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수행평가 연구건축물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학번, 이름연구 주제학생들의 공부에 영향을 주는 건축물의 요소는 무엇인가?주제 선정이유(10~400)공통 주제를 일단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인 교육으로 정했습니다. 예전에 천장의 높이가 공부환경에 영향을 준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천장의 높이 외에도 공부환경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무엇이 있고 어떻게 해야 공부에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 알고 싶었습니다.문헌 연구 결과(10~600)미네소타 대학의 조앤 레비 교수는 실험을 통해 천장의 높이와 창의성, 집중력의 관계를 알아냈습니다.천장의 높이를 2m 40cm, 2m 70cm, 3m로 30cm씩 다르게 한 후 실험 참가자들에게 창의적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낮은 천장의 실험 참가자들은 문제를 거의 풀지 못했고 3m의 참가자들은 2m 70cm의 참가자들보다 2배 정도 문제를 잘 풀었습니다. 반대로, 천장이 낮은 방의 참가자들은 높은 방의 참가자들보다 구체적인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 문제를 더 잘 풀었습니다.중학교의 건축특성을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학습자 중심교육공간에서 필요한 교육전략으로는 학습자 주체성, 개인특성맞춤교육, 문제 중심학습, 학습자간 교류, 공동체 학습이 있습니다. 학습자 중심 교육이 적용된 예시로 프랑스의 리세 넬슨만델라학교가 있습니다. 넬슨만델라학교의 다목적 공간은 주변과 연계하는 배치로 주변시설과 학습공간의 교류가 확대되고 개인특성맞춤, 문제 중심학습, 공동체학습이 이 부분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길고 높은 Industrial hall에서는 학습자주체성, 학습자간 교류, 공동체학습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추가 연구 방법(질문지, 실험, 인터뷰, 참여관찰 등의 내용)[00~100]00고등학교 1학년 32명을 대상으로 공부가 잘되는 장소와 조건을 물어보는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추가 연구방법을 통한 연구결과[00~600]일단 천장의 높이는 높은 환경에서 공부가 잘된다는 의견이 23명으로 제일 많았습니다. 창의성을 높여주는 환경에서 공부가 더 잘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도배색이 하얀색일 때 공부가 제일 잘된다고 14명이 답했습니다. 이유는 깔끔하기 때문에 집중이 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5명이 하늘색을 선택했는데 색이 시원하기 때문에 좋다고 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스탠드를 켜고 공부하는 것과 밝은 곳에서 공부하는 것, 어떤 환경이 더 공부가 잘되는지도 물어봤는데, 저는 밝은 곳을 선택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근소한 차이가 났고 거의 비슷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부가 제일 잘되는 장소를 물어보았습니다. 보기는 자습실, 교실, 카페, 학원, 독서실이었고 집이 10명으로 제일 많았고 그 이유는 편안하고 누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번째는 자습실이고 조용해서 공부 분위기가 잡힌다고 했습니다. 3번째는 학원이고 눈치가 보여서 잘 수 없어서 공부하기에 좋다고 답했습니다.결론 및 하고 싶은 이야기[10~400]일단 기본적으로 고려해야할 것은 천장의 높이인 것 같습니다. 높은 천장은 창의성이, 낮은 천장은 집중력이 향상되는데, 나이가 어릴 때에는 창의성이 높아지게 높은 천장에서 공부하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낮은 천장에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문헌연구 후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설문조사 결과 나이가 많아져도 탁 트인 공간인 높은 천장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더 많이 답했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과학 분야 혹은 자신의 진로와 관련 있는 분야, 나중에 일하고 싶은 분야저는 공학 쪽에 관심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학과에 가고 싶다고 정하지는 못했지만 알아볼 예정입니다. 과학 분야 중에서는 화학에 관심이 있습니다.발표했던 내용 요약아레니우스의 산과 염기안녕하세요. 000입니다.저는 이온화설을 제안하고 산과 염기를 정의한 아레니우스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그리고 산성과 염기성 물질 몇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아레니우스는 스웨덴의 웁살라 근처의 비크에서 1859년에 태어났습니다.17살 때 웁살라 대학에 입학하여 물리, 수학, 화학 등을 배웠습니다. 전공은 물리학이었습니다.졸업 후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E.에들룬드의 실험실에서 전기분해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아레니우스는 전해질희석수용액의 전기전도도에 대하여 연구하여 ‘전해질의 이온화설’ 논문을 1884년 과학아카데미에 발표하였습니다.1884년 웁살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큰 인정은 받지 못했습니다.러시아 과학자 오스트발트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과학아카데미의 해외연구생으로 5년간 여러 나라에 유학하였습니다.1896년 이온화설 제안의 업적으로 독일의 전기화학학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고, 1901년에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습니다.1902년 영국의 왕립학회로부터 데이비상을 받고, 1903년에는 전기해리이론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아레니우스는 스웨덴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1905년 스웨덴 정부는 노벨물리화학연구소를 만들고, 아레니우스를 소장에 임명하였습니다. 1927년까지 여러 연구를 하였습니다.주요 업적은 이온화설, 화학반응속도 및 면역화학의 이론, 오로라의 기원에 관한 가설, 화산 활동의 원인에 대한 가설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책을 썼는데, 《사적으로 본 우주관의 변천》 등이 유명합니다.산과 염기산: 수용액에서 이온화하여 H+를 내는 물질신맛이 난다금속과 반응 시 수소 기체가 발생한다.탄산칼슘과 반응 시 이산화탄소 기체가 발생한다.염기: 수용액에서 이온화하여 OH-를 내는 물질쓴맛이 난다.단백질을 녹이는 성질이 있다.이 주제를 선택했던 이유교과서에 아레니우스가 산과염기를 제안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산과염기의 정의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정의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레니우스에 대해 조사해 보게 되었습니다.발표 주제와 연관지어 더 알고 싶은 점아레니우스가 연구한 다른 것들을 알고 싶고 아레니우스 말고도 누가 또 산과 염기에 대해 연구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산성, 염기성 물질의 더 많은 예도 알아보고 싶습니다.
1단계: 제안 배경 현황인권 문제에 대해 잘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몇 일전 옥수동에서 할머니께서 버스자리에 앉기도 전에 출발을 한 것을 보고 노인 인권에 대해 조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인권 문제에 대해 뉴스 기사를 찾아보았는데 노인 인권 문제가 심각하여 존엄케어로 해결해야 한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나이를 이유로 한 고용 차별, 문화관광해설자 제한, 아파트 경비원 연령차별 등이 일어나고 있고 이가 당연시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49.6%로 가장 높고, 자신의 건강상태에 만족하지 않는 한국 노인의 비율이 39.7%로 나타났다. 아셈노인인권정책센터 김현정 정책기획팀장은 의료법에 인권보호 규정이 없는 점을 지적하며 국가, 사회가 노인 인권 개선의 환경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덕현 노인요양병원협회 수석부회장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노인을 돌보는 존엄 케어에 대해 설명했다.또 동국대학교의 문영희, 강동욱 교수님이 쓰신 논문(노인 학대방지를 위한 법 정책적 개선방안 2018.9)를 보고 노인 인권에 대한 정책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노인 학대의 심각성이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 실태도 잘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노인 학대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대처가 부족하기 때문에 노인 학대 방지를 위한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논문이었다.2단계: 정책의 필요성보건 복지부의 2017 노인 학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노인 학대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101602건에서 13309건으로 31% 증가했다고 한다. 노인 학대는 대부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데, 피해 노인이 그 사실이 알리지 못한 이유는 자녀가 사회적으로 받을 비난과 처벌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학대 받는 노인들의 인식개선과 학대 예방을 위해 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정기적으로 학대 예방 교육과 홍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UCC제작 등을 통하여 노인에 대한 존중을 하는 태도를 기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또한 정부에서 저소득층 노인의 문화권과 주거권 보장을 위해서 행사 개최비용, 주거지 위생 관리와 난방 보수를 위해 재정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3단계: 제안 목표 및 정책 제안1.노인 학대 예방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문화권을 보장한다.노인 학대 예방을 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노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함양하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학대를 신고하여 학대받은 노인을 보호하고 가해자를 엄중 처벌하면 학대받는 노인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된다.또한 노인의 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기적인 또래친구모임을 구성해야한다. 모임을 조직해서 운동을 하면 건강이 회복되어 삶의 질이 향상되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2.노인의 주거권을 보장하자.사회적 약자인 노인은 주거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노후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집수리 봉사단을 모집하여 도배, 봄맞이 대청소 등을 하여 노인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여 도우미를 고용하는 비용을 서로 조금씩 부담해서 깨끗한 환경에서 저소득층노인들이 생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3. 노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증가시키고 노인 일자리를 창출시킨다.노인 학대는 피해노인의 경제적 수준이 낮을수록 학대의 위험으로부터 많이 노출 받는다. 그러므로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을 확대시켜 경제적 수준을 향상시키면 노인 학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기초연금의 지급 대상은 소득 수준 하위 20%인데,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OECD 조사 결과 49.6%로 노인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지급대상이 너무 작다. 자산을 축척해놓은 노인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전히 자산이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독거노인을 위한 기초 연금을 상향시켜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 연금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여 노인들이 일자리를 가지게 되면 사용되지 않고 낭비되는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하면서 소득을 얻고 계속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면서 우울증과 의욕저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자존감도 올라가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4단계: 정책제안 세부내용 및 실천방법1. 노인 학대 예방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문화권을 보장한다.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TV동화 행복한 세상’ 동영상처럼 짧은 UCC나 만화 동영상 등으로 교육 후에 교훈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성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정기적으로 하면 머릿속에 잘 남아있을 것이고 그것을 실천할 확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등학생은 초등학생들과 달리 영상 교육만으로는 실질적인 효과가 적은 연령대이기 때문에 노인 체험 교육을 통해 직접 체험해서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인 체험 복장을 착용하여 걷는 체험이 이루어진다면 노인 분들이 횡단보도를 빨리 건너지 못하고 허리를 잘 피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양원이나 병원관련 직업인들을 대상으로도 노인 학대 예방 교육을 하여 스스로도 모르게 실수(언어폭력 ,신체폭력 등)를 저지르지 않게 미리 방지를 해야 한다.문화권을 보장하기 위해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바둑, 장기, 음악 감상 등 취미생활을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을 만든다. 그리고 노인 분들이 참여하는 서예 나 민화 그리기 행사 등을 개최해 일상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 새로운 취미 활동이 생겨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본다.타이치 운동이라고 관절강화에 효과가 있는 운동이 있는데 노인 분들에게 좋은 운동이라고 한다. 이런 운동을 보건소나 자치회관에서 공간을 마련하여 삶의 활력소를 제공하는 모임이 만들어졌으면 한다.2.노인의 주거권을 보장하자.겨울에는 결로현상으로 곰팡이가 생기고 집은 난방시설이 취약하므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결로현상 방지 및 난방에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지원해줘야 한다. 유리창에 뽁뽁이를 부착하는 작업, 실내 단열재 지원, 노후한 보일러 수리 및 교체지원 등이 필요하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 물건을 잘 정리하거나 버리지 못해서 집을 더 협소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물건정리 지원 산업을 실시한다. 이불은 무겁기 때문에 노인 분들이 자주 이불 빨래를 못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된 노인을 위해 이불 빨래 봉사단을 모집하여 깨끗한 잠자리를 선물하는 지원 사업을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3. 노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증가시키고 노인 일자리를 창출시킨다.요즘에는 사교육도 많은데 마을 주민 센터나 자치 회관에서 지식인 노년층을 선생님으로 모셔서 한문수업과 역사수업, 일본어수업 등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유치원에서 옛 동화를 읽어주는 수업을 해주거나 요리를 만들어서 독거노인들에게 배달해주는 반찬 요리사와 같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연세가 있으시기 때문에 너무 오랜 시간 근무하는 것 보다는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하루 5시간 정도로 근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요즘에는 맞벌이 가족의 수가 증가해서 녹색 어머니회 모집이 힘든데 신체적으로 건강하신 분들을 모집하여 녹색 할머니, 할아버지 회를 구성해서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면 좋을 것이다.
독립을 위해 노력한 위인, 백범 김구김구는 황해도 해주에서 1876년 태어났다. 집안 분들이 양반에게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 양반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아버지를 졸라 서당에 다니고 과거 공부를 하여 과거장에 도착한 김구는 뜻밖에 광경에 놀랐다. 과거장은 글을 대신 써주는 사람, 뒷돈을 주고 벼슬을 사는 사람 등 매관매직으로 부패할 때가지 부패한 상황이었다. 이후 김구는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니 관군에 의해 실패한다. 동학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김구는 안태훈의 집으로 피신한다. 안태훈은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 세 아들들의 아버지다. 이때 김구는 안태훈의 제자가 되었고 마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의 호심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능선 선생의 청나라 방문 권유로 청나라를 돌아보기로 하고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기로 한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1896년 3월 김구는 치하포의 주막에 있었다. 그런데 칼을 차고 어눌한 언어를 구사하는 스치다를 보고 저 녀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당이라고 생각해 그의 칼을 빼앗아 그를 죽였다. 일당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장사하는 사람이면 변장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달 후 그는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당할뻔하나 고종이 특사를 보내 사형취소를 내려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김구는 감옥 안에서 여러 책을 읽고, 죄수들을 가르치다 백성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알려야 겠다는 마음으로 감옥을 몰래 빠져나왔다.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백성들이 느끼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김구의 원래 이름은 김창수였으나, 본명으로 활동하면 위험할 것이라 생각해 외자 이름인 김구로 바꾸게 되었다. 1901년 12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이 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김구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학교와 군대를 만들어 나라를 구하자는 활동을 함께하였다. 그러나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빼앗기게 되면서 김구는 서대문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으로 하였는데, 백범은 백정부터 범부 까지 애국심을 가지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특무공장이라고 생각해 적의 주요인물들과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거를 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활동을 돕기도 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일왕을 폭탄으로 저격하였고, 운봉길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고위인물들을 폭살시켰다. 이들의 활동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들의 의거로 일본군이 김구와 임시정부의 인물들을 잡으려 하자 김구는 60만원(현재 198억원)이라는 현상금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0년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을 맡게 되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 oss부대와 함께 한국광복군은 1945년 8월에 국내 진입작전을 실행할 계획을 하고 특수훈련을 했다. 그러나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의 항복으로 이 계획은 실행조차 해보지 못하였고 김구는 광복이 된 기쁨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지 못해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었다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1945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38도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김구는 남북의 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했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였던 안두희가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김구에게 권총 4발을 쐈고, 그 자리에서 김구는 서거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이 서거하면서 통일을 위한 노력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고, 결국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진행되었다.사실 백범 김구기념관을 오랜만에 가보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 한번 와봤지만 그때는 어려서 기념관을 제대로 구경해보거나 글귀를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성숙된 상태로 방문해서 박물관에서 지식을 얻어 갈 수 있었다.이번 봉사활동으로 인해 여러 가지 느낀 점과, 새로 알게 된 점이 있다. 사실 김구의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었다. 본명은 김창주로, 안전을 위해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백범의 정확한 뜻도 알게 되었다. ‘백정에서 범부(평범한 사람)까지 모두 애국심을 갖길 바란다.’ 국민 모두가 애국심을 갖기를 바라는 김구의 마음이 그의 호에서부터 느껴진다. 그의 활동들을 보며 그의 열정과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서거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안두희는 김구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으나 미군정이 배후로 암살을 지시했다고 한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림을 주장하던 김구는 미군정에게 걸림돌로 치부되어 암살된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 이루고 노력한 일들이 많은데 돌아가셔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감옥에도 갔다 오고 여러 순탄치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독립의지를 꺾지 않은 그가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김구의 출생, 활동 등 일대기와 자세한 이야기들을 알 수 있게 되어 정말 좋았고 박물관 투어도 할 수 있어 정말 유익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김구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기념관을 둘러보니 내가 모르는 내용도 무척이나 많았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에 힘쓰시고 광복 후에도 통일을 위해 노력한 분이신데 잘 모르고 있어서 미안한 느낌도 들었다. 독립운동가 윤봉길과 의거 직전에 시계를 바꾼 일화도 인상적이었다. 윤봉길의 시계는 6원짜리였고, 김구의 시계는 2원짜리였다. 윤봉길 의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였다는 글을 읽었을 때 놀라움을 느꼈다. 의거 직전에 김구가 윤봉길에게 느꼈을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 요즘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거의 없다. 김구처럼 나라를 위해서 평생을 바칠 정도의 나라사랑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나라에 자부심을 가지는 정도의 애국심은 필요할 것 같다. 김구의 특징은 큰 키와 동그란 안경뿐만이 아니다. 큰 키보다 너 높은 애국심이 그의 진정한 특징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계속 이어나간 그의 정신은 본받아 마땅하다. 백범 김구 기념관의 시설도 좋았다. 1층 중앙에 흰색 백범 김구 동상이 인상적이었다. 큰 동상을 올려다보니 원래 가지고 있던 존경심이 배가 되어 느껴졌다. 김구의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좋았고 기념관 중간 중간에 영상도 있어서 긁을 읽기 지루해하는 어린 아이들도 관심을 갖고 관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 전시관에 있던 김구 실물사이즈 모형도 인상적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그의 키를 동상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김구 선생님의 소원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들어 알고 있었으나, 다른 장소에서 그 이야기를 읽어보니 느낌이 달랐다. 소원 3개를 모두 대한의 완전한 독립으로 했다는 점은 그가 대한 독립에 대한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독립운동가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다. 그들의 노력에 대해 감사함을 가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가끔 그것을 잊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에는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활동들을 자주 해서 그들을 잊지 않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를 스스로 생각을 갖고 조사한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만, 학교 숙제를 통해서라도 그들을 잊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김구는 물론이고 다른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의 어머니, 김락나에게 ‘여성독립운동가 중에 생각나는 사람을 말해보라’라고 한다면 유관순과 남자현 두 분 밖에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독립운동가 모든 분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분들에 대해 더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에 우표박물관에서 여성독립운동가 우표 기획전이 3월에 열렸었다. 그곳에 방문하여 여러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일생과 활동에 대한 간략한 소개 글을 읽던 중에 관심이 가는 분이 있었다. 그 분은 독립운동가 김락이었다.관심이 간 이유는 모진 고문 때문에 두 눈을 실명했다는 내용을 봤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인상 깊었고 두 눈이 실명한 이유가 뭘까 알아보고 싶어져서 독립운동가 김락을 조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락은 1863년에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천천리는 내앞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서 독립유공자 20분이, 마을 출신까지 합하면 33분이나 배출되었다. 정말로 대단한 독립운동가 마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을은 의성김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독립운동이 결속력 있게 길게 이어졌던 곳이다. 김락은 이 가문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락의 남매들로는 김대락, 김효락, 김소락, 김정락 4명의 오빠와 김우락, 김순락 2명의 언니가 있었다.그녀가 18살이 되던 해에 친정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하는 집안인 진성이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고, 2남 3녀를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안가 시어머니를 여의고 집안의 맏며느리의 역할을 맞게 되었다. 이때 시아버지 이만도는 안동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을 맡게 되었고, 남편 이중업도 외국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맏며느리로서 짊어지게 된 직책이 무거웠지만 아내를 잃은 시아버지와 남편, 집안의 사람들을 살뜰히 보살폈다.1910년 국권침탈이 일어나자 이만도는 일제에 항거하는 뜻으로 24일간 단식하다 세상을 떠났고 큰 오빠 김대락도 동생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연이어 일어난 슬픈 소식에도 김락은 꿋꿋이 남편과 두 아들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의 두 아들은 이동흠과 이종흠으로, 이동흠은 1917년 광복회에 참여해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돼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종흠도 군자금 모집 활동에 기여했다.1919년에 남편 이중업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김락 또한 1919년 3월 독립만세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57세라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안동 예안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때 달궈진 인두로 두 눈을 실명 당했다. 그녀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은 80년 동안 세상 빛을 받지 못하다가 200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2000년 여름 안동의 독립 운동사를 연구하던 김희곤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일제 경찰의 기록물인 「고등경찰요사」를 읽다가 ‘안동 양반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이 내 어머니가 3·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발견해 김락의 독립운동이 세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고등경찰요사는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가 만든 고등계 형사들의 지침서이다. 김락의 독립활동이 일제의 기록에서 발견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석방 후에도 김락의 고통은 고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2차 독립청원을 준비하던 남편 이중업이 병으로 1921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차남 이종흠도 1926년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돼 1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냈다. 홀로 남아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김락은 2번의 자결 시도를 했다고 한다. 김락은 그 뒤 1929년 2월 12일에 67세를 일기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김락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그녀가 살던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또 김락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우리가 독립운동가 김락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잘 알려지지 못한 독립운동가일수록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녀의 집안은 3대 연속으로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대가 연속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두고 놀라워하지만 그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사람이 누군지는 관심이 없고 누군지 알지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