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삶과 문학세계1. 연암 박지원의 삶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서울의 서쪽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하였다. 그곳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박사유를 아버지로 두었다. 성장하면서 몸이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선조의 효심을 흉내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관직에 오르지 못했기에 할아버지가 그를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 28년) 전주 이씨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다. 장인에게 『맹자』를 배워 학문을 시작하였고,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에게서 사마천의 『사기』를 배우며 문장 쓰는 법과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계속 학업을 하며 문장에 대한 이치를 깨달았고, 처남인 이재성과는 문우로 지내며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연암의 생활은 곤궁해졌다. 1761년 봄, 주역을 배우고, 홍대용을 만난다. 연암은 학문에 재능이 있었으나 1765년 첫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여러 번 과거에서 낙방하자 과거와 벼슬을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1767년 아버지 박사유가 죽고,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때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이웃하게 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류를 하였다. 이때를 전후로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한다.1776년 영조가 사망하고 정조가 즉위하였다. 그때 당시 국내는 정조의 측근에 있었던 홍대용이 세도를 잡아 권력을 휘두르던 때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를 공격하였다. 벽파인 박지원은 생활이 위태로워지자 황해도 김천 연암협으로 가 은거하였다. 연암이라는 아호도 이때 이후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고,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1780년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게 된다. 압록강 너머의 열하까지 갔다 오는데, 이때 견문을 기록한 책이 『열하일기』이다. 실학사상을 소개하였으며, 이용후생에 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 이 저술로 인하여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쓴 글이라 하여 문원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1786년(정조 10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1789년 평시서주부, 사복시주부, 1791년 한성부 판관, 1792년 안의 현감, 1797년 면천 군수, 1800년 양양 부사를 맡았다. 지방 수령으로 지방을 다니면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해보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같은 해에 정조가 죽게 되자 1801년 연암은 치사하고 관직에서 물러난다.2. 연암 박지원의 문학세계연암 박지원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과도기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지식인이다. 또한, 북학과 이용후생을 주도적으로 주장했던 실학자이다. 연암의 다양한 작품들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 관심과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가 담겨있다.연암의 대표작이라 전해지는 『열하일기』는 실학자로서, 한 시대를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연암의 면모를 보여주는 저작물이다. 『열하일기』에는 청의 기술문명과 문물제도가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이는 이용후생의 실천 근거로서 연암의 실학사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분류된다.『열하일기』는 연암의 문학이론이 어떻게 실제 작품에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연암은 피서록보에서 부석사에 있는 선비화에 얽힌 사건을 소개하며, 부박한 청년들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글로 남긴다고 하였다. 이를 보아 연암은 글 성정을 함양과 정서를 순화시키기 위한 공리적이고 효용적인 것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암은 조선의 선비들은 춘추대의를 외치면서도 국경 수비는 소홀히 하고, 서민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많은 제도가 있으나 실현하려 하지 않는다며 청의 문물제도와 조선의 문물제도를 비판한다. 또한 실용을 위주로 생각하였기에 사대부들의 허위와 무력함도 비판한다.연암은 글의 본질보다 표현 기법이나 창작 방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이 사실대로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했고, 과장적이거나 상상적인 표현을 배격했다.배에 함께 탄 사람들이 경치를 돌아보며 기뻐하면서,“강산이 그림 같으오.”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그대들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 구려. 어디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지. 흔히들 흡사하다느니 같다느니, 닮았다느니 똑 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같다는 의미를 말함이다. 그러나 비슷한 것으로써 비슷한 것을 비유함은 실은 같은 성 싶어도 같은 것이 아닌거요.”이는 열하일기에 실린 내용 중 하나로 그가 중시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잘 나와 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사실적으로 표현되는 글이 잘 쓴 글이라 하였으며, 화려한 문체의 글은 글을 꾸미느라 각종 표현이 들어갔기 때문에 바르지 못한 글이라 하였다.연암은 소설을 많이 창작하였다. 18세 때 을 시작으로, 19세 , , 20세 때 허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을 썼다. 그리고 21세 , 28세에 을 집필하였다. 이는 연암이 살아온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양난으로 혼란한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조선을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라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배운 사람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작품 중 선비에 관한 얘기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선비들의 실상을 폭로하며 풍자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과 에서 선비들을 풍자하는 내용이 많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른 계급과 구분 짓는 정선 양반의 글 읽기가 사회를 완화하는 데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돈조차 벌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정선 양반은 마을의 부자에게 양반 신분을 팔게 된다. 정선 군수가 부자에게 양반이 지켜야 할 것을 알려주지만, 부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양반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말해주자, 부자는 도둑놈 같다며 양반 매매를 그만둔다.연암은 글 읽기밖에 모르는 양반을 주인공으로 제시하면서 당시 사회의 필요에 응하지 않는 양반들의 태도를 풍자하며 비판하고 있다. 정선 양반은 자신의 빚을 갚아주겠다는 천부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인 것을 보아 선비도를 상실하였다 볼 수 있다. 그의 가문을 상품으로 매매하는 행동을 했다는 점이 풍자의 대상이 된다. 이를 보아 비생산적인 일에 빠져 선비의 도리를 잊어버린 양반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의 내용은 주인공 허생이 글 읽는 것만을 좋아하자 아내가 가난함에 못 이겨 허생의 독서를 비난한다. 이에 집을 나선 허생은 부자에게 찾아가 돈을 빌린 뒤 고리대금, 매점매석 등을 하여 원금의 10배로 갚는다. 그리고는 부자에게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이야기한다.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양반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책밖에 모르는 양반들의 태도에 그를 부양해야 하는 가족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허생이 집 밖으로 나와 일을 하기까지 아내의 고단함이 드러난다. 허생이 상업 활동을 하여 돈을 버는 장면에서는 조선 후기 상업을 폄하하던 양반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비판한다.
사무원? 김기택??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그는 하루 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坐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이 시를 읽는 순간 ‘그가 있는 곳이 사무실이 아닌 절이었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사무실에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절에서 스님들이 하는 행동인 것처럼 묘사되어있기 때문이다. 스님이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존재들로 무소유를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무소유를 통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는 회사에서 30년간을 일한 사람이다. 그가 쉬지 않고 일한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돈 때문이다. 돈을 위해 30년간을 일해온 사람의 행동을 무소유를 실천해야 할 스님의 행동으로 비유하였다. 손익관리와 자금수지를 경전인 것처럼 ‘손익관리대장경과 자금수지심경’이라고 표현하고 심지어 이를 한자로 표기하였다. 이는 그가 진짜 스님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아이러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시주’를 받기 위해 하기 싫어도 사무를 봐야 했다. 스님은 자발적으로 도를 닦지만, 그는 ‘시주’를 받기 위해 반강제로 일한다.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지만,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기에 자유를 뺏겨버린 상황이다. 또한 하는 일들은 전혀 스님의 행동과 관련이 없지만, 마치 스님의 일인 듯한 묘사로 인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보여준다. 강제로 하는 것과 원해서 하는 것의 괴리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환경적 영향으로 쉬고 싶지만 억지로 일을 해야만 한다.그는 회사에 매여있어 ‘혹독하다면 혹독’한 수행을 하면서도 이를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가 창작된 사회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이 시는 1999년에 나온 『사무원』이라는 책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기는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많은 회사원이 권고사직으로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시에 나오는 구절은 그 당시 힘들었던 때를 잘 그려낸 것으로 생각된다.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해 오랫동안 근속해 왔으나 한순간에 잘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말한 것이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하였기에 모든 것이 자동화될 만큼 익숙해졌지만, 그런데도 잘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한 채 잘리게 될지만을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이는 사람의 도리로서는 맞지 않은 일이다. 화자는 그가 30년가량 일을 하였음에도 불안과 걱정을 안고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활을 누릴 수 없었던 시대를 비판하였다.또한 그는 회사에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서지도 않고 계속 일만 하였다. 수동적으로 일만 하는 그를 보면 인간의 자율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기본적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를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아 그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늘 그곳에 있었던 물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은 단절되고 삭막해진 인간소외의 현상을 잘 보여준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서 버티기 위해 일만 하다 보니 교류도 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정은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 또한 그는 무생물인 의자와 하나가 될 정도로 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일했는데, 이는 그만큼 일의 양이 매우 많았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기본적인 노동법조차 지켜지지 않은 상황을 그를 통해 나타내어 이런 상황을 지적하고 싶었다.그는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인해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다. 회사에서 하루 16시간 동안 몇 번 일어서보지도 못한 채로 일만 하니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같았다. 계속 의자에만 앉아 있으니 다리가 가늘어질 때로 가늘어져 의자 다리처럼 가늘어진 것이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휴식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몸에 이상이 있는 상태임에도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하니 그는 화폐 물신주의가 된 세상에 기본적인 인권도 인정되지 않는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해온 것이다. 그는 힘들고 고단한 생활을 매일같이 하고 있지만, 상사의 앞에서는 예스맨이 되어야 한다. 회사에서 잘리기라도 하면 당장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살림에 스며들어 남지 않지만, 그 돈이라도 있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기에 꿋꿋이 버텨왔다. 이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시대를 비판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그가 청아하게 염불을 외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말하는 것은 자신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기계적으로, 아무런 감정 없이 읽었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왜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하였을까? 상냥하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유지해야만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아한 목소리로 말을 해야 상사들과 거래처를 상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감정 없이 읽었을 것인데, 버릇되어 저절로 청아한 목소리로 읽게 되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속가의 살림’에 보탤 수 있는 돈을 벌기에 하기 싫은 일도 할 수밖에 없는 괴리를 보여준다. 싫은 일을 꿋꿋이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까닭은 일해야만 하는 자아와 일하고 싶지 않은 자아의 대립에서 일해야만 하는 자아가 이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역시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에 드러나는 현대적 서사의 특징Ⅰ. 서론중세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듯이 서사의 흐름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서사는 사람이 하는 모든 담화에서 생겨날 수 있다. 따라서 서사가 변했다는 것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 몇 가지를 꼽아보았다.현대적 서사의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의 위상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서사의 주인공이 우리와 비슷해져 주인공을 보고 공감하는 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서사의 주인공은 초월적 존재이거나 신이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필자가 주인공을 보면 재미가 없었다. 주인공이 할 다음 행동이 예상이 갔었는데, 현대적 서사의 주인공은 필자와 비슷한 사람이거나 혹은 위상이 더 낮은 사람이기에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 주인공이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궁금하기에 서사를 계속하여 읽게 되고, 주인공의 행위를 맞춰보며 읽게 되었다.또 다른 특징은 언어의 타자성이 드러난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주체의 행동과 말이 서사가 되었기 때문에 주체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들리고 보이는지 판단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의 의사소통적 능력이 중요해지면서 내 생각보다 타인의 생각을 더 신경 쓰게 되고,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주체가 영웅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지위가 떨어져 타인과 상호작용을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호작용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도 발생하는데, 이를 주인공이 어떻게 헤쳐나갈지를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또한 현대적 서사에는 개인주의가 담겨있다. 근대 이전에는 인물보다는 일어나는 일, 사건이 더 중요했었다. 그런 내용을 보다 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고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적 서사에는 인물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개성과 정체성이 중요해졌다. 개인의 신념이나 행동이 읽는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욱더 재밌고, 예측 불가능하게 쓰여있어 독자들은 더욱 흥미를 느끼고 내용을 보게 된다. 현대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작가들은 독자들의 관심에 맞는 작품을 써야 했다. 개인주의적인 작품을 쓰면 독자들이 그 상황에 공감하며 흥미를 느꼈기에 많은 작품에 개인주의적 성향을 담게 되었다.이러한 현대적 서사의 특징을 영화 을 통해 찾아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위상 하락과 언어의 타자성, 개인주의가 영화의 어떤 장면에,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영화 에 드러나는 현대적 서사의 특징은 삼진그룹에 입사한 지 8년 된 말단 여사원 ‘자영’이 회사의 비리를 보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려 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첫 번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은 입사한 지 8년이나 되었지만 계속 사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자신보다 늦게 들어온 남자 후배는 벌써 대리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알 수 있는 특징은 주인공의 위상이 낮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95년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지금보다 낮았을 때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주인공을 회사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말단 사원이자 여자로 삼으면서 상대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자영은 회사의 심부름으로 농촌에 갔다가 폐수가 강으로 방류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하지만 동네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그 물로 과수원에 물을 주고, 식수로 활용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 상부에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사 누구도 말단 ‘여직원’인 자신의 말은 들어줄 것 같지 않아 일찍이 대리가 된 남자 후배에게 대신 얘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처럼 주인공이 낮은 지위에 있어 잘못된 것을 말하지 못하는 상황도 나온다.반면 주인공은 자신의 낮은 지위를 활용하기도 한다. 자영의 친구인 ‘유나’와 ‘보람’ 역시 말단 사원이었다. 이들은 회사의 서열 중 가장 끝에 있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 위치 덕분에 무슨 행동을 해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회사가 폐수가 흐르는 강 옆에 사는 사람들을 속이려고 폐수의 양을 잘못 기재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들은 다시 확인서를 받아내고 만다. 회사에서는 그들이 일을 키운다는 생각이 들만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회사의 모든 잡무를 맡았기에 잡무를 한다는 구실로 상사들의 대화를 가까이에서 녹음하였다. 그들의 서열은 말단 사원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회사의 요모조모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회사의 비리를 밝히려는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자영, 유나, 보람은 회사에서 폐수가 흘러 주변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증거를 모으려 한다. 그들은 낮은 위치에 있기에 그들이 주장하는 말은 회사의 사장이 주장하는 말보다 영향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흥미 있는 것을 들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지위, 서열이 가장 낮은 주인공들의 말은 사람들에게 닿지 못한다. 또한 그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닿는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그 말을 듣는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위치가 낮아서 어떠한 신문사에서도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고, 그들이 수집한 증거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신문사도 결국은 기업이기에 자신들에게 돈이 될만한 정보를 찾는 것이다. 모든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주인공들은 알고 있기에, 더욱더 자료수집을 확실히 한다. 여기서 현대적 서사의 두 번째 특징인 타자성이 잘 드러난다. 타자성은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측면을 말한다. 주인공들이 말하려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상호 간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장면이다.그들의 노력이 통했는지 폐수방류사건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기자가 나왔다. 기자에게 그동안 모은 증거들을 보여주며 회사의 악행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기자는 그것을 열심히 듣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날, 주인공들의 회사에 가자마자 이를 덮으려는 부장들에게 감봉처리와 빨리 회사를 관두게 하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아무것도 없이 달랑 자리를 놓아둔다. 이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줄 알았던 기자가 말단 사원들의 말이라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을 알고 회사에 내부고발자가 있다며 연락을 한 것이다. 결국 기자도 주인공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언어의 타자성이 드러난다. 주인공들이 말을 하고, 증거물을 보여줄 때, ‘주인공이 더 능동적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주고, 증거물을 보아주어야 주인공들과 기자와의 상호소통이 유지된다. 기자가 들어주고 보아주지 않는다면 주인공들이 아무리 쓰기 좋은 정보를 가져다준다 해도 필요 없는 소리가 된다. 주인공들의 말도 들어주어야 성립되는 것이기에 결국 이 상호소통에서 중요한 사람은 기자가 된다.그중 폐수방류사건을 알리려고 하는 데 가장 주도적이었던 자영은 회사에서 잘릴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포기하기에는 자신이 찾아온 증거들이 너무나 많고, 제일 중요한 마을 사람들의 건강도 지킬 수 없다. 그러던 와중 회사의 사장이 애초부터 삼진그룹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해외로 도망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영, 유나, 보람은 공장 폐수방류사건과 사장의 비리를 대중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영어로 된 자료들을 보았다. 사장이 외국인이었기에 모든 문서는 영어로 기록되었다.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자료를 찾으면서 영어 공부도 해야 했다. 대리로 진급하기 위해 다녔던 영어토익반에서 주인공들은 밤을 새우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같은 입장의 말단 여사원들이 그들을 도왔고, 영어 강사도 수업하는 척하면서 해석하는 것을 도왔다. 회사를 살릴 방법은 주주총회에서 회사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지 않게 부결을 받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말단 여사원들은 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아낸다. 주주총회에서 부결을 받는 데 성공하고, 그동안 사원들이 모여 해석했던 증거물들을 보여주자 사장은 결국 회장에게 잘리고 구속까지 된다. 그리고 대리로 승진하려면 넘어야 했던 토익 600점을 한 번에 따내어 대리로 승진하고 영화는 끝나게 된다.
맥베스 부인은 왜 맥베스에게 살인을 부추겼나?-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며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마녀들의 훗날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왕위 찬탈을 하는 맥베스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던컨 왕의 장수였던 맥베스는 그를 시해하기까지 고민을 거듭하는데 그의 고민을 듣고 왕을 죽이라고 그를 채질하는 사람이 있었다. 실패할까 걱정하는 맥베스에게 “실패한다고요? 당신이 용기만 다 낸다면 실패할 리가 없어요.”라며 살인을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부인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왜 그녀가 왕의 죽음을 바랐는지,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이름도 붙이지 않은 그녀에게 어떤 역할을 주려고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자, 사악한 생각을 돕는 악령이여, 이리 와서 나의 여성성을 제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무시무시한 잔인함으로 채워다오. (중략) 내 가슴을 젖 대신 담즙으로 채워다오.”이는 마녀들이 사라졌을 때 왕을 죽여도 될지 갈등하는 맥베스를 설득시키기 전에 하는 맥베스 부인의 독백이다. 맥베스 부인은 악령에게 자신의 여성성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여성성을 상징하는 젖 대신 남성성을 상징하는 담즙을 넣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마녀의 모습과 비슷해지려 한다. 셰익스피어는 왜 그녀를 굳이 마녀들과 비슷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더욱이 사람이(맥베스) 그녀의 말을 더욱 잘 따르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마녀들은 존재를 규정할 수 없게 나오는데 이는 예언의 기이함과 그 예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인 그녀는 마녀들과 비슷하게 되었다고 해도 인간이기에 그녀가 하는 말에 욕망이 심겨 있어 사람들이 듣기에 좀 더 힘있게 설득할 수 있었고 맥베스가 더 잘 따랐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역할은 맥베스의 야욕을 더욱더 잘 드러나게 하려는 마녀들과 같은 역할이다.- 그녀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이유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왜 그녀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 번째로는 마녀와 같은 역할을 하되 극에서의 비중이 높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녀들은 처음에 맥베스에게 예언을 해 주었다. 이 예언은 그의 욕망의 씨앗이 되었고 극 중에서 그 씨앗을 키워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책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지위가 정해져 있었기에 그저 욕망만 대변하는 사람을 찾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중이 별로 없지만, 욕망을 대변하기에 자격은 충분한 그의 아내를 통해 마녀들과 비슷한 자격을 주었다. 그녀는 마녀들이 없을 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갈등 때문에 망설이는 맥베스에게 욕망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두 번째는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16세기 사람이다. 이 시기의 여성은 사회적으로 침묵하고 순종하는 철저히 대상화된 모습을 강요받았다. 셰익스피어도 한 시대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사회에 만연해있는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희곡을 쓴다면 당연히 남성들의 역할을 더 강조해서 썼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남성 중심의 서사를 만들기 위해 여성들의 이름은 배제하고 싶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성의 이름은 처음부터 중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역할의 끝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그녀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분명 처음에는 맥베스보다 더욱 잔혹한 그녀였지만 후반부로 가면 그와 성격이 바뀌게 된다.“천륜을 어긴 행위는 비정상적인 고통을 낳는 법. 고통받은 영혼은 귀머거리 베개에라도 대고 비밀을 털어놓는 법. 왕비마마께는 의사보다도 신의 도움이 필요해.”몽유병에 시달리는 그녀를 보며 전의가 했던 말이다. 그녀는 천륜을 어겼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고통으로 몽유병에 시달린다. 여기서 천륜을 어긴 행위란 무엇일까?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지금도 천륜을 어긴 행위라 볼 수 있지만, 더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왕을 죽였다는 점이다. 이 희곡이 쓰인 시대는 왕권신수설을 믿던 사회였다. 왕의 지위가 신에게서 나왔다는 사상을 믿던 때에 왕을 죽였다는 것은 천륜을 어기고도 남을 범죄 행위였다. 그녀가 왕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욕망에 휩싸여있었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드는 죄책감은 지우지 못하였다. 죄책감을 지우지 못한 그녀는 점점 피폐해졌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면을 통해 처음에 보여줬던 무자비한 그녀의 모습과는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즉,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녀의 역할은 끝이 나게 된다.
노루귀꽃김형영어떻게 여기 와 피어 있느냐산을 지나 들을 지나이 후미진 골짜기에바람도 흔들기엔 너무 작아햇볕도 내리쬐기엔 너무 연약해그냥 지나가는이 후미진 골짜기에지친 걸음걸음 멈추어 서서더는 떠돌지 말라고내 눈에 놀란 듯 피어난 꽃아어떠한 글이 시인지, 시가 아닌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에지를 갖추고 있는가, 갖추고 있지 않은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포에지는 시적 기능으로 시 전체는 아니지만 다른 모든 요소를 변형시키기에 시에서 빠지면 안 되는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위의 시를 보면 단순한 노루귀꽃에 의미를 부여하여 노루귀꽃이 화자를 위로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살펴보는 대상과 하나가 된 시점에서 그냥 글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포에지를 가진 시이다.그렇다면 서정이란 무엇인가? 서정을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자면 ‘감정을 펼치다, 정서를 펼치다’이다. 이를 풀어보자면 서정은 외부적 대상, 내부적 대상 상관없이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자아의 감정적인 발현이고, 서정시는 그 발현을 글로 나타내는 것이다. 자아와 대상이 하나 될 때, 자아와 대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을 고집하지 않고 자아와 대상은 서로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자아가 대상과 동일시되고, 그것을 글로 써 내려갈 때 저절로 시에는 시인의 가치관과 경험, 그가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녹아 들어간다.모든 글이 그렇지만 특히 서정시란 화자의 경험과 생각이 많이 담겨있다. 눈에 보이게 담겨있는 것이 아닌 함축적으로 녹아있다. 시에서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언어가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언어를 쓰더라도 언어는 기호의 형식, 기표에 불과하므로 그 언어는 기호의 의미인 기의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떠한 언어로 무언가를 이렇게 적자’라고 약속하여도 그 언어가 대상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위의 시에서도 노루귀가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 있는 그대로 적지 않고 적절한 생략과 여지를 남겨 우리에게 생각할 공간을 만들어준다. 생각할 여지를 주었기에 우리는 ‘노루귀꽃’이라는 대상에 집중하기 쉬워진다.시는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읽히기 때문에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시 속에서 이미지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고 사물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이미지를 씀으로써 시가 구체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시는 이 구체적이고 특수한 이미지를 통해 추상인 의미를 전달한다. 이미지의 주된 기능은 의미 전달이다. 시인이 관념을 직접 진술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 추상적인 이미지로 의미를 전달하기에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를 파악할 때 시의 의미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시인이 작품 속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작품 속에서 실제로 표현된 실제적 의미, 독자가 해석한 의미다. 또 다른 기능은 정서 환기의 기능이다. 이미지는 간접화된 의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의사소통적, 지시적 기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미지가 사물이 그 자체가 될 때 자립성과 독립성을 지닌다. 다양한 이미지 중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지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관적 정서에 좌우된다.위 시를 보자. 이 시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시각적 이미지다. 시를 읽으면 저절로 사람도 다니지 않고, 바람도 잘 불지 않고, 햇볕도 잘 안 미치는 그야말로 ‘후미진 골짜기’에 피어 있는 꽃이 떠오른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서 홀로 외롭게 피어난 꽃이 생각난다. 신경 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꽃을 자세히 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화자는 무엇 때문에 골짜기를 걷고 있던 걸까?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보면 ‘지친 걸음걸음 멈추어 서서/더는 떠돌지 말라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았을 때 시적 화자는 삶이 힘들어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즉, 화자는 삶에 의욕이 없는 상태라 볼 수 있다. 화자가 삶에 더는 미련이 없어 마지막으로 산에 올랐다가 이런 척박한 땅에도 피어난 노루귀꽃을 보며 놀라워하는 것이 아닐까? 꽃도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데 자신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또한 사람을 꽃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꽃’은 시적 화자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시인이 시각적 이미지를 선택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노루귀꽃이 피는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효과적이라 느꼈기에 시각적 이미지를 선택하였다.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사건을 인식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기관이 눈이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를 고른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꽃이 느껴야만 했던 고난이 더욱 생생히 느껴진다. 꽃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어떠한 사람일지 쉽게 연상되는 까닭도 시인이 시각적 이미지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꽃으로 묘사된 사람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강인하고, 남에게 위로를 주는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여기서 굳이 노루귀꽃이 시의 대표적 이미지인 이유도 알아봐야 한다. 노루귀는 3월 중순에서 5월 상순까지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을 피우는데 지름이 1.5cm 정도로 작은 꽃이다. 노루귀는 전형적인 산지 식물로써 추위나 음지에 매우 강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노루귀꽃의 꽃말은 인내, 신뢰라고 한다. 김형영 시인이 태어난 연도는 1945년이고 이 시가 쓰인 시대는 박정희 정부 시대였다. 그렇다면 노루귀꽃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시민들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 자유도 억압된 사회를 비판한 것이다. 당시는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이라고 불리는 사건도 있었을 만큼 민주화의 암흑기였다. 이때 계속하여 민주화, 민주주의를 꿈꾼 시민들은 당대 정부의 핍박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이런 시민들의 성격은 노루귀꽃의 꽃말과 같다. 추위와 음지라는 안 좋은 환경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노루귀꽃이 민주화의 암흑기를 견뎌낸 시민들과 닮아 보여 많고 많은 꽃 중 노루귀꽃을 시에 쓴 것이다.‘내 눈에 놀란 듯 피어난 꽃아’라는 구절을 보았을 때 화자는 자신의 앞에 피어 있는 꽃이 자신의 슬픔을 알아주었기에 피어난 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시 그 자체로만 보면 화자의 우울하고 서러운 눈에 놀라 화자를 위로해준 대상이 꽃으로 묘사되는 사람이다. 화자는 이런 ‘꽃’의 행동에 위로받아 다시 생을 이어가려 했을 것이다. 시와 시의 외적 요소를 같이 보면 삶에 희망이 없다며 체념한 사람에게 ‘꽃’은 힘이 되어준 시민들이 아니었을까. ‘꽃’이 있어 견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꽃’과 화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