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장우선 ]성장론(성장우선론)이란?경기침체로 인해 오랫동안 내수 불안이 계속될 경우,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성장이 필요하고, 성장하고 난 뒤에 분배를 해도 늦지 않다는 경제이론을 말한다. 경제정책의 무게를 분배보다는 성장에 우선한다는 뜻에서 '성장우선론'이라고도 한다. 성장론에서는 분배를 강조하다 보면 사회 구성원의 성취동기가 떨어져 결국 경제 발전에 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냉전 시대 사회주의 국가들이 취한 분배 우선 정책에서 보듯, 분배 일변도의 정책은 결국 낮은 경제성장률로 이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침체된 내수 시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제효율이 떨어지는 분배론보다는 먼저 임시방편일지라도 일자리를 창출하여 내수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통해 경기가 회복되어 성장이 계속되면 고소득층에서 저소득층까지 소득이 확산되어 자연스럽게 분배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이론이다.성장론 입장-사회복지 증대와 이를 위한 세수 증대는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언정 경제난 극복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복지증대가 경기를 더 어렵게 할 수 있다.-저소득층 지원책으로는 내수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경기 부양책으로 성장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경기 활성화를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를 위한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분배우선론은 우리 사회에 복지병을 불러올 수 있다. 이는 곧 경제 효율성을 저해시킨다.[ 분배우선 ]분배론(분배우선론)이란?경기침체로 인해 오랫동안 내수 불안이 계속될 경우,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나면, 경제성장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경제이론을 말한다. 부의 재분배를 통해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높이고, 내수까지 늘려 결과적으로 경기침체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무게를 성장보다는 우선 분배에 둔다는 점에서 '분배우선론'이라고도 한다. 분배론에서는 경제가 장기간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제한다. 즉 경제성장을 해도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사회 구성원의 의욕이 떨어져 경기는 나빠진다는 것이 분배론의 입장이다. 따라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채질하는 성장 위주의 정책은 경기침체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적극적 복지정책을 펼쳐 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킴으로써 수요를 창출하고, 수요 창출을 통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꾀해야 한다고 본다.
「데미안」은 유명한 책이다. 오래되었고 그만큼 많이 읽혔으며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책속의 몇몇 구절들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또한 과제를 하기 전까지는 데미안을 완독한 적이 없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은 게 전부였고, 데미안을 읽으려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는 했다. 아예 안 읽은 것도 아니고 매번 중도하차를 했던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도입부(두 세계)에서 불량배 프란츠 크로머에게 싱클레어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짓으로 허풍을 떨다가 약점을 잡혀 갖은 협박과 갈취를 당하는 내용이 나를 너무나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 정도 그 부분을 좀처럼 읽지 못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누군가에게 고자질했을 때,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에 사로잡혀 가슴께가 답답했다. 나는 싱클레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헤세의 문체를 썩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탁월한 글 솜씨를 가졌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쨌든 책을 손에서 놓을 정도의 불안감에 시달린 나에게 데미안의 등장은 구원이었다. 싱클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데미안이라는 인물은 구원자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출발하여 지향점, 이상향, 또 다른 자아로까지 뻗어 나간다. 따듯한 세계에서 온실 속 화초마냥 살아왔던 싱클레어의 반쪽짜리 삶을 뒤바꿔 놓은 ‘데미안 막스’. 그는 싱클레어에게 어두운 세계가 네 영역을 침범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의 세계이며 그 두 세계가 공존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이렇게 점차 세상에 대해 깨우친 싱클레어는 상급학교(김나지움)에 진학하여 방황의 시기를 맞는다. 친구와 떨어진 그는 데미안을 그리워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술에 취하는 건 예삿일이고 모범적인 학교생활과는 안녕한지 오래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스쳐지나간 소녀를 연모하게 된 싱클레어는 방탕한 생활을 접고 다시금 반듯이 살아가려 노력한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를 베아트리체라 부르고 매일매일 소녀의 얼굴을 화폭에 옮기며 그림에 심취한다. 그러나 그 얼굴, 묘하게 중성적이며 데미안과도 닮았고 심지어는 싱클레어 자기 자신마저 보이는 초상화에 그는 혼란을 느낀다. 그날 밤 꿈속에서 본 새를 그려서 보낸 싱클레어에게 도착한 데미안의 답장은 역사에 남을 훌륭한 격언으로 평가된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한번쯤 들어본 문장일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 균열이 갔음을 인식한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건넨 답. 모든 성장에 따르는 고통의 필수불가결함과 익히 알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전환 혹은 도약을 얘기하고 있다.데미안의 편지로 인하여 아프락사스가 누구인지 궁금해진 싱클레어는 아프락사스에 관해 탐구하다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가 말하길, 아프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존재였다.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신적인 것과 악한 것의 결합물. 싱클레어는 스승이자 친구인 피스토리우스를 안식처로 삼는다. 당시의 싱클레어에게 피스토리우스가 좋은 ‘길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다면, 싱클레어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안내자가 된 경험도 있었다. 바로 동급생 크나우어를 도와준 일이 그것이다. 아프락사스를 이해한 싱클레어는 청소년기의 성적 욕망에 종교적 교리를 잣대로 죄책감을 느껴오던 크나우어를 해방시켜주기에 이른다. 한편, 줄곧 피스토리우스의 말을 믿고 따라왔던 싱클레어는 불쑥 고개를 든 반발심 내지는 의견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그와의 관계를 깨트린다. 길 안내자를 잃고 다시 혼란에 휩싸인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재회하기를 염원한다.그렇게 김나지움을 졸업한 싱클레어는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청년기에 접어든 데미안과 마주친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반겨주고, 곧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된다. 에바 부인을 본 싱클레어는 큰 충격을 받는데, 이는 그가 매일같이 그려오던 꿈속의 연인이 에바 부인과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데미안과 닮은듯하면서도 누군가의 어머니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하지만 자애로운 그녀에게 푹 빠져버린 싱클레어. 그녀를 안고 싶고 사랑하고픈 욕구에 허덕이며 힘들어할 뿐이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에바 부인은 말한다. "돌이켜 생각해 봐,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 아름답지는 않았나?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이 험난할지라도 아름답고 가치 있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스스로를 찾아가는 데 몰두하던 세 사람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전쟁 통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싱클레어는 병원에서 데미안을 본다. 헤어짐을 예고하는 데미안, 데미안의 입맞춤은 에바 부인의 키스였고 수많은 동지들의 포옹이었다. 이제 더 이상 직접 만나러 올수는 없지만 내가 필요할 때면 네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라고 속삭이는 데미안. 싱클레어는 비로소 그와 하나 됨을 느끼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아트 슈피겔만이 「쥐」를 완성하기 까지 자그마치 1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에게 전해들은 생생한 이야기, 치밀한 현장조사와 스케치, ‘그래픽 노블’이라는 새로운 만화양식을 탄생시킨 예술적 표현기법. 이렇게 공들여 만든 작품인 만큼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 작품을 위해 십수 년의 시간을 들이려면 얼마나 많은 애정과 끈기가 필요할지 가늠하기 어렵다.책의 제목이기도 한 ‘쥐’라는 단어에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작가는 책 속의 등장인물들을 유대인은 쥐로, 나치는 고양이로, 폴란드인은 돼지, 미국인은 개, 집시는 곤충, 프랑스인은 개구리, 스웨덴인은 순록, 소련인은 곰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여러 나라와 민족 간의 관계나 특징을 파악하여 다양한 동물로 의인화한 것이다. 특히 쥐와 고양이에 빗댄 유대인과 나치의 관계는 유대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여기며 말살해야하는 존재로 취급한 나치의 행동과 부합한다. 또한 폴란드인들의 경우, 유대인들처럼 나치의 탄압 하에 있으면서도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며 권력의 끄나풀 노릇을 했기에, 탐욕의 상징인 돼지로 그려졌다.이 작품의 내용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바로 끔찍한 홀로코스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버지의 과거사와, 2차 세계대전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인 아들과 갈등을 빚는 현재의 이야기이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과거는 말 그대로 참혹했다. 행복하던 결혼생활은 나치의 점령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어렵사리 숨어 지내는 것도 잠시,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폴란드 방방곡곡을 떠돌아야만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첫째 아들인 리슈를 잃었다. 수용소는 더했다. 그곳은 도무지 사람이 살 데가 아니었으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바랄 수 없었다. 딱딱하고 작은 빵 한조각과 멀건 스프로 하루를 버텨야했다. 그마저도 못 먹는 날이 많았다. 열댓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좁은 방 안에서 부대끼며 쪽잠을 청해야했고, 과도한 노동과 온갖 질병들이 그들을 괴롭혔다. 쌓여가는 시체와 소각장, 가스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동료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블라덱을 짓눌렀다. 그래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을 다시 만나고자하는 결연한 의지는 물론이거니와 타고난 사업수완과 처세술을 겸비했기 때문이었다. 블라덱은 도피생활 중에도 사업을 이어나가고, 수용소에서는 자신의 영어실력이나 잡다한 기술들을 이용해 상황을 해쳐나간다. 게다가 주변인들을 사귐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에게 이런 능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쥐’라는 걸작을 못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비로소 재회하게 된 블라덱과 그의 아내 아냐는 곧 아트 슈피겔만을 낳는다. 하지만 과거의 잔재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매일 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아버지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어머니는 아트의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 아트는 낡은 사진에서만 본 형 리슈에게 비교당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아버지는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를 강요한다. 고물을 모으고, 알약의 개수를 일일이 세며, 지나치게 아끼며 사는 아버지. 아직도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을 답습하고 있는 그를 미국에서 자란 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함께 살다간 죽어버릴 것만 같아!”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온 아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부모세대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어서 작가이자 주인공인 아트의 삶은 주로 현재의 시점에서만 서술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를 해소해주는 한방이 있다. 단편만화 「지옥 혹성의 죄수」가 그것이다. 의도적으로 본문 중간에 다른 작품을 삽입함으로써, 정신병원 퇴원 후 어머니의 자살이 안겨준 절망스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쥐’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풀어낸 ‘지옥 혹성의 죄수’는 그래픽 노블의 독특함을 더해주는 한 가지 요소이다. 작가는 여태껏 독자들이 동물로 인식해오던 캐릭터들을 사람으로 묘사하여 작품의 서사를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지도록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죄책감과 함께 부모세대와 동일한 경험을 하지 못한 유대인 청년의 혼란스러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나는 이 책을 중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봤다. 앞부분의 몇 페이지를 대충 훑어보다가 평소에 읽던 만화와는 너무 달라서 제자리에 꽂아 넣은 것이 기억난다. 그때는 그래픽 노블의 화법에 익숙지 않았었다. 그러나 과제를 준비하며 「쥐」를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블라덱 슈피겔만이라는 개인의 인생을 통해서 한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비춘 이 작품덕분에 지금까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홀로코스트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가 저지른 악행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다. 나치만 가해자였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더욱 힘든 시기였음에 분명하다. 안전히 대피를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전쟁 통에 사람들을 꾀어내 인신매매를 하고, 같은 유대인들끼리도 본인의 잇속을 채우려 타인을 밀고한다. 나치가 시작한 혐오는 빠르게 확산되어 또 다른 폭력과 차별을 양산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별과 배척과 혐오사상은 파국을 몰고 올 뿐이다. 그런데 유대인으로서 숱한 부조리를 겪은 바 있는 블라덱 마저 흑인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부분에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우리 인간들은 과연 서로를 향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지 의문이 싹텄다. 제2, 제3의 나치즘이 발생하는 것도 시간문제는 아닐까 싶었다.
심훈의 「상록수」 감상문나에게 있어서 상록수는 지루한 소설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학생 시절 상록수를 배웠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아무런 생각 없이 교과서에서 줄줄줄 읽기만 할 때 보다는 감회가 새로웠지만, 오랜만에 읽은 상록수는 역시나 썩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꽤나 신선한 작품이었나 보다. 친일지주, 악덕 고리대금업자와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열정 가득한 두 연인을 동시에 등장시켜 조선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동아일보의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작인데, 동아일보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 운동의 일환으로 공모전을 기획하였다. 공모작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농ㆍ어ㆍ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태와 정조를 가미할 것, 둘째, 인물 중에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셋째, 신문소설이니 만치 사건을 흥미롭게 전개시켜 도회인 농ㆍ어ㆍ산촌을 물론하고 열독할 것.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작가가 꾀한 방도는 실제 계몽운동의 주역인 ‘최용신’이라는 실존인물을 발굴해낸 것이었다.심훈은 소설을 집필하던 1935년 당시 전국 각지에서 들려오는 농촌계몽운동 소식을 참고했다고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농촌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친 최용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녀는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생각으로 농촌 계몽 운동에 임하였다. 원산 출신의 최용신은 1931년 YWCA(기독교 여자 청년회) 파견교사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녀가 온 후 샘골 강습소는 정식 인가를 받았고, 점차 학생이 늘어나 그 인원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샘골 강습소를 확대하여 새로 짓는다. 농촌계몽운동에 대하여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던 최용신은 병에 걸려 다시 샘골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에도 계속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결국 만 26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보다시피 청석학원을 세우고 각기병으로 명을 달리한 ‘채영신’ 그 자체인 인물이었다.최용신의 삶에도 박동혁과 같은 동지가 있었을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영신의 곁에는 동혁이 있었다. 농민운동 보고회 자리에서 서로의 일장연설을 인상 깊이 본 둘은 점차 가까워지고, 사상적 동지를 얻었다는 충족감과 함께 연정에 푹 빠지게 된다. 농촌을 직접 경험하며 그네(농민계급)들이 어떻게 하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피력하는 동혁과,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네들을 위해 한 몸 희생하지 않으면 우리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영신. 그 누구보다 서로의 생각을 잘 이해하는 그들이기에, 각자 지역의 진행경과를 보고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운동)’과 ‘사랑’이라는 갈림길에 서기도 하는데, 영신이 하느님께 고해하는 장면에서 이들의 고민과 힘든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는 견고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주시옵소서. 저의 족속의 불행을 건지기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치겠다고 당신께 맹세한 저로서는, 지금 두 가지 길을 함께 밟을 수가 없는 처지에 부닥쳤습니다. 오오, 그러나 하나님, 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대사에서 알 수 있듯 둘은 동지애에서 출발해 그 이상의 사랑을 나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영신의 기도대로 일과 사랑을 결합시킨다. 물론 우여곡절도 있었다. 여느 연인들과 같이 갈등과 오해를 겪으며 얻어낸 결과이다. 민족의 공동선과 행복 추구를 위한 일을 함께하며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일에 대한 열정도 더해졌던 것이다.허나 후대에게 운동을 넘겨줄 만큼 안정이 되면 혼인을 하자는 기약은 무색해지고 만다. 안타깝게도 영신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다. 나는 영신의 부고를 전해들은 동혁의 태도에서 놀라움을 느꼈는데, 사랑하는 정인을 잃은 사람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담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도 사람이기에 잠시 흔들리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른다. “당신이 못다 한 일의 두 몫을 하겠다.”는 동혁의 다짐이 이를 보여준다. 여전히 동혁의 일에 깃든 사랑과 올곧은 사상은, 영신의 육체는 죽었을지라도 그녀의 정신만은 계속해서 살아있게 한다. 연인의 죽음 앞에서 취한 그의 태도에서 나 같은 소인배는 감히 따라 하지 못할 담대함을 엿볼 수 있었다.작품을 읽으며 주목한 점은 영신의 죽음의 의미와, 작품 속에서 작가가 비판하려 한 것이 무엇인가였다. 영신의 죽음은 작품의 제목과 연관이 있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른 상록수처럼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동혁과 같은 동지들에 의해 그녀의 사상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다른 뜻도 포함하고 있는데, 바로 당시의 독립운동이 계몽에서 끝나지 않고 경제적, 사상적 실천으로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영신과 동혁은 영혼의 단짝이었으나, 독립운동에 대한 방향성이 약간 달랐다. 영신은 그저 문화적 계몽을 위해 민중 교육에만 사력을 다한 반면, 동혁은 보다 경제적이고 사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자 하였다. 그 뜻을 이루려 조직한 것이 농우회이다. 그가 자신의 고향인 한곡리에서 만든 청년단체 농우회는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강기천이 ‘진흥회’를 세우기 위하여 농우회의 사람들을 돈으로 꼬드겼고, 결국 농우회는 진흥회로 바뀌게 된다. 이는 농촌진흥‧자력갱생의 기치를 내건 일제와 친일지주의 허구적인 농촌진흥운동을 비판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 다른 비판은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향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빌려 세계 각국을 견학하고 온 후에도 강연만 하는 백현경의 이상론, 농촌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있는 YMCA 서울 지도부의 관념론 등을 비판하면서 민중 속에 뛰어드는 선구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신과 동혁뿐만 아니라 농촌계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내부노선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영신의 죽음은 문맹퇴치라는 교육적 차원으로 한정된 종교적 농촌계몽운동이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작가의 통찰력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나는 영신과 동혁의 관계를 지켜보며 올해 개봉한 영화 의 두 주인공이 연상되었다. 박열과 후미코는 상록수의 인물들처럼 동지애로 똘똘 뭉친 연인이다. 계약서를 쓰며 동지적 사랑을 강조하는 당찬 후미코와 지장을 찍어주는 박열의 모습. 일과 사랑의 교차점에 위치한 동지애가 이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박열과 후미코 커플 쪽이 더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긴 했으나, 계몽운동도 독립운동의 범주에 포함되므로 이 두 연인은 닮은 점이 꽤나 많다고 생각한다. 한글교육이 억압받던 일제강점기에 언어를 통한 우리 민족정신의 보존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유한 언어에는 그 민족의 문화와 전통, 역사마저 담겨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지식인으로서의 소신을 가지고 민족 계몽에 힘쓰는 것 또한 일제로부터 독립하는데 있어 든든한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내용은 청석골에서 예배당을 빌려 글을 모르는 아이들을 정성껏 가르치던 영신에게 일본 순사가 와서는 학생 수를 80명 이하로 줄이지 않으면 교실(예배당)을 강제로 폐쇄 시키겠다고 협박을 한 이후, 영신이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었다. 협박에도 불구하고 영신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50여명의 아이들을 교실 밖으로 내보내긴 했으나, 거기서 그녀의 수업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내보낸 아이들은 예배당 밖에 둘러앉아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영신도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다. 어릴 적에는 그저 재미없던 상록수를 다시 읽어보니 등장인물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다가왔다. 특히 농민들을 계몽하겠다는 영신의 푸르른 열정은 모델이 된 최용신의 삶과 맞물리면서, 더욱 진실되고 아름다운 기록으로 느껴졌다. 이런 이유에서 상록수라는 책이 오래도록 읽히고 사랑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기 전환기의 독일 문학[ 반자연주의적 세기전환기 문학 ]세기전환기, 그 중에서도 1900년 전후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독일문학은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여러 문학사조들이 공존했는데, 인상주의, 신낭만주의, 상징주의 등으로 대표된다. 세기말의 거의 모든 예술분야에서 나타난 이들의 공통점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의 경향에 반대하며 문학의 전위성과 실험성을 꾀한 것이었다.[ 시대적 배경 ]정치적인 면에서 세기전환기는 1890년의 비스마르크 퇴진 이후 1910년까지의 빌헬름 2세가 통치한 시대, 즉 “빌헬름시대"였다. 이 시대는 정신사적으로 이전의 시기와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독일제국 창건 시점인 1871년에서 1890년까지의 시기가 유물론에 지배되었던 반면 1890년부터 1910년까지의 20여 년간은 인문주의적 이상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세기전환기는 농업사회가 고도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으며 이런 문명의 현대화는 한편으로 시대를 반영하는 자연주의 문학을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와 현실의 제 문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상징주의 예술을 가져왔다. 시대상에 대한 반발로서 상징주의는 귀족주의적 고립과 보헤미안적 생활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기교주의 시학이론을 발전시켰다.세기말의 반자연주의 문학 조류들의 형성에 철학적·세계관적 기초가 되었던 것은 비합리주의와 활력주의였으며, 이는 당시까지 지배적이던 과학적·실증주의적 방법론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예술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상징주의와 대표적 작가들 ]앞서 말했듯 세기전환기에는 다양한 사조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상징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상징주의는 세기전환기의 서구 문학 전체와 미국문학까지 포함하는 문학사조로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나 운동의 범위를 넘어 일반적인 현대 문학이론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문예사조로서 상징주의는 전환기의 문학사 서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전환기에는 자연주의와 상징주의가 부분적으로 겹쳤고, 이를 ‘고전적 현대’라고 일컫는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스테판 말라르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가 고전적 현대의 물꼬를 텄다. 상징주의 시는 자연주의와는 달리 엘리트적이며 미와 형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는 특징이 있다. 독일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은 스테판 게오르게, 후고 폰 호프만스탈,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독일 산문의 대가들이 탄생하였는데, 릴케가 시 쓰기를 중단하고 파리에 체류하면서 저술한 『말테의 수기』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만의 초기작들은 전통적인 산문양식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 외에도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시작으로 독일교양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은 토마스만, 고독한 현대인의 실존을 그려낸 프란츠 카프카, 실험적 산문 『개성없는 남자』를 쓴 로베르트 무질, 그리고 헤르만 헤세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