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학교 이야기는 무슨 책인가? 2p다르게 배워야 다른 꿈을 꾼다. (발달의 특성) 2~3p자기주도 탐구경험이 자기긍정으로 피어나다. (가드너 이론) 3~5p아이들은 서로 가르치며 배운다. (정보처리이론) 5~6p수업이 왜 재미있을까? (창의력과 사고력) 6~8p책을 통해 느낀 점. 8~9p-이우학교 이야기는 무슨 책인가?이우학교는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도시형 대안학교이다. 입시 위주의 치열한 교육 속에서 학부모 100명은 학교 교육을 바꾸기 위해 모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교육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곳 중 하나인 분당에 이우학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책 ‘이우학교 이야기’는 이우학교에서 실시되는 교육과 그 사례들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우학교는 교육의 3 주체(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가 협력해서 학교 교육을 만들어간다. 요즘 모든 학교가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과목에만 집중하고 우열반을 나누어 수업하고 있는 와중에 이우학교는 과감하게 수준별 수업을 없앴고 학급별로 성적과 상관없이 아이들을 함께 섞어놓았으며 아이들은 학부모와 교사의 도움을 받아 교육의 주체로서 그 역할을 확실하게 해나갔다. 이렇듯 이우학교는 우열반을 폐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교육을 금지하였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개혁을 이끌어나갔다.그렇다면 이우학교의 교육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우학교의 교육이 추구하는 교육목표와 방향은 정말 특별한 것일까? 사실 이우학교가 추구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본래 추구해야 할 가치와 숨 막히는 경쟁구도 속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치유해주고 그들의 본래의 아름다운 가치를 찾아주는 것, 그리고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과 공부하고 놀며 내면의 힘을 성장시키도록 하는 것이 이우학교가 추구하는 교육이다. 지금부터 나는 이우학교에서 등장했던 사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4가지를 교육심리와 관련지어 이야기해보겠다.-다르게 배워야 다른 꿈을 꾼다. (발달의 특성)‘아이들은 믿음을 발판으로 점프한다’. 내가 책에서 가장 인상로 관련되어 있고 아이 각자의 성장 시계는 모두 다르다. 또한, 속도와 시간은 물론, 성장의 경로와 방향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평균이라는 성적 단 하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비교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비교하면 아이들은 두려움을 학습하게 되고 내면의 힘을 잃고 방황하게 될 우려가 크다. 또한 부모와 교사의 이런 무지와 다그침이 아이들로부터 배움의 힘을 앗아간다.발달의 단계 중 5단계 청년기에 해당하는 지완이는 신체적으로는 성숙하지만, 정신적 발달에서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혼란과 긴장을 경험하게 되는 시기이다. 다행히도 지완이는 교사와 학부모의 믿음 덕택에 이런 두려움을 학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과 방향을 찾게 되었다. 다시 말해 교사와 학부모는 발달의 특성인 ‘속도와 방향은 개인마다 다르다’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학생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자기주도 탐구경험이 자기 긍정으로 피어나다. (다중지능이론, 가드너 이론)이우학교는 학생들에게 1학년 첫 여름방학부터 중2 겨울방학까지 방학 때마다 특별한 과제를 준다. 자기주도 탐구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이해이다.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 탐구주제를 정하지 않으면 1년간 힘들 수 있다. 즉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행복할 거야” 이것이 자기주도 탐구과제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자기주도 탐구과제에는 3가지 절차가 있다. 첫째, 선배와의 만남, 둘째, 교사와의 상담, 셋째, 발표회와 전시회. 이 절차는 혼란을 겪을 수 있을 학생들이 성공적으로 탐구과제를 끝마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들이다. 이런 절차들을 거쳐서 2년간의 자기탐구가 끝나게 되면 학생들은 중3 졸업작품을 준비하게 된다, 졸업작품은 교과서도 없고 시험도 없는 과목이지만 이우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의 하나이다. 학생들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관심 분야와 소질, 적성을 찾아가며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와 자존감을 찾게 된다.책에는 몇 명의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장도 한얼이를 바꿔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졸업작품집이었다. 기타를 치기 전에는 꿈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졸업작품을 준비하면서 기타를 치기 시작한 이후부터 꿈이 생겼고 굉장한 보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즉 이우학교의 자기주도 탐구과제와 졸업작품은 학생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 것이다.나는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그 누구보다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수업을 듣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야간자율학습을 한다던가, 학원을 가면서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하고 요즘에는 학생부를 채우기 위해 독서, 봉사 등 스펙쌓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3년 전 고등학생 시절 내 꿈은 ‘하루에 6시간 자기’ 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소박한 꿈이란 말인가. 한참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많아야 할 10대 시절 나의 꿈은 그저 수면시간 확보였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범대를 가야 했고 사범대를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에 의해 나의 삶의 방식을 그저 대학이라는 목표에만 몰고 가느라 그 당시 나를 잘 보듬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학창시절부터 확고한 꿈이 있는 학생은 다행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학생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의 경우 확고한 꿈이 없었지만, 대부분 학생처럼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가고 보니 자신의 적성과 전공이 맞지 않아 자퇴하게 되었다.나는 이와 관련하여 학습의 개인차에서 등장한 가드너가 생각이 났다. 가드너에 의하면 모든 학생은 최소한 하나 이상의 우수한 지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각 개인의 우수한 지능에 맞추어 교육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즉 가드너 이론은 획일적 교육이 아니라 학생에게 맞게 개발된 교육을 지향한 것이다. 이우학교의 진영이와 한얼이 님과 같이 공부라면 선배들과 더 친해질 수 있고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중2 학생에게 지원이유를 물자 “애들이랑 같이 공부하면서 지식을 나누고 싶고 이렇게 공부하게 되면 복습도 쉽게 되니까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고 후배들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뿌듯해요”라고 대답했다. 즉, 배움을 받고 배움을 하는 1학년과 2학년 모두 학습동아리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수업시간에 배운 정보처리이론이 떠올랐다.정보처리이론이란 인간이 지각하는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컴퓨터와 비교하여 유추, 설명해주는 이론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단계에는 정보저장소와 인지처리과정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보저장소는 투입된 정보가 머무르는 곳으로 감각등록기, 단기기억, 장기기억으로 나누어진다.인지처리과정은 각각의 정보저장소로부터 정보가 이동하는 지적 활동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주의집중, 부호화, 시연, 조작화, 인출, 망각 등의 과정이 포함된다. 많은 과정 중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망각’ 부분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다양한 지식, 즉 정보들은 일시적인 저장소인 단기기억으로 저장되고 단기기억에서 머무르던 정보는 부호화나 시연의 과정을 거쳐 장기기억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때 장기기억이나 단기기억에서 정보의 인출에 실패하는 때도 생기게 된다. 이 현상을 우리는 망각이라고 부르게 된다.에빙하우스에 의하면 학습 후 망각률은 처음 몇 시간 동안은 급속하게 높고 그것을 학습 한 직후에는 가장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학습을 한 후 복습을 하는 것이 정보를 기억에 머무르게 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우학교 학생들의 학습동아리는 잃어버린 기억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올바른 학습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나도 고등학생 때 영어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해 친구들에게 영어를 알려주게 된 적이 있었다. 처음 프로그램을 할 때는 내가 알고 있는걸 또 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의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교육은 학생들 모두에게 훈련을 통해 창의력을 충분히 증진해줄 수 있다.이우학교는 창의력향상 교육의 좋은 예시가 되고 있다. 수학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생각은 학창시절 대부분의 학생들이 했을 법한 생각이다. 나도 그렇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나는 항상 ‘수학’이라고 대답해왔다. 세기의 천재들은 수학 문제를 풀며 행복감을 느꼈다지만 누군가에 의해 공식을 배우고 배운 공식을 외우고 외운 공식을 적용해서 문제풀이를 기계적으로 해왔던 나로서는 수학이란 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과목이었다. 특히 우리는 수학을 배울 때 이런 말 역시 종종 해왔다. “언어는 사용하기라도 하지 수학 공식 외워서 어디가 써먹어?” 하지만 이우학교의 학생들은 달랐다. 수학 시간에 아이들의 표정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들의 수학 공부법은 특별했다. 연습문제와 공식으로만 채워져 있는 수학책이 아닌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수학적 경험과 상상력을 들을 수 있는 재밌는 이야기책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아주 먼 옛날에는 우리 몸의 여러 부위를 이용해서 길이를 쟀습니다. 엄지손가락, 발, 코끝에 팔 끝까지 걸음과 양팔 등을 이용했지요, 중세시대 스코틀랜드에서는 길이를 잴 때 ‘스코틀랜드의 엄지손가락’이라는 길이 단위를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엄지손가락이란 몸이 큰사람, 보통인 사람, 작은 사람의 엄지손가락의 평균을 나타낸 것입니다. 각자의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길이를 잰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세요” 즉, 아이들은 표준화된 단위체계를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단위체계들이 만들어지기의 과정들을 이야기를 통해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아이들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그 내용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된다. 붕대와 휴지, 신문지와 스케치북, 자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언뜻 보면 미술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의 수업주제는 ‘우리 몸의
최근 연예인들의 학교폭력사실이 이슈가 되는 과정에서 학교폭력과 관련된 다양한 기사들이 매스컴을 통해 쏟아져나왔고 관련기사에는 수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다양한 댓글속 ‘어른스럽지 못했던 어린시절의 행동’이라는 댓글은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 베스트 댓글로 등극하였다. 나는 이 댓글을 보며 과연 ‘어른스럽다’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나아가 우리가 흔히 일컫는 단어인 ‘어른’이란 무엇일까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어른은 규정지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규정지을 수 없다’이다.사전은 ‘어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다 자란 사람, 혹은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사람으로 보통 만 19세 이상의 남녀를 총칭.’ 사전에 정의된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대게 법적 근거, 육체적 성숙, 정신적 성숙을 기준으로 ‘어른’을 규정짓는다.하지만 첫째, 법적 근거로 ‘어른’을 규정짓는 것은 모든 국민이 출생신고 혹은 주민등록증을 태어나자마자 바로 만들었을 때만 가능하다. 과거에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바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던 가정이 많았고 현재에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자녀의 출생신고를 바로 하지 부모들이 있다. 실제로 ‘무엇이든 물어 보살’이라는 TV 프로그램에는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11년간 의무교육을 받지 못하고 주민등록증을 제때 발급받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출연한 적이 있다. 이처럼 법적 나이를 기준으로 ‘어른’을 정의하게 된다면 사람이지만 어른이 평생 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둘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육체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비교하여 키와 체형 등에 성장을 이룬 지금, 자신들을 어른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전혀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논리이다. 예를 들어 신체적 성장이 더디거나 병에 걸려 성장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앞선 논리로 ‘어른’을 규정한다면 이 경우의 사람들은 ‘어른’이 아닌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Ⅰ 서론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자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느낌을 묻는다면 많은 국민들은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는 빨갱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된 배경은 해방 전인 1920년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증가하게 됨에 따라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상징 색깔을 정하였고 빨간색이 선정 되면서 공산주의 집단 내에서 붉을 적 자를 많이 사용 했었던 것에 있다.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치되는 이념에 의해 몇몇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대표적 색이었던 빨간색을 폄하하여 빨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이고 편협한 태도는 때때로 많은 논쟁을 일으켜왔고 그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따라서 필자는 지금부터 항일운동의 전선에 있었지만 공산주의의 색체 때문에 평가가 절하된 대표적인 인물 ‘김원봉’, ‘여운형’, ‘박헌영’의 생애 활동과 논쟁이 있는 쟁점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Ⅱ 본론김원봉지난 2015년 문재인 대통령은 영화 ‘암살’을 관람한 직후 김원봉에게 독립 유공자 훈장을 달아 들이고 싶다는 발언을 하여 큰 논란이 되었었다. 논란이 된 부분은 김원봉의 이념과 관련이 있다.김원봉의 이념에 대해서는 그는 공산주의자이다 라는 의견과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라는 의견으로 나뉘게 된다. 김원봉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정부 수립에 도움을 주고 우리나라의 큰 아픔인 6.25전쟁 기간 동안 북한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내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이유였으며 한편 후자의 경우는 김원봉의 월북 행위는 당시 남한에서 겪었던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던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 이전 김원봉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김원봉은 1919년 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한 폭력운동만이 독립운 순탄하게 전개되지 않았다.이후 김원봉은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직접 만들어 국내의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고 기술과 지식들을 전수하였다. 1935년에는 대한독립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을 합쳐서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혁명당은 대일선전전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 이후 김원봉은 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개설하고 1942년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겸 한국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게 된다.해방 직후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지속적으로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막상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시작되자 월북을 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으며 일생을 이어 나갔으나 1958년 숙청을 당하고 만다.여운형두번째 인물인 여운형 역시 그의 이념으로 인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이다. 2005년 여운형은 서훈 2급의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를 두고 너무 낮은 훈장이 아닌가라는 반발과 2급의 건국훈장도 주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여운형에게 더 높은 서훈 훈장을 주어야한다는 입장은 그의 독립운동의 업적을 근거로 삼았으며 여운형에게 준 훈장 자체를 취소해야한다는 사람들은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를 들었다. 지금부터 양측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여운형의 과거 생애를 살펴보겠다.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실현하려는 사상인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고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의 대표 파견을 위해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게 된다. 그 후 여운형은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고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다.1919년 일본은 상해 임시정부를 해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 노력들은 실패로 돌아가 게 된다. 그러이르쿠츠파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이때 여운형은 레닌을 만나게 되고 러시아혁명을 교훈 삼아 조선의 독립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 후 여운형은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중국혁명운동이 성공한다면 조선의 독립에 있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혁명운동은 실패하였고 여운형은 1929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여운형은 4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가 출소한 1930년대는 일제의 민족말살통치가 이루어지던 시기로 무장투쟁운동과 더불어 민족 문화 수호 운동과 다양한 문화활동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자리에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에 복귀하게 된다. 중앙일보의 사장자리에 있는 동안 벌어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일장기 말소사건이란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선수의 사진을 개제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을 하였다. 일본은 친일파 사장을 등용할 것과 같은 조건들을 제시하며 신문의 복간을 권유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하며 신문사의 폐간을 결심했다.1942년 여운형은 2번째로 수감되었는데 1년간의 투옥생활을 마치자마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 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해갔다. 건국동맹은 좌우를 불문한 애국세력의 항일통일전선이자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는 조직이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패망이 점쳐지자 구체적으로 건국 준비 활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여러 독립단체들과 건국동맹의 꾸준한 활동으로 인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에서 드디어 해방하게 되게 된다.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안을 계기로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하게 되고 통일 임시정부를 논의하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이에 1946년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 하자는 정읍 발언을 하게 되고 여운형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사회주의 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마침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1922년 박헌영은 국내 잠입을 하다가 체포되어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수감생활을 하던 1920년대 국내에서는 조선공상당을 창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헌영은 출소 이후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조선공산당창당대회를 개최하고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활동의 주축이 되었던 박헌영은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시 감옥에 투옥되고 만다. 일제가 사회주의자들 검거에 주력했던 이유는 사회운동자들이 식민 통치에 가장 비타협적으로 굴었던 독립운동세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박헌영은 ‘6.10만세 사건’을 주도하였고 1927년 9월 조선공산당 사건에 대한 공판이 마침내 열리게 되었다. 일제는 사회운동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공산당 사건의 핵심인물인 박헌영을 향해 각종 고문과 폭력을 가했지만 박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공판에 임하였다.출옥 후 박헌영은 일본의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과 관찰령을 피해 활동하기 위해 노동자로 변신했고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공산당활동을 지속하다가 해방이 오게 되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해방 이후 박헌영의 활동이다. 해방 이후 박헌영은 공산당재건을 위해 총력을 다했으며 조선공산당의 중앙 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그 후, 1945년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 회의가 열렸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이 발표되었다. 처음 결정 이후 박헌영은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박헌영은 북한에 다녀온 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설명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박헌영이 현재 국민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속된 말로 ‘빨갱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날조하여 좌익을 탄압하였고 이에 박헌영은 남한을 탈출하여 북한으로 가게 하고싶다. 김원봉과 국민당의 관계의 시작은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며 그저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었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여운형의 인식은 1927년 7월19일 경찰부에서 실시한 조사의 응답을 통해 알수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공산주의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당파 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 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공산 운동에 참가한 것도 조선독립의 편의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국제공산당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원조할 의지를 갖고 있으며, 당신과 같은 유력자들이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하는 권고가 있었으므로 나는 이동휘등의 그룹에 가입하게 되었다”. 즉 이 문장을 통해 처음 여운형이 공산당에 입당한 이유는 개인의 정치적 성향, 이념, 이익이 아닌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함 이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들의 공산주의적 발자취가 그들의 독립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묻고 싶다.또한 필자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건들을 분리해서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북한 그리고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역사적 인물들의 활동 전체가 폄하되어서는 안될 뿐 더러 앞뒤 시대적 상황을 구별하지 않고 한 인물의 업적을 합쳐서 생각한다면 사실에 대해 혼란스러움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염인호 (2000). 의열단에서 조선민족혁명당까지 김원봉. 내일을 여 는 역사(1), 126-132염인호. (2010). 김원봉. 한국사 시민강좌, 47, 237-253.김광운. (2019, November 1). 김원봉의 1945년 광복 이후 정치 행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8, 265–308.韓相禱. (2019).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근현대사연구, 88(), 209-245.이정애, "김원봉의 월북 이유, 나경원을 알고 있을까", 2019.03.28정병준. (2010). 여운형. 한국사 시민강좌, 47,T8
1945년 8월 17일 영국에서 처음으로 ‘동물농장’이 출간되었다. ‘동물농장’의 저자 ‘조지오웰’은 1903년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북동부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셔에 정착하였으며 장학금으로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였으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인도 제국 경찰에 지원하여 미얀마에서 복무하게 된다. 미얀마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동양과 실재의 괴리를 느낀 후 1927년 영국으로 귀국해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이후 1933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 1934년 ‘버마 시절’, 1935년 ‘목사의 딸’을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인정을 받게 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조지오웰은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입대하였지만, 그 속에서 스페인 혁명을 가로막는 세력이 오히려 좌익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카탈로니아 찬가’로 그가 느꼈던 사상을 기록하였고 ‘카탈로니아 찬가’를 기준으로 그의 저서에는 정치적 성향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 후 조지오웰은 현실 세계를 풍자하기 위해 글을 썼고 1945년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에 바탕을 둔 우화인 ‘동물농장’이 탄생하게 되었다.‘동물농장’의 발단은 농장의 주인인 ‘존스’와 동물들의 불평등적인 구조로 인한 갈등으로 시작된다. 많은 동물이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인간을 위해 노동을 하던 어느 날 12살의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꿈속에서 계시를 받게 되고 농장에 사는 모든 동물을 모아 연설하기 시작한다. 현재 동물들의 삶을 비참한 노예의 삶이라고 표현하며 인간을 몰아낸다면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의 근본 원인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동물 중 가장 똑똑한 돼지들을 중심으로 혁명을 준비하였고 동물들의 먹이를 제대로 주지 않은 사건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주인‘존스’는 농장 밖으로 쫓기게 된다. 그 후 ‘스노볼’의 주도하에 풍족한 먹거리와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농장 속 동물들은 행복 ‘스노볼’을 시기하던 ‘나폴레옹’은 자신이 사육하던 개들을 사용하여 ‘스노볼’을 몰아내고 그를 도와줄 세력들을 은밀하게 조성하여 동물농장 속 평화를 붕괴시킨다. 자신과 같은 종족인 돼지들은 지배계급으로, 다른 동물들은 피지배계급으로 하여 풍차 건설을 위한 노동을 시켰으며 그의 필요에 따른 노동착취와 살생 등이 이어졌다. ‘나폴레옹’의 독재로 인해 동물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몇 년 동안 이어진 세뇌와 사건들로 인해 큰 항의 한번 하지 못한 채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이어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동물농장 속 캐릭터들의 관계는 크게 인간과 동물의 수직적 관계, 동물과 동물의 수평적 관계, 그리고 동물과 동물의 수직적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 메이저농장의 주인인 ‘존스’는 농장 속 동물들을 착취하고 생산수단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랄하다고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그 당시 영국에서 ‘존스’와 같은 농장주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명확하게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정의될 수 있었다. 농장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여기고 농장경영에는 힘쓰지 않은 채로 음주와 유흥에만 시간을 쏟던 ‘존스’는 당연하게 동물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성격은 동물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수상경력이 있는 미들 화이트종의 수퇘지라고 불리는 ‘메이저 영감’은 모든 동물을 평등하게 생각하고 비민주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혁명을 외쳤던 혁명가이다. ‘메이저 영감’과 후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들이 주인이 되자고 주장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농장을 이끌었던 정치제도에서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메이저 영감’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세 마리의 개를 시작으로 하여 돼지, 닭, 비둘기, 양과 소, 말, 새끼 오리, 고양이 등 다양한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연설을 듣는 그들의 관계는 수평적이었으며 ‘메이저 영감’이 이상하는 사회는 평등, 자유, 올바른 분배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감’의 죽음 이후 ‘스노볼’과 ‘나폴레옹’이라는 돼지가 동물들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스노볼’은 나폴레옹보다 쾌활하고 언변에 능하며 기발하다는 평을 받았다. (p.23) ‘스노볼’은 ‘메이저 영감’이 이상하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스노볼’은 ‘나폴레옹’과 함께 동물 주의 원칙을 일곱 개의 계명으로 정리하였고 이를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불변의 원칙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칠 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두 다리로 걷는 자는 모두 적이다.’ ‘2. 네 다리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자는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한편 ‘스노볼’이 지도자로 있는 동안 칠 계명은 잘 지켜졌으며 동물들은 칠 계명에 기반을 두어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노동을 이어갔고 그 결과 생산물들의 증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생산물의 증대에 그치지 않고 ‘스노볼’은 동료 동물들의 노동력 절감과 소득의 평등분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풍차라는 과학적 문명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풍차 건설을 보지도 못한 채 제거 되고 만다. 그와 동시에 동물과 동물 사이에 존재했던 수평적인 관계는 끝을 맞이하게 된다.‘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지도자가 된 후 동물과 동물 간의 수직적 관계가 시작된다. 그의 곁에는 그의 독재를 돕는 동물들이 존재했는데 빠른 두뇌 회전으로 동족을 억압하고 ‘나폴레옹’을 찬양하도록 세뇌하는 ‘스퀴얼러’와 ‘나폴레옹’을 기리는 시를 지어 퍼뜨리는 ‘미니무스’ 그리고 ‘나폴레옹’을 수호하는 개들이 그 주체이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스퀴얼러’에 대해 큰 반감을 품었었다. 그 이유는 ‘나폴레옹’의 무리한 요구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게 된 닭들을 콬시딩증이라는 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감추었고 남은 동물들을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을된 정보를 전달했던 과거의 정부와 정치가들이 떠올랐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견고한 지배계층을 형성하는 동안 피지배계층들의 노동은 계속되었다. 나는 동물 중 ‘복서’라는 말이 노동자계층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복서’의 모토는 ‘내가 좀 더 열심히 할게.’(p.64)고 수탈을 당하면서도 노동에 항상 앞서서 묵묵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해나갔다. 또한, 힘이 좋고 튼튼한 말로 묘사되던 책의 초반과는 다르게 책의 후반부의 ‘복서’는 노동으로 인해 체력을 잃고 건강을 잃어가게 되었는데 건강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은퇴 후의 보장된 삶을 꿈꾸며 ‘나폴레옹’의 거짓말을 믿었다. 즉 ‘나폴레옹’의 이기적임과 ‘스퀴얼러’의 거짓말은 충성스러웠던 ‘복서’의 건강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붕괴시켰다. 나는 ‘복서’를 보며 순진하고 성실한 민중들의 현실이 떠올랐다. ‘나폴레옹’의 독재정치 이후 앞선 일곱 개의 원칙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나는 칠 계명이 바뀌게 되는 과정과 내용이 ‘조지오웰’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들을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결국 인간을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이 써지던 당시의 상황이 소련 체제였다는 점에서 ‘메이저 영감’은 사회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를 ‘스노볼’은 볼셰비키 혁명을 이끌어낸 마르크스주의자 ‘레온 트로츠키’를 ‘나폴레옹’은 소비에트연방에서 스탈린주의의 독재로 인해 많은 피해자를 발생시켰던 지배자 ‘스탈린’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쫓긴 많은 동물’들은 그의 말을 거역했던 ‘혁명가’들로 해석할 수 있다. 매너 농장 속 동물 혁명은 1917년 발생한 2월 혁명과 10월 볼셰비키 혁명과 유사하며 동물농장을 지키기 위해 주인 ‘존스’와 싸우게 되는 외양간 전투는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쫓겨난 러시아 귀족과 장교들이 외국의 지원을 받아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내전과 일치한다. ‘스노볼’이 추진하려던 풍차 계획은 1921나폴레옹’이 자신의 명령에 거절하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처리하고 동물농장재판을 개정한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비극적이라고 손꼽히는 모스크바재판을 상징한다. 즉 이 소설 속 이야기는 러시아혁명, 공산주의 등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은유적으로 다뤘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과거의 사건들을 상징했다는 점에서 과거형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권을 가진다’라는 천부인권 사상에 대해 학습해왔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문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문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막상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문장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라는 문장에 더 많은 공감을 표할 것이다.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하면서 ‘평등’이라는 단어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수업을 들으며 같은 밥을 먹던 학창시절과는 다르게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대학에는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소유하고 먹고 경험하는 타인을 보며 한때 ‘평등’이라는 단어를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내가 경험한 것보다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과 소유하지 못한 자들, 경제력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의 계층 분류가 훨씬 확고하게 되어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약자는 꾸준히 약하고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회적 강자들은 끝없이 강해지고 있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횡포와 악독한 행위는 뉴스나 매체 혹은 실제로 목격하거나 듣는 있다.
We face a variety of dilemmas while living in the world. And in a dilemma, you make a choice and the choices come together to create your own life. Choosing a major and choosing a university was one of the dilemmas of the past, and I chose English education to achieve my dream. Two years have already passed since I entered university and I am already in third grade. During that time, I met so many people that I could not compare to when I was a student and I have formed various human relationships. So from now on, I want to talk about the dilemma of human relations.