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인생』 속 주인공들의 죽음에 집중하여동양사학과 2016-17343 국윤지1. 서론『인생』은 민요 수집을 주요 일거리로 삼은 ‘나’가 푸구이 노인을 만나 그로부터 들은 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노인의 이야기는 그의 삶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푸구이는 청나라 말기에 태어난 인물로 신해혁명, 국공 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였다. 그의 이야기 전반에는 그의 아버지, 아내, 딸, 아들 그리고 사위, 외손자 총 6명의 인물이 등장해 그와 같이 삶을 영위해 간다. 하지만 위 인물들은 끝끝내 목숨을 부지하는 푸구이와 달리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은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 사회적 차원으로 해석되었을 때 20세기 중국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각 인물의 탄생과 죽음은 한 정권의 탄생과 쇠퇴 그리고 또 다른 정권의 등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각각의 인물이 20세기 중국의 여러 시대를 상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본 서평에서는 각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20세기 중국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마지막 왕조 중국을 상징하는 아버지와 중국의 현대 및 미래를 상징하는 외손자 쿠건을 매개로 하여 20세기 중국의 각 측면을 골고루 해체해 볼 수 있었다. 위 등장인물들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인물 설정을 통해 중국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저자의 비관적 태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의 중국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역시 포착할 수 있었다.2. 본론2.1. 청년기은 푸구이의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의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는 변모를 거듭하던 20세기 중국의 각 시대를 상징한다. 푸구이의 세 가지 인생단계는 푸구이와 그의 여러 가족들에 의해 전개된다. 청년기는 젊은 푸구이와 그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중년기는 푸구이와 그의 자식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노년기는 늙은 푸구안의 독자인 푸구이는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로 부유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학교에 가 많은 지식을 쌓아 가문의 번창에 힘쓸 것을 원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푸구이는 도박,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황을 즐겼다. 계속되는 호화로운 생활 속에 푸구이는 노름꾼들에게 많은 토지를 저당 잡혀 결국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푸구이의 청년기에서 중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인물은 푸구이의 아버지이다. 푸구이의 아버지는 전통적 유가사상에 기초한 가부장적 인물로 전통 중국을 상징한다. 유가사상의 피를 이은 푸구이는 관습에 따라 과거시험을 거쳐 관리가 되는 입신양명의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노름에 빠져 기성세대가 일궈온 모든 것을 빼앗겼다. 푸구이의 파산을 들은 어머니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라고 기성세대인 아버지의 책임을 논한다. 이에 아버지 역시 “내 손에서 쉬씨 집안의 소는 양으로 변했고, 양은 또 거위로 변했다. 네 대에 이르러서는 거위가 닭이 되었다가, 이제 닭도 없어졌구나”라고 하며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다. 푸구이 부모님의 말을 통해 쉬씨 집안의 몰락은, 중국 왕조 패망의 이유는 결코 푸구이로 대표될 수 있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장기간 존속되어 왔던 시스템 하자로 인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푸구이 아버지도 과거 푸구이와 같은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문제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푸구이는 과거의 삶의 방식을 답습하였다. 푸구이 아버지와 푸구이가 지속하였던 도박과 노름은 19세기 중국의 시대상을 고려하였을 때 아편을 상징함을 확인할 수 있다. 도박과 아편 모두 강한 중독성을 가진 물체로 건전한 사람이라면, 건전한 사회라면 따라가야 할 메커니즘을 붕괴시켰다. 도박은 쉬씨 가문을, 아편은 중국 대륙을 몰락시켰다. 이 후 푸구이로 대표되는 청나라는 룽얼로 대표되는 강자에 의해 토지를 강탈당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편전쟁 이후 계속되는 서양 열강들과의 전쟁 속에서 여러 영토를 할양해주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고난길의 시작이었고 그의 중년기에 본격적 시련이 시작된다.2.2. 중년기그의 중년기는 농지개혁 이후 인민공사의 설치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중국 공산당 정부 중심의 중국의 모습을 상징한다. 중년이 된 푸구이는 그의 방탕한 청년기 즉, 왕조 중국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며 농민으로서의 삶을 착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성을 방문하였을 때 국민당으로부터 국민당군의 병사로 활동할 것을 강요당한다. 1920-30년 당시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의미한다. 당시 푸구이는 농민으로 주체적 사고를 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었다. 이는 비단 푸구이만의 이야기가 아닌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의 이야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정치와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도자들 간의 방향 차이, 정치 이념차이로 인해 국공내전이 발발하였고 이 속에서 많은 농민들이 희생당하였다. 비록 이러한 국공내전의 시기를 거친 이후 중국은 기존 봉건주의 사회로부터 벗어나 공산주의 국가로 성장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 냈음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무고한 백성들이 그들의 의지와 달리 전쟁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고 그들의 삶을 잃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존의 이념 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어 졌던 반면 인생의 저자는 한 개인의 측면에서 이념 갈등을 다룸을 통해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백성의 고단함에 집중할 것을 독자에게 권유하였다.전쟁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푸구이는 다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아내, 평샤, 유칭과 함께 삶을 영위해 간다. 하지만 기쁜 날도 잠시 그의 가족은 계속되는 배고픔으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이는 모택동 주도의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상징한다. 모택동은 소련식 공산주의를 넘어선 자신만의 이상적 사회주의의 도래를 원하였다. 그의 이상실현에는 공업적 발전은 필수적이었기에 대대적으로 무리한 공업중심의 발전이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발전은 더디게 진행되었고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의 딸 펑샤 역시 아들을 낳는 과정 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아내 역시 계속되는 질병 속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푸구이를 제외한 그의 가족 모두의 죽음은 전통 왕조 중국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고 동시에 국공내전을 시작으로 한 근대, 현대 중국의 아픔을 상징한다. 저자는 푸구이 가족 전원의 죽음을 통해 모택중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모택동 한 개인의 이상실현이라는 명분 하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백성들 역시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중국의 상처는 푸구이 중년기에 중단되지 않았고 노년기에도 역시 지속되었다.2.3. 노년기그의 노년기는 모택동 정부의 실패 이후 등장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치 이후의 중국을 의미한다. 문화대혁명 이후 많은 중국 지식인들은 순수한 공산주의의 실현화의 불가능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후 권력을 잡은 등소평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유지하지만 약간의 체제 이완을 허용하며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특징은 본 책에서 크게 2번에 거쳐 확인할 수 있다. 첫번째로 병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병원은 유칭의 죽음을 시작으로 해서 계속해서 『인생』 후반에 등장한다. 병원은 기존 전통 중국의 한약방과 다른 양약의 상징 즉 서양문물의 상징이다.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이후 멈춘 중국산업의 발전의 촉구를 위해 개혁개방의 시대의 도래를 인정하였다. 즉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비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얼시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얼시는 근대화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시멘트 사이에 끼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혼란에 빠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황 해결책인 시장의 도입마저 부정적 상황을 타개할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계속해서 자본주의의 상징들이 푸구이 주변인물들의 죽음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저자의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마지막 그의 가족인 얼시와 쿠건의 죽음설정을 통해 개혁개방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모습 역시 비판하였다. 하지만 노년기에서 얼시와 더불어 쿠건까지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쿠건의 죽음은 본 책이 단순히 중국 과거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각을 보다 선명히 보여준다. 쿠건은 농아인 펑샤와 목에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얼시 사이에 탄생한 인물로 얼시 이후의 계속해서 나아갈 현대 중국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러한 쿠건은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아 요절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왜 하였을까? 필자는 본 책의 저자인 위화가 중국 과거와 더불어 중국 미래에 대해 역시 비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바라보는 서술자인 ‘나’의 모습을 여유롭게 표현함을 통해 그리고 결국 살아남은 푸구이의 삶이 소 한마리와 함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과거 풍요로웠던 삶에 대한 굉장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위화를 비롯한 중국은 청일전쟁을 비롯한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전통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해혁명을 비롯한 다양한 혁명을 통해 봉건주의 중국을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없애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모택동 주도하에 이루어진 문화대혁명 시기에 폭발하였다. 공자로 대표되는 중국사상의 근간마저 붕괴되었고 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개혁개방시대로 대표되는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자 그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뿌리는 지워질 수 없는 봉건시대의 중국에 있음을 파악하였을 것이다. 위화 역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꼈고 이를 노년기의 푸구이의 적적한 삶과 전체 서술자인 나의 여유로운 과거 전통 중국의 농민생활에 해당하는 생활을 통해 표현하였다. 또한 이러한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채 서양식 발전 노선을 추구하는 현대 중국에 대해 쿠건의 죽음을 통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죽음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푸구이는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메데이아를 통한 신화 비틀기: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고1. 서론페르세우스, 테세우스,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 이야기는 남성 영웅들이 험난한 모험 속에서 무수한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영웅들은 신들과 다른 인간 조력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련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영웅 이야기는 그들의 영웅적 면모를 강조한다. 이러한 영웅 이야기에 여성들은 종종 부가적 인물로 등장하여 남성 영웅의 성공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죽이는 과업이후 돌아오는 과정에 안드로메다를 얻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는 페르세우스와 달리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모험 과정에서 헬레네와 히폴리테 등의 여성을 얻는다. 하지만 이아손 영웅 이야기에 등장하는 메데이아는 다른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들과 사뭇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황금빛 양의 모피를 구하기 위해 콜키스에 도착한 이아손과 사랑에 빠져 그를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이아손을 위해 고향과 가족을 배신하고, 이아손 성공의 방해물인 펠리아스를 죽인다. 이아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녀이지만 이아손은 결국 메데이아를 버리고 성공을 위해 크레온 왕의 딸과 결혼하기로 선택하고 이에 분노한 메데이아는 그를 향한 철저한 복수극을 계획한다.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첫 만남에서 시작된 그들의 사랑과 그들사랑의 마침표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메데이아』를 여성과 남성 간의 사랑싸움에 관한 것이라고 인지하며 메데이아를 사랑에 미친 악녀로 기억한다. 사랑을 위해 잔인한 행동을 서슴치 않는 그녀의 행동은 이러한 사고를 갖게끔 한다. 과연 『메데이아』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랑 이야기이며 메데이아는 그저 사랑에 실패하고 폭주하는 여자인가? 『메데이아』의 두 주인공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깊이 분석해보면 본 이야기가 단순히 두 남녀의 치정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님을 파악할 수 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사랑하는 한 인물임에 동시에 아티카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콜키스 출신으로 이방인이자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해당한다. 여성과 이방인이라는 그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이아손을 선택하고 이아손 영웅 이야기의 전반에 등장하며 메데이아는 주체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러한 메데이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메데이아』의 복합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메데이아 설화는 메데이아라는 복합적 성격을 가진 여성 인물을 설정함을 통해 기존 남성 중심의 신화를 비트는 탈 시대적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2. 본론2.1. 메데이아의 도구적 사랑『메데이아』의 표면적 주제는 자신이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한 한 여인의 잔혹한 복수이다. 이아손은 펠리아스로부터 과업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이올코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콜키스에 도착했다. 메데이아는 외적 매력을 가진 이아손에게 첫눈에 반해 그를 위해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고 이아손이 황금빛 양의 모피를 얻는 데 조력자로서 큰 도움을 준다. 이후 이아손과의 사랑을 약속한 맹세만을 믿고 정처 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이렇듯 그녀 행동의 근원적 동기는 사랑이다. 과연 메데이아의 사랑은 매력적 외모를 가진 이아손을 소유하고자 하는 에로스적 사랑만을 의미하는가?“내 모국은 미개한 나라, 내 동생은 아직 어리다. 그리스 영웅을 구하는 영예, 이 땅보다 훨씬 나은 나라, 먼 바다 해변까지 그 이름이 두루 알려진 나라에 대해 내가 얻을 새로운 견문. 이것이 어찌 고귀한 것들이 아닐까 보냐. 그래, 그런 도시의 예술과 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온 금은보화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아손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아손을 지아비로 섬기면 온 세상 사람들은 나를, 하늘의 사랑을 입은 여자라고 부르겠지. 내 권세가 별을 찌를 만큼 드높아질 테지.”메데이아가 이아손에게 사랑을 느끼고 고뇌에 빠졌을 때의 독백이다. 이를 통해 그녀의 ‘사랑’이 단순히 한 남성에 대한 사랑에 국한된 작은 개념이 아님을 파악할 수 있다. 메데이아는 콜키스의 왕족이지만 콜키스는 아티카 중심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국가라는 점에서 문명인에 속하지 않는다. 더불어 왕족이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기에 남성의 사랑만이, 그리고 남성의 성공에 의탁하는 것만이 생존하는 방법이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메데이아의 사랑은 순수한 한 남성을 향한 에로스적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낳은 그녀의 성공의 일종의 도구라 해석할 수 있다. 그녀는 이아손이라는 매력적 남성을 소유하길 원하는 동시에 그녀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고자 가족을 버리고 이아손이라는 이방인을 선택한 것이다. 이아손이라는 그리스 영웅의 아내의 길을 걸음으로 메데이아는 광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성과 비문명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남성을 선택하는 메데이아의 모습은 기존 그리스로마신화가 다루는 순종적 여인상과 사뭇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인간 여성들 중 대부분은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인지하고 있다하더라도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비탄하며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자신의 한계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목소리 높여 행동하는 주체성을 보였다. 그녀의 주체적 면모는 이아손을 선택한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2.2. 메데이아의 주체적인 영웅적 면모메데이아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녀의 주체적 행동을 파악해보았다. 메데이아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아손이라는 영웅의 모험이야기로 표면적으로 이아손이 주인공이고 메데이아는 이아손 성공을 위한 부차적 인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아손 모험 이야기’라는 타이틀과 다르게 이야기 전반적으로 메데이아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아손은 기존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헤라클레스와 다른 영웅상이다. 기존의 영웅들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고난을 헤쳐 나갔다. 이아손 역시 무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가 역경을 헤쳐 나가는 방식은 그의 매력적 외모라는 무기를 활용하여 주위 인물을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아손의 조력자 중 메데이아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이아손의 1차적 과업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마법을 사용해 약초를 만들어 이아손이 손쉽게 모피를 획득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든다. 또한 판본에 따라 전해지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메데이아의 배신을 알고 이아손과 그녀를 쫓은 아버지의 군사를 따돌리기 위해 동생을 찢어 죽여 바다에 그의 시체를 던진다. 이후 이아손에게 왕위를 약속하였지만 왕위를 넘기지 않는 펠리아스의 딸들을 꼬셔 펠리아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결국에 성공하는 것은 이아손이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메데이아라는 배후의 인물을 통해 손쉽게 성공을 획득할 수 있었다. 반면 메데이아는
옹정제의 동력, 두 가지 정체성에 대한 집착: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을 읽고동양사학과 2016-17343 국윤지서론청나라는 극소수의 만주족이 절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피라미드형 구조의 특수한 국가로 불균형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약 300년간 존재하였다. 옹정제는 이러한 청나라의 5대 황제이자, 북경에 거주하는 청나라의 3번째 황제이다. 옹정제는 기존 강희제 시기의 정치보스 중심의 사회를 전복하여 강력한 황권을 획득하고자 하였고 이에 군주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는 『어제붕당론』을 반포하였다. 또한 만주족이라는 그의 두번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華夷一家를 실현하는 『대의각미록』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그의 독재군주제의 바탕이 되었고 옹정제는 13년간 강력한 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옹정제』의 저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강희제 후기의 혼란한 청 황실사부터 옹정제의 업적 및 그의 정치동력원을 살펴보며 옹정제의 황제로서의 역량을 긍정하였고 옹정제의 선정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천명을 지목하였다. 본 서평에서는 옹정제의 정치동력원으로 지목된 천명에 의문을 가지고 그의 동력을 해체해 보았다.본론2.1. 옹정제의 정책옹정제는 청나라의 황제로 중국의 황제이자 만주족이라는 독특한 2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곧 청나라의 기틀을 위협하는 화이사상으로 전개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였고 이에 『어제붕당론』을 반포하고 『대의각미록』을 편찬하였다. 『어제붕당론』은 옹정 2년 옹정제에 의해 직접 저술된 것으로 크게 문인붕당의 해악과 붕당 문제의 연원과 이에 대한 논리적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옹정제는 송대 구양수의 붕당론에서 비롯된 진붕을 비판하며 당은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으로 오직 소인에게 있음을 지적하며 붕당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옹정제는 붕당 중심이 아닌 군주 중심의 강력한 통합을 주장하였다. 그는 강희제 시기의 정치 보스중심의 정치를 직접 목격하였다. 관대한 황제 아래 수많은 정치가들은 각자의 붕당을 결성하였고 자본과 결탁하였다. 강력한 군주제는 정교한 관료제를 필요로 하지만 자본과 결합한 막강한 관료제는 전제군주제의 방해물로 작동한다. 정치세력은 정치권력의 흐름에 편승하고자 하였고 막후세력으로 성장하여 황실을 조종하고자 하였다. 이는 두 차례에 거친 황태자 폐위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정치보스 시기를 직접 목격한 옹정제는 정치 보스들로 이루어진 붕당, 내막정치에 대한 공포감을 느꼈고 어제붕당론을 통해 타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본디 옹정제는 유력한 황자가 아니었던 만큼 견고한 지지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고 그렇기에 다른 유력 황자들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는 옹정제의 중국 황제로서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었기에 그는 가혹하다 평가될 만큼 형제들에 대한 강력한 압박을 시행하였다. 팔아거와 구아거의 황족으로서의 이름을 박탈시키고 지방으로 유배 보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였다. 자신의 동복동생인 십사아거에게도 형제 이전에 자신의 신하가 될 것임을 강조하였으며 개선장군이었던 십사아거의 공에도 불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변방으로 좌천시켰다.옹정제는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가지고 있었고 화의사상을 방지하기 위해 『대의각미록』을 편찬하였다. 『대의각미록』은 주자학자 여유량(呂留良)이 주장한 화이사상의 영향을 받은 증정(曾靜)이 배만을 위한 거병을 하도록 총독을 종용하다가 붙잡힌 사건을 계기로 편찬된 것이다. 옹정제는 Hyperlink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6466&ref=y" 청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논설에, 증정 등의 신문(訊問)에서 있었던 문답과, 그들이 전향하기에 이른 경과 등의 기술을 곁들여 간행했으며, Hyperlink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4361&ref=y" 관료나 독서인들의 필독서적으로 삼게 하였다. 『대의각미록』 편찬 과정 중 옹정제는 시골 선생에 불과한 증정의 사상을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옹정제는 증정과 여러 차례에 거친 대화 즉, 교화의 과정을 거쳤다. 옹정제는 그의 주접을 증정에게 보임을 통해 그의 정치에 대한 열정을 호소하였고 이를 통해 증정의 화이사상을 제거할 수 있었다. 반역사건을 상세히 기술한 서적을 국가적으로 널리 배포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명나라 초기 주원장이 모든 신민에게 정적들의 배신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리고자 했을 때 비슷한 수단을 사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반포가 실시되었다. 앞서 언급된 이외에도 황권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시도들이 이루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옹정제는 13년간 강력한 전제군주로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옹정제를 통해 보다 강력해진 청나라는 건륭제 시기에 꽃을 피웠다.2.2 옹정제의 동력『옹정제』의 저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청나라 초기의 역사를 ‘기적’이라 지칭한다. 만주의 소규모 부족에서 흥기한 누르하치 일족은 만주 일대를 통일하였고 인구 면에서 거의 100배가 넘는 명나라와 전쟁을 계속하며 순치제에 이르러 베이징 입성에 성공하였다. 옹정제 역시 청나라 초기 역사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력한 다른 황자들을 제치고 황위에 오른 ‘기적’을 보인 인물이다. 이에 이치사다는 기적을 통해 황위를 획득한 옹정제가 초기에 큰 불안감을 느꼈고 이후 천명에서 안정감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라고 오인한 그는 그 결심 앞에서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중 모든 의혹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길을 천명에서 찾아내었다.”라고 평가하며 천명사상이 옹정제에게 있어 버팀목이자 동력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옹정제는 “천명은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천하 만민의 생활을 보장해주고 각각 분수에 맞게 안주시키는 것이 천자에게 부여된 임무이며, 만약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천명은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라고 천명사상을 해석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선정을 펼쳤다는 것이 미야자키 이치사다 주장의 골자이다.앞서 본론 2.1.에서 언급되었던 바와 같이 옹정제는 강희제의 수많은 아거들 중 사아거 출신으로 본디 유력한 황위계승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거친 황태자 폐위사건, 강희제의 팔아거 경계 등 예측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이에 옹정제가 강희제의 뒤를 잇게 되었다. 수많은 정치보스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마흔 여섯 살의 늦은 나이에 황제에 부임할 수 있었다. 오로지 침묵과 인내만이 생존의 길이었던 황궁 속에서 옹정제는 침묵하며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끝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에게 있어 자신에게 기회를 부여한 하늘 즉, 천명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존재임은 확실하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천명은 그에게 안정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사명감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피상적인 천명만이 그의 선정에 동력이 되었다는 서술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한계는 옹정제의 여러 정책들에서, 다른 황자들에 대한 강력한 압박에서 보다 명확히 포착할 수 있었다.그는 다른 유력 황자들을 비롯한 정치보스의 존재에 극도로 민감하였고 그들에 대한 반발은 그들에 대한 강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이는 앞서 살펴본 여러 황자들의 숙청과 어제붕당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옹정제는 만주족으로서의 독특한 황제로서의 정체성에도 민감하여 반역의 과정을 상세히 다룬 『대의각미록』을 편찬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하였으며 시골 선생에 불과한 증정의 사상을 개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골 선생인 증정의 교화에 집착하였다는 것, 이러한 집착은 옹정제의 정치동력원을 잘 설명해준다. 옹정제는 청나라 5대 황제이기는 하나 북경에 입성한 청나라의 3번째 황제 즉, 완벽히 정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청나라 초기의 황제였다. 또한 적자, 황태자가 아닌 사아거 출신으로 미약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초창기 청나라 황제로 절대 다수인 한족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며 동시에 사아거 출신으로 만주족의 인정 역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가 황제에 즉위하였고 그는 거대한 청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이자 한족을 다스리는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저자가 주목한 천명이 옹정제의 위기감을 해소해주는 방안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하늘의 뜻은 결코 그의 본질적 동력이 될 수 없다. 결국 그의 본질적 정치동력원은 옹정제의 중국 황제이자 만주족이라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집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옹정제는 만주족임에 동시에 황제였고 중국 황제임에 동시에 만주족이었다. 그의 위태로운 상황과 그의 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그의 동력으로 작용하였고 그로 하여금 강력한 독재군주로 군림하게 하였다.결론『옹정제』는 강희제 후기의 혼란한 청 황실사부터 옹정제의 업적과 그의 정치동력원을 다룬다. 저자는 기존 옹정제에 대한 평가가 그의 독재정치에 집중하여 그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며 이후 건륭제 시기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옹정제의 황제로서의 역량을 긍정하였다. 또한 이러한 옹정제의 선정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천명을 지목하였다. 본 서평에서는 이러한 옹정제의 정치동력원으로서의 천명에 의문을 가지고 그의 동력을 해체해 보았다.옹정제는 본디 유력한 황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청나라 황권이 확립되기 이전 초기 청나라의 황제였다. 불안정한 그의 위치는 그의 만주족 중국 황제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렇기에 옹정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집착하였고 이는 그의 정치동력권으로 작동하여 선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천명사상은 그에게 있어 결코 무시될 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13년간 옹정제의 정치업적의 동력을 일반화하는 것에는 비약이 존재할 수 있다. 저자는 ‘천명’이라는 설명의 일반화 오류를 범하였다.
: 영화 을 보고동양사학과 2016-17343 국윤지서론“아름다운 풀들이여 저 은빛바다를 건너 신비한 바다 가까이 가고파”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영화 은 시작한다. 노래와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본 영화는 68혁명 시기를 바탕으로 당시 이상향을 꿈꾸던 신진세대들의 열망 및 고뇌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시네마테크의 폐쇄를 시작으로 한 프랑스 정부의 억압적 태도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는 크게 매튜, 테오, 이사벨 그리고 테오의 부모님이 등장한다. 청년들은 당시의 신진세대를, 부모님은 기성세대를 상징하며 영화 내내 진행되는 논쟁을 통해 각자의 가치관을 표출한다. 본 서평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에 집중하여 각 인물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해체해보았다. 68혁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감독은 인물들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를 현실적으로 드러냈고 마지막 장면을 통해 68혁명의 한계점을 지적하였다.본론2.1. 매튜와 테오매튜는 미국인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온 인물이다. 프랑스 유학 도중 프랑스 영화에 매료되어 사이요 왕궁 시네마테크를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다양한 영화를 관람한다.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가치판단을 보류한 채 모든 종류의 영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청년들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말로 문화부장관은 시네마테크 폐쇄를 결정하였고 자유의 상징인 시네마테크의 폐쇄는 당시 지식인들의 격분을 자아내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정권의 탄압에 궐기하였고 매튜와 테오는 이러한 집회에서 첫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매튜와 테오, 이사벨은 영화라는 주요 관심사를 바탕으로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고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논쟁을 벌이며 각자의 가치관을 공유하였다. 하지만 3명 모두 당시의 신진세대를 상징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로의 가치관 차이는 영화 초반의 가족 저녁행사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두드러지집회에 참가하는 테오에게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망상으로 벗어나 우리 역시 부정적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테오의 아버지는 시인으로 과거‘시는 탄원서이다. 탄원서는 시다.’라는 저항시로 과거에 혁명적 정신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점차 기성세대가 됨에 따라 사회와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며 보수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테오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감을 드러내며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을 정신개조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매튜는 시네마테크의 폐쇄에 대해서는 테오와 같은 태도를 취하지만 그의 아버지에게 있어 보다 온화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미온적 태도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테오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반발감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사회에 대한 저항심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테오의 사상은 그의 방이 모택동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테오는 모택동을 동경하며 모택동을 주도로 진행된 문화대혁명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는 홍위병들은 총이 아닌 책을 들고, 즉 폭력적이 아닌 문화적 태도를 취해 그들의 이상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문화대혁명은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라고 주장하며 모택동을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여겼다. 이에 대해 매튜는 모택동의 혁명이 영화에 해당된다면 이는 주연배우가 없는 알맹이 없는 영화라 정의하였다. 홍위병들은 그들의 주체적 생각이 배재된 채 모택동의 주도하에 모택동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을 들며 혁명에 참여하였고 그들은 엄청난 폭력을 자행하였다. 매튜는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모택동의 영화는 엑스트라만이 참여한 영화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테오의 현 상황이 굉장히 모순됨을 지적하였다. 테오는 계속해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혁명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와 달리 테오는 학교에도 나가지 않은 채 매튜, 이사벨과 그의 집에서의 은둔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튜는 이에 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탁상공론 상황에서 벗어나 마지막에 직접 길거리에 동참하여 혁명의 흐름에 참여하였다. 반면 매튜는 직접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채 뒤돌아 섰다.테오와 매튜는 모두 68혁명 시기의 청년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혁명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매튜는 미국인으로 그의 미온적 태도는 당시 미국의 시대적 배경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무리하게 전개하며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태도는 당시 세계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매튜 역시 폭력을 거부하며 이러한 자국의 잔혹한 행태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전쟁에 반대하는 청년들을 감옥에 보내는 등 강압적 행보를 보였고 매튜는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여 부정적 사회현실에 대해 소극적 반대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테오는 전 세계에서 진행된 68혁명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프랑스의 국민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보다 적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테오는 전쟁에 대한 환멸감을 드러내며 미국 정부에 대해 암묵적 동의를 취하는 매튜를 비겁하다 지적한다. 또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지막 시위 장면에 현실에 타협해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매튜와 달리 시민들을 탄압하는 경찰들을 향해 폭탄을 날리며 사회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매튜가 현실주의자에 속한다면 테오는 이상주의자에 해당하였다. 감독은 이러한 두 종류의 신진세대를 명시함을 통해 당시 격동하는 사회상을 현실적으로 드러냈다.2.2. 이사벨극 중 매튜와 테오는 각자의 가치관에 관한 활발한 논쟁을 펼치며 각각이 상징하는 바를 뚜렷하게 명시하였다. 하지만 이사벨은 자신의 가치관 및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다. 과연 이사벨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사벨은 영화 내내 유아적 행동을 반복하며 아직 정서적 성숙이 완성되지 않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을 상징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을 제외한 국민들은 시네마테크의 폐쇄로 대표되는 국가의 억압적 태도에 대해 매튜스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프랑스의 각성은 이사벨의 성숙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이사벨은 선구자에 해당하는 테오에 의해 매튜와 첫 경험을 가지게 된다. 성 행위 도중 테오는 계란을 깨트리는데 계란의 깨짐은 각성의 클리셰이며 즉, 이는 프랑스 국민의 각성을 의미한다. 이사벨의 첫 경험이 프랑스 국민의 각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성 행위 장면과 밖에서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항해 지식인들의 시위장면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첫 경험은 각성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였고 여전히 이사벨로 대표되는 프랑스 국민은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감독은 매튜와의 데이트를 통해 이사벨이 어른의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프랑스의 성숙을 유도하였다. 이사벨이 매튜와 영화관 데이트 이후 길거리에서 키스를 하던 중 68혁명이 더 확대되는 뉴스 속보가 뜬다. 파리 전역의 공장과 상점이 문을 닫고 학생들과 시민이 68혁명에 참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68혁명이 과거에 지식인만이 참여하는 지식인 주도의 운동이었다면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하며 진정한 운동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감독은 이사벨의 성장과정을 통해 프랑스 국민의 정치적 성숙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이사벨의 성숙이 이사벨 주도하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테오와 매튜라는 외부인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국민의 각성은 한계점이 있었고 이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다 극명히 드러난다. 매튜, 이사벨, 테오는 집 밖으로 나와 시위의 행렬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에 매튜는 현실적 태도를 취하며 참여하지 않았고 이사벨에게 역시 자신과 같은 판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결과론적으로 이사벨은 테오의 손을 잡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사벨 본인의 의지로 이루어진 행동이 아닌 테오의 권유에 의해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이러한 이사벨의 행동은 당시 68혁명에 참여한 많은 프랑스 국민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주체적 사고 없이 시류에 편승했음을 지적한다. 즉, 68혁명이라는 각성이 실제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격해졌다. 폭력에 대항해 등장한 폭력은 기존 폭력을 압도하였고 피의 흥분은 초심에서 벗어나 폭력만을 위한 폭력을 낳았다. 순수한 혁명이 폭동으로 변질하였다. 이는 테오로 대표되는 당시 청년들이 동경하던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홍위병들은 그들의 이상향을 향해 총이 아닌 모택동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들며 집결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순수한 목적은 단기간에 소멸되었고 유교사상으로 대표되는 봉건사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였다. 혼돈의 문화대혁명은 약 10년간 진행되며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을 마비시켰다. 감독은 위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68혁명이 종결된 2003년에 발표하고 라는 제목을 붙임을 통해 68혁명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영화의 주인공과 같이 68혁명의 주인공은 청년들이었고 그들은 이상주의자였으며 대다수의 그들은 이사벨과 같이 혁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단계로부터 탈피하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청년들에 의해 주도된 68혁명은 순수한 혁명정신을 단기간에 잊어버렸고 방향성을 상실하였다. 감독은 청년들을 ‘dreamers’라고 지칭한다. 순수한 꿈은 있는 그대로 가치가 있지만 지나친 꿈은 몽상, 망상으로 변질한다. 테오와 이사벨은 꿈을 꾸었고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도전하였고 아직 그들은 어렸기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영화는 세 주인공에 집중하여 서사를 진행함에 따라 68혁명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도전에 대한 가치판단은 보류하였다.결론본 영화는 시네마테크 폐쇄에 대한 반발을 시작으로 한 68혁명을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혼돈의 시기 속에서 매튜와 테오, 이사벨은 같은 집에 은둔하며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공유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다 극명히 드러난다. 테오와 이사벨은 시위에 참여하였고 매튜는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해 살아갈 것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이사.
지원자의 개인적 환경(가정, 학교, 지역, 국가 등)에 대해 설명하고, 그 환경적 특성이 지원자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경험적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저는 중학교 때 반크(사이버 외교부)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알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지만,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 또한 갖게 되었습니다.이러한 반일감정을 지니고 살아가던 중, 중학교 3학년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가 채택되면서 일본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어 선생님께서는 일본 동요와 전통놀이인 켄다마와 후쿠와라이 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등 놀이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일본의 문화 자체를 접할 수 있었고 이러한 수업방식을 계기로 일본어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흥미를 바탕으로 일본어를 더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어 서울외국어고등학교 일본어과에 진학했습니다.일본의 날을 맞아 다코야키와 당고를 팔고 일본의 전통복인 유카타를 입게 해주는 행사를 하는 등 학교에서 일본과 관련된 여러 활동이 진행되었는데 저는 그 중, 저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쿄도립 고등학교 학생들이 저희 학교를 방문한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한 학생당 일본 학생 2명을 배정받았고, 저희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학교 소개를 했습니다. 그들은 화답으로 K-POP의 여러 춤과 배를 탈 때 행하는 일본 전통 춤(소란 부시)을 준비해 보여주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일본인에 대한 저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틀림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저를 따뜻이 대해줬던 그들을 통해 일본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호감은 일본여행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해주셨고, 마침내 2학년 때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오사카성과 나라성과 같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봉건시대적 건축양식을 띈 건축물을 보며 한국과 다른 일본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 중세사에 대한 관심은 저의 역사학자라는 진로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