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끝 시레토코 반도목차 1. 사전 준비 2. 여행일정 3. 예상비용 4. 제작후기사전준비 - 훗카이도소개 검색 훗카이도 홋카이도는 일본의 47개 도도부현 중 하나로, 일본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섬이 다 . 용화 러브레터의 촬영지인 오타루라는 지역이 속한 곳이며 , 2 월에 유명한 삿포로 눈꽃 축제가 열린다 . 기후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 냉대 ( 아한대 ) 기후에 속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매우 춥다 .사전준비 - 시레토코 반도소개 검색 시레토코 반도 시레토코 반도는 일본 홋카이도의 북동쪽에 있는 지역을 말한다 . 시레토코는 훗카이도 소수민족의 아이누어로 ' 땅이 끝나는 곳 ' 이라는 뜻이다 . 자연과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풍경이 아름다워 2005 년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침엽수와 활엽수가 울창한 원시림을 이루고 있고 , 북극에서 떠내려온 유빙과 곰 · 사슴 · 여우 · 부엉이 등 육지동물 , 연어 · 바다사자 · 고래 등 해양 포유류 , 바다새와 철새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사전준비 - 물품준비 기타 물건 구매 08/ 10 일 110V 어댑터 동전 지갑 환전하기 07/28 1070 원 = 100 엔 마스터 카드 08 / 08 현금 부족 대비 캐리어 싸기 08/15 일 추가 수화물 신청을 안했을 경우 10kg 미만으로 준비 출국 08/17 일 비행기 예약 06/12 일 호텔 예약 06/17 일사전준비 - 여행일정 (2021 년 08 월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출국 / 삿포로 삿포로에서 아시바라로 아바시리에서 시레토고 반도로 아바시리에서 / 삿포로로 귀국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사전준비 - 여행일정 2 ( 상세항공편 )1 일차 -1 부산역 인천 공항 오후 12 시 25 분 신치토세공항 오후 3 시 10 분 저녁 스아게플러스 수프카레 홋카이도 구 본청사1 일차 -2 삿포로 TV 타워 홋카이도 구 본청사 숙소 티마크 시티 호텔 삿포로2 일차 -1 삿포로 맥주공장 점심 라면 공화국 훗카이도 신궁 삿포로역 숙소 아침은 호텔 조식 바이코켄2 일차 -2 아시히카와역 오후 5 시 05 분 아비시리역 오후 8 시 49 분 숙소 삿포로역 오후 3 시 30 분 저녁 SHIROKIYA 도미 인 아바시리3 일차 -1 아비시리역 오전 9 시 55 분 시레토코샤리 역 오전 11 시 06 분 점심 편의점 우토로 마을 숙소 아침은 호텔 조식 시레토코샤리 역 오전 11 시 30 분3 일차 -2 시레토코 반도가이드 워킹 투어 오후 2 시부터 오후 5 시 30 분 우토로 마을 오후 2 시 00 분 시레토코샤리 역 오후 06 시 10 분 시레토코 반도가이드 워킹 투어 오후 2 시부터 오후 5 시 30 분 우토로 마을 오후 5 시 30 분3 일차 -3 저녁 나카즈시 시레토코샤리 역 오후 06 시 30 분 아비시리역 오후 07 시 20 분 숙소 도미 인 아바시리4 일차 -1 오마가리 호반원지 오전 11 시 08 분 ~ 오후 12 시 아비시리역 오전 10 시 44 분 숙소 아침은 호텔 조식 아비시리역 오후 12 시 26 분 점심 편의점에서 구매 아비시리역 오후 12 시 35 분4 일차 -2 아비시리역 오후 12 시 35 분 아시히카와역 오후 4 시 30 분 삿포로역 오후 5 시 55 분 스스키노 저녁 징기스칸 숙소 티마크 시티 호텔 삿포로5 일차 -1 삿포로시 시계탑 점심 라면 공화국 삿포로역 오후 12 시 36 분 소라 숙소 아침은 호텔 조식 신치토세공항 오후 1 시 14 분5 일차 -2 신치토세공항 오후 2 시 05 분 인천 공항 오후 5 시 05 분 부산역예상비용 JR 이용 5 일권 250,000 윈 트래킹 비용 25,600 윈 삿포로 숙소 100,000 윈 아바시리 숙소 150,000 윈 항공권 650,000 윈 식비 180,000 윈 기타비용 30,000 윈 합 1,385,600 윈제작후기 시레토코 반로의 여행을 계획하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계획을 계획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기본적인 부분만 준비하고 구체적인 계획은 현지에서 계획하는 나아가는 저의 여행스타일과는 차이가 있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생소하여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코로나 19 사태로 많은 교통과 관광 운영이 축소와 중단이 되면서 자료를 찾는 데에 있었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렇게 여행을 계획하면서 코로나가 종식되고 다시 해외로의 여행길이 열리면 이번에 제가 계획한 이 여행계획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의미 있었던 과제 였던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대한민국 일반항공사의 일대기들어가기에 앞서현재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항공업계는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코로나19 백신이 보급이 진행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강하게 걸어 잠금 봉쇄조치도 해소의 기미가 보이면서 앞으로의 희망과 항공사 나름대로 다양한 상품과 경영 판단으로 위기를 해처 나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항공업계의 뉴스를 보면서 저는 우리나라의 항공사의 상황과 더 나아가 역사는 어떠한지 궁금함을 느겼습니다. 그래서 대형항공사 즉 일반항공사(FSC)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1. 대한민국의 첫 항공사 조선항공사업사우리나라의 최초의 항공사는 해방 이전인 일제시대 전라북도 고창의 갑부인 신용욱이라는 사람이 1922년에 일본의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항공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이후에 일본 동아항공학교를 거쳐서 미국에서 헬리콥터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일본군에 입대하는 조정사를 양성하다가 1936년에 학교를 조선항공사업사로 바꾸고 항공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우라나의 최초의 항공사가 탄생하게 된다. 처음에그림 1 위키백과, 대한민국항공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A%B5%AD%EB%AF%BC%ED%95%AD%EA%B3%B5일본항공운송(주)에 비하면 초라하였다. 하지만 신용욱의 항공사가 돈을 벌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조선항공사업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크나큰 행운을 얻게된다. 바로 일본 정부가 정부자금을 지원해주고 일본 해군에서 DC-3 수송기(미국산 29인승 수송기)를 인수하도록 주선하고 또한, 일본 육군으로부터는 복엽기 10대를 불하 받으면서 사세는 날로 확장되었고 중국의 해남도까지 노선을 취항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회사의 항공기들이 일본군에 징발되면서 항공사업은 중단 노선을 운영하면서 대한민국의 항공업계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항공 수요 급감과 환율 상승으로 인한 운영상의 어려움을 격게 되고 창랑호 납북 사건으로 북한으로부터 창랑호의 기체를 반환받지 못하면서 당장 운행가능한 항공기가 1대만 남게 되면서 부랴부랴 항공기를 추가구매와 임차하면서 적자를 해소해보려고 하였지만 적자는 해소하지 못하여 1961년 7월 16일 신용욱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하였고 1962년 11월 13일 대한국민항공사는 폐업 처리된다. 대한국민항공사가 폐업을 하면서 정부는 구제해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해보지만 상당한 금액의 부채액과 다양한 부실한 요소로 인해서 구제를 포기하고 국영기업으로 설립을 결정하고 대한항공공사법을 제정하고 정부의 출자로 국영 대한항공공사가 설립된다.3. 국영기업에서 대한항공(민영화)이 되다.새롭게 탄생한 대한항공공사는 66년 증권거래소 상장과 67년에 한-미 노선권을 취득하는 등 힘차게 출발하였지만, 당시의 경제 사정상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라고는 재벌 회장과 대기업그림 2 대한항공공사 사장 임명장을 받고 선서하는 조중훈 사장 대한항공 50년사https://www.koreanair.com/content/dam/koreanair/ko/footer/about-us/who-we-are/koreanair-story/fifty-years/History_1.pdf임원, 고위급 공무원, 외국인, 독일로 가던 광부와 간호사들 정도가 고작일 정도로 별로 없던그림 3 1969. 3. 6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대한항공 50년사https://www.koreanair.com/content/dam/koreanair/ko/footer/about-us/who-we-are/koreanair-story/fifty-years/History_1.pdf상황 때문에 대한항공공사의 여객기 결항률은 18%를 기록하고 각종 정비 문제가 발생하면서 누적 적자가 무려 27억원에 이르자 정부는 경영을 포기하고 민영화를 결정하였다. 민영화가 결정되면서 일거수일투족이 공사법에 묶여 있었고, 모든 비용 집행 또한 예산 제도의 통제를 받아 본격적인 민영화를 위한 경영활동에는 제한이 따랐다. 이에 따라 정부가 대한항공공사법 폐지안을 임시국회에 제출해 1969년 7월 10일 대한항공공사의 모든 재산과 권리·의무는 신설되는 주식회사 대한항공이 포괄적으로 승계한다는 항목을 함께 의결, 통과시킴으로써 국영 대한항공공사 시대는 막을 내리고 대한항공 민영화의 시대가 열린다.4. 초라한 항공사에서 대형항공사로그림 4 1969. 10. 2 B720 1번기로 동남아시아 노선 최초 취항 대한항공 50년사 https://www.koreanair.com/content/dam/koreanair/ko/footer/about-us/who-we-are/koreanair-story/fifty-years/History_1.pdf그림 5서울-도쿄-호놀룰루-LA를 연결하는 태평양 횡단 정기 여객편 개설 대한항공 50년사https://www.koreanair.com/content/dam/koreanair/ko/footer/about-us/who-we-are/koreanair-story/fifty-years/History_1.pdf 이제 막 민영화가 된 대한항공은 항공기 9대의 초라한 항공사였다. 이에 대한항공의 사장 조중훈은 국제적인 항공사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국제선 노선 확대가 절실했고 신기종 항공기 도입 또한 필요불가결했다. 이에 대한항공은 1972년에 4.19 태평양 노선을 개발함으로서 전 세계 대륙 진출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민영화 당시의 국제선은 오직 일본 노선에 취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한항공은 초기의 영업 전략을 국제화에 두고 1971년 4월 태평양 횡단 미주 화물 노선을 개설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19일에는 미주여객노선 취항도 실현하였다. 이로써 당시 미주이민 교포들의 숙원사업이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민 항공의 제트화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그 후 1977년 뉴욕진출을 위한 한미항공협정 회담을 시작한 이래 2년여의 각고 시작했다. 1976년에는 5.21 서울~ 바레인 노선을 취항하여 중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용역 수출은 1976년 중동 진출로 본격화되었다. 이에 건설 사업 인력의 중동진출이 급격히 늘어나며 대한항공도 정기 노선을 개설하였다. 곧이어 사우디, 쿠웨이트 노선진출로 이어지면서 중동노선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었고 당시 여객사업 매출의 30%에 이르는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후 1993년 1월 6일 카이로 노선의 취항으로 이집트의 역사 및 문화탐방, 성지순례의 활성화는 물론 중동, 아프리카 노선망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1981년 12월 3일, 해외 화물터미널을 확보하게 되었다. 1981년 로스엔젤레스 공항 전용 화물터미널 준공에 이어 1983년 10월 18일 뉴욕 전용 화물터미널 개장은 동남아시아와 미국을 잇는 교량 역할을 수행해온 대한항공이 미국 시장의 진입로에 교두보를 확보한 쾌거였으며 우리나라의 입지를 높여놓은 계기였다. 1986년 4월 29일에는 김포 기내식 공장을 준공하여 1980년대 들어 늘어난 항공 수요에 적절히 대처하고자 하였다. 연건평 5600평 규모의 기내식 전용건물을 완공하여 하루에 최고 2만 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한항공은 국제항공 운송협회(IATA)에 정식 가입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작은 민항사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계 선진 항공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대한항공이 정식 가입할 당시 IATA는 173개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고 대한항공은 이들 항공사와 협조체계를 수립하여 경쟁력을 강화했다. 대한항공은 1990년 4월 1일 서울 ~시드니 간 여객 노선을 개설하여 오세아니아주에 첫 취항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경 또는 홍콩 등을 경유하여 악 20시간이 소요되던 비행시간을 10시간 이내로 줄였으며 그 후 1993년 8월 9일 브리즈번 노선도 개설해 한국과 호주 양국 간의 관광 및 문화교류 활성화에 기여하였%EC%95%84%EB%82%98%ED%95%AD%EA%B3%B5#s-2.1 1989년이 되면서 내국인의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됨에 따라 본격적인 항공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또 외국 항공사의 서울 취항을 연쇄적으로 하면서 경쟁이 격화되는 1988년 정부는 세계 항공업계의 자유화 추세에 따른 시장 개방 요구 등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국내 항공 산업 경쟁력을 제고 하고자 제2 민항의 설립을 계획하고 사업자선정에 나섰다. 사업자선정에는 금호그룹과 삼성그룹이 사업자에 지원하였고, 정부는 금호그룹을 최종선정하였으며, 교통부의 운송사업자 면허를 받은 금호그룹은 1988년 2월 17일 처음에는 ㈜ 서울 항공이라는 이름의 법인으로 설립되었으나, 취항을 앞두고 같은 해 8월에 법인명을 (주)아시아나항공으로 변경하였다.2번째 민항항공사로 등장한 아시아나는 초기에는 지금의 저비용 항공사보다 못한 수준의 노선을 운항하였지만, 박삼구 사장이 취임한 이후에는 신기종의 도입과 미주노선의 취항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제선의 무대에 전진하였다. 이후에 빠른 성장을 보인 아시아나항공은 99년도에 코스닥에 회사를 상장하고 03년도에는 세계적인 항공사의 동맹체인 스타얼라이언스에 가입하였고 07년부터 13년 7년 연속으로 세계적인 항공사 서비스 평가 사이트에서 5성 항공사로 인증받을 정도로 세계적인 항공사가 되었고 특수화물의 수여증가로 화물수송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면서 대한항공과 경쟁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6. 항공업계의 위기아시아나항공이 무섭게 성장을 하는 동안 대한 항공은 01년부터 인천공항의 개항에 발맞춰 항공동맹인 스카이팀이라는 동맹을 창립하고 지속적인 항공기 기종의 교체를 하고 새로운 자재 구입과 투자 항공기의 서비스와 안전에도 투자하면서 항공사의 운영에 내실을 다지는데, 공을 들이면서 08년도 발생한 미국발 금융위기를 단기간 내에 극복하였다. 하지만 대한 항공의 오너 일가에서 나온 여러 가지 갑질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동안 쌓아온 대한항공의 이미지는 땅으로 추락하였고 결국에는 19년도에 열
1) 인쇄기로 작업하는 모습-1520년목차1. 서론2. 본문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인류는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는 동물로서, 습득한 정보를 가능하면 최대한 안전하고 정확하게 보존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오늘날 인간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낸 원동력이었다.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의 인류들은 동굴의 벽이나 동물의 뼈, 계곡의 암석 등에 그림을 그려 정보를 전달 및 보관하였다. 그러나 고대 인류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보존해야 할 정보의 양이 급증하였고, 간단한 그림만으로는 많은 양의 정보를 왜곡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문자로 정보를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체계적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문자의 등장과 사용은 인류에게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지식의 독점화였다. 문자를 만든 인류는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정보보관과 전달의 편리함을 얻었다. 하지만 문자를 담기 위해서는 비싼 비용이 요구되었다. 당시 중세유럽에서 양장피(소 ·양 ·새끼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도서재료)로 만든 성경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 200~300마리의 가죽이 필요했으며, 필경사가 필사하는데 2달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성경 1권의 가격은 소규모농장 1개에 달할 정도로 매우 고가였다. 이로 인해 배울 수 있는 여유와 재화가 있는 지배층으로 독점화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글을 아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격차는 심화 되었고,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15세기 독일에서 금속 인쇄술의 등장으로 당시 유럽에 대격변이 일어난다.2. 본론당시 유럽은 종교(기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특히 기독교의 수장 교황의 권력이 막강하였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년 11월 11일 ~ 1106년 8월 7일)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갈등하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Ⅶ, 1020년 추정 ~ 1085년)가 황제를 파문 (교단이나 종파로부터 추방되는 일)를 시키면서 황제를 교황이 있는 성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정도로 교황의 힘은 막강하였고, 교황의 견제세력이 사라지자 교황은 세력권을 예루살렘으로 확장 시키려는 야욕을 펼치면서 십자군 전쟁(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을 일으키지만,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처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기사가 몰락하여 봉건시대가 가고 절대왕정(왕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관료제와 상비군을 기반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형태)의 시대가 오면서 예전과 같은 힘은 누릴 수 없었지만, 여전히 유럽 시민의 정신세계는 기독교가 지배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2.3.)의 인쇄소에서 납과 주석 그리고 안티몬(금속 원소의 종류)을 섞어서 주물을 만들고 와인과 올리브유를 만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사용하여 42행 성경을 찍어내면서 유럽의 금속 인쇄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있어, 글자를 찍어내는 인쇄기기도 중요 하지만 인쇄가 이루어지는 종이도 그의 인쇄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구텐베르크는 그의 인쇄술을 통해 성경을 인쇄하는데 초기에는 종이가 아닌 양피지를 사용하고 싶었다. 신(예수)의 말씀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귀하고 고급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 당시에는 그 재료가 양피지였다. 하지만 양피지로 성경을 인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성경 한 권의 분량은 대략 2000여 쪽이었고, 8쪽을 인쇄하려면 양이나 염소 한 마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성경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했다. 그러나 인쇄를 위해서는 양질의 종이가 필요했는데 이 또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당시 양질의 종이는 이탈리아에서 생산되었고, 이 종이를 구하기 위해서 지출되는 시간적. 경제적 비용이 매우 막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거주하는 마인츠라는 지역의 지리적 이점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강 건너 프랑크푸르트에서 매년 두 차례씩 박람회가 열렸고, 구텐베르크는 박람회에서 이탈리아산 종이를 주문할 수 있었다. 주문한 종이는 6개월 후 다음 박람회 때 배달되었다. 즉, 구텐베르크는 성경을 인쇄하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자원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생긴 영향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 중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루터(Martin Luther, 1483.11.10 ~ 1546.2.18.)의 종교개혁이다. 1) 루터는 인쇄술을 가리켜 “복음 전파를 위해 신이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까지 극찬했다. 중세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는 성 베드로성당의 개축비 마련을 위한 면벌부를 시민들에게 판매하자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만들었다. 이를 배포하기 위해 금속 인쇄술을 기반으로 2주 만에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추가로 그동안 라틴어로 되어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도 인쇄되어 널리 퍼트렸다.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루터는 그의 사상을 빠르게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판화를 통해서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도 그의 사상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종교개혁에 기반 되어서 출판된 여러 책과 인쇄물을 접하면서 이제 대중들도 지배층만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을 갖게 되었다. 즉,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해 이용했던 ‘지식’이라는 권력은 이제 사회 전반에 퍼져 지배층의 독단적인 권력의 행사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유럽 사회 시민들의 의식을 계몽시켰고,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으로 독일에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 이후 새롭게 재편된 유럽에서 시민들이 중심이 되는 사상을 주장하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계몽사상가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은 각각 이후에 미국의 와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현시대에 대의민주주의와 정부의 삼권분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때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언급될 때, 우리는 항상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직지심체요절’이다.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에 간행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보다 약 80년 정도 앞선 것이며 우리는 이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째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개발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일으킨 인쇄의 혁명과 같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였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는 인쇄기술이 정부가 독점하던 사업이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서는 대규모 인쇄 사업은 중앙 및 지방 관청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자연스레 특정 사상의 검열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고려 이후 조선의 폐쇄적인 정책으로 고려시대 보다 외국의 문물을 접하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인쇄술은 시기적으로 서양을 앞섰지만, 그 기술의 발전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은 마련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그토록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바탕에는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 상황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