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과 후기 철학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특히 후기 철학에는 명제 그림 이론이 언어를 설명하는 기능 중 하나라고 설명하고 언어를 놀이에 비유한다. 언어의 본성은 실재(reality, 세계)를 기술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다. 예를 들어 노트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름은 노트북이 가지는 여러 의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단어가 가지는 전부 다시 말해, 본질이 아니다. 이는 가족 유사성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다. 가족들은 서로 닮았다. 눈만 닮을 수도 코만 닮을 수도 있고, 전체가 닮을 수도 있지만, 하지만 서로 닮은 부분이 유사하게 중첩되는 것이지 완벽하게 본질적인 닮은꼴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늘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에 공통되는 본질이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런 유혹에 잘 빠진다고 한다. 이런 유혹을 일반성의 유혹이라고 하기도 한다. 언어의 본질이 있을 그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 전기철학을 놀이 이론(게임 이론)으로 비판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러 규칙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진 여러 언어들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언어라는 본질이 있어서 세상의 모든 언어가 본질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처럼 서로 다른 규칙들이 있는데 이러한 규칙들이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어서 유사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사한 것들을 본질이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본질이 있을 것이란 본질이 있을 것이란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가족 유사성에 기초해서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이 이론은 놀이를 직접 해봄으로써 그 게임의 규칙도 알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서 그 놀이를 잘 알게 된다. 이는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언어 활동도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고, 언어를 쓰는 사람은 이 놀이에 참여한 참가자인 것이다. 언어놀이에 참여하면 그 언어놀이를 알게 된다. 이때 규칙은 절대불변하지 않는다. 규칙은 변할 수 있어도,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규칙은 삶과 결부되어 도구로써 사용 방법이 변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본질은 없다. 단어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라며 철학적 탐구에서 설명한다. ‘노트북’이라는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의미는 그 단어가 사용되는 언어게임의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노트북’이라는 단어가 세계에 실재하는 대상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언어놀이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바꿔서 쓸 수 있다. 본질이 없어도 사용에 따라 의미가 발생한다. 언어놀이에 참여한 언어놀이 속에서 이해하면 된다. 즉, 어떤 언어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많은 철학자가 의미, 자아, 존재에 본질이 있는 것처럼 가정하고 주목해서 연구했기 때문에 이런 연구는 출발이 잘못되었다. 이것들은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따라 헛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표지판에 반응하는 것은 습관에 의해서만 쓸 수 있다. 규칙은 관습의 결과물이지만, 관습이 규칙의 결과물이 될 수 없다. 하나의 낱말이 어떻게 의미가 있는가? 언어놀이에 참여한 참가자가 그 놀이에서 사용한 맥락에서 얻어지는 것이다.언어의 본질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만 그의 철학에서 반박하고 싶은 점이고, 언어놀이에는 동의한다. 언어의 본질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노트북’이라는 본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에 생겨난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놀이처럼 규칙에 따라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은 존재하고 그 본질에 따라서 우리가 규칙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트북을 지칭하는 언어의 규칙이 변한다 해도 우리는 결국 노트북이라는 관념이 있다. 그 관념 속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본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놀이의 규칙이 변해도 우리는 그 ‘노트북’이라는 단어를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규칙이 변하는 과정에서 노트북이라는 관념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언어는 언어 공동체(삶의 형식=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것)에서 존재한다. 불가능성. 사적 언어는 결코 언어가 될 수 없다. 언어의 규칙들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기만의 통증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서 표현한다고 가정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어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따라 했을 때, 그 앵무새의 말은 의미가 있을까? 그 말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라는 것은 언어놀이에 참여한 참가자가 사용 맥락 속에서 가지는 것이다. 앵무새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음성을 따라 한 것에 불과하지 우리의 언어놀이에 참여한 참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한 것과 공적인 놀이 속에서의 언어는 다르다. 사적인 언어도 결국 자기만의 언어이기 때문에 앵무새의 경우처럼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언어게임 속 맥락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적인 언어로 자신의 내밀한 사적인 통증 등등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공적인 영역에 있는 언어놀이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 것인가? 만약 누군가에게 맞는다면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형식이다. 만약 사람마다 통증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 다르다면, 본성상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위와 같은 인간의 삶의 형식은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맞는 순간 고통은 아픔을 느끼는 것은 사적인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은 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삶의 형식으로 나온다. 결국, 통증에 대한 공통 반응이 일치하는 언어놀이에서는 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형식의 일치하는 사람 사이에서 실행 가능한 언어놀이는 공적인 틀이 있다는 것이다. 맞으면 “아프다!”라고 말하자고 의견을 일치시켜서 삶의 형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통증을 겪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표정이 일그러지며, 소리를 내는 것이 삶의 형식이다. “아프다”라고 말하기로 약속하는 의견의 일치 작업 이전에 더 근원적인 것, 공통된 반응을 하는 인간의 그대로의 모습을 삶의 형식이라고 하는 것이고, 인간은 이러한 삶의 형식이 일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적 언어는 이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사람에게조차도 언어로서 이바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가능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이바지하지 못한다.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사적인 언어에 대한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만의 통증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통증과 다른 놀라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말해보자. 어떤 한 개인 방송 스트리머가 놀라움의 의미로 “와…. LEGEND(와…. 전설이다. = 말도 안 된다)다.”라는 말을 D를 O로 바꿔 생각하면서 발음 그대로 레게노라고 말하면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렇게 사적인 언어가 많은 사람이 쓰는 언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즉, 삶의 형식에 들어있지 않은 본인만의 사적인 언어가 되지 않는다는 그의 철학과 반대되는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처럼 언어의 규칙은 계속해서 변한다. 규칙뿐만 아니라 언어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기체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간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콰인의 철학에서 언어의 본성에 관한 견해들과 존재론과 과학의 탐구 개념 간에는 밀접한 연계성이 있다. 언어에 대한 콰인의 접근은 경험주의자와 행동주의자의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경우 언어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았거나 말로 표현된 특정한 자극들을 받을 때, 개인들에게 나타나는 공개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행동 반응들을 경험적으로 연구해야 했다. 자극들과 반응들의 형태는 특정한 성향이 있는 대화 때문에 전달되며, 어떤 사람이 하나의 특정한 언어에 숙달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가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언어의 역할에 관한 공통으로 잘못된 하나의 오해를 기술하기 위해 ‘박물관 신화’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박물관 신화는 “언어는 정신적인 실재들에 대해 ‘의미’라는 꼬리표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꼬리표는 바뀔 수 있으므로, 그 지시물은 꼬리표의 어떠한 변화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 변화에 개의치 않는다. 언어를 바꾸는 것은 단지 그 꼬리표를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불확정과 상대성의 요소들이 언어의 모든 사용에서 어떤 형식으로나 어떤 정도로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불확정적인 요소로 우리는 일상 언어를 잉여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채택과 사용은 관찰 적, 감각적 사용 때문에 미결정된 것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접촉해 보지 않은 원주민의 언어를 번역해야만 하는 현장 언어학자가 경험하게 되는 종류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불확정성 영역을 감소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법들과 수단들을 전부 말한다고 해도 어떤 정도나, 형식에서는 모두 제거될 수 없다. 이렇게 불가피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번역 불확정성은, 콰인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은 이른바 개념적 상대성의 논제라는 것을 그가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하나의 언어로 진행할 때, 하나의 단일한 번역 편람에 의해서 번역될 수 있는 하나의 단일하고 완전한 연결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상황은 항상 가능하다. 우리가 채택한 언어는 규약적으로 선택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배경 언어는 원초적으로 채택했다는 뜻이고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불가해적 존재론을 하고 있다. 절대적 사실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시를 달성하는 경우 지시 장치에 관한 개념 체계 사용과 독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콰인은 기껏해야 자의적으로 도입한 하나의 개념 체계를 다른 것으로 번역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번역 결과가 엄밀하게 똑같다는 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르기아스」의 부끄러운 것「고르기아스」 책의 초반 소크라테스는 대중들 앞에서 설득력 있게 말하는 고르기아스의 기술에 관해서 알고 싶어서 동료인 카이레폰과 함께 그의 강연을 들으러 왔고, 밖에서 칼리클레스를 먼저 만나고 안으로 들어와 고르기아스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책의 초반부터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를 추궁하며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많은 당대의 지식인들을 곤란하게 만들며, 앎에 대해 추궁하듯이 문답법으로 질문했다. 분명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으로 정말 수없이 많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며, 그런 대화 속에서 답변자는 결국 자신의 깨달음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것이다.고르기아스 또한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설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둘의 대화에서 많은 것들이 오갔다. 이 중 가장 큰 화두는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말하기 위해 그들은 수사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게 수사술이 무엇인지 규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고르기아스와의 문답을 통해 여러 번 수정을 거듭하면서 최종적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 한 것에 관해서 믿음을 갖게 하는 설득의 기술’이라는 규정을 얻었다. 여기서 고르기아스는 수사술의 힘은 모든 분야에 발휘되고 더 나아가 다른 기술들을 능가한다며, 수사술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고르기아스의 수사 즉, 연설능력은 연설능력에 바탕을 둔 정치적 삶이 그 주체에게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힘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런 고르기아스 말에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로 비판한다. 수사술로 “수사가가 대중들 앞에서 다른 전문가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결국 지식이 없는 자가 지식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지식을 가진 자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는 것과 고르기아스는 수사가가 정의와 부정의에 관해서 지식을 가진 자라고 했고, 지식을 가진 자는 정의로운 자이므로 불의를 행할 수가 없는 것인데, 고르기아스가 수사술을 배운 자는 그것으로 불의를 행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자기 모순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연설술로 사람들을 꾀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고 여기는 고르기아스의 삶이 훌륭한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이에 같이 있던 폴로스는 수사가는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수사가가 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에도 없는 참주적 힘을 가진 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수사가는 제일 힘이 없는 자라고 반박하며, 불의를 행하는 것은 가장 나쁜 것이기 때문에 그런 힘은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안 된다고 반박한다. 결국, 고르기아스와 폴로스가 말하는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힘은 결국 대중의 압력에 굴복하는 아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결국 ‘허구’로 판명된다. 이런 연설술과 정치 권력의 신봉자인 이들을 굴복시킨 것은 결국 부끄러움이다. 이들이 그렇게 신봉했던 연설술의 근본은 결국 ‘무지한 자가 듣기 좋은 말로 무지한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강력한 힘과 무소불위를 참주하는 연설가는 무지한 자로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부끄러운 자들에 해당하는 것이다.폴로스와 고르기아스가 말하는 힘은 모두 소크라테스에게는 부끄러운 행동이다. 위와 같은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한다. 이러한 논박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질문을 듣는 상대방이 질문을 듣고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데 있다. 고르기아스와 폴로스도 계속해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듣고 강력한 힘이 결국 허구라는 것을 깨달았고, 소크라테스는 앎이 모자란 연설은 본인에게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고르기아스는 당대의 유명 연설가와 정치가들이 남긴 업적을 역설하며 상황을 반전시키려 한다. 이는 수세에 몰린 고르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업적을 통해 연설술의 강력한 힘을 또다시 주장한다. 여기에 덧붙여 연설가가 부정하게 그의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의 선생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이런 고르기아스 말에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을 배우려는 자는 정의와 불의에 미리 알고 있어야 하고, 만약 모른다면 그를 가르칠 수 없는가? 아니면 만약 모르고서 온다고 해도 많은 사람 앞에서 그것에 대해 아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가?’라며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의에 대해 앎을 아는 자는 정의로울 수밖에 없고, 연설술을 부정한 곳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고르기아스의 말에는 사실 자가당착적인 말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말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연설가는 모르는 자들 앞에서 아는 자보다 더 아는 것처럼 보일 힘을 가진다고 말했고, 이에 따른다면 정의에 관해 설득하는 자로서, 정의롭지 않은 것을 정의롭게 ‘보이게’ 하는 것도 연설가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연설가가 말하는 정의롭지 않은 것을 가르치는데 대중들의 민심에서 위기를 피할 방법은 대중의 요구에 굴복해야 한다. 즉, 대중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칼리클레스의 지적대로 “대중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다. 결국, 연설가가 대중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연설가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에 고르기아스가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계속해서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이와 같은 대화가 계속된 이유는 변론에서 부끄러움을 강조할 만큼 부끄러운 삶을 굉장히 치욕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에 관해 주장함과 동시에 상대방이 부끄러움을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에 대한 논박을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이용함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소크라테스가 부끄러움에 대해 계속해서 대화하는 이유가 있다.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의 믿음으로 언쟁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계속해서 상대방이 말하는 믿음과 모순되는 전제를 제시하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얻는다. 결국, 고르기아스와 폴로스는 계속해서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빠져들어 자기 모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믿음에 모순되는 전제를 제시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동의를 얻지 않는다면, 고르기아스와 폴로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계속해서 반박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기의 모순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대화가 이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연설술은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확신을 심어주는 기술이지, 대중들을 가르쳐 앎을 깨닫게 해주는 기술이 아니다. 이를 질문과 상대방이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자신이 함으로써 대화하는 상대방이 일관성을 잃게 만드는 소크라테스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여기서 부끄러움의 역할은 정치적 삶과 철학의 삶을 대립시키는 가장 큰 화두이다. 고르기아스와 폴로스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정치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지, 철학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게 바꿔말하면 정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부정의 한 방법으로 환심을 얻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과 상대방이 하는 말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껴 부정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종적으로는 부끄러운 삶을 깨닫게 만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극화 사회 속에서 ‘더 랍스터’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서론양극화 사회 속에서 ‘더 랍스터’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나는 예술품에 대해 생각을 했을 때, 단번에 영화가 떠올랐다. 이유를 말하자면 내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어떤 예술적 교양이나 지식이 없이 제작물을 보아도 쉽게 어떤 예술적 느낌을 받거나, 내가 질문을 받거나, 내 질문에 답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랍스터’라는 영화를 예술품으로 생각하고 왜 예술품이 되는지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그리고 겉으로는 사랑을 주제로 영화가 전개되지만, 그 밖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영화 ‘더 랍스터’는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더 랍스터’는 2015년도에 개봉한 사랑을 주제로 한 SF 영화이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했는데, 줄거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줄거리를 소개하기 전 영화는 특이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랑을 주제로 영화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아름답거나, 로맨틱한 느낌을 받기는 힘들고, SF영화지만 영화 속에는 SF 요소인 최첨단 기술이나, 공상과학기술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 사랑에 대해서 심오하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미래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줄거리는 일정 나이가 됐는데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돌싱도 포함해서)은 호텔로 끌려가게 된다. 45일간 호텔에서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고 짝을 찾지 못하면 결국 본인이 원하는 동물로 변하게 하는 형벌에 처한다. 주인공은 호텔에서 결혼 상대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도망자가 된다. 도망자가 되어 숲으로 숨게 되는데, 이 숲에서 사는 무리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무리에 들어오면 누구하고도 절대 사랑하면 안된다. 주인공은 사랑하지 않음을 약속하고 무리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 사랑을 찾아야 할 곳(호텔)에서 도망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곳(숲)에서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과 여자는 숲에서 몰래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이다가,되는데 도망치는 과정에서 눈을 잃은 여자는 남자도 자신과 같이 눈을 잃기 원한다. 주인공은 나이프를 들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영화의 막이 내린다.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은 계속해서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조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응징한다. 이런 선택은 사소한 것에도 적용된다. 호텔에 들어가면 똑같은 옷을 배급해주는데 주인공이 옷을 받는 도중 신발 사이즈에 대해서 문제가 생긴다. 주인공은 44.5 사이즈의 신발을 신는데, 호텔에는 44사이즈와 55사이즈 밖에 없어 둘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같은 문제는 성적 가치관을 고르는 질문에서도 나타난다. 동성애와 이성애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양성애는 안되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이성애와 동성애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대답이다. 이 영화는 계속해서 주인공의 양극단에 있는 선택지를 선택하면서 일어지는 일로 진행이 된다.그리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무표정으로 일관되고 있는데, 이를 보는 우리는 굉장히 황량하고 건조한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 때문에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가 양자택일의 상황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은 계속해서 양자택일 중간의 답을 내어놓으며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본론그렇다면 나는 ‘더 랍스터’를 왜 예술품으로 생각하는가?나는 예술이 계속해서 사회 또는 사회의 문제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품은 보는 이(시민)에게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어떤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예술품이다.미술과 사회는 굉장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품들이 이를 증명하듯 각자의 사연을 갖고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예술품들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습들을 투과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선사시대와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그림에서 우리에게 예술품과 사회가 어떻게 관서술하려고 한다.우선 선사시대 예술을 보자. 최초의 예술작품은 기원전 1만 5000년경에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야생동물 그림과 기원전 3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거라고 통하는 여신상이다. 그 당시 그림은 동물에 대한 묘사가 훌륭하게 되어있다. 동굴 벽에 그려진 그림인데, 벽이 울퉁불퉁한 것을 이용하여 동물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여신상은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여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보일까 말까 한 이목구비와 지나치게 부푼 젖가슴과 커다란 배, 튼실한 넓적다리와 짧은 종아리를 지닌, 여신이라 하기엔 좀 민망한 모습의 작은 돌덩어리다.특히 벽화는 그 시대 그려진 것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역동적이고,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벽화와 조각상은 예술적인 의미도 지니지만 단순히 미적 관조의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당시 사람들에게는 동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동물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였는데, 잡아먹히거나 잡아먹어야 했다. 즉,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 극복의 대상을 벽에 그려 활을 쏘며 사냥 연습을 하기도 하고 동물 그림 앞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선사시대의 예술은 단순히 미적 관조의 측면이 아닌 당대의 중요했던 의식이자 활동이었다. 비너스도 마찬가지로 선사시대의 여성상을 잘 나타내준다. 풍만한 골반과 가슴은 다산의 상징으로서 종족의 번영을 의미한다. 이렇게 비너스와 벽화 모두 당시의 시대상을 나타내며 사회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두 번째로 시대는 신고전주의 그림으로써 고대 그리스의 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근육과 표정이 매우 현실적이고 ‘라오콘 군상’ 조각상처럼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력을 보여준다. 이런 정신력과 강인함은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그림에서 이러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받아들여 그림으로 나타낸 이유는 당시 불안했던 프랑스에서 ‘베르사유 행진’,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16세 처형)은 시민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당시의 그림은 시민들에게 교훈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이희생당한 것을 매우 강조하고 이런 영웅이 갖고 있었던 정신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마라의 죽음을 굉장히 숭고하고 민중을 위해 희생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피에타 조각상을 보는 듯한 죽음에 대한 숭고함이 느껴진다. 이 그림은 대중들에게 혁명의 희생정신을 가르치고 교화시킴으로써 시민의 혁명 참여에 크게 이바지한 그림이다. 이 그림 역시 사회가 밀접한 관계를 했음을 알 수 있다.마지막으로 사실주의 시대 그림이다. 사실주의는 19세기 그림으로서 이전 그림과는 다르게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특징이 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그림이 가장 대표적인데, 그 중 ‘돌 깨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중장년층이 없고 어린 소년과 늙은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고된 노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프랑스의 산업혁명으로 중장년층이 돈을 벌려고 도시로 떠난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농촌의 생활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뿐 아니라 쿠르베의 그림 모두 산업혁명으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을 그렸는데, 영웅과 신화적 인물이 더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세 시대의 그림들과 상황을 짧게 정리했는데, 위의 시대의 그림들은 당대 중요하게 여기던 상황을 굉장히 적나라하고 예술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앞선 시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품은 사회의 현실을 아름답거나, 예술적인 그 어떤 모습으로 관객에게 교훈이나 깨달음 등등을 안겨준다. 이는 예술품은 계속해서 예술적인 형태로 사회와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영화 ‘더 랍스터’를 예술품으로 생각하는 이유이다.예술품은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관객에게 다가선다. 이를 증명하듯 우리는 미술의 역사를 학창시절부터 의무적으로 배운다. 단순히 그림이 아름다운지, 어떤 느낌인지 만을 다루지 않고 그 그림 기, 당대의 상황 등등 그림의 배경지식을 같이 배운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실물로 그림을 봤을 때, 이미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한 결과물 보게 된다. 이미지적 아름다움과 텍스트 적 사유가 결합하여 그림을 조금 더 생동감 있고 공감을 하게 만들어주고, 우리는 그림을 예술품으로 인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미술관을 갔을 때, 단순히 그림만을 보지 않는다. 그 그림의 배경, 왜 그려졌는지, 화가의 상황들을 같이 접하며 그림이라는 이미지에 텍스트를 결합하여 그것을 예술품으로 받아들인다. 영화 ‘더 랍스터’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흘러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방식이 다양화되었다.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화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림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방식은 다양화되었지만, 우리가 현재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미지로 투과하는 것은 변함없다.그렇다면 ‘더 랍스터’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담아내고 있을까?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선택이다. 양 극단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주인공은 양극단에 서는 것보다 중간을 원하고 있지만, 주인공이 사는 사회에서 중간은 찾기가 힘들어졌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나눠진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눠진 양쪽에서 한쪽만을 선택하는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젠더간의 갈등, 좌파와 우파의 양극화 등등을 볼 때 사회의 이분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불가피하게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우리도 주인공처럼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도 우리는 그 선택에 회의를 느끼거나 자신의 선택에 반감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선택을 하지 못해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에서 양극단에 서고 싶지 않지만, 사회는 계속해서 양극화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는 현재 소셜네트워트(‘이하 SNS)를 빼면 안될 만큼 SNS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것처럼 눈을 뜬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스마트폰을 떼지 못한다.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기술력에 의해 바뀐 삶의 형태 중 하나이고,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즉, 나 또한 SNS에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우리의 삶의 형태는 분명 계속해서 변했다. 언어가 그랬고, 의식주 모두가 그랬다. 시대정신도 급변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SNS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상에서 설명 하듯이 더이상 SNS는 도구가 아니다. 도구 이상의 새로운 것으로 우리의 삶을 점점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가지 예로 우리가 여행을 갈 때, 우리는 SNS로부터 시작한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고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숙소에서 잠을 자고 어떤 곳을 찍어서 SNS에 올릴지를 생각한다. 내가 가고 싶은, 먹고 싶은, 느끼고 싶은 것들과 SNS에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SNS가 맛있다고 추천하는 음식을 먹으며,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인지, 유행하는 음식을 먹은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점점 불명확해지고 있다.결국 SNS로 우리는 우리를 잃어간다. 어쩌면 알고리즘이 내 삶의 형태를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위에서 말했던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분명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하고, 인정받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이것들은 단순히 좋아요, 하트, 리트윗 등으로 채울 수는 없다. 이것들은 단순히 0과 1로 이루어진 스마트폰 세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점점 이와 같은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중독되어 손에서 떼지 못하는 것은 영상에서 말한 것처럼 SNS는 더 이상 도구의 역할 이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또한 예전과 다르게 정보의 제공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인 미디어, 1인 홈페이지 등등의 결과로 말이다. 이말은 즉슨, 명확한 사실이 있는데, 잘못된 사실을 믿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잘못된 진실에 우리는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다. 어쩌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명확한 사실을 부정하고, 잘못된 진실이 내 세상이었으면 하는 욕구가 SNS로 발현된 것일 수 있다. 그런 욕구는 70억명의 견해가 쏟아져 나오는 SNS에서 쉽게 해소할 수 있다.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분명한 위기에 처해있다. 나의 견해를 추가한다면, 현재 지금 우리가 위기에 처해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제일 큰 위기이다. 영상에서처럼 SNS중독은 단순히 게임중독, 알콜중독과는 다르다. SNS 또는 그것을 담고 있는 스마트폰은 우리가 몇 만년동안 유지해오던 도파민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버튼하나 눌렀을 뿐인데, 도파민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당장 우리가 해야할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우리가 치명적인 위기에 처해있다는 점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게가 말하는 이상적인 언어에서 동일성 언명이 무엇을 말하는가? 동일성이란 대상들의 하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성 언명들에 관한 만족할만한 분석을 제공하지 않는다. 즉 ‘a=a’와 ‘a=b’의 차이점을 처리하지 못한다. 이는 전자는 특별한 정보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후자는 전자가 전달하고 있지 않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호의 의미 즉, 지시체는 단어의 의미로서 지시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기호 간의 관계는 기호 간의 관계이지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시체는 단어가 대리하거나 적용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개밥바라기는 샛별이라는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는 이것이 거짓인지 참인지 모르지만, 그 문장의 의미도 안다.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는 것은 개밥바라기라는 의미도 알고 샛별이라는 의미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유명사의 의미가 그 고유명사가 지시하는 지시치라고 하면 개밥바라기의 지시체도 알고 샛별의 지시체도 안다는 것이고, 개밥바라기의 지시체와 샛별의 지시체가 같다는 것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 발생한다.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지시체일 뿐이다.라는 가정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레게는 뜻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그래서 뜻과 지시체가 모두 같은 대상의 동일성을 지니다. a=b가 지시하는 방식이 다른 기호들과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다. 뜻은 다르지만, 지시대상이 같은 것들의 동일성을 말한다. 뜻은 ”표현의 양태”를 포함하는 지시 관계이고 지시체를 지시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바지한다. 이때 지시체는 기호가 지시되는 대상이다. 여기서 프레게는 하나의 표현이 어떤 정신 속에 환기하게 시키는 주관적 연상(images)까지 설명했지만, 주관적이기 때문에 철학 진리탐구에서 고려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관적인 연상은 결국 지시체과 뜻이 객관적이라는 뜻이다. 결국, 프레게는 표현의 뜻을 객관적인 것으로 도입했고, 이처럼 표현의 지시체를 객관적인 과학적 사용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사실적 지식의 뜻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하에, 표현을 이해하는 것과 그 표현이 적용되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일상언어와 달리 이상 언어에서 모든 표현(기호)을 뜻하고 있으며, 각 표현이 단일한 하나의 뜻하고 있다. 그것을 언어사용자가 공유하고 있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잘 형성된 문장의 모든 구성요소는 하나의 명료하고 확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일상언어에서는 모든 단어가 뜻과 지시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프레게는 이름과 단어는 뜻과 지시체로 구분되어 있고, 이러한 이름과 단어의 문장이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관념의 집합체가 아니라 객관적이며 공개적인 것이고 획일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명제(참이거나 거짓인 문장의 내용)로 표현할 수 있다. 지시체는 결국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뜻과 지시체의 구분과 명확한 개념의 정의에 있어서 프레게 이론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프레게의 말에 따라 일상언어로 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언어에서 지시체가 부재하거나 뜻이 부재한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프레게가 표현의 뜻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기술 언어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자연수 등등의 문장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지시체가 없지만 우리는 이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예에서 지시체가 없는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한다는 것일까? 이는 프레게 철학에서 표현의 뜻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이렇게 도입된 철학으로 인해 우리는 지시체라는 객관적인 표현과 그 표현의 여러 가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관찰자가 보는 여러 가지 뜻이 지시체라는 객관적인 표현을 뜻하는 것을 알기에 관찰자는 객관성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의 정리로 인해 우리는 문장을 이해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언어의 문제점 또한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프레게의 언어철학은 미래에 있을 언어철학의 큰 디딤돌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렇기에 나는 프레게 이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가 왜곡되어서 만들어진 가짜 문제라고 주장했다. 언어는 미사여구를 빼고, 언어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고, 언어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해야 세계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언어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그림이론에서 세계에는 대상들이 있다. 이런 대상은 책, 노트북, 이어폰 등등을 말할 수 있고 이는 이름과 대응한다. 이때 이름은 뜻이 없고 지시체만 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이름은 논리적으로 단순한 것이다. 이름은 단지 기호일 뿐이다. 이런 대상들의 관계가 사태이다. 사태는 단순 명제와 대응한다. “책은 사각형이다.”, “이어폰은 파란색이다.”로 말할 수 있다. 이런 단순 명제는 단순 사태(상황)로 볼 수 있다. 이는 사태는 사실과 거짓된 사태를 서술하고 있다. 단순 명제도 이와 같다. 단순한 대상들이 세계의 실체를 구성할지라도 이것들은 결국 서로 간의 결합 방식이고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름들은 지시할 뿐, 뜻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이를 말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명제들만이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하며, 오직 명제와의 연계 속에서만 하나의 이름은 의미를 갖는다.라고 주장했다. 명제를 이해하는 것은 그 명제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참과 거짓임을 알 수는 없다. 참과 거짓은 알 수 없어도 구성요소들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알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그림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하나의 그림, 실재와 비교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사태를 연결하면 사실들이 된다. “파란색 이어폰이 사각형 책 위에 올려져 있다.”라는 예를 들 수 있다. 이는 복합명제로 대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연결하면 세계가 된다. 세계는 언어로 대응할 수 있다. 이름을 연결하면 요소명제가 되고, 요소명제를 연결하면 복합명제가 되며, 복합명제를 연결하면 언어가 된다.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서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경험과학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가 세계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복합명제도 같다. 복합명제가 복합적 사실과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태들은 대상들의 결합물이고, 이름들이 결합하여 문장을 형성해서 명제가 사태를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은 뜻이 없고 지시체만 가지고 있다. 이때 일상적인 고유명사나 한정 기술구 모두 논리적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것들은 실제 세계에서 사례를 들 수 없고 단순히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을 지시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단순한 것을 지시하는 단순한 대상들이 세계의 실체를 구성할지라도 이것들은 결국 서로 간의 결합 방식이고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결국,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있는 것 즉, 언어에서 유의미하고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논리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인식될 수 있는 것, 존재하고 있는 것의 한계를 제시한 것이다. 어떤 명제에 대해 분석을 계속해서 갖는다. 이런 과정은 계속하게 되는데, 언어가 세계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것이 참이라면 그 과정은 어디에선가 끝나야 하고, 그 마지막 결과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감각 인식의 세계와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점은 세계를 그림으로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서 잘 나타난다. 즉, 세계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이것이 사실적인 정보나 지식을 제공하거나 기록하기 위해 철학이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철학은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무의미하다.명제들은 그것들이 말하는 바를 보여 준다. 항진 명제들과 모순 명제들은 그것들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논리적 명제는 공허하다. 즉, 정보를 주지 않지만 무의미하지 않다. 등등 철학은 이론 제공이 아니라 개념을 명료화하는 다시 말해, 논리적인 분석을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분석을 할 수 없는 언어가 있다. 바로 말해질 수 없다. 이것은 언어는 선험적으로 주어졌고, 그것들은 언제라도 경험적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검증했을 때, 그림이론과 같이 그에 대응하는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착하다.”, “좋다.”라는 명제는 대응하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윤리학, 철학, 미학 등등의 문제이다. 결국, 이런 문제는 즉, 삶의 의미의 문제 가치는 세계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하다, 명제는 사실 이상의 고차원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고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가치는 필연적이고 세계는 우연적이기 때문에 가치는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명제에는 차원이 없으므로 사실 이상의 고차원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다. 모든 명제는 경험적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