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의 품격을 통해 본 일본의 해고Ⅰ. 서론불경기 속에서「정리해고」 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정리해고란 사업 분야나 인원을 축소,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도 정리해고를 그대로 한자로 쓴 「整理解雇」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보다는 「リストラ」라는 단어가 훨씬 보편적으로 쓰인다. 「リストラ」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영어 「restructing」을 줄여서 외래어 표기한 것이다. 본래 사회의 재구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일본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기업들이 대규모 정리해고를 하면서 사회적 충격,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해 그 의미를 완화할 목적으로 일부러 해고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돌려서 이중어법(ダブルスピ―ク)으로 표현한 것이 그 시초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해고를 의미하는 단어로도 함께 쓰이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새로운 표현을 형성할 정도로 해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과연 절차적으로 해고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기업생활을 그린 드라마 「파견의 품격」이라는 미디어 매체에서는 해고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를 알아본다.Ⅱ. 본론1. 은행합병으로 「リストラ」드라마의 주인공 오오마에 하루코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기업은행에 입사했다. 성격도 밝고 싹싹해 은행원으로서 개인의 서비스·영업능력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은행의 인사합병으로 인해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 당한다. 대기업에서 20대 사원을 정리해고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꽤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 또한 자신은 그동안 기업에서 무엇을 한 것인지, 자신은 회사에 어떤 존재인 것인지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이 해고통보를 받은 뒤 사측에 어떠한 조치를 했는지, 혹은 어떤 절차를 밟은 것인지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회사에서 강제로 나가게 된다.오오마에 하루코는 은행원이라는 금융직종의 근로자이다. 일본에서는 근로자를 노동기준법과 노동계약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고에 관해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사용자가 근로자를 함부로 해고를 하지 못 하도록 규제를 두고 있다.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업에서 정리해고를 할 때 필요한 입법규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동안의 판례를 통해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판단하고 있다. 이를 정리한 것을 소위 말해「정리해고의 4요건론」이라고 한다. 인원조정의 필요성 유무, 해고 회피를 위한 노력이행 유무, 해고대상자 기준의 합리성, 근로자·노조와의 성실한 협의 유무 네 가지이다.먼저 인원조정의 필요성 유무란 말 그대로 꼭 인원삭감이 필요한가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기업이 어느 정도 적자인지, 인건비 삭감이 꼭 필요한 단계인지, 삭감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해고 회피를 위한 노력이행 유무로는 희망퇴직 모집, 배치전환 등등이 있다.표 1 해고회피조치 실시 (복수응답/ 단위:%)표 1은 2012년까지의 일본기업이 해고 회피를 위해 노력한 조치들을 나타낸 것이다. 그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기업은 6.5%에 그쳤다. 정리해고가 있기 전 기업에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이기 때문에 이렇게 낮은 수치를 보인다.그리고 해고대상자 기준에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무작위, 개인적인 감정, 편견, 노조문제 등을 이유로 해고를 하여서는 안 된다. 근무태도, 성과, 근속연수 등의 객관적인 기준으로 사원들을 평등하게 선별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근로자·노조와의 성실한 협의가 있어야만 한다. 정리해고는 사원과 노조에게 그 필요성, 구체적 이유와 기준 등을 먼저 전달해 사전에 교섭해야만 한다.다만 판례상 앞의 4가지 요건을 꼭 모두 충족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정리해고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나 협의의 유무에 대한 요건은 일부 판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아니하여 기업 측의 의견을 우선 수용한 경우도 있다. 협의 없는 무통보 정리해고는 실제로 국내에서도 노조와 기업 간의 큰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오오마에 하루코는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이 요건들을 우선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은행의 인사합병은 정리해고의 필요성을 충족할 수 있다. 다만 드라마 상 함께 근무하던 동기, 20대 여성 동료들도 함께 해고당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해고대상자의 기준이 합리적이었던 것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설사 기준이 합리적이었다 하더라도 사측에서 해고 회피의 노력을 이행했는지의 여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근무부서가 사라졌다면 배치전환을 실행하였는지, 희망퇴직자를 모집하였는지의 여부이다. 보통 희망퇴직자 또한 정리해고와 같이 일정한 기준을 두고 모집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에 20대 사원이 포함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만약 희망퇴직자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데에도 정리해고를 당했다면 해고대상 기준이 합리적이지 못한 점이 될 것이다.부당해고라고 여겨진다면 정리해고를 당한 근로자 집단은 노동위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측과의 재협의는 물론 행정구제나 재판 등에 있어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의 지방고용노동청에 해당하는 지방노동국에 신고하여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며 일본의 노동심판제도로 해결을 할 수도 있다. 이때 부당해고를 당한 근로자들은 복직 혹은 부당해고로 인한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수도 있다.2. 모호한 이유의 갑작스러운 해고오오마에 하루코는 이후 수산시장에서 일하게 된다. 주된 업무는 생선해체, 경매참가 등 이었으며 수산시장 상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성실하게 일해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으며 부모자식처럼 의지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만에 갑작스럽게 고용주의 사정을 이유로 해고당한다. 수산시장에 정을 붙여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어떠한 협의도 하지 못한 채 떠나게 된다.노동계약법 16조에 의하면 해고는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효로 본다. 해고의 이유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의 사정이라면 부당해고인지 확인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 없이 단순 '고용주의 사정' 으로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는 부당해고가 될 수 있다. 다만 고용주의 사고, 질병, 금전 문제 등으로 사업을 계속하지 못하여 피치 못한 해고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또한 일본에서는 갑작스러운 해고통보를 제한하고 있다. 노동기준법 20조 1항에서는 근무자를 해고할 때는 적어도 30일 이전에 예고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30일 전에 예고하지 않은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30일 분 이상의 평균임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즉, 해고 30일 전 해고를 통보한다면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추가로 임금을 지급할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20일 전에 해고를 통보한다면 10일분의 예고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만약 당일 통보한다면 30일분의 해고수당을 지급해야할 것이다. 예외적으로 즉시해고가 인정되는 경우가 있는데 경영난, 사용자의 고의에 의한 사고, 거래실패 등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천재지변에 준하는 불가항력한 일로 인한 사유나 사용자가 질병 등으로 사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해고예고제도의 예외가 되는 자들이 있다. 일일 고용자, 2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고 계약한 근로자, 계절적 업무에서 4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고 계약한 근로자, 수습기간 중인 자이다.오오마에 하루코의 경우 이 예고제도에서 예외되는 자가 아니므로 이러한 갑작스러운 해고통보를 받는다면 부당해고인지, 즉시해고가 가능한 경우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혹은 30일 이전에 예고 받거나 혹은 예고수당을 맞추어서 지급받아야할 것이다.3. 잔업거부와 해고오오마에 하루코는 연이은 해고에 결국 파견근로자의 길을 선택한다. 파견업체소속의 직원이 되어 회사에는 항상 3개월간의 기간 동안만 나가는 계약으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때마다 복잡한 인간관계, 잔업, 회식 등을 그녀는 모두 거부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인의 태도가 아니며 건방지다는 평을 받았고 어느 한 회사에서는 그녀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1시간 만에 해고를 통보했다.정확히는 회사간의 파견근로가 계약해지된 것이지만, 매체 내에서는 해고를 당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녀가 파견근로자가 아니었다면 이전의 정리해고와는 다른 보통해고를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사측이나 고용주의 문제가 아닌 근무태도 불량, 무단결근, 명령불복종, 심신의 불안정함 등 근로자의 문제로 해고를 하는 것을 보통해고라고 한다.일본에는 파견근로자를 위한 노동자파견법이 따로 있지만 이는 비정규직인 파견근로자를 더욱 세세하게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으로, 노동기준법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보호받을 수 있다. 노동기분법 제 32조에 따르면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일 8시간, 1주일 40시간을 초과해서 노동을 시켜서는 안된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한국은 초과근로시간제도가 따로 있기 때문에 최대법정근로시간에서 차이를 보인다. 법정근로시간 이상의 시간 외 근무인 잔업은 취업규칙으로 사원과 합의 하에 명령할 수 있다. 이 취업규칙은 사원 과반수 이상이 가입한 노동조합장 혹은 사원의 과반수 이상을 대표하는 자와 합의하여 서면으로 협정을 체결하고 근로기준감독서에 신고해야 한다.위 절차를 모두 거쳤다면 사측에서는 근로자에게 잔업을 명령할 수 있고 이를 거부하면 명령위반이 된다. 하지만 이를 명령불복종이라 하여 해고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다른 사원들이 잔업명령을 이행하는 분위기라면 직무태도 면에 있어서 연이은 명령불복종이란 다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점이다. 또한 취업규칙에 반드시 적어야하는 사항 중 하나인 해고의 사유에 협조성 결여, 명령불복종에 대한 사항을 적는다면 또한 불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인간관계·회식에 대해서는 필수적인 근로의 부문이 아니기 때문에 적용되지 않는다.
15.06.10일본의 역사에도 三大改革에 대하여Ⅰ. 에도시대 개혁의 필요성 고두개혁이란 사회에서 점층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질서의 개선 혹은 구제가 특정한 제도나 행동, 조건 개조를 통해 성취될 수 있을 때, 사회제도의 본질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일부분만을 사회 발전에 적합하도록 변혁시킨다. 항상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발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실패한다면 도리어 사회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기존의 제도나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 모순을 제거하여 기존체제 붕괴를 방지하려는 것인만큼 개혁은 사회가 불안정할 때 더욱 그 필요성이 강조된다.일본 근세시대에는 ‘에도 삼대개혁’ 이라고 불리는 개혁들이 있었다. 즉, 에도시대에도 분명 기존체제가 흔들린 때가 있었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막부에서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 개혁을 시도 하게 된 배경으로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보다 조금 더 앞선 때의 경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겐로쿠버블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던 17세기 후반, 겐로쿠 시대에는 고도의 경제성장이 있었다. 막부가 가진 주 수입원으로는 직할령의 세금, 광산의 금은 산출, 무역을 통한 이익 등으로 초기의 재정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광산의 금과 은은 17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거의 고갈상태였으며 쇄국과 해금 정책으로 무역이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또한, 급속도로 발전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문화가 발전하고 농경사회도 변화하게 되었다. 상인계층인 조닌계층이 성장하면서 각종 사치품 외에 다른 생필품들의 가격이 올라갔고 반대로 쌀의 값이 오르지 않았다. 직할령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 즉 쌀의 절대적인 양의 수치는 점점 늘어갔지만 쌀값이 오르지 않아 이 또한 막부 재정의 큰 타격을 주었다. 품삯을 쌀로 받았던 다른 무사들의 재정상태 또한 힘들어졌다. 바닥난 막부 재정을 다시 채우기 위해 경제성장으로 농촌사회에까지 침투한 화폐의 금은 주조 비율을 조정하였다. 이를 통해 막부의 재정은 채울 수한 사무라이와 상인계층의 사치스러움, 도시의 발달 등을 겪어 변화된 일본사회는 개혁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었다.Ⅱ. 3대 개혁1. 교호개혁이처럼 18세기 초, 겐로쿠, 쇼토쿠기를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번 체제는 점차적으로 모순을 드러냈다. 막번 체제가 재정난으로 흔들리는 때에 임명된 8대 쇼군 요시무네는 이에야스의 시대를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하며 체제의 변혁을 모색하였고 30년의 재위 기간동안 각종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총체적으로 통틀어 교호 개혁이라고 한다. 요시무네는 행정기구 개편, 전답 개간, 연공 수입의 확대 등을 시행하여 막부재정을 호전시키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이는 에도 삼대개혁 중 유일하게 개혁의 의도대로 흘러가 '성공'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개혁이다. 요시무네는 본래 지방 기이 번의 다이묘였으나 6, 7대 쇼군의 요절로 도쿠가와 적손의 가계가 단절된 후 이에야스가 생전에 정해 놓은 규칙에 따라 장군의 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전에 다이묘를 하며 지방을 살폈기 때문에 그는 상황에 알맞은 개혁안을 선택하여 시행할 수 있었고 개혁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볼 수 있다.먼저 교호 개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초기 정책이 바로 '검약령' 이다. 요시무네가 지방에 내린 10개조 법령을 보면 "금은은 물론이고 각종 물건이 윤택하다고 하여 함부로 써버리지 않도록, 술 과자류를 멋대로 많이 만들어내지 않도록 주의시켜야만 할 것." 이라며 검약령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사치품 제조와 매매에 관한 직인과 상인에게 동종조합의 결성을 지시하고 신제품 제조를 금하기도 했다. 신제품을 금지시키면서 미곡값의 안정화를 꾀는 것이다. 이처럼 쌀값의 안정화에 신경을 자주 썼기 때문에 요시무네를 코메쇼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상거래의 과도한 이윤추구를 제한하는 등 겐로쿠와 같은 대성한 인플레이션 시대를 보내고 과열된 사치풍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막부 식비나 옷값, 사치품에 쓰는 비용을 줄여 막부재정부담을 확실하게 줄일 수 있었다.검약령을 통해 지출을 가난해진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위한 대책으로 아이타이스마시령이라는 막부 금전채무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서민들의 의견을 거두는 메야스바코를 평정소에 설치하였는데 여기서 투서를 받아 빈민 구제 시설인 양생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막부의 재정만이 아니라 서민들을 신경쓴 정치를 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면모다.하지만 이어서 막부는 농촌에 풍작과 흉작 관계없이 일정액의 연공미를 징수하는 정면제를 실시해 수입 안정을 도모하였다. 때문에 흉작에 곡식부족을 호소하던 백성들은 농민반란, 잇키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식량부족으로 인한 농민들의 격렬한 잇키, 우치코와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교호 개혁이 많은 성과를 거두긴 하였으나 농촌 재정난은 더 심각해졌다. 농민의 조세부담이 늘었으며 자급자족형태의 농촌사회에 화폐 경제가 유입되고 있었기에 농민부담은 더욱 심각했다. 즉, 교호 개혁이 농민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였고 막부재정난을 해결하는데 꽤 도움이 되었던 성공한 개혁이라고 해도 이 또한 봉건 사회 조직 자체와 시대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 간세이 개혁요시무네의 뒤를 이어 이에시게, 이에하루의 시대에는 타누마 오키츠구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오키츠구는 로추로 승진하여 막강한 권력을 누렸는데 이를 타누마 시대라고 한다. 교호 개혁을 통해 늘린 연공이 감소하기 시작하자 막부의 재정은 또 다시 위기에 빠졌다. 오키츠구는 재정부족의 타개책으로 요시무네의 긴축 정책과 반대로 상인의 힘을 빌리는 중상주의적 정책을 채택했다. 상품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의 상인, 수공업자들의 나카마조직을 공인하여 일종의 영업세인 운조와 특허세인 묘가를 부과하였다. 또한 동, 철, 인삼 등을 취급하는 전매 자리를 설치하여 이용하는 전매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인들의 세금으로 부족한 막부의 재정을 채워나갔다. 또한 오사카 대상인들의 자금을 활용하여 간척사업도 시도하였는데 1786년 대홍수로 개혁이라 하며 에도 3대 개혁 안에 들어가지 않지만 바로 뒤에 단행된 간세이 개혁에 영향을 주게 된다.간세이 개혁의 중심인물은 타누마가 아닌 청렴한 정치가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이다. 타누마 일파와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로추직을 두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우치코와시가 발생하여 막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었다. 때문에 사다노부가 로추가 되어 새로운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사다노부는 이전의 타누마의 개혁을 비판하며 잇키를 일으켰던 하층민들을 위한 개혁안을 실시했다. 특히 농민정책에 중점을 두었는데 재정의 기초는 단연 소작한 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해 농민들의 도시 유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다시 귀향하게 만들었다. 또한 농기구 각지에 사창과 의창을 설치해 미곡의 비축분, 가코마이를 저장하도록 했다.교호 개혁과 같은 검약령을 내려 타누마와 반대로 초긴축재정을 실시하였으며 "매사 교호 연간에 시행된 규정과 작법을 참관 후에 지시를 내리도록" 명령하였다. 따지자면 사다노부는 요시무네의 손자에 해당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완전히 복고적 성향을 띤 개혁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능한 인물을 등용하여 문무장려를 했고 무사의 기강을 바로잡아 조닌과 함께 사치와 뇌물정치를 금하였다. 하타모토와 고케닌의 사치를 금하면서 채무파기특령, 즉 기연령을 내려 6년 이상 된 채무는 파기하여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뿐만 아니라 인소쿠요세바를 설치하여 노숙자를 수용하였고 마을 소요 비용의 7분의 1은 빈민 구제에 활용하기도 했다.이때 만들어진 인소쿠요세바나 다른 제도들이 막말때까지 남아있었던 점이나 막부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매꾼 것으로 보아 경제나 빈민구제 정책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사다노부는 조선과 같이 주자학을 정학으로 삼아 최고이념으로 삼으며 이외의 것을 모두 이학으로 분류해버렸다. 타누마때 난학이 발달하였던 것과 정반대의 양상이다. 조선의 과거제도와 비슷한 가쿠몬노긴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3. 덴포 개혁덴포 개혁은 이전의 개혁들보다 시간이 더 지나 1800년대에 들어서서 일어난 개혁이다. 간세이 개혁 이후 서양의 페리들이 일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일본의 쇄국정책이 변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되었다. 서양 열강들의 강제통상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1732년의 대기근, 그 후 1782년부터 5년에 걸친 텐메이 대기근, 이어서 1833년부터 6년간 걸친 덴포 대기근까지 연속적인 대기근에 농촌과 도시 모두 힘들어졌다. 특히 농촌은 황폐해져 잇키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는 도시에 까지 전해져 고리대급업자에 대한 우치코와시마저 격해졌다. 결국 '오시오의 난' 이라고 불릴 정도의 큰 잇키마저 일어났고 막부는 큰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와중에 일부 상인계층이 쌀은 독점하여 폭리를 취했다. 그런데도 마치부교는 구제책을 마련하지 않고 빈민들을 방치만 하였고 무장 봉기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11대 이에나리가 겨우 정치를 친재할 수 있게 되었고 12대 이에야스가 신임하고 있던 로추 미즈노 타다쿠니에게 모든 것을 맡김으로서 그를 중심으로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그 또한 교호, 간세이 개혁을 롤모델 삼아 "정치에 관한 일은 역대의 의향은 물론이지만, 그중에서도 교호, 간세이 개혁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모든 일을 깊이 명심하여 행해야할 것." 이라 말하며 두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덴포 개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덴포 개혁 역시 주요한 개혁정책이 바로 검약령이었다. 뿐만 아니라 간세이 때보다 더한 모든 계층에 대한 엄격한 풍속 통제를 단행했다. 신제품 제조금지 수준이 아니라 고기와 과자, 화려한 의복등을 모두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부키삼좌가 풍속을 어지럽힌다며 멀리 이전시켰고 출판 통제령을 통해 막부가 모든 출판부를 검열하였다.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되면 출판을 금지하였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었다.또한 저물가 정책으로 가부나카마와 같은 상인 조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