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이란 용기- 를 읽고‘인간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문장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정해놓은 틀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보고 싶지 않은데 자꾸 보이고, 듣고 싶지 않은데 자꾸 들리는 존재가 있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는가? 그 존재를 자신의 틀 안으로 넣어야 할까. 이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소설은 미하엘의 시점에서, 3부로 나뉘어 촘촘하게 진행된다. 1부는 15살 소년 미하엘과 36살 여인 한나가 사랑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들의 관계에서 한나가 보이는 행동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녀는 미하엘에게 의문만 남긴 채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린다. 이러한 의문들은 2부에서 한나와 미하엘이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한나는 수용소의 감시원 신분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인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그녀를 이곳까지 이끈 가장 큰 원인은 문맹으로 인한 수치심이었다. 문맹이었기 때문에 직장에서의 승진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던 소년 미하엘을 떠나 수용소의 감시원이 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법정에서 이 사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은 채 동료들의 죄까지 뒤집어써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다.그녀의 비밀을 알아차렸지만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미하엘의 고뇌가 3부에서 드러난다. 그는 한나와의 지난 일들을 그리워하다가 감옥 안의 한나에게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낸다. 한나는 이를 통해 글을 공부하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미하엘은 한나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런 한나의 모습을 거부하고 이상적인 모습으로만 사랑하려 한다. 결국 한나는 가석방되기 전 날 자살한다. 미하엘이 그녀의 전 재산을 유대인 문맹 퇴치 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한나와 미하엘의 끈끈한 이야기는 그들의 존재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미하엘은 처음에는 이를 부정한다. 그에게 한나는 자신이 한 때 너무나도 사랑했었던 여인인 동시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여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한나를 이해하려고도 노력해봤지만 도저히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한나라는 존재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인생의 많은 벽감들 중 하나의 벽감만을 내 주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끌고 온 여인을 하나의 벽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인가. 그는 그녀를 자신의 인생으로 바라볼 마음의 자리를 만들지 못한 것 같다.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그의 이런 마음을 깨닫고 자살하고, 그제서야 그는 그녀의 존재를 오롯이 자기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이러한 미하엘의 내적 갈등의 과정은 내겐 ‘인정’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는 과정이었다. 삶에는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특히 사람간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내 가치관과 전혀 맞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그것들과 어쩔 수 없이 계속 부딪혀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대응해야 할까. 미하엘처럼 답을 내놓기까지의 과정은 누구나 어렵지만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관계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사회적인 문제에서도 그러하다. 전후세대를 상징하는 미하엘이 전쟁세대의 한나를 바로 본다는 것은, 독일의 비극적인 역사와 결부시킬 수 밖에 없는 행위이다. 전후세대가 전쟁세대의 유죄를 올바르게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공동의 과제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사람들은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관계를 버틸 수 있게 만드는 떳떳한 힘이다.즉, 인정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바로 보겠다는 다짐이자 용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젊은 세대가 꼭 숙지해야 하는 덕목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성과주의, 물질만능주의, 정권에 대한 불신 등의 문제가 만연해 매우 병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제보하는 인터넷 기사에는 항상 ‘이민이나 가야지’등의 댓글이 달린다.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환경을 바로 보지 못하고 무시하는 모습이다.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반성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동시에 우리 사회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는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