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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학개론 독서보고서
    예배학개론 독서보고서- 거룩한 예배1부 예전과 신학미국의 작가이자 명상가인 애니 딜라드는 기도와 예배에 대해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피상적인 기도와 예배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우리가 예배하는 방식이라고 전부터 믿었던 습관적인 사실에 대해 다시 살펴볼 수 있도록 해준다.연약한 인간의 파토스는 하나님의 에토스로 이끌어 가는데, 이것은 진정한 예배가 되게 하는 요소로 말씀과 성만찬을 통해 작용한다. 자크 엘룰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부재 현상에 대해 말하면서 희망을 가질 것을 권면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다. 세상을 마치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양극적 구조 속에서 살면서 인간이 갖게 되는 파토스는 진정한 기독교 예배를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찬양과 감사의 예배가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깊은 파토스를 가지고 우리는 함께 모이며,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경건기도의 차원에서 행할 수 없는 것들을 실행한다.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히 생각이나 경험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올려드리는 것이며 정해진 규정을 따라 실행하는 것인데,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알게 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찬양과 감사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와 사랑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치유하심과 능력의 손을 내밀어 우리의 모습을 받아 주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은 무엇인지 기억하면서 간구하기도 한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어거스틴은 “하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우리가 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의 지나친 “소비자 중심주의”는 즉각적인 느낌으로 예배자가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 하나님의 에토스는 변형의 힘으로 우리의 경향을 바꾸고 새.예배에서 활용되는 모든 예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실제로 이 땅의 인간적 차원에서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지, 그 방법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감사는 단순히 개인에게 허락하신 모든 축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신 것을 삶의 원천으로 고백하는 인간적 성숙함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다. 또한 완전하고, 능동적이며,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가운데 참여함으로 영광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모든 기독교 예배와 기도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언약의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간절한 외침을 담고 있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이라는 용어는 최후 심판, 죽음, 천국, 그리고 지옥과 같은 “마지막에 될 일에 대한 교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지만 현대 신학에서는 신학적 사고의 본질로 자리잡게 되었다.주일에 모여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기도와 거룩한 성만찬을 나누기 위해 모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종말론적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종말론적 실재를 포함하는 시간의 경축 패턴으로서 기독교 교회력은 예배 가운데 종말론적 희망이 현재화된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기독교 세례는 기독교 예배가 가장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중심적으로 알려준다. 세례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자체가 표징이며, 희망에 대해 살아 있는 증언을 하는 공동체이다. 세례 의식의 행동을 통해 육체적으로 장사 되는 것과 죄로부터 씻김의 이미지가 표현된다. 또 한 가지는 ‘입양’의 이미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세례’가 현재와 장차 올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나라에 대한 신학의 재정을 담고 있다면 ‘성만찬’은 이러한 신학을 공동체의 삶과 개인의 믿음생활 경험에서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세례와 성만찬의 자리에서 우리를 차별하동체에 하나님의 자기 소통을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예전적 주제와 개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바르트는 『복음적 신학 개론』이라는 책에서 신학적 작업은 “단지 기도와 함께 시작하지고 않고, 기도와 단순히 동반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전체성 안에서 기도의 행위를 통해서만 실행되는데, 이것은 신학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다.”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를 형성하려는 작업은 단지 기도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신학적 연구의 대상은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신학적 사고는 그 자체가 대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보다 초기에 가졌던 신학적 사고의 확실성 위에 세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할 수 없다.인식에 대한 개념은 기도와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설명이 가지는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신학 그 자체는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찬양의 제사이다.2부 기도로서의 예배함께 모인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서 드려지는 예배는 실행의 형식을 취한다. 찬양과 감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는 한, 그리고 성경적 기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존재의 신비에 적절한 영광과 송축을 하나님께 돌리는 한, 우리는 예배를 기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로서의 기도는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깊이 인식하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텍스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에서 물려받은 언어와 동작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감사를 드렸다. 매일의 삶 가운데서 함께 떡을 떼면서 찬양과 감사를 계속해서 올려드렸던 것이다.식탁에서의 축복 기도와 디다케에서 사용되는 기도의 언어들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예배 집례자와 함께 모인 공동체가 화답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성만찬 대감사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그 후에 ‘아남네시스(회상의 순서)’를 위한 부분적인 기도가 따라오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특별한 것은 모든 교회의 하나됨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가? 기독교 예배 전통에서 감사드림의 의미는 찬양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감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고 그가 주신 것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바로 이런한 연결점에 대하여 칼 바르트는 명확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모든 죄가 감사하지 않음에서 온다고 보았다. 지속적인 감사와 찬양은 우리가 최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며 진정한 기도는 인간의 극한적 상황에서 태동되는 것이다.예배는 우리에게 기도의 삶을 가르쳐 줄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그러한 사람을 살지 못하고 있다. 예배는 개방되어 있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만약 기독교 예배가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주님의 계속적인 기도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하나님이 온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기도는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며,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 데오도르 제닝스의 주장은 일반적 주장과 달라 보이지만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성경과 기독교의 영성 전통을 살펴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초대와 탄원으로서의 기도가 하나님의 부재 현상 혹은 그분이 멀리 계신다고 느끼는 인간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으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한 그분의 신실함 가운데 있는 것이다.기독교의 모든 성만찬 감사기도의 중심에는 담대함과 과묵함이 존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기 주심과 강력한 생명을 부어주시는 능력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으며 바로 성령님을 초청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신비를 경축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시편의 탄식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거기에는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인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신학적 고민들이 있어왔다. 고대 중보자가 되신다. 디모데전서에서 우리는 중보기도의 가장 초기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감사, 탄원, 그리고 중보기도의 특별한 유형들이 공동체 안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초기 교회 예전이 보여주는 중보기도의 주제와 범주를 따라 행하게 될 때 갖게 되는 유익은 그것이 가지는 포괄성에서 찾을 수 있다.중보기도의 회복과 갱신은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온 세상을 위해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라는 신학적 중심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중보기도의 네 가지 측면은 다음과 같다.1. 중보기도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재의 우리를 만나게 된다.2.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3. 하나님께 세상에 대해 아뢰면서 도덕적 의도성을 가지게 된다.4. 우리의 신앙이 도덕적 혼동이 있고 육체적 열망들이 서로 충돌하는 강한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3부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예배문, 즉 ‘텍스트를 넘어서’ 사자는 말은 예배 안의 상징과 상징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예배를 살펴보자는 말이다. 언어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와 행동을 밝혀내는 것이 기도로서의 예배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하지만 단지 예배문, 즉 텍스트가 아니라 예배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이 예배에 있어서 ‘기도로 출발하는 신학’을 위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오늘날 개신교회 예배 전통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상징에 대한 의식이 거의 부재하거나 심지어 상징 영역에 대하여 뿌리 깊은 의심을 가지는 데 있다. 각 예배 의식은 채택된 상징 안에 내재된 다양한 차원의 의미 가운데 특별히 선정된 영역만을 형성하고 표현하게 되는데 예배 공동체가 받아들이기 까지는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편으로 상징은 사물, 몸동장, 말, 혹은 복합적 행동을 통해 표현되고 경험되어
    독후감/창작| 2021.04.15| 6페이지| 2,5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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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설교코칭 독서보고서
    1부 설교 목적에 대한 코칭현대 사회와 문화의 변화는 기독교의 설교 자체를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정을 리차드 리셔(Richard Lischer)는 “말씀의 종말의 때"로 규정하고 있으며 월터 브루그만은 ‘포로기’(exile) 상황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제 안심하고 거주할 처소와 토양을 상실한 채 집 없는 노숙자(homeless)와 같이 서 있는 것이 서구 기독교의 자기진단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맡겨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들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설교는 기독교의 가장자리가 아닌 가장 중심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인간 타락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파괴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못한데서 부터 시작 되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제를 벗어나면서 방향을 상실한 것이 타락한 시대의 비극이었다. 피조물 중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장 거스르면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듯하다.그리고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걸으면서 절대적인 것은 사라져가고 있다. 상대화되고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진리는 모호해져간다.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하는 설교자들 역시 망망대해 가운데 어디로 가야할지 키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성도들을 태우고 긴 항해를 해야 하는 설교자들, 오늘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 진리의 선포인 설교의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이다.좋은 설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좋은 설교는 청중들의 삶 가운데, 그리고 예배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 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설교이다. 말씀과의 경험을 이끌어주고 하나님과의 만남 주선해준다. 둘째, 개인과 공동체에 회심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게 한다. 넷째, 복음이 온전히 드러나게 한다. 결국 끊임없는 영적 전투를 거치고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쓰는 뜨거운 육필을 거쳐 선포될 때 좋은 설교라 할 수 있다. 나아가서 그 2부 설교 신학 형성에 대한 코칭설교의 신학을 점검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설교하는가와 왜 설교하는가를 정리해야 한다. 설교자의 일관성, 복음과 성경 해석의 일관성, 메시지의 일관성을 점검하면서 설교의 권위를 세워가야 한다. 문제는 설교자가 설교의 주인으로 군림하면서 이러한 본질을 상실해 가는 데 있다. 설교가 본질을 상실하게 될 때 진정한 설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본질을 벗어난 설교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강연이나 연설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설교는 될 수 없다.기독교 설교 사역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속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핵심에 해당하는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선명하게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면서 어떤 분이신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이러한 구속 사역의 끝은 십자가의 은혜로 귀결된다. 언제나 무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그 절정이 선포될 때 설교의 영광을 볼 수 있다그렇다면 설교 사역을 위한 토대는 어디로부터 쌓아야 할 것인가. 첫째,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둘째,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인 성경을 중심으로 선포된다. 설교자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통해 안정된 진리를 전해야 한다. 셋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이 순간 청중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설교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발과 입이 되어 드리는 것이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나오시도록 하는 것이 그의 설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 설교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나도 않은 진리여야 할 뿐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에 모든 것을 걸 때 그 설교에는 복음이 선포되게 된다. 초기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신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이며, 개인들과 사회와 나라들, 그리고 온 우주 속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주실 수 있음을 선포하는 복된 소식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설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여야 하며, 율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그 내용은 십자가의 복음을 통과하여야 한고, 그 결론은 언제나 복음으로 끝이 나야 한다.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레고리적인 설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 사도들, 그리고 바울이 예수를 전할 때 그들이 의지했던 말씀은 구약의 말씀이었다. 우리도 구약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할 수 있고 설교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의 설교가 아닌 철저하게 신학적인 토대 위에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성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온전하게 어디에서든지 안전할 수 있다.3부 설교 준비 코칭설교 준비는 단계에 맞춰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자신을 먼저 점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유기적 과정을 거쳐 준비되어야 한다. 기본적인 과정에 충실하면서 성령님의 속삭임과 자유로우신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성경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는지, 그 당시 청중들에게 그 말씀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 무슨 의미가 있고 나에게, 청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묵상해야 한다.성경과 대화가 시작 되었다면 설교의 목적과 중심 주제를 정해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형태는 자칫 소흘히 여길 수 있는 부분이다. 형식은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 틀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균형 없이 방향 잃고 헤매게 될 수 있다. 현대 설교학에서 역시 중점적으로 다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설교의 형태이다. 현대 설교학의 조류는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설교 형태를 통일성을 가진 살아있는 유기체로 생각하면서 중심 주제가 전개 과정으로 통해 결론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야기식 설교와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가 제시되기도 했으며, 의식전환에 강조를 둔 흑인설교 등도 제기되었다.형태론에 따라 분류한다면 전통적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통적 설교방식에는 주제설교 혹은 대지설교, 강해설교, 분석설교, 본문설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고, 새로운 패러다임에는 귀납적 설교, 이야기식 설교, 현상학적 전개식설교, 네 장면 설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전통적 설교는 주로 어ㄸ?ㄴ 진리의 체계, 혹은 교리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 그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도록 하는데 설교의 목적을 둔다. 주로 연역적 구조를 취하게 되며,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설교 형태를 취한다. 전통적 설교는 주로 설교의 효과는 논리적으로 내용을 요약하고 배열할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논리를 증명하고 명료화하기 위한 명제와 그것을 설명하는 대지, 그리고 그것을 예증하기 위한 예화들이 동원되게 된다.주제설교는 합리성과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던 모더니즘 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주기 위한 방안으로 시작되어 지배적인 설교의 형태로 활용되었다. 주제설교는 특정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룰 수 있고 명료한 이해를 전달할 수 있다. 또한 논리적 관점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설교의 구조가 선명하여 이해하기가 쉬운 설교이다. 때문에 간결하고 논리적인 설교가 된다.분석설교는 성경 본문에서 찾게 되는 중심 명제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하면서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안점을 두고 있다. 성경 본문의 중심 메시지가 설교를 지배한다. 성경은 설교의 근원, 설교는 성경의 해석이며 적용이 된다. 강해설교는 관찰의 단계, 해석의 단계, 적용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 때 설교자는 본문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해석하도록 노력하고 본문의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본문의 구조를 분석해야 하며 단어 자체의 의미, 단어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후 본문 간 대조와 비교를 끝내고 성경적인 교리 안에서 해석을 해내야 한다. 끝으로 주석이나 참고자료를 활용한다. 본문의 해석이 끝났다면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석의에 들어가야 한다. 강해의 목적은 본문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강해설교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그 본래의 맛을 온전히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귀납적 설교는 전통적 설교 패러다임에서 전환을 시도하면서 제시되었다. 설교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주제에 대한 발전적 구조를 통하여 내용이 전개되어 가면서 주제에 이르도록 한다. 귀낙적 설교에 있어서 상상력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미지를 사용하여 복음의 빛 아래 주어지는 삶의 경험을 재창조하도록 한다. 한 가지 포인트는 일관성이다. 단일 개념을 따라 움직이고 내용이 전개되어 가면서 설교의 결론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이야기 설교는 이야기가 가지는 플롯을 설교 전개 과정으로 도입한 설교 형식이다. 모순점 혹은 갈등을 느끼도록 시작하면서 심화시키고 급격한 반전을 이루면서 문제의 해결 구조를 취하게 한다. 이야기식 설교는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데 그 주안점을 둔다. 전략적으로 결론적인 내용이 유보되며 전개되다가 급격한 반전을 통해 제시될 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 될 수 있다.네 장면 설교는 영상화와 연속성, 이야기성, 대극적 사고 등으로 특정지어질 수 있다. 설교 형태는 기본적으로 대극적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인간의 곤경 상황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 성경의 시대와 오늘, 율법과 은혜, 문제와 해결이라는 양극이 비교되면서 진행되는 대극적 특징을 지닌다. 네 장면 설교는 된다.
    독후감/창작| 2021.04.15| 5페이지| 2,500원| 조회(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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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계획서
    1Ⅰ. 들어가는 말목회가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베풀어지는 예방과 치유의 연속이라면 목회에 있어서 상담은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상담은 정신장애, 부적응행동이나 사고, 습관화된 부정적 행동이나 삶 등의 문제가 있는 사람을 ‘주로 대화를 통해서’ 돕는 일을 말한다. 상담자는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을 통해 문제가 있는 내담자와 객관성과 동시에 주관성을 유지하는 관계를 가지고 문제들을 풀어간다. 그런데 요즘 많은 목회현장 속에서 이 상담을 적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회적 현장 속에서 목회자에게 문제를 의뢰하고 답을 얻기를 원하는 내담자, 성도들의 요구 때문이다. 성경적으로도 이러한 상담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상담적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자리에서 전했던 것이 아니라,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소외된 그들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아파하는 것을 함께 겪으시며 함께 다니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셨다. 또한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으로 함께 치유사역을 행하셨으며 더불어 미래를 향해 온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셨다. 단순한 치유만이 아니라 영속적인 후속관리가 이어진다. 이러한 예수님을 모델로 하여 우리는 목회의 비전을 ‘상담적’인 모습으로 그려볼 수 있다.목회상담은 일반적인 상담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목회상담 자체가 원래 목회적 차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 상담과 근본적이 차이가 있다. 교회와 신앙을 고려하여 목회자가 교인의 영적, 정서적, 행동적 측면인 내적인 문제와 가족, 타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관계적인 문제를 성경적 진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다양한 상담적 이론과 실제적 기법들을 사용하여 해결해야하기 때문이다.먼저 목회상담은 상담관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개입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한다. 일반 상담기법만 사용하지 않고 현재의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보게 하고,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문제 해결에 있어서 인간적인 들여다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유익과 연결시켜 다이어리를 고자한다. 이는 매일 매일 자신의 영적 상태를 체크하며, 문제점들을 진단할 수 있다. 이렇게 쓰여진 다이어리는 1대 1로 매칭 되는 후원자와 함께 큐티를 나누 듯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후원자와 함께 기도하며, 해결 방안을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때 후원자는 처음에는 목회자로부터 출발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고 교회 안에 이 방법이 잘 정착됨으로써 점점 더 많은 영적 후원자와 조력가, 작은 상담가들이 생겨나 도와 줄 수 있다.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이 어떤 영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지, 또한 주변의 환경과 문제들에 반응하는 영혼의 표정을 관찰하며 삶의 일기를 쓰듯이,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 생활을 하루하루 영위하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큐티를 매일 하는 습관이 이 프로그램과 연결되었을 때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큐티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지만, 다이어리를 쓰면서 먼저는 자신의 영적, 심리적, 육체적 상태를 체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그날 읽은 말씀이 자신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말씀이 실제로 내 영혼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단순히 어떤 사건들에 적용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적용들로 인하여서 영혼이 어떻게 자라고 성숙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2. 자신 바라보기한국 교회의 건물에는 여러 용도의 공간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고, 특히 개인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가능하다면 예배당이겠지만, 도난이나 관리의 문제로 평소에는 예배당이 주로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고, 출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예배당은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거나 아픈 가슴으로 하나님께 나와 토로하고 싶을 때 기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사실 목회자가 내담자, 신자를 상담해 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상담적 목회에 있어서는 자기가 자기 모습을 바라문제와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곳이 필요하지만 의외로 조용하게 묵상하고 숨죽이며 하나님을 바라봄을 통해 문제와 나의 상태가 분명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현대의 한국 교회가 사회 속에서 외면 받는 이유 중의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시끄럽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포함한 방송이 주로 제공하는 이미지는 시끄럽게 찬양하며, 알 수 없는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이다. 개그나 코미디에서 희화화하는 기독교의 이미지도 역시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노래를 하거나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한국의 교회는 주여 삼창은 잘하지만, 골방에서 침묵하는 기도는 굉장히 부족하다.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더 크게 기도하는 것이 더 깊은 영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해되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물론 방언이나 통성 기도가 신앙생활에서 사라져야할 요소들은 아니지만, 그것과 더불어 강조되어야 할 것은 조용한 가운데 침묵하며 관상하는 기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교회에 특별히 부족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도실을 만드는 것에 더하여, 그 기도실은 침묵으로 기도하는 공간이 되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시끄러운 교회에서 나만의 공간을 갖고 하나님을 찾으며, 나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토로함으로써 침묵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는 장소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3.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상담을 위한 장소로 일반적 상담을 위해 상담가를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은 목양실을 이용하지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목양실을 쉽게 들어가기 힘들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들킬까봐, 그리고 목사님께 문제들을 알리게되면 다른 교인들이 알게 될 까봐 선뜻 그 문을 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는 일반적 상담이 가능한 상담사를 두고 상담실을 따로 만들어두고자 한다. 그렇게 큰 공간은 아니더라도 푸근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조용한 음악이 나오며, 커피한잔을 할 수 있는 평안한 공간을 만들어두고 싶다. 그러나 교회 재정적인민들을 함께 나누고, 함께 해결함으로서 교회 내 신자들 간의 벽을 허물고 존재를 만나는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서로의 문제를 마음이 맞고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끼리 상담이 이루어진다면, 목회자가 나설 때 보다 훨씬 더 친밀감을 형성하고 끝까지 상담이 유지되고 지속될 가능성이 있게 될 것이다.B. 상담적 목회를 위한 사회참여 프로그램1. 쉼터현실적으로 빈민들에게 주거지를 제공하는 것은 개교회가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사역이다. 그들이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만 일정 시간 동안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빌려주는 것은, 평일의 대부분 시간, 빈 공간으로 돌아가는 교회 건물 운영에 있어서는 가능한 일이다. 우산 없이 바깥을 지나다가 갑작스런 비를 만났을 때, 처마로 피하는 것처럼, 이들이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대응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교회가 그들이 피해갈 수 있는 처마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물론 특별한 관리가 요청되겠지만, 정해진 시간과 활용에 있어서 필요한 규칙들을 수립하고, 엄격히 지켜나간다면, 이들이 잘 곳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활용되지 못하고 방치된 교회의 건물들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 쉼의 장소로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더불어 교인들과 빈민들의 만남과 상담이 이루어짐을 통해 교인들은 상담가로서 자질을 갖춘 그리스도인으로 가다가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격려와 상담의 삶을 사는 것이 성경적으로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고 제자의 삶이라면 다른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또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와 더불어 신자들만이 아니라 빈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이를 통해 빈민들은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얻게 되고, 새로운 만남과 관심과 상담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C. 가정 상담 프로그램1. ‘한 몸’ 부부가족상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부부이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돕는 베필’로 지어주신 서로의 조력자요 세미나 같은 형식의 제도를 이어 가겠지만, 더불어 이를 가족 전체의 모음에도 계속적으로 연계할 생각이다.2. 통합적인 가정 사역런던과 와이즈만은 “우리의 승패가 정말로 판가름 나는 곳은 가정이다. 가정은 우리가 다른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하려면 가장 먼저 성공을 해야 하는 경기장이다.”라고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가장 작고,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정이 온전하게 세워지지 않는다면 더 크고 넓은 공동체도 물론 잘 세워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바로세우고 세상을 바로세우기 위해 부어지는 가정 사역은 교회 사역 중에 가장 중심에 둘 수 있는 사역이다.그러나 기성교회에서의 가정 사역은 이름뿐인 가정사역이고, 실제적으로 가정을 위한 시간을 제공해주지도 않는다. 많은 봉사와 헌신을 강조하는 교회는 가족끼리 함께 있어야 할 시간을 빼앗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기본적인 가정이 먼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바라시지 않을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교회는 통합적인 가정연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그것은 먼저 가족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주일 오후예배를 빼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말들이 많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과감하게 뺄 것이다. 아니 다양하게 드린다고 표현할 수 있다.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면 주일 오후의 삶을 주일다운 예배로 드리는 것이다. 가족끼리 모든 시간을 제쳐두고 말씀안에서 하나로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참 예배다운 모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의할 점은 모든 가정이 처음부터 그렇게 모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12주 정도의 가족이 함께하는 교육을 받고, 각 가정끼리 소그룹실에 모여서 말씀공부를 한다. 그리고 이 말씀공부는 지루한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고 함께 질문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더불어 분기별로 가족별로 말씀공부를 한 내용을 중심으로 다양한 발제와 나눔을 통해
    인문/어학| 2019.06.07| 6페이지| 1,000원| 조회(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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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신학자 칼 바르트와 1906-1968의 정치1. 들어가는 말바르트의 정치적 활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편한 외침의 연속이었다. 바르트 사망 당시 스위스 연방정부 관료가 추도예배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바르트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다. 본인이 태어난 스위스를 향한 비판은 말 할 것도 없고,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적인 반공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 정당화 등 곤란한 상황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계를 뒤흔든 두 번의 전쟁과 폐허 속에서 바르트를 움직이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바르트는 일생에 걸쳐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의 정치적인 동기는 신학적 주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신학적인 주제들이 정치적인 활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11장 칼 바르트의 정치윤리를 요약하면서 전쟁 이후 바르트 신학의 전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바르트가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이끌었던 동기는 무엇이고 바르트가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2. 몸말(1) 칼 바르트의 정치윤리바르트의 삶을 통틀어 일관되게 존재하는 많은 상수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중 하나는 세계를 향한 관심과 깨어 있는 태도다. 그는 사람들이 놀랄 만큼 세상의 일들에 대해 극도로 예민했다. 또 다른 상수들도 있다. 세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언제나 특별한 입장표명과 결합되어 있었다. 바르트는 실제적인 일상의 질문들을 결코 사적인 것으로 여기며 뒷걸음질하지 않고, 그 질문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세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바르트의 삶 전체를 관통하던 또 다른 핵심요소는 ? 신약학자 에른스트 캐제만(Ernst Kasemann)의 대중화된 표현을 사용한다면 ? 그의 모든 정치적 (신학적) 입장들을 주도하는 “종말론적 유보”다. 바르트는 결코 “전체주의적” 사상가가 아니었다. 1933년 봄에 행한 “신학 공리로서의 제일계명”이라는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모든 인간의 일은 죄의 용서와 맞닿아 있어야 하기에 “신학에서 일어나는 논쟁은 아무리 선하고 불가피한 일이라 해도···다만 잠정적(vorletztes)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절대적인 진지함과 분노를 가지고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논쟁이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공동의 희망” 가운데에서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최종적인 것”(das letzte)과 “잠정적인 것”(das vorletzte) 간의 기초윤리학적 구분은 본래 디트리히 본회퍼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우리는 잠정적인 것 안에서 살고 있으며, 최종적인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은 구분은 바르트의 모든 정치적 활동의 암묵적 전제다. 1915년 2월 사회민주당에 가입하던 때, 바르트는 이미 “가장 위대한 이에 대한 신앙”, 즉 “불완전한 것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고난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포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논하였다.바르트의 태도는 국가사회주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바르트는 신중하면서도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지 않으려 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히틀러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바르트는 국가사회주의에 대하여 가장 단호하게 비타협적 저항을 선두에서 실시한 투사였다. 또한 그는 모든 종류의 스위스적 “조국수호방식”과 스위스식 민족 “신화”를 조롱하기도 했다.종전 이후 바르트는 이데올로기적인 반공주의와 동구원에서 이루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정당화 모두를 반대하였다. 그는 이 두 방향 모두를 통해 시도된 세계내적·정치적 입장에 대한 절대화와 신학화에 반하여 투쟁하였다.정치윤리와 관련하여 바르트와 루터 사이의 심대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례다. 루터의 소위 두왕국론에 반하여 바르트의 정치윤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왕적 지배론”으로 불려왔다. “그리스도의 왕적지배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승리가 그의 부활에서 분명히 드러났다는 확신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를 토대로 남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순종적으로 뒤따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승리를 공동으로 성취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러한 공동성취는 (특히) 국가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을 형성하는 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공동책임을 지는 가운데 드러난다.”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두왕국론이 본래 뜻에 충실하게 제대로 이해된다면 칼 바르트와 깊이 단절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루터 자신은 “세계·정치·경제라는 영역이 하나님의 율법과는 무관한 독자적 법칙성을 가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루터의 두왕국론의 진정한 의미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정치와 경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치란 가능한 것들을 다루는 방법이지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루터와 바르멘 신학선언 안에 나타나는 바르트의 표현들 사이에는 실질적인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멘 신학선언에 따르면 “우리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다른 주님을 섬기는 것이 더 적절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뿐만 아니라 바르트 역시도 “최종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을 구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바르트가 비록 신중하고도 비이데올로기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음에도 민주주의를 다른 여타의 국가 형태보다 훨씬 선호하였다. 민주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상호 관계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교적·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통제나 제약 없이 “누군가가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1940년 11월의 강연에서 바르트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보기에 타당한 국가형태에는 “민주주의”외에 다른 이름이 주어질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민중’이 아니라, 공동체와 자유의 법률과 의무”만이 “지배”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바르트는 신학의 가장 주요한 기본원리를 신약성서와 고대 교회에서 발견하였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로마 황제의 신상 앞에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바르트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였다. 국가 안에서 - 설령 최선의 국가라 할지라도 - 절대적인 무언가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사유와 충돌한다. 최선의 국가조차도 상대적이므로 국가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국가를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굴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봉사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잇는 가장 적극적인 참여방식이다.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시민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한다. 시민 공동체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서 시민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진다.” “시대적 사건에 대해 방관하면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니다” 이것이 칼 바르트가 남긴 정치적·윤리적 유산이다.(2) 최종적인 것 잠정적인 것최종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의 구분은 바르트 신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계시자이시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라고 설명하면서 대상이 되어 버린 하나님을 다시 주체이자 대상으로 설명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본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악을 꺾으시고 정복하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악과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잠정적인 것들 가운데서 최종적인 일을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이것은 바르트의 모든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 암묵적 전제가 된다. “최종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 간의 구분은 바르트를 이해할 때 항상 염두 해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최종적인 것, 즉 잠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하여 알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태적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잠정적인 것들 가운데서 최종적인 일을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태에 대응하기 적합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바르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이것이었다.바르트는 언제나 절대화와 교조화에 대해 새롭게 경고한다.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그의 신중한 태도는 일생에 거쳐 확인할 수 있다. 국가사회주의에 대하여 가장 단호하고 비타협적 저항을 이끈 것, 종전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적인 반공주의와 동구권에서 이루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정당화 모두를 반대한 것들이 그의 전제가 바탕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바르트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절대화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비판했다. 정치적 보수주의, 정치적 혁명주의, 이데올로기화된 종교사회주의 모두 바르트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바르트는 자기의 입각점을 하나님의 관점과 동일시하고 혼동하는 것에 대해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비이데올로기적이고, 철저히 사태 그 자체에 뿌리박은 정치를 추구했다. 바르트는 완벽한 해결책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최선의 경우라 해도 기껏해야 차선책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3) 하나님 나라와 정치적 참여사회주의를 하나님 나라의 전조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이것은 바르트에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바르트는 1927년 독일의 뮌스터 대학에서 교수가 되면서 자신의 이력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세계대전은 나에게 전환을 가져왔다.” 독일의 지성인 93명이 전쟁지지 선언에 서명을 했고, 여기에는 바르트의 스승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르트는 혼란에 빠졌고 자신의 신학을 다시 세워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를 하나님 나라의 전조 현상으로 해석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바르트 신학 발전에 시금석이 되는 그의 대표적 『로마서 주석』을 출판한다. 로마서 주석에는 그의 급격한 신학적·정치적 입장 변화가 담겨 있다.
    독후감/창작| 2019.06.07| 5페이지| 2,000원| 조회(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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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위선적 영성에 빠진 교회를 향한 사도의 권면1. 들어가는 말한국 교회는 120여년의 짧은 기독교역사를 보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신학 업적과 교회의 발전을 이뤄왔다. 일본의 식민지배, 해방, 한국 전쟁과 분단, 민주화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특수하고도 주목할 만한 역사의 길을 걸어왔고 교회가 함께 해왔다.그러나 너무 빠르고 급하게 성장해버린 탓인지 한국 교회는 현재 곳곳이 누수 되어 침수되기 직전이다.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다. 무엇이 이토록 한국 교회를 가라앉게 만든 것일까? 많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겠지만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의 부분적 이해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속죄의 복음과 영혼구원에만 집중되어온 나머지 구원을 불교적 의미의 내세와 동일시하고 하늘나라로 올려버렸다. 왜곡된 구원론과 심각한 이원론으로 천국복음에만 몰두하게 된 한국 교회는 결국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동시에 참된 종말론적 비전을 상실해버렸다.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속죄론에 치중된 복음 이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언약적 신실함을 이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설명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복음은 실존적이고 현재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인 비전 또한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올바른 복음 이해는 절실한 것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율법을 곧장 행위로 연결시켜 버리고, 행위가 구원과 연결되는 순간 이단시 되어버리는 우리의 인식과 상황을 전환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생명과 희망의 약속을 되새겨 주고 있다.본고에서는 저자의 관점을 따라가 보며 갈라디아의 닥친 실제 문제를 살펴보고 그들에게 간절히 호소한 바울의 외침을 들어보려 한다. 전통적 관점과 새 관점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재조명해보면서 바울이 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나아가 지금 우리와 한국 교회에 갈라디아서는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 고민해보고자 한다.2. 몸말(1)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 그리고 이신칭의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따뜻함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흔한 인사말도 하지 않은 채 시종일관 꾸짖는 말투를 보인다. 갈라디아서가 성경으로 읽혀질 것을 예상했다면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을만한 용어도 서슴없이 언급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무엇이었고 바울이 이토록 열을 내고 있는 것일까.갈라디아의 위기는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면서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던 일이다. 그것은 회심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배교, 곧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최악의 실수였다.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로의 부르심에서 이탈하는 모습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바울의 수고를 헛되이 하는 것이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이례적으로 비판을 가하는데, 바울의 태도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일침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의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야만 한다.갈라디아의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바울이 다시 이신칭의 교리를 명확하게 제시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유대인은 실패했고 예수를 통해 새로운 복음이 전해졌으며, 그 복음은 행위로 율법을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갈라디아서의 이해였다.그러나 바울이 지적한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율법의 행위로 규정하고 그 해결책을 단순히 이신칭의 교리로 한정해 버릴 때 갈라디아서는 안개 속에 사라져버리게 된다. 우선 대표적으로 이신칭의 교리를 설명하는 구절의 문맥상 해석에 관한 문제다.“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갈2:16을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본다면 전통적인 설명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듯이 보인다. 문제는 앞서 등장하는 말씀과 함께 볼 때 나타난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는 갈2:15 구절과의 흐름을 고려해보면 이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를 이끌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이곳 외에 실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는 명제적인 진술은 갈라디아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또 다른 중요한 지점은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율법의 행위 문제로 보았을 때 5-6장에서 바울이 이어가는 논증이 어색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5-6장에서 강조되는 순종의 삶과 성령의 좇아 행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이신칭의와 일맥상통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및 영생에 이르게 될 것, 의의 소망이라는 표현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이미 받았다는 선언은 모순되기까지 한다.전체 맥락과 바울의 논증을 바탕으로 한 2:15-16의 해석, 이신칭의 교리와 관련된 구절의 불충분, 갈라디아를 향한 바울의 전체적인 강조점과 5-6장의 연결이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얻으려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의 써 왔던 안경을 잠시 벗고 새로운 안경을 집어 들어야 한다. 갈라디아의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2) 갈라디아 교회의 진짜 문제저자는 갈라디아 교회에 펼쳐진 진짜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다. 단단하게 굳어져 온 교리의 틀을 깨고 갈라디아 교회의 진짜 문제를 현실적이고 치밀하게 접근한다. 우선 복음을 방해하려고 들어온 잘못된 사람들의 태도와 그에 현혹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율법의 행위들이라는 용어를 좀 더 세분화 시킨다. 율법의 행위들을 율법에 관해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는 율법의 행위들을 구분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율법을 행위들을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전체로서의 율법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관점과 새 관점의 주장을 동시에 지적하며 논의를 이어간다.그리고는 보다 바울의 논법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다. 갈2:15-16에서 율법의 행위들은 도덕적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삶이 아니라,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드러내며 그들을 이방인과 구분해주는 정체성의 표지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문제 삼는 율법의 행위는 할례(5:2-4; 6:12-13), 안식일 등의 절기준수(4:10) 및 안디옥 사건에서 드러난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식탁 규정(2:11-14)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접근했을 때 할례나 다른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에 대한 실질적 순종을 구분하는 바울의 논증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저자가 율법의 행위들을 할례문제와 안식일 등의 절기준수,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식탁 규정으로 구분지음으로 바울이 지적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영성이 드러났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고넬료 세례사건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 말씀, 약속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이었으며, 나머지는 이방 죄인이었다. 여기까지는 논란거리가 없었다. 문제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할례 받기 전에 성령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이방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하는 신학적 문제가 대두되었다.이 가운데 갈라디아 교회는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육체의 일에 쉽게 빠져버리게 되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나 할례와 같은 피상적 행동방식들이 유대적 정체성과 종말론적 구원을 얻게 되는 것으로 여기고 따르게 된 것이다. 선도자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것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결국 하나님을 등지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3) 위선적 영성바울이 율법의 행위들로 규정하는 내용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언약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전혀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유대적인 외적 신분을 알릴 때에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는 무기력하고 무익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신앙에 유익을 주거나 진리에 이르게 하는 다른 길 혹은 또 다른 복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은 선택받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배제시키는 저주 아래로 떨어지는 행위 곧, 위선적 영성의 유혹이다.바울의 텍스트 내에서 율법 아래에 진실 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들은 타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는 순간 언약백성으로써 지게 되는 책임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만약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루려 했다면 바울이 그들을 향해 절대 소리치지 않았을 것이다.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지적했던 것은 할례와 절기 준수가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율법의 표지만을 가진 위선적 신앙이었다. 복음의 진리는 헛된 가치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는 스스로 인간적인 가치에 족쇄를 채웠다.(4) 성령을 좇는 삶바울은 다른 복음을 좇느라 자신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을 떠난 갈라디아 교인들을 심각하게 여겼다. 할례만 받아 유대인의 신분에 집착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회심 이전, 믿기 전에 상태로 돌아갔고 진리를 순종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복음, 복음의 진리는 무엇이었나. 육체의 모양을 따르지 않는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을 좇는 삶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단순히 실천적 행동이 철저히 제외된 정신작용을 믿음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을 받으며 성도를 섬기는 삶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면 성령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변함없는 모습을 보인다.
    독후감/창작| 2019.06.07| 5페이지| 2,000원| 조회(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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