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본드의 분석: 폭력의 순환성과 자본주의적 병폐의 고발에드워드 본드란 누구인가: 에드워드 본드 작가론2. 에드워드 본드의 (1971) 작품론3. (1971)의 주제분석: 폭력의 순환성 인식과 예술의 역할4. 막장별 플롯 분석5. 주요 등장인물 분석6. (1971)의 공연사7. 결론1. 에드워드 본드란 누구인가: 에드워드 본드 작가론에드워드 본드(Edward Bond)는 헤럴드 핀터와 함께 1960년대 영국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다. 1934년 7월 18일 영국 북런던 Holloway의 노동자 집안(working class)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제2차세계대전 중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시골 지역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폭격과 같은 지속적인 전쟁의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이는 그가 세계를 ‘잔혹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의 교육은 전쟁에 의해 중단되는 바람에,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공장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2년동안 영국군에서 군 복무를 하기도 했다.그의 본격적인 극작 활동은 20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1950년대에는 극작의 ‘신세대’인 작가들이 영국 드라마에 대한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극작가들에는 를 창작한 John Osborne이나 를 창작한 Arnold Wesker, 그리고 을 창작한 Harold Pinter 등이 포함되었다. 본드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 새로운 극작가의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1961년에는 (법왕의 결혼식)을 Royal Court Theatre(로열 코트 극장)에서 상연했고, 1965년에는 (구조되었다)가 상연되었다. 의 경우 극중 아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잔인한 장면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가지는 ‘극도의 폭력성’을 가진다는 ‘악명’이 드높여졌다. 이렇게 극도의 폭력성을 띠는 는 결국 (영국 연극의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는 공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던) The Lord Chamberlain에 의해, 그 원작 대본이 강한 수준으로 검열되어야 했다. 그는 이 극의 잔혹성 때문에 기소되고 벌식하게 된다. 또한, 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들은, –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오열하는 사람들, 인간과 신의 대결적 구도, 그 안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고통 – 인간과 신의 관계를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명상적, 추상적, 그리고 불가해한 것으로 그려낸다. 이런 불가해한 힘의 운명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은 부당한 세계를 바꾸거나 사회적 불의에 대해 재고하고, 특정한 행동을 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에 따라 이런 일련의 ‘장엄미’를 가진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사건들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을 대변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인 변화가 아닌 단지 그 비극적 상황 자체를 수용하고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게 된다. 카타르시스란 이런 위대한 비극을 관람하여 이루어지는 감정적 정화로서, 이런 비극적 상황을 체념적으로 수용할 때 발생한다.이런 셰익스피어의 에서 도출되는 핵심적인 가치는 ‘견인주의’이다. 인간의 비극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이며, 이 ‘견인’의 과정에서 고통의 수용과 감정적 정화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를 지닌 메시지들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올 때까지 참고 견디자’라는 견인주의는, ‘60년대’의 문제를 생각하면 적절하지 않다. 당시에 인류는 핵무기나 냉전과 같은 거대하고 세계적인 폭력적 위협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장 문제 제기를 통해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 문명 자체가 절멸할 수도 있다는, 대단한 위기감을 요구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세계가 마주한 여러 거시적이고 폭력적인 ‘위험한’ 상황의 심각성과 급박함을 고려할 때, 본드는 이 가진 가치과 메시지가 더 이상 현대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과감한 개작을 통해 그것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2-2. 에드워드 본드의 의 시대적 유효성과 필요성: 폭력의 순환성에서의 연민과 공포는, 고통받는 인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낙관주의적 결말로 이어진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이처럼, 본드의 는 인간이 본질적이고 태생적으로 폭력적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며, 이 잘못된 믿음(성악설)에 기반해 쌓아 올려진 권력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거나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하고 고립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잘못된 믿음은 인간을 서로에 대한 불안과 불신 속에서 분열하고 반목하게 하며, 권력자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며 억압할 심리적이고 명분과 사회 구조를 제공할 뿐이다. 또한 이런 잘못된 믿음은 서로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내고 서로를 반목하고 고립시키는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것을 넘어, 그 과정에서 폭력을 수평적으로 전파하고 수직적으로 대물림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폭력에 물들며 이를 체화하게 되고,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존재’로서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연결고리에 가만히 갇혀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폭력의 순환 고리 속에 갇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함으로써, 인간은 리어가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한 것처럼, 작은 실천적 행동을 시작으로 이 폭력의 연결고리를 부수고 이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와 같은 ‘동시대적인’ 연극은 이런 사고와 자기반성, 그리고 행동을 고취시키는 실천적인 의무와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연극뿐만 아니라 나아가 ‘예술’은, 권력이나 위계, 혹은 폭력과 같은 인간사의 본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병폐라는 동시대적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반성하며 해결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기능한다.4. 막장별 플롯 분석가 제시하는 인간성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악하고 폭력적이라는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인간이 서로를 불신하게 되고, 이 불신으로 인해 폭력적인 반목이 발생하며, 이 폭력성은 전파되고 대물림되며 인간은 폭력의 악순환에 갇혀 며, 그녀의 폭력적 행동의 근원이 자신의 인간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 따라서 폭력은 내재적인 게 아니라 외삽적인 것이며, 자신이 그 장본인이고, 폭력은 대물림되고 순환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코델리아는 결국 보디스마저 살해하나 리어는 죽이지 않는다. 대신, ‘과학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쫓아내는데, 이는 원작인 에서 글로스터 백작이 눈이 먼 후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리어는 눈이 먼 후 마침내 자신의 폭력이 무고한 시민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꺠닫고, 아들이 군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가족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껴 이들에게 도망가기를 권유하며,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코델리아를 향해 사람들의 고통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기도 한다.3막 1장에서 코델리아의 성벽 건설 현장에서 도망친 탈영병이 리어의 집에 도착하고, 곧이어 도착한 군인들로부터 탈영병을 숨긴다. 그를 찾지 못한 군인들은 결국 자리를 뜨고, 다른 사람들도 탈영병이 떠나기를 원하지만, 리어는 그와 그 집으로 오는 모든 탈영병이 머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어의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 그리고 도덕 의식이 완숙 단계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특정한 인물이 아닌 보편적인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장은 이로부터 몇 달 후로 이어진다. 소년의 집에서 리어는 사람들에게 우화를 들려주고, 청중 수백 명이 리어의 대중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이지만, 토마스는 리어가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2장에서 의원은 리어에게 코델리아가 리어의 연설을 용인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만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제한에 대해 리어는 자신이 여전히 죄수라고 불평한다. 마치 사방에 벽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은 개인의 자유와 발언권까지 간섭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게 자유가 제한당한다는 부정적인 위기 상황에서 더 마르고 움츠러든 소년의 유령이 등장한다. 유령, 리어는 그녀의 신체 내부에서 사악함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우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것을 확인하고는, 두 딸의 폭력성과 잔인함은 다름아닌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이 모든 폭력 사태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된다.코델리아(Cordelia)를 리어가 피난처를 찾으러 왔을 때 소년(gravedigger’s boy)의 아내로서 극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자신 역시 두 딸의 군인들로부터 겁탈당하는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운명을 마주한다. 이 사건 이후 코델리아는 목수(Carpenter)와 재혼하고, 두 딸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권에 대항해 반란을 주도한다. 그녀는 반란을 성공으로 이끌지만,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는 그녀가 맞서싸웠던 이들인 두 딸처럼 강한 권력을 기반으로 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정치 행보를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코델리아는 리어에서 두 딸, 그리고 두 딸에서 다시 코델리아로 이어지는 폭력의 대물림과 순환 구조를 상징하는 인물들 중 한 명이며, 나아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똑같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에드워드 본드의 사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폭력에 대한 폭력적 저항’은 결국 폭력을 전파시키고 순환되게 만들며, 인간을 폭력의 악순환 속에 가두기 때문이다. 한편, 작품 속에서 대표적으로 폭력을 행했던 이들은 모두 코델리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보디스와 폰타넬, 그리고 두 딸의 병사를 죽이거나 총에 맞은 채 죽어가도록 방치했으며, 모든 폭력의 씨앗인 리어를 맹인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이런 냉정하고 잔인한 그녀의 행동이나 면모를 고려할 때, 코델리아는 더욱 리어가 폭력의 잔인함과 순환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게를 싣고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그려진다고 할 수 있다.소년(gravedigger’s boy)은 리어에게 폭력의 고통과 무고한 자에 대한 연민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첫번째 연민은ar.
인류 구원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무엇이 아포칼립스를 극복하게 하는가?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중심으로코맥 매카시의 는 매일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극한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살아남는 남자와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무형의 도덕률이나 인간 존엄성,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생존을 위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인간은 이런 위험한 세계로부터 생존을 위한 비인간성을 강요받는 한편, 이 강요를 이겨내고 인간 존엄성을 유지하며 ‘선’을 실행하기도 한다. 성정혜의 라는 논문 역시 이와 같은 ‘선의 실행’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분석한다.성정혜는 ‘선의 실행’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남자의 선에 대한 양가적 태도와, 그로 인한 남자와 소년의 실제 행동의 차이를 분석하고 있다. 성정혜에 따르면 남자의 선은 ‘도덕적 공리주의’에 기반하는 반면, 소년의 선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상주의에 근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작품 속 선의 실행은 남자와 소년이라는 두 인물에 의해 양분되어 있으며, 이들이 반목하거나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다르게 남자와 소년을 ‘선의 실행’의 관점에서 양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단일하고 최종적인 지점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즉, 남자의 행동은 소년의 생존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그렇게 보호받은 소년이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선의 실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두 인물의 ‘선의 실행’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매카시는 적극적인 선의 실행을 위한 필요조건을 제시함과 동시에, 구세대의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무형의) 도덕적 가치가 어떤 방식을 통해 신세대로 전승되는지, 그리고 그 전통적인 가치가 어떻게 인간으로 하여금 위기 상황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지 보여주고 있다.여러 선행 연구에서 알 수 있듯, 소년은 종종 지구-종말 이전을 경험하지 사람 무리를 목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거나,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신체 일부를 조금씩 잘라 먹히며 천천히 죽음에 이르는 인간과 같이 끔찍한 광경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런 비인간적 경험은 단순히 목격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아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트럭에서 내린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여버린다. 또한 자신들의 카트를 훔치려 한 남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내려놓고 – 심지어는 옷이 없으면 얼어죽을 게 분명한 상황에서, 그가 입은 옷마저도 버리고 – 떠나기를 명령하기도 한다. 이처럼 생존 자체가 일상적으로 위협받는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남자는 생존을 명목으로 또 다른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거나 때로는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희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어진 아포칼립스 세계는 휴머니즘이 설 자리가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런 비인간적인 행동들과 대조적으로, 남자는 동시에 소년과 함께 ‘좋은 사람들’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이 좋은 사람들이란 ‘선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선의 실행’의 관점에서 남자와 소년의 표면적인 차이점이 발생한다. 성정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아버지인 남자에게 ‘선’이란 아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반면 아들에게 ‘선’이란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여기서 자비란 ‘보편적인 대상에 대한 적극적인 선의 실천’, 즉 ‘이상주의적인’ 선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움이 필요한 타인이 있다면, 그를 마땅히 돕는 것이 아들이 추구하는 ‘선’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들의 ‘선’이란 아버지의 ‘선’과 실제 행동의 측면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즉 아버지는 어려움에 빠진 타인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들의 그것과 대조되고 때로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아들의 선은 마치 성선설과 같이 인간 내부에 자연스럽게 자리하는 것이며, 단지 이 ‘성선설적인’ 경향이 아‘사람을 돕는 것’으로 상징된다. 이러한 서사적 전략의 목적은 선악의 구별을 통해 낯선 이들로부터 소년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년은 이런 옛날 이야기를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소년의 입장에서 그것은 ‘진실한(true)’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사람은 사람을 돕지만, 실제로 그들은 사람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주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심지어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 이렇게 ‘현실성’이 부족한 옛날 이야기와 현실 상황의 괴리에 따라, 소년이 체감하는 선악의 경계는 점차 불분명해지고, 자신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소년이 남자에게 자신들이 ‘좋은 사람들’인지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소년의 이러한 자기 의심을 드러낸다. 남자는 이렇게 변화하는 현실의 상황에 발맞춰 옛날 이야기를 반복하는 대신 선악의 경계를 한층 더 명확하게 긋고, 이후 아들의 선악의 구별 기준은 ‘사람’과 ‘개’를 잡아먹지 않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런 기준은 소년이 작중에서 목격하거나 경험한 것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자신 역시 타인에 의해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경험을 해 보았기에,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인의 생명을 위협해야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식량이 부족해서 (칼을 목에 대일 때만큼의)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껴보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식인 행위를 마주했을 때 한층 더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더 끔찍하게 느껴졌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성, 혹은 인간성의 기준을 ‘사람과 개를 잡아먹지 않는 것’으로 정했을 것이다. 또한 식인은 ‘자기의 생명 보호를 위한 급박하고 불가피한 살인’보다 한층 덜 급박하고 더 ‘능동적인’ 행위이므로,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인간성의 ‘마지노선’과도 같다고 느꼈을 수 있다.그러나 이런 선악의 구별, 즉 ‘도덕적 기준’은 어디까지나 ‘금지된 행위’의 마지노선을 정할 뿐, ‘선’이라고 배워왔던 것들, 즉 ‘어려움에 빠진 타인을 돕는 것’ 역시 실천해야 비로소 ‘선’이 완성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적극적 구제’가 내재하는 잠재적 위험성 때문에 이를 꺼리는 남자와 달리, 소년은 오히려 그 잠재적 위험성을 별로 개의치 않거나,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이렇게 선의 ‘실천’의 측면에서 남자와 소년의 태도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둘은 ‘선’이라는 무형적 가치 자체를 두고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년의 이런 ‘타인에 대한 적극적 구제’란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선’ 그 자체를 두고 대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런 아들의 ‘선’에 대한 개념과 태도는 종말 이전에 존재하던 전통적인 도덕적 관념이자 가치이며, 이것이 아버지를 통해 종말 이후 세대인 아들로 성공적으로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선한 행동의 ‘실천’ 여부는 아포칼립스 상황이라는 특수성에 따라 매 경우 두 인물에 의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기는 하나, 그 ‘선’의 개념 자체는 남자와 소년 모두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성정혜는 남자가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남자는 구세대의 도덕적 가치와 전통적인 선의 실현 가능성을 종말 이후의 신세대로 소년을 통해 이어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선’은 결국 소년이 원하는 방식대로 ‘실행’된다는 점에서 이런 ‘전승’의 측면이 더욱 강조된다. 비록 작품 초반에 소년은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번개를 맞고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작품 후반부에는 남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Ely’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남자가 타인을 구제할 만한 여유로운 식량과 체력 등의 조건을 갖추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소년이 추구하는 대로 선자가 개인이 아니라 가족과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라는 점 역시 의미가 크다. 이는 매카시가 제시하는 ‘선의 실천’을 위한 필요조건이 단순히 ‘자기 방어가 가능한 물리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새로운 남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년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자원이나 조건, 그리고 생존의 기반이 되는 자기 방어가 가능한 수단이나 환경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의 실행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할 뿐, 선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 이들이 개인이 아닌 공동체라는 점이다. 이들은 공동체라는 형태를 통해 생존에 더 유리해짐은 물론이고, 나아가 보다 많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구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런 희망은 단순히 각각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만 구제되는 것을 넘어, 아포칼립스 상황에 놓인 이들이 연대를 통해 개인이 아닌 ‘인류 차원’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즉, 소년이 만난 새로운 공동체는 선의 적극적 실현을 통한 인류의 연대와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정리하자면, 남자와 소년의 ‘선’은 표면적으로는 개념 단계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고 양립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 소년의 ‘선’은 아버지를 통해 종말 이전의 구세대로부터 전승된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비록 그 ‘선’의 실천 여부나 방법의 측면에서 일시적인 차이가 드러나기도 하나, 결국에는 소년이 추구하는 방식대로 ‘선’을 실천하는 데 성공하고, 나아가 소년 자신 역시 그러한 방법대로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남자와 소년의 ‘선’이란 양립하기보다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적극적 구제’라는 단일한 방향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아포칼립스를 ‘아포칼립스’로 만드는 것은 비단 인류를 둘러싼 척박한 환경만이 아니다. 아포칼립스 상황을 심화시키는 진정한 원인은, 극한의 생존 경쟁 상황에 내몰린 이들이 .
1.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과 러시아 코스미즘의 연관성<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5년 안노 히데아키가 감독을 맡아 제작한 TV판 애니메이션이다. 해당 작품은 인간들이 ‘에반게리온’이라는 ‘거대 로봇’을 타고 신원 미상의 거대 괴생물체인 ‘사도’에 맞서 싸우는 것을 중심 서사로 삼고 있다. 주인공들은 서사가 진행되며 예언서인 ‘사해문서’에 예언되어 있는 ‘사도’를 모두 해치우고, 이에 따라 시청자들은 ‘악을 무찌르고 선(인간)이 승리하는’ 클리셰적인 결말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무색하게, 에반게리온TVA 시리즈를 서사적으로 완결시키는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인간은 ‘인류보완계획’의 실행에 따라 ‘해피엔딩’이 아닌 ‘문명 자체의 멸망’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이런 ‘인류보완계획’은 소위 ‘세계 종말’이라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보완계획’의 목적과 목표는 ‘인류의 불멸’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인류불멸 프로젝트’로서의 ‘인류보완계획’은, 1900년대 초반 러시아에서 인류의 부활과 불멸, 그리고 우주로의 진출을 주장했던 ‘러시아 코스미즘(Russian Cosmism)’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러시아 코스미즘’과 ‘인류보완계획’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작동하는 정치 경제 체제(자본주의와 공산주의)부터 시작해서,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을 필두로 하는 비교 분석은, 코스미즘의 관점에서 인류보완계획의 의의와 한계를 제시할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2. ‘불멸 프로젝트’로서의 인류보완계획에반게리온은 기대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며 ‘<에바> 신드롬’이라 칭해진 광범위한 사회적 반향1)을 일으켰다.
과 : 과학의 낳은 미지의 공포아시모프의 은 기존 물리학 법칙을 거스르는 장치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SF 소설이다. 작중에서 ‘이론’을 우선시하는 프리스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인 ‘이장이론’을 발표하고, 그의 친구인 브룸은 이 이론을 바탕으로 ‘반중력 장치’를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우여곡절 끝에 브룸은 반중력 장치 개발에 성공하고, 평소 ‘돈과 명예’로 대비되는 삶을 살며 서로에게 묘한 시기와 열등감을 느끼던 프리스를 초청해 공개 실험을 실시한다. 프리스는 브룸의 요청에 응해 당구공을 반중력 장치 안으로 밀어넣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당구공은 빛의 속도로 날아가 브룸을 죽게 만들고, 끝없는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결국 프리스는 죽은 브룸의 자리를 차지하며 마침내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나’는 이 사고가 과연 불의의 사고였는지, 아니면 모든 사실을 예견한 프리스의 ‘살인’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브래드버리의 은 매우 짧은 이야기이다. 이야기 초반에 미지의 존재인 ‘용’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는 기사들이 등장하는데, 작중 후반에 사실 그 ‘용’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근대 산업의 결과물인 ‘기차’였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독자는 더 이상 기사의 공포에 공감하기보다,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에 두려워하는 기사를 바라보며 일면 ‘조소’하게 된다.두 작품은 모두 과학의 지식 층위 차이가 만들어내는 ‘미지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미지’에 대한 것인지, 그리고 그 ‘미지’가 어떻게 성립되고 과학적으로 해석되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아시모프의 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미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해당 과학 분야, 즉 물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다면 해당 소설의 과학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시모프는, 그 소설의 기반이 되는 물리학 지식에 대해 일상의 사물을 동원해가면서까지 매우 친절한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이 설명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중학교 수준쯤에 머무르는 독자라 할지라도, 소설의 핵심 소재로 기능하는 물리학 지식에 대해 큰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이러한 물리학적 설명은 단순히 현재 학계에서 ‘공인된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시모프만의 상상이나 재해석 역시 더해진다. 그것이 정말로 물리학적으로 ‘성립 가능한’ 가설과 방정식, 즉 ‘사실’인지 대부분의 독자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독자는 그 상상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론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시모프의 상상을 마치 ‘정당한 사실’, 혹은 정당하지는 않더라도 ‘그럴듯한’ 사실로 여기고 온전히 따라가게 된다. 엄밀하게는 일반 독자들에게 있어 이 시점부터 ‘미지’는 이미 발생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독자들이 따라가는 ‘과학적 서술’이 모두 그럴듯한, 혹은 완전한 ‘사실’에 해당하는지 독자는 확신할 수 없다. 애초에 물리학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영구운동장치’를 브룸이 개발해버린 시점부터, 이 소설은 ‘정상적으로 공인된’ 물리학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기존의 과학’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오히려 작가로 하여금 그의 과학적 상상력을 더욱 자유로이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이론과 실제, 혹은 돈과 명예는 프리스와 브룸이 대립하는 대표적인 소재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둘이 갈등을 겪고 열등감을 느끼도록 하는 표면적인 소재일 뿐, 그것이 이 작품의 본질은 아니다. 이것들은 단지 브룸에 대한 프리스의 열등감 강조, 그리고 이 때문에 그가 브룸을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심에 어느 정도 개연성이나 합리성을 더해줄 뿐이다. 작품의 핵심 쟁점은 이렇게 기존의 과학 상식에서 다소 벗어난 새로운 과학 이론의 ‘개연성’을 정립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 벌어지는 ‘사고’의 고의성 여부이다. 독자는 앞서 언급한 두 인물의 관계나, 서술자인 ‘나’의 의견을 통해 프리스의 사고가 고의성을 띤다고 의심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 그것을 증명하거나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고와 관련된 복잡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프리스의 살인을 경찰에게 증명하는 것 역시 소설 속 세계관에서는 요원해보인다. 프리스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이고, 그의 사고가 사실은 ‘살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과학적 지식과 권위를 동시에 갖춘 인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살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상위의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를 기반으로 한 뛰어난 권위를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은 (서술자에 따르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과학적 지식 층위의 차이는 단순히 세상의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행동이 가지는 심리나 의도를 숨기도록 기능할 수 있다. 이런 작품 속 브룸의 살인은 다음의 예시를 통해 조금 더 간단히 비유될 수 있다. 현대인이 중세로 ‘자동 권총’을 가지고 시간 여행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중세 시대의 누군가를 자동 권총으로 의도적으로 살해했다고 할 때, 중세의 누구도 그것이 ‘고의적 살인’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누구도 자동 권총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그것에서 총알이 발사되고, 그 총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고 순식간에 누군가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에 불과할 뿐, (설사 그 의심이 심정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살인의 인과 관계를 사실로서 ‘증명’할 수는 없다. 프리스의 브룸에 대한 살인은 이처럼 중세 시대에 벌어진 ‘자동 권총 총격 사건’과 같은 셈이다.
SF 소설은 저자나 그가 속한 사회가 과학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를 드러낸다. <한국 근대 SF 단편선>은 여러 저자가 쓴 네 편의 소설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소설은 ‘한국 근대 SF’라는 공통 범주로 묶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매우 상이하 게 드러난다. 가령 <천공의 용소년>에서는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본질적이거나 오랜 숙원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드러난다. 해당 소설에서 화성은 당대의 지구에 비해 과학 기술이 월등하게 발전한 사회로 묘사되는데, 이런 화성에서 국가의 경계나 전근대적 봉 건제는 소멸한 지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쟁’이란 오래전에나 벌어지던 ‘과거의 야만 적인 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