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의 배경 및 목적최초의 교역품이라 불리는 ‘비너스 상’과 ‘칼’의 교역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의 교역으로 무역은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왔다. 무역은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국제 통상 체제의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중상주의에 기반한 보호무역주의를 시작으로 자유무역주의, 신보호무역주의 등 많은 이론들이 개발되고 다양한 무역정책들이 생겨났다. 현재도 각 국마다 다양한 무역정책들을 펼치고 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역을 하고 있다.이에 본 보고서는 국제 통상 체제의 변화 중 두 시대의 무역 정책을 비교 분석을 진행할 예정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바탕으로 그 시대에 채택된 국제 통상 체제를 국가별로 분류하여 분석한 할 것이다. 세계 패권국 혹은 경제 대국의 무역 정책과 그에 따른 상대적 약소국들의 무역 정책을 확인할 것이다. 그 후 두 시대의 무역 정책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비교 분석할 예정이다. Ⅱ. 대공황이 가져온 경제블록화의 등장 (보호무역주의)(1)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8월 유럽의 열강들은 삼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과 삼국협상(러시아, 영국, 프랑스)이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전정을 시작했다. 이후 아시에서 일본 및 영국의 식민 국가, 그리고 미국까지 참전하면서 전쟁은 전 세계로 확대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약 4년 4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패배하면서 천문학적 금액의 전쟁 배상금을 떠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영토를 많은 부분 상실하였다. 피해는 패전국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모든 국가에 피해를 낳았다. 전사자는 약 1천만명, 부상자 약 2천만명을 낳으며 엄청난 인적 및 2천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적 피해를 초래했다.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누군가의 인생사를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한 개인이 겪은 상황, 당시의 심정 등은 나를 되돌아 보는 계기를 준다.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또한 이러한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이에 내가 책을 읽으며 한 생각을 3가지 서술해보려고 한다. 먼저 이봉창의 신일본인이 되기 위한 노력은 합당한가이다. 이는 위인의 과거 행적을 살펴볼 때 과연 무엇을 더 고려해야 하는가에 초점에 맞추어 서술했다. 다음으로, 사회 발전의 개인의 태도가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봉창의 현실순응적인 모습을 보고 이러한 태도를 가진 이들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재고해보았다. 이에 현실순응적인 모습이 사회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다.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제와 벗어나 보일 수 있으나 이봉창의 업적만을 알고 인생사를 알지 못한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업적만 알게된 원인을 분석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 서술해보았다.간단히 책의 내용을 서술하고 내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 책의 초점은 위인 이봉창이 아닌 인간 이봉창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인의 모습인 이봉창은 일왕암살 시도가 주가 아닌 것이다. 가정의 몰락을 시작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했던 이봉창의 책임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받으며 좌절과 방황을 하게된다. 일본으로 넘어가 진짜 일본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당시 상황에서 그는 또 좌절을 느끼고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한다. 그 후 일자리를 위해 상해로 떠났지만,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우는 계기도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일왕을 암살하는 당일의 행적과 생각을 자세히 서술해주며 그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게 도와준다.먼저, 신일본인이 되기 위한 이봉창의 모습을 비판할 수 있는가 이다. 과거 일제 치하 당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대우는 처참했다. 차별의 주된 원인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일본인이 되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이 있다.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다. 이는 일반 백성들은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항상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제 치하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어려움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또한 그랬다. 이들에게 가장 먼저 주어졌어야 하는 것은 안정적인 생계 유지인 것이다. 이는 일본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의해 무참히 무시되었다. 그래서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기 위해 일본을 선망하고 일본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현재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생사의 길에서 자신을 챙기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를 통해 친일파 전체를 옹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한번 맹자의 말을 살펴보자. 먼저, 항심을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생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에 맹자는 조건을 단 것을 알 수 있다. 그 조건은 일반 백성이다. 여기의 백성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을 지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계적 문제를 떠나 항상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는 그 사람을 선비라고 지칭했다. 선비는 마음을 다스릴 줄알고 유교의 교리를 통달한 사람이다. 당시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제대로 된 교육의 부재는 조선인의 직업적 선택을 한정적으로 만들었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직업에서 일반인들의 기회 자체를 배제시킨 것이다. 또한 이는 삶의 여유를 없앴으며 교육적 열망이 있던 사람 조차도 현실적 문제에 부딪쳐 좌절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수양할 기회를 박탈당한 일반인들은 독립의 대한 열망을 꿈꾸는 것이 사치의 영역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된 교육을 받은 사람을 선비라 대응할 수 있다. 친일파 대부분은 고등교육(현대식 교육을 지칭하지 않음)을 받았으며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떠나 독립을 위한 바른 마음을 유지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항심을 가지지 못했으니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봉창은 전자의 상황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 사업의 몰락,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생계적 문제가 우선이 되도록 한 것이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일본인이 되기 위한 이봉창의 노력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다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순응적 모습이다. 앞에 적었듯이 이봉창은 일본인이 되기위해 노력했었다. 또한 일왕을 암살을 결심하기 전 그는 당시 현실에 저항적인 모습을 보였다기 보다 순응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에 나는 과연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인가와 꼭 모든 사람이 순응적인 모습에서 탈피해야 하는가 또한, 만약 가치 있는 일이면 사회는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먼저 나는 현실에 순응하는 것 조차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는 수많은 구성원들이 존재한다. 이 구성원들은 독립성을 가지고 있어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산다. 이와 더불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묶이는 공통성을 가진다.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최소화하고 사회의 공통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성을 중시하며 사회를 유지하며 안정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문제에 회피하고 무시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안일한 현실주의자라고 비난할 수 있나? 나는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사회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 질문인 모든 사람이 현실순응에서 탈피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를 지키기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순응하는 것에 탈피하는 사람은 누가되어야 하는가? 사회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본다. 이들의 이상이 사회 대다수에게 전해져 공감을 얻는다면 사회적 변혁이 일어난다. 이때 대다수는 대의를 위해 잠시의 사회적 혼란을 인정한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따라 다시 안정화되며 사회구성원의 대다수는 다시 자신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소수의 이상주의자들 또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뇌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사회는 발전하고 안정화되어야한다. 이 과정에 이봉창을 대입해보자. 이봉창은 처음에 현실에 안주하는 대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발전을 위한 희생을 하는 이상주의자가 되었다. 이에 따른 그의 행동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촉발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두부류의 집단이 조화는 사회를 건설적으로 발전하게 할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 교육에 대한 재고이다. 나는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을 읽기 전까지 이봉창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식은 단지 위인이었다. 일본 황제를 향해 폭탄을 던진 용감한 청년일 뿐이었다. 위인 이봉창의 모습이다. 이는 이봉창의 단편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에게는 수 많은 모습들이 존재한다. 그 중 나는 인간 이봉창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다. 누구나 조금만 노력한다면 알 수 있었던 것이지만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게 하는 주된 이유가 무엇일까라 생각해보았다. 나의 의지가 가장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한민국의 현 역사 교육 과정에서 문제가 기인한다고 보았다. 2018년도 역사교육 과정 개정안을 살펴보면 현재 역사는 사회 과목으로 분류되고 5,6학년군으로 분류되었있다. 즉 빠르면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약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역사 교육을 배운다.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역사 교육을 받는데 왜 우리는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알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답을 찾는 역사 교육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대입을 위해 수능이란 시험을 치룬다. 수능은 학생들로 하여금 정답을 찾게 만든다. 따라서 학교는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이는 인물에 대한 업적,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편적인 모습들을 포함한다. 한 인물의 구체적인 인생사, 역사적 사실의 구체적 상황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되기에 학교 교육에서 배재되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시험 범위가 존재한다. 범위 모든 부분을 배워야 한다는 거는 시간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들을 선별하고 그것만을 배운다. 이에 구체적인 내용들은 학생들, 교사들에게도 교정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교육은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답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흐름이다. 단지 인물을 아는 거로 부족하다. 단지 사건을 단편적으로 아는 것으로 부족하다. 인물의 인생사, 사건의 복합적인 요인들을 정확히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꿔줄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한국사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할 것이다.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교육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바로 초중고 연계 교육인 것이다. 현재 각 단계에서 범위를 한국사 전체로 하고 있어 시간에 쫒기게 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때 일부를 자세히,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면 깊은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하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즉, 우리는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며 답을 위한 역사 교육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답을 위한 역사는 우리에게 단편적인 역사를 제공하는 것과 동일하며 이는 역사를 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행동의 근본 원인이 인간의 조건이자 본질이다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본인 또한 인간은 왜 존재하며, 존재해야 할 당위가 존재한다면 이 당위를 구성하는 조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을 했었다. 간단히 생각하면 인간은 출생을 통해 세계라는 무대에 나타나게 되며 죽음이라는 경험을 통해 무대에서 퇴장을 한다. 그래서, 단지 인간은 삶을 향유하는 하나의 존재라고만 생각을 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최종 목표는 단지 삶을 사는 기간 동안 죽음을 준비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 했다. 이러한 안일한 생각은 인간에게 무력감을 준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 무엇이며 조건에 따라 파생되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일까 탐구하자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본 글에서는 본인의 사견을 기반으로 인간을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이에 더해 인간의 본질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이다.『인간의 조건』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it)’가 서술한 인간의 조건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이 저서를 통해 불멸성을 최상의 가치로 격상시켰다. 이는 활동적 삶을 통해 성취 가능한 가치이다. 또한 ‘관조’ 즉, 사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실천적인 삶을 추구해야함을 역설한다. 먼저, 그는 인간의 근본활동을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로 나타냈으며, 이는 노동, 작업, 행위로 표현된다. 노동은 삶 자체가 근본조건으로 인간신체의 생물학적 과정과 상응하는 조건이다. 이는 삶 자체를 표방한다. 작업은 대상성과 객관성에 대한 인간 실존의 의존성을 인간의 조건으로 보며 인간 실존의 비자연적인 것과 동시에 세계성을 표방한다. 행위는 다수성을 인간조건으로 가진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이다. 이 세 가지의 활동과 조건은 인간 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인 탄생성과 사멸성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과 작업은 세계가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세계를 유지하고 마련하는 과제를 지녔으며, 특히 행적 인간사의 영역만을 뜻한다. 따라서 노동과 작업과 같이 자유롭다고 보기 힘든 것들은 품위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고대 도시 국가가 몰락하면서 활동적 삶이란 용어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고, 모든 종류의 세상사로의 참여의 의미를 가지고 되었다. 그 영향으로 행위는 노동과 작업의 위치로 떨어졌으며, 오로지 관조만이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기원하며 이후 기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관조를 최대의 기쁨으로 격상시켰다. 활동적 삶은 이제 모든 인간활동을 포함하는 정치적 삶의 의미보단 모든 활동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게 됐고, 관조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제한된 존중만을 받게 된다. 그녀는 이에 대해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도 않음을 전제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불명성과 영원성의 차이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불명성은 시간 안에서 영속하고 지상과 이 세계에서 죽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의 신과 자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이들은 영원히 세상속에서 사멸하지 않고 존재한다. 이에 비해 인간은 사멸성을 가지지만 작업, 행위, 언어능력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세계속에 불멸성을 지닐 수 있다. 반면 영원성은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사의 영역 밖과 인간의 다수성 밖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중세의 사유에서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이 구분되는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원성은 무엇과도 상응하는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인간은 과제는 불멸성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다. 영원성의 추구는 다음 과제인 실천적 행위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본인은 인간의 조건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지 못한다는 진술에 반대한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이고 이들이 모여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옳다. 위 글에서 “이 다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생겨났다. 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는 일에 사회를 간과하면 안된다. 사회의 축적성이라는 특성을 통해 남겨진 기록은 인류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언어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인간을 보다 고차원적 존재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기록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의 실존의 조건으로 규정한 언어능력에서 파생된 문자의 기록을 폄하하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진술이라고 판단된다.마지막으로,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면서 실천적 행위를 위한 방법론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 철학자이다. 대중에게 혹은 학계에 학문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위대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적 이론만을 제시하는 학자는 단지 탁상공론만 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정치 철학자라는 위치를 가진 자는 특성상 자신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해야한다. 이는 그가 주장하는 실천적 행위의 필요성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저서에서는 방법론에 대한 부분이 미비하다. 『전체주의의 기원』과 같은 다른 저작을 살펴보면 ‘자유’의 초점을 맞추고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자유를 신뢰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방법론만을 제시한다. 하지만, ‘자유’,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다.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구체적인 지침을 세우는 것이 정치에 관여된 사람의 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저서에서 실천적 행위를 위한 구체적 방법론이 제시되었으면 더욱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실천적 행위를 인간의 조건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실천적 행위가 인간이 삶을 향유하는데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 필자는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사유’라고 생각한다. 모든 행동, 행위의 기반은 사유이다. 모든 행동의 기반은 인간의 사유를 통한 가시적으로 행위가 발현되는 것이다. 사유가 의식적이든 무다는 것은 뇌의 뉴런 작용을 통해 현대에 증명되었다. 이에 따라 전제가 거짓일 가능성은 배제된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전제가 거짓일 가능성이 배제되었다는 점, 올바른 연역적 모델을 따랐다는 점은 결론이 참이라는 것을 보장한다. 따라서,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이며 사유 자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조건이라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또한, 사유를 통해 인간의 행위, 사회의 구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사유를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점에 반대할 것이다. 그가 인간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위’이다. 사유는 관조적 삶을 구성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관조적 삶은 인간의 실존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상황들을 보면 사유를 기반으로 한 관조적 삶이 과거를 지배했다고 본다. 관조를 기반으로 한 인간 혹은 사회의 지배는 실천적 행위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 관조적 삶은 단지 인간의 역사에 영원성을 남기는 활동이며 이는 인간 발전 혹은 인간에 대한 정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성은 자연과 신의 속성이며 인간에게 적용이 불가하다는 입장이다.먼저, 본인은 ‘한나 아렌트’가 각 조건 간의 연관성을 간과한 것 같다. 그는 노동, 작업, 행위라는 인간의 근본적 활동을 분류하였다. 그리고 각 조건의 개념을 서술하며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조건은 서로 독립된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행동하는 실천적 행동을 통해 작업이 나오고 이에 따라 노동이라는 가치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이 연쇄적 고리의 출발점은 사유인 것이다. 사유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먼저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에 대해 논의해보자. 의식적으로 한 행위 즉, 한 개인이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고 하는 행동이 사유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에 반박할 여지는 없다. 다음으로는 무의식으로 나온 행동에 대해 논의해 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의 개념을 통자 각 개인이 합의를 통해 탄생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합의를 하는 행위 자체는 실천적 행위로 분류된다. 하지만, 합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 있다. 그것은 합의를 위한 상태의 비교이다. 합리적 개인이 자연상태의 이득과 사회상태의 이득을 합리적 비교해 사회 상태의 이득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사유는 실천적 행위를 이끌어내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서로 간의 합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거주지 혹은 실천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무대 조차도 사유를 기반을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사회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 조차도 인간의 사유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적용된 것이다. ‘맑스’의 과학적 공산주의도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는 당시의 영국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이론을 만들어냈다. 이는 다시 소련의 정치 체제로 채택된 것이다(비록, 상황의 모순과 지도자의 야욕으로 그래도 수용되지 않음). 이 과정을 살피면 학자의 문제의식에 따른 현실 진단, 이론의 생성, 이론의 수용 및 현실 적용의 순을 따른 것이다. 이 매커니즘 조차도 사유가 핵심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인간 행위는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인간이 삶을 향유하는 공간 조차도 사유를 통해 구성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사유라는 능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노동, 작업, 행위 자체는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생각이 기반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각 변인의 근본적 원인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이후의 모든 과정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 작업, 행위를 포함한 행동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사유 능력이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의 본질로서 역할을 한다. 이 조건은 사회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 사유를 기반으로 한 이데올로기의 현실 적용을 연구하는 것이 본인의 다음 과제라고 생각한다. 사유는 경험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변수2001
19성차별2019.10.171.주제 선정 배경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는 울면 안돼!’, ‘남자가 왜 분홍색을 입지?’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당시에는 충분하고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하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니 그 말들을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남자는 울면 왜 안 되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색의 옷을 입는 것인데 왜 간섭하는 것이지 라는 의문이 생겼다.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가르기 이전에 두 존재 모두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감정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표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왜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울음을 참도록 강요하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사회적 요구들이 저 하나 뿐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 요구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사람들이 이를 따르는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성 차별을 완벽하게 없앨 수 있을까로 고민했으며 가능하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또한, 사회 내에서 성차별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무엇이 최선일지 생각해봤다. 그래서 이 주제를 선정했으며 이에 대해 조사하며 내 이해를 풍부하게 하기로 했다. 이러한 나의 사고를 통해 나는 사회에 만연한 성적 차별에서 벗어나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 그대로인 인격 자체를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2. 성차별의 정의 및 양상성차별의 기원은 젠더이분법(Gender Binary) 사고에서 기원한다. 젠더이분법은 두 개의 대비되는 젠더를 상정하는 사회적 구조이다. 전통적인 젠더 이분법에서 두 개의 대비되는 젠더인 남성과 여성이다. 젠더 이분법에는 ‘젠더리즘’이라는 사고가 내재되곤 한다. 젠더리즘은 생물학적 성별과 성 정체성과 함께 전통적 관습의 성적 특성들까지도 하나의 성으로 일치해야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되는 성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 역할이란 남성이나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나타나는 신체적 차이로 발생하는 역할의 차이 또는 그려하기 위해 남성 근로자들에게 육아휴직을 제공하는 등의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제도의 취지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남성이 육아에 참여하는 것을 ‘남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기에 남성이 육아 휴직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장 혹은 상사들이 존재한다. 이번에는 여성의 사례를 살펴보자.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여성에게 가사노동과 육아가 여성의 전유물로 남아 있다. 즉, 보수적인 고정관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3. 성차별적 교육 현장먼저, 교육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교육은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줌’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의 주목적은 한 개인의 인격을 길러주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육과정 내에서 사회적 차별, 사회적 고정관념이 반영되어 있다면 취지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그렇다면,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기반으로 수업을 하며 교육을 진행한다. 현재 교과서에 반영된 성적 고정관념, 차별이 들어간 예시를 확인해보자.옆에 삽화를 보자. 이는 초등학교 실과 과목에 포함된 삽화이 다. 저녁 모습을 묘사한 삽화이다. 이 삽화에서 다른 가족은 앉아있고 한 여성이 과일을 가져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삽화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생긴 성적 고정관념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은 가정에서 집안일을 해야 하며 이는 당연시되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은 이러한 삽화를 보고 어머니라는 존재를 가정의 일 즉, 집안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다. 초등학생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고의 체계가 명확히 잡혀있지 않아 이러한 관념들을 당연시 받아드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 차별적인 삽화 혹은 내용이 이 하나일까? 아니다. 2018년도 9월19일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교과서 내 성차별적 표현 개선방안에 대한 결과를 보면 교과서 내에 많은 성차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을 수렴하는 온라인 국민 참여 공모 ’바꾸면 쓸모 있는 성평등 교과서‘를 진행했다. 국민 894명이 참여 했으면 앞에 언급된 성차별 표현을 성평등하게 바꾼 표현을 댓글로 제안 받았다.앞에 제시된 삽화를 이렇게 바꾸도록 의견을 냈다. 또한, 이번에 접수된 국민 제안 주요사례를 앞으로 ‘양성평등 교육 시법학교’ 운영과 청소년용 성평등 교육자료 보완 등에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내가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라 교과서만 바뀐다고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가 인가 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교육하는 선생님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선생님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정부의 노력이 빛을 바랄 것이다.4. 직장내 성차별2019년 4월 29일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서 직장내 성차별에 대한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서울시 성평등 생활사전 직장편’에 따르면 성차별 현황과 개선 방안에 대한 조사에 1205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 중 직장에서 성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1002명(83%)가 성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를 성별로 구분해본다면 충격적인 결과를 볼 수 있다. 남성은 67%(144명), 여성은 87%(858명)이 성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면, 여성에게 더 많은 비율로 성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성차별이 어떤 분야에서 이루어지는지도 설문을 조사했다. 성차별이 가장 심한 분야로는 ‘평가, 승진’(27.9%)이다. 이어 임금(21.8%), 업무배치(18.2%), 가족친화제도이용(14%),채용과정(13.1%) 순이었다. 또한, 직장에서 바꾸고 싶은 성차별적인 말과 행동으로는 남녀 모두가 결혼, 출산, 육아 관련 내용이었다.그렇다면, 직장 내의 이러한 성차별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사회구조적과 개인적 요인으로 나누어 접근해보려고 한다. 먼저,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가부장적 사회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사고, 인 인정하지 못하는 생각 혹은 나의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직장 내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할까? 그것은 바로 인식의 개선이다. 하지만, 인식이라는 것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바위와 같은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필자의 사견으로는 회사 차원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평면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성차별적5. 성차별을 당했을 때 개인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까?직장 혹은 여타 다른 사회적 조직 내에서 성차별을 당했다면 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것일까? 몇몇 사람들은 그냥 참는 것이 조직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방관한다면 사회는 바꾸지 않을 것이기에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말한다. 전자는 개인의 안위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이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 개인마다 입장,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를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후자는 자신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한들,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미투운동’이 대표적인 예시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만연했던 성폭력,폭행 문제를 고발함으로써 세상에 인식을 바꾸어 놨다. 필자는 두 개의 방법 중 무엇이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상황적 배경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나는 이러한 사실을 숨겼다고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받을 사회적 비난에 그 개인이 위축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6. 성차별을 사회 내에서 없앨 수 있을까?이 질문에 대해서는 엄청난 고민을 했다. 과연 사회 내의 성차별이 없어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머리 속으로 계속 되내었다. 그러다가 내 머리 속에 스치는 하나의 대답 사람들의 사고를 획일화시킬 수 있다고 해도 이를 받쳐줄 사회적 시스템이 구성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사람을 하나로 묶는 사회적 시스템은 현재 다양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와 배치된다. 이 사회에 익숙해 있는 개인이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한다면 과연 받아드릴까? 필자는 아니라는 답을 내놓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했던 국가들이 존재했다. 하나의 우상을 만들고 이를 숭배하게 하고 그 교리에 따라 개인을 움직이게 했다. 이 시스템에서 조차 개인들의 사회적 불만들이 표출되었고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나누는 등 엄청난 사회적 병폐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조차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성차별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이 것이 사회적 시스템에 영향을 끼친다 한들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리도록 하는 것이다.7. 성차별을 완화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성차별을 떠나 차별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많은 이론적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아직까지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실질적 효능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실질적이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내린 최선의 방법은 중대한 사회적 사건을 통한 사회적 구성원들의 인식 개선이다. 사회적 인식이 바뀐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주제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바로 과거 독재 정치에서 민주주의로 바뀐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독재 타도라는 하나의 목표로 단결했고 그로 인해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을 운용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이를 성차별에 대입해 보자. 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병폐를 고발하는 큰 사건이 터지고 이로 인해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고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성차별은 당연한 것이 아닌 없애야 한다는 인식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