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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체제
    Ⅰ.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체제#주요 연표1904 러일전쟁 발발 1905 ‘피의 일요일’ 사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결성/ ’10월 선언’발표1906 국가기본법 공포/ 제1두마 열림 1907 삼국협상 성립 1912 볼셰비키 당 결성1914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총파업/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7 3월혁명/ 제정타도/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탄생/ 레닌’s ‘4월 테제’ 발표/ 7월 사건/ 케렌스키의 연립정부 구성/ 코르닐로프의 반란/ 11월혁명1919 백군 총공세/ 코민테른 창립 1922 스탈린 서기장 취임/ 소비에트 연방 수립1. 러시아혁명1) 러시아 혁명 전의 상황※ 러시아혁명 : 1917년 1차 대전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사건 중 하나* 러시아 : 20 세기 전환기에 산업화 과정을 거쳤으나 여전히 농업 중심 사회*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의 정치: 농업사회 →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 X⇒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많은 추종자를 얻은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해결방법* 러시아사회는 19C말로부터 20C초에 걸쳐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됨.But, 차르의 전제정치에는 아무런 변화X, 자유주의와 혁명운동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가해짐.⇒ 국민의 불만이 점점 증가, 러일전쟁으로 인한 물가고는 이를 더욱 부채질∴ 1905년 초,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공장 노동자 파업이 일어남.2) 당시 러시아의 정치구도① 인민주의자 - 사회혁명당* 서구의 시민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겪지 않게 하고자 함.* 마르크스의 봉건-자본-사회주의의 발전단계를 거부* 현재의 봉건사회 →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 추구* 러시아 전제정을 타도,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함* “브나로드”라 불리는 운동을 전개 → 농민층의 의식화 및 선전작업 전개But, 당시 농민층 의식 수준 : 전제정 타도에 동의 X → 테러 전술로 전략 변경* 20C 사회혁명당 조직하여 정치활동 전개② 마르크스주의 - 사회민주노동당⇒ 마르크스주의는 인민주의자와 파업 / 농민 : 폭동 / 자유주의자들 : 의회정치와 보통선거 요구⇒ 10월 칙령으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숭인 / 입법의회(Duma) 창설을 약속함.⇒ 혁명적인 기운이 일단 누그러짐※10월 칙령* 진정한 의회민주주의, 내각책임제, 개인의 자유 등 약속* 온건 세력을 만족시킴으로써 반정부 세력을 약화시키고 혁명 진압을 함.* 정부 : 선언의 약속을 잠정적, 형식적으로만 이행* 국가기본법 제정⇒ Duma에서의 헌법문제토의 배제 & 자유주의적인 입헌 개혁 후퇴시킴⇒ Duma : 보수집단, 빈곤층 대변 X피의 일주일※ 피의 일요일 VS 피의 일주일피의 일요일1905. 1. 9 1871. 5. 21 ~ 1871. 5. 28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 국민의회 : 파리코뮌 진압위해 군대 파견주동자 : 게오르기 가폰 신부 코뮌 지지자들 2만명 희생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유혈진압3. 1905년 혁명┕ 1917년 혁명을 위한 ‘예행연습’, 제1차 러시아혁명① 배경* 판에 박은 관료주의* 비밀경찰에 의해 지배된 러시아 제정의 모순② 내용* 특정 지도자가 없음* 반정부 운동과 폭동이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확산* 전국 총파업, 전함 포템킨의 반란 등 → 최고조But, 헌법 제정, 무력 진압 : 점차 진정* 1907. 6. 19 스톨리핀 총리의 쿠데타로 종식③ 결과* 러시아 최초의 혁명→ 사망 1만 5000명, 부상 1만 8000명, 수감 7만 9000명이라는 희생* 제 1차 러시아 혁명 : 총체적 패배 X→ 차르 정권에 대한 존경심 잃고 압제자에 맞서 투쟁하는 법 배움.* 볼셰비키 핵심 활동가 : 자신을 단련, 이미 겪었던 끔찍한 경험 속에서 교훈 이끌어 냄.*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높아지고, 노동시간 단축* 10개월 이상 동안 노동자들 : 독립적인 노동조직을 만드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음→ 공장 위원회, 노조, 소비에트 등4. 3월혁명(러시아력 : 2월혁명)① 배경* 3월 혁명의 불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당겨짐.→ 러시아의 참전은 불가피* Why?→ 러시아인들의크스 이론을 러시아 조건에 맞도록 실천에 옮긴 사람* 마르크스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 준비* 1893년 이후 혁명의 전략, 전술에 관해 저술 : 20C 혁명이론 수립* 1895년 정치활동으로 투옥 → 시베리아 유형* 1900년 스위스로 가 ‘이스크라’라는 사회주의 기관지 창간 참여* 1917. 4. 16 페테르스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 독일참모부가 레닌 귀국시킴.→ 러시아를 연합군의 진영으로부터 이탈시킬 수 있다고 생각* 레닌의 귀국 : 예상하지 못한 큰 결과 가져옴.② 귀국 후의 레닌* 임시정부 비판하는 선언 : 4월 테제를 발표함* 볼셰비키 지휘, 임시정부와의 가차 없는 투쟁 선언③ 4월 테제* 러시아가 부르주아 혁명의 최고, 최종 단계에 와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이원적 권력 체제와 혁명 집단들에 종지부 찍기*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 → 사회주의 혁명으로 직결* 레닌의 혁명 이념을 담고 있음.* 러시아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공산당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 함.* 임시정부 밀류코프 : 연합군 측에 최후까지 참전할 것의 각서 보냄→ 국내에 알려지면서 4월의 위기 도래→ 많은 국민들은 격렬한 시위 벌임 → 자유주의자들 위기감 느껴 내각 개편 서두름*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립정부 성립But, 연립정부 : 일시적인 미봉책만을 제시, 국민들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 X⇒ 7월 사건 발발④ 7월 사건* 임시정부의 국방장관 케렌스키(A.F Kerensky, 1881~1970)→ 국민의 사기를 양양하기 위해 6월에 전선에서 공세 취함 : 성공 X⇒ 식량난, 물가고 더욱 심화*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해 7월에 반란 시도(7월 사건) → 실패⇒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 이 무렵 케렌스키가 새로운 내각의 수반이 됨.* 7월 시위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 시작Why? 볼셰비키의 세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음을 보았기 때문* 볼셰비키 본부가 점령, 당 기관지 의 발행 금지* 시위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의 집 수색* 반란에 가담한 부대 해제* 볼 농민&군인은 급진적인 농업정책과 토지를 약속하는 볼셰비키에 관심을 가짐* 레닌은 무력에 의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결심을 세움* 10월 회유와 강압에 의해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소집 → 볼셰비키 봉기 안을 통과시킴* 1917.11.4 대규모의 시위와 대중 집회가 열림* 1917.11.7 볼셰비키의 무장봉기가 시작됨. 무장된 “적위군은 전략요지를 점령함* 레닌은 성공적인 혁명을 성취하였지만, 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대도시에만 해당* 러시아 전역에서는 여전히 많은 반혁명세력 존재 → 이들 사이에 내전 발생 (적백내전)* 백군 : 황제의 복위를 원하는 왕당파, 귀족, 자본가 등 다양한 인물이 모여 결성된 반혁명세력→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원에 힘입어 혁명세력인 레닌과 볼셰비키 공격→ 혁명세력은 큰 위기에 빠지며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백군의 구심점을 없애기 위해 전 차르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처형? 적백내전* 볼셰비키 세력 vs 반 볼셰비키 세력→ 무력충돌로 일어난 것이 “적벽내전”* 초기 : 볼셰비키 진영에게 불리하게 돌아감* 게다가 연합국 : 백계 반혁명 세력 편에 서서 개입but, 백군 : 과거의 체제로 돌아가길 원함 → 이 사실을 안 농민들의 지지를 잃음→ 외세의 지원을 받는 매국노 취급을 받음 내전에서 패함8.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 배경* 새로운 공산정권(볼셰비키) : 독일군과 휴전교섭에 들어감.* 레닌 : ‘영토의 병합과 배상이 없는’ 평화를 주장* 독일 : 영토요구⇒ 협상은 지지부진이어서 레닌이 양보∴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 체결? 내용* 러시아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내용 O1. 폴란드, 발트지방, 그루지야 등에서의 주권 포기2. 핀란드, 우크라이나 정부의 승인3. 카르스, 아르다한, 바투미 등의 터키에의 할양4. 적위군을 포함한 육, 해군의 해체5. 60억 마르크의 배상금 지불? 결과* 크나큰 어려움 가져옴.* 사회주의 혁명가당 : 조약 체결에 반대 → 연립 정부에서 탈퇴* 이후 불셰비키는 ‘전시공산주의’라고 명명한 정책는 제도농민들은 잉여농산물을 팔아 생계유지* 농업생산량 크게 증가, 대규모 시장 형성, 상인계급 등장, 소비재 공업 활성화② 한계* 시작하고 나서 3~4년간 가시적인 성과 보임But, 농민들의 계급분화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 공업 : 산업 간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주장 제기*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를 발전시켜야 함.작업장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통제 완화X, 노동자들의 불만 야기3) 코민테른(Co-mintern)* 혁명에 승리하고 정권 장악한 레닌 : 1919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창설* 코민테른 : 국제적인 공산당 기구* 제2인터내셔널 : 자국의 전쟁수행, 자본주의 세력 재건에 참여 → 배타적 애국주의, 자본주의 옹호 세력으로 변질⇒ 파산 선언,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의 계승 내세우면서 코민테른 탄생* 강령 : 마르크스, 엥겔스의 기본적 전제의 기초 위에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등 레닌이 세운 이론들을 포함* 코민테른의 방침과 정책 : 수시로 변경→ 아시아, 후진지역에 대해서는 반제국주의적인 민족주의진영과의 합작, 동맹전술 추구→ 1930년대 파시즘의 진출에 대항 : ‘공동전략’ 전술 채택→ 인민전선(popular front) 형성But, 1939년 독, 소 불가침조약 체결 ? 전술 포기* 1941년 독일이 소련 공격→ 1943년 스탈린 : 연합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코민테른 해산10. 러시아혁명에 대한 해석, 의의, 이후 상황1) 해석① 전체주의론적 ? 반공주의적 해석*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라는 소수 음모 집단에 의한 권력 장악→ 소련 체제는 전체주의 체제라고 하는 해석이 반공주의적 해석의 주류를 이룸.● 10월 혁명의 외적 측면에서부터 음모론 제기* 대표적인 인물 : 알란 무어헤드→ 1958년 『러시아혁명』출판* 서방의 극히 보수적인 논객들 : 민중의 자발적 봉기를 강조하는 경우 多→ 볼셰비키의 역할 축소 or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반공주의적
    인문/어학| 2020.12.17| 15페이지| 3,5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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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과목담당교수학과학번이름제출일Ⅰ. 서론우리는 흔히 서양사를 공부하다보면 여러 종류의 “서양문화”에 대해 접하게 된다. 이러한 서양문화를 형성하는데 가장 먼저 기초가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얼핏 보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단어가 비슷하여서 그 개념과 내용조차도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엄연히 이 두 가지는 다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과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 비교를 해보려고 한다.Ⅱ. 본론먼저 헬레니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헬레니즘(Hellenism)은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제국을 건설한 이후 동방의 문화와 폴리스 중심의 문화를 서로 융합하여 형성한 것으로 그리스의 뒤를 이어 나타나게 된 문화이다. 이 용어는 독일 출신의 역사가이면서 정치가인 요한 드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 1808~1884)이 『헬레니즘의 역사 geschichte des hellenismus』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널리 보편화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은 크게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살펴볼 수가 있다. 먼저 좁은 의미에서 헬레니즘이란 앞서 봤듯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제국을 건설한 이후 형성된 것으로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의 혼합에 따른 매우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넓은 의미에서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문화와 정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에서 hellenims이라는 용어는 hellas에서 유래되었다.이러한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신화와 문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로마 시대를 거쳐 유럽 문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난 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중세가 시작하게 되면서 그리스 로마 문화는 헤브라이즘에 밀려서 차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가 14~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게 되면서 다시 부각 되기 시작하였다.더 나아가 헬레니즘은말 그대로 헬레네스라고 불리었던 그리스인들의 삶의 전체로 봐야 한다. 즉, 단순하게 추상화되고 형식화된 이념이나 정신 및 문화와 문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삶 전체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한 세계관과 신앙 그리고 가치관 및 삶의 양식과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된 예로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의 철학사나 지성사를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리스 철학의 전통은 학문을 신화와 종교로부터 분리시키고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서만 합리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즉, 헬레니즘의 합리성은 무엇보다도 주객의 분리와 대상의 객관화 작업을 통해 분별된 지식으로만 모든 사물을 파악하려는 사유 방식을 견지하는 데 있다. 더 나아가 헬레니즘 문화는 보편적이면서도 세계 시민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며 이것은 당시의 철학 중에서도 특히 스토아학파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스토아학파는 키프로스의 셈족계통 출신의 사람인 제노(Zeno, 335~263 B.C.)가 창설한 것으로 폴리스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자연법과 보편적인 정의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세계적인 국가를 구상하였으며, 그 구성원이 되는 시민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을 하였다.다음으로는 헤브라이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헤브라이즘(Hebraism)은 다른 모든 이상 같은 것들을 포기하고 신에 대한 복종과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히브리인의 종교는 미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윤리적인 개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거쳐서 발전했는데 그 과정은 모세 이전의 단계, 민족적 단일신 숭배의 단계, 예언 혁명의 단계, 바벨론 포수 이후의 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삶은 그들이 믿고 있었던 신(神)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히브리인들의 신은 우리가 아는 가나안의 만신전이나 올림포스 신전에 모여 살았던 신들과는 다르게 초월적 타자로서 유일신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인들은 신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자신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이뿐만 아니라 헤브라이즘은 앞서 살펴보았던 헬레니즘과 서로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가 1869년에 출판한 『문화와 무질서』의 4장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아놀드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여러 서양문화 중에서도 가장 근본에 내재 되어 있는 두 가지의 대립하는 전통이라고 보았다. 이뿐만 아니라 매튜 아놀드는 헤브라이즘의 본질에 대해서 “양심의 엄격함”으로 규정을 지었으며, 그 중심에는 자신들에게 절대자인 신이 존재하며 신은 언제나 늘 도덕적인 존재로 상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개인들은 신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되었으며,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했었다. 이뿐만 아니라 헤브라이즘은 헤브라이 문화 또는 헤브라이 정신을 총괄하여 지칭하는 말로써 유대민족이나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이처럼 헬레니즘은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이며,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 시민주의적인 성향을 지니는데 반해 헤브라이즘은 신(神) 중심적이면서도 초월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매우 믿는 성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로마 시기에 이르러 보다 더 성숙된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이를 후세에 전달함으로써 유럽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핵심적인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인문/어학| 2020.12.17| 4페이지| 1,000원| 조회(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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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를마뉴(서양사)
    유럽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서로마의 황제, 샤를마뉴과목담당교수학과학번이름제출일Ⅰ. 샤를마뉴 소개Ⅱ. 샤를마뉴의 업적1. 영토 확장2. 황제 대관식3. 순찰사 파견4. 충성의 서약5. 샤를마뉴력Ⅲ. 카롤링거 르네상스Ⅳ. 샤를마뉴 이후의 상황Ⅴ. 샤를마뉴에 대한 평가Ⅵ. 나의 생각 & 느낀점Ⅶ. 참고문헌 소개 & 평가Ⅰ. 샤를마뉴 소개피핀의 아들인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는 건장한 체구와 긴 수염을 가진 정력적인 인물이고 인품과 능력에 있어서도 탁월하였다. 그는 쉬지 않고 왕국을 누볐고 계속적으로 군사원정을 벌여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샤를마뉴는 권위적이고 때로는 잔인하기도 했지만 총명한 왕이었다.샤를마뉴는 814년 1월 28일 3시에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생전에 건립한 아헨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대성당이 그가 영원히 안식할 장소로 결정되었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 개선문을 세웠다.“정통 신앙을 지킨 위대한 황제, 샤를마뉴가 이 돌 아래 누워있다. 황제는 당당한 프랑크족의 왕국을 확장하고, 47년간 평화롭게 치세한 후, 인딕티오 7년,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신 지 814년째 되던 해 1월 28일 70대에 운명했다.”이러한 샤를마뉴로 인해 프랑크 왕국은 절정에 달했다.Ⅱ. 샤를마뉴의 업적1. 영토 확장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의 대제국은 색슨족·롬바르드족·아바르족·사라센인 등과 맞서 싸운 종교 전쟁의 과정을 통해 건설되었다. 우선 샤를마뉴는 스페인의 무어인, 덴마크 국경선의 스칸디나비아인, 이탈리아의 게르만 계열 롬바르드인과 싸우면서 프랑크 왕국을넓히고 기틀을 다졌다.아인하르트의 기록을 보면 서로마제국의 정확한 규모를 살펴볼 수 있다.“피핀이 물려준 프랑스는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 바다와 발레아레스해 사이의 갈리아 지역과 독일 내에서 프랑크족이 거주하던 지역이 전부였다. 프랑크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작센과 도나우강, 라인강, 살라강, 알라마니족과 바바리아인의 나라와 경말 보폭으로 1백만 보폭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독일에서 프랑크족이 거주하던 지역과 길이는 비슷하지만 폭은 두 배나 큰 작센 지역을 차지했고, 이 외에도 판노니아와 다키아, 이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을 획득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도나우강, 비스툴라 강과 바다 사이의 모든 야만족의 땅을 통합했다.”이러한 프랑크 왕국의 확대는 가톨릭 세력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샤를마뉴는 자신의 정복 전쟁을 성전으로 선포하고 전쟁터에는 늘 성직자를 동행시켰으며, 정복과 동시에 그 지역을 주교 관구로 재편하였기 때문이다.2. 황제 대관식799년에 로마의 시가지에서 교황 레오가 습격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교황은 북쪽으로 도망쳐서 샤를마뉴에게 도움을 호소했고 샤를마뉴가 교황의 권위와 위엄을 되찾아주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서기 800년 12월 25일에 로마에서 크리스마스 미사가 거행되고 있을 때 교황은 감사의 마음으로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참석했던 군중은 “샤를 아우구스투스, 신에 의해 황제의 보위에 오른, 위대한 평화의 로마 황제”라고 환호했다. 이렇게 샤를마뉴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봉해짐으로써 샤를마뉴와 가톨릭의 결합이 더욱 공고해졌고 이를 계기로 서로마 제국은 다시 부활하였다. 그리고 황제라는 지위가 생김으로써 이후 중세의 정치 구도는 종교를 지배하는 교황과 세속정치를 지배하는 황제라는 이중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로써 민족이동 이후의 혼란이 안정되고 그리스도교 교회를 매개로 로마-게르만적인 중세 유럽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다.3. 순찰사 파견샤를마뉴 대제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는 수도를 파리에서 엑스 라 샤펠로 옮기고 지방을 300개의 주(州)로 나누었고, 그곳에 주백(州伯) 또는 변경백(邊境伯)을 파견하여 치안과 사법, 군사를 관장하게 하고 이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각 지방의 귀족이나 주교의 권한이 막대하여 샤를마뉴의 의도대로 제국 전체를 자신이 직접 효율적으로 통치념한 샤를마뉴의 신앙심을 짐작할 수 있다.4. 충성의 서약샤를마뉴는 자신과 중앙정부를 지킬 기사단을 할아버지 샤를 마르텔로부터 기인하는 주종제도를 통해 확보했다. 그래서 황제는 12살이 넘는 모든 자유민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요구했고 789년, 793년, 802년에 행해진 선서로 말미암아 전제국을 광범위한 충성의 망으로 짜여졌다. 8세기 말 이후에는 루아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지역에서 종속관계가 맺어짐을 표현하는 용어와 의식이 나타났다. “봉신(vassal)”은 그의 두 손을 “주군”의 손 사이에 놓고 그에게 “신서”를 했다. 그리하여 봉신은 그의 주군을 군사적으로 돕고 그에게 조언할 것을 약속했고, 그 대가로 주군은 그를 보호하고 그에게 “은대지”를 종신으로 수여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명령’이 아닌 토지를 매개로 한 지극히 사적인 쌍무적 ‘계약’을 통해 성립되었다.5. 샤를마뉴력샤를마뉴는 일 년 열두 달의 명칭도 바꾸려 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1000년 후 프랑스 국민공회도 같은 일을 추진하다 같은 결과를 얻은 사실은 우리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샤를마뉴력의 월 이름들이 이국적으로 거칠게 들리는 것을 보면 샤를마뉴가 철저히 게르만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몇몇 민족, 특히 앵글로색슨족이 샤를마뉴력을 사용했는데, 아인하르트는구분샤를마뉴력January(1월)Wintermonath 겨울 달February(2월)Hornuncomonath 진흙 달March(3월)Lenzmonath 봄 달April(4월)Ostermonath 부활절 달May(5월)Minnemonath 사랑 달June(6월)Prahmonath 태양 달July(7월)Heumonath 건초 달August(8월)Arndmonath 수확 달Sept(9월)Windmonath 바람 달October(10월)Windemmonath 포도주 달November(11월)Herbstmonath 가을 달December(12월)Helmonath 죽음 달샤를마뉴력의 월 이름을 “민족적”이름이라고 표현했다.Ⅲ. 카롤 감사하여 통치에 문제가 없는지 정의가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정복민을 그리스도교로 강제 개종시킴으로써 교회의 권력을 강화시켰다.이러한 샤를마뉴는 예술과 건축 면에서도 로마 제국의 형식과 전통을 따름으로써 북유럽 세계를 풍요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라벤나의 산 비탈레 교회를 본떠 아헨의 궁정 교회를 디자인했고, 요크 신학교에 있던 영국 학자 알쿠인을 초빙하여 책임을 맡겼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과거의 다른 건축물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이를 활력 넘치는 북방식 문화로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건축 양식 및 건축 개념의 발달을 자극했다. 그리고 창조적 융합이란 점에서 그것은 카롤링거 예술의 전형을 이룬다.이렇게 샤를마뉴의 재위기에 로마의 몰락 이후 침체되었던 유럽의 문화는 모처럼 기지개를 켰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문명의 빛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Ⅳ. 샤를마뉴 이후의 상황프랑크 제국의 통일성은 샤를마뉴가 죽자 제국은 서서히 분열하였다. 샤를마뉴의 아들인 루이 경건왕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다. 그들 중 장남 로타르는 황제의 칭호와 제국의 중부 지방을 물려받았고, 차남 페팽은 아키텐을, 삼남 루이 독일왕은 바비에르를 상속받았다. 그 후 막내 샤를 대머리왕이 태어났다.루이 경건왕이 죽자 막내 샤를과 삼남 루이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동맹을 맺고 큰형인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그들은 엑스라 샤펠로 진군해 843년 로타르와 베르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해 제국은 세 개로 분리되어 샤를 대머리왕은 서프랑크, 루이 독일왕은 동프랑크, 장남 로타르는 황제의 칭호와 함께 중부 프랑크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프랑크 제국의 분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남 로타르가 죽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는 북이탈리아를 제외한 중부 프랑크를 차지하기 위해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세 나라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Ⅴ. 샤를마뉴에 대한 평가서양 역사에는 세 명의 위대한 영웅이 각에 활동한 역사가 브라이스 경(Lord Bryce, 1838~1922)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샤를마뉴가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최초의 신성로마 황제로 즉위한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희대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샤를마뉴가 황제로 즉위하는 그 순간 근대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Ⅵ. 나의 생각 & 느낀점처음에 보고서 주제로 “샤를마뉴”를 받고 난 뒤에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빌리고 과제를 시작하였다. 모두가 다 잘 알 듯이 영토 확장, 황제대관식, 순찰사 파견, 충성의 서약은 샤를마뉴의 유명한 업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유명한 업적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샤를마뉴의 업적에 대해서도 조사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참고했던 대부분의 책은 샤를마뉴의 유명한 업적들만 주로 나와 있고, 딱 한 권의 책에만 일 년 열두 달의 명칭을 바꾸려고 시도한 “샤를마뉴력”이 있고 또 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리고 책에는 “샤를마뉴력”이 나와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되게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이해를 하는데 조금 어려웠고 뭔가 내용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샤를마뉴에 대한 수업을 들었을 때는 그냥 ‘샤를마뉴가 이런 인물이고 이런 일들을 하였구나.’라는 데에서만 그쳤었는데 이렇게 보고서를 통해 서유럽의 황제로서 중세 이후의 유럽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샤를마뉴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해보고 많은 것을 알았다는 것이 정말로 보람찼다. 또 나는 보고서를 하기 전까지는 ‘샤를마뉴가 그냥 좋은 업적만 많이 남긴 사람이다.’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마뉴가 권위적이고 잔인한 왕이라는 걸 듣고 조금 놀랐었다.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에 대한 평가를 조사해보면서 이 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의견이 확고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걸 보면서 한 인물에 대하여 무조건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샤를마뉴뿐만 아니라 역었다.
    인문/어학| 2020.12.17| 7페이지| 2,500원| 조회(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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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론(서양사)
    아테네의 입법자이자 혁명솔론(Solon)과목담당교수학과학번이름제출일Ⅰ. 솔론이 살았던 시대Ⅱ. 솔론에 대하여1. 솔론의 생애2. 솔론의 사료Ⅲ. 솔론의 개혁1. 사회ㆍ경제적 개혁1) 채무 말소(세이삭테이아)와 1/6세(稅)인(헥테모로이)의 해방2) 상공업 장려3) 화폐와 도량형2. 정치적 개혁1) 시민의 4계층 구분2) 공직의 지역적 안배와 분권3) 민중재판소의 권위 확립Ⅳ. 솔론의 개혁 후1. 솔론의 개혁의 결과2. 솔론 개혁 후 혼란과 참주정의 수립Ⅴ. 솔론에 대한 평가1. 솔론의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2. 솔론을 향한 비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VI. 참고문헌Ⅰ. 솔론이 살았던 시대솔론이 살았던 기원전 7세기는 경제적으로 큰 변혁기였다. 이 시기에는 화폐가 도입되고 과수 재배가 일반화되고, 본토와 식민지 사이의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빈부의 차가 격심해졌다. 또한 농민들은 몰락하여 지주에게 예속되었는데, 이러한 예속민은 ‘헥타모로이’라고 불렀다. ‘헥타모로이’는 1/6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빌린 땅에서 수확한 농작물의 1/6을 지대로 지주에게 바친 데서 나온 이름이다. 그러나 1/6이라는 지대는 너무 경미하다고 하여 1/6을 농민이 소유하고 5/6를 지주에게 받쳤다는 해석도 있다. 이들이 살고 있었던 아티카는 토질이 척박하여 비옥한 스파르타나 메세니아에 비해 생산량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과도한 경작에 따른 토지의 피폐와 흉작, 메가라 군대의 침입, 화폐 도입에 따른 차금(借金)의 용이, 신분의 열등함과 예속에 대한 불만 등 농민의 불안은 컸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보다도 부채로 인한 노예로의 전락이었다. 농민들 중 급진분자들은 마침내 토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나섰으며, 양편의 알력이 격화되어 폴리스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기원전 594년 양측의 합의 하에 그 자신은 정작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던 현인 솔론을 아르콘으로 선임하여 그에게 조정자와 입법자로서의 권한을 위임하단편들,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정치제도』와 플루타르코스의 「솔론전」, 셋째는 고대 수사학자ㆍ역사가ㆍ문헌학자 등 여러 작가들이 그에 관해 전하는 정보들이다. 첫 번째의 시는 연대 측정이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정보를 직접 주지 않는데, 두 번째 범주의 자료는 구체적인 사건과 연대 등을 전해준다. 하지만 두 번째 자료는 솔론 당대의 것이 아니라 300~700년 정도가 지난 다음 씌어진 것이라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는 주로 두 번째 범주에 바탕을 두고 있거나 사소한 정보들인 경우가 많다.이러한 솔론에 관한 연구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아테네 정치제도』가 발견되던 19세기 말 이래 문헌ㆍ역사ㆍ법률ㆍ사회학자 등의 폭넓은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것은 그전에는 단편들로만 전해왔으나 1880년경 이집트의 사막에서 발견된 일련의 파피루스 속에 들어 있던 것을 1890년 케년(F.G. Kenyon)이 책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솔론에 대한 연구는 불완전한 사료의 한계점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솔론의 개혁을 드라콘의 입법과 구분한다. 드라콘은 법률(nomos)만 만들었으나 리쿠르고스와 솔론은 법률과 정치체제(politeia)를 모두 세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솔론의 개혁 범위가 훨씬 광범했음을 뜻한다. 그 개혁은 아르콘 선출, 시민의 4계층 구분, 민중재판소의 권위 확립 등의 정치체제부터 채무 말소, 토지제도 개혁, 사치 금지 등 사회ㆍ경제적인 여러 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Ⅲ. 솔론의 개혁1. 사회ㆍ경제적 개혁1) 채무 말소(세이삭테이아)와 1/6세(稅)인(헥테모로이)의 해방『아테네 정치제도』에 따르면 솔론이 아르콘으로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아테네에서는 부자와 군중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거의 모든 땅이 소수의 수중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 그 아이들과 아내까지 부자들 밑에서 일했는데, 이들은 ‘피보호인’ 또는 ‘1/6세(稅)인’(헥테모로이)이다는 견해도 있다.2) 상공업 장려솔론은 채무 말소(세이삭테이아)와 1/6세(稅)인(헥테모로이)의 해방뿐만 아니라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도록 장려하였다.이들이 살고 있던 아티카의 땅은 척박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일거리도 빈약하여 실업자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해외 상인들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인 물건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실업을 없애고 대체무역의 바탕을 강화하기 위해 솔론은 공업을 장려하였다. 이 때는 한편으로 수출물량의 생산을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는 풍부하게 생산되는 올리브기름을 제외한 다른 농업생산물의 수출을 금지하였다.솔론은 대책 없는 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서 그 아들은 부양의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였고 아레오파고스 의회에는 게으른 사람을 조사하여 벌하게 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산업과 무역이 발달 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아테네는 점차 코린토스, 에보이아, 시켈리아, 마그나 그라이키아 등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상업기지의 일환으로 편입되게 된다. 그전에는 아이기나를 중심으로 한 상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솔론 이후 더욱 광범한 지역과 교류가 성립되었다.이 같은 조처는 사회ㆍ정치적 특권이 주로 토지에 대한 권한을 중심으로 하던 전통사회에 새로운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 같은 곳에서는 토지 소유권이 있는 사람이 시민이 되고 시민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던 스파르타와 달리 아테네의 자연환경이 척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이렇게 솔론이 아테네인들에게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도록 장려하였기 때문에 아테네는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도자기 산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이 지중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3) 화폐와 도량형솔론은 도량형과 화폐의 표준도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전하는 『아테네 정치제도』(Ⅹ)와 플루타르코스의 「솔론전」(XV)에서 전하는 안드로티온의 말은 각각 다음과 같다.“솔론은 이렇듯 입법에서 민 늘렸다는 견해도 있다. 화폐가치의 변화와 관련하여 위 두 문장의 뜻이 모호하기 때문에 명확한 뜻을 구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솔론의 개혁으로 아테네에서는 아이기나 화폐에서 에우보이아 화폐의 기준으로 바꾸었으며 동시에 아테네에서 직접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한 것이 솔론 때라고 보기도 한다.2. 정치적 개혁1) 시민의 4계층 구분예전에는 농민이 사회의 중심이었으나 솔론 이후 수공업자나 상인들도 농민과 같은 권한을 갖게 되었다. 아테네에서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도 발달하게 되자 다양한 형태의 부를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솔론은 반드시 토지를 소유하지 않아도 되도록 소득의 정도에 따라 시민들을 4계급으로 구분했다. 제1계급(pentakosiomedimnoi)은 연간 소득이 500메딤노이(medimnoi)이상이 되는 시민으로 국고 관리직 자격을 부여하였다. 제2계급인 기사계급(hippeis)은 연간 소득이 300메딤노이 이상이 되는 시민이었고, 제3계급인 농민계급(zeugitai)은 자영농이라고도 불리고 연간 소득이 200이상이 되는 시민이었다. 그리고 제4계급인 노동계급(thetes)은 연간 소득이 200 이하로 빈민에 속하며, 민회나 법정에 참여하여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기사 이상 등급 보유자들은 최고 관직인 아르콘에 피선될 자격을 가졌고 자영농 이상의 등급에 속한 자들은 군 복무가 허용되었다.시민을 4계층으로 구분하여도 아르콘이나 아레오파구스회의의 의원은 여전히 상위 두 계층에 한정되었지만, 최하층에게도 민회에 참석할 권리를 주고, 새로 설치한 시민법정(heliaea)에도 계층의 구별없이 추첨으로 참석하게 하였다.이렇게 하여 시민들은 소속 계급이 높을수록 고위 정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고 반면에 노동계급은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솔론은 노동계급이 민회에 참가하는 권리는 인정을 해주었다.2) 공직의 지역적 안배와 분권솔론은 의회 구성이나 행정 등에서 지역별로 수를 안배하거나 그 권한을 지역으로 분산하였다.먼저 드라콘 때는 참드라크마의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솔론 때에는 드라콘 때와 달리 의회에 불참했다고 벌금을 물었다는 기록이 없다.3) 민중재판소의 권위 확립솔론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했으며, 민중의 힘을 강화하여 민중이 재판소(디카스테리온)에서 상소심 재판을 하게 하였다. 이것은 민중이 재판권을 가짐으로써 정치 체제의 주인이 되게 한 것이었다. 이때는 법이 단순하고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이나 무남여식 상속처럼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재판소가 사적ㆍ공적인 여러 가지 사건을 결정해야 했다.Ⅳ. 솔론의 개혁 후1. 솔론의 개혁의 결과솔론은 예전보다 더 강한 지도력을 가지고 아테네의 국익을 위해 안팎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다. 안으로는 사회적 평등을 위하여 채무 말소, 예속된 인신의 해방, 상공업 장려를 기반으로 한 생산력 강화와 실업 축소 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정치적으로는 부유한 사람에게 공직이나 공공경비 등 공공의 의무를 부담하게 하고, 공직선거나 재판정 등에서 경제적인 능력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참정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 바깥으로는 살라미스 등을 정복함으로써 아테네 해외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사회의 불평등과 불만을 해소하는 데 공권력을 동원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 권력으로 솔론은 기존의 지역 유지들의 독립성을 제한하고 빈부간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였는데 이 권력은 시민들 간의 동의를 토대로 주어진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도시국가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역의 자치에도 비중을 두어 중앙과 각 지역 사이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즉 솔론은 빈부간 불평등의 시정뿐 아니라 중앙과 각 지역 간에도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여 사회계층간ㆍ각 지역 간의 균형을 이루었다.그러나 이 조치로 솔론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부자들은 채권을 빼앗긴 것에 불만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
    인문/어학| 2020.12.17| 10페이지| 2,500원| 조회(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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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가사상의 노자 리포트
    Ⅰ. 서론평소에 공자, 맹자, 순자, 묵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고 이들의 업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만, 노자나 장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지도 않았고 이들이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내가 알고 있던 공자나 맹자, 순자, 묵자가 아니라 잘 모르고 있는 노자나 장자에 대하여 알아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노자를 할까 장자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장자보다는 노자에 대하여 조금 더 궁금하여서 노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서도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가사상에 유독 관심이 많았었는데 아마도 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무위자연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친근감이 있어서 다른 것들보다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인위적인 것을 가하지 않는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의미인 무위자연이 내 마음에 와닿았고 평소에 내가 지향하는 성격이랑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것들보다 더욱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하여 도가사상을 창시한 노자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Ⅱ. 본론1. 노자의 생애노자는 중국의 춘추 말기에 살았던 사람이고 중국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학파인 도가를 세운 사람이다. 사상 의식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이 컸고 철학적인 이론 사유의 면에서도 도가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성은 이(李) 씨이며 이름은 이(耳)이고 자는 담(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책을 보면 “자가 백양(伯陽)이며 시호가 담이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고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담(聃)’은 ‘이만(耳曼)’이다. 여기서 만(曼)은 길다는 뜻이다. 즉 담은 귀가 정말 크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 까닭에 “노자의 귀는 7촌이나 된다.”라는 설이 바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사기』를 보면 노자는 초나라의 고현(苦縣) 여향(?鄕) 곡인리노자는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라는 명제를 고찰한다. 이것은 먼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만물로부터 출발을 한다. 노자가 보기에는 만물은 각기 다르고 복잡하지만, 여기에서 복잡한 사물은 전부 간단한 사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노자는 만물은 무조건 가장 간단한 한 사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이 사물이 바로 “만물은 유에서 생겨난다.”라고 할 때 그 ‘유’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라는 존재는 바로 모두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또 노자는 우주라는 시작이 있는데, 이 시작은 결코 형상이 있는 구체적 존재물인 ‘유’가 아닌 바로 ‘유’의 대립물로서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사유에서 최종 결론이다. 노자는 ‘도’의 형상과 성질에 대해서 ‘도’는 형상이 없고 자연을 본받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노자의 도론(道論)은 중국의 고대 철학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두 번째로 덕론은 ‘덕은 만물의 본성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덕은 바로 덕성을 가리키며, 덕성은 바로 사물의 본성을 가리킨다. 고형(高亨)은 “오늘날 노자의 책과 장자의 말을 잘 살펴보면 ‘덕은 모든 무리의 본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덕론이란 곧 물성론이요 만물의 본성을 토론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여기서 노자가 말한 ‘덕’을 귀납해 보면 총 3가지 의미를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가 바로 우주의 본원인 도의 덕성을 일반적으로 ‘현덕(玄德)’이라 한 것이고, 둘째가 도를 체현한 성인의 덕성을 ‘현덕’이라고 하는 것, 셋째가 천지만물의 덕성을 일반적으로 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의 덕과 땅의 덕과 인간의 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사물의 덕성을 노자는 하늘의 도, 땅의 도, 인간의 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하늘의 도와 하늘의 덕, 인간의 도와 인간의 덕은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모두 동일한 논리상의 개념이다. 그리고 천지만물의 덕정치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암시하고 있다. 즉 통치자는 겸허한 태도로써 언제나 겸손한 위치에 처하며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자의 무위학설 속에는 ‘유위(有爲)’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위는 ‘작은 행위(小爲)’가 모여서 큰일을 이뤄 낼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노자에 의하면 유위는 무위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위사상을 보충하는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노자가 생각하는 정치적 이상은 바로 ‘작은 나라와 적은 국민(小國寡民)’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다섯 번째로 유약론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노자가 주장한 것은 바로 이를 통해 사회의 투쟁적인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제기한 것은 사회의 투쟁에 참여하려는 책략의 한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자는 힘을 거의 또는 전혀 쓰지 않고서도 천하를 빼앗고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고,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책략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노자는 “감히 세상 사람보다 앞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그 앞이 될 수 있고 빼앗고자 한다면 먼저 주고 구부러지면 온전해진다.”라고 말하였다.여섯 번째로 변증론은 ‘모순하는 쌍방이 서로를 이루어 준다.’라는 것이다. 노자는 사물의 대립 쌍방이 상호 의존하고 상호 전화하는 관계, 즉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원리를 천재적으로 인식, 변증법 사상이 매우 풍부한 철학 명제를 보인다. 서로 모순된 것은 바로 거꾸로 서로 의존한다고 하여, 대립된 쌍방은 서로를 절대적으로 배척하거나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의존하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순되는 쌍방이 서로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각각 그 대립면의 존재를 전제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전환되지 않도록 적당할 때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고”차이점이 있다. 그는 무엇보다 생명체를 더 신령스럽고 신비스러운 존재로 보았다. 이를테면 “천하는 신기(神器)라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기(神器)란 신령스럽고 신비스러운 만물을 뜻한다. 노자는 천하는 신비스러운 존재이므로 감히 제멋대로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생명체란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질서를 이루고 자발적으로 변화하는 자균(自均)과 자화(自化)를 주장하였다. 여기서 자화(自化)에 대하여 노자는 “도는 언제나 행함이 없다. 군주가 만약 이 무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화(化)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노자는 어떠한 명령이나 간섭에 의해 화(化)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상과 같이 서양에서 말한 생명의 개념과 노자가 말한 생명의 개념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의거할 경우 노자의 사상은 단순한 과거의 지혜일 뿐이며 과학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단지 이상론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노자의 생명관이 서양에서의 생명관과 비교했을 때 비록 다르다고 해서, 노자의 생명관이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서양에서 말하는 생명관에도 분명히 묵과할 수 없는 많은 의문점들이 있다. 첫째가 자연 상태가 적자생존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주장한 다윈의 견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투쟁의 상태로 본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다윈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가 생명체를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로 보는 견해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진화의 원인을 자연선택으로 보는 다윈의 견해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고, 네 번째가 생물학자들은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단순히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생명체란 것이 바로 서양 학자들의 주장처럼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인 기계인지 아니면 노자의 주장처럼 변화에 대해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적응을 해야하는 주체간에 대한 깊은 철학과 마땅히 그렇게 행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마음가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노자』라는 책은 다른 말로 『도덕경』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본래부터 그리 불렀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경(經)’이란 명칭을 붙이지 않고 ‘도덕 양편’ 혹은 ‘도덕 상·하편’으로 불러졌었다. 『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는 ‘노자가 지은 책, 상·하편은 덕편과 도편으로 5천 여 글자로 되어 있다’고 밝힌다. 현재 존재하는 『노자』의 판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1973년 중국 후난성 장사 마왕퇴(馬王堆)3호의 한묘에서 출토된 백서 『노자』이다. 백서 『노자』는 오탈자와 중복된 글자가 많고 세월에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노자 해석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주는 판본이다. 이 판본은 갑(甲), 을(乙) 두 종류의 필사본이 있고, 을본 상편 말미에는 「덕(德)」이라고 되어 있으며 하편 말미에는 「도(道)」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덕(德)」편, 「도(道)」편이라고 일컬어졌을 뿐 ‘경’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백서 『노자』는 갑·을본에 동일한 부분이 많다. ‘덕’이 앞에 오고 ‘도’가 뒤에 오는 편(篇)의 순서가 같으며 문장의 배열 순서 또한 같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현존하는 『노자』의 배열순서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다. 또한 백서 『노자』에는 가차자(假借字)가 많이 쓰였고 다른 판본들에 있는 착오를 잡는 단서 역할을 한다. 이런 백서 『노자』와 『노자』의 판본들의 차이를 분석하면 노자 사상의 본래 뜻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백서 『노자』는 그 가치가 매우 중요하고 보다 깊은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5. 『노자(도덕경)』에 대한 논의『노자』는 어느 시기에 저술되었으며, 누가 지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서 분분하여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크게 세 부류의 견해가 있다.첫째, 『노자』의 저작 시기를 춘추 말기로 보아, 공자의 『논어』보다 앞선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호적(胡適), 마서 있다.
    인문/어학| 2019.09.14| 7페이지| 2,000원| 조회(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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