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제목: 죽은자의 정치학 발행: 2014 지은이: 하상복 사자(死子)의 정치, 국립묘지 빵떼옹이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국립묘지다. 묘지에는 볼테르와 루소와 같은 영웅들과 위인들이 묻혀있다. 묘지는 고유 번호를 지닌 묘소들로 이루어 져 있는데 묘소들은 ‘혁명의 기억’,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와 같이 특정한 의도와 상징적 의도를 가진 공간이다. 죽은 자들은 빵?璨价 지하묘지를 대혁명과 공화국의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는 기억공간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수플로와 같이 복고 왕정의 정치적 열망을 간직한 존재 또한 공존하며, 지상의 벽화와 부조, 조각상들을 통해 절대군주제와 종교적 신념의 구체제적 이념과 공화주의와 세속성의 신체제적 이념이 함께 존재한다. 이는 대혁명 이후 내전으로 점철된 격동의 역사와 혼란을 반복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미국 남부 버지니아 주에 속한 국립묘지이다. 이 묘지 또한 번호로 구역이 구분되어 있으며, 남북전쟁, 세계대전 등과 같은 여러 전쟁의 전사자들이 대체로 영면해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남북전쟁이 초래한 정치적, 이념적 분열과 대결의 역사를 간직하면서도 대결과 적대를 공존과 통합으로 이끈 역사도 표상하고 있다. 초기 연방군만 안장될 수 있었던 이 묘지는 화해의 분위기에 따라 남부군도 수용되며 복잡한 정치의 공간이자 화합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알링턴 국립묘지가 말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화합, 그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된 개인들에 대한 신성화이다. 이는 전쟁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개인들을 공적 존재로 탄생시키며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인다. 국립 현충원은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국립묘지이다. 현충원이 위의 두 묘지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은 공간의 구분이다. 국가원수 묘역, 애국지사 묘역 등으로 구분하며 구역에 따라 묘지의 크기가 달라진다. 이러한 권력과 위신의 차이에 따른 공간은 묘지의 군사주의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여순반란사건에 의해 순직한 경찰관들이 현충원 탄생의 계기가 된 만큼 반공주의적 색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적, 반공주의적 색체는 “친일이라는 반민족주의만이 아니라 군사쿠데타라는 반민주주의마저 탈색해버린다.“ 국립묘지는 국가에 의해 조성된 만큼 어떠한 의도와 상징을 가지고 만들어 진다. 빵떼옹과 알링턴국립묘지는 갈등의 구조 속에서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현충원은 여전히 정치의 도구로 사용되며 국가권력과 민주화의 이념 대립 위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당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며, 보수당 정치인들은 현충원에 방문한다. 이러한 양상을 보면 마치 죽은 자가 산 자를 조정해 정치를 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의 해결법을 책에 언급한다. “국립 현충원과 민주묘지 사이에 ‘새로운 묘지’를 건립하는 것, 그 묘지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모두가 인정하는 애국적 인물을 받아들인다. (생략) 만약 그 새로운 묘지가 어느 누구도 잠들어 있지 않는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말해주는 상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노트 책 제목: 자기만의 방 / 달려라, 아비 출간: 2011 / 2005 지은이: 정민우 / 김애란 출판사: 이매진 / 창비 당신이 원하는, 피하고 싶은 불편함 집이란 무엇인가. 한 학생에게 고시원은 안락한 나의 집이 되어 주기도 했고, 다른 학생에게 고시원은 벗어나고 싶은 늪과 같은 곳이다. 작가는 작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정의는 “공간과 주체 사이의 일종의 관계 규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 고시원은 매우 특수하게 나타난다. 집의 한 형태이면서, 많은 사람에게 집이라고 불리길 거부당하는 공간이다. 고시원은 집이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닌 방황하던 시기,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켜주는 상징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힘든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과일을 먹으며 “참 그땐 힘들었지, 그래도 그게 다 추억 아니겠어?”라며 회상하듯 고시원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집”의 유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집의 유무는 그 사람의 물질적인 계급성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안락한 집이 있는 누군가에게 고시원은 단지 지나치는 여행지일 뿐이고, 그러한 집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고시원은 결코 집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기에 어렵사리 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간이 고시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집을 만들고, 집을 만들지 않는다. 자신의 공간이기에 자신에게 맞추어 조금씩 변화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 집을 만들어 가면서도 자신의 집이 아니기에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한다. 이러한 역설적이며 불안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쫓겨 다닌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 시간을 집어삼키는 공간이자, 공간에 덫을 놓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고시원에 느끼는 이질적 감정을 편의점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하려 한다. 그렇기에 수업시간에 몇 번 앉게 되는 자리는 나의 자리가 되고, 그 자리에 앉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낀다. 편의점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화자가 단골 편의점을 계속 방문하며 그 공간과의 하나의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장소에서 자신이 노출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마치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이 집을 만들 면서도, 일정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으려 관계 규정을 하는 것 같다. “‘집’이라는 명명은 공간과 주체 사이의 일종의 관계 규정이다. (중략) 나는 이곳에 산다, 나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주거 공간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빙빙 돌려가며 끝내 사랑한다는 표현만은 아끼는 치졸한 연인처럼 그 주거 공간에 집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집에 살면서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며 일정 이상의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편의점, 공항 라운지와 같은 공간에서 익명성에 숨어 불편함을 애써 느끼지 않으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사용하려 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고는 두렵고 막연한 사회에 대한 방어기제로 작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독서노트 책 제목: 문화사회학 / 장소와 장소상실 출간: 2012년 / 2005년 지은이: 한국문화사회학회 / 에드워드 렐프 출판사: 살림 / 논형 보통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 공간에 대한 정의 나는 여행을 갈 때에는 웬만하면 기차를 이용하려 한다. 버스를 타면 왠지 모르게 잠이 온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나는 길에는 자지 않기 위해 기차를 타게 된다. 뭔가 기차라는 공간은 여행과 굉장히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작가는 이러한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은 공간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공간 또한 각자의 추억과 생각에 기초하여 하나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상호 교수님이 수업 중에 공간이란 어떠한 사람이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그곳이 공간이 된다고 하셨다. 예를 들어 종교인들이 모여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그곳은 하나의 교회가 된다. 하지만 최근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공간의 개념이 바뀌고,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 예로 생각난 것이 최근 부동산 시장이다. 하나의 집의 공간적 가치는 그 집에 누가 살았는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가가 아닌 평당 얼마의 가치를 지니는가, 이 집의 수요가 존재하는가와 같은 개념으로 여겨진다. 작가가 공간의 유형을 나눈 개념들이 나에게 굉장히 재밌게 다가왔다. 특히 ‘공간소’라는 개념과 ‘사이버스페이스와 미디어스페이스’의 공간화이다. 공간소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공간의 기본단위를 뜻한다고 하는데 오락실, 지하철과 같은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곳곳에 편재하고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적 장치를 말한다. 천선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맥도날드,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또한 공간소로 분류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또한 사이버스페이스와 미디어스페이스에 대해서는 이강형 교수님께서 사이버상의 공간을 공론장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냐, 사이버상의 개인들은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대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교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다시금 대답했을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보통의 장소의 변명 “현대 도시인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자신이 사는 도시 여기저기를 제대로 찾아다닐 수 있으면서도 원주민 사냥꾼이 자기 영역 내 아주 먼 거리를 길을 잃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에는 깜짝 놀란다.” 작가가 쓴 전반적으로 어려운 글에서 나에게 확 와 닿던 부분이다. 우리는 한참이 떨어진 식당을 찾아갈 때도 별도의 지도 없이 쉽게 찾아가곤 한다. 하지만 가끔 다큐멘터리에서 원주민들이 나무숲을 헤치며 강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우리들은 깜짝 놀란다. 작가는 이러한 예시를 통해 무의식적 장소감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공간적 이동 능력이 증가하여 이러한 무의식적 장소감의 훼손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무의식적 장소감과 동시에 의식적인 장소감의 필요에 대해서도 적혀있다. 장소를 이해와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며, 분위기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을 했다. 우리는 어느 공간에 가면 의식적으로 그곳의 분위기를 파악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의식의 유무 외에도 진정성과 같은 개념으로 공간에 대해 설명한다. 작가는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하위개념이 아니라 다른 차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진정하지 못한 장소’에 대한 불만이 글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졌다. 그러한 작가의 시선은 관광에 대한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작가는 관광이라는 행위나 수단이 방문하는 장소보다 더 중요해진 비진정성에 대해 냉소적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집을 하나의 키치로 보는 부분이었다. “집의 의미는…감상에 젖거나 상품화에 의해서도 약화되어 왔다. 잘 알려진 ‘즐거운 나의 집’ 테마를 활용하는 키치적 골동품 취미가 넘치고 있다.” 이와 같은 부분은 현대의 주거 상황을 굉장히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집의 소유는 노후에 이루어지며, 불가피한 터전의 이동이 필요한 이상 지금과 같은 주거 형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집의 의미가 약화된 건 사실이만 이 또한 하나의 주거 문화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일화되고 상품화된 공간에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고, 삶을 만드는 게 인간이다. 과연 똑같은 집이라 해도 사는 사람이 다르다면 같은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라디오에 “요즘 아파트는 아이들의 고향입니다. 우리 건설사는 고향을 짓습니다.”라는 광고가 나온다. 들으면서 이게 바로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옛 초가집처럼 자신의 손으로 지은 집은 아니지만 이제 아파트 또한 개인의 진정성을 담은 하나의 공간으로 여겨져야 한다.
편집을 통한 창조, 러시아 몽타주 이론-3명의 이론가를 통해 본 러시아 몽타주 이론-강의명: 영상 커뮤니케이션담당교수:학과:학번:이름:소설을 쓸때 똑같은 문장을 어디에,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어느 시인은 한 구절의 위치 정하느라 밤을 새기도 한다. 영상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편집이다. 같은 영상물을 가지고도 정반대의 결과물을 내고 영상을 돋보이게 만들며 예술성을 성립시킨다. 그러한 방법을 더욱더 명확하게 하려는 것이 몽타주이론이다. 몽타주란 프랑스어 'monter'에서 유래한 용어로 우리말로는 모으다, 조합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숏과 숏을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몽타주이다.몽타주의 등장몽타주의 등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배경이다. 1900년대에는 1905년, 제 1차 러시아 혁명에 이어 1917년의 3월혁명,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을 포함하여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레닌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1920~30년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했다. 그중 영화를 통해 대중을 계몽하려 했던 지가 베르토프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며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기위해 노력하는 기존의 영화는 부르주아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으며, 현실은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주의'에 입각한 예술적 방법론을 지양했다. 이러한 베르토프의 생각은 그의 작품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드러난다. 새벽의 도시의 모습에서 시작한 영상은 카메라를 든 사나이 등장으로 숏의 길이가 짧아지며 활기를 띄고, 잠에서 깬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남아내며, 그러한 사람의 모습을 찍는 카메라의 모습, 그러한 영상을 편집하는 모습을 이어 붙이고 마지막에는 그러한 영상을 상영하는 극장의 모습까지 담는다. 그는 단순히 촬영한 것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조직을 만들고자 했으며, 각 숏의 길이를 조절하고 리듬을 만들며 충돌이 일어나게끔 했다. 그는 촬영 단계에서는 사실적 기록을 중시하며 "카메라가 포착한 객관적 사실은 편집을 통해 예술성을 가진 작품이 된다" 라고 주장했다.-지가 베르토프-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몽타주 이론의 확립1. 레프 쿨레쇼프레프 쿨레쇼프는 이러한 베르토프의 시도를 실험을 통해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몽타주에 대해 의미는 한 숏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숏의 병치에 의해 창조된다는 공통된 생각을 바탕으로 간단한 실험을 했다. 그는 모주힌 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촬영한 숏을 수프접시, 관 속의 여자, 장남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의 숏과 연결했다. 각각의 영상을 본 관객은 그의 영상을 극찬했다. 수프와 연결된 배우의 얼굴은 배고픈 얼굴로, 관속의 여자와 연결된 배우의 얼굴은 깊은 슬픔의 얼굴로, 아이의 숏과 연결된 배우의 얼굴은 기쁨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의미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한 맥락에 의해 의미가 생산되는 것이다. 그 이후 숏의 연결로 인해 전혀 다른 의미, 새로운 이미지가 생산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창조적 지형학이라고 불리는 실험도 이루어 졌는데 한 청년이 러시아 도심을 걷고 있는 숏과 한 여인이 러시아의 다른 거리를 걷고 있는 숏, 그리고 두 사람이 제 3의 장소에서 만나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 미국의 백악관 계단의 숏을 이어 붙이면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이 백악관에서 만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영상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장소가 하나의 장소로 통합되며 현실이 조작된다.2. V.I 푸도프킨푸도프킨은 커트의 연결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기술에서 예술로 발전시켰다. 그는 몽타주를 적절히 사용하며 관객을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오게 만들었다. 그는 몽타주를 단순히 한 장면과 한 장면의 충돌뿐만이 아니라 숏의 순서에 따라서도 의미가 바뀐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발견하였다. 샷의 연속성을 강조하였으며, 몽타주 이론은 숏과 숏의 연결에 있어서 방해되는 요소들은 배제시켜 합리적인 연결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연결을 '통합적이고 중단되지 않는 연속적인 액션'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실험에서 먼저 첫 번째 숏에는 웃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두 번째 숏에는 권총을 가르키는 손, 세 번째 숏에는 놀라 표정을 연결했다. 이러한 연결에서 영상 속 남자는 권총을 보고 놀라는 겁쟁이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의 순서를 거꾸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놀란 남자가 권총을 보고 웃는다. 이러한 모습에서 그 남자는 굉장히 용감한 남자가 된다. 그는 몽타주란 사건들을 잘 연결해 현실을 보다 인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완화된 사실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푸도프킨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이 에이젠슈타인이다.3.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푸도프킨이 A숏과 B숏이 연결돼 AB숏을 만든다는 것과 다르게 에이젠슈타인은 A숏과 B숏이 합쳐져 C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벽돌을 쌓는것처럼 연관성 있는 영상을 병치하여 의미 전달한다고 생각한 푸도스킨과 반대로 에이슈타인은 대립되는 숏들의 충돌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충돌은 마르크스의 변징법적 유물론을 통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변증법이란 정(正)이 있으면 정에 도전하는 반(反)이 있고, 이러한 반목이 결국 합(合)을 이루고 이러한 합은 또 다른 반에 직면하여 새로운 합을 이루며,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진리에 근접해 간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기계적인 쿨레쇼프의 몽타주 기법을 비난하였으며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의 결합에 의한 새로운 의미, 개념으로의 전환을 추구했다. 그는 화면들을 연결할 때 충돌이 생기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충격은 관객의 마음에 하나의 갈등으로 자리 잡고, 그 갈등이 새로운 관념에 대한 지각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에이젠슈타인은 이러한 과정을 만들어 내는 몽타주를 변증법적 몽타주라고 물렀다. 그러한 변증법적 몽타주를 체계화 시키면 다섯 가지로 나타난다.몽타주원리전함 포템킨운율몽타주내용에는 관계없이 화면의 길이를 결정해 병치하여 음율을 맞춘다. 숏과 숏의 길이에 의해 생기는 충돌이다.전함 포템킨중 오뎃사의 계단에서 일어나는 학살 장면 중 강도가 더 해질수록 화면의 길이를 짧게 편집하였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편집 속도를 증가시켜 긴장감과 공포의 분위기를 더함.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김혜자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배우 김혜자씨. 새하얀 백마를 타고 등장하는 신랑과 리무진을 타고 들어오는 신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먹을 게 없어 풀을 뜯어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위해 배우 김혜자씨는 자신의 명예,부 등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에게로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본 처참한 풍경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책으로 옮겼다. 책표지에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매혹되 펴게 된 책이였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도 죽어가는 이들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 할 뿐이였다.이 책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한 가족이 외식 한번 할수 있는 돈으로 학교도 가지 못한채 입담배를 마는 아이들도 있고, 자신의 앞에서 부모님이 군인에게 목이 베이는 것을 보고나서 그 군인에게 끔찍한 행위를 당한 여자도 있었다. 또한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무더위 속에서도 몇 시간을 걷는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그저 소설속 이야기만 같은 이 이야기는 모두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였다. 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저 살고 있는 장소만 다른 이 사람들은 우리들이 공부가 어렵다고 투덜거릴 때 하루 한끼만이라도 먹기 위해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급식소를 향했고, 우리가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넣어 음료수를 고르고 있을 때, 동물들의 변과 같은 온갖 더러운 오물들이 섞인 물을 마시고, 우리가 감기가 걸려 학교를 조퇴하고 병원으로 향할 때, 이 아이들은 어머니의 오열 속에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더욱 내 자신이 한심했던 것은 이 책을 읽고 잠시 후 밥이 맛이 없다며 투덜거리고는 반 이상을 쏟아 버렸다는 것이다. 과연 내가 이 책에 나오는 무자비한 군인들과 다를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버리는 음식들 그리고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편리하게 욕실에서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물들. 만약 내가 그 음식을, 물을 김혜자씨에게로 보내주었다면 한 아이는 오늘 밤 굶주림을 느끼지 않고 잠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래도 내가 이 아이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인가. 책을 보며 끊임없이 불쌍하다, 불쌍하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누군가가 너에게 너도 김혜자씨처럼 그것으로 가서 저 아이들을 도우며 살라고 한다면 넌 가겠는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결국 내 대답은 이것이였다. ‘차라리 날 죽여라.’ 이것은 어렸을적부터 편안함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선택이였다. 한번도 그들이 겪어본 어려움을 우리는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물었다. 만약 너에게 그들에게 너의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무엇을 내 놓겠는가? 아마 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안에 있는 지폐들을 바라보고는 소심하게 천 원 한 장을 내어 놓고는 그것을 보며 아깝다며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말하겠지. ‘나에게 내어 놓을 것 같은건 없어. 그리고 오늘 친구들이랑 영화 보기로 했으니, 천 원 이상은 줄 수 없는걸.“ 다시 묻겠다. 과연 이런 내가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였던 부분은 어렸을 적부터 사람을 죽여 왔다는 소년병이 김혜자씨가 또다시 그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꺼냐는 물음에 먹을 것도 있고, 힘이 생기니깐 또다시 군인이 된다는 말이였다. 이미 이 아이들은 사람을 죽이며 생명의 소중함에 무감각해진 것이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를 헤쳐야했던 그 전쟁의 참혹한 상황에 익숙해진 것이였다. 이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보지 않는 이들이 자신의 생명은 소중히 지킬 수가 있을까? 만약 이 아이가 소년병이 되기 전에 누군가가 이 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었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사가 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구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 아이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기에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신의 한 달 용돈의 반만이라도 모두 모아 저곳에 보내준다며 저곳의 전쟁은 끝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수많은 인재들이 생겨나겠지. 또 그 인재들은 자신들이 받은 도움을 나누기위해 또 다른 나라의 전쟁을 멈출 것이다. 작은 나눔이 이 지구상에 평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 책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신이여, 이들을 용서하지 마세요.’ 5천여명의 사람이 총, 칼 등 무기로 인해 목숨을 빼앗긴 한 성당 벽에 쓰여 있는 문구라고 한다. 나도 신에게 물어 보고 싶다. 정말 가난으로 병으로 혹은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정말 이 죽음들이 신이 내린 운명이라면 그 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들의 모습을 본다면 이렇게 가혹한 벌도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도 그들은 살고 있고, 하루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면 신에게 감사한다. 그런 ‘천사’들을 위해 김혜자씨는 그 험한 곳으로 간 것이였다. 나는 나눔이란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행복과 배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혜자씨도 그 ‘천사’들에게 나눔을 하고 받는 행복과 배움을 느끼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고 생각한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감옥에 넣는 대신 1년, 아니 반년만이라도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하는 나눔을 베풀어 범죄자들이 자신들이 받은 나눔을 그 ‘천사’들에게 베푼다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