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온 아이가 매고 나갔던 목도리가 없어진 것을 보고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더니, 감기가 걸린 친구에게 주었다는 대답을 들은 적도 있었죠. 그런 점은 생전에 수입이 줄어 생활비가 부족해도 기부를 멈추지 않았던 제 아버지를 쏙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아이는 그 날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유치원에 다녀왔다가 오후 늦게까지 일하는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 때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낯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저기에 있는 피고인이었죠. 아이는 고민에 빠졌을 겁니다. 엄마로부터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그를 따라가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이는 그 낯선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피고인이 아이에게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말했기 때문이겠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아이는 낯선 사람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아이는 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가장 먼저 원망의 화살이 향한 곳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왜 아이를 혼자 있게 했을까. ‘한 두 시간 정도는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던 저의 오만이 아이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더 강하게 낯선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못했을까.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마치 쇠사슬처럼 저를 옭아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두 번째 원망의 화살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의 아버지에게로 향했죠. 그가 아이에게 어려운 사람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는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빨리 세상을 뜨지 않아서 내가 아이를 혼자 두고 일하지 않아도 되었더라면.하지만 아이는 이미 이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아이의 방에는 아직도 아이가 매일 안고 있던 인형, 아이가 좋아하는 원피스, 아이가 덮고 자던 이불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이제 아이는 없습니다. ‘엄마’하고 부르며 입가 가득 머금던 그 햇살 같은 미소도 더 이상 볼 수 없겠죠. 저는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울기만 했죠. 그리고 계속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은 전부 제 탓이라고.그런데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후, 문득 저의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나의 아이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아이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에 빠져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이를 죽인 것은 저 피고인이라는 것을.피고인은 왜 아이를 죽였냐는 질문에 대해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일축했습니다. 심신미약을 주장하여 감형을 받기 위해서죠. 앞으로도 저를 비롯한 이곳 법정에 계신 모든 분들은 피고인의 범행 동기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심신미약을 주장하기 위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죠.하지만 법정에 계신 여러분께서 꼭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피고인의 범행동기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아이가 죽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피고인에게 그 죄를 덜어주어야 하는 이유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아직 다 피지도 못한 아이의 생명을 무참하게 꺾어버린 피고인에게 도망칠 핑계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아이의 미래와 꿈을 잔인하게 짓밟아 없앤 피고인에게 심신미약이라는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됩니다.저는 이제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어머니로서 아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바로 아이를 죽인 저기 저 피고인이 엄중한 벌을 받고, 또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지 못하도록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부디 피고인에게 합당한 처벌이 내려지도록 함으로서 나의 아이가 천국에서나마 편안히 눈감을 수 있기를. 두 번 다시 또 다른 누군가의 꿈과 미래, 그리고 미소가 사라지는 일기 없기를SOAPS 분석S :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의 형사재판에 참석한 어머니O : 살인사건의 재판이 이루어지는 법정A : 법정에 참석한 판사와 배심원들P :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에게 엄중한 형벌을 내려줄 것을 촉구S :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의 불합리성Tone : 앞부분에서는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말하다가 뒷부분에 강한 어조를 사용하여 감정을 고조시킴EPL 분석Ethos : 피해자의 가족인 화자가 직접 사건경위를 설명하여 증언의 신빙성을 높임Pathos : 딸을 잃은 슬픔을 환기시켜 청자의 감성에 호소Logos :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가 전적으로 피고인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여 엄중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합당함을 논증비유법 아이는 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도치법 : 아이는 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직유법 : 마치 쇠사슬처럼 / 햇살 같은 미소반복법 : 아이는 이제 이세상에 없습니다. / 이제 아이는 없습니다.의인법 : 고개를 드는 의문
우리 시대의 삶과 문학ㅡ 정이현의 를 읽고소설의 제목인 ‘너는 모른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우리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너는 모른다’일 것이다. 이 소설은 막내 딸 ‘유지’의 실종으로 인하여 외면해왔던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되는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대만에 있는 옛 연인을 잊지 못하고 계속 만나는 어머니 옥영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아버지 상호가 장기밀매로 돈을 번다는 사실과 의대에 다니는 줄 알고 있는 아들 혜성이 학교는 다니지 않고 방화를 즐긴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니 의외로 간단하게 해답을 알 수 있었다. 답은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아예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가족들이 상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아버지로서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그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대목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혜성이 등록금 고지서를 위조하고 아버지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한 것이 무색하게 확인 조차 하지 않고 무심하게 수표를 건네는 상호의 모습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언제나 화목한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지의 실종은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의 일상을 무참히 깨뜨린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위기 상황에서 소통이 단절된 가정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딸이 유괴되었음에도 자신이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이 드러날 까봐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상호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든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이를 외면하려고 하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작가는 단호하게 ‘너는 모른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 하다. 또한 그것은 ‘너는 알아야 한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심지어 이제는 그 무관심이 이웃을 넘어서 가족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 ‘너는 모른다’는 대화가 사라진 가족. ‘우리’보다 ‘나’와 ‘너’가 익숙해진 요즘의 세태를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이 소설의 인물들은 왜 악인인가?이 소설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김상호’에 대한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쉽게 화를 내고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와는 도무지 거리가 먼 인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표현하지는 않아도 자식들을 사랑했고, 마지막에는 딸 유지를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에 대해 공감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그가 장기밀매를 주도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독자들에게 하여금 다시 반감이 들게 한다. 비록 딸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다른 이의 생명을 서슴없이 해하는 모습은 아들 혜성이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생각해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선’보다는 ‘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딸 유지가 사라지고 난 뒤, 애타게 아이를 찾는 옥영의 모습은 매우 안타까워 보이지만 상호와 결혼했음에도 계속해서 밍을 만났고, 그녀가 낳은 유지가 상호의 친딸이 맞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혜성 또한 묵묵히 옥영과 유지를 배려해주는 사려 깊은 아들로 묘사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방화를 저지르고 쾌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자기중심적이고 늘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은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굳이 인물들을 모두 악인으로 설정했을까?그 이유는 아마 가족들이 서로에게 차마 밝히지 못하는 ‘비밀’을 만들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에게 조차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개 떳떳하지 못한 ‘나쁜’ 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또한 인물들이 서로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모습을 통해 혹시 내 가족이 자신이 모르는 악한 일면을 가지고 있을 까봐 두려워하는 심리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모른척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나 역시 그러한 상황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내가 모르고 있는 가족의 악한 모습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애써 믿고 싶을 것 같다.그러한 맥락에서 ‘너는 모른다’는 가족간의 소통부재와 무관심을 의미하는 반면,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기에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에서 오는 무지를 뜻하기도 하는 것 같다. 종종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의 부모가 ‘우리 애는 그런 애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타인이 아닌 ‘가족’이기에 더 모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왜 미스터리 소설인가?‘도시적 감수성의 작가 정이현이 치밀하고 날렵한 문장으로 펼쳐 보이는 새로운 미스터리!’‘너는 모른다’의 책 뒷부분에 실린 소개 문구이다. 내가 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읽어본 작가의 다른 작품인 ‘삼풍 백화점’을 떠올렸을 때, 이 작가가 미스터리 소설을 썼다는 것이 어쩐지 생소하게 느껴졌다. 위에서 소개한 문구에 걸맞게 이 글은 추리소설의 형식과 유사하게 진행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강에서 발견된 시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미스터리나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큰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결말부분까지 소설을 읽고 나면 허무한 기분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다. 결국에는 강에서 발견된 시체나 실종된 유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다는 그러한 사건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가족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인데,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고 어떻게 이를 해결해나가는지에 중점을 두고 책을 읽는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불친절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강에서 발견된 시체는 옥영의 옛 연인인 밍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옥영과 유지에 대한 깊은 사랑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왜 이 이야기의 중심사건인 양 도입부에 소개되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유지가 갑자기 크게 머리를 다친 상태로 발견되는 부분에도 의문이 들었다. 다들 납치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인터넷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만나 그녀를 찾아나선 것이라는 전개는 충분히 납득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 다치게 되는 원인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다지 교류가 없었던 이복언니 은성이 유지를 열심히 돌보고 이를 통해 무관심했던 가족들이 가까워지는 결말은 너무 성급한 마무리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매우 중요한 것처럼 언급되었던 모든 사건들은 가족간의 화합이라는 결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비록 소설 속 인물이긴 하지만 유지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옥영과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유지를 위해 몸을 던진 밍은 더더욱 그러했다. 심지어 옥영과 혜성이 그런 그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는지 조차 언급되지 않고 소설은 막을 내린다.혹시라도 나의 이러한 불만을 작가가 본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는 모른다’고. 소설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인물들 나름대로의 숨겨진 사정이 있을 것이고, 이를 상상하는 것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스터리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상, 중심 사건에 대한 의혹을 명확히 해소시켜 주지 않는 것은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명왕성’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해석● 줄거리영화 ‘명왕성’은 한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김준은 일반 고등학교에서 이 곳으로 전학을 온다. 김준은 철저히 성적에 의해 대우가 달라지는 학교의 분위기에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잠시 이에 적응하고 소수 최상위권 학생들만이 속해 있는 스터디에 들어가려고 고군분투하게 된다. 스터디의 일원인 전교 1등 유진 테일러를 비롯한 한명호, 강미라, 최보람 등의 학생들은 스터디에 들어오게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김준에게 온갖 악행들을 지시한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죄책감을 잊고 아이들의 눈 밖에 난 교사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같은 반 여학생에게 성폭행을 시도하는 등의 지시에 따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이용했을 뿐임을 알게 되고 분노와 동시에 회의감을 느끼던 한편,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 유진 테일러와 속마음을 터놓으며 악행을 멈출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학생들은 뒷산에서 유진 테일러를 살해하고 이를 김준에게 뒤집어씌운다.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김준은 복수를 계획하고 아이들의 지시로 만든 액체 폭탄을 이용해 아이들을 죽임과 동시에 자신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해석이 영화에는 입시전쟁에서 승리하여 좋은 대학에 가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삶이라는 거대담론이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학교 안에서는 ‘성적’이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하는 철저한 ‘권력구도’가 발생한다. 이러한 권력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위치한 아이들은 마치 성적만 좋으면 어떤 행동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듯이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대해 다른 학생들은 이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대신 그들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고 노력한다. 새로 이 학교에 전학을 오게 된 주인공 또한 처음에는 이에 저항하려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이 이에 적응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거대담론 형성을 유발했을까? 이는 비단 학교 내부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이라는 ‘통일성’의 잣대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줄 세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학생들이 사회와 어른들로부터 강요받는 총체적인 모습의 폐해를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학생들은 모두 똑같이 생긴 교복을 맞춰 입고 일렬로 놓인 책상 앞에 앉아 같은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한다. 철저하게 다원성이 무시되면서 성적표에 인쇄된 숫자에 따라 권력이 형성되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아이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그들의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를 용납해주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교사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입시를 위해 모든 악행을 묵인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가 절대적인 하나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감독은 뒤늦게 부조리함을 깨달은 주인공의 행동을 빌려 이러한 거대담론에 저항한다. 성적이 좋으면 어떤 행동도 용인될 수 있다는 거대담론에 도취된 아이들에게 대항하며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감독의 외침과도 같은 이러한 저항은 금방 벽에 부딪힌다. 거짓으로 사죄하던 아이들은 여전히 죄책감보다는 입시에 지장이 생길 것이라는 불안감에 집중하고 최후의 순간 주인공은 전화를 한 통 건다. 아이들 중 한명이 합격한 대학의 예비 1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아이를 ‘죽일까’ ‘살릴까’에 대해 물어본다. 긍정의 침묵을 보내며 전화를 끊는 예비 1번 학생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학벌 중심주의 양상이 특정 집단만의 모습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것임을 묘사한다. 결국 주인공은 거대담론에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거대담론에 대해서는 ‘니체’의 사상과 연관 지어 비판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절대적인 진리나 하나의 기준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을 ‘평균적으로 타락한 인간형’으로 표현하며 크게 비판했다.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통해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인식과 존재에 대한 폭력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를 통해 평가받고 규정되는 것이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하니까’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와 같은 인식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러한 거대담론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성적’이라는 기준을 통해 권력을 잡은 아이들의 악행을 극단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이러한 존재에 대한 폭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그동안 은연중에 당연시 해왔던 것들에 대한 문제를 표면화하게 된다. 사회가 학생들에게 ‘성적’과 ‘학벌’ 등을 통해 출세와 성공을 이룰 것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와 같은 문제들 말이다.한편 영화 ‘명왕성’은 ‘대중성’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예술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한국의 ‘고등학생’들이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어느 정도 상황을 극대화시키기는 했지만 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은 우리 삶과 매우 유사하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객은 영화 속 상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지금 속해있는 사회나 현실과 연간지어 사고하게 된다. 영화 속 상황은 우리와는 동떨어진 고상한 ‘이상’이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주의’를 드러낸다. 독립영화만의 특유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는 이 영화는 완벽한 구도와 안정적인 연출보다는 불안정하고 때로는 일부 시점만을 담은 카메라 구도를 통한 영상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 드러난 불안정한 상황과 심리를 해체주의적 특성을 통해 담아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을 통한 문화 콘텐츠 분석― 현대 사상의 이해 과제물● 니체의 사상에 대한 간단한 소개니체는 독일 출신의 철학자로 당시 지배적이던 근대의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과감히 전복시킨 사상가이다. 크게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겁회귀와 같은 세 가지의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을 끊임없이 투쟁하고 자기극복 하는 존재로 만드는 강한 에너지를 뜻한다. 그리고 위버멘쉬는 이러한 자기극복을 통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초인과 같은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영겁회귀는 유한성을 지닌 세계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개념이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줄거리인간을 잡아먹는 괴물. 이른바 ‘거인’이 등장한 후 인류는 큰 위협을 받는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인류는 거대한 벽을 세우고 그 안으로 피신한다. 이로 인해 100년간의 평화가 지속되지만 주인공 ‘에렌’은 언젠가 거인이 벽안으로 침투할 것을 걱정하며 거인과 맞서 싸우는 ‘조사병단’에 입대하는 것을 꿈꾼다. 결국 에렌의 예상대로 거인이 100년 만에 벽을 부수고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이에 에렌은 거인으로 인해 부모님을 여의고 친구인 미카사, 아르민과 함께 조사병단에 지원하여 리바이 병장 등과 같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거인과 함께 맞서 싸워가는 내용이다.● 니체의 사상을 통한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분석이 애니메이션은 스토리 진행 전반에 걸쳐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인’이라는 적을 만났을 때 인간이 보여주는 강력한 ‘힘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물론 강력한 숙적을 만났기 때문에 인간이 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박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위기의식에 따른 에너지 이상의 초인적인 힘을 보여준다.주인공 에렌은 벽 안에 피신한 후 거인이 다시는 인간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항상 거인이 벽 안까지 침투할 가능성을 염두 해둔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을 적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인류는 거인과의 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에 불과한 벽 뒤에 숨는다. 하지만 니체의 사상과 같이 세계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언젠가 인류는 다시 그들의 숙적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 바로 에렌 이었다. 인류가 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을 때 100년 이상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평화가 계속될 것을 당연시 해왔다. 하지만 결국 에렌의 예상이 적중하여 인간은 100년 전과 같은 상황에 어김없이 다시 마주하게 된다.또한 에렌은 계속해서 ‘힘의 의지’를 발휘하여 투쟁을 멈추지 않는 ‘위버멘쉬’의 모습을 보여준다.이러한 모습은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난다.거인과 맞서 싸우기 위해 조사병단에 들어간 에렌은 거인과의 싸움을 위해 반드시필요한 입체기동기 훈련을 받게 된다. 하지만 훈련에도 불구하고 에렌은 중심조차잡지 못했으나 강한 의지로 당당히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여러 상황에 대해 에렌은 허무주의적인 니힐리즘에 빠지는 대신 늘 스스로 자기극복 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간다. 언젠가 ‘거인’이 다시 인류를 공격할 것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 상태에 이르지 않고 ‘조사병단’에 지원하기를 희망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의지만 앞서던 에렌을 낮게 평가하던 상사와 동료들도 그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에렌은 남들의 평가와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이에 열성적으로 몰두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단순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삶이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다.아르민 또한 니체가 주장하는 삶의 방식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아르민은 인류가 벽 안에서 안주하던 시기에 벽 바깥쪽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다.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거인과 맞서 싸운다. 아르민은 처음에는 자신이 동료들에게 짐만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곧 자신의 장점을 살려 투쟁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주체적으로 결단을 내리며 동료들을 리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항상 자기극복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인적인 인물이다.그리고 리바이 병장은 그 누구보다 ‘위버멘쉬’에 가까운 인물이다. 리바이는 병장으로서 조사병단을 책임지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부담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과감하고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리바이 병장이 위기의 순간 에렌에게 해준 말이 있다. ‘아무리 정확하다 소문난 지혜라고 해도 결과에 다다를 때까진 그것의 옳고 그름은 절대로 알 수 없다. 그저 후회를 남기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Amor-fati'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리바이는 무질서와 우연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이 안에서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여 끊임없이 자기 상승을 추구한다. 물론 실패하여 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이에 니힐리즘처럼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실패를 기회로 삼아 자기극복 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