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리 딜레마를 통해 본 동물의 도덕적 권리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165310213" 트롤리 딜레마를 통해 본 동물의 도덕적 권리 PAGEREF _Toc165310213 h 1 Hyperlink l "_Toc165310214" 1.쟁점 PAGEREF _Toc165310214 h 1 Hyperlink l "_Toc165310215" 2.핵심어 정의 PAGEREF _Toc165310215 h 2 Hyperlink l "_Toc165310216" 3.주장 및 근거 PAGEREF _Toc165310216 h 2 Hyperlink l "_Toc165310217" 1)침팬지의 도덕적 지위는 인간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PAGEREF _Toc165310217 h 2 Hyperlink l "_Toc165310218" 2)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되는가? PAGEREF _Toc165310218 h 3 Hyperlink l "_Toc165310219" (1)공리주의적 입장 PAGEREF _Toc165310219 h 3 Hyperlink l "_Toc165310220" (2)의무주의적 입장 PAGEREF _Toc165310220 h 3 Hyperlink l "_Toc165310221" (3)덕윤리적 입장 PAGEREF _Toc165310221 h 4 Hyperlink l "_Toc165310222" 4.예상 반론(반례) 및 재반론 PAGEREF _Toc165310222 h 5 Hyperlink l "_Toc165310223" 5.결론 PAGEREF _Toc165310223 h 5 Hyperlink l "_Toc165310224" 참고문헌 PAGEREF _Toc165310224 h 6쟁점여기에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제어 통제가 불가능한 트롤리가 있다. 주선으로 계속 돌진할 경우, 주선 위의 1명의 어린 아이가 트롤리에 치여 죽는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트롤리를 지선으로 돌릴지정의이 논문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로는 ‘비인간 사람’이다. 비인간 사람은 인간 종에 속하지는 않지만,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가치를 갖는 존재를 인정하는 개념이다. 이는 기존의 ‘비인간 동물’ 개념에 비해 자연생명 중심주의를 극복하여, 인공지능이나 외계생물을 인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주장 및 근거침팬지의 도덕적 지위는 인간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침팬지의 도덕적 지위는 인간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라는 질문을 핵심어를 통해 재개념화한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침팬지를 ‘비인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싱어나 벤담의 입장을 참고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지능이나 종과 관련 없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다른 도덕적 주체가 그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만약 침팬지, 즉 쾌락과 고통을 가지고 있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관심이 있는 존재가 비인간이라는 이유로 사람으로 고려받지 않는다면, 어떤 인간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못하게 취급받는 결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기 침팬지 다섯 명’의 자리에 ‘중증 장애인 다섯 명’, ‘(나치가 집권하던 때의 독일에서의) 유대인 다섯 명’이 오면 어떨까? 이들은 분명히 인간임에도, 일부 사람들에 의해 쥐나 바퀴벌레라는 이름으로 비인간화되고,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지곤 한다. 또, 만약 ‘더 높은 가치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 하나’와 ‘인간 다섯 명’이 오게 된다면 어떨까? 같은 상황에서, 인간은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렇듯, 쾌고 감수능력이 있는 존재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 그 자리에 ‘인간성이 부족한’ 상태의 자신이 놓였을 때 대우받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이는 우리의 직관과 어긋난다.따라서, 침팬지 역시 쾌고감수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 사람과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즐거움과 고통을 헤아리는 만큼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참고해볼 수 있는 관점이 두 가지 있다.첫째, 함과 둠의 차이이다. 이 침팬지 트롤리 딜레마의 사례에서, 우리가 주선으로 계속해서 달린다면 그것은 한 아이를 ‘죽게 두’는 것이다. 한편, 지선으로 틀어 침팬지 다섯 명을 죽이게 되면, 그것은 나의 선택과 작위로 인해 누군가를 ‘죽게 함’이다. 적극적 ‘죽게 함’과 달리, ‘죽게 둠’에는 의사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아 환자가 죽는 경우, 소극적 안락사를 도운 경우 등이 해당된다. 여기에서, ‘죽게 둠’의 영역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죽게 함’보다 허용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둘째, 이중결과론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침해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 없이 단순히 예견만 한 것인지의 구분에 따라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① 행위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좋거나 중립적이고 ② 좋은 결과만을 의도해야 하며 ③ 좋은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나쁜 결과를 야기해서는 안 되고 ④ 나쁜 결과를 허용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때, 침해가 소수에게 ‘가해지게 둠’으로써 다수에게 동일한, 그러나 양적으로 더 많은 침해를 막을 수 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때, 앞서 도입한 전제와 (1)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침팬지와 아이는 도덕적으로 똑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침해의 양을 줄이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 사례의 경우, 더 많은 비인간 사람을 구하고자 했던 좋은 목적에 따른 불가피한 부수 효과로 아이가 죽게 ‘두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 가능하다.덕윤리적 입장덕윤리적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유덕한 자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행동이 무엇인지이다. 예를 들어, 주선에 묶여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의 엄마라면 어떨까? 혹은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서) 말하셨다. “순께서는 천하를 버림을 헌 짚신을 버림과 같이 본다. 몰래 업고 도망가서, 물가를 따라가니, 종신토록 흔연하게 기뻐하고, 천하를 잃을 것이다.여기에서, 도응은 공적인 일과 가족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충돌했을 때, 성인이 했을 법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맹자는 전수받은 법을 해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마음을 따라 도망쳤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사적 관계에서의 사랑을 전제로 두고, 타인에게 사랑을 미루어 미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적 영역으로 사랑과 신뢰가 확산되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이렇듯, 『맹자』에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활용하여 성인의 마음씀을 배우고자 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이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상황에 가장 적절한 행동을 헤아려 중심을 잡되(權), 비교하거나 계산하고, 논의하고 살피지 않아도 대처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이를 참고한다면, 덕윤리적 입장에서는 침팬지 트롤리 딜레마 역시 보편화되고 정당화된 하나의 선택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상황 맥락을 고려하여 ‘성인이 할 법한’, 즉 ‘유덕자가 할 법한’ 것을 끊임 없는 수양을 통해 내면화한 결과로서의 행동을 할 것을 주문할 것이다.예상 반론(반례) 및 재반론첫째, 칸트의 의무주의적 논리에 따라 이성적 사고능력을 가진 인간 사람의 도덕적 지위가 더 높지 않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언제부터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는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어린 아이와 침팬지는 모두 ‘사람’이 아니라고 판별될 것이다.둘째, 미래의 발달 가능성이나 사회/경제적 효용을 고려했을 때, 인간 사람의 도덕적 지위가 더 높지 않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발달 가능성’이나 ‘효용’은 그 관점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주선에 있는 어린 아이가 인간이지만 중증 장애를 가져서 ‘사회적 효용’이 부족하다면 어떨까? 혹은, 지선에 있는 침팬지를 살리는 것이 멸종위기종을 보호했다는 점에서 생가 향하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 사람 각각과 비인간 사람 각각을 서로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윤리학의 여러 입장을 고려하여 답해보았다. 이 과정에서, 양적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항상 정당화될 수 있고, 의무주의의 입장에서는 특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에 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추론을 통해 보편적 행위지침을 정립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의 도덕적 직관에 부합하면서도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 덕윤리적 입장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트롤리 딜레마’가 가진 한계, 즉 상황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이렇듯, 침팬지 트롤리 딜레마 사례를 다룸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한 윤리적 고려를 예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한된 양의 약이 있고 그것을 적절하게 분배해야 할 때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자율주행 자동차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사고가 있다면,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다.참고문헌『맹자집주』셸리 케이건. 김후 역.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서울: 안타레스, 2020.강철, “트롤리 문제의 해결을 위한 4가지 방식과 그 한계: 비인간 윤리를 위한 시론적 연구” 철학연구 169, (2024), 1-28.김봉규, “학살된 영령들이시여, 영면에 드소서” 한겨레, 2024년 2월 6일, Hyperlink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27527.html"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27527.html유세진, “美 야생동물보호청, 모든 침팬지 멸종위기종 지정…의학 연구 등에 사용 금지” 뉴시스, 2016년 11.
챗GPT를 활용한 과제, ‘성능 향상’인가 ‘성취’인가?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170228165" 챗GPT를 활용한 과제, ‘성능 향상’인가 ‘성취’인가? PAGEREF _Toc170228165 h 1 Hyperlink l "_Toc170228166" 1.쟁점 PAGEREF _Toc170228166 h 2 Hyperlink l "_Toc170228167" 2.핵심어 정의 PAGEREF _Toc170228167 h 2 Hyperlink l "_Toc170228168" 3.주장 및 근거 PAGEREF _Toc170228168 h 3 Hyperlink l "_Toc170228169" 1)GPT를 활용하여 과제 수행을 한 결과 겪은 것은 ‘성능 향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성취’라고 해야 하는가? PAGEREF _Toc170228169 h 3 Hyperlink l "_Toc170228170" (1)성능 향상의 측면 PAGEREF _Toc170228170 h 3 Hyperlink l "_Toc170228171" (2)성취의 측면 PAGEREF _Toc170228171 h 3 Hyperlink l "_Toc170228172" (3)상호보완성에 대한 고려 PAGEREF _Toc170228172 h 4 Hyperlink l "_Toc170228173" 2)그 성취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PAGEREF _Toc170228173 h 4 Hyperlink l "_Toc170228174" (1)박영수 씨 PAGEREF _Toc170228174 h 4 Hyperlink l "_Toc170228175" (2)Open AI 및 산하 프로그래머 PAGEREF _Toc170228175 h 5 Hyperlink l "_Toc170228176" (3)챗GPT PAGEREF _Toc170228176 h 5 Hyperlink l "_Toc170228177" (4)상호보완성에 대한 고려 PAG28179 h 6 Hyperlink l "_Toc170228180" 참고문헌 PAGEREF _Toc170228180 h 6쟁점최근 OpenAI가 개발한 인공지능 언어모델인 챗GPT가 인간의 과업을 도울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윤리/사회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대학 역사 수업에서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해야 하는 박영수 씨가 있다고 해 보자. 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챗GPT를 활용한다. 먼저, 주제 선정 및 자료 조사에 있어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 목록을 요청한다. 챗GPT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벌지 전투 등 여러 전투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주요 전투 목록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구조와 아이디어 생성에 있어 에세이 구조를 제안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따라 초안을 작성한 박영수 씨는 마지막으로, 작성된 초안을 교정함에 있어 문법 및 문장 구조 점검을 요청한다.이 사례는 챗GPT 사용의 형평성, 성과에 대한 책임, 기술 사용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의 경계 등 다양한 윤리적 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성과에 대한 책임’을 중점에 두고 이야기하면서, 다음의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박영수 씨가 챗GPT를 활용하여 과제 수행을 한 결과 겪은 것은 ‘성능 향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성취’라고 해야 하는가? 만약 성취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그 성취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핵심어 정의이 논문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로는 ‘주체’가 있다. 주체는 곧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며 윤리적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람’은 꼭 인간 종일 필요는 없으며, 침팬지, 인공지능, 로봇 등 인식과 감정, 자율성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존재라면 누구든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비인간 동물’ 개념에 비해 자연생명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다음으로, ‘성능 향상’은 주어련이 있는 개념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비인간사람의 기여, 혹은 성취는 인정하기 어려워진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성취는 그 주체가 결과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 과정에서 주체 자신에게 어떤 발전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자발적으로 목표지향적 행위를 했는지 등으로 정의하고자 한다.주장 및 근거GPT를 활용하여 과제 수행을 한 결과 겪은 것은 ‘성능 향상’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성취’라고 해야 하는가?성능 향상의 측면먼저, 박영수 씨는 챗GPT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성능이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효율성 향상이다. 챗GPT를 활용하여 초안 작성 전 자료 조사 및 데이터 수집에 있어 속도 및 정확성을 끌어올렸다. 이는 문제 해결에 소요되는 시간 전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자동화의 이점이 있다. 문법 교정, 문장 다듬기, 구조 제안 등은 작업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셋째, 챗GPT 사용 자체에 대한 지식이 향상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능력 향상은, 향후 비슷한 과제나 프로젝트의 수행에 유리한 결과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성취의 측면다음으로, 박영수 씨는 다음의 측면에서 성취를 거두었다. 첫째, 기여 및 발전의 측면이다. 챗GPT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박영수 씨가 스스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최종 결과물을 완성시켰다. 특히, 정보 수집 행위를 챗GPT가 하기는 했지만, 그것 중 알맞은 것을 취하고 작성하는 행위는 박영수 씨에게 귀속된다. 또한, 이 점에서, 정보 취합 및 선택의 측면에서 성취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챗GPT가 목표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명령어를 넣은 것이 박영수 씨라는 점에서, 그 자신이 목표지향적 행위를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전통적인 성취의 개념에서 이야기되는 결과로서의 감정을 느낀다. 박영수 씨는 학습을 통하여 도전을 경험하고, 성능 향상에 따른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며, 그에 대한 사회적 기대 및 평판 향상이 일어. 이러한 성능 향상의 결과는 개인에게 더 많은 성장과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성취, 그리고 그에 따른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그 성취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박영수 씨가장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성취의 주체로는 박영수 씨가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챗GPT를 활용하여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성취감을 느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결과를 얻기 위해 주요한 질문을 던졌으며, 그 결과를 글로 옮김으로써 실행에도 기여했다. 특히, 챗GPT가 제공한 정보에 대한 판별력과 그 판별 과정에 대한 경험은 이 결과와 관련 있는 자들 가운데 박영수 씨만이 소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전통에 의해 지지될 수 있다. 첫째, 칸트이다. 그는 자율성이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챗GPT와 같은 기술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단순히 도구여야만 한다. 책임을 질 수 있고 성찰할 수 있는 주체가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이성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둘째, 경험주의 및 실용주의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이들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당사자인 박영수 씨가 하는 경험과 그 맥락이 중요한 것이며, 기술은 그 학습을 보완하는 것일 뿐이라고 볼 것이다.셋째, 덕윤리적 관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등 덕윤리를 대표하는 이들은, 인격자가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덕한 행동을 하고, 이를 통해 좋은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보기에 챗GPT는 과제 수행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껴서 ‘덕’을 기르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갖춤으로써 인격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가 챗GPT에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Open AI 및 산하 프로그래머챗GPT를 설계하고 개발한 사람들은 챗GPT의 초기 학습 방향과 구조를 결정했을 것이기에, 성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일례로, Open AI 및 산하 프로그래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인공지능 모델이 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성과가 Open AI 및 산하 프로그래머에게 종속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딥러닝 방식의 자기주도학습을 통해 챗GPT는 그 자체로 계속 발전하였다. 그렇기에, 프로그래머나 질문을 던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챗GPT가 내 놓은 정보나 결정을 모두 이해하거나 예측/조작하지는 못하게 된다. 즉, 과제 수행은 챗GPT의 독립적 성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예상 반론(반례) 및 재반론사람과 사물은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고, 사물은 사람의 도구일 뿐이라는 반론이 펼쳐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은 자율성과 의식을 가진 존재로, 자기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둘째, 사람은 법적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셋째, 사람을 상품처럼 다루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넷째, 사람은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그러나, 이 네 가지는 모두 완전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딥러닝을 통해 배움을 이룬 챗GPT와 같은 기술이 역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법적/윤리적 권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일례로, 몇십 년 전만 해도 흑인 노예는 법적/윤리적 권리 없이 상품처럼 거래되었다. 또한, 요즈음에도 노동자들은 상품화되어 단순한 생산 도구로만 여겨지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를 본다면, 사람과 사물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결론앞선 예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박영수 씨는 챗GPT를 통해 효율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구조를 제안받아 초안을 작성하며, 마지막으로 문법 및 문장 구조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과제 완성이라는 성과를 완성시켰다. 이때, 이 성과를 성능 향상으로 보아야 하는가, 성취라고 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필자는 그 답이 명확하게 내려질 수는 없지만 성취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러한 성취는 박영수 씨뿐만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참고문헌 Hyperlink "https://wtml
재생산권과 건강권의 충돌, 어떻게 볼 것인가? TOC o "1-3" h z u Hyperlink l "_Toc163309537" 재생산권과 건강권의 충돌, 어떻게 볼 것인가? PAGEREF _Toc163309537 h 1 Hyperlink l "_Toc163309538" 1.쟁점 PAGEREF _Toc163309538 h 1 Hyperlink l "_Toc163309539" 2.핵심어 정의 PAGEREF _Toc163309539 h 2 Hyperlink l "_Toc163309540" 3.주장 PAGEREF _Toc163309540 h 2 Hyperlink l "_Toc163309541" 4.근거 PAGEREF _Toc163309541 h 3 Hyperlink l "_Toc163309542" (1)청각장애 배아의 출산이 도덕적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PAGEREF _Toc163309542 h 3 Hyperlink l "_Toc163309543" (2)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다. PAGEREF _Toc163309543 h 3 Hyperlink l "_Toc163309544" 5.예상 반론(반례) 및 재반론 PAGEREF _Toc163309544 h 4 Hyperlink l "_Toc163309545" 6.결론 PAGEREF _Toc163309545 h 4 Hyperlink l "_Toc163309546" 참고문헌 PAGEREF _Toc163309546 h 4쟁점“장애인이 아이를 낳아 뭐하느냐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산부인과에선 장애인이라고 잘 안 받아 주기도 합니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한 장애여성의 말이다. 임신을 하거나, 임신을 준비하는 장애여성이 주변인과 병원으로부터 낙태를 권유받거나 진료를 거부받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이러한 환경 속, 많은 장애여성은 출산 및 양육을 포기하거나, 불임 수술을 받기도 한다.한편, 장애를 가지고 있것을 ‘장애’가 아닌 ‘정체성’, ‘선물’로 인식함에 따라 자신을 닮은 자녀를 낳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샤론(D. Sharon)과 캔다스(M. Candace) 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선천적 청각 장애를 가진 레즈비언 부부이나, 장애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임신의 과정에서 농아 집안의 남성으로부터 정자를 기증받아 청각 장애 배아를 선택하였다. 이때, 첫째는 청각 장애를 가진 채로 태어났으나, 둘째는 한 쪽 귀에 청력이 있었기에 보청기 착용을 권유 받았다. 그러나 부부는 그를 실행하지 않았고, 그 결과 두 자녀 모두 청각 장애를 갖게 되었다.이 사례는 장애와 손상의 관련성, 장애인의 재생산권, 배아/태아의 건강권 등 다양한 윤리적 쟁점을 포함하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두 가지 논점을 중점으로 두고 논하고자 한다. 첫째, 청각장애 배아를 출산한 경우, 그들의 의도를 존중해서 도덕적으로 칭찬하거나 적어도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는가? 둘째, 둘째 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듣지 않아서 양쪽 귀가 모두 들을 수 없는 농아가 되었는데, 이 행위는 정당화되거나 허용될 수 있는가?핵심어 정의이 논문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생산권이다. 재생산권은 임신, 출산, 양육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여기에는 피임을 할 권리, 피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 여성 할례 등 젠더 차별에 기반한 관습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자녀의 양육에 관해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인생/사회/교육관에 따라 자녀의 양육을 자유롭게 형성할 권리 등이 포함된다. 둘째, 건강권이다. 건강권은 최소한의 건강을 보장받거나, 건강에 대한 보호를 요구할 권리이다. 셋째, 장애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장애는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장애를 사회적 정상성 및 의료적 모델로만 파악하고, 장애를 둘러싼 환경은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에서는 장애를 신체/정신적 손상에 대하여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작용할 때에 구성되는 개념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일례로, 맹인이 책을 읽을 때 장애를 경험하는 것은 점자로 만들어진 책이 제공된다면 장애를 겪지 않는다.주장핵심적 전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인권을 가지고 있으며, 장애인이나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아동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때, 인권의 보장은 모체에서의 독립 이후부터 죽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이러한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 청각장애 배아의 출산이 도덕적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둘째, 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다.근거청각장애 배아의 출산이 도덕적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이 주장의 근거를 내세움에 있어, 다음의 두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첫째, 배아의 선택이다. 배아의 선택은 적절하지 않은 배아를 삭제하는 등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전제를 참고하면 배아는 인권을 가진 ‘person’이라고 볼 수 없기에, 배아의 선택이 그 자체로 윤리적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설령 배아 선택과 관련된 기존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케이스에 적용될 수는 없다. 레즈비언 부부는 자연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둘째, 청각장애 배아의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배아의 선택’이 문제가 될 수 없다면, ‘청각장애’ 배아의 선택 역시 문제가 될 수 없다. 배우자를 택할 때 2세를 염두에 두거나,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속성을 가진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 행동 경향이지,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출산에 있어 아이의 동의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부모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으로 아이를 낳는 것은 하나의 권리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이 부부의 경우 청각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이자 선물로 고려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청각장 배아에게 부부가 손상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손상을 가지고 있는 배아를 선택했을 뿐이기 때문이다.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다.첫째, 의무주의적 관점이다. 의무주의는 이성에 따른 행동을 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를 인격체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태아보다 많은 정보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부모는 아이의 건강권을 보장할 책임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누군가를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 역시 가진다. 그렇다면, 이때 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의사가 권했음에도 그 진단에 따르지 않은 부부의 선택은 아이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수단으로 대했고, 그 결과 아이의 건강권 및 미래에 그가 원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을 앗아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둘째, 공리주의적 관점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존재는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때, 아이가 가질 수 있었을 능력을 영구적으로 쓸 수 없도록 한 것은 그의 복리에 손상을 가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예상 반론(반례) 및 재반론향후 태어났을 때 고통을 겪을 것이 예상된다는 점은 같은데, 배아일 때와 태어난 후에서 서로 다른 윤리적 판단이 내려지는 이유와 관련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배아가 person이 아니라면, person인 부모가 갖는 선택권이 우선되어야 한다. 반면, 태어나 모체로부터 분리된 후에는 아이는 person이며 동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또한, 청력의 손실이 새로운 능력을 낳을 수 있는 정체성, 혹은 공간지각력 및 가족 간 화합을 증대해주는 선물로 파악할 수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일례로, 흑인 역시 차별 대우를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이를 낳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체성은 자신이 정의할 때 구성되는 것이지, 타인에 의해 주이 아니다. 더하여, 설령 난청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익이 있고, 추후에 아이가 그것을 긍정적으로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사회적 통념에 의거했을 때 이는 장애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의 손상이자,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고통을 낳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다.결론최종적으로, 청각장애 배아의 선별적 출산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음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의사에 의해 확인되고 권유되었음에도, 그것을 따르지 않은 것은 일종의 학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부모의 재생산권을 강조하면서도, 이미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는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만큼 그들의 건강권을 국가의 입장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켜줄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온정적 간섭주의와 국가의 온정적 간접주의 간의 위계가 존재하게 될 때에 자유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 윤리를 이야기함에 있어 사회적 통념은 어느 정도 고려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참고문헌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파주: 오월의봄, 2019. 74-75.엄수정. “여성의 재생산권과 장애인의 태어날 권리의 충돌이 빚어내는 제3공간” 한국장애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2015, 3 (2015), 77-84.이현아. “보조생식술 접근에의 사회적 제한은 비윤리적인가?” 인격주의 생명윤리, 13 no.2 (2023), doi: 10.35230/pb.2023.13.2.63명희진, “진료 꺼리고 낙태 권하고… 장애인은 엄마 자격 없나요” 서울신문, 2017년 4월 11일. Hyperlink "https://www.seoul.co.kr/news/society/health-medical/2017/04/11/*************3" https://www.seoul.co.kr/news/society/health-medical/2017/04/11/201704023
잃어버린 오늘을 찾아서2월 3일을 꿈꾸던 필시간은 때때로 개연성을 잃은 듯 보인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난 뒤에야, 우리는 변화를 깨닫는다. 영화 속 주인공, 필에게 개연성을 완전히 잃은 시간이 찾아왔을 때, 필의 주변인들은 이를 극단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루 전만 해도, 자기 중심적으로만 사고하고 살아가던 사람이, 어떻게 유쾌하며 인정 넘치는 사람이 되었을까?그 비밀은 필의, 끊임없이 반복된 2월 2일에 있다. 변하는 것이 없는 세상 속,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한 순간 그가 일탈을 즐기며 살게 돕기도 했지만, 그 시기가 지나간 후에는 끊임없이 죽음을 꿈꾸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많은 사람들, 특히 리타와의 만남이 이어지자 필의 모습은 바뀌게 된다. ‘과학 실험하는 느낌’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바라보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더라도 ‘모든 것은 바라보기 나름’임을 깨닫자, 그는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내일이 아닌 수많은 오늘들을 성실히 살아낸다.물론, 현실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필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나’만인 상황은 아닌 현실 속, 왜 ‘나의 모습’을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 중요할까? 그것은 아마도, 매일이 새로운 기회라는 축복처럼 찾아오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속에 내재된 모순과 괴로움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단 필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10월 18일을 살아가는 나“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 많이 밝아졌다!” 졸업 이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날 때면, 항상 듣는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는 입시 경쟁이 꽤 심한 편이었다. 서로를 견제하고 긴장하는 과정 속,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우울감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다. 다들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은데 괴로워하는 내가 싫었고, 사이가 좋았던 친구들을 입시 경쟁 안에 가두게 한 교육 제도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교육학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해 보아도 바뀌지 않는 학교를 보면서, 조금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상담실을 찾았다. 감정의 나와 나의 상황을 일기를 통해 분리하는 과정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과거의 나를 딛고 일어선 나를 긍정적으로만 여겼지, 과거의 나 자체를 수용하려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흘러간 시간이고, 현재만이 나를 바꿔낼 수 있음을 깨달은 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몸부림이 과거의 나였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나의 고등학교 생활을 교육제도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 모습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아가고자 나름의 최선을 다해 시행착오를 겪은 모습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이렇듯, 우리가 시간 속에서 개연성을 발견했든, 그렇지 못했든, 그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수용하고, 나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미래는 지금의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결정하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회의주의자이고, 자기중심적이던 필의 시간이 반복과 재해석 속에서 긍정적이고, 모두에게 친절을 베푸는 필을 만들어 냈듯, 시계의 째깍거림을 개연성으로 만들어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들어가며우리는 많은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사회 생활을 할 때에는 배려심 깊고 적극성이 높은 자아를, 친구들과 있을 때에는 익살맞은 사람의 자아를, 가족들과 함께할 때는 때때로 짜증을 내기도 하는 자아를 가지기도 하는 우리는, 본모습이 무엇이라고 뚜렷하게 말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자아를 꺼내어 사용한다. 누군가는 이 자아를 페르소나라는 전문 용어로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를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우리의 본질을 가두는 가면이라 파악하고, 인간 사회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이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소설, 인간실격은 이러한 염증에 지친 요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혐오스런 요조의 일생요조는 어릴 적, 성적 학대를 당하고,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도 못한 아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두려우며,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요조는 익살꾼의 가면을 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에 적응할 수 없었던 요조는 호리키와의 만남을 통해 비합법의 길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많은 여자들은 그에게 편안함을 주기도,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크게 세 명 정도로 나누어 보자면, 쯔네코와 시즈코, 요시코가 있다. 그는 쯔네코의 가난함에 동감하며, 함께 자살을 결심하나 홀로 구조되고, 자살 방조죄로 체포되어 아버지와의 연도 끊어진 채 감시 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중, 시즈코 모녀를 만나 동거하면서 약간의 행복을 찾지만, 곧 그들의 행복에 자신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또다시 그들을 떠난다. 이후, 자신을 믿어주는 유일한 여자인 요시코를 만나지만, 그녀도 강간당하면서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그 모습에 그녀를 떠나 괴로워하다 자신을 동정하고 애정을 베풀어준 이를 통해 모르핀을 접하게 된다. 곧 중독 상태가 되어 괴로움을 겪던 그는,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고,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 여겨 절망하게 된다.무저항은 죄인가자신이 인간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 것 같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계속하던 요조는, 죽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무저항과 회피를 계속해가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생각만 계속하다 정말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저항은 죄인가? 나는 실격된 존재인가? 이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지만, 나는 죄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는 강간당하고 있는 요시코가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부인을 모르핀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버팀목으로 삼아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B와 D 사이의 C’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은 의도치 않게 태어나고, 죽더라도, 그 속의 선택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피하기만 하는 행동은, 자신의 삶에 주체성을 가지며 책임지려는 인간의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죄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인간이 아니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가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죄를 짓고는 있으나, 그에 대해 계속해서 사유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만약 그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실격이 된다면,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처했거나, 선택할 수 없도록 사회적 압박을 받은 사람 역시 인간으로서 실격이 된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이들까지 인간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도 오만한 자세라고 생각한다.닫으며자살을 결심하는 것에는 사회적 유대의 소멸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자신이 이해 받을 수 없고, 이상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요조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그를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나를 사랑해주는 다른 이가 존재하니 스스로를 ‘실격된’ 존재로 느껴 죽음까지 결심하는 일은 없었지 않았을까? 서로 다양한 배경에서 자라난 이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그를 포용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이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을 저버리고, 회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혐오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살면서 한 번쯤 느낄 수 있지만 털어버리고 살아가는 감정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살아간 요조의 삶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또 다른 요조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