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OST-흘러나오는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영화의 장면이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잊고 있다가도,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그때 보았던 영화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재생된다. 기억의 재생과 함께 영화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도 기억의 수면 아래에서 떠오른다. 모든 노래가 영화를 회상 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에 좋은 곡이어야만 가능하다.영화 은 과거에 유명했던 곡들로 영화의 수록곡을 구성했다. 이 곡들을 영화가 나오기 이전에 들었을 때는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후에 듣게 되면, 장면들이 떠오른다. 영화에 대한 여운을 음악이 가져다 준 것이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누구나 다시 영화를 통해 느낀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요새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 영화의 OST도 중요시 하게 되었다. 노래가 영화의 한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OST의 중요성이 커져가면서, 영화 노래가 가지는 힘과 역할을 과 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은 2013년에 개봉한 감독 ‘리처드 커티스’의 작품이다. 의 주요 장면들에는 OST가 삽입된다. 단순히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경우 말고도 대사를 빼고 노래가 사운드를 전부 채우기도 한다. 이는 감독인 ‘리처드 커티스’가 좋아하는 방법이다. 그의 다른 대표적인 작품인 만 봐도 알 수 있다. 에서 탄탄한 스토리에 더해 올드팝을 비롯한 현재의 음악가들의 작품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이 들어갔다. 'All you Need is love',‘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 노래들을 영화에 담았고, 그 노래들이 을 빛냈다.의 가장 대표적인 곡이라고 한다면 'How long will I love you'이다. 영화의 주인공 메리와 팀이 연애를 시작한 이후, 지하철역을 배경으로 해서 밴드가 공연을 시작한다. 이때 밴드가 부르고 있는 곡이 ‘How long will I love you‘이다. 연애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연애를 하라고 자극하는 곡이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까요. 별들이 하늘 위에 떠있는 한 오랫동안 내가 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사에 맞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풋풋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하는 둘의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 장면 속에서 관객들은 대사 없이도 메리와 팀에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감독은 연애를 갓 시작한 팀과 메리의 이야기를 지하철 역에서 노래와 함께 매끄럽게 넘겼다.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연애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 스토리의 진행도 자연스러웠다.‘How long will I love you"는 1990년에 출시되어 영화보다 23년 일찍 나온 노래다. 오랜 세월의 차이가 있음에도 노래는 영화 안에서 이질감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영화의 스토리에 녹아들어 더 자연스러운 몰입을 유도했다.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가 아닐까 싶었다. 영화에 어울리는 명곡을 넣으면서 대중들에게 영화에 빠져들게 했다. 아는 노래를 넣음으로써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익숙함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을 보고 난 후 'How long wiill I love you'를 들으면, 관객들은 메리와 팀의 지하철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다음 곡은 메리 역을 맡은 ‘레이첼 맥아담스’의 레드 드레스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결혼식에서 나온 곡인 'Il Mondo'다. 팀과 메리의 결혼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하했다. 결혼식 분위기와는 다르게 날씨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날씨에도 사람들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주인공들이 행복하니 악재마저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이 장면에서 오히려 코미디적인 요소가 더 많았지만, 그 요소들보다 메리와 이 노래가 관객들에게 각인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노래인 ‘Il Mondo’는 이탈리아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지미 폰타나’가 1965년에 초연한 곡이다. 이 곡의 대표 가사를 보자면 ‘오 지구야 지금 오직 이 순간만, 당신을 볼 수 있어. 당신이 침묵하는 동안에 난 날 잃어버렸어.’라는 내용이다. 결혼식에서 이 노래의 사용은 그들만의 세계가 아무리 어려운 날씨에도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이탈리아 노래였기에 처음엔 가사 뜻도 알지 못했다. 감독이 굳이 이탈리아 노래를 삽입한 것에 의문이 들긴 했다. 하지만 가사 뜻을 몰랐던 순간에도 이 노래는 메리의 붉은 드레스와 어울렸다.그 밖에도 'Mid air‘라는 곡이 있다. 메리와 팀의 블라인드 카페 장면에서도 나왔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곡은 가사도 음정도 바꾸지 않았지만 장면에 따라서 상반되는 감정을 극대화 시켜주었다. 메리와 팀의 장면에서는 한없이 아름다운 곡이었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슬픈 곡이었다.이 삽입곡들을 활용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게 했다면, 이와는 조금 다른 영화 음악의 활용을 보여준 영화가 있다. 바로 2016년에 개봉한 다. 는 영화의 스토리에 더해 그에 맞는 음악들과 마치 뮤지컬을 연상시키듯 배우들이 직접 부르는 노래로 성공할 수 있었다. 는 3백만 이상의 흥행 기록했고, 영화 상영 당시 영화 ost가 음원차트를 점령했다. 상영이 끝난 후에도 영화의 ost는 기억되고 있다. 는 재즈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과 배우 지망생인 미아가 만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도 과 같이 영화 노래가 중요한 흐름마다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해갔다.의 영화 감독 ‘다미엔 차젤레’는 배우들에게 직접 ‘City of stars'와 'Audition’ 곡을 영화 촬영 현장에서 라이브로 진행시켰다. 그는 배우들의 더욱 세밀한 감정을 영화에 담으려 노력했다. 이런 감독의 의도대로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직접 부른 노래는 관객들에게 더욱 영화의 흐름을 잘 전달했다. 를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city of stars'다. 이 노래는 에서 크게 다섯 번 정도 등장한다. 이 중 세 장면만을 이야기하면, 첫 장면은 영화의 세바스찬이 혼자 부르는 순간이다. 어두운 부둣가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세바스찬의 쓸쓸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 순간의 노래는 한없이 어두웠다. 세바스찬이 처한 상황과 노래가 어울러져있었다. 두 번째 장면은 세바스찬과 미야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을 때 같이 불렀던 장면이다. 피아노를 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부를 땐 그들의 아름다운 관계와 사랑을 노래가 뒤받쳤다. 앞서 세바스찬이 불렀던 장면의 노래라고 생각이 안들만큼 경쾌하게 변했다. 마지막은 ‘과거에 연인이었던 미아가 자신과 끝까지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세바스찬이 상상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막바지 부분에서의 활용은 관객들로 하여금 더 큰 여운과 아쉬움을 남겼다. 특유의 아름다운 영상에 ‘city of stars' 노래가 어우러지며 아직도 관객들에게 잊히지 않는 장면을 만들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의 꿈이 아닌 상대방을 선택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 장면에서 곡에 대한 느낌이 바뀔 만큼, 감독은 같은 곡을 변화를 주며 활용을 잘했다.
인물 품평 - 캉유웨이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캉유웨이(康有爲)다. 캉유웨이는 변법자강운동을 주장했던 변법론자이며, 자신이 저술한 대동서에서 대동(大同)사회를 주장했던 이상주의자이자, 변법자강운동의 또 다른 주도자라 할 수 있는 량치차오의 스승이었다. 그의 삶은 어떠했고 그가 주장해오던 것은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그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캉유웨이는 1858년 광동성 광주부에 속한 남해현 서초 소촌 돈인리에서 태어났다. 캉유웨이가 태어나고 자란 광주부는 오래전부터 동남아시아나 아랍 세계와 교류가 이루어져 온 무역항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외침의 영형에 가장 민감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인지 이 지역은 근대 서양의 침투를 받은 첫 번째 장소였으며, 아편전쟁의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자,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과 바로 이웃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는 캉유웨이가 중국 내에서 어떠한 측면에서 보더라도 서양 세계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맺어질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임을 보여준다.캉유웨이가 태어났을 때 청 왕조는 이미 쇠약해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삶은 힘겨울 대로 힘겨웠으며 서구 열강의 위협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한편 캉유웨이의 가족력을 살펴보자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지내온 사대부였다. 그는 자신의 자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안은 9세조 유경공이 사인(士人)이 되고부터 나 21세에 이르기까지 무릇 13세 동안 사인이다.” 즉 13대나 사대부가로 이어져 내려온 집안인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사대부 집안에서 성장한 캉유웨이는 자연스레 전통 유학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사상관 형성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캉유웨이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특했고 책을 좋아했으며,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높은 명망을 샀다. 그러나 그는 틀에 박히고 옛것을 공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과거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듯했다. 알다시피 그의 집안은 사대부 가문이기 때문에 ‘학문이 넉넉해지면 벼슬을 해야 한다’라는 표방을 가지고 있기까지 했지만 그가 벼슬길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못했으며 여러 번의 낙방을 경험했다.한창 그가 학문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때 쯤 우연한 기회에 고향을 떠나 홍콩을 방문하게 되는데, 고향과는 달리 번영을 누리고 있는 모습에 서양 문물의 우수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양사람, 건축물의 화려함과 도로의 정돈됨과 깨끗함, 그리고 경찰의 엄격함과 치밀함을 보고서 비로소 서양 사람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법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전처럼 그저 오랑캐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캉유웨이는 서양 문물에 대한 감탄과 동시에 청 왕조?사회의 모순과 혼란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갖게 되었으며, 훗날 이러한 경험들은 모두 변법자강운동과 그 후의 그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캉유웨이는 어려서부터 전통유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시문은 물론, 경학 주자학, 양명학 등을 배웠으며 또한 그에 능통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인이 학습한 전통과 유학의 틀에서 벗어나 본인이 지향하고, 중국이라는 국가가 서구 열강의 침입과 세계 사회의 격변 속에서 취해야할 태세를 모색하였다. 즉, 한마디로 그는 서구의 도전과 침탈에 대응하여 위기에 처한 중국을 어떻게 구원해낼 것인가에 대해 주야장천으로 고민했던 학자라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답으로 ‘중국의 가치를 재해석하여 서구적 가치를 극복하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중국 전통사상의 토대 속에서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이상세계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캉유웨이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중화세계 사회의 전반적인 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것은 서양의 견제와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은 시대적인 상황을 절실히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변법자강운동 이전의 캉유웨이는 서양 열강들의 위협과 그로 인해 청 왕조가 흔들리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 속에서 중국의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고 서양의 문물, 제도 그리고 법률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총체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했다.캉유웨이는 서양열강의 침입이 빈번했던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중화세계가 서양의 이기(利器)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서양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사상과 제도를 다른 지역사람들보다 비교적 직접적으로 체감했고, 양무운동 실패의 원인을 찾고 곱씹어 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개혁에 누구보다도 열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부가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는 이웃 나라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케이스를 보았고, 그것을 모델로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여 자신의 개혁사상의 핵심으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그의 혁신적인 개혁안이 실권을 잡고 있던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에 의해 제대로 날개를 펼치지도 못한 채 좌절되어 완전히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열을 올려 제창했던 백성을 위한 개혁사상만은 남아서 고일대로 고여 썩어가고 있던 중국에 새로운 물꼬를 터주었다. 또한, 그의 개혁운동의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그의 개혁사상은 동아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는 더 이상 청 왕조에는 희망이 없으며 2백 년 동안의 만주족의 지배와 4천 년 간의 왕권과 황권이 더 이상 발전동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즉, 현존하는 통치방식으로는 발전한 사회를 더 이상 꿈꿀 수 없을뿐더러 희망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또한 약한 세력과 그에 동반되는 어설픈 리더십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루어지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였다.결국 개혁을 주장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통치방식 아래 강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십에 따른 적절한 발전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중국 전역에 전파했으며 더 넓게는 동아시아 전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한편, 그는 자신의 저서 「신학위경고」에서 국가의 종교를 통일하자는 제안과 함께 유교적인 틀 안에서의 개혁을 제안했다. 이는 그가 서양의 사상만이 개혁으로 나아가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사상의 재조명을 통해서도 개혁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캉유웨이가 변법과 대동을 중심으로 개혁을 이루고자 실행했던 변법자강운동은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에 의해 ‘103일간의 천하’에 그쳤다. 그와 뜻을 같이 했던 동료들은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며 자신은 해외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 전역,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 사회에 퍼져나가게 된 그의 개혁사상은 각 국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갈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부여했다. 물론 중화민국의 수립 후 그가 다시 중국에 돌아왔을 때 그가 보였던 이전과는 다른 극단적 보수주의자의 모습이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화세계질서를 넘어서 세계질서가 격동에 몸부림치던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이 바로 캉유웨이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그는 분명 깊은 고뇌를 수차례 반복했을 것이며, 해외망명이라는 급격한 상황적 변화 속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곧 그가 귀국 후에 보여준 극단적 보수주의자의 모습은 ‘시대’가 캉유웨이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두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든다.
한중일의 통합에 관한 고찰하마킹()요약: 오늘날 동아시아는 EU와 NAFTA처럼 통합이 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립으로 인해 통합이 되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동아시아에 남게 된 과제가 많다. 한중일이 통합을 하지 못했던 이유들을 찾아 제시하고, 하려고한다면 무엇을 극복해야 되는지에 대해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한중일 통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한지 조사를 하려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들을 조사하고나서 해결책의 방안으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제시하고자 한다.1. 서론1) 연구배경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반 세기동안 지속된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강력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 각국의 상업 자본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으며 국경은 점차 기존의 의미를 잃고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 새로운 체제의 대표주자는, 제국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이다. 이미 두 세력은 각각 EU, NAFTA로 유럽과 북미지역의 경제적 통합을 이뤄 그 영향력을 타 지역으로 뻗어나가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과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 공동체 내에서의 확고한 지역협력체 형성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미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동아시아는 1998년 ASEAN+3을 공식화하고 2016년 9월 아시아지역 자유무역 협정인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졍) 타결협상이 예정되어있다. 그러나 EU, NAFTA와 같이 하나로 단단히 뭉쳐진 지역공동체를 형성해 경제적 패권주의를 노려볼만한 단계에 이르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사람들의 관심도 아직은 적은 편이고,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아직 정리가 안되었기 때문이다.표 1. 한중일FTA 검색 빈도(구글 트랜드)본고는 북미와 유럽과 달리 빠른 공동체의 형성이 어려운 이유는 과거의 역사, 특히 1944년에서 1953년, 중일전쟁 후반과 냉전초기의 동아시아 정세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으리라다. 또한 이 장애물들이 사라진 현 21세기, 사람들의 한중일 통합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에 대한 조사와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 조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무료 사이트의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결속의 방향성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통해 제시할 것이다.2. 본론(1)일본 패권주의의 몰락과 패권공백기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 후 일본은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점차 일본은 군국주의화하며 자신들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신질서, 일명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실현하려 했다. 일본의 패권주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중국의 항일전쟁이 시작되었으나, 전쟁 자체는 일본의 동아시아 주도권을 약화시킬 뿐, 패권 자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결국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체제가 무너진 것은 1944년부터 1945년 초, 일본의 대륙타통작전과 마리아나 해전, 도쿄대공습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패배하며 시작되었다고 본고는 보고 있다. 각각의 사건들은 일본의 동아시아 대륙과 바다에서의 패권상실과 제국의 내부적 붕괴를 초래했다.세 사건 이후 몰락한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은 1945년 8월, 원폭 투하와 소련의 만주침공으로 일본이 항복하며 완전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종전을 전후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대체할 패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중국은 전쟁의 상처를 안고 분열되었으며, 한반도와 일본은 소련, 미국의 군정기에 돌입한다. 동아시아는 본격적으로 권력의 공백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이념대립과 냉전의 물결이 이 공백기의 동아시아를 물들이게 되었다.(2)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미국은 종전 후 패권국가가 없는 동아시아에서 소련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내외적 이념대립과 현재까지도 풀지 못하는 갈등을 낳는 것에 일조하게 되었다. 먼저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을 일으켜 동아시아를 혼란에 몰아넣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전후 처리는 오로지 형태는 그대로 남고 GHQ와 총사령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형태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전시 일본의 총책임자이자 전범이라 할 수 있었던 천황은, 연합국은 물론 미국 국민의 70%가량이 그의 처벌을 주장했지만 새로운 정치세력이 아닌 반(反)-공산주의적 구체제가 필요했던 미국의 계산에 의해 처벌받지 않았다.표2. 처형전범 재판수감국외 추방무죄33%17%11%9%3%일본을 완전히 미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의 결정체는 일본국헌법이었다. 이 헌법의 초안은 맥아더에 의해서 작성되었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번역하고 약간의 수정만을 거쳐 받아들였다.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이 일개 미군 장군에게서 나와 별다른 반대가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일본 통치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일본국헌법 9조의 효과로 천황제는 확고히 유지되었고, 전쟁의 총책임자인 쇼와 천황의 처벌은 불가능하게 되었다.미국은 일본을 교두보로 삼아, 대만과 한반도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한반도의 경우 미국은 이미 1944년부터 한반도 점령과 통치계획을 세웠다. 미 국무부는 1944년 3월 점령, 신탁통치, 독립이 3단계로 이루어진 점령안을 마련했고, 1945년 7월 미국 군부는 이를 개선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한반도를 4분할하기로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과 중국은 당시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한으로 양분되었다. 미국은 일제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잃은 1944년부터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침투,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국제연합의 지지를 호소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해,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고 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한편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켰다.한편 중일전쟁 직후 일어난 중일전쟁의 두 승리자, 중화민국과 중국 공산당 간의 내전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가 패하고 1949년 대만으로 도주하자, 미국은 일단 대만을 중립화해서 불필요한 충돌을 막 발전에 큰 공헌을 하며 대만을 중국 본토 공산정권의 대항마로 키우고자 했다. 결국 대만의 중립화는 무산되고 대만은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利害)에 기반해 소위 ‘자유진영’에 편입되면서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패권국가가 없는 권력 공백상태의 동아시아에 개입, 일본과 쪼개진 중국, 한국의 반쪽을 세력권에 편입시켜 동아시아의 대립과 분열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것의 이면에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를 미국과 자본주의의 영향아래 두고자 하는 미국의 대국적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3)남겨진 과제들그렇담 오늘 날 어느 정도의 이념대립이 사라지고 나서 미국의 개입 후 남아있는 삼국이 처해있는 문제는 무엇일까?표 3. 일제강점기 검색 결과 키워드 (소셜매트릭스)일본의 항복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수탈당했던 중국과 한국에 대한 적절한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고, 더 나아가 일본의 사과도 없이 미국의 일본 통치로 인해 한중일 간의 역사적 갈등만 남게 되었다. 당시의 사과없이 일본과 한국사이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토 분쟁의 문제가 남아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또한 만주사변과, 센카쿠 열도 분쟁이 남아있는 게 오늘날의 과제이다. 표에서 나타나 듯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고통, 아프다의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리고 있다. 중국인들 또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고 역사 문제에 대한 해결은 아직도 미결로 남아있고 오늘날에도 계속 논의되는 수역문제, 영유권 다툼, 미사일 배치등 문제를 포괄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제이다.3. 결론일제의 패망 이후 동아시아의 기본질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이념 대립의 장으로 넘어갔다. 이후 소련의 붕괴에서 시작된 동구권의 붕괴는 미국 중심의 단극화된 국제 질서를 만들었으며 동아시아도 경제적으로 미국 중심의 신질서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21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지역질서가 분권화되고 다극화되어가고 있으며 패권이 작동하는 대외적인 방식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변화되었다. 군사적 일방주의 그 자체도 21세기에서을 찾을 수 있다. 역사분쟁, 수역문제, 영유권 다툼, 미사일 배치 등 여전히 냉전시대 및 일제 침략의 잔재가 동아시아의 협력을 방해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분쟁의 기원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이미 다루었다. 아직까지 역사문제의 개선과 방향에 대해서는 해결방안이 뚜렷하지 않고 지속적인 교류만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렇게 불신과 갈등, 민족주의가 난립하는 오늘날 동아시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우리는 동양평화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동양평화론은 100여년 전, 여순감옥에 투옥된 안중근 의사가 쓴 미완의 저술이다. ‘동양평화론’의 본격적인 연구는 1979년 이후에 시작되었고, 2009년 의거 100주년 되던 해에 다양한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어 ‘동양평화론’에 대한 재해석과 심층적인 해석에 따른 새로운 주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동양평화론이 최근에 꾸준히 동아시아가 나아가야할 방향으로써 관심 있게 논의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 증거이다. 동양 평화론에서 제시하는 주요 사안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뤼순을 개방하여 한,중,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근거지로 만든다. 두 번째로 한,중,일 3국이 평화회의를 구성한다. 셋째, 재정확보에 있어서 삼국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한다. 넷째, 삼국의 공동 군단을 편성한다. 이는 실제로 1993년 출범한 유럽연합이 유럽중앙은행 설립, 유로의 발행, 국경개방등 성공적으로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많은 교류와 의존을 통해 지역 공동체로 정착한 사례와 일치한다. 위의 목표들 중 일부를 수립하고 난 후, 다섯 번째. 지속적인 역사학자들의 역사교류를 통한 한중일 공동 역사서를 더 치밀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된 문제로 한중일은 오늘 날 커다란 갈등 속을 거닐고 있다. 삼국의 지속적인 교류와 대화를 통해서 역사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나가고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식의 방법으로 천천히 묶여있던 고리를 풀어 나가야 한다. 물론 오늘날 복잡미묘한 국제 정치학을 고려했을 때, 동양평화론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실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