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고려 중기의 상황을 통해 본-담당:과목명:학번:이름:1. 문벌귀족의 성립2. 이자의의 난과 숙종·예종 대의 개혁 노력3. 이자겸의 난4. 이자겸의 난 이후1. 문벌귀족의 성립건국 초기 진취적·자주적·개방적 성격의 지방 세력은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형성되어 갔고, 성종(成宗) 이후 점차 그 기반이 확립되면서 고려 중기로 넘어가면서 귀족 세력은 점차 보수적·사대적·폐쇄적인 문벌귀족으로 발전해 나갔다. 문벌귀족의 유형으로는 지방 호족 출신, 개국 공신 계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화된 계열,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 등이 있었으며, 이들 문벌귀족은 특권으로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서도 중앙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음서(蔭敍)와 고려 초기 공신전(功臣田)의 한 형태로 존재하다 문종(文宗) 대에 경정전시과(공음전시과) 체제를 정비한 이후 5품 이상에게 지급된 세습전인 공음전(功蔭田)이 있었다.이런 문벌귀족들은 과거와 음서제를 이용하여 관직에 진출한 문신 관료들이었고 이들은 11세기 중엽 이후 고려사회가 안정된 가운데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들은 재추(宰樞)로 불린 중서문화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 소속의 재상직과 함께 관료의 인사를 담당한 이부·병부의 판사와 상서직을 장악하였다. 또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전시과제도에 따라 과전을 지급받는 한편, 공음전을 받아 세습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유력한 가문끼리 폐쇄적인 혼인 관계를 구축하여 권력적 위상을 대를 물려 이어갔다.2. 이자의의 난과 숙종·예종 대의 개혁 노력고려사회는 그 중기에 들어서면서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왕실의 외척 가문이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경원 이씨 가문으로 이자연의 딸들이 문종(文宗)의 왕비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국왕들과 인척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였다. 이후에도 경원 이씨 가문에서는 순종비(順宗妃) 장경궁주 및 선종비(宣宗妃) 사숙태후, 원신궁주 등을 배출하여 문종(文宗) 대부터 인종(仁宗) 대까지 왕의 외척 세력으로 80여 년간 집권하였다. 이런 가운데 경원 이씨 중 일부는 왕실의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이자의(李資義)의 난이었다. 박용운, 2008, 『고려시대사』, 일지사11대 문종(文宗)이 죽고 장자인 12대 순종(順宗)이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몇 개월 만에 하세(下世)하여 13대 선종(宣宗)이 즉위하였다. 이 시기부터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점차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선종(宣宗)이 재위 11년 만에 죽고 11세의 어린 임금인 14대 헌종(獻宗)이 즉위하자, 이정(李?)의 아들로서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 종2품)를 지내고 있던 이자의는 자신의 여동생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漢山侯) 윤(?)을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헌종 원년(1095) 7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헌종의 숙부인 계림공(鷄林公) 희 (熙)가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소태보(邵台輔) 와 상장군 왕국모(王國?), 장사 고의화(高義和)를 이용하여 이 난을 진압하였다. 이 공로로 계림공은 중서령이 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헌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숙종(肅宗)이다.헌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오른 숙종은 경원 이씨를 비롯한 문벌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경이 길지임을 내세워 남경건설을 추진하였고, 숙종은 의천의 상소에 따라 주전(鏡錢) 사업을 추진하여 동전을 유통시켜 권세가의 대민수탈을 막고 국가가 유통경제를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숙종의 이러한 정책은 예종(睿宗) 초에도 이어져 예종(睿宗)은 별무반을 편성(1104)하여 여진정벌(1107)을 단행하여 성공해 국가적인 위세를 세우려 노력하였으며, 감무(監務)를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유방을 방지하려 하였다. 또 청연각(淸?閣)·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여 유교에 입각한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숙종과 예종의 노력으로 경원 이씨 세력은 위축되고 과거를 통해 진출한 왕의 측근 세력이 성장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왕권이 강화되었다.3. 이자겸의 난이자의의 난으로 경원 이씨 가운데 이자의 계열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다른 계열은 건재하였다. 그리하여 이자겸의 둘째 딸이 예종비(睿宗妃)로, 그리고 셋째와 넷째 딸이 인종비(仁宗妃)로 들어갈 수 있던 것이다. 왕실의 외척이 됨으로써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던 이자겸 일파는 신진 관료라 할 수 있는 한안인(韓安仁)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종이 죽고 자신이 키운 14세의 어린 임금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자신을 반대하던 한안인을 비롯한 왕의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이자겸은 그의 일족들을 요직에 앉히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그래서 이자겸의 집으로 사방에서 들어오는 선물이 계속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 썩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이자겸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노복을 풀어 수레와 말을 약탈하여 물건을 실어 나르기도 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수레를 부수고 소·말을 팔아 버릴 정도였다.이뿐만 아니라 이자겸은 스스로 국공(國公)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올리는 축하의 글을 임금과 동등하게 전(箋)이라 불렀으며,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려고 인종(仁宗)에게 요청해 자신의 집에 와서 책봉하게 했으며 시간까지 강제로 정하는 등 무례를 범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이자겸의 태도에 대해 인종은 매우 반감을 갖게 되었는데 이를 눈치 챈 내시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 등은 인종 4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과 함께 인종(仁宗)의 측근 세력인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을 불러 계획을 짜고 척준경의 동생으로 병부상서를 맡고 있던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 등 5~6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이자겸과 척준경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반대파를 제거한 뒤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인종에게 강요하여 자신의 집인 중흥택(重興宅)의 서원(西院)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이후 인종은 이자겸 일당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어 거의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으며, 이자겸은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을 맹신하여 자신의 딸(넷째 딸, 폐비 이씨)을 시켜 인종을 살해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李之彦)의 종과 척준경의 노비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 주인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번져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이 틈을 타서 인종은 최사전을 통해 이자겸을 제거해 큰 공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교서(敎書)를 척준경에게 전해 주며 그에게 이자겸을 제거하고 공을 세우도록 회유하였다. 이에 결국 척준경은 이공수와 의론하여 무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체포하고 그와 그의 일파들을 각지로 귀양 보냈고, 이자겸은 결국 유배지 영광(靈光)에서 죽었다.이자겸 제거 후 척준경은 공신으로서 문하시중(중서문하성 장관)에까지 올랐으나 사양하고 문하시랑의 직을 받아 잠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정지상(鄭知常)과 김부식(金富試) 등의 탄핵을 받고 암태도에 유배되었다가 곡주에서 죽었다.4. 이자겸의 난 이후고려 왕실을 위협하고 어쩌면 왕조를 바꿨을지도 몰랐던 인물인 이자겸에 대해 ‘고려사’(물론 조선 시대에 쓰이지만)에서 절대 좋게 평가할 일이 없기에 ‘고려사’에 적힌 그의 행위가 다소 과장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감안해도 이자겸이란 인물은 특별히 좋게 볼 여지는 없을 정도로 악인은 확실하다. 더불어 재밌는 사실은 이자겸의 모친마저 악인으로 묘사되었던 만큼 이자겸 말고도 그의 일족인 경원 이씨 자체가 왕실의 외척으로 오늘날의 소위 ‘갑질’을 해 됐을 것으로 보인다.문벌 귀족을 대표하는 이런 경원 이씨가 문종 대 할아버지 이자연 세대를 지나 손자 세대인 이자의와 이자겸 대에 와서 문벌 귀족으로서 절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왕실을 넘보며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들었으며, 어떻게 보면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불어와 이후 무신이 난을 일으키게 되는 배경을 만들었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개경파 문벌귀족 세력 가운데 특히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경주 김씨 세력과 새롭게 외척 세력으로 성장한 임원애를 중심으로 한 정안 임씨 세력이 크게 부상하는 한편, 척준경을 제거한 공로를 인정받은 정지상 등을 중심으로 승려 묘청과 백수한 등의 서경 출신 신진 관료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서경 천도 문제를 놓고 다툼으로써 이자겸의 난으로 발생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의 연장선으로 문벌 귀족 세력 간의 분열이 극심해졌다.참고문헌1. 관련 서적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6, 국역 『고려사』 20 열전1, 민족문화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6, 국역 『고려사』 28 열전9, 민족문화박용운 외, 2007, 『고려시대사의 길잡이』, 일지사박용운, 2008, 『고려시대사』, 일지사한국역사연구회, 2017, 『고려시대사 1』, 푸른역사2. 인터넷인천 이씨,http://michuhol.grandculture.net/Contents?local=michuhol&dataType=01&contents_id=GC047006881) 위봉루(威鳳樓)에 행차하여 사면령을 반포하여 3년간 역(役)을 면제하고 …… 문무 관리에게 관작 1급을 더해주며,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는 음직(蔭職)을 수여하였다. -『고려사』 권75, 지제29, 선거(選擧)3-2) 경종 2년(977) 3월에 개국 공신 및 향의귀순성주(向義歸順城主) 등에게 훈전(勳田)이 50결부터 20결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사여(賜與)되었다. / 현종 12년(1021) 5월 공음전이 제정되었는데, 공음전은 직자(直子)가 범죄한 경우 그 손자에게 이급(移給)하도록 하라. -『고려사』권78, 식화지1, 전제 공음전시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