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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A+레포트] 조선은 유교국가인가? (반대입장)
    [A+레포트] 조선은 유교국가인가? (반대입장)
    우리는 통념상 조선을 유교국가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현상들은 모두 유교의 강력한 영향권 하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조선 건국과 멸망의 원인을 유교를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조선은 유교에 종속된 국가였을까? 과연 유교가 조선의 모든 역사적 사건과 현상의 인과를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열쇠일까? 지금부터 조선은 유교국가라는 통념을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비판하고, ‘조선은 유교국가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개진하고자 한다.조선을 유교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첫 번째 근거는, 유교가 공통 조건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는 당시 동아시아에 공통적으로 뿌리박은 사상체계이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 독보적인 특수성을 지니지 못한다. 또한 왕조의 체제교학으로서 사실상 어떤 역사 현상과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유교를 통한 인과설명은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화재의 원인을 산소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공기 중에 산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불이 붙는 것이지만 그 누구도 화재를 산소에 의한 재난으로 규정하는 않는다. 부주의, 자연발생, 의도적 방화 등 각기 다른 화재들이 각기 다른 직접적 원인들을 가지고 있듯이 조선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도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의 각기 다른 인과들을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조선의 역사를 유교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일은 모든 화재 사건을 산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둘째, 역사의 인과는 복잡성과 다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역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원인과 결과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으로 얽힌 실타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 또한 마찬가지로 시대와 지역,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수많은 다른 요소들과 얽히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인과의 연쇄적 고리를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교국가 조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 각 사건마다 유교가 줄 수 있는 영향력이 다르고, 이에 따라 비유교적 성격을 지닌 훨씬 강한 인과적 연결고리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의 멸망을 살피면, 우리는 그 원인으로서 성리학 말고도 당시 국제 정세, 대내적 위기 등 실질적인 요소들을 고려할 수 있다. 조선의 멸망은 고루한 유교적 사고방식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제국주의 국제 정세 속 일본의 성장과 야욕이 더 크게 작용했을지 모르는 일이다.셋째, 행위가 정신에 상응된다는 이원론에 함몰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성리학이라는 정신적 요소의 영향력만으로 모든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위는 다양한 조건의 결합물이므로 의식의 질서로만 환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통념상 조선 후기 재산상속에서 딸들이 배제된 일의 원인을 성리학적 종법질서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유교적 질서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전략과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친족 간의 결합을 포기할 수 없는 이상 사이의 절충된 산물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현실은 경제적 사회적 요소들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성리학적 이념은 그것을 정당화 내지 가속화하는데 그쳤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이라는 정신적 요소만 강조한다면, 이에 매몰되어 그 이면에 존재하는 행위의 다양한 조건을 간과할 수 있다.
    인문/어학| 2025.09.18| 2페이지| 2,000원| 조회(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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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춘추전국이야기7 전국시대의 시작> 요약 및 서평
    <춘추전국이야기7 전국시대의 시작> 요약 및 서평
    춘추전국이야기 7 - 전국시대의 시작: 비평과 감상1. 전국시대의 시작, 그 이야기 속으로역사서 중 전국시대를 다룬 독보적인 저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국시대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상상과 추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불가피하게『전국책』등 논란이 되는 역사서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앞으로 책을 집필함에 있어서 오류나 왜곡된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언급한다. 다만 확실하게 기록과 해석의 경계를 분명히 밝힐 것을 약속한다.이어서 그는 전국시대 역사의 흐름에 대해 간단히 먼저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전국시대는 삼가분진으로 본격화되었다. 전기에 위 문후와 오기의 개혁이 있었지만 문후 사망 이후 흐지부지해진다. 이후 삼진의 연합이 와해되고 대륙 중앙에서는 서로 치고 받는 난타전이 시작된다. 그 사이 상앙의 변법을 거치며 서쪽의 진(秦)이 성장한다. 부랴부랴 6국이 힘을 합쳐 진에 대항해보지만 결국 진에 의해 천하통일이 이루어진다.저자는 이러한 전국시대의 일곱 국가들을 일곱 나무를 통해 비유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무의 뿌리는 국체요, 이는 정치의 근본이다. 줄기는 전략이며 이는 전쟁과 외교의 지침을 말한다. 가지와 잎은 전쟁 승리를 위한 단순 계책인 전술을 의미한다. 가지와 잎에만 집중한 타국의 나무들과는 달리 진(秦)의 나무는 전략을 바꾸지 않고 일관성 있게 줄기를 위로 곧게 나아가게 해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결국 진 또한 정치의 근본인 뿌리가 썩어 곧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저자는 가지와 잎, 즉 전장에서의 승부와 담판장에서의 득실에만 신경 쓰다가는 정작 중요한 뿌리와 줄기를 망각하게 됨을 지적한다.이후 그는 기존에 전국시대를 다루었던 서적들이 가진 심각한 결점으로 몰인정함을 언급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대다수 개인의 존재를 하찮게 다루지 않고 당시 인민의 생활과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끝없이 상상하여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것을 말한다. 자신의 책이 그들의 혼을 행여나 상처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지원으로 대비하고자 했으며 한, 조와의 분쟁 막기 위해 외교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위 문후는 제나라의 전씨의 쿠데타를 용인하고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해주는 등 제나라와도 외교적으로 큰 분쟁을 만들지 않고자했다. 저자는 그를 전략의 원칙을 위해 자신의 기호나 옛 원한 따위는 잊고도 남을 대인배라고 평가한다.위 문후는 법가적 개혁군주였다. 법가와 유가의 종합형 인물인 이회를 등용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법제적, 경제적 개혁을 도모했다. 위 문후는 또한 유학자들을 중시했다. 그는 유학자들이야말로 실용적 기능을 가진 인재들을 통솔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보았다. 저자는 단간목과의 일화를 통해 문후가 유학자들을 함부로 하지 않고 존경의 태도를 표시한 군주였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이것이 향후 법가사상의 고봉으로 알려진 상앙, 한비자가 유학자들을 배척한 것과 대비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유가는 법가의 출발점과 다름없다. 문후는 능력이 출중해도 성품이 모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군자를 가장 높이 두고자 했다. 위 문후가 가장 의지했던 개혁가인 오기 또한 유학자 출신으로 유가의 학설을 바탕으로 법가 및 병가 사상 발전시킨 인물이다. 저자는 이에 따라 위 문후의 개혁도 유가적 법가의 맥락에서 읽어야함을 주장한다.지방 단위의 정치를 중요시한 위 문후는 지방관이 현지의 백성을 장악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공손히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인재를 찾아 섬기라는 말고 함께 서문포를 업에 보냈다. 업에서 서문표는 인신공희와 같은 지방의 악습을 강하게 뿌리 뽑았으며 무당, 삼로 등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저자는 이를 비록 뒤틀린 형식이지만 지방자치를 용인하지 않는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위 문후는 중앙에는 유학자를 등용하고 지방엔 서문표 등과 같은 강단 있는 실력자를 배치했다. 지방의 각 실력자들은 기존에 있던 지방 속리 도움을 받지 않고 백성을 직접 지배했으대 50만을 격퇴했다고 나와 있지만 저자에 의하면 이는 분명 과장이다. 그러나 오기 측이 승리한 것은 분명하다. 이어서 저자는 오기의 방식이 정면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었음을 말한다.이렇게 서하에서 진을 점차 압박하던 오기는 난데없는 참소를 당하게 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오기는 본국에 기반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기는 변방의 새로운 땅에 위나라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곧 중앙 귀족들의 식읍에서 차출한 자들이다. 이를 통해 오기가 중앙 정계의 귀족들의 견제와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를 지지해주었던 위 문후가 살아있을 때는 괜찮겠지만 문후가 없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문후가 기원전 387년 사망하자 그 아들인 무후가 군위에 올랐고 이를 계기로 오기를 시기하는 여러 세력들은 그를 모함했다. 저자는『여씨춘추』등의 자료를 통해 오기가 중앙 권력에서 오기가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음을 설명한다.이후 중앙 무대에서 설 자를 잃은 오기는 결국 초나라를 떠난다. 저자는 오기가 위나라에서 밀려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귀족들을 누르고 군주권을 강화하고자했던 그의 정책 때문이다. 오기는 중간 지배층의 이중착취를 금지하고 변방에 백성을 이주 시켰다. 이는 다수의 귀족들이 그에게 반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무후와의 오기 사이에 틈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후가 교만하고 호승심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그가 오기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셋째, 오기를 비롯한 서진파와 왕조를 비롯한 동진파의 대립 때문이다. 왕조는 후에 상당을 동방의 거점으로써 차지한 인물로 오기를 참소한 자다. 저자는 왕조가 상당에 기반을 둔 귀족이며 서방의 거점보다 그곳을 더 중요시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후 초나라로 간 오기는 초 도왕의 환대를 받고 재상직을 맡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위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여러 개혁들을 추진해 나간다. 기록에 따르면 오기는 불급한 관직 줄였으며 법을 명확히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오기게 석문에서 패배한 이후 위협을 느낀 위나라는 더 동쪽에 있는 대량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이후 소량마저 진에게 빼앗기고 만다. 저자는 위가 동쪽에서 싸움질을 하느라 힘을 분산시켰기 때문에 진에게 계속해서 영토를 내주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 혜공은 진과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동쪽에서 한, 조와 싸움을 계속했으며 송 또한 침공했다. 결국 서하는 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5장에서 저자는 위 혜왕의 계속된 몰락과 위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제나라 전술가 손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계릉에서의 싸움에 대해 알아보자. 위 혜왕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조나라의 한단 공략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전국책』에 의하면 위나라는 먼저 송나라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나라는 바로 1년 전에 위나라의 공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나라와 사전에 말을 맞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나라를 배신한다. 이후 제나라가 전쟁에 참여하여 조나라와 위나라 둘 다 지치게 만든다는 계산 하에 위나라의 양릉을 공격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실제 전황은 더 복잡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전쟁은 위나라와 제-조-송-위의 대결이며『죽서기년』과『손빈병법』의 기록을 통해 제군의 진격로가 하나가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이에 따라 다시 자세하게 본 전쟁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위 혜왕은 한단을 공격하면서 치구로 갑사 8만을 진격시켰다. 이때 위(魏)군이 위(衛)를 공격하자 손빈은 위(衛)를 돕지 않고 남쪽의 엉뚱한 곳인 평릉을 친다. 그리고선 일부러 작전에 가장 서투른 대부들을 보내 패배하도록 한다. 이후 손빈은 적이 교만에 빠져 제나라 군을 얕보게 만든 뒤에 계릉에서 위군을 요격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위나라는 한단을 점령했지만 결국 계릉을 잃게 됐다. 저자는 이것이 위나라 본토를 공략하여 한단을 구한 손빈의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위는 추가적으로 진의 상앙에게 안읍을 공격당하여 빼앗김으로써 만신창이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위 혜왕은 과거의 실패를 통해못한다. 오기는 자신을 강하게 하고 손빈은 상대를 약하게 하기 때문이다.6장에서는 진나라에서 변법 개혁을 주도한 상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상앙은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공숙좌의 중서인(집사)이었으나 공숙좌 사망 이후 진나라로 간다. 공숙좌가 죽기 전 상앙을 위 혜왕에게 추천했으나 혜왕이 듣지 않자 그를 등용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니까 죽일 것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왜 상앙은 진을 선택했을까? 저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시 진나라는 수도를 역양으로 옮기고 풍속을 개혁하는 등 바야흐로 융성하던 중이었다. 또한 이때 야침찼던 진 효공이 21세의 창창한 나이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진을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뛰어났다. 이에 매력을 느낀 상앙은 결국 진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상앙은 당시 진 효공의 총애를 받았던 환관 우두머리인 경감을 통해서 진 효공을 네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효공에게 제도, 왕도, 패도,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법 순으로 유세를 했다고 한다. 효공은 처음에는 거들떠보지 않다가 네 번째 유세에서 상앙의 말에 푹 빠지고 만다. 저자는 상앙이 네 번에 걸쳐 다른 주제로 유세한 것을 두고 그가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군주의 마음을 알아내고 그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속도를 조절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후 상앙은 비로소 진 효공의 신임를 얻고 진나라에 변법 도입을 주장한다. 대신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그는 변설을 통해 새 시대의 새 법을 주장했다. 결국 효공의 강한 지지 아래 좌서장에 임명된 상앙은 본격적으로 변법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다.저자는 『상군서』, 『상군열전』, 『한비자』 등을 통해 상앙의 변법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상앙의 변법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상앙은 연좌제를 도입하고 극형주의를 표방했다. 이는 백성들의 사사로운 싸움과 범죄를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기존의 분가를 하지 않는 풍습을 지우기 위해 인구 및 호수를 증강시키는 정책을 썼으며 식구의 수에 따라 기한다.
    독후감/창작| 2023.02.06| 12페이지| 2,000원| 조회(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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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춘추전국시대의 전쟁과 무기체계
    춘추전국시대의 전쟁과 무기체계
    춘추전국시대의 전쟁과 무기체계학교학과학번이름목차I. 서론·································································································3II. 군대의 조직, 규모의 변화···········································3III. 전투 양상················································································5IV. 전쟁 무기의 발달·····························································71. 춘추시대의 전쟁무기2. 전국시대의 무기 체계3. 전쟁의 보완재, 병법과 병법가V. 결론·····························································································12I. 서론중국은 거대하다. 단언컨대 이토록 거대하고 광활한 지역에서, 춘추전국시대만큼 역사적으로 수많은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통일’된 중국이 본격적으로 역사상에서 등장했다는 점은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춘추전국 시대와 관련하여 백가쟁명과 같은 사상 혹은 국가별 변법 등의 시대적 특징들은 비교적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실제로 국가와 국가 간의 사활을 건 전투가 어떠한 양상으로 혹은 어떠한 무기체계에 의해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필자는 이에 대해 깊은 학술적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체계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춘추 전국시대는 중원에서 주 천자의 억제력이 약해지면서 발생한 시기다. 이를 통해 중원은 서로의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보였던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했다. 순장된 병력들을 기초로 그 규모를 측정했을 때 소규모의 군대는 대략 5개의 부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려졌으며 1개 부대는 전차 1대에 5명의 탑승자, 혹은 호위병, 그리고 그들 외의 보병 25명이 하나의 부대로써 구성되어 있다.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서는 군대의 병종과 그 규모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보이는데, 춘추시대에서는 아직까지 귀족들 사이에서의, 제후와 제후 사이의 예(禮)에 입각한 전쟁을 치르는 시기였다면, 전국시대에서는 대규모의 군대와 전문적인 군인이 발생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춘추시대의 전쟁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 더 이상 국인(혹은 사인)으로만 군대의 병력자원을 충당하는 것이 크게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진(晉)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이러한 낡은 제도를 깨고 야인, 즉 민(民)들까지도 그들의 병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제도의 개편을 보고, 다른 국가들까지 앞 다투어 이를 본받게 되면서 군대의 규모는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된다.예를 들어 군대의 규모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오면 어느 정도로 확대가 되는지를 알려주는 자료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국력의 힘을 나타내는 단위는 전차를 나타내는 승(乘)이었다. 진(晉)의 경우 기원전 632년에는 7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고, 기원전 537년에는 4,9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제(齊)나라의 경우에도 기원전 720년에는 고작 100대의 전차를 동원했을 뿐이었지만,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면 무려 4,000대 이상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춘추시대에는 이처럼 전차를 중심으로 만승지국, 혹은 천승지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전국시대에 들어가서는 전차의 무력화로 인하여 더 이상 전차가 중심이 아닌 보병을 중심으로 군대의 규모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진(秦)이나 초(楚), 제(齊), 조(趙)와 같은 국가들의 병력은 무려 대갑세기까지의 전투는 많은 수의 전차가 등장하여 전차전으로 자웅을 겨루는 전차의 전성시대로 일컬어진다. 주된 전투는 전차가 이동하기 쉬운 평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춘추 시대의 중기에 이르게 되면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게 되면서 전차의 질이 크게 향상되게 되었고,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전차의 숫자 자체가 그 국가의 힘을 의미하는 병력의 표지가 되었다. 춘추 시대의 전차전은 귀족적인 전투로 흔히 알려져 있으며, 교전하는 쌍방은 “예”의 원칙에 의거해서 싸워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병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며, 전투에서의 속임수는 있어서는 아니 되며, 적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면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등의 원칙이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과 동시에, 실제로는 전쟁을 벌일 때는 농민들이 보병으로써 함께 전투에 참가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전차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보병의 경우에는 전차에 비해서 그 활용도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알려졌다. 직접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하는 기병에 비해서 전차의 경우에는 기동력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초창기의 전차는 보통 나무로 만들고 말 두 필이 전차를 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에는 물론 4두 전차, 6두 전차까지 나왔다고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전차에 승차하는 전투 인원이 적지 않은 탓에 그리 기동성이 좋은 병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차를 모는 계복(戒僕)과 활로 무장한 갑수(甲首), 그리고 창(여기서의 창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끝부분이 뾰족한 창(槍)이 아닌 적의 병사를 마차로부터 떨어뜨리는 데 특화된 무기인 과(戈)를 의미하는 것이다)과 방패를 가지고, 근접전을 전문적으로 하는 병사인 참승(參乘)을 기본으로 한 조로 삼고 움직이는 전차들은 춘추 시대 전반기의 주 병종으로 전투에 참여했지만, 기원전 6세기 말부터는 전차를 이용하지 않는 전투가 점차 늘어가기 시작둘러싸고 있는 성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벌어지게 된다.(때로는 전차전이 사라지게 된 이유가 봉건 국가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공성전을 벌이게 됨에 따라, 성곽을 직접적으로 넘어가는 보병의 효용이 전차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에 전차가 점차 전쟁에서 도태되었다고 보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이에 따라 전쟁에서는 보병과 함께 직접적으로 성곽을 넘어 공격할 수 있게끔 하는 구름사다리(운제)나 성벽에 대해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성 안에서 농성을 벌이게 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게 되었다. 즉 성을 공격하고 해자를 빼앗는 전투 상황에서는 언제나 긴 시간을 대치하는 교착상태가 지속되게 된다. 성곽이 가지는 방어 체계의 견고함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림 1 춘추시대의 전차, 전차에 탑승하는 인원 중 참승이 사용하는 무기가 같이 표현되어 있다.다시 말해 춘추시대에서 보였던 기존의 전차전과는 다르게, 보병과 함께 다른 병과들의 기민한 움직임을 통해 전쟁을 치르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고(혼합 병종) 이와 병행해서 전문적인 싸움꾼, 즉 장수들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보병보다 기동력을 중시하는 기병의 출현 또한 전국시기에 나타나게 된다. 특히 기병과 수군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병종이 나타나게 되는 부분이 중요한데, 특히 기병의 경우에는 전쟁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꾸게 되는 파괴력을 가진 병종이었다. 기동성이 강한 기병의 경우에는 전장에서 수많은 임무를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정찰이나 기습은 물론, 적의 추격과 우회, 포위 등의 다양한 작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병의 발전은 조(趙)나라의 무령왕에 의해 처음으로 전투에 응용되었다.IV. 전쟁 무기의 발달1. 춘추시기의 전쟁 무기서주에서 동주로 옮겨가면서 시작한 춘추 시기의 주된 무기류는 청동기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전차는 움직임이 둔하여 방어 용도로 효과적이었다고 전해진다.그림 3 중국식 동검, 칼과 자루가 일체형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차가 점차 춘추 시대에서 사라지게 된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은 역시 보병의 출현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러한 보병들이 애용했던 무기는 바로 검이다. 물론 전차에서 뿐만 아니라 보병도 창과 과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검에 대한 효용이 더 큰 이유는 아무래도 방패와의 겸용이 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 정도부터 나오는 기록들을 살피면 투척무기 혹은 발사무기인 활보다도 검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게 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특히 보병이 점차 주된 병종으로 자리 잡으면서 양손무기였던 장병기들보다는 보병의 생존율을 높여줄 수 있는 보구인 방패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또한 전술적으로 근접전투, 즉 백병전의 위험을 무릅쓰는 확고한 의지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와 관련해서도 이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기존의 장병기가 아닌 짧은 형태의 검은 전쟁에서보다 제기(祭器)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보병의 효용이 크게 증가하는 춘추 말기, 전국 시기에 이르게 되면 근접전에서 가장 선호하는 무기로써 변모하게 된다. 초창기의 검은 비교적 짧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춘추 중기까지도 검은 베는 무기라기보다는 찌르기 형태의 위주였지만, 기원전 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철기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초나라와 한나라에서는 비록 그 질이 낮지만 철제 병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까지는 제철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므로 청동을 완벽하게 대제하지는 못했다.그림 4 노의 방아쇠, 장전장치의 발전으로 노는 더욱 더 파괴력을 가진 무기로 변모했다. 수노, 혹은 추고누(諸葛弩제갈노의 중국식 발음)로 잘 알려진 노(弩=석궁) 또한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무기이다. 전설에 따르면 노를 제작한 최초의 발명자는 황제 또는 치우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서는 한(韓)나라에서 남방의 만국(蠻國)이라고 알다.
    인문/어학| 2022.12.30| 12페이지| 2,000원| 조회(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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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피엔스 3부 서평(내용 요약, 감상 및 비판)
    돈, 제국, 그리고 종교3부를 들어가며, ‘상상의 질서’의 힘3부는 인지혁명, 과학혁명을 거친 사피엔스가 어떻게 서로 통합해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1,2부에서의 내용은 '엥 이런 주장을 한다고?!'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 3부는 대체적으로 '음.. 그렇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새로운 주장보다는 기존에 알려진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부터 계속 언급 했듯이 유발 하라리는 '상상의 질서'가 인류를 통합하고 상호 신뢰를 형성하는 열쇠로 작용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 있는 질서 3가지를 소개한다. 바로 ‘돈의 질서’, ‘제국의 질서’, ‘종교의 질서’다.10장: 이슬람교도가 달러를 신뢰하는 이유, 돈의 질서하라리는 돈이 농업혁명 이후 부의 전환과 저장, 이동을 쉽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각기 다른 종교 등 서로 다른 질서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조차 돈에 대해서는 모두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을 예로 들어 돈의 관용성을 강조한다. 돈이 보편적 전환성과 보편적 신뢰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는 돈으로는 전환할 수 없는 인간적인 가치도 존재함을 잊어선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역설한다.돈이 꽤나 영향력 있는 질서라는 것은 알았지만 따지고 보니 굉장히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하라리의 말처럼 돈이 인간적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점점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소위 '물질만능주의'로 가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11장: 하라리가 말하는 제국의 질서. 과연?흔히들 '제국'하면 과거 제국주의를 가장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곤 한다. 나도 사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1장에서 하라리는 제국의 영향과 역할을 '인류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조목조목 따지며 제국의 밝은 측면 또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제국이 수많은 민족과 문화적 정체성을 통일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국이 만들어낸 놀라운 문명과 유산들을 언급한다. 하라리는 하나 조심스러운 예상을 하며 11장을 끝맺는다. 결국 언젠간 전 지구를 통일하는 지구 제국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다.'제국'에 대한 하라리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제국을 필두로 한 이런 문화적, 민족적 통합을 항상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문화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국 주도하의 통합은 이러한 다양성을 소멸시키는 현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라리는 지구 제국의 출현을 예상하며 11장을 끝맺는다. 그러나 현재 몇 안되는 강한 이데올로기, 문화, 국가들이 강력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제국 질서가 이끄는 통합의 과정에서 항상 물리적 폭력이 있어 왔음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전 지구를 통일하는 하나의 제국이 존재하려면 그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의 수반은 필수일 것이라고 나도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12장&13장: 종교의 질서와 유발하라리의 역사유발하라리는 종교야말로 인류 통일의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는 종교가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그 특징들을 조목조목 분석한다. 하라리는 이어서 어떻게 유일신 기반의 종교가 힘을 얻어갔는지, 인본주의와 과학의 발전을 필두로 종교가 어떻게 힘을 잃어 가는지를 설명한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종교의 출현과 그 양상을 가장 잘 설명했다고 생각이 들었다.13장에서 하라리는 이러한 인류 통합의 양상이 셀 수 없이 많은 변수들의 상호작용과 우연적 촉발에 의해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가 예측 불가능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결정론이 한계가 있음를 주장한다. 따라서 하라리는 역사의 목적을 정확한 예측의 수단이 아닌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어도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해답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독후감/창작| 2020.06.07| 3페이지| 1,000원| 조회(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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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피엔스 4부 서평(내용 요약, 감상 및 비판)
    사피엔스의 시작과 종말. 그 기나긴 대장정을 마무리하며사피엔스, 과학혁명을 맞이하다.4부 중반까지 유발 노아 하라리는 사피엔스가 어떻게 해서 과학혁명을 맞이했고 그 이후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꽤나 다양한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다른 챕터들 보다 분량이 유독 길다. 그렇지만 결국 핵심을 요약하자면 이 한 문장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혁명은 과학과 제국, 그리고 자본의 합작품이다.’하라리는 현대 제국주의와 과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이야기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지에 대한 인정을 기점으로 생긴 미지의 대상에 대한 강력한 호기심은 ‘정복의 사고방식’이라는 강력한 체계를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자와 정복자들이 공통으로 묶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과학은 새로운 지식과 힘을 제국에게 주고 이를 통해 제국은 미지의 세계들을 정복했으며 이는 제국과 과학이 계속해서 공생하는 메커니즘이 된 것이다. 하라리는 이어서 자본주의가 제국과 과학간의 관계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신용’의 등장으로 더욱 복잡한 경제 시스템이 생겼고 이는 과학 연구의 뒷받침, 제국주의 확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자본주의가 어떤 난관을 마주하는지, 어떻게 해서 현재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말한다.나는 과학-제국-자본주의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과학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무지의 인정’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야말로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사피엔스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적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라리가 예시로 든 ‘지도 이야기’는 실로 흥미롭다. 실제 사실과 다르게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이전의 세계지도와는 달리 과학혁명 직후의 세계지도를 보면 빈 공간이 굉장히 많다. 기존의 것이 틀렸고 본인들은 무지하다는 것에 대해 인정했기 때문이다. 과거 사람들이 그러한 지도의 빈 공간을 점차 채워나갔듯이 사피엔스도 앞으로 다양한 분야의 빈 공간을 메워나가야 할 것이다.그래서 우리 행복하니...?4부의 후반부에 와서 유발 하라리는 지금까지의 인류의 변천과 발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한다. 그는 독자에게 여러 철학적 질문들을 던지는데 굉장히 무겁고 그 깊이가 깊다. 가령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는지,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발전한 생명 공학에 대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내게 굉장히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그가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을 남겼지만 그 중 가장 임팩트가 큰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혁명들을 거쳐 변화하고 번영한 현재 사피엔스, 즉 우리는 현재, 과연 행복할까? 행복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고, 어느 쪽이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행복에 대한 뚜렷한 기준도 없기 때문에 현대의 인류가 아무리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도 이것이 곧 행복의 증진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고 해서 이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현 인류에게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점차 행복해져 왔는지를.
    독후감/창작| 2020.06.07| 2페이지| 1,000원| 조회(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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