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를 보고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인 1941년,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참전한 일본은 초반에 올린 성과와는 달리 전세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자꾸만 일본에게 불리하게 흘러갔고 결국 수세에 몰린 일본은 1944년, 전래 없던 사상 최악의 전술을 내놓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일명 ‘가미카제’ 라고 불리우는,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공격하는 자살 공격이 바로 그것.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를 방어하기 위해 1945년 가을, 일본은 1,000명이 넘는 특공대원들을 작전에 대거 투입하였고, 그 중에는 조선인 가미카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는 지옥 같은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소속 조선인을 상관으로 두었던 전직 가미카제 특공대원인 한 남자와 상관의 약혼녀였던 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시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못하는 남자와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넘었지만 남자의 상관이었던 일본군 소속의 조선인, 약혼하기로 했던 그 시절의 약혼자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여자는 남자와 함께 각자의 상처를 안은 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며 세월과 함께 늙어갔고, 이제는 백발의 노인을 바라보는 날만 남겨두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장르가 멜로 그리고 로맨스인 만큼 작품 그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땐 단순히 노부부의 사랑과 회한이 많이 드러난 작품이라는 정도로만 여겨질 수 있으나, 36년간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역사적인 요소, 특히 그 중에서도 민감한 문제라고 여겨질 수 있는 부분들이 다분히 영화의 배경에 깔려 있는 만큼 관람객이 일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해당 작품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영화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한 평은 호인지 아니면 그 반대가 될 지 극명하게 갈릴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이나 근거 없는, 다시 말해 ‘다른 몇몇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별로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으니 나도 한지스럽고 이유 없는 싫어함을 가지고 살아오진 않았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떠받들다시피 살아오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좋은 것은 좋은 것 혹은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쁘고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로 봐야 한다는 주의다. 그러던 중, 한국과 일본 양국 간 일어났던 일에 대한 소재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 ‘호타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가질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자칫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 봐도 무방하리라고 생각되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당 영화의 감독이 ‘호타루’라는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혹은 더 나아가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가지는 시각 혹은 나의 개인적 생각에 대한 바를 이번 감상문을 통해 풀어 나아가려고 한다.우선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해당 영화를 보기 전 영화에 대한 줄거리가 어느정도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여 줄거리를 미리 본 후 영화를 감상하였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의 초반부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러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화에 대한 소개나 줄거리가 없으면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그것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제목과 분위기만 봤을 땐 전쟁 관련 장면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예상했던 부분과는 상당히 달라 당황했던 감이 적지 않아 있었다. 장르도 나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기에 상당히 지루할 것이라 예상했던 나였지만, 해당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색깔에 지루했던 부분이 있었다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영화는 끝이 났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영화 속 내용과 관련된 것들 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을 넘어 영화 외적인 부분에 관련한 내용, 그리고 궁금증들까지 더한 전부였다. 이 모든 것들은 나로 하여금 오랜만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었던 일본군 소속 조선인인 김선재 소위를 생각하는 회상 장면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 김선재 소위는 출격 전날 밤 여관집 주인에게 다음 날 밤 호타루가 되어 다시 찾아오겠다는 유언을 남기며 동시에 조선의 노래인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김선재 소위, 그에게 있어 아리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영화의 감독은 김 소위가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영화 제목인 ‘호타루’가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영화의 감독이 해당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였고, 마지막으로 해당 영화를 감상한 후 일본에 대한 나의 생각은 과연 어떠한지? 영화를 감상하기 전과 후의 느낌이 다른지?와 같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바로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했던 총 네 가지의 질문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첫째, 해당 영화에 삽입된 노래인 아리랑은 내가 느낀 바로는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이며 꺾이지 않을, 불굴의 민족 정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었다. 야마오카의 김선재 소위에 대한 마지막 회상 장면과 같이, 김선재 소위 자신은 결코 일본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닌 극한의 상황에서, 비록 자신은 일본군 소속이지만 특공대원으로서, 자신의 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우리 민족이 지닌 정신, 즉 꺾이지 않는 의지이자 조선의 선비 정신과 비슷한 그 무엇을 드러낸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전략적 혹은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수 천년간 많은 침략과 수난을 겪어온 우리 민족이지만, 결국은 꺾이지 않은 그 굳건했던 모습을 나는 김선재 소위의 장면에서 엿볼 수 있었다.둘째, 영화 제목인 ‘호타루’는 사전적 의미로 ‘반딧불이’를 의미한다고 한다. 김선재 소위는 여관집 주인에게 전날 밤, 그러니까 출격 후 다음날 자신은 ‘반딧불이’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다. ‘반딧불이’는 날아다록 조선인 신분으로서 일본군에 속해 지금 당장은 이국 땅에 있어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이고, 일본군의 신분으로 당장 내일이면 작전에 투입되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입장이긴 하지만 죽어서라도 자신이 가진 신념을 끝까지 가지고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어 고향 땅으로 날아가겠다는 그의 의지, 사후에 비록 그의 육신은 없어질지 몰라도 그의 곧은 기상과 긍지만은 살아 숨쉴 것이라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셋째, 내가 느끼기에 영화의 감독인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은 해당 영화를 통해 진정한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해당 감상문의 도입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애초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배제해 두기로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느낀 감독의 화해의 메시지는 노부부가 한국을 직접 방문해 김선재 소위의 남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인 안동으로 가 직접 김 소위의 유품을 전달하는 부분과, 김 소위가 마지막에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영화에 삽입한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 말로만 행하는 것이 아닌 직접 발 벗고 나서서 하는 행동에 대해 그 진정성의 차이가 확연히 존재한다고들 흔히 말한다. 영화 속을 보자면, 감독은 노부부의 사랑과 회한만이 초점으로만 느껴지게 작품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직접 찾아가 유품을 전달, 사과하는 장면을 넣었다. 물론 노부부가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일본인이 직접 사과하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나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의 과오가 하루 아침에 전부 끊어질 수도 없고 또 쉬이 잊힐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아직도 양국 간에 남아있는 깊은 갈등의 구덩이를 화해와 용서를 통해 메꿔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다는 만 봐도 한일간의 무역, 투자, 인적 교류는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지속되고 있다. 예컨대 제3국에서의 회사 수주와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한 한일 간 기업 간의 연계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등 양국 간 경제 관계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문화 부분에서도 양국 간의 관심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엔 일본의 10대, 20대 젊은이들,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한국의 화장품이나 패션 그리고 음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고, 한국에서도 일본의 음식이나 관광지 또는 애니메이션, 굿즈 등의 인기가 상당히 높아 대중 네트워크 매체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에서도 자주 양국 관련 관심 목록들을 쉽게 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의 핑크 빛 양상 내면엔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선인들이 느꼈을 억울함과 분노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위와 같은 긍정적인 부분들에만 익숙해져 모든 것을 청산하고 행복한 관계로 속히 끝낸다는 것은 너무도 허무하게 다가오는 일이며 이는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뼈아픈 역사를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로 대하는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인간은 화해와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선조들이 겪어왔던 그 내면의 실상을 서둘러 잊으면서까지 양국 간 교류가 주는 긍정적인 부분만 맹목적으로 좇으려고 하는 움직임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처음과 같다. 서로에게 있어 좋은 것은 나누면 좋은 것이고, 나쁜 일이면 그 자체로 분명 나쁜 일이니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는 사실 말이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한다.’라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이 말과 같이, 영화의 배경에 깔려 있는, 이러한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일은 다시는 되풀이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며, 더불어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양국 간 충분한 소통과 이해 그리고 지난날에 있었던 얼룩진 상처에 대한 충분한, 또 확실한 역사적 바로잡기만이바이다.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The Salesman)”, 이 작품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뉴욕의 평범한 세일즈맨인 윌리 로먼(Willy Roman)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30년이란 시간동안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에 몸담았으며, 이 작품은 그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거의 반평생이라 볼 수 있는 시간동안 판매직에 인생 전부를 투자한 셈이었으나, 결국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 끝내 자살을 택하고 마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며, 이 작품은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불과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로 축약, 서술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의 특징을 꼽자면, 이 작품은 윌리(Willy)라는 한 세일즈맨의 인생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붕괴, 그리고 더 나아가 윌리(Willy)가 속해있던 나라인 미국의 급변하는 사회적 모습까지 담아 낸 폭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게, 소위 말하는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은 크게 윌리(Willy)와 비프(Biff)라고 생각된다. 윌리(Willy)의 경우는 글 전반적으로 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 그렇다고 칠 수 있겠지만, 비프(Biff)는 갑자기 웬 말인가 하고 생각될 것이다. 굳이 그가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할 법한 논지가 있긴 한건지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비프(Biff)에게 어떠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면서, 쉽게 말해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이 영화를 시청해 나간다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갈 것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어떻게 생각하면 고집 센,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의 주장이 너무 강하고,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며, 비프(Biff)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뒷전이고 그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한다고 볼 수 있는 윌리(Willy)의 태도는, 이러한 윌리(Willy)의 밑에서 자란 비프(Biff)를 보는 우리로 하여도 비프(Biff)가 반드시 크게 성공을 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윌리(Willy)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윌리(Willy)가 여전히 한결같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자식에게 많은 기대를 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만약 그들에게 자식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자식에게 많은 기대를 걸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윌리(Willy)가 아들인 비프(Biff)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걸어 비프(Biff)가 불쌍해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윌리(Willy)는 아들인 비프(Biff)와 어느 정도 대화를 해 나감으로써 서로 타협점을 찾았어야 했다고 생각된다. 윌리 로먼(Willy Roman)의 경우처럼, 비프(Biff)에게 자신의 기대를 “주입”시키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윌리(Willy)와 비프(Biff)가 서로 부자 관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엄밀하게, 조금 더 냉정하게 따져 보자면 비프(Biff)도 하나의 인격체인 사람이다. 윌리(Willy)가 어떻게 하라고 해서, 그가 아들인 비프(Biff)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해서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무조건 할 수 있는, 반드시 그가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느낀 것은 아무리 부자 관계에 있어서라고 한들 어느 한 쪽이, 특히 아버지의 경우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상대방에게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방식은 잘못된 훈육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러한 방법은 상대방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기 때문이다.이 뿐만 아니라 윌리(Willy)의 다른 훈육 방식에서도 문제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 비프(Biff)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훔친다. 우리는 비프(Biff)가 고등학교 때부터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의 부모들 같으면, 솔직히 말해 상식적으육 방식으로 인한 나쁜 버릇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비프(Biff)의 모습임에 틀림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라는 속담이 있다.이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비프(Biff)가 하는 행동은 딱 이 속담에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비프(Biff)가 이러한 그릇된 행동을 스스럼없이 했다는 그 자체는 우선 본질적으로 그가 제대로 된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며, 더 나아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원인은 부모인, 비프(Biff)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윌리(Willy)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극에서 윌리(Willy)가 급변하는 사회에 있어 가장 큰 희생양이고 한평생 판매직이라는 하나의 일만 하다가 결국 회사에서 해고당하며, 심지어 아들들에게도 외면당하고 마는 그가 가장 불쌍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의 이 극에서 가장 큰 희생양은 결국 비프(Biff)라고 생각된다. 위에서도 기술했듯이 결국 어릴 때 부모의 잘못된 훈육 방식으로 인한 영향을 받아 비뚤어지게 된 그가 이 극에서의 가장 큰 희생양이라고 생각된다.또, 윌리(Willy)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편으로 그가 변화하는 사회의 가장 큰 희생양처럼 비춰지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상당히 “비열한” 인물로 조명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인 린다(Linda)는 이 극에서 어떤 인물이었는가? 순애보 스타일로 한 평생 윌리(Willy)만 바라보고 항상 남편에게 순종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식들에겐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던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윌리(Willy)가 저지른 행동은 과연 어땠는가?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서, 그 자신이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잠시 외로웠다고 해서 이런 아내를 등진 채 외도를 했던 모습을 우리는 이 극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을 것이다. 평생 남편만을 바라보고, 불평 하나 없이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며 두 아들을 키워 낸, 어떻게 보면 상당히 찾아보기 드문 현모양처적인 인물이라고 비춰질 수도 있을 법하다.하지만 내가 린다(Linda)를 보고 느낀 점은 좀 다르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린다(Linda)의 이미지만 놓고 보았을 때 그녀는 상당히 현모양처적인 인물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단순히 드러나는 이미지만 놓고 보았을 땐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다는 점은 나 자신도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현모양처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부터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현모양처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옆에서 별다른 불평 없이 오직 묵묵히 자신의 가정과 가족만을 위해 집안일을 잘해내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단순히, 맹목적으로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때로는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손 놓고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끔 바로잡아 주는 일도 포함된 것만이 진정한 현모양처의 의미이다.하지만 이 극에서 린다(Linda)는 어땠나? 비프(Biff)가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 윌리(Willy)가 비프(Biff)에게 너는 어차피 크게 될 인물이니까 무언가를 훔치거나 해도 크게 문제될게 없다고 말한 부분에서, 린다(Linda)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윌리(Willy)를 말리거나 비프(Biff)를 꾸짖었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린다(Linda)는 옆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지 않았는가?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어떻게 이런 린다(Linda)를 보고 그녀가 진정한 현모양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그녀가 진정으로 현모양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떻게 보면, 나에겐 그저 린다(Linda) 자기 자신이 귀찮아서, 자기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방관적서 비프(Biff)를 바라보자면, 나는 비프(Biff)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극단적으로 생각하자면, 오히려 나는 비프(Biff)의 편을 더 들어주고 싶을 정도다.이 극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비프(Biff)가 17살 때,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기 전에, 비프(Biff)는 우연찮게 윌리(Willy)가 있는 호텔방에 들렸다가 아버지인 윌리(Willy)의 외도를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정신적 성장이 멈춰 버렸다. 이것이 내가 비프(Biff)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니까 윌리(Willy)가 다른 보통의 가장들처럼 외도를 하지 않고 보통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갔다면 비프(Biff)의 정신적 성장은 아버지가 외도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광경을 봤던 그때에 멈춰 있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다른 보통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씩 뉴스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외도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난 집안에서 자랐던 아이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랐는가? 절대 아니다. 탈선의 길을 걷거나 나쁜 길로 쉬이 빠지곤 한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윌리(Willy)의 잘못이 더욱 크다는 말이다.이 작품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결국 윌리(Willy)는 몇 십 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되고, 쓸모없어진 인간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그가 자살하기 전 린다(Linda)도 그렇고, 나중에 알게 되었긴 했지만 아들 비프(Biff)도 아버지인 윌리(Willy)가 언젠가 자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윌리(Willy)가 자살할 낌새를 보였고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어느 정도 예견했었다면 당연히 막았어야 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알고 있었으면서 가만히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냐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상당히 극단적이긴 하지만, 물론 주위에서 그러한 자살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