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로 본 서양사 「암흑시대, 종교의 탈을 쓴 십자군 전쟁」돈, 권력, 그리고 종교 이 세 가지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시작되었다. 이 목적들은 이슬람에 넘어가버린 예루살렘의 탈환이었고, 이는 200년간 이어지는 가장 잔인한 십자군 원정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다.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 유대교의 발원지이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수많은 종교인, 성직자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중세에 이 도시를 둘러싸고 역사를 크게 흔드는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은 기독교, 이슬람교 두 종교와 문명의 충돌로 서양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전쟁이다.11세기 무렵 중동지역에는 셀주크투르크라는 국가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과거 동남아였던 비잔티움제국 코 앞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기독교를 종교로 삼고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은 자신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셀주쿠투르크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로마누스 4세는 셀주크투르크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지만, 황제에서 포로로 쫓겨나고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이렇게 군사 전쟁을 일으키면 안되겠다고 깨닫고, 대규모 용합 용병을 구하기 시작한다. 서유럽에도 도움을 청하고, 도움 요청을 받은 서유럽 역시 이 원정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 판단을 하였다. 상인들은 용병을 이동시켜 얻는 금전적인 소득과 만약 승리를 하게 될 경우 얻게 될 동방과의 무역로까지 개척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교황도 유럽의 황제에 망신을 준 지난 카노사의 굴욕사건 이후에 자신의 권력을 더 확대하기 위해 욕심을 냈다. 종교의 탈을 쓴 전쟁이야 말로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순수하게 종교적인 믿음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구원하면 본인의 속죄를 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종교적인 목적이 십자군 전쟁의 주된 목적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서유럽사람들의 마음을 홀린 덕분에 6만 규모의 원정대가 꾸려졌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비잔티움 황제나 교황은 체계가 잘 잡히고, 통제가 잘되는 군대를 원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 우루바노스 2세는 병사가 될 수 없는 여자, 노인은 전쟁에서 배제하기 위해 원정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서약을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십자군 원정은 현대의 기준으로 침략전쟁이지만, 당시의 유럽인들에게는 순례자의 길로써 하나님과의 맹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묘에 찾아가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원정대가 꾸려졌다. 또, 선동꾼 같은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일반 시민들이 조직한 원정대가 있었다. 무지한 시민들, 엘리트 기사와 영주들까지 합쳐졌다. 심지어는 원정도중에 물자가 부족하여 같은 기독교인들을 약탈하고 다니며 규율도 체계도 없었다. 이렇게 민중 십자군은 중동에 도착하자마자 소득 없이 셀주쿠투르크 군대에게 몰살당하고 만다. 여기에서 더 의아한 점은 은자 피에르는 전략을 짠다는 명분으로 비잔티움에 남아있었고, 이 몰살을 피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민중 십자군의 몰살 결과가 다음의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 승리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의 셀주쿠투르크의 통치자는 고작 17살이었고, 군사 전략의 경험에 미숙했다. 1차의 민중 십자군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다음 정식 1차 십자군들을 얕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게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셀주쿠투르크가 십자군 전쟁으로 바빠진 틈을 타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뺏어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중동은 여러 지역의 왕들과 전쟁 중에 있었고, 때마침 운이 좋게 십자군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때 승리를 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1년이 지난 뒤, 십자군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냈다. 예루살렘 주변은 더운 사막이었다. 이집트는 이를 노리고 십자군의 우물에 몰래 독을 탔고, 멀리 있는 요르단까지 물을 직접 길어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 여기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나무들을 전부 베어버렸다. 이렇게 극한으로 불리했던 이 상황에서 단 1만의 병력으로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했고, 1차 십자군 원정의 종결이자, 앞으로 있을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먼저 기독교 사회는 이슬람 사회의 분노를 사게 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이슬람이 믿는 종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자리를 밀어버리고 교회를 세운다. 그들의 사원을 마굿간 화 시켜버렸다. 이 일에 분노를 사게 되었고, 전쟁의 뒷수습을 잘 해야 했던 시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해 정책보다는 부정부패의 모습이 보여졌다. 이 시기부터 십자군 전쟁의 변질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 중동에서는 중동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힘의 원천 ‘기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혜택을 제대로 얻지 못하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중동 땅을 지킬 유럽의 병력은 부족해졌고, 남은 인원들마저 문제만 일으켰다. 뜻이 있는 기사들은 기사단을 만들었다. 십자군 전쟁 때 성지 순례자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서방교회의 기사 수도회로 붉은 색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이 그들의 상징이었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주고,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여러 곳의 기부를 받기도 하는 등 거대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다. 템플 기사단은 금융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보면 월스트리트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기사단은 재력 때문에 정작 고국에서는 위협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각종 누명에 시달렸고, 전 재산은 요한 기사단에 이관되고, 최후의 총회장은 화형에 처해졌다. 이런 이슬람 사회에서는 이마드 앗딘 장기라는 인물이 나타났고, 북부 시리아에서 세력을 확대하면서 조직적으로 십자군에게 대항했다. 유럽인들은 테러리스트라고 인식했다. 이마드 앗딘 장기는 1차 십자군이 점령한 요충지 중 하나였던 에데사 지역을 다시 찾기까지 했다. 이슬람 세력에서도 그를 상대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리더의 자질이 부족했다고 한다. 노예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질책을 했고 이 노예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탈환했던 에데사는 유럽에게 큰 공포와 충격을 안겨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덕분에 1147년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제 2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은 지난 원정과 다르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루이 7세는 원정도중 아내 엘레나가 바람을 핀다며 이혼을 하기위해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2차 십자군은 ‘다마스쿠스’까지 왔다가 공략을 실패하는 바람에 주저 없이 포기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원정은 애초에 이룬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었고, 이슬람 사회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져 싸우는 도중 통합으로 가는 가속제 역할만 하게 해주었다. 이는 이슬람과 십자군이 제대로 싸우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암시하는 듯했다. 3차 십자군에는 살라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종교라는 이념 아래에 온갖 이익들이 모여 전쟁을 벌였던 십자군 원정, 새로운 국면과 이슬람 영웅 살라딘에 맞서는 또 다른 인물. 리처드가 등장한다. 리처드는 과거처럼 단순한 돌격이 아니라 재정과 안정의 보급의 중요성이라는 것을 빠르게 판단하였다. 많은 영지와 통치권을 팔아서 밑천을 마련하였다. 이에 살라딘은 내륙의 십자군 요새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역전을 위해서는 3차 십자군은 역전을 위해서 큰 전투가 불가피했다. 이 전투를 아크레 전투라고 한다. 십자군들과 이슬람의 구원병들이 서로 몰려오니 전쟁이 장기전이 되었고, 시체 및 오염된 물로 인해 전염병으로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큰 상실감을 받은 살라딘, 그리고 사기를 회복한 십자군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이 기세로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십자군 최대 전투인 아르수프 전투이다. 치밀한 전투를 준비한 까닭에 승리를 차지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게도 두 번째 전쟁과 같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전까지는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었지만, 자본주의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결국 예루살렘 점령이 힘들다고 판단을 했고, 살라딘에게 기독교도들도 예루살렘을 순례를 허용해준다는 조약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에도 4차 십자군은 십자군이 빚을 탕감하기 위해 어이없게도 같은 기독교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고, 이 와중에 소년 십자군 전쟁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